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송축함(시편 118:1-18)
여기에서는, 다른 곳에서도 종종 보이듯이, 다윗이 그의 마음을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 보인다. 그는 그것에 관하여 생각하기를 즐겼고 그것에 관하여 말하기를 사랑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그 찬양을 받으시고 다른 사람들도 그 위로를 갖기를 갈망했다. 우리의 마음들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해 감동되면 될수록 완전한 복종의 자세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Ⅰ. 그는 하나님의 자비 일반을 송축하며, 그것에 대한 저희들의 경험으로부터 그것을 인정하도록 다른 사람들을 불러 일으킨다(1절). "여호와께 감사하라. 저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나님은 영원한 샘물이 되실 뿐만 아니라. 결코 시들지 않는 자비의 시냇가가 되시며, 가장 긴 영원의 선(線)까지 평형을 이루며 흐를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선택된 "자비의 그릇"으로, 그 영원한 기념이 될 것이다. 이스라엘과 아론의 집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모든 자들은 "여호와를 의지하라"는 부르심을 받는다(115:9-11). 여기에서 그들은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고 고백하라는 부르심을 받고 그를 의지하라고 격려되고 있다(2-4절). 제사장들과 백성들, 유대인들과 개종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고백해야 하며, 모두 같은 감사의 찬송을 부르는 데에 연합해야 한다. 만일 그들이 더 이상 말할 수 없다면, 그들로 하여금 그를 향하여 이렇게 말하게 하라. 즉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그리고 저희가 항상 그것을 경험하였다는 것을 말하라. 그리고 영원히 존속할 선한것들로 인하여 그것을 신뢰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진심으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모든 자의 찬양과 감사는 이스라엘의 집과 아론의 집의 찬양과 감사와 마찬가지로 그를 기쁘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Ⅱ. 그는 특별히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은혜롭대하신 일을 보존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전함으로써 그로부터 저희가 찬양의 노래와 믿음의 근거를 가져오게 한다. 하나님은 두 방편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다윗은 그 시대에 굉장히 큰 역경을 헤치고 나갔으며, 거기에서 그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크게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다음 사실들을 주목해 보기로 하자.
1. 다윗이 처해 있었던 큰 곤경과 위험을 보자. 그는 현재 그가 처한 자리에 대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찬미하기 위해 당시 상황을 반성한다. 사람들이 높아지면 이전에 낮은 상황에 대해서 듣거나 말하는 것에 관심두지 않는다. 그러나 다윗은 어떤 경우에든 그의 낮은 상태를 기억하고자 한다. 그는"고통 중에"(5절) 있었고 크게 곤란을 당해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를 미워하는 자들"(7절)이 많았다. 이것은 소박한 사람 중의 한 사람에게 커다란 슬픔이 되지 않을 수 없었고,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으려 안간 힘을 쓰는 자들에겐 더욱 그러했다. "열방이 나를 에워쌌다"(절). 이스라엘에 인접한 나라들 즉 블레셋과 모압과 수리아와 암몬 족속 등이 다윗이 새로이 왕위에 올랐을 때 훼방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에워싼 그의 적"들에 관해서 본문을 통해 본다. 그들은 그에 대항하여 동맹을 맺고 그를 건져 줄 모든 후원국을 단절해버리려고 생각했다. 그를 에워싼 그의 적들의 이러한 노력은 반복되었다(11절). "저희가 나를 에워싸고 에워쌌도다." 이것은, 그에 대적하는 그들의 사도가 적의에 찼고 맹렬하며, 오랫 동안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무질서해질 때 그들이 다시 동맹을 맺어 그들의 계획에 박차를 가했다는 사실을 나타내 준다. 그들이 수효가 많고 시끄럽고 귀찮게 하기 때문에 "저희가 벌과 같이 나를 에워쌌던 것 같다." 그들은 그에게 날아왔고 그에게 떼지어 날아와서 그를 독소 있는 침으로 쏘았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이 말하는 바대로, 침을 쏘면 그벌은 죽어버리듯 오히려 저희 자신의 파멸이 되었다. Animamgue in vulnere ponit - 즉 그 상처에서 자기 생명을 잃게 된다."여호와여 나를 괴롭히는 자들이 증가하여 어찌 그리 많은지요!" 다윗은 두 가지 방법으로 고통 중에 빠지게 되었다.
(1) 사람들이 그에게 행한 손상으로 말미암아서다(13절). "네가"(아, 대적자야!) 집요한 공격으로 "나를 밀쳐" 죄와 파멸로 "넘어뜨리려 하는 도다." 사탄은 유혹으로써 우리를 밀쳐 넘어뜨리려는 가장 큰 대적이다. 우리의 장점을 아래로 떨구어 버리고, 우리를 우리 하나님과 그 안에 있는 우리의 위로에서 멀리 끊어 버리려 한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총으로 지켜 주시기 않는다면 사탄의 밀침은 우리에게 숙명적인 것이 될 것이다.
(2)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고난에 의해서이다. "여호와께서 나를 심히 경책하셨다"(18절). 사람들은 그를 파멸시키려고 그를 밀쳤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아버지의 사랑과 인자로써 그를 경책하셨다. 사람들은 대적자의 적개심으로 그를 던졌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부(聖父)의 사랑과 인자로써 그를 경책하셨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계획적으로 주신 고난, 곧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케하기" 위해 마련한 바로 그 고난을 말하는 것 같다(히 12:10, 11). 그렇지만 그 고난의 도구 노릇을 한 인간들은 그렇지 아니하였다. "그 마음의 생각도 이 같지 아니하고, 오직 그 마음에 파괴하며 멸절하려는 것뿐이었다"(사 10:7). 인간들은 가장 큰 불행을 꾀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으로써 가장 큰 선을 계획하신다. 누구의 계획이 이루어질 것인가를 말하기는 쉽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서 고통을 씻어 주시며, 그가 경책하신 것과 같이 그가 계획하시는 선하심으로 고치신다. 그리고 그는 대적자들의 던짐과 같은 고통에 대해서도 그들을 지켜 주실 것이다. 그들이 꾀하는 사악으로부터 그들을 건져내시며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된다. 다윗이 받은 고통은 우리 주 예수에게 매우 적합하다. "그를 미워하는" 많은 자들이 있었고, 이유없이 기를 미워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그를 에워쌌다."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은 그를 둘러쌌다"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은 그를 둘러쌌다. "그들은 그를 심하게 밀쳤다." 악마도 그를 시험할 때 그렇게 행했다. 그를 박해하는 자들도 그에게 욕설을 퍼부울 때 그렇게 행했다. 아니 여호와께도 "그를 심히 경책하셨고," 그를 괴롭히고 그에게 슬픔을 안겨 주었다. 그리하여 리로 하여금 "그의 채찍 맞음으로 우리가 낫게 하려 하심이라.
2. 하나님께서 그의 고난 중에서 그에게 내려 주신 은총을 보자.
(1)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셨다(5절). 그는 크게 "나를 응답하셨다." 그는 나에게 내가 구할 수 있었던 것보다 더 크게 행하셨다. 그는 기도 중에 나의 마음을 크게 여시고, 내가 간구했던 것보다 더 크게 주셨다.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광할한 곳에 세우셨도다"(우리는 이같이 읽고 있다). 그 광활한 곳에서 나는 내가 활동할 자리를 가지며 만족할 수 있는 여지와 번창할 수 있는 자리를 갖는다. 그리고 광활한 곳은 그가 고통 중에서 거기까지 이끌어내었기 때문에 더욱 평온한 것이다(시 4:1).
(2) 하나님은 그에게 대적하는 적들의 계획을 좌절시켰다. "저희가 가시덤불의 불같이 소멸되었다"(12절). 그것은 잠시동안 맹렬하게 타오르고 큰 소리와 커다란 불꽃을 일으키지만 곧 사라지며 위협을 주었던 불행을 야기시키지 못한다. 다윗의 적들의 격렬함이 그와 같았다. "우매자의 웃음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 타는 소리같다"(전 7:6). 그것은 마치 우매자의 분노와 같아서 두려움의 대상이 될 뿐이다. 저희가 그를 격렬하게 밀쳤지만 "여호와께서 그를 도우셨다"(13절). 그를 도우사 그의 발을 지키시며 그의 근거를 보전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도움이 되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영적인 적들은 오래 전에 우리를 파멸했을 것이다.
(3) 하나님은 그의 생명을 죽음의 일보 직전에 있을 때 지키신다(18절). 그가 "나를 경책하셨어도, 죽음에는 붙이지 아니하셨도다." 왜냐하면 그가 나로 하여금 내 적대자들의 뜻에 굴복치 않게 하려하기 때문이다. 성 바울은 고린도 후서 6장 9절에서 이것에 대해 언급하는 것으로 보인다.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심히 경책받을 때 즉시 절망에 빠져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때때로 나타나셔서 "인간을 파멸로 이끄시고는, 말씀하시기를 돌아오라"고 하신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살라" 하신다.
이것도 또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응답하시고 그를 광활한 곳에 세우셨다." 그는 그의 적들이 갖고 있는 걱정의 불을 껐다. 그것은 그들 자신을 불태울 뿐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죽음을 통해서 죽음의 권세를 가진 자를 파멸시켰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약속을 통해서 그를 도와 주었다. 그리고 그는 이같이 그를 무덤에 두지 않기 위해서, 또한 그가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를 죽음에 굴복하지 않게 하였다. "죽음이 그를 지배할 수 없었다."
3. 그가 이러한 은총으로 얻은 진보를 보자.(1) 그것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 더욱 큰 힘을 주었다. 인간에게 신뢰를 두는 것보다 - 그 신뢰가 방백에게 두는 것일지라도 - "여호와께 피함이 낫다(8, 9절). 그것이 더 현명하고 평안하고 더 안전하다. 그것이 훨씬 더 나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인자하심에 대한 전적인 의존을 갖고서 하나님의 인도와 지배에 자신을 맡기는 자는 모든 왕들과 땅의 방백들이 그를 보호해 준다고 할지라도 그것보다 더 그를 편하게 해 주는 좋은 평안을 가질 것이다.
(2) 그것은 그로 하여금 그러한 신뢰 가운데서 승리하도록 해 주었다.
[1] 그는 하나님 안에서, 그와의 관계에서, 그를 의지함으로써 승리한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6절). 그는 의로우신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나의 정당한 소송을 지지해 주며 그것을 변호해 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선다면 그는 우리 편에 계신다. 우리가 그를 향해 서 있고 그와 함께 있다면 그는 우리를 향해 계시고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다.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향해 서 계시며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신다"(7절). 그는 나를 돕는 자들 가운데 계시며, 그는 사람들과 내게 있어서 전부가 되시며, 그가 없으면 나는 무력해지며 세상에 있는 어떠한 친구들도 나를 도울 수 없다. 이와 같아, "여호와는 나의 능력과 찬송이시라"(14절). 나는 그를 그렇게 생각한다. 그가 없으면 나는 약하고 슬픔을 당한다. 그러나 그에게 나는 나의 능력을 두며, 행함에 있어서나 고난에 있어서나 나는 그에게서 나의 기쁨을 표현하며 나의 슬픔을 달랠 수 있는 나의 노래로서 나를 위로한다. 그리고 그를 그렇게 대하고 있으며, 그가 그러한 분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은총으로 내 마음에 힘 주시며, 위로로써 내 마음을 기쁘게 해 주신다. 하나님이 우리의 능력이라면 그는 우리의 노래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가 우리의 모든 일을 우리 가운데서 활동하신다면 그는 우리로부터 모든 찬양과 영광을 받으셔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때때로 그가 저희의 노래가 되지 않을 때에도 그의 백성의 능력이 되신다. 저희가 영적인 기쁨이 결핍되었을 때 영적인 원조를 공급받는다. 그러나 그가 우리에게 양면을 채워 주신다면 우리는 그를 기뻐해야 할 풍성한 이유를 갖는다. 그러므로 그가 우리의 능력이 되시고 우리의 찬송이 되신다면 그는 우리의 구원자가 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구원도 되신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능력되심이 구원에 이르는 우리의 보증이 된다. 그가 우리의 찬송되심은 구원의 징표이며 그것을 미리 맛보는 것이 된다.
[2] 그는 그의 적들에게서 승리한다. 이제 그의 머리는 그들 위로 높이 올려질 것이다. 왜냐하면
첫째, 그는 저희가 자기를 상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한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신다. 그러므로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6절). 그는 그들을 모두 무시할 수 있으며 저희의 어떠한 시도에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허용하시지 않는 한 내게 어떠한 일도 할 수 없다. 그들은 나에게 아무런 진정한 상을 입힐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나와 하나님과의 관련을 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나의 유익을 위해 행하실 수 있는 것을 제외하고서는 어떠한 일도 할 수 없다. 인간은 능력이 제한되어 있고, 높은 권세에 종속되며, 의존적인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나는 적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같이 될 인자(人子)를 두려워하느냐?"(사 51:12) 사도는 이 구절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하면서 인용한다(히 13:6). 그들은 다윗 자신이 담대했던 것같이 담대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그들로 하여금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두라.
둘째, 그는 마침내 그들에게 심한 어려움이 임할 것을 확신하다.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7절). 나는 그들이 나에 대항하는 계략으로 패배하는 것을 보리로다. 아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희를 끊으리로다(10-12절). 나는 그들을 멸망하게 할 수 있는 여호와의 이름을 신뢰하며, 그의 힘을 의지하여 그로부터 권능을 받고서 그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내게 신뢰를 두거나 복수심을 스스로 갖지 아니하고 그들을 향해 나갈 수 있는 그의 이름을 신뢰하리라." 이와 같이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삼상 17:45) 골리앗을 향해 나아갔다. 다윗은, 어두움의 권세를 이기시며 멸하고, "저희를 온전히 부끄럽게 만드신"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3] 다윗은 자기의 위로와 승리와 생애의 지속에 대한 확증 가운데서 개가를 올린다.
첫째, 그의 위로에 관해서 보자(15절). "의인의 장막에 기쁜 소리, 구원의 소리가 있음이여." 그리고 특히 내 안에 나의 가정에 있음이라. 이 세상에서의 의로운 자의 거할 곳은 미천하고 유동하는 장막일 뿐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속할 도성"을 지니지 못한다. 그러나 이러한 장막이 사악한 자의 궁전보다 더 좋은 안식처가 된다. 왜냐하면 이 집에는 신앙이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구원이 있다. 거기에는 악으로부터의 보호가 있고 "이 집에 이르는"(눅 19:9) 영원한 구원의 징표가 있다.
구원이 있는 곳에는 기뻐할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끊임없는 기쁨은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이다. 거룩한 기쁨은 "구원의 기쁨"이라고 불리워진다. 왜냐하면 그 안에 기뻐해야 할 풍부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기쁨이 있는 곳에는 기쁨의 "소리" 즉 찬양과 감사의 소리가 있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 마음의 기쁨과 즐거움으로 섬기라. 그 기쁨의 소리가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들의 용기를 위해서 우리 가정에서 매일 들려지도록 하라.
둘째, 그의 승리에 해서 보라.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며"(15절), "높이 들렸도다." 왜냐하면(어떤 사람들이 해석하는 바에 의하면) "그것이 나를 높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권능의 오른손이 그의 백성들을 위해 활동하시며, 그들에게 권능있게 행하시어 승리하게 해 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용맹 앞에 어떤 어려움이 버틸 수 있겠는가? 우리는 약하고, 우리로서는 겁쟁이처럼 행동할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강하시며 우리를 위해서 질투와 단호한 결심으로써 권능을 베푸신다(사 63:5, 6). 자기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모든 섭리에는 능력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오른손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권능을 베푸실 때는, 우리도 우리의 찬송을 높이 올려야 할 것이다.
셋째, 그의 생애에 관해서 보자(17절). "내 생명을 찾아 헤메는 나의 적들의 손에 의해서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하리로다. 나는 하나님의 자비와 권세의 기념으로 살게 될 것이다. 그의 동은 내게서 선포될 것이며, 나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크게 전하는 것을 내 생애의 과제로 삼기를 원한다. 내 존속이 끝날 때까지 그것을 바라보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행사를 선포하는 것" 이외에 다른 목적을 위해 사는 것은 가치가 없다. 왜냐하면 그의 영광과 다른 사람들의 용기는 그를 섬기며 의지하는 데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것이 행위의 성공을 확증받는 다윗의 자손의 승리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선한 기쁨은 그 손에서 번영할 것이다."
메시야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시편 118:19-29)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 주 예수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 그리고 그에 뒤따르는 고난과 영광에 대한 현격한 예언을 보게 된다. 베드로는 이것을 직접적으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사용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오용했다고 말할 수 없었다(행 4:11). 여기에서 자세히 관찰해 보자.
Ⅰ. 이 고귀한 예언이 소개되고 있는 서문(19-21절).
1.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성소에의 허입을 희망한다. 그것은 거기에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시는 자"의 영광을 송축하기 위해서였다"내게 의의 문을 열지어다." 성전문은 그렇게 불리워졌기 때문에,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들에게는 닫혀 있었으며, 가까이 오는 외국인을 금지하였다. 마찬가지로 거기에서 드려지는 제사는 "의의 제사"라고 불리워졌다. 거룩한 규례대로 하나님과 교통하러 들어가기를 원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허입을 비는 겸손한 청원자들이 되어야 한다. 의의 문이 우리에게 열렸을 때 우리는"그리로 들어가야" 하며 허박받은 한 지성소에 들어가서 "여호와를 찬양해야"할 것이다. 하나님의 문 안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문이 우리에게 열려져서, 우리가 그를 영원히 찬양할 하나님의 집에 거할 수 있기까지 오랜 소망을 지녀야 할 것이다.2. 그는 그에게 부여 허입을 본다(20절). "이는 여호와의 문이라." 그가 정하신 문이라. "의인이 그리로 들어가리로다." 그가 말한 것처럼, "너희가 두드리는 문은 열리고, 너희는 영접될 것이다.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리리라."
어떤 사람들은 이 문을 그리스도로 이해한다.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으며, 또 우리의 찬양이 받아들여진다. 그는 "길"이다. 그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길을 발견하지 못한다(요 14:6). 그는 "양의 문"이다(요 10:9). 그는 성전의 문이다. 그에 의해서, 그에 의한 의로운 자들만이 이 "주의 의에 들어 갈"수 있다(69:27). 시편 기자는 오랫 동안 닫혀 있었고, 오랫동안 두드렸던 의의 문이 이제 드디어 열려진 것을 발견하고서 개가를 올린다.
3. 그는 이러한 은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기로 약속한다(21절).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아주 멀리서 그리스도의 날을 보았던 자들은 그 전망을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를 알았다. 왜냐하면 그에게서 그들은 메시야의 오심을 위해 구약의 성도들이 했던 기도를 들으시고 저희의 구원이 되실 것이라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Ⅱ. 예언의 내용을 보자(22, 23절). 이것은 다윗의 승진을 다소 언급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사울과 그의 신하들이 버렸던 돌이었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의해서 건물의 초석(礎石)이 되기까지 발전했다. 그러나 그 근본적인 언급은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예언을 볼 수 있다.
1. 그리스도의 낮아지심. 그는 "건축자가 버린 돌"이다. 그는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산에서 따내온 돌"(단 2:34)이다. 그는 능력과 견고성과 지구력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영적인 성전의 건축에 있어서, 그 생명에 대해서도, 하나의 돌이다. 그렇지만 "보배로운 돌"(벧전 2:6)이다. 왜냐하면 복음적인 기초는 "청옥(사 54:11)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 돌은 "건축자에 의해서 버림받고" 유대인은 지배자와 군중들에 의해서 버림받았다(행 4:8, 10-11). 그들은 그를 약속된 돌, 즉 약속된 메시야로 고백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그에게 그들의 신앙을 세우려 하지 않았고 그에게 가담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를 쓸모없다고 여기고, 그 없이 저희의 건축을 계속 쌓아 가고 있다. 그들은 "빌라도 앞에서 부인하였다"(행 3:13). 그 때에 그들은 "우리는 가이사 이외의 다른 어떤 왕도 모시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들은 이 돌을 짓밟고 그것을 도성 밖에 있는 쓰레기 가운데 던져버렸다. 아니, 그들은 거기에 걸려 넘어졌다. 이것은 그리스도에게 수치였지만 그것은 그를 경시했던 자들의 파멸을 입증해 주었다.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부하게 된다.2. 그의 높아지심. 그는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그는 영광과 유효성의 가장 높은 정도까지 올라갔으며, 모든 것 위에 계시며 무엇보다도 높아지셨다. 그는 기초에서 쓰여지는 머릿돌이며, 그를 기초로 해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연합되어 하나의 거룩한 집이 되는 것이다. 그는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다. 그에게서 건물이 완결되며 그는 모든 것 중에서 "우리의 신앙의 창시자요, 성자"로서의 탁월성을 가짐이 틀림 없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그를 높이셨다. 그가 스스로 낮추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획에 따라서 그를 우리의 희망의 근거로 삼아야 하고, 우리의 연합의 중심과 우리의 인생의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내게 있어서 사는 것은 그리스도이다."
3. 이 모든 것에 함께하신 하나님의 손.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여호와께로부터 온 것이다. 그것은 여호와가 함께하신 것이다. 그것은 그의 섭리의 산물이다. 그것의 그의 계획이다. 주 예수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 모두 그의 행사였다(행 2:23; 4:27, 28). 하나님은 그를 보냈고 인봉했다. 하나님의 은 그와 더불어 그의 전 행위를 통해서 함께했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그는 아버지의 뜻을 행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눈에 기이한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은 "기묘한 자"이다. 그가 행한 구속은 하나님의 기적의 행사(기묘한 일) 중 가장 놀라운 것이다. 그것은 천사들이 "찾기를 갈망했던" 것이며, 영원까지 경탄될 일이다. 우리는 그것을 더욱 더 찬양해야 하며, 그에게 우리 모두를 고백해야 할 것이다. "논쟁할 여지없이, 하나님의 신비는 크시다."
Ⅲ. 그와 더불어 받아들여진 기쁨과 이러한 예언에 뒤따르는 환호를 보자.
1. 그 날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커다란 기쁨으로 엄숙히 축복해야 하겠다(24절). "이 날은 여호와의 지으신 날이다." 복음이 지배하는 모든 때 즉 "정하신 때," "구원의 날은" 여호와께서 그렇게 정하신 것이다. 그 날은 기쁨으로 지켜져야 하는 끊임없는 축제의 때이다.혹은 이것은, 버림당한 돌이 높임받은, 그리스도의 부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는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이라고 이해하는 것도 적합할 것이다.
(1)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에 관한 교리가 있다. "이 날은 여호와의 지으신 날"이며, 보통과는 다르게 만들어진 날이며, 거룩하게 지으신 날이며, 다른 날들과 구별되는 날이다. 그는 그날을 인간을 위해서 만드셨다. 그러므로 그 날은 "여호와의 날"이라고 불리웠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의 형상과 이름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2) 안식일의 의무. 즉 그의 날에 해야 하는 그 날의 행사가 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그러한 날로 정해진 그날의 설정에서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모퉁이의 머릿돌"로 오시는 경우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우리는 그것을 그의 영광으로, 우리의 유익으로 여겨 모두 기뻐해야 할 것이다. 안식일 날들은 기뻐하는 날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우리에게 거룩한 날들로 임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섬기는 선한 주인, 즉 그의 예배를 위해 한 날을 정하시고 그것을 거룩한 기쁨으로 되라고 정하신 분이 어떠한가를 보라.
2. 높임받은 구속자를 즐거운 호산나 찬송을 외치며 영접하고 따르자(25, 26절)
(1) 왕의 대관식 때 상례적으로 하듯이 그로 하여금 백성의 환호를 받게 하자. 그의 충성스러운 신민의 모든 자가 기쁨으로 외치게 하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이것은 마치 Virat rex - 즉 왕이여 만수무강하소서 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그가 왕좌에 오르심에 대한 진정한 기쁨과 그의 통치에의 전적인 만족과 그 권세와 영광에 대한 열심적인 애호를 표현하고 있다. "호산나"는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옵소서"를 의미한다.
[1]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이 구세주는 나의 구세주시며, 따라서 나를 다스리는 분입니다. 나로 하여금 그의 보호 아래 있게 하시며, 그의 기뻐하시는 신민의 하나로 삼으소서. 그의 적은 곧 나의 적입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그들로부터 나를 구하소서. 내게 그의 왕국의 번영에 참여할 권리를 주시고, 그것을 기뻐하는 모두와 함께하게 하소서. 내 영혼을 번창케 하시고 건강하게 하사 그 나라가 임하는 평화와 의에 참예케 하소서(72:3). 나로 하여금 나의 영혼과 싸우는 것을 좋아하는 자들을 이기게 하시고, 내 마음에 하나님의 은총이 이기며 또 이기게 하소서."
[2]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그를 막아 주소서. 구원자에게도 언제나 번영을 주소서. 그의 복음을 성공을 주시며, 하나님을 통해서 요새를 무너뜨리는 힘이 되게 하소서. 그리고 낮아진 영혼들을 그에게 연합하게 하소서. 그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사 그의 "나라가 임하시며 그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이와 같이 "사람들이 저를 위하여 항상 기도하리로다"(72:15). 여호와의 날에 우리가 기뻐하며, 그의 나라를 기뻐할 때, 우리는 그것이 더욱 더 발전하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며, 사탄의 국이 파멸되고 그 위에 그리스도의 나라가 세워지기를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 공공연히 입성을 할 때, 이처럼 그에게 호의를 보내는 자들과 마주쳤다(마 21:9).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왕이신 예수여, 만수무강하소서, 영원히 다스리소서."
(2) 제사장들과 여호와의 사신들로 하여금 이 거대하고 장엄한 예식에 자기의 일익을 담당하게 하라(26절).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복이 있도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시는 이(oevrcome noj)"이며, 오신 자이며, 이제 다시 오실 자이다(계 1:8). 그는 여호와로부터 위임을 받고, 그를 위해 행하고, 그의 뜻을 행하고, 그의 영광을 추구하기 위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시는 자여 복이 있으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오시는 자를 기뻐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를 찬양하고 경외하여 그를 높이 중하며, 영원히 그를 축복받은 예수로 불러야 하며, 영원히 송축해야 할 것이다(45:2). 우리는 그를 우리 마음에 영접해야 하며, 말해야 할 것이다. "오시옵소서, 여호와의 축복받은 자여, 주의 은총과 성령으로 오소서. 그리고 주의 것으로 나를 소유하소서." 우리는 그의 이름으로 오시는 그의 충성스러운 사신들을 축복해야 할 것이며, 그를 위해서 그들을 영접해야 할 것이다(사 52:7; 요 13:20). 우리는 그의 교회의 확장과 구현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며, 그의 재림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그는 "확실히 내가 속히 오리라. 곧 오리라"고 말씀하셨다.
[1] 그들로 하여금 저희의 기도로 그 백성을 축복하게 하라.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그리스도의 사신들은 그의 이름으로 진심으로 그를 사랑하고 그의 통치를 사랑하는 그의 충성된 신민들에게 축복을 선포하라고 임명될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으로 보장받는다(엡 6:24).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해서 너희가 축복받은 자들인 것을 확신한다. 왜냐하면 그가 너희를 축복하셨기 때문이다. "너희는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엡 1:3), 즉 여호와의 집에서 축복받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너희를 축복하신 자를 송축해야 할 이유가 있다."
3. 감사의 제사를 드리자. 우리를 위해서 크게 속죄하는 제사를 드린 그의 영광에 감사의 제사를 드리자(27절).
(1)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특권을 갖는다. "여호와는 우리에게 빛을 비취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여호와로 그 이름이 알려졌으며 그가 약속하신 것을 수행하시며 그가 시작하신 것을 완전하게 하시는 분이다(출 6:3). "그가 우리에게 비취셨으니," 그는 우리에게 자신을 알게 하시고, 그의 뜻을 깨닫게 하셨다. "그는 우리에게 빛을 비추셨다"(어떤 이들은 이렇게 해석한다). 그는 우리를 축복하시고 우리를 그의 보좌의 빛으로 올려 세우셨다. 그는 우리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위한 처지를 주셨고 그것은 영에의 빛이 된다. 하늘에 있는 영원한 빛을 우리에게 보게 하셨다. "여호와의 지으신 날"은 빛으로, 참된 빛으로 온다.
(2) 이러한 특권이 요청하는 의무가 있다. "줄로 희생 제물을 제단 뿔에 맬지어다." 율법에 따르면, 죽인 희생 제물의 피를 제단의 뿔에 뿌려야 한다. 제물이 도살되기 전에 "제단의 뿔에 희생을 매는 것"은 아마도 관습이었을 것이다(우리가 그러한 예를 어느 곳에서 나 쉽게 찾아 보지 못했지만).
그렇지 않으면, 이것은 여기에서 특별한 의미를 나타낼 것이다. 구속하시는 사랑에 감사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 제물은 우리 자신들이며, 우리 자신을 제단에서 살육해서 바치는 것이 아니라 "산 제물"(롬 12:1)로 바친다. 그것은 제단에 기도와 찬양의 영적인 제사를 묶어드리는 제사이며, 우리의 마음도 고정해야 하고, 거기에 참예해야 한다. 아마 그런 것을 뜻할 것이다. 그 제사는 뒤로 물러서지 않도록 "제단 뿔에 줄로" 묶는 제사이다.
4.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의 고백으로 결론을 맺는다. 그는 여기에서 다른 사람들도 자기와 연합할 것을 요청한다(28, 29절).(1) 그는 스스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자신의 마음과 다른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그를 높이려고 꾀한다. 이것은 그에 대한 하나님의 계약의 관계로 말미암은 것이며, 그에 대한 관심 때문인 것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는 내가 의지하는 분이며, 내가 헌신할 분입니다. 그는 나를 시인하시며, 내 고백을 받으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2)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서 모든 백성에게 큰 기쁨의 기쁜 때를 위해 모든 것을 취하게 될 것이다. 즉 거기에는 구속자 주 그리스도가 계신다. 하나님께서 "선하시며" 인간에게 "그 인자하심이 영혼함이로라"는 사실은 바로 그에게서 발견되는 것이다. 그에게서 은총의 계약이 수립되었고, 그에게서 확증이 주어졌고, 선이 이뤄지고 영원한 계약이 성립되었다. 그는 이 시편을 그가 시작한 것과 같이(1절) 결론을 짓는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를 향한 우리의 고백에서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끝이 되어야 한다. 주의 이름이 영광 받으시옵소서, 영광은 주의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써 적절하게도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을 마감한다. 천사들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감사를 드린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눅 2:14)라고 천사들이 말하므로, 우리는 "땅에서" 호산나를 외쳐 반향해야 할 것이다(눅 19:38).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는 "하늘에 평화요," 그러므로 "가장 높은 곳에서 영광이다."
Previous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