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사와 성사(잠언 16:1)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의 큰 진리를 배우게 된다. 즉 우리 스스로는 "자신에 대해" 지혜롭고 선한 어떤 것도 "생각하고 말할 능력"도 없고 "우리의" 모든 "능력은 하나님께로서 나온다"는 사실이 바로 그 진리이다. 마음과 입과 함께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빌 2:13; 시 10:17).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본분을 달리 해석한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그는 이런 저런 일을 안출해 내기도 하고 계획하기도 한다),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그가 말하려고 작정한 내용을 전달하는 문제 뿐만 아니라 행하려고 계획한 일의 결과와 성패까지도 하나님께서 좌우하신다. 요약해서 말한다면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1. "모사는 사람에게 달려있다"(계획은 사람이 한다). 인간은 사고의 자유와 의지의 자유를 허용받았다. 사람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대로 계획하고 설계하도록 하라. 그러나 결국 어떻게 되는가?2. "성사는 하나님께 달려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축복없이 자기 사업을 수행해 나갈 수가 없다. 그는 "사람의 입을 지으셨으며" 우리가 말한 바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 반대로 하나님은 인간의 계획을 쉽사리 낭패시키고 그들의 수단을 무위로 돌려 버릴 수 있으시며, 또 가끔 그렇게 하신다. 발람의 심중에 준비되어 있던 것은 저주였으나 말의 응답은 축복이 되었던 것이다.
여호와의 감찰(잠언 16:2)
1.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판단에 있어서는 편파적이기 쉽다. "사람의 행위"(혹은 "길"), 즉 그의 모든 계획과 행동이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 그는 그 속에서 잘못된 것을 전혀 찾아 볼 수가 없고, 자신을 비난할 일이나 자기 계획이 잘못된 것을 볼 수 없다. 그러므로 그는 성공할 것으로 자신하며 말의 응답도 마음이 기대하는 대로일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의 길에는 아주 많은 타락의 오물들이 붙어 있고 우리는 이들을 알아채지 못하거나 아니면 마땅히 생각해야 할 만큼 그렇게 나쁘게 여기지도 않는 것이다.2. 우리가 확신하는 대로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진실을 따라 하는 심판이다. 그는 공정하고 틀리지 않는 저울로 "심령을 다지며"(혹은 "감찰하시며") 우리 안에 있는 것을 아시고, 그것에 따라 우리에게 판경을 내리시사 우리의 저울 눈금이 넘는 부분에다가 데겔(Tekel)이라고 쓰셔서, "저울에 단즉 모자람이 발견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의 심판에 의해 우리는 서거나 넘어지거나 해야 하는 것이다. 그는 우리의 행위를 보실 뿐만 아니라 심령도 감찰하시며, 우리라는 존재는 우리 심령의 모습 그대로인 것이다.
여호와의 위탁함(잠언 16:3)
1. "우리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진다"는 것(혹은 "우리 생각이 든든히 선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즉 우리 생각이 요동하지 않고 불안한 걱정이나 두려움으로 인해 쫓기는 것같이 조급하지 않으며, 정직과 경건의 탄탄대로로 변함없이 행하고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거나 어떤 사건이나 변화로 말미암아 안정된 기조가 깨어지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렇게 되면 만족을 얻어 모든 일이 유익하게 이루어지고 그 마지막 결과가 선할 것이며, 따라서 언제나 편안하고 침착하게 된다.
2. 우리의 "경영하는 것을 이루는"(우리 "생각을 든든히 세우는")유일한 길은 "우리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는"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인도하심에 대한 의지심과 복종심으로써(딤후 1:12) 우리 영혼의 큰 문제를 그 은혜에 맡기지 않으면 안 된다. 한편 우리의 외적인 관심사는 모두 하나님의 섭리와 그 섭리의 지고하고 지혜로우시며 은혜로우신 처분에 맡겨야 한다. "너의 행사를 영호와께 굴려라"(단어의 의미는 그러하다). 네 걱정의 짐을 네게서 벗어 영호와께로 굴려라. 기도로써 문제를 하나님 앞에 나열하여라. "네 행사를 영호와께 알리라"(그렇게 해석하는 자도 있음). 네 손이 하는 일뿐만 아니라 네 마음이 행하고 있는 일도 그에게 알려라. 그리고 나서는 믿음과 의존과 복종과 단념으로써 그것을 그에게 맡겨버려라. "야호와의 뜻대로 이루어지리라."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우리도 기쁘게 해 줄 것이라고 믿을 때 우리는 편안해질 수 있다.
여호와의 다스리심(잠언 16:4)
1. 하나님은 제1 원인이시다. 그는 만물과 만인보다 먼저 계시는 자요 모든 존재의 근원이시다.그는 모든 피조물에게 존재를 부여하셨고 그 위치를 정해 주셨다. 비록 반역자이긴 하나 악인조차 그의 피조물이다. 그는 자기를 거스려 대항할 힘까지도 악인에게 주셨는데, 그것은 그들의 악함을 가중시켜 그들은 자기들을 지으신 이로 하여금 자기들을 다스리도록 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비록 그들을 지으신 분이지만 그들을 구원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2. 하나님은 최후의 결과이시다. 모든 것이 그에게 속하였고 그로부터 말미암았으므로 모든 것은 그에게 돌아가며 그를 위해 존재한다. 그는 만물을 자기 의사대로 지으셨으며 자기를 찬양하도록 창조하셨다. 그들 모든 피조물을 통해 자기 목적을 이루시려고 의도하셨고 그의 계획은 결코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은 다 그의 종이다. 그는 악인에게 영광을 받지는 않으실 터이나 악인으로 인해서 영화롭게 되실 것이다. 그는 어떤 사람도 악하게 짓지는 않으셨으나 악하게 될 것을 예견하시면서도 그들을 지으셨던 것이다. 그는 "악인으로 인해 스스로 존귀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아셨던 까닭에 그들을 지으셨던(창 6:6) 것이다(롬 9:22).혹은(혹자가 이해하는 대로) 그가 세상에 대한 심판을 내릴 악한 날에 자기 진노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하여 악인을 지으셨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는 딴 것과 마찬가지로 악인도 자기의 칼이나 손(시 17:13, 14), 또 flagellum Dei-즉 하나님의 채찍으로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바빌론의 왕도 자기의 "종"이라고 부르셨던 것이다.
교만한 자의 벌(잠언 16:5)
1. 죄인의 교만은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다.신분이 높다고 하여 마음을 교만하게 가지고 자기 처지로 인해 마음이 부풀어 올라서 하나님과 인간에게 대한 태도가 거만하게 되는 자는, 비록 스스로 자화자찬하고 남들 또한 자기를 사랑해 준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그를 무시해 버리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를 혐오하고 계시는 것이다.
2. 죄인이 비록 양손으로 스스로를 강화시킨다고 하더라도 그의 능력으로는 자신을 하나님께로부터 안전하게 지키지 못한다.그들이 상호간에 동맹과 연합을 하며 힘을 합쳐 스스로를 강화시킨다고 하더라도 그의 의로우신 연합을 심판을 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기를 지으신 이와 다투는 자는 화가 있을지어다(잠 11:21; 사 45:9).
인지와 진리와 경외함(잠언 16:6)
1. 죄악이 어떻게 우리에게서 제하여 지는가?그것은 곧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에 의하여 이룩된다. 인자는 약속해 주시는 것 가운데 나타나고 그 진리는 자비로운 약속을 이루는 것 가운데 나타나며, 그 인자와 진리는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입맞춤하는 것이다. 또한 죄악은 인자와 진리가 그 안에서 밝게 빛나는 은혜의 언약으로 말미암아 속해지며, 사유의 조건과 그것의 필수 자격이 되는 우리 자신의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속하여진다. 죄악을 속하는 것은 이러한 것인지 율법의 제사가 아니다(막 6:7, 8).
2. 어떻게 죄악의 권세가 우리 안에서 깨뜨려지는가?우리의 속 사람을 지배하는 "인자와 진리"의 원리로 말미암아 타락하는 경향은 숙청된다(상반절은 그렇게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여호와를 경외함"과 그 경외의 영향력"으로 인하여 사람은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자기 마음 속에 거룩한 두려움과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유지하고 있는 자들은 감히 그를 거스려 범죄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기뻐하시는 여호와의 은혜(잠언 16:7)
1. 하나님께서는 원하기만 하시면 원수도 친구로 바꿔 놓으실 수가 있다.모든 사람의 마음을 자기 수중에 쥐고 계신 하나님은 그들의 심령에 접근하시고 다스리시며, 깨닫지 못하게 그러나 불가항력적으로 그들에게 역사하셔서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 마음을 변하게 하시거나 억지로 복종하는 채하도록 만드실 수 있다. 그는 모든 대적을 싹 쓸어버릴 수도 있고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자들을 한 자리에 모으실 수도 있는 것이다.
2.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때는 그는 우리를 위해 이일을 행하실 것이다.우리가 하나님께 화해하고 그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일을 우리의 관심사로 삼는다면 그는 종래에 우리를 시기하고 성가시게 하던 자들로 하여금 우리에게 대해 호의를 품게 하여 우리 친구가 되도록 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에서가 야곱과 화목하게 하셨고, 아비멜렉을 이삭과 화해하게 하셨으며, 다윗의 대적들이 다윗의 은총을 구하며 이스라엘과 동맹하기를 원하도록 만드셨다.
의로운 자들에게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형상과 그들에[게 대한 그의 각별하신 인자는 그들을 모든 자들, 심지어 극히 해롭게 하면 자들에게서는 존경을 받게 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적어도 의로운 소득(잠언 16:8)
1. 정직하고 선한 자는 이 세상 재물을 조금만 소유하리라는 것이 가정되고 있다(의인이라고 하여 전부가 다 부유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적은 것을 소유하여도 정직할 수 있으며(궁핍은 부정직하게 될 것을 유혹하기는 해도- 잠 30:9 - 당해 내지 못할 만큼 큰 유혹은 아니다), 사기나 착취로 잠시 부유할 수 있고 "많은 소득"을 가질 수 있다고 해도 "불의를 겸하여" 그것을 얻으려 지킨다고 할 것 같으면 아무런 선한 권리나 명분도 누리지 못하며 그 많은 소득을 활용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2. 본문 말씀은 적은 재산이긴 하나 정직하게 얻은 것으로서 사람이 그것에 만족하고 편안하게 누리며 즐거이 하나님을 섬기는 데 사용하고 정당하게 이용하는 것이면, 부당하게 벌어서 부당하게 간직하거나 낭비하는 큰 재산보다 낫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적은 소유이긴 하나 그런 재산은 보다 많은 내적 만족을 가져다 주며, 지혜롭고 선한 모든 사람들에게 보다 나은 명망을 얻어 준다. 그런 재산은 보다 오래 지속할 것이며 사람들이 소유한 대로가 아니라 행한 대로 심판을 받게 될 저 큰 날에는 더 나은 평가를 얻게 해 줄 것이다.
여호와의 지시와 지배(잠언 16:9)
본문은 인간을 다음과 같은 존재로 묘사해 주고 있다.
1. 자신을 위해 고안해 내는 능력을 가진 이성의 동물로서, "사람은 마음으로 자기 길을 계획하며" 목적을 설정하고 그 목적에 이르기 위한 수단과 방법을 고안한다.이런 일은 감각과 생리적 본능의 지배를 받는 하등 동물은 하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방법과 자신의 영원한 상태를 위해 준비하는 길을 궁리하지 않는다면 그런 자에게는 더 많은 수치가 이를 것이다.
2. 자기를 지으신 이의 지식과 지배에 따라야 하는 의존과 피조물로서.사람이 하나님의 영화를 목표로 삼고 하나님의 뜻을 규칙으로 삼기 위해 "자기의 길을 계획"한다면 하나님이 성령과 은혜로써 "그들의 걸음을 인도해"주시리라고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의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될 것이며 목적지에 미쳐 닿지 못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저희 세상사를 아무리 용의주도하게 계획하고 성공의 확률을 크게 가지더라도, 그 일의 조정은 하나님께 달려 있어서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그 걸음을 인도"하신다. 우리가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약 4:14, 15)라는 고백을 하고 우리 생애 중의 큰 고비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가 내딛는 모든 발걸음 속에서도 하나님께 우리 시선을 향하도록 가르치려는 것이 이 말씀의 목적이다. "여호와여, 나의 길을 직행하게 하소서."(살전 3:11). 인도하소서. 지시하소서.
선한 위정자의 재판(잠언 16:10)
이 명제가 언제나 진실 그대로이라면 얼만 좋겠는가! 우리는 이 점을 왕이나 모든 권세자를 위한 기도로 삼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저들의 입술에 있어서 저들이 명령을 내릴 때 지혜롭게 행할 수 있도록 하면 판결을 내릴 때 공평하게 행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원해야 한다. "재판"에는 지혜와 공의란 두 가지 말뜻이 다 포함되어 있으며, 이 두 가지 중 어느 것으로도 "저희 입이 그릇하지 아니"하도록 간구하자(딤전 2:1).
그러나 흔히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1. 따라서 이 말씀은 이 땅의 통치자와 재판관들에게 지혜로운 자가 되며 훈계를 받도록 하는 명령으로 해석될 수 있다.그들은 모름지기 공평해야 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에서 통치해야 한다. 그들은 아주 슬기롭고 양심적으로 행동하여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 속에 거룩한 예지가 나타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초자연적인 원리를 따라 인도되어야 한다. 심판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입은 재판에서 그릇하지 말아야 한다.
2. 또한 이 말씀은 모든 선한 위정자들에게 주신 약속으로 해석할 수 있다.그들이 성실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목표로 삼고 그의 지시를 구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저희 신분의 고하와 저희 수중에 맡겨진 책임의 경중에 따라 사라보다 능가하는 지혜와 부여해 주실 것이다. 사울이 스스로 왕이 되었을때 하나님은 그에게 다른 영을 주셨던 것이다.
3. 본서를 기록한 솔로몬에 대해 말하더라도 이것은 타당한 말씀이다.하나님이 그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는 비상한 지혜를 소유하게 되었던 것이다(왕상 3:28 참조).
여호와의 공평함(잠언 16:11)
1. 위정자가 일반 대중에게 정의의 법을 행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에 따른 것이다. 저울(즉 재판)은 신이 정하신 정의의 법 안에서 공정하게 다루어지며 또 변함없고 공평무사한 손으로 처리되어야 마땅하다. 우리는 여호와를 위하여 법에 복종해야 하며, 권세자의 권세 속에서 주의 권세를 볼 수 있어야 한다(롬 13:1; 벧전 2:13).2. 사람과 사람 간에 이루어지는 상거래에 있어서 법을 지키는 것 또한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다.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 사이의 권익을 정확하게 조정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그는 인간에게 슬기를 주사 저울과 추를 만들게 하시고 어느 쪽도 손해를 보지 않도록 하셨다. 권익의 보전에 유용한 다른 모든 발명품도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들이다. 동시에 그는 자기 법에 의하여 그러한 것들이 공정하도록 규정해 놓으셨다. 그러므로 올바로 행한다는 미명과 구실 하에 술책을 부려서 손해를 입히는 것은 하나님과 그의 다스리심에 대한 모욕이 된다. 이런 것은 "심판 자리에 이를 악"인 것이다.
선한 왕의 공의(잠언 16:12)
1. 선한 임금의 특성.이 말씀을 통해 솔로몬이 의도하는 바는 자신의 칭찬을 들으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후계자들과 그 인근의 통치자들이나 자기 밑에 있는 방백들을 훈계하려는 것이었다. 착한 임금은 정의를 행할 뿐만 아니라, 불의를 행하는 것은 "그의 미워하는"일이 되기도 한다. 그는 악행하려는 생각과 정의를 왜곡시키려는 생각을 미워한다. 그는 딴 사람이 악을 행하는 것도 타기하지만 그 자신이 어떤 나쁜 짓이든 악을 자행하는 것도 싫어한다. 그에게는 권세가 있어서 수월하게 또 안전하게 악을 행할 수 있는 데도 불구하고 그는 불의를 미워한다.
2. 선한 임금의 위로. "그 보좌가 공의로 말미암아 굳게 섬이니라." 권력의 올바른 사용을 본분으로 삼는 자는 그것이 바로 자기 정권에 대한 최선의 안보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인해 국민은 고마움을 느끼고 편안하게 될 것이며, 그 이익을 얻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도 입게 될 것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은총은 권좌에 대한 굳건한 기초가 되고 강한 수호자가 될 것이다.
의로운 왕의 기쁨과 사랑(잠언 16:13)
여기에는 현군의 특성이 한층 더 부연되어 있다. 즉 그들은 "정직히 말하는 자"를 "사랑"하고 "기뻐"한다는 것이다.
1. 선한 위정자는 기생충 같은 무리나 아첨하는 간신배들을 미워하며, 주위에 둘러선 모든 자들이 자기들에게 충직히 대해 주고 듣기 좋든 나쁘든, 인물에 관해서든 사물에 관해서든 진실을 말해 주면 아주 기꺼워한다. 그들은 무슨 일이나 참 모습대로 알려 주기를 바라며 조금이라도 가장된 것은 원하지 아니한다(잠 29:12).2. 그들은 몸소 의를 행할 뿐만 아니라 의롭게 행하는 자들을 자기 수하에 등용하려고 세심한 배려를 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국민에게 매우 큰 영향을 주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가장 높은 통치자에게 복종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가 보낸 지사들에게도 순복해야 하기 때문이다(벧전 2:14). 그러므로 선한 지배자라면 양심적 인사에게 권력을 맡기기 마련이며, 또 의롭고 분별있는 말을 할 것이고 어떻게 하면 올바르고 요령있는 말을 할 수 있는지도 알 것이다.
왕의 진노와 희색(잠언 16:14,15)
이 두 성귀는 어디 가나 위세를 떨치는 왕의 권력을 나타내 주고 있다. 이것은 왕권이 절대적이고 전체적이었던 동방 여러 나라에서 특히 그러하였다. 그들은 죽이고 싶은 자는 죽이고 살리고 싶은 자는 살리는 등 생사여탈을 마음대로 하였다. 그들의 의사는 곧 법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그 통치 아래 살고 있는 복된 정부 제도로 인해 하나님을 송축할 만한 것이다. 즉 우리의 헌법은 군주위 전권도 신민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고 못박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본문은 다음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다.
1. "왕의 진노"는 얼마나 두려운가! 그것은 "살륙의 사자와 같으니라."하만에게 대한 이하수에로의 진노도 그러하였다. 격앙된 군주가 내?는 불호령은 많은 자들에게 "살륙의 사자"가 되었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사형선고라도 내린 듯한 두려움을 안겨다 주었다. 요나단이 한 때 다윗에게 대한 자기 아버지의 격노를 진정시켰듯이(삼상 19:6) 적절한 말로 왕의 진노를 "쉬게"할 줄 아는 자는 "지혜로운 사람"임에 틀림 없다. 슬기로우 신하는 때때로 성난 군주에게 그의 화를 식힐 말을 진언하는 것이다.
2. 왕의 노여움을 산 자들에게는 왕의 총애가 얼마나 귀중하며 필요한 것인가! 성난 왕이 그들에게 대한 노여움을 푼다면 그것은 죽은 자가 생명을 얻는 것이나 다름없다. 또 딴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늦은 비를 내리는 구름"과 같다. 늦은 비는 목마른 대지를 촉촉히 적셔 주는 단비인 것이다. 솔로몬이 자기 신하들에게 상기시키는 것은 그들이 자기 진노를 살 일이며 어떤 일도 행하지 말고 그의 총애를 입도록 잘 보이게 세심한 배려를 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 말씀을 유의해야 하는 것은 왕 중 왕이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 그의 은총을 얻기에 얼마나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가 하는 사실이다. 그의 찡그리심은 살육보다 더 가혹하고 그의 은총은 생명보다 더 길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상의 지배자가 진노를 피하고 총애를 얻기 위해 하나님의 은총에서 뛰쳐 나오며 스스로 하나님의 진노를 입으려는 자들은 어리석은 자이다.
명철과 지혜의 이득(잠언 16:16)
솔로몬은 지혜를 얻는 것이 금을 얻는 것보다 더 낫다고 주장하는 데 그치지 않고(3:14; 8:19) 그것이 훨씬 더 나으며 형언할 수 없으리만치 더 낫다는 것을 자신있게 말하고 있다. 그는 불균형진 차이에 놀란 자 모양 탄성을 말하며("얼마나 나은고!") 인간의 양심에 호소하고 있다("그것이 얼마나 더 나은지 너희 스스로 판단해 보라".) 그리고 "명철을 얻는 것이 은"이나 왕의 모든 보물이나 총애하는 것을 "얻는 것보다 더욱 낫다"는 것을 같은 취지로 부언하고 있다.
1. 하늘의 지혜는 세상 재물보다 더 나으며 따라서 그것보다 우선시되어야 한다. 은혜는 황금보다 더 귀중하다. 은혜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의 선물이다. 황금은 단지 보통의 섭리가 주시는 선물에 불과하다. 은혜는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인데 반하여 황금은 타인을 위한 것이다. 은혜는 영혼과 영원을 위한 것이지만 황금은 몸과 시간을 위해 존재할 뿐이다. 은혜는 황금이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는 임종시에는 도움을 줄 것이다.2. 하늘의 지혜를 얻는 것은 세상 재물을 얻는 것보다 낫다. 많은 사람들이 재물을 얻기 위해 근심 걱정과 수고를 하지만 부귀에 이르지 못하는 자들이 많다. 그러나 은혜는 그것을 진지하게 구하는 자들에게 거절하는 법이라곤 없다. 재물을 얻는 데에는 심령의 헛됨과 성가심이 있으나 지혜를 얻는 데에는 심령의 기쁨과 만족이 있다. "지혜를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큰 평강이 있으리라."
정직한 자의 길(잠언 16:17)
1. 죄를 피하고, 죄와 닮은 것이나 죄에 이르게 할 것은 무엇이든지 회피하는 것이 "정직한 사람의 길"이다. 이것은 권세에 의해 정해진 대로이며 우리보다 앞서 간 많은 자들이 달려간 대로이고, 우리는 그 길에서 우리와 동행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 길은 대로와도 같이 찾기 쉽고 여행하기에 안전하다(사 35:8). "악을 떠나는 것이 명철이니라."2. 정직한 자의 관심사는 자기의 영혼을 보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들은 자기 영혼이 죄악에 오염되지 않고 세상 풍파로 영혼을 망실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특히 영혼의 영원한 멸망을 방지한다(마 16:26).
그러므로 그들의 관심은 자기 길을 지키고 어느 쪽으로든지 치우치지 않으며 완전을 행해 똑바로 매진하는 데에 있다. 자기 의무에 집착하는 자들은 자기 행복을 확실하게 지키는 자이다. 네 길을 지키라. 그리하면 하나님이 너를 지켜 주시리라.
교만한 자의 패망(잠언 16:18)
1. 교만한면 넘어질 것이다."마음이 거만한"자는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타인들을 업신여기며, 자만심으로 하나님을 모욕하고 딴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러한 그들은 참회나 파멸로 인해 낮아질 것이다. 교만한 자를 낮추는 것은 곧 하나님의 명예이다(욥 40:11, 12). 또한 스스로 치켜든 자들을 낮은 데 두시는 것은 공의의 행위이다. 바로나 산혜립이나 느부가넷살이 이에 대한 본보기이다. 인간은 교만을 처벌할 수가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으로 친히 교만을 처벌하신다. 교만한 자들을 처리하는 일은 그에게만 맡겨라.
2. 교만한 자들은 흔히 파멸되기 직전에 가장 뽐내고 무례하며 거만하다.따라서 교만은 그들이 멸망의 벼랑에 서 있다는 것을 알리는 확실한 전조이다. 교만한 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하고 심판 따위는 자기들에게서 천만리나 떨어져 있는 것으로 생각할 때, 그것은 곧 하나님의 심판이 문 앞에 이르러 있다는 신호인 것이다. 벤하닷과 헤롯의 경우가 이를 입증한다.
"이 말이 오히려 왕의 입에 있을 때에," 하늘에서 쇨가 있었다(단 4:31).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의 교만을 무서워하지 말고 우리 안에 있는 교만을 두려워하도록 하자.
겸손과 교만(잠언 16:19)
가난하고 겸손한 것이 부유하고 교만한 것보다 더 낫다는 말은 이 세상의 자녀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고 동의하기 어려운 역설이 된다.
1. "탈취물을 나누는" 자들은 일반적으로 교만하다. 그들은 자신을 존중하고 타인들은 멸시하며 그들의 마음은 자신의 상태에 따라 떠오른다.그러므로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은 마음을 높이지 말라"고 견책 받을 필요가 있다(딤전 6:17). 교만하여 스스로를 내세우려 하고, 출세를 위해서는 밀치고 기어오르는가 하면 뚫고 들어가 세치기를 하여 엽관운동을 하는 자들이 대개는 "탈취물을 나누며" 이권을 분배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자들은 세상을 마음대로 쥐고 흔들며 살고 있는 것이다.
2. 그러나 누가 뭐래도 야욕을 갖고 출세를 목적삼아 세상에서 부산히 뛰어 다니는 것보다는 낮은 처지에서, 마음도 그에 따라 겸손히 갖는 자들과 운명을 같이 하는 게 더 낫다. 겸비(謙卑)하면 이 세상에서는 경명을 받기 마련이지만 반면에 그 같은 태도는 우리를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하여 은총을 얻어 주고 그가 은혜로운 방문을 하기에 적합한 자로 만들어 준다. 또한 우리가 그의 영광에 참예하도록 준비해 주고, 여러 가지 시험에서 우리를 보호하며 우리 영혼의 정적과 휴식을 보존해 준다. 따라서 세상 부위 영화를 달고 다니면서도 하나님을 일게 인간의 적으로 삼고 마귀를 자기 주인으로 삼는 교만심보다야 겸손이 훨씬 더 나은 것이다.
신중함과 경건함(잠언 16:20)
1. 신중함은 사람에게 존경과 성공을 가져다 준다. '일을 슬기롭게 처리하는 자는"(이런 자는 자기 업무에 정통하여 자기가 시도하는 일에 대해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 나타나며, 일 처리에 신중하여 무슨 말이나 글을 쓸 때는 요령이 있다.) "좋은 것을 얻게" 될 것이고(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느니라. 우리 성경) 좋은 평파니 나게 될 것이며, 그 일로 상당한 이익을 얻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2. 그러나 인간의 진정한 행복을 보장해 주는 것은 경건밖에 없다.
"일을 지혜롭게 처리하는" 자들이 몇 가지 "좋은 것"을 얻게 되더라도 교만해져서 자기 자신의 총명에 의지하게 된다면, 그들은 그일 속에서 큰 만족을 얻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자기 지혜에 의존하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그의 성공은 마지막에 더욱 빛날 것이다.
이 말씀의 전반절도 경건에 대한 말씀으로 설명할 수 있다. "삼가 말씀(하나님의 말씀, 13장 13절)에 주의하는 자는" 그 말씀 가운데에 "좋은 것을 얻게" 될 것이며 그 말씀으로 인하여 좋은 것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를 의지하고" 그의 말씀을 의지하는 자마다 복이 있을 것이다.
지혜로운 마음과 선한 입(잠언 16:21)
1. 확고한 지혜를 소유하고 있는 자들은 그로 인해 신망을 얻게 될 것이다.그들은 그로 인해 명성을 얻게 되고 "명철하고" 장중한 사람으로 "일컬음을 받게 될" 것이며, 그들의 판단에는 경의가 표해질 것이다. "지혜롭고 선한 일을 하라. 그리하면 네가 그와 같은 칭찬을 받으리라."
2. 지혜뿐만 아니라 복된 화술도 소유하며, 자기 소감을 쉽게 선한 은혜 안에서 전달하고, 자기들의 지혜를 나타내며 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선한 언어 뿐만 아니라 선한 의미도 전하는 자들은 "남은 학식도 더 하게 하느니라."그들은 지식을 타인들에게 전파하라고 알린다. 그래서 말로 선을 행하며 그런 수단으로 하여 자기 자신의 창고를 넘치게 한다. 그들은 온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학문을 향상시키며 학식의 영역에 이바지 한다. "있는 자"와 가진 것을 이용하는 자에게는 "더 많은 것으로 주시리라."
명철과 미련함(잠언 16:22)
1. 지혜롭고 선한 자가 얻을 유익은 항상 있다. "명철한 자에게는 그 명철이 생명의 셈이 되느니라." 그것은 언제나 흐르며 결코 메마르는 법이 없다. 어느 경우에든지 그에게는 할 말이 있으며 그 말은 사용하려 하는 자들에게 유익하고 유용하다. 그에게는 자기의 창고가 있어서 옛 것과 새 것을 필요한 경우에 따라 끄집어 낼 수 있다. 그의 명철은 최소한 자신에게 풍부한 만족을 제공해 주는 "생명의 샘"이 된다. 설령 딴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하는 경우에도 그 자신의 생각 안에서 즐거움을 누리며 자신을 교훈하기라도 하는 것이다.2. 미련한 자가 얻을 선은 아무 것도 없다. 그의 훈계와 단호하고도 엄숙한 담화조차 그를 닮아 미련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딴 사람을 자기처럼 미련하도록 동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미련한 자가 자기의 최선을 다하는 때조차 지혜로운 자의 보통 담화와 비교하면 그것은 어리석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즉 미련한 자가 모세의 자리에서 말하는 것보다 지혜로운 자가 식탁에서 하는 말이 더 훌륭한 것이다.
지혜로운 자의 마음과 입술(잠언 16:23)
솔로몬은 달변 혹은 "입의 선한 것(21절)"을 칭찬하였고 그것을 지혜보다 우선시 하는 듯이 보였는데, 말하자면 여기에서는 수정을 가하여 그 달변을 뒷받침할 만한 선한 보고를 속에 비축하고 있지 못한다면 아무리 청산유수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거의 무가치하다는 것을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즉 그 요점은 "마음"의 지혜이다.
1. 말할 때 우리에게 지시해 주는 것은 마음이며, 무엇을, 언제,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그 입을 슬기롭게 하여"("그 입에게 가르쳐 주어":원뜻)하는 말이 적당하고 적절하며 때에 맞도록 하는 것도 마음이다. 만약 그렇지 못한 경우라면 아무리 아름다운 언어라 한들 그것을 말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2. 우리가 하는 말에 무게를 부여하고 "지식을 더하며," 이성의 힘과 논증의 힘을 보강해 주는 것도 이것이다. 이 마음의 지혜가 없으면 아무리 그럴 듯한 말로 표현된 것이라 하더라도 심사 숙고하는 자들에게는 하찮은 것으로 배척받게 될 것이다. 색다른 표현은 귀를 즐겁게 하고 유모어는 기호를 만족시켜 주지만, 판단을 깨닫게 하고 좌우하는 것은 입술의 학식이다. 마음의 지혜는 이렇게까지나 필요한 것이다.
선한 말의 유익함(잠언 16:24)
본문이 칭찬하고 있는 "선한(혹은 "즐거운")말"은 "지혜로운 자의 마음이 슬기롭게 하고" (혹은 "가르치고"), "지식을 더해 주는" 말임에 틀림 없으며, 때에 맞는 충고의 말이요 훈계의 말이며, 위로의 말이요 하나님의 말씀에서 취한 말이다. 솔로몬은 이런 말을 "꿀과 꿀송이보다 더 단 것"으로(시 19:10) 여기도록 자기 아버지에게서 배웠던 것이다. 이런 말을 음미할 줄 아는 자들에게는 그것이 다음과 같은 말이 된다.
1. 즐거운 말.그것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그 안에는 "여호와께서 은혜롭다"는 맛이 난다. 새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 및 그로부터 빌어 온 말씀보다 더 고맙고 즐거운 말은 없다(시 119:103).
2. 건전한 말.즐겁기는 하나 유익하지 못한 말도 많은데 반해 이 "선한 말은 마음에 달"뿐만 아니라 속 사람에게는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 이 즐거운 말씀은 죄가 골절시키고 탈골시킨 "뼈를 기쁘게"만든다. 뼈는 신체의 힘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신 말씀은 우리를 악화시키는 여러 가지 질병을 고침으로써 영적 힘을 부지하게 하는 방편이 된다.
자기 기만의 길(잠언 16:25)
이것은 앞서도 나왔던 말씀이지만(14:12) 재고할 필요가 있는 말씀이기에 반복되고 있다.
1. 우리에게 대한 경고의 말씀으로서. 우리 모두는 큰 관심의 대상인 영혼의 문제에 있어서 실제로는 옳지 않은데 "보기에 바른" 것 같은 일에 안주함으로써 자기 기만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자기 기만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자기 실험에 무사 공평해야 하고 우리 자신에 대한 질투심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2. 그 길이 바르지 아니한 자들에게는 공포를 주는 말씀으로서. 자기 자신이나 타인들에게나 그 길이 아주 옳은 듯이 보이더라도, 그 길이 당위의 길이 아니면 그 종착점은 필시 죽음이 될 것이다. 그 길은 죽음으로 직행하는 확실한 경향성을 지니고 있다.
부지런함에 대한 권고(잠언 16:26)
이 말씀은 우리를 부지런하게 하기 위한 의도를 지니며, 세상 사업이나 신앙의 일에서나 다 같이 "우리 손에 잡히는 일은 우리의 온 힘을 다하여 행하도록" 촉구하기 위한 것이다. 원문에 보면 "노력하는 영혼은 그 자신을 위해 수고하나니"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마음의 일이요, 영혼의 수고이며 본문에서 우리에게 이를 권면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1.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므로, 입은 끊임없이 우리의 수고를 독촉한다. 영혼이든 신체든 필수품을 시급히 요구하며 꾸준한 공급을 강요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일을 하든지 굶어 죽든지 해야 할 판이다. 이 양자는 날이면 날마다 양식을 달라고 소리친다. 따라서 날마다 수고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얼굴에 흐르는 땀으로 먹지 않으면 안 된다(살후 3:10).2. 말로 다 할 수 없는 소득을 주는 것이므로, 우리는 누구의 심부름으로 가고 있는지 알고 있다. "노력하는 자"는 자기 수고의 열매를 거둘 것이다. 그 수고는 "자신을 위한"것이 될 것이다. 그는 그 자신이 한 일로 될 것이며 "자기 손으로 수고한 것을 먹을 것이다." 우리가 신앙을 우리 사업으로 삼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업이 우리의 복으로 되게 해 주실 것이다.
악한 자의 폐해(잠언 16:27,28)
세상에는 스스로 결점이 있으면서 타인에게까지 악의를 품고 해를 끼치기도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자들이 가장 불량한 사람에 속한다. 그런 사람 중 두 부류의 인간이 여기에 등장하고 있다.
1. 아름다운 이름의 명예를 지닌 자를 시기하는 자. 그런 자는 비방과 중상 모략을 하면서 이웃의 선한 이름을 도말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그들은 "악을 꾀하느니라." 그들은 비방의 근거나 구실이 될 이런 저런 일을 찾아 내기 위해 막대한 수고를 한다. 부족하다기 보다는 근거가 될 만한 것이 전혀 표면에 나타나지 않을 경우에도 은밀한 것을 탐사하고 아주 뒷 길로 돌아가서 보건, 악한 의심과 추측 및 억지 풍자로써 비방꺼리를 캐내려고 할 것이다.모략하는 자와 험담하는 자의 입술에는 "불 같은 것이 있어서" 그 이웃의 명성에 낙인을 찍고 연기를 나게 하여 못쓰게 할 뿐만 아니라, "맹렬한 불 같은 것이 있어서" 태워 없애기도 한다. 이 불이 조금만 있어도 얼마나 큰 일을 불태울 수 있으며, 그것을 끄기는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약 3:5, 6).
2. 우정의 위안을 얻는 자를 시기하는 자. 그런 자는 우정을 깨뜨리기 위해 할 수 있는 온갖 일을 한다. 즉 극히 가까운 친척간이나 진배없고 오랫동안 친밀하였던 자들에게 이쪽 저쪽으로 다니면서, 틈새가 벌어지게 할 만한 암시를 하여 최소한 서로가 냉담하게 하거나 저희 애정이 소원해 지도록 만든다. 자기 말고는 어느 누구도 사랑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 "패려한 자"는 딴 사람들이 사랑하며 지내는 것을 보면 배알이 틀려 못견디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자는 "다툼을 일으키"는 것으로 능사를 삼아 "친한 벗"사이에서 이 사람에게는 저 사람의 단점을, 저 사람에게는 이 사람의 결점을 흠하고 거짓말을 하는가 하면 악담을 퍼뜨려서, 서로를 이간시키려고 하거나 화내게 하고 적어도 서로를 미씸쩍어 하게 하려고 기도한다. 그런 못된 일을 저지르는 자는 남녀를 불문하고 악한 자이다. 그들은 마귀의 일을 행하고 있는 것이며, 마귀의 일이 곧 그들의 삯이 될 것이다.
악한 행동과 궤계(잠언 16:29,30)
여기에는 또 다른 부류의 악한 일이 묘사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그들처럼 행동하거나 그런 자들과 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1. (사탄처럼) 폭력과 강압에 의하여 가능한 온갖 해를 입히려 는자.그들은 간교한 뱀처럼 기만한 환심에 의해 해를 입힐 뿐만 아니라 우는 사자처럼 힘과 폭력에 의해서도 악행을 저지른다.
그들은 강탈과 억압으로 모든 일을 행하는 "강포한 사람"이요, "패역한 일을 도모하기" 위해 "눈을 감고" 극히 치밀한 저의와 열심으로써 묵상하는 자이다. 어떻게 하면 자기 이웃에게 최대의 위해를 가할 수 있으며, 자신은 해를 입지 않는 안전한 범위 안에서 이 일을 효과적으로 행할 수 있을까 하고 궁리한다. 그리고 나서 그들의 "그 입술을 놀려"("닫고":우리 성경) 자기 졸개들에게 명령을 내리며, 초조감을 감추지 못하며 "그 입술을 깨물면서"(이렇게 해석하는 이도 있음) "악한 일을 이루고" 나쁜 계교를 성취시킨다. "악인의 의인을 해하려고 악한 꾀를 꾸밀" 때는 "의인에게 그 이를 가느니라."
2. 또한 (역시 사탄처럼) 남을 "꾀어"내기 위해 할 수 있는 온갖 일을 다 행하는 자. 이들은 타인들을 끌어들여 악한 일에 가담시키려고 갖은 수단을 다하여 "불선한 길로 인도하느니라." 이 길은 정직하지 못하고 영화롭지 못하며 안전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노염움을 입는 길로서 종말에 가서는 죄인에게 해로운 길이 될 것이다.이와 같이 악인은 이 세상에서는 사람들을 환란 속에 몰아 넣어 파멸케 하려고 하며 저 세상에서 죄 중에 끌어들여 멸망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백발의 영화(잠언 16:31)
1. 노인들은 "백발을 의로운 길에서 얻게 되"는 것을 일대 관심사로 삼아야 한다.의로운 길은 곧 신앙의 길이요, 하나님을 따라 성실하고 경건하게 사는 길이다. 하나님이나 사람이나 다 의로운 길에서 노인을 만나려고 찾을 것이다. 나이가 많은 분은 선한 자이며 많은 연륜은 그들에게 최선의 지혜를 가르쳐 주었을 것이라고 예상될 것이다. 그러므로 노인을 그 의로운 길에서 찾아 볼 수 있어야 한다.
죽음이 올 것이며 심판하시는 이가 오고 계신다. "주가 가까우시느니라." '주 앞에서 평강 가운데 나타나게" 되려면(벧후 3:14) 나이 많은 분들은 "의로운 길에서" 그에게 발견되어야 할 것이며, 또 "그렇게 하는 것을 보여 드려야" 할 것이다(마 24:46). 나이 많은 분들은 오래된 제자들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 종말에 "의로운 길에서" 발견되기 위하여는 발들여 놓은지 오래된 그 길에서 끝까지 머물도록 해야 할 것이다.
2. 백발들이 "의로운 길에서 얻게" 된다면 그들의 나이는 곧 영광이 될 것이다. 고령은 그 자체만 해도 영예롭고 존경을 받을 만하다("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라." 레 19:32). 그러나 흰 머리라도 악한 길에서 발견되는 경우에는 그것의 존귀가 상실되고 면류관이 욕을 입으며 티끌에 놓이게 된다(사 65:20). 그러므로 노인들이 자기의 명예를 보존하고 싶으면 계속하여 자신의 성실성을 굳게 붙잡아야 한다. 그러면 그들의 백발이 진정 자신의 "면류관"이 될 것이다. 그런 자는 "배나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자이다. 노년의 영화는 은혜인 것이다.
온유한 성질의 유익함(잠언 16:32)
이 말씀은 우리에게 온유함의 은혜를 권면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잘 어울릴 것이며 특히 "백발"이 된 자(31절)에게는 더욱 잘 어울릴 것이다.
1. 온유함의 성질.그것은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며 쉽사리 화를 내거나 도발에 곧잘 발끈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온유한 자이면 우리 격정을 폭발시키기 전에 곰곰히 생각해 보는 시간적 여유를 가짐으로써, 화를 냄으로 인해 정당한 영역을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고 노를 향한 행동을 더디게 하여 빨리 화를 멈추거나 진정시킬 수 있게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마음, 정욕이나 애착심, 우리의 모든 취향을 지배하는 것이다. 특히 우리의 성품이 분노를 지배하여 신앙과 올바른 이성의 지시와 억제와 엄한 규제 아래 두고 지키는 자가 온유한 자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러하신 것같이(나 1:3) "우리 분노의 주인"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Aeolus sis, affectuum tuorm-즉 풍신이 바람을 다스리듯 네 격정을 다스리라.
2. 온유함의 명예.자기의 격정에 대해 지배권을 가지고 그것을 유지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오랜 전쟁으로 나라를 항복받거나 오랜 공성 끝에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보라! 알렉산더나 시저보다 더 큰 자가 여기에 있다. 우리 자신이나 우리 자신의 다루기 힘든 격정을 정복하는 데는 적군에 대한 승리를 얻는 것보다 더욱 참한 지혜가 필요하며 보다 꾸준하고 항구적이며 규칙적인 관리가 요구된다.
이성을 가진 피조물에게 있어서는 합리적 정복이 야수같은 정복보다 더 고귀한 것이 된다. 그것은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얻은 승리이다. 단지 약간의 야비한 정욕을 희생시키는 것 외에는 어떤 생명보다 재물도 이를 위해 제물로 바쳐지지 않는다. 외부에서 쳐들어오는 침략에 저항하는 것보다 내부에서 일어나는 봉기를 진압하는 것이 더욱 어렵고, 따라서 그것은 더 영광스러운 일이 된다. 이러한 것이 바로 온유한 데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이며 그로 인해 "우리는 정복자보다 나은 사람이 되느니라."
여호와의 섭리(잠언 16:33)
1. 우리에게는 완전히 우발적이고 우연한 일도 하나님의 섭리가 명하고 지시하신 것이다. 어떤 일도 우연히 일어나거나 눈먼 운명의 신이 결정하는 사건은 없고,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의지와 계획대로 정해진다. 인간이 보지도 손대지도 않은 일조차에도 하나님께서 밀접히 관련되어 있으신 것이다.2. 운명에 맡기는 수(제비 뽑기)밖에는 달리 결정할 수 없거나 그 이상 더 잘 정할 수 없게 되어 그 일의 결정을 위하여 제비를 뽑고 섭리께 엄숙히 호소하려 할 때는 하나님을 주시해야 한다. 즉 그 일이 바로 처리될 수 있도록 기도로써 하나님께 시선을 돌리며("실상을 보이소서, 삼상 14:41; 행 1:24), 또 일이 처리되면 그 일 가운데 하나님의 손길이 계시고 그 무한하신 지혜자의 손길이 지시하신 것으로 만족히 여기면서 묵묵히 따라가야 한다.
우리는 우리 신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섭리가 내린 처분이라고 받아들여야 하며 그 모든 섭리의 처분은 우리에게 지정해 준 운명의 제비인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께 맡긴 일에 대한 결정이라고 간주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 일에 순순히 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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