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추정에 대한 경고(잠언 27:1)
1. 장차 올 시간에 대한 추정을 금하라는 유익한 훈계.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더구나 많은 날과 해와 지난 때를 어찌 알겠는가!이것은 내일에 대한 대비를 금하는 것이 아니라 내일에 대한 추정을 금하는 말씀이다. 우리는 생명과 안락이 내일까지 계속될 것으로 기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현재 상태는 불확실성 속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렇게 생각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이런 자세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면서 인생을 논해야 한다.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해서는 안 된다(마 6:34). 내일에 대한 걱정은 하나님께 던져 버려야 한다(약 4:13-15 참조). 꼭 해야 할 한가지 일, 곧 회개라는 중대한 일 만큼 내일로 미루어서는 안 된다. 회개의 확실성을 보증하기라도 하는 듯이 우리는 "오늘," 곧 "오늘이라 불리우는 동안"은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2. 이 경고의 기초가 되는 깊은 생각.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라." 시간이란 어미의 태 속에는 사건이란 자식들로 꽉 차있다. 그리고 그것은 태어날 때까지 비밀에 부쳐져 있는 것이다(전 11:5). 잠깐 동안에는 괄목할 만한 변화가 생길 수 있으며 우리가 거의 생각조차 못할 정도로 상당한 변화가 있을 수 있다. 우리는 현재의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저녁이 전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Nescis quid serus vesper vehat-즉 너는 해질녘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알 수 없느니라. 하나님은 지혜로우시게도 우리로 하여금 미래사에 대해서는 깜깜하게 해 놓으셨고 장래 일에 대한 지식은 왕관에 달린 한 송이 꽃처럼 자기에게 유보해 두셨는데, 이는 우리를 하나님께 대한 의존 속에서 훈육하시고 또 우리로 하여금 부단히 매사에 준비하도록 하시기 위함이다(행 1:7).
자화자찬에 대한 경고(잠언 27:2)
1. 우리는 칭찬받을 만한 일을 행해야만 한다. 그러면 우리를 모르는 낯선자들조차 칭찬할 것이다. 우리는 세상 사람에게 우리의 "빛을 비추지" 않으면 안 되며 남에게 본이 될 수 있는 선한 일을 행해야 한다. 물론 우리의 선행을 남에게 과시하기 위해 일부러 행해서는 안 되지만 말이다. 우리는 "성문에서" 조차 칭찬될 만한 일을 행해야 한다(빌 4:8).2. 창찬받을 만한 일을 행하더라도 스스로 칭찬해서는 안 된다. 자화자찬은 교만과 미련함과 자기 자랑에 대한 증거이며 사람의 명성을 감소시키기 때문이다. 스스로 추켜 올리는 자에게는 모두가 나려들어 깎아내리려고 할 것이다. 자신을 해명해야 마땅한 경우도 있을 수 있지만 자신을 칭찬하는 일은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proprio laus sordet in ore-자화 자찬은 입을 더럽힌다.
분과 투기(잠언 27:3,4)
이 두 성귀는 격노와 시기의 해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심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1.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격한 분노의 폐해. 흥분하면 나오는 대로 지껄이고 되는 대로 행동하는 어리석은 자의 분노는 큰 돌덩어리나 모래 한 짐보다 더 거추장스럽다. 그것은 성내는 자신을 무겁게 내리누른다. 자기 혈기를 제어하지 못하는 자들은 자기 자신조차도 그 부담을 이기지 못하여 찌그러지게 된다. 또한 미련한 자의 분노는 그가 성내는 대상에게도 무거운 압박을 가한다. 맹렬한 분으로 그가 어떤 악행을 저지를 위험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련한 자를 화나게 하지 않으며, 만일 그가 성이 나있으면 그를 피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2. 뿌리 깊은 악의의 폐해.
이것은 노가주나무의 목탄이 가시덤불 땔감보다 화력이 강하듯 앞에 나온 분노의 폐해보다 더 나쁘다. "분은 잔인하고"(이것은 사실이다) 많은 야만적인 짓을 저지르며 "노는 창수 같느니라." 그러나 딴 사람에게 대한 적의나 번영에 대한 시기, 그리고 모종의 피해나 모욕에 대한 복수의 염원 따위는 분노보다 훨씬 해가 크다. 다윗이 사울의 창날을 피했듯 갑작스런 열기는 누구나 피할 수 있다. 그러나 사울의 경우처럼 그것이 쌓여서 움직일 수 없는 시기심으로 될 때는 아무도 그 "앞에 설 수가"없다. 투기하는 마음은 추격해올 것이며 따라와 붙잡을 것이다. 딴 사람의 선을 보고 못마땅 해 하는 자는 계속 그에게 가해할 꿈만 꿀 것이며, 자기의 분노를 영구히 품고 있을 것이다.
책망과 아첨(잠언 27:5,6)
1. 우리가 친구들에게 책망을 받고 잘못을 지적당하고 이른 유익하다. 마음속에 있는 참 사랑이 우리의 친구들과 솔직히 대하는 일이나 그들의 잘못된 언행을 책망하는 일로 표면화되기에 충분한 열의와 용기를 지니고 있다면 이것은 은밀한 증오심(레 19:17)보다 참으로 "나을" 뿐만 아니라 숨은 "사랑보다도 나으리라." 우리 이웃에게 대한 숨은 사랑이란 것은 이러한 선한 열매를 나타내 보이지 않고 죄악 중에 있는 이웃을 칭찬하여 그 영혼에 피해를 입히는 사랑을 가리킨다.""친구의 통책은" 당장에는 "상처와"도 같이 고통스러우나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니라." 우리 영혼에 대한 사랑으로 그들이 우리의 죄를 용인하려 하지 않으며 우리 혼자 죄 중에 있는 것을 가만두려하지 않는다면 이는 그들이 참으로 충성된 자라는 증좌이다. 의사의 관심사는 환자의 입맛을 충족시키는 게 아니라 그의 병을 치료하는 데 있는 것이다.
2. 원수의 애무와 아첨을 받는다는 것은 위험하다. "원수의 잦은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우리는 그들을 신용할 수 없기 때문에(요압과 가룟 유다의 입맞춤은 기만을 위한 것이었다), 그들에게서 아무런 즐거움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원수에게 미혹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비난을 받게 되어 있는 것이다.흑자는 이성귀를 다음과 같이 해독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원수의 입맞춤과 거짓말하는 입술과 궤휼의 혀로부터 우리를 건지시니라."
부자와 빈자(잠언 27:7)
본 잠언에서에 자주 등장하였듯이, 솔로몬은 여기서 가난한 어떤 점으로는 부자가 갖지 못하는 혜택을 지닌다는 사실을 나타내 주고 있다.
1. 가난한 자들은 부자보다 자기 즐거움을 보다 낫게 음미한다. 배고픔은 제일 좋은 반찬이다. 형편없는 음식이라도 식욕만 왕성하면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너무 많이 먹어 그 마음에 식상한 자들은 이런 것을 알지 못한다. 매일 호화판으로 먹어대는 자들은 마치 이스라엘들이 메추라기에 물린 것처럼 별미를 가진 음식에도 메스꺼움을 느끼게 된다. 이에 반해 생명이 유지에 필요할 것도 변변히 못 먹는 자들에게는 "배부른 자"가 "쓰다"고 소리칠 정도의 음식도 "다라". 그들은 형편없는 음식도 즐거이 먹고 소화시키며, 그것으로 힘을 얻는 것이다.2. 그들은 이 정도의 즐거움도 부자들보다 한층 더 감사해한다. "주린 자"는 떡과 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할 터이나, 배부른 자들은 아무리 고량진미라고 하더라도 감사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동정녀 마리아는 다음 말에서 이 점을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눅 1:53). 하나님의 축복을 평가할 줄 아는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그것을 깔보는 "부자는 공수로 보내시어"마땅하다.
방황하는 자(잠언 27:8)
1. 언제 넉넉하게 될지를 몰라서 현재의 상태를 불안히 여기고 변화만 추구하는 자들이 많다. 하나님께서는 섭리로 그들에게 적합한 장소를 지정해 주시고 그곳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셨으나 그들은 정착하기를 싫어하고 유랑하기를 좋아한다. 해외로 나갈 구실을 기뻐하며 한곳에 오래 머무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꼭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없는데도 자기 일에서 빠지며 돌볼 것을 돌보지 않고 자기와 관계없는 일에 참견하는 것이다.2. 이처럼 지정된 자리를 버리고 다니는 자는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와 같으니라."
그것은 그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예증이다. 그들은 어리석은 새처럼 철이 없다. 그들은 언제나 요동하여, 마치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겨 앉으면서 아무 데서도 안주하지 못하는 떠도는 새와 같다. 그와 같은 짓은 불안전하다. 떠도는 새는 위험에 드러나 있는 셈이다. 사람의 처소는 그의 성이다. 그곳을 떠나는 자는 새 사냥군에게 자신을 손쉬운 먹이로 내 주는 자이다. 새가 보금자리를 떠나 떠돌게 되면 둥지 속의 새알과 새끼들을 버려지게 된다. 즉 밖으로 나돌아 다니기를 좋아하는 자는 집안 일을 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둔다. 그러므로 각자는 "부름을 받은 소명(즉 천직) 속에서 거하여야" 하며, 거기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야 할 것이다.
참다운 우정의 유익함(잠언 27:9,10)
1. 우리의 친구들에게 신실하여 변함없이 대하라는 훈령. 우리는 옛 친구들과 친교를 유지하며 우리 힘이 자라는 한 그들에게 기꺼이 온갖 선한 일을 베풀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친구, 곧 흉금을 털어 놓을 친구가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우리는 그들과 허물없이 자유로울 수 있고 충고를 교환할 수도 있다. 친척들 중에서 이와 같은 친구로 삼을 만한 자가 있다면 극히 행복한 일이긴 하나 이러한 친구가 꼭 친척이나 우리에게 가까운 혈연 관계이여야 할 필요는 없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형제간이었으며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했다. 그런데 솔로몬은 흔히 친구와 형제를 구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까이 살고 있는 이웃 가운데서 친구를 고른다는 것은 권할 만한 일이다. 그러면 우리는 계속해서 왕래할 수 있으므로 친분을 유지할 수 있고 따뜻한 인정을 교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우리 가정에 우호적이었던 자들을 특별히 존중하는 것도 유익하다. "네 친구, 특히 그가 네 아비의 친구였거든 그를 버리지 말라. 기회있을 때마다 꼭 그에게 봉사하고 도움이 되도록 하라. 그는 믿을 만한 친구이며 네 사정을 환히 아는 친구로서 네게 특별한 배려를 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그의 권고를 들으라."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그들의 친구를 사랑하고 그들과 상의하는 것은 부모에 대한 우리의 도리이다. 솔로몬의 아들은 자기 아비의 친구들이 베푼 권고를 저버림으로써 스스로 화를 입었었다.
2. 왜 우리가 참다운 우정을 중히 여겨야 하며 친구를 신중히 택해야하는 지에 대한 이유.(1) 교우의 즐거움 때문에.
진정한 친구와 사귀고 의견을 나누는 일에는 아주 많은 "아름다움"이 있다. 그것은 아주 냄새가 좋고 기분을 돋구는 "기름이나 향과" 같다. 우정은 "마음을 즐겁게 하느니라." 무거운 걱정의 짐도 친구에게 가슴을 털어놓고 나면 가벼워진다. 우리 일에 대해 친구의 소견을 듣는다는 것은 매우 큰 만족을 준다. 우정의 "아름다움"은 진심어린 희락과 웃음이 있는 게 아니라 진심어린 충고, 즉 "충성된 권고"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진심으로 충고하는, 아침이 전혀 섞이지 않은 "영혼의 권고"(말의 의미는 그렇다)이며, 경우에 맞고 마음을 울리는, 영혼에 대한 관심에서 우러나온 권고이다(시 66:16). 우리는 신령한 일에 관한 대화를 통해 영혼의 번영을 촉진시키는 교제야 말로 가장 즐거운 교제라고 생각해야 한다.
(2) 교우의 이득과 유리함 때문에. 우정은 특히 "환란날에" 더 도움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형제의 집"에 들어가지 말라는 권고를 받는다. 친척이란 이유만으로 해서 그에게 구조를 기대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친척의 의무는 흔히 사촌입네 몇촌입네 하고 부르는 데 지나지 않는다. 참다운 인정을 시험하는 때가 오면 친척의 도리란 것도 없어지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본문은 오히려 가까이 있어서 절박할 때 기꺼이 도와 줄 수 있는 이웃에게 찾아가라고 권하고 있다. 우리가 그들에게 이웃사람답게 은혜를 입히는 일은 지혜로운 일이다. 우리가 곤경에 처하게 될 때 그들 역시 우리를 도와줌으로써 그 혜택을 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18:24).
자녀에게 지혜를 권고(잠언 27:11)
본문은 자녀들에게 지혜롭고 선한 자가 되라고 권면을 하고 있으며, 그 목적은 다음과 같다.
1. 자녀가 부모의 위로가 되며 악한 날이 이를 때에도 "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따라서 그들의 수고에 대한 보답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23:15).2. 부모의 명예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하면 나를 비방하는 자에게 내가 대답할 수 있겠노라. 그들은 내가 자녀의 양육에 너무 엄하고 가혹하였으며, 내 자녀에게는 딴 젊은이들이 누리는 자유를 제한함으로써 나쁜 교육 방법을 취했다고 비난한다. 내 아들아! 지혜를 얻으라. 그러면 결국 내가 자녀를 다루는 데 가장 현명한 길을 택했다는 사실이 판명될 것이다." 경건한 교육의 축복을 누린 자들은 매사에 있어서 자기가 받은 교육이 치욕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처신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젊어서는 성자였던 자가 늙어서는 악마로 둔갑하더라"고 하는 자들에게 할 말이 없게하고 반대로 "젊어서는 성자이더니 늙어서는 천사가 되었다"는 말을 듣도록 행동해야 한다.
재앙에 대한 권고(잠언 27:12)
이 말씀은 앞서도 나온 바가 있다(22:3).
1. 재앙은 예견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유혹이 있는 곳에 뛰어들면 거기에 죄가 있으리라는 것쯤 쉽사리 예상할 수 있고, 죄악을 무릅쓰고 행하면 거기에 형벌이 따를 것이라는 사실도 쉽게 내다 볼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보통 우리 위에 파숫군을 세워두시고 우리에게 부상을 입하시기 전에 경고하시는 것이다(렘 6:17).2. 행이냐 불행이냐 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우리 앞에 있는 재앙에 대해 통찰력을 발휘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우리의 행, 불행도 결정되는 것이다.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예견한다는 뜻으로 따라서 예측과 상통함)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들은" 너무 둔하여서 그 화를 예견하지 못하거나, 너무 고집이 세고 게을러서 재난을 피하는 일에 관심을 갖지 않고 태연히 "나아가다가 해를 입는다." 우리가 나중을 위해 대비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유익한 일이다.
보증에 대한 경고(잠언 27:13)
이 말씀 역시 앞에서 나왔었다(20:16)
1. 가난을 재촉하는 자는 어떤 자들인지를 나타내 주고 있다. 너무나 지각이 없어 누구든지 요구하기만 하면 보증을 서 주고 이방 여인에게 정신이 빠져 있는 자들이 바로 빈궁을 향해 달려가는 자들이다. 이와 같은 자들은 자기 신용이 통하는 한 돈을 줏어 챙길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자기 채권자를 속이게 될 것이다. 아니, 그들은 줄곧 속이고 있는 것이다. 정직한 자가 거지로 될 수도 있으나 이런 사기 보증인이 되는 자는 정직한 자가 아니다.2. 본문은 일처리를 신중히 하며 분명히 재산을 탕진하고 있는 자에게는 충분한 담보없이 금전을 차용해 주지 말라는 권면을 하고 있다. 어리석은 돈놀음은 자기 가족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이다. 잠언 기자는 "딴 사람을 연대 보증시키라"고 하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그 자신을 공동 보증인으로 삼는 자는 자기 자신과 같이 파탄한 자들을 자신의 보증으로 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옷을 취하라."
지나친 칭찬의 폐해(잠언 27:14)
1. 비록 가장 친한 친구나 따뜻이 대해 주는 후원자라 하더라도 그들에게 칭찬을 남발한다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짓이다. 각 사람에게 합당한 칭찬을 해 주고, 지식이나 미덕이나 유용성이 뛰어난 자들에게 갈채를 보내며 우리가 받은 친절에 대해서는 감사함으로 사례하는 것이 우리의 당연한 도리이다. 그러나 이것도 "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하는 정도가 되면 지나치다고 할 수 있다. 어느 모임에서든지, 심지어 그 친구의 면전에서까지 시종 같은 투로 되풀이하고 일찍 일어나 행하는 일처럼 열심히 이 짓을 행하며, 그 친구의 장점을 터무니없이 확대하고 과장한다면 그것은 비위에 거슬리고 구역질나는 일이 되며 위선과 흉계인 듯한 냄새마저 풍기게 된다. 사람들이 행한 일에 대해 칭찬한다는 것은 그들에게서 더욱 많은 것을 얻어 내려는 데 불과하다. 누구든지 그 의도가 찬사나 헌사에 대한 보답을 얻으려는 기생충적 바람에 있다고 결론을 내릴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만 돌려야 할 이런 찬양을 우리 친구에게 적용해서는 안된다. 혹자가 생각하듯 축복하기 위해 "이른 아침에" 일어난다는 데에는 하나님께 대한 도리가 암시되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침에 찬양받아야 할 분이기 때문이다.우리는(혹자가 이해하듯) "사람을 칭찬하는 일에 너무 성급해서는 안된다." 그들의 능력과 업적에 대해 너무 일찍부터 추켜 세워서는 안 되며 일단 시험을 해 보아야 하는데, 이는 그들로 자만심에 들떠서 게으른 잠을 자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2. 칭찬받는 일을 지나치게 좋아한다는 것은 더욱 어리석은 짓이다. 현명한 자라면 터무니없는 칭찬은 도리어 "저주"와 자신에 대한 비난으로 간주할 것이다. 자기 호주머니를 노릴 저의가 있는 것으로 간주할 것이며 실제로 자기에게 손해를 입힐 수 있는 것으로 여길 것이다. 온당한 칭찬은 (위대한 기자가 관찰하는대로) 그 칭찬에 보탬이 될 것들을 끌어오지만, 무절제하고 무례한 칭찬은 오히려 그 가치를 떨어뜨리기 시우며 지나친 칭찬을 듣는 자라는 비난을 면할 길 없게 만든다. 게다가 한 사람을 과도히 칭찬함으로써 그를 시기의 대상으로 만들게 된다. 누구나 명예에 관한 한 한몫 끼어들려고 나서기 때문에 만일 딴 사람이 그것을 전유물로 삼거나 자기 몫보다 더 많은 칭찬을 받는다든지 하면 자기가 피해를 입은 것으로 여길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큰 위험은 그 칭찬이 교만에 이르게 하기 쉽다는 점이다. 사람은 남이 자기를 정도 이상으로 추켜 주면 자신을 정도 이상으로 과대평가하기가 쉽다. 지나친 평가를 받을까봐 두려워한 사도 바울은 얼마나 주의깊고 복된 분인지를 보라(고후 12:6)
다투는 여인의 폐해(잠언 27:15,16)
솔로몬은 앞에서와 같이 괴팍하고 성미 급한 아내를 가진 자의 경우에 대해 비탄을 금치 못하고 있다. 이 여인은 끊임없는 잔소리로 자기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는 모든 자를 불안하게 만든다.
1. 도저히 피할 도리가 없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그것은 "비오는 날에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과 같은 것이다. 이웃의 다툼은 세찬 소나기와 같아서 그 당장에는 고통을 주나 분쟁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피신할 수가 있다. 그러나 "다투는 아내"는 꾸준히 젖어드는 비와 같아서 달리 치료할 길도 없고 참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19:13 참조).2. 감출 길이 없다는 것도 하나의 괴로움이다. 지혜로운 자라면 자신과 아내의 명예를 위해 아내의 그러한 점을 감출 수만 있다면 감추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바람이 불 때 나는 시끄러운 소리나 강렬한 향 기름 냄새를 어떻게 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일을 감출 수가 없다. 더구나 패역하고 언쟁하기 좋아하는 자들은 친구들이 친절한 마음에게 그 사실을 덮어 주고자 해도 자신의 치욕을 광고할 것이다.
교제의 유익함(잠언 27:17)
본문은 교제의 즐거움과 이익을 말해 주고 있다. 독불장군이란 말이 있다. 한 사람으로는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한 쪽 모퉁이에서 책을 아무리 골똘히 파고 앉아 있어 봤자 인간을 책으로 읽고 연구하는 것과 같이 그렇게 성취하지는 못한다. 현명하고 유의한 담화는 인간의 슬기를 갈고 닦아 준다. 아무리 지식을 많이 소유하고 있는 자라도 회의(會議)를 통하여 더 얻을 게 있는 법이다. 그것은 사람의 표정을 빛나게 해 준다. 심령을 즐겁게 해 줌으로써 그 얼굴에 활력과 생기를 더해 주어 그 자신이 즐겁다는 모습을 나타내 주고 그의 주위 사람들에게도 즐거움을 주게 만든다. 이와 같이 착한 사람들의 은혜는 선한 자와의 대화를 통해 빛나게 되는 반면에 악한자들의 정렬과 혈기는 쇠가 쇠로, 특히 줄칼로 날카롭게 되듯 악한자와의 교제로 더욱 날카로와진다. 사람은(거칠고 둔하고 비활동적이었던 자는)교제를 통해 다듬어지고 부드러워지며 총명하게 되고 일할 수 있게 된다. 이 말씀의 의도는 다음과 같다.
1. 우리 자신을 날카롭게 벼리고 빛나게 닦기 위해 이 편리한 방편을 우리에게 권장하고 있다. 또한 우리가 사귈 자를 택하는 데 있어서 조심하라고 하는 경계의 말씀을 겸하고 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미치는 교제의 영향력이 너무나 커서 우리를 더욱 선하게 하거나 더욱 악하게 하기 때문이다.2. 교제에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 즉 우리는 교제를 통해 남과 자신을 아울러 향상시킬 수 있어야 하며, 시간을 낭비하거나 서로 농담으로 시종하지 말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여" 서로를 더욱 지혜롭고 선한 자로 만들어야 한다(히 10:24).
근면과 충실함(잠언 27:18)
이 말씀은 보잘 것 없는 고용살이에서도 근면과 충성과 항구성을 유지하도록 하라고 격려하기 위한 것이다. 직업이 비록 힘들고 천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고수하는 자들은 그 직업으로 얻을 게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1. "무화과나무를 지키는" 가난한 동산지기라 하여 풀이 죽지말라. 무화과나무를 키우려면 끊임없는 보살핌과 손질이 필요할 것이며, 또 자라고 나면 잘 가꾸어 놓아야 하고 철이 되면 무화과를 채집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자기 수고에 대해서 대가를 받을 것이다. 그는 "그 과실을 먹으리라"(고전 9:7).2. 자신이 가난한 하인이라고 해서 성공하고 출세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지 말라. "자기 주인을 시종하는" 일에 부지런하며 그에게 무척 조심하고 순종한다면, 또한 "자기 주인을 지키면"("시종"의미는 "지킨다"는 것이다), 즉 자기 주인의 생명뿐만 아니라 명성까지도 안전히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여 주인의 재산이 탕진되거나 손해를 보지 않도록 조심하면 그는 "영화를 얻으리라." 그런 자는 칭찬을 받을 뿐만 아니라 중용되고 상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를 신실히 섬기는 자에게 영광을 입히겠다고 약속하신 "주인"이시다(요 12:26).
자신을 아는 길(잠언 27:19)
이 말씀은 다음 두 가지 길이 있음을 보여 준다.
1. 우리 자신을 알게 되는 길. 물은 반사에 의해 우리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거울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을 "사람에게," 즉 자신에게 밝혀 주는 거울도 있는 것이다.자신의 양심과 생각과 애정과 의도를 살피도록 하라. 하나님의 법의 "거울에 자기의 생긴 얼굴"을 비춰 보아라(약 1:23). 그러면 자기가 어떤 종류의 인간이며 자기의 진정한 개성은 어떠한지를 식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사람이 자기의 바른 모습을 아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2. 우리를 통해 서로를 아는 길. 사람의 얼굴과 물에 비친 영상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듯이, 한 사람의 마음과 딴 사람의 마음에는 유사함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같게 만드신 것이다. 다수의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자신을 통해서 남을 판단할 수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원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규칙의 근거가 된다(출 23:9).Nihil est unum uni tam simile,tam par,quam omnes inter nosmet ipsos sumus,sui neno ipse tam similis quam omncs sunt omnium-즉 사람과 사람이 비슷한 것만치 서로 간에 더 유사한 것은 없다. 각자가 자기 외의 모든 사람과 닮는 만큼이나 자기 자신과 닮은 사람은 없다(서체로 문집, 1권). 한 사람이 부패한 마음도, 하나의 성별된 마음도 딴 사람의 마음과 같다. 전자는 땅의 동일한 형상을 입고 있고 후자는 하늘나라의 동일한 형상을 입고 있는 것이다.
사망과 죄(잠언 27:20)
여기서는 만족할 줄 모르는 두 가지를 말하고 있는데 그들은 아주 가까운 관계를 지니는 것이다. 그것은 곧 죽음과 죄이다.
1. 사망은 만족을 모른다.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이 다 그러하다. 묘지는 날마다 매장되는 무수한 시체로도 다 메꾸어지는 법이라곤 없으며 여전히 "열린 무덤"으로서 "달라, 달라"하고 소리지른다. 지옥 또한 스스로 확장하여 그 감옥에 들어갈 저주받은 영들을 계속 수용할 여지가 있게 된다. "도벳(Tophet)은 깊고 넓었느니라"(사 30:33).2. 죄는 만족을 모른다. "사람의 눈은 만족함이 없으며" 쾌락을 향한 세상적 마음의 욕심도 그러하다. "눈은 보아도 족한 줄 모르며," "은은 사랑하는" 자가 "은에 만족하지 아니한다. 인간은 싫도록 누릴 것을 위해 수고하지만 그것에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아니, 그것은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것들이다. 우리의 첫조상들이 에덴 동산의 모든 나무로도 만족을 느끼지 못하여 금단의 나무를 건드릴 수밖에 없었던 이래로 이런 끝없는 불안은 인간이 마땅히 느끼게 될 숙명이 되어 버렸다. 자기 눈을 항상 여호와께로 향하고 있는 자들은 그에게서 만족을 얻게 될 것이며 영원히 만족하게 될 것이다.
칭찬의 시련(잠언 27:21)
이 말씀은 우리가 자신을 시험해 볼 수 있는 시금석을 제공해 준다. 은과 금은 풀무와 도가니에 넣어 봄으로써 시련할 수가 있거나 사람은 칭찬해 줌으로써 시험해 볼 수가 있다. 사람을 극찬하고 좋은 자리에 기용해 보라. 그러면 그는 자기의 모습을 보여 줄 것이다.
1. 사람이 칭찬으로 인해 교만해지고 자만심을 가지며 냉소적인 인간이 되는 경우. 즉 그는 헤롯처럼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 할 영광을 자기가 취하는 자이다. 칭찬을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그는 자기의 말과 행동에 더욱 조심성을 잃게 된다. 자기 이름이 높아졌다고 대낮이 되도록 "침상에 누워있는" 자는 헛되고 어리석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자는 설사 칭찬을 받고 있더라도 진정으로 칭찬할 만한 것은 하나도 없는 자이다.2. 반대로 사람이 칭찬을 받음으로 해서 하나님께 더욱 감사하고 자기 친구들을 더 존경하며 자기 명예에 오점이 될 만한 것이면 무엇이나 한층 더 경계하게 되는 경우. 그는 자신을 향상시키는 일에 더욱 부지런해지고 자기 친구들의 기대에 보답하기 위하여 님에게 더 열심히 선을 베풀며, 이로써 그는 지혜롭고 선한 사람이란 사실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는 훌륭한 성정을 소유하여 아간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을 간과할 줄도 알며, 전과 다름없이 지내는 자이다(고후 6:8).
불치의 미련함(잠언 27:22)
솔로몬은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아 내리라."(22:15)고 말했다. 아동기는 마음의 형성기여서 악습이 뿌리를 내리지 않았으므로 그와 같이 말했지만, 여기서는 아동기 때에 행하지 못한 징계를 나중에 하려면 거의 불가능하게 되리라고 말하고 있다. 병이 만성이 되면 난치병으로 될 위험이 있는 것이다. "구스인이 자기 피부를 바꿀 수 있으냐?
1. 어떤 자는 극히 흉악하여 온화한 방법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으므로 거칠고 엄한 수단을 써야 한다. 그런 자는 "절구에 넣고 찧어야"된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통하여 그들에게 이러한 방법을 취하실 것이다. 위정자들은 엄정한 법에 따라 악인에게 이런 수단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이성과 사랑 및 그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으로 다스림을 받지 않으려고 하는 자들에게는 완력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2. 어떤 자들은 구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악하여 이런 거칠고 엄한 방법으로도 소기의 목적을 거둘 수가 없다. 그들의 "미련은 벗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이토록 "그 안에는 악을 행하려는 마음"으로 꽉 차있다. 그들은 흔히 채찍을 맞아도 겸손해지지 않고 풀무에 넣어도 정하여지지 않으며, 아하스왕처럼 한층 더 많이 죄를 범한다(대하 28:22). 그렇다면 그들은 내다 버리는 은처럼 배격받는 도리밖에 없지 않겠는가?
부지런함에 대한 권고(잠언 27:23-27)
Ⅰ. 우리 직업에 게을리하지 말도록 하라는 권고.
이 말씀은 농부와 목자가 가축을 돌보는 자들을 가리키고 있으나, 딴 모든 정당한 직업에도 확대하고 적용할 수 있다. 집 안이나 집 밖에서의 일이나, 우리의 생업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는 거기 전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권고가 암시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할 일을 가져야 하며 게을리 살아서는 안 된다.2. 우리의 일을 올바로 그리고 완전히 이해해야 하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어야 하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일에는 손대지 말아야 한다.
3. 우리는 직접 그 일에 주목하고 있어야 하며 그 일에 대한 온갖 보살핌을 남에게 미루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눈으로 "우리 양떼의 형편"을 관찰해야 한다. 양떼를 살찌게 하는 것은 바로 주인의 눈인 것이다.
4. 우리는 일 처리에 신중하고 분별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일의 "형편을 살피며" 거기 "마음을 두어서," 아무런 손실이 없도록 하고 기회를 놓지지 않도록 하며 만사를 제때에 질서정연히 처리하여 최상의 이익을 얻도록 활용해야 한다.
5. 우리는 "부지런해야"하며 수고를 해야 한다. 앉아서 궁리도 해야 하지만 서서 행동하기도 해야 한다. "보살피는 자답게 마음을 네 소떼에 두라. 네 손을 네 사업에 두고 분골쇄신(粉骨碎身)하라."
Ⅱ. 이 권고를 보다 강하게 뒷받침하는 이유.
1. 세상 재물의 불확실성. "대저 재물은 영영히 있지 못하느니라"(24절).(1) 딴 재물은 이들 가축만큼 지속성이 없다. "네 양ㄸ와 소떼에 마음을 두며 농촌에 있는 재산과 가축에 정성을 들여라. 이들은 농경 사회의 주요한 제화로서 상속을 통해 영구적으로 소유된다." 이에 반해 상업으로 얻는 재산이나 상품은 그렇지 못하다. "면류관" 조차도 양떼나 소떼보다 더 확실성이 없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2) 이런 재물조차 잘 돌보지 않는다면 없어질 것이다. 사람이 소위 큰 "승원"을 소유하면서도 게으르고 사치하면 그 문을 닫게 될 것이다.
왕위와 조세권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손상을 입을 것이며, 잘 관리하지 못하면 "대대로" 계승되지도 못할 것이다. 다윗은 자기 가문에 왕권을 상속한 임금이었지만 "자기 양떼와 소떼를 부지런히 살폈던 것이다"(대상 27:29, 31).
2. 자연, 즉 자연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관대하심과 그 섭리의 후하심. "풀을 벤 후에는 새로 움이 돋느니라"(25절).(1) "소떼와 양떼를 살피는 데는 큰 수고,즉 쟁기질이나 씨를 뿌릴 필요가 없다. 가축의 사료는 땅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산된다. 풀이 움돋는 여름에는 그곳으로 가축 떼를 몰고 가기만 하면 되고 겨울철에 대비해서는 산에서 꼴을 거두는 것밖에는 달리 할 일이 없다. 하나님은 자신의 역할을 다 하셨다. 만약 네가 너의 할 일을 행하지 않는다면 너는 그의 은혜를 모르는 자로써 부당하게도 그의 섭리에 보답하기를 거부하는 셈이 된다."
(2) "목축에는 지켜보아 이용해야만 되는 기회가 있다. 그 시기는 움이 돋는 때이다. 만일 이 시기를 놓치게 되면 너의 소떼와 양떼는 제대로 잘 먹지 못하게 될 것이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가축을 위해서도 우리는 개미처럼 양식을 장만해 두어야 마땅하다.
3. 가정 경제상의 유익.
"네 양떼를 지켜라. 그리하면 네 양떼가 너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너는 네 자녀와 종들에게 줄 음식, 곧 넉넉한 염소의 젖을 얻게 되리라(27절). 족하면 잔치나 다름 없느니라. 아울러 너는 의복을 얻게 될 것이다. 어린 양의 털은 네 옷이 되리라. 또한 너는 땅값으로 내 놓을 수 있는 돈을 벌게 될 것이다. 팔기 위해 내놓은 염소는 네 밭을 사는 값이 되리라. 뿐만 아니라 어떤 자가 해석하듯 너는 사는 자가 될 것이며 네 자녀에게 물려 줄 땅을 사게 될 것이다"(26절).
(1) 양식과 의복이 있고 누구에게든 줄 돈이 있으면 우리의 소유는 족한 셈이다. 이런 경우 우리는 만족해야 할 뿐만 아니라 감사해야 한다.
(2) 가장은 자기뿐만 아니라 가족한테도 필요한 물품을 공급해야 하며, 자기 밑에 있는 사용자들도 적당한 생계를 영위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어야 한다.
(3) 간소한 음식과 수수한 의복일 망정 먹고 입는 데 무리가 없기만 하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것이다. "네가 네 양 새끼의 털로 집에서 짠 옷을 입고 네 염소의 젖을 먹는다면 다행으로 여겨라. 네 집 사람의 식물이 되며 네 여종의 먹을 것이 되는 그것으로 네 음식을 삼아라. 멀리 가서 비싸게 주고 산 별미를 원하지 말라."
(4) 우리의 일이 가족의 부양에 충분한 것을 제공하리라는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일에 마음을 기울이고 부지런히 종사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 준다. 즉 우리는 "우리 손이 수고한 것을 먹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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