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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

아굴의 신앙 고백(잠언 30:1-6)

혹자는 "아굴"이본 잠언 기자의 이름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는 "편집자"였고 수집자였으며 스스로 잠언을 지은게 아니라 딴 사람들이 지혜의 말씀과 관찰기를 집성하고 남의 기록 중에서 발췌하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혹자는 이 때문에 그가 "나는 몸소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으나 딴 지혜자와 학식있는 자의 서기, 또는 필기자가 되었다"고 말한 것으로 풀이한다(3절 참조). 우리가받은 달란트가 단 하나에 지나지 않더라도 그것을 땅에 묻어 두어서는 안 되며, 설령 남이 기록한 것을 단지 수집하는 일이라 해도 우리가 받은 은사대로 봉사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굴이란 말이 오히려 그의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성서에 다시는 언급되지 않긴 하나 틀림 없이 당시에는 잘 알려져 있던 이름이었을 것이다. 또 "이디엘과 우갈"이란 이름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는 다음 둘 중 하나일 것이다.

1. 그의 문하생의 이름.

이들은 그에게 교훈을 받던 자들이었거나, 아니면 그의 지혜와 인자함을 크게 평가하여 신탁을 물으러 온 자였을 것이다. 아마 이들은 바룩이 예레미아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받아 기록한 것처럼 그가 구술하는 것을 기록했을 것이고 그와 같이 하여 이 잠언을 보존했을 것이며, 이것이 아굴의 잠언임을 기꺼이 입증하려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잠언은 이들에게 말할 것이고, 그들은 이 잠언의 두 증인이기 때문이다.

2. 그의 담화의 주제.

"이디엘(Ithiel)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뜻인데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의 "임마누엘"(Immanuel)을 단수목적어에 따라 변용한 형태이다. 이 단어는 그를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칭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인은 이 말을 전용하여 그를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이 칭호는 곧 나를 사랑하시사 나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셨으면 그와의 연합과 그와의 교제를 나에게 허용해 주신 분"을 나타낸다.

"우갈"(ucal)은 "전능하신 자"를 의미한다. 우리에게 도움을 베풀 자는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훌륭한 해석자들 중 다수가 이 말을 메시야에 적용한다. 모든 예언이 그에게 대해 증거하는 것이며, 또 그렇게 해석하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이 말씀은 아굴이 "이디엘, 바로 이디엘"(원문에는 이 이름을 강조하고 있다)과 "우갈"-즉 "우리와 함께 계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사 7:14; 9:6)"에 대해 말한 것이다.

이 예언자는 여기서 다음 세 가지를 위해 이야기하고 있다.

Ⅰ. 자기 비하(卑下)를 위하여.

아둘은 자기 신앙을 고백하기 전에 자신의 미련함과 자기 이성의 약점과 결핍을 고백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신앙에 의해 인도와 규제를 받을 필요성이 있도록 해 준다. 그는 구세주를 꼭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것과 그가 없이는 무용지물밖에 되지 않는 것을 얘기하고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 자신으로부터 탈피해야 하는 것이다.

1. 그는 의로움이 결여되고 미련하게, 아주 어리석게 행동한 자가 바로 자신이라고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을 돌아보고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나는 실로 짐승이라"고 자인한다. "사람마다 짐승처럼 우준하도다"(렘 10:14). 자기의 마음을 아는 자는 딴 어떤 사람보다 자신의 악함을 더욱 많이 알기 때문에 이와 같이 절규한다. "참으로 나는 다른 사람보다 더 짐승같은 존재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실로 나만큼 부패하고거짓된 마음을 지닌 자는 없으리라. 나는 아담(히브리어로 아담은 인간이란 뜻:역주)의 총명을 갖지 못한 자처럼 행동하였고 인간이 태초에 창조됐을 때 지니던 지식과 의로부터 비참하게 타락돼 버린 자로서 행동하였다. 아니, 나는 사람의 상식과 이성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만약 가지고 있다면 이렇게 행하지는 않았어야 할 게 아닌가!" 아굴은 타인으로부터 여늬 사람보다 더 지혜로운 자로 인정되었으나 자신은 누구보다 더 미련한 자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남들이 우리를 얼마나 높이 평가하든지 간에 우리 자신을 낮게 생각하는 것은 온당한 일이다.

2. 그는 자기를 진리와 지혜의 길로 인도해 줄 계시가 부족한 자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여기서 또 다음과 같이 자백하고 있다(3절). "나는 자신의 능력으로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지혜의 깊이는 내 재간과 수단으로 잴 수가 없다-거룩하신 자들, 천사와 범죄 이전의 첫 조상을 아는 지식도 없으며, 하나님의 거룩한 일들을 아는 지식도 없다. 하나님이 나에게 알리시기를 원하는 이상으로는 이들을 살필 수도 판단할 수도 없다." 육신의 인간이나 생리적 힘으로는 "하나님의 성령에 관한 일들을" 깨달을 수 없으며 "받지도 못한다."

혹자는 아굴이 옛날 아폴로의 신탁처럼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누구냐?" 는 질문을 받았다고 상상한다. 그 대답은 특히 거룩한 일에 있어서 "자기의 무지를 깨닫는 자"이다. Hoc tantum scio, me nihil scire-즉 내가 아는 전부는 내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Ⅱ.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 그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칭송하기 위하여(4절).

1. 혹자는 이 말씀을 하나님과 그의 역사로 이해한다. 하나님의 일은 비교와 측량이 불가능하다. 그는 위에 있는 하늘과, 바람과 물과 땅에 대해 설명해 보라고 온 인류에게 도전하고 있다. "하늘에 올라 가서 위에 있는 천체들을 살펴 보고 내려와서 설명하겠노라고 나설 수 있는 자가 누구냐? 누가 바람을 지배하여 자기 손에 장악하고 하나님같이 조종할 수 있다고 할 것이며, 하나님이 행하셨듯이 바다 물결을 강보에 쌌다고 주장하겠는가? 누가 땅의 모든 끝을 정하였으며, 그 기초의 강도(强度)와 그 계한의 넓이를 설명할 수 있는가? 하나님과 경쟁하겠다거나 그의 모사가 되겠다는 자의 이름이 무엇인지 내게 말해 보라. 만약 그가 죽었다면 그에게 이 큰 비밀을 물려 받은 자의 이름은 무엇인지 말해 보라."

2. 또 딴 자들은 이것이 그리스도, 즉 하나님의 아들이신 이디엘과 우갈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본문에서 찾고 있으며, 도전적으로 묻고 그와 겨룰 수 있느냐고 한 것은 아버지의 이름인 동시에 아들이 이름도 되는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를 계시된 자로서 높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때에는 숨기운 자로서, 듣긴 조금 들었으나 아는 게 불분명하고 불완전한 자로서 그를 크신 자라고 칭송하였다. "우리가 귀로 그의 소문은 들었으나(욥 28:22)" 그를 묘사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바람을 그 장중 손에 모으시며" "물을 그 옷에 싸는" 이는 확실히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무엇인가?"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출 3:14)라는 게 바로 그의 이름이다. 경배받을 이름이지만 깨달아 알 수 있는 이름은 아니다. 그가 이 모든 일을 말미암는 "그의 아들의 이름은 무엇인가?" 구약 성도들은 메시야를 "복된 자의 아들"로 고대하였으며, 여기에서는 아버지와 분명히 구별되는 분으로 묘사되어 있으나 그의 이름은 밝혀져 있지는 않다.

위대하신 구속주께서는 자기 섭리와 은혜의 영광 중에서 견줄 자가 없으시며, 또 완전히 발견되지도 않으시는 것이다.



(1) 하나님의 은혜로운 나라의 영화는 찾아낼 수도 없고 비할 데도 없다. 그 외에 달리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없기 때문이다. 이 두 세계를 완전히 알고 친히 양쪽 나라와 자유로이 교통하며, 따라서 야곱의 사닥다리처럼 중보자로서 통신을 전담하기에 적격인 분이 달리 누구 있는가? 그는 "하늘에서" "아버지 품 속에"계셨다(요 1:1, 8). 그는 우리의 본성을 입으시고 거기서 내려 오셨으니 그와 같이 자기를 낮추신 겸손은 결코 없었다. 그는 자기의 높아진 상태의 약속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다시 올라 가셨으니(엡 4:9), 그 외에 누가 이렇게 행하였는가?(롬 10:6)

(2) 그 하나님의 섭리의 나라의 영화도 마찬가지로 알아낼 길이 없고 비할 데가 없다. 하늘과 땅을 화해시키는 분은 바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과 같은 분이시며, 지금도 모든 것을 다스리고 지배하고 계신다. "공기"와 "물"과 "흙"의 세 가지 원소에 대한 그의 통치는 여기서 세분화되어 나타나 있다.

[1] 공기의 운동은 그의 지시에 속해 있다. 사탄은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로 자처하나 공중에서 조차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권세"를 가지신다. 그가 "바람을 꾸짖으시니" 바람도 순종하였던 것이다.

[2] 물의 경계도 그의 정하심에 속해 있다. 그는 "물을 옷에 싸시니," "그들이 여기까지 오고 넘어가지 못하리라"(욥 38:9-11).

[3] 땅의 기초도 그가 확립하신 것이다. 태초에 땅의 기초를 세우신 분도, 아직 떠받치고 계신 이도 그분이시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중재하지 않으셨더라면 인간의 죄 때문에 땅에 쌓인 저주의 하중으로 땅의 기초는 벌써 내려 앉아 버렸을 것이다. 이 모든 일을 행하시는 전능하신 분은 누구시며 무엇인가? 우리는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아들을 완전히 찾아낼 수는 없다. "오! 그 지식의 깊음이여!"

Ⅲ.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우리에게 확신시키고 권면하기 위해서(5,6절). 아굴은 하나님에 관한 일로 그에게 가르침을 받기를 기대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도저히 여러분의 훈계를 맡을 수가 없으니 하나님의 말씀에게 가보시오. 그가 자신과 자기의 마음과 뜻에 대해 거기에 계시하신 것을 살펴보시오. 여러분은 말씀이 가르치는 이상은 알 필요가 없으며, 더구나 그 말씀은 확실하고 충분한 것으로 의지할 만하오.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오. 거기에는 허위가 조금도 섞여 있지 않으며 부패한 것이 없소." 사람의 말을 듣거나 읽는 데에는 경계하거나 고려하는 태도가 필요하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에는 부족한 데가 있다고 의심할 만한 여지가 조금도 없다. 그것은 "일곱 번 단련한 은과 같아서"(시 12:6) 불순물이나 찌꺼기가 추호도 들어 있지 않다. "주의 말씀이 심히 정미하나이다"(시 119:140).

1. 하나님의 말씀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뢰해야 하고 우리 영혼을 과감히 내맡겨야 한다. 자신의 말씀 속에 계신 하나님 자신의 약속 가운데 계신 하나님은 자기의 보호 아래로 투신하는 모든 자와 자기를 의지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가 되시며 확실한 보호물이 되어 주신다. 믿음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면 우리는 최대의 위험 가운데에서도 편안하게 될 것이다(시 46:1, 2).

2. 하나님의 말씀은 충분하다. 그러므로 그 말씀에 우리가 더해서는 안 된다(6절). 하나님의 말씀은 순전하며 온전하기 때문에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에 배치되거나 경쟁적 지위에 오르는 그 어떤 것도 금하고 있다. 해설을 위한 것이라는 구실이 그럴 듯하게 붙어 있더라도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한 권위를 내세우면 그것은 "그의 말씀에 더하는"것이 된다. 이것은 그 말씀이 불충분하다는 수치를 입히는 일인 동시에 온갖 오류와 타락을 불러 들이는 일이기도 하다. 어느 한 사람의 말, 또는 집단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한 믿음과 존경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될 일이다. 이런 하나의 부조기가 용납되면 수천의 부조리가 대두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알맞다고 생각하셔서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며, "기록된 것 이상으로 지혜롭게" 되려고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다음 두가지 때문이다.

(1) 하나님은 이것을 극도로 모욕으로 간주하셔서 분개하실 것이다. "그는 너를 책망하실 것이다. 너를 자기 왕권과 존엄에 대한 반역자로 간주하시어 너를 자기 말씀에 가감하는 자들의 가혹한 운명 아래 두실 것이다"(신 4:2; 12:32).

(2) 우리는 끝없는 실수에 뛰어들게 될 것이다. "너는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참된 말씀을 부패케하는 자, 이단 사설의 제창자극히 흉칙한 위조범이 될 것이다. 하늘 나라의 옥새를 위조하며 하나님의 사명과 영감을 위장하지만 그 모은 것은 사기이나, 사람은 속을지 모르나 "하나님은 희롱당하지 않으신다."

 

30:2 없음.

 

30:3 없음.

 

30:4 없음.

 

30:5 없음.

 

30:6 없음.

 

30:7

아굴의 기도(잠언 30:7-9)

아굴의 신조와 고백 뒤에는 그의 기도가 나오고 있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 사실을 살필 수 있다.

Ⅰ. 아굴의 기도의 서론.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나이다." 우리는 기도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이며 하나님께 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것이 유익하다. 즉 우리의 경우에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마음에 소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해 주시기를 바라는가? 이런 것을 미리 생각해 놓음으로써 정작 청원과 요구를 제시해야 할 때 그것을 찾을 필요가 없게된다. 그는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하고 애걸한다. 우리는 기도할 때 죽음도 생각해 봐야 하고 거기에 따라 기도드려야 한다.

"여호와여, 내가 죽기 전에, 내가 여기서 떠나가 더 이상 존재치 않게 되기 전에 용서와 평안과 은혜를 주시옵소서. 죽기 전에 중생과 성별함을 얻지 못한다면 나중에는 이 일을 이룰 수 없지 않습니까? 죽기 전에 기도의 효험을 얻지 못하면 나중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여호와여! 여호와여! 그렇지 않습니까? 무덤 속에는 이런 지혜도 없고 역사도 없습니다. 주의 은혜를 내게 거절하지 마소서. 주께서 주지 않으시면 나는 죽습니다. 나는 망합니다. 당신이 내게 잠잠하시면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습니다.(시 28:1). 내가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내가 산 자의 땅에 남아 있는 한 나로 주의 은혜와 선하신 섭리의 인도하심 아래 존속하게 하소로."

Ⅱ. 아굴의 기도 그 자체.

그가 요구하는 "두 가지 일"은 충족한 은혜와 필요한 양식이다.

1. 그의 영혼에 충족은 은혜.

"허탄과 거짓마을 내게서 멀리 하옵소서. 나를 죄악에서 건지시고 모든 부패한 원리와 행위와 애정에서 구하시며, 모든 죄의 밑바닥에 있는 실수와 오류에서 건지시고 세상과 세상 것에 대한 사랑에서 해방시켜 주옵소서. 이들은 모두가 허탄과 거짓이옵니다."

혹자는 이 말씀을 죄의 사유하심에 대한 기도로 해석한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용서하실 때 그것을 제거하시고 치워버리시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 기도는 오히려 우리를 시험에 들지말게 하옵소서."란 주기도문과 취지를 같이 한다고 하겠다.

죄보다 우리에게 더 해로운 것은 없다. 그러므로 "dr을 행치 않게"해 달라고 하는 것보다 더 간절히 기도드릴 것은 없는 것이다.

2. 신체에 필요한 양식.

신의 은혜가 역사해 주시길 기도드린 그는 여기서는 신의 섭리의 은총을 구한다. 그러나 영혼에 유익하나 피해가 갈 정도로 섭리의 은총을 구하지는 않는다.



(1) 그는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선물 중에서 이 세상살이에 충분한 몫의 낙을 얻게 되도록 기도하고 있다.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배당하기에 알맞다고 생각하시는 만큼만 주소서." 우리는 섭리의 모든 선물에 대해 하나님의 지혜를 믿고 의지해야 한다. 또 이 말씀은 "하나의 인간으로서, 한 사람의 가장으로서 내게 알맞는 양식을 주소서. 내 신분과 형편에 어울리는 양식을 주소서."라고 해독할 수도 있다. 인간은 자기 능력에 알맞게 얻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주님이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란 기도를 가르치실 때도 이 말씀을 뜻한 듯하며, 이 말씀은 이 "먹을 양식과 입을 의복"외에는 더 원하지 않는다고 하나 야곱의 서원을 인용한 것 같다. 우리는 설령 고량진미와 진수성찬을 받지 못하더라도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만으로 흡족히 여겨야 한다. 향락과 장식에 쓸 것을 소유하지 못해도 꼭 필요한 것만 있으면 만족해야 한다.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하여 구하고 하나님께 의존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꼭 필요한 양식인 것이다.

(2) 그는 자기에게 시험이 될 만한 모든 생활 환경으로부터 멀리해 주시도록 기도하고 있다.

[1] 그는 지나친 풍요함이나 궁핍을 얻지 않도록 기도드리고 있다.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소서." 그는 이 일에서 하나님께 지시하지도 않고 자기에게 어떤 형편을 배당해 달라고 가르치기를 자처하지도 않으며 빈곤이나 풍부를 절대적으로 부정하는 기도를 드리지도 않는다. 빈곤이든 부든 그 자체에 있는 악한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성별되어 우리에게 유익한 방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첫째, 그는 지혜롭고 선한 사람들이 중요적 생활 상태에 대해 품고 있는 존중감을 표현하려 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 자기의 상태가 너무 존귀한 것도 너무 천대받는 것도 아닌 그런 상태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다. 우리는 사도바울처럼 빈부 두 가지의 생활을 다 소화할 줄 알아야겠지만(빌 4:12) 오히려 이 양자의 중간에 항상 위치하게 되기를 원해야 하겠다. Optimus pecunioe modus qui nec pinaupertaten cedit nec procul a paupertate discedit -즉 최상의 상태는 빈곤을 읨하는 것도 아니요 빈곤에서 멀리 물러난 것도 아닌 상태이다-쎄네카.

둘째, 그는 여기서 자신에 대해 품고 있는 경건한 경계심을 암시하고 있다. 곤고한 형편이나 형통하는 형편에 대한 시험으로부터 자기의 소신을 고수할 만한 자신이 없다는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남들은 빈곤이나 부유에서 초연히 자신의 완전함을 보존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는 이들을 다 두려워한다는 말이다. 즉 육신의 충동이 그에게 가난을 원치 않는 기도를 드리게 한다면, 이에 못지 않게 은혜가 부유를 부정하는 기도를 드리도록 가르친다. 그러나 "여호와의 뜻이 이루어지어다."



[2] 자기 기도에 대해 경건한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9절). 그는 "혹 내가 부하게 되어 골치 썩힐 일이 많아지고 내 이웃에게 시기받으며 수수한 종들이 살림을 거덜낼까 두려우며, 혹 내가 가난하게 되어 짓밟히고 고된 일과 변변치 않은 음식을 면하지 못하게 될까 두려워함이니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부하게 되어 죄짓게 될까 두려우며 혹 가난하게 되어 죄짓게 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하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죄는 어떤 상황이나 경우에서든지 선한 자가 두려워하는 대상이다. "나를 두렵게 하고, 이렇게 함으로 범죄하게 한다"고한 느헤미야 선지가 이에 대한 증거이다(느 6:13).

첫째, 아굴은 부유한 형편이 몰고 올 시험을 두려워한다. 따라서 심지어 부자가 되지 않게 해달라고 탄원한다.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하며"("살찌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발로 차고 버린 여수룬처럼," 신 32:15), 자기 교만에 찬 바로처럼 "여호와가 누구간대 내가 그 말을 듣겠느냐?"라고 말하게 될까 "두렵나이다." 사람은 번영을 누리게되어 교만해지면 하나님이 필요치 않으며 따라서 그에게 대한 아무 의무도 없다는 긋이 하나님을 망각하게 된다. "전능자가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실 수 있으랴?"(욥 22:17) 그러므로 형통으로 교만해진 자는 하나님을 위해 아무 것도 행하려 들지 않는다.

선량한 자들조차 극히 악한 죄를 짓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마음을 이토록 거짓되다고 생각하며 이세상에서 얻는 최대의 이익으로도 극히 작은 죄 하나를 상쇄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그는 가난한 형편에 따르는 시험을 두려워하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게 될까 두려워하나이다"하고 기도한다. 가난은 사람의 정직함을 강력하게 시험하며 부정직으로 유혹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시험에 굴하고 만다. 그들은 가난이 자기의 부정직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내가 가난하기 때문에 훔쳤다"고 말한다 해서 재판석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법정에서도 이런 변명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만일 "주릴 때에 배를 채우려고 도적질하면" 그것은 동정받을 수 있는 경우가 된다(잠 6:30). 정직한 원칙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이들조차 때로는 이런 잘못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아굴이 이 도둑질을 두려워하는 이유를 살펴 보면 도둑질로 이해 위험에 빠지게 될까봐 두려워한 것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교수형을 받는다거나 매를 맞거나 수갑과 차꼬를 차게 된다거나, 노예로 팔려갈까봐 겁낸 것은 아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보상해 줄 재력이 없어 노예로 팔려 가는 가난한 도둑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두려워한 것은 "내가 도적질하여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신앙 고백과 부합되지 않는 행위로 경건한 신앙을 먹칠하게 될 것이었다. 또는 도둑질하다가 추궁을 받게 될 때 거짓 맹세를 하게 될까봐 두려워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그가 한 가지 죄를 두려워하는 것은 또 다른 죄까지 짓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죄의 길은 내리막 길인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내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따라서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에 그를 노엽게 할 어떤 범행도 두려워하는 것이다.

 

30:8 없음.

 

30:9 없음.

 

30:10

네 종류의 악한 세대(잠언 30:10-14)

Ⅰ. 여기에는 자기 하인에게 대하듯 딴 사람의 하인을 학대하지 말며 그 주인과 이간시키지 말라는 훈계가 나온다. 이 같은 행위는 나쁜 짓이며 보기 흉한 짓이어서 남에게 미움받을 만한 악행이기 때문이다(10절). 다음 사실을 고려해 보자.

1. 이것은 종이 대한 권리 침해이다. 그의 불쌍한 처지로 보아 그는 연민의 대상이 되나. 그러므로 고통을 당하는 자에게 엎친 데 덮치는 격으로 고통을 가한다는 것은 야만적인 것이다. 난외주에는 "종을 네 혀로 해치지 말라"고 되어 있다. 혀라는 채찍으로 남을 은밀히 친다는 것은 옹졸한 심사를 증명한다. 특히 우리의 상대가 되지 않는 자, 즉 종에게 그 같이하는 경우는 그러하다. 그 주인이 그에게 가혹하게 한다면 우리는 그를 더 속상하게 하지 말고 오히려 보호해 주어야 마땅할 것이다.

2. "이것은 네 자신의 손해가 된다. 그 종이 화가 나면 너를 저주하고 고소하여 너를 곤란한 입장에 빠뜨릴 것이다. 아니면 네게 욕설을 퍼부어 네 명예에 오점을 찍거나,하나님께 호소하여 그의 진노가 네게 임하게 해달라고 기원할 것이다. 하나님은 학대받은 무죄한 자의 후견자요 보호자이신 것이다."

Ⅱ. 이 훈계에 즈음하여 유덕하고 선량한 모든 자에게 증오를 받아 마땅한 몇몇 악인 세대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1. 부모를 학대한 악한 무리.

이들은 부모에게 욕하고 저주하며, 나쁜 이름으로 부르다 못해 실제로 상처를 입히기까지 한다. 그러한 "무리가 있느니라." 이런 못된 품행의 청년들은 흔히 끼리끼리 모여 떼를 짓고 서로 자기 부모를 애타게 한다. 자기에게 지워진 멍에를 견디지 못해 육친이나 관원이나 목사를 저주하는 자들은 "독사의 자식들"이다. 자기 부모를 저주할 정도로 극악한 경지에 이르지는 않더라도, 부모를 축복하지 않으며 고운 말로 대하지 않고 그들을 위해 기도도 드리지 않으려는 자들은 독사 무리의 사촌쯤은 되는 것이다.

2. 스스로 젠체하고 허울뿐인 성결을 가장하여, 남들뿐만 아니라 아마 자신들로부터도 많은 악행을 숨기는 자(12절).

이들은 자기들이 모든 점에서 당위의 범주를 이탈하지 않기라도 한 듯, "스스로를 깨끗한 자로 여기느니라." 자신과 자신의 성격에 대해 아주 좋게 생각하며 자기의 의인일 뿐만 아니라 "부지며 부요한 자"(계 3:17)라고 과대평가를 한다. 그러고는 "자기들의 더러운 것을" 즉 그 마음의 더러움을 "씻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기들의 가장 선한 부분이라고 내세운다. 아마 그들은 비로 쓸고 아름답게 장식은 할지언정 깨끗이 씻고 성화(聖化)시키지는 않을 것이니, 안에는 온갖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던 바리새인과 같다(마 23:25, 26).

3. 자기 주위 사람에게 거만하고 냉소적인 자(13절).

필자는 참을 수 없을 정도의 저희 교만과 무례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언급하고 있다. "저희 눈이 심히 높으니라! 그들은 자기 이웃을 얼마나 괄시하는지, 자기의 양지키는 개보다도 못한 자인양 경멸의 시선을 던지고 있지 않은가! 누구든지 자기를 슬금슬금 피해 주기를 여간 기대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자신을 바라보는 눈은 어떤가! 실은 자신을 가소로운 존재로 만드는 것인 줄 모르고 화려하게 되는 것으로 착각하여, 공작새처럼 뽐내며 자랑한다." 세상에는 그런 무리가 있으며,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는" 분께서 그런 자에게 치욕을 쏟으실 것이다.

4. 가난한 자에게 잔인하고, 자기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모든 자에게 야만적인 자(14절).

앞니는 쇠와 철 같아서 장검과 군도가 되며 잔혹한 기계가 되어 음식을 잘라 먹는 굶주린 자처럼 탐욕스럽게, 또 최대의 즐거움을 누리면서 "궁핍한 자를 삼키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가 항상 우리와 함께 있도록" 정하시고, 또 그들이 "땅에서 그치지 않도록"하셨다. 그러나 이들을 구제하기가 싫기 때문에 할 수만 있으면 땅에서, 사람들 중에서 멸하고자 하며, 특히 하나님의 가난한 자를 없애려고 하는 자들이 있다. 혹자는 이 무리를 남에게 상처를 입히고 파멸시키고자 하여, 중상 모략을 하고 무고하며 그들의 영원한 상태를 혹독하게 비난하는 자들로 이해하기도 한다. 이런 자들의 혀와 이는(두 가지는 모두 언어 기관이다) "장검과 군도 같으니라"(시 57:4 참조).

 

30:11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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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5

만족을 모르는 네 가지(잠언 30:15-17)

앞에서는 가난한 자를 삼키는 무리에 대해 말씀하였고(14절) 또 네 가지 무리 중 가장 악한 자들로서 이들을 마지막에 언급하였으나, 여기에서는 이 악행을 할 때 느끼는 그들의 불만족감을 언급하고 있다. 그들의 상투적 기질은 잔인성과 탐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말하자면 그들은 "거머리"에게서 난 "두딸"과 같이 "다고다고 하고 더 많은 피를 다오. 더 많은 돈을 다오"하며 소리친다. 즉 피흘리기를 좋아하는 자는 계속 피에 굶주리며, 피에 흠뻑 취한 자는 갈증이 더욱 심해져 계속 피를 찾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은을 사랑하는"자들은 결코 "은에 족한 줄을" 알지 못한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원리에 의하여 궁핍한 자들을 삼키고 있는 동안에도 그들은 스스로 계속 불안해 한다. 다윗의 대적들도 그러했었다(시 9:14, 15). 이제 이에 대해 좀더 상세한 묘사가 펼쳐지고 있다.

Ⅰ. 그는 "족하다" 하거나 "부하다"하지 않는 그들 탐식자들과 비교하여 만족을 모르는 다른 네 가지를 열거하고 있다. 항상 탐내는 것들은 결코 부요한 것이 아니다. 언제나 갈망하고 있는 네 가지란 어떤 것인지 살펴 보자.

1. 음부.

무수한 사람들이 거기에 빠지며, 아직도 더 많은 자들이 계속 거기 떨어질 것이다. 그래도 음부는 그 모든 사람을 다 삼켜 버리고 아무도 돌려 보내지 않는다. "음부와 유명은 결코 만족함이 없느니라"(잠 27:20). 우리 차례가 오면 우리를 위해 마련된 무덤을 보게 될 것이다(욥 17:1).

2. "아이 배지 못하는 태."

불임녀는 아기를 낳지 못한다는 고통을 참지 못해 라헬처럼 "내게 자녀를 달라" 외친다.

3. 한발시의 "물로 채울 수 없는 땅."

이러한 땅(특히 열대 지방의)은 풍성히 내리는 비도 계속 흡수하여 잠시 후면 더 많은 물을 요구한다.

4. "불." 불은 충분한 양의 연료를 태워 없애고도 탈 수 있는 물질을 던져 넣으면 넣는 대로 계속 삼켜댄다.

죄인의 부패한 욕망은 이처럼 배부른 줄 모르며, 그 욕망을 마음껏 누리고도 거의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Ⅱ. 불순종의 자녀에게 대해 무서운 위협이 가해지고 있는데(17절), 이것은 네 종류의 악한 무리 중 부모를 저주한 첫 번째의 무리에게(11절) 경고를 주기 위함이다. 여기에는 다음 사실이 제시되고 있다.

1. 이 악한 무리에 속하는 자는 누구인가?

분노와 격정으로 자기 부모를 저주하는 자들은 물론 이에 속한다.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자들도 여기에 속한다.



(1) 부모를 "조롱하는" 자.

단지 얕보는 시선으로 조롱하는 것에 불과하며, 부모의 신체적 허약함 때문에 멸시하거나 훈계와 명령을 들을 때 싫은 표정을 짓고 고집을 피우며, 그들의 견제를 참지 못해 화를 내는 정도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자들은 이 악한 무리에 들게 된다. 하나님은 자녀들이 그 부모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지 주목하고 계시며 부모에게 퍼붓는 악한 말뿐만 아니라 험상?은 표정과 흘겨 보는 눈초리도 다셈하실 것이다.



(2) 부모에게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

부모에게, 특히 "어머니"에게 효도하는 것을 시답지 않게 여기고 코웃음치며, 어머니에게 통제받지 않으려는 자들고 이 무리에 속한다. 이 때문에 고통 속에서 자식을 낳은 어머니는 보다 큰 고통 가운데서 자식의 못된 태도를 지켜 보는 수밖에 없게 된다.

2. 그런 무리의 운명은 어찌될 것인가?

부모를 명예롭지 못하게 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복수의 기념물로 세우실 것이다. 말하자면, 사슬에 묶인 채 매어 달려서 새들에게 저희 눈을 쪼아 먹히게 될 것이다. 자기의 선한 부모를 그토록 멸시하던 바로 그 눈을 뽑히게 될 것이다. 악인의 시체는 밤새도록 매달아 놓지 못하도록 돼 있었지만 밤이 되기 전에 까마귀들이 그 눈을 파먹을 것이었다. 사람들이 패륜아를 처벌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벌하실 것이며, 자기 부모한테 거만히 행동하는 자들에게는 최대의 치욕을 퍼부우실 것이다. 불명예스러운 종말을 맞게 된 사람들 중에 많은 자들은 자기들의 악한 길을 되돌아 보고 그 악한 길의 출발점은 부모의 권위에 대한 경멸이었다고 자인했던 것이다.

 

30:16 없음.

 

30:17 없음.

 

30:18

알 수 없는 네 가지 일(잠언 30:18-23)

Ⅰ. 탐색이 불가능하고, 완전히 알기에는 "심히 기이한" 네 가지 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1. 처음 세 가지는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일로서 단지 마지막 사례를 설명하기 위한 비교로 등장할 뿐이다. 우리가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는 경우가 다음 세 가지 있다.

(1) "공중의 독수리."

이 새가 날아간 것은 발자취나 냄새로 찾아 낼 수가 없다. 짐승이라면 그 길이 땅 위에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은 흔적으로 찾을 수도 있다. 이 새는 얼마나 빨리 날아가는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다. 우리는 그 신기한 비상도 설명할 수 없다.



(2) "반석 위의 뱀."

뱀이 모래 위로 기어간 길은 우리가 그 흔적으로 찾아낼 수 있으나, 딱딱한 바위 위로 간 뱀의 길은 찾아 낼 수가 없다. 발도 없는 뱀이 어떻게 바위 꼭대기까지 쉽사리 기어가는지도 우리는 설명할 수 없다.



(3) "바다로 지나 다니는 배."

악어는 실로 "자기 뒤에 광채나는 길을 내니, 사람이 보기에 바닷물이 백발같다"고 하지만(욥 41:32)배는 지나간 흔적을 나기지 않는다. 때로는 파도에 가랑잎처럼 요동하는 배가 어떻게 바다를 왕래하게 되는지 신기하게 생각될 정도다. 자연계에는 삼라만상의 하나님이 행하시는 불가사의와 신기한 일들로 꽉 차 있으나, 그것을 "알아낼 수가 없는"것이다.

2. 네 번째 사례는 앞에 나온 것들보다 한층 설명이 곤란한 문제로서, 곧 불의의 비밀이다. 이것은 사탄의 심오한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아무도 알 수 없는 마음의 기만성이요, 극도의 사악성이다(렘 17:9). 이것은 다음과 같이 양면적 의미를 지닌다.

(1) 악한 간음자가 여인을 타락시키기 위해 이용하는 저주스런 술책.

난봉군은 여인을 자기의 악한 육욕과 가증한 정욕의 희생물로 삼기 위해 온갖 기교를 다 부린다. 오래 전에 어떤 불량한 시인은 "De arte amandi"(사랑의 기교에 대하여)란 책을 썼는데 이런 것이 바로 그런 한량의 소치이다. 사랑을 가장하고 사랑을 단언하며, 이런 강력한 매력을 이용하여 결혼을 약속하거나 비밀엄수와 보상을 장담한다고 하는 야비한 배신자에게 자기의 정절과 명예와 평화와 영혼까지도 깡그리 팔아 먹는 경솔한 처녀가 얼마나 많은가! 이 같은 죄스러운 욕망은 모두 사랑의 영역에 있다고 하겠다. 모든 청순한 마음의 소유자는 유혹이 보다 교묘하게 자행되면 될 수록 그에 대한 경각심을 더 높이고 결심을 보다 단단히 해야 한다.



(2) 악한 음녀가 자기의 악함을 숨기기 위해 이용하는 저주스런 술책.

간통하는 여인은 특히 자기가 배신하여 저버리고 있는 남편에게 자기의 더러운 악을 은폐시키기 위해 온갖 수작을 다 부린다. 그녀가 자기의 음탕한 정부와 즐기는 밀회는 너무나 주도면밀하고 교묘히 위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밝혀낸다는 것은 "공중에 날아 다니는 독수리"의 자취를 찾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그녀는 아담의 범죄를 본받아 금단의 열매를 먹고도 표가 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 "입을 씻는다." 그리고는 태연하게 뻔뻔스런 낯으로 "내가 악을 행치 아니하였다"고 한다.



[1] 그녀는 세상 사람들에게 그런 사실을 부인한다. 부인하다 못해 어떤 여자 못지 않게 정숙하고 방정하며, 의심받고 있는 그런 악행은 결코 저지르지 않았다고 선뜻 맹세까지 한다. 빛에 드러나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애쓰는 것은 흑암이 하는 일이다.

[2] 그녀는 자신의 양심에게도 (조그만 양심이라도 남아 있다면) 잘못을 부인한다. 그 "큰 악"을 조금도 악으로 인정하려 들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무죄한 향락이라고 주장할 것이다(호 12:7, 8 참조).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악한 것을 선하다 일컫고 자신의 범죄를 자기 합리화로 아무렇지도 않게 여김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영혼을 파멸시키고 있다.

Ⅱ. 용납할 수 없는 네 가지 일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다음에 드는 네 부류의 사람들은 자기 고장과 친척과 친구에게 몹시 성가신 존재이다. 땅(즉 세상)은 이들 때문에 "진동하며" 그 무거운 점 아래서 견디지 못해 신음하는데, 이들을 전부가 아주 비슷하다.

1. "종."

누구보다 무례하고 오만한 종이 출세하여 권력을 잡을 때가 바로 그것이니 암몬 사람 도비야가 그 실례이다(느 2:10)

2. "미련한 자."

미련하고 어리석고 무례하며 난폭한 악인이 부자가 되어 식탁의 즐거움을 누리게 되면, 쓸데없는 말을 마구 지껄이고 주위 사람에게 모욕을 가함으로써 그의 모든 교제인들을 당황하게 만들 것이다.

3. 성미가 괴퍅하고 심술궂은 "계집." 이런 여인이 남편을 얻으면 교만과 심술 때문에 몹시 미움을 받을 것이며, 그래서 누구나 이 여인을 사랑할 남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마침내 결혼을 하게 되고 그나마도 존귀한 자리에 시집가서 이전보다 더욱 더 거만해지고 표독함이 더 심해진다면 누가 참을 수있겠는가! 그 결혼으로 성미가 보다 부드러워져야 할텐데 반대의 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은혜로운 여인은 결혼을 하게 되면 더 온유해지는 법이다.

4. 여주인의 비위를 살살 맞추고 있다가 소위 약점이란 것을 잡아 가지고 그가 가진 것을 물려받는 데 성공하거나 상속인이 되기라도 한 듯 주인에게 가깝게 행세하는 늙은 계집종.

이런 여자도 마찬가지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교만하고 심술사나울 것이다. 자기 여주인이 주는 것은 무엇이고 너무 하찮은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며, 설사 어떤 것을 물려 받는다 하더라도 그로 이해 스스로 피해를 입을 것이다.

그러므로 섭리에 의해 보잘 것 없는 데서 시작하여 존귀한 자리까지 올라가는 자들은 자기들이 사로잡히기 쉬운 이러 죄를 경계해야 한다. 특히 교만과 거만은 금물이다. 딴 어떤 결점보다 이런 것은 전혀 용납할 수 없고 면제의 여지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자들은 자기가 몸담아 있던 옛 반석을 기억하여 스스로 겸손해져야 할 것이다.

 

30:19 없음.

 

30:20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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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4

작고도 지혜로운 것 네 가지(잠언 30:24-28)

Ⅰ. 아굴은 큰 자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미천한 네 부류의 사람을 열거하였는데, 이제는 작지만 매우 훌륭한 작은 것 속의 위대성을 나타내 주는 것 네 가지를 열거하고 있다. 패트릭 주교가 관찰한 대로 여기에서 우리는 몇 가지 유익한 교훈을 배우게 된다.

1. 신체적 아름다움이나 체력이나 체구를 보고 경탄하지 말며 그런 잇점을 지닌 자라 하여 존중하거나 보다 좋게 생각하지 말고, 지혜와 행동, 근면과 열성이란 기준에 의해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하라는 것이다. 이런 특성이야 말로 존경을 받을 만한 것들이다.

2. 극히 작고 보잘 것 없는 동물에게 나타난 창조주의 지혜와 능력을 찬미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코끼리뿐만 아니라 개미를 보고서도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에 경탄할 수 있어야겠다.

3. 우리 자신의 참된 이익을 위해서 극히 보잘 것 없는 미물만큼도 애쓰지 않는 스스로를 꾸짖으라는 것이다.

4. 세상에 있는 약한 것들을 멸시하지 말라는 것이다.

"땅에서 작고," 세상에서 가난하며 보잘 것 없어도 극히 "지혜로우며," 자기 영혼과 저 세상을 위해 지혜로운 자들이 있다. 이런 자들은 "가장 지혜로운" 자기 이웃보다 더 지혜로운 자들이다. 딴 사본에는 "그들이 지혜로우며" 특수한 본능으로 지혜롭게 된다고 되어 있다. 지혜로와서 구원에 이르는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지혜로와지는 것이다.

Ⅱ. 그가 여기에 열거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개미."

개미는 아주 작고 매우 약한 곤충이지만 필요한 양식을 모으는데 매우 부지런하다. 거기다가 여름철을 적절한 시기로 잡아서 양식을 거둬들이는 신기한 슬기를 소유하고 있다. 이것은 매우 지혜로운 일로서 우리는 개미로부터 후일을 위해 지혜로와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6:6).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느니 "사자가 궁핍하며 굶주릴" 때도 부지런한 개미는 풍족하며 궁핍을 모르는 것이다.

2. "사반."

이것은 토끼, 혹은 아라비아의 들쥐라고 이해하기도 한다. 약하고 겁이 많지만, 스스로 잘 보호할 수 있도록 "바위 사이에 집을 지을" 만큼 지혜가 많은 동물이다. 연약한 몸이기 때문에 천연의 견고한 요새를 도피처로 삼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불완전성과 연약함을 의식한다면 보호와 후원을 얻기 위해서 "우리보다 높은 바위" 되신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그 높은 바위에 거처를 마련하도록 하자.

3. "메뚜기."

이 역시 작은 생물로서 벌과는 달리 "임군이 없지만" 전투대형을 벌인 군대처럼 "다 떼를 지어 나아간다." 이들의 질서 정연함을 살피게 되면 "임군이 없다"고해도 메뚜기는 별반 불편이 없으리라고 생각게 된다. 메뚜기는 하나님의 "큰 군대"라 불리운다(욜 2:25).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에는 마치 그가 애굽에 대해 행하신 것같이 이들을 점고하여 정렬시키고 이들로써 전쟁을 하시는 때문이다." 그들은 다 함께 모여 나아간다"(난외주는 그렇게 해독하고 있다).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을 의식하는 이상 서로의 손을 힘있게 해 줄 수 있도록 함께 뭉쳐야 마땅할 것이다.

4. "거미"(우리 성서:"도마뱀").

하나의 곤충으로서, 개미가 밖에서나 들에서 부지런하듯 거미는 집안에서 근면함을 보여 주는 큰 본보기이다. 거미는 거미줄을 치는 데 매우 재간이 있으며, 그가 짠 집은 어떤 재주군도 가까이 따를 수 없을 만큼 훌륭하고 정확하다. "자기 손으로 잡고" 뱃 속에서 아름다운 실을 자아내며 훌륭한 재주를 피운다. 거미는 가난한 자의 오막살이뿐만 아니라 "왕궁에도" 있다. 자기를 박멸하기 위해 온갖 손질을 가하는데도 거뜬히 남아 있다. 하나님의 섭리는 놀랍게도 인간이 먹여 주지 않는 동물뿐만 아니라 모든 자가 손을 벌려 죽이려고 하는 미물까지도 계속 살게 하신다. 자기 일에 전념하고 그 일을 "자기 손으로 붙잡고" 있는 자는 "왕궁에" 있게 되리라. 비록 곤란과 좌절에 부닥치기도 하겠지만 조만간에 그들은 성공을 하며 탄탄대로를 달리게 될 것이다. 잘 잔 거미집을 싹 쓸어 없애도 거미는 또 다른 집을 짓느라고 열중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30:25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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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8 없음.

 

30:29

위풍있는 네 가지 일(잠언 30:29-33)

Ⅰ. 위용을 갖추고 또 그 걸음걸이고 당당하며 의관이 장대한 것 네 가지가 여기에 나열되고 있다.

1. "짐승 중에서 가장 강하므로" 백수의 왕이라 일컫는 사자. 짐승의 세계에서 걸출하게 하는 것은 힘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인간 사회에서는 그렇지 못하여 인간을 존귀하게 만드는 것은 "지혜"이자 "힘"이나 "완력"이 아닌 것이다. 사자는 무엇이 자기를 쫓아와도 물러가지 않으며 발걸음을 바꾸지 않는데, 이는 자신이 그들보다 굳센 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의인은 사자와 같이 담대하여," 의무의 길에 봉착하는 그 어떤 난관이 두려워 "물러가는" 일은 없는 것이다.

2. 허리에 띠를 띠어 질주하기에 알맞도록 해놓은 "사냥개"(어떤 사본에는 말로 되어 있음), 혹은 "위풍있게 다니는" 동물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말"(난외주). 장식용구나 마구로 채려놓았을 때는 특히 그렇다.

3. "수염소."

수염소의 걸음걸이가 보기 좋은 때는 그가 앞장 서서 걸으며 염소떼를 인도할 때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걸음걸이가 아름다운 때는 선한 일에 앞장서고 의로운 길로 남들을 인도하는 때인 것이다.

4. "왕."

임금이 위엄을 베풀고 웅자를 나타내어 존경심과 경외감을 불러 일으킬 때는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그를 대적하여 일어날 자가 없다"고 말한다. 아무도 그와 경쟁하지 못하며 다투지도 못한다. 그와 다투는 자는 누구든지 그 생명이 위험하기 때문이다. 지상의 군주를 "당할 수 없다"면 "자기를 지으신 이와 싸우는 자에게 화가 있으로다."

이 말씀의 의도는 우리가 모든 덕행을 실천하는 중에 "사자"로부터 용기와 강인함을 배워서 어떠한 난관의 봉착에도 "물러나지 않도록"하는 데에 있다. "사냥개"로부터는 민첩함과 신속함을 배울 수있으며, "수염소" 한테서는 가족이나 우리의 감독 하에 있는 자들의 보살핌에 대해 배울 수 있고, "왕"에게는 아주 근엄하게 함으로써 우리 자녀를 복종시키는 일을 배울 수 있다. 이들 모두로부터는 "잘 걷는" 것을 배울 수 있으며, 처세의 걸음걸이를 조정하여 안전하게도 되고 "위풍있게 다니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다.

Ⅱ. 어떤 자극을 받더라도 항상 성미를 죽이고 어떤 경우에도 너무 심하게 성내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는 훈계가 나오고 있다. 특히 아무도 "당할 수 없는 왕"일 경우, 지배자라든가 우리보다 훨씬 높은 자일 경우라면 그것은 그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며 죄를 입게 된다. 뿐만 아니가 이 법칙은 대상이나 때나 장소에 구애됨이 없이 항상 동일한 것이다.

1. 우리는 자신의 감정에 재갈을 물려서 억압해야 하며, 정당하게 책망을 받을 때는 언제나 수치를 감수하고서 자신의 결백을 고집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에 대한 교만한 생각이나 우리 윗사람에 대한 괴퍅한 반대 심리에서 스스로 "높은 체한다"든지 우리의 지위나 신분상의 관례를 범한다는 것은 "미련한"짓이다. 남보다 자기를 높이거나 남을 쳐서 자기를 돋보이게 하며, 거만하고 무례한 자는 치욕을 자취하고 자신의 연약함을 노출할 나름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단지 악을 생각만 하였더라도, 즉 우리의 마음 속에 악한 계획을 품거나 악한 계획이 마음에 떠오르기만해도 "우리 손으로 입을 막아야"한다.

(1) 즉 우리는 잘못 행한 일에 대해 스스로 낮추지 않으면 안된다. 욥이 자기의 미련한 말을 회개할 때 행하였 듯이("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욥 40:4), 우리의 잘못에 대한 슬픔으로 하나님 앞에서 재 가운데 앉는 일조차 꺼려하지 말아야 한다. 죄를 깨달은 문둥병자가 "윗입술을 가리워야"했듯이 우리는 그릇 행하였을 때 입을 가리워야 한다. 우리가 미련한 짓을 행한 경우에는 사람 앞에서 그것을 고집하지 말고 침묵으로 우리 죄를 자인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가 잘못을 범한 자를 달래는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

(2) 우리는 마음에 품었던 악한 생각이 악한 말로 발설되지 않도록 지켜야 한다. 악한 생각에 imprimatur-즉 면허장을 주지 말아라. 발표되지 않도록 하라. "네 손으로 입을 막아라." 필요하다면 네 자신에 대한 경건한 폭력을 사용하고, 그리스도께서 악한 귀신에게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듯이 네 자신에게 침묵을 명령하라. 나쁜 생각을 품는 것은 악하지만 그것을 말하는 것은 더욱 악하다. 악한 생각을 표현하는 것은 악한 생각에 동의하는 것이며 악을 남에게 전염시키고 싶은 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2. 우리는 남의 감정을 촉발시켜서도 안 된다. 어떤 자는 그 말과 행동이 너무나 도발적이어서 "노를 격동"시키기조차 한다. 주위 사람이 원하든 않든 성내게 만들며 평소 성 잘내는 사람뿐만 아니라 성을 내지 않으려고 마음을 굳게 먹는 자들까지도 분노하게 만든다. 이렇게 "노를 격동하는" 일은 "다툼"을 불러 오며, 다툼이 있는 곳에는 "분란을 온갖 악한 일"이 있게 마련이다. 우유를 격렬하게 저으면 우유 속에 있는 좋은 것이 죄다 분리되어 나오고 "코를 비틀면" 피가 나는 것 같이 "노를 격동"시키는 것은 한 사람의 신체와 심령을 다 고갈시키며 그 사람 안에 있는 선한 것을 모두 강탈하는 짓이 된다.

또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젖을 젓는 일"이나 "코를 비트는 일"은 힘으로 하는 일이며 힘에 의하지 않고는 될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심령도 강렬한 분노에 의해 점차 열기를 더해 가게 된다. 한 마디의 성난 말이 제2, 제3의 화난 말을 불러 일으키며 하나의 열띤 토론을 또 다른 논쟁을 만든다. 그래서 마침내는 화해할 수 없는 반목으로 끝맺게 된다. 그러므로 무슨 말이나 행동이든지 난폭하게 하지 말고 매사를 온순하게 부드럽게 행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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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튜 헨리 주석, 잠언 1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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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튜 헨리 주석, 잠언 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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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튜 헨리 주석, 잠언 1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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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튜 헨리 주석, 잠언 1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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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튜 헨리 주석, 잠언 1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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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튜 헨리 주석, 잠언 1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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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튜 헨리 주석, 잠언 1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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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튜 헨리 주석, 잠언 2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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