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에 감사하는 고백(시편 116:1-9)
우리는 이 대목의 시편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볼 수 있다.
Ⅰ. 다윗의 경험과 그의 경건한 서원에 관한 일반적인 내용이다(1,2절). 이것이 전체 시편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1. 그는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기도의 응답에서 경험하였다. "여호와께서 그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셨다." 다윗은 환난 중에 겸손하고 진지하게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하였고, 하나님은 그의 간구를 들으셨다. 즉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은혜롭게 받아들으셨으며 그의 처지를 감찰하시고 그에게 평안의 응답을 주셨다." 그는 그 귀를 내게 기울이셨다" 이것은 기도를 들으시려는 하나님의 준비성과 자진성을 나타내 준다. 그는 기도를 듣기 위해서 기도하는 입에 자기의 귀를 두신다. 그 기도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울려 퍼지는 것일지라도 귀를 기울이신다. 그는 "귀를 기울여 들으신다"(렘 8:6). 그렇지만 이것은 또한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겸비를 나타내 준다. 그것은 그의 귀를 숙이는 것이다. "여호와여! 인간이 무엇이기에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같이 굽어 살피나이까!"2. 그러한 것을 생각하면서 그는 하나님과 그의 영광에 전적으로 헌신하기를 결심한다.
(1) 그는 더욱 더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한다. 그는 그의 마음 속에 차고 넘치는 고백으로 돌연히 시편을 시작한다.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18:1 과 같이). 그는 이 시편을 처음이자 가장 큰 계명에 따라서 그리고 우리를 향한 그의 관대하심의 모든 은사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서 시작한다"나는 그만을 사랑한다.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사랑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그를 향해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연민의 사랑은 정당하게 그에게서 만족하는 우리의 사랑을 요청한다.
(2) 그는 더욱 더 기도를 사랑하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기도하리로다." 우리가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체험한 경험은 우리로 기도를 계속하게 하는 커다란 격려가 된다. 우리는 기도에서 우리의 몰가치성과 허약성에도 불구하고 잘 진행해 왔다. 그런데 왜 우리가 할 수 없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를 사랑하도록 하기 위해서 기도에 응답하신다. 그리고 그의 은총에 대한 보답으로 우리로부터 기도를 고대하신다. 왜 우리는 기도에서 잘 대접받을 때 다른 밭에서 이삭을 주어야 하는가? 아니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히브리어로는 "나의 날에"). 마지막 날까지 매일 매일 기도하리로다. 계속해서, 살아있는 동안 우리는 계속해서 기도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마지막 숨질때까지 숨쉬어야 할 호흡이다. 왜냐하면 그 때 우리는 숨을 그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는 기도를 해야 한다.
Ⅱ. 그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처사에 관한 더욱 상세한 이야기와 그가 받을 아름다운 인상이 여기에 있다.
1. 하나님은 그를 대하시는 데서 그 자신이 선한 하나님이신 것을 보여 주셨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 대한 이러한 증언을 간직하고 있으며,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 두는 것이다(5절).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신 분이다." 그는 의로운 분이다. 그래서 내가 환난 중에 있을 때에 내게 악을 행하시지 않았다. 그는 은혜로운 분이다. 그래서 친절히 나를 원조해 주며 구원해 주셨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발견한 하나님을 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의롭고 선하신 분이 아니라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없다. "위 하나님은 자비하시도다." 우리에게 자비로우시다. "우리가 소멸하지 않는 것은 그의 자비를 인함이라."(1) 다윗의 경험들을 자세히 살펴 보자.
[1] 그는 커다란 환난과 고통에 처해 있었다(3절). "사망의 줄이 나를 둘렀다." 즉 그것은 죽음과 같은 슬픔이었으며, 사망의 고통처럼 여겨지는 슬픔이었다. 아마도 최극도의 육체적 고통 혹은 마음의 슬픔이 여기에서 "음부의 고통"이라고 표현되었을 것이며, 그것은 죄의식으로부터 일어나는 양심의 아픔이었을 것이다. 다음 사실을 주목해 보자. 사망의 줄은 커다른 슬픔이며, 음부의 고통도 커다란 고통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자에 대한 준비를 성실히 한다면 후자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사방에서 그를 "둘렀다." 저희가 그를 붙잡았다. 그래서 "그를 묶어 버렸다." 가 도망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두려움이 없는 곳에는 투쟁도 없다.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다." 저희가 나를 만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저희를 만났다. 침울한 자들은 그들 자신이 발견하는 수많은 슬픔을 안고 있으며, 공상과 감정에 빠져서 스스로 만들어낸 많은 환난을 안고 있다. 이것이 때때로 선한 사람들이 약점이 되어 왔다.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의 상황을 나쁘게 만들 때, 우리는 우리의 경거망동에 의해서 상황을 더욱 악화시켜서는 아니된다.
[2] 그는 환난 중에서도 신실하고 열심 있는 기도로 하나님께 의뢰하였다(4절). 그는 그가 기도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였다." 그가 최후의 곤경에 빠졌을 때 그는 최후의 요법으로써가 아니라 과거의 것이며 유일한 요법으로써 기도를 사용한다. 그는 여기에서 모든 고통에 대한 구제책을 발견하였다.
그는 그의 기도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우리에게 말해 준다. 그것은 짧은 것이었으나 적절한 것이었다. "오 여호와여? 내가 주께 간절히 소원하나이다. 내 영혼을 구하소서. 나를 사망에서 구원하시며 나를 죄로부터 구원하여 주소서. 왜냐하면 그것이 영혼을 죽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기도의 열심과 겸손은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라는 말에 잘 나타나 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 올 때에는 자선금과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거지와 같은 자세로 나와야 한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5절)라는 다음에 오는 말은 그의 기도의 중요 부분으로서, 그의 요청을 힘 있게 해 주고, 그의 신앙과 희망을 격려해 주는 간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호와여 "내 영혼을 건지소서. 주는 은혜로우시며 자비하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오직 구원을 주께만 의지합니다."
[3]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때를 맞춰서 효험있는 구원을 주시려고 오신다 .그는 하나님이 은혜로우시며 자비로 우시다는 것을 경험에 의하여 알았으며, 긍휼로서 "어리석은 자를 보존하신다"(9절)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이 어리석기 때문에(즉 교활하지 않고 진지하며 올바르기 때문에) 하나님은 바울을 보존하신 것과 같이 그들을 보존하신다. 그는 세상에서 "육에 속한 지혜로써가 아니라 단순함과 경건한 진지성을 가지고" 말했다. 그들이 어리석지만(즉 약하고 무력하고 자신들을 변경할 수 없는 자들이고 아무런 속셈과 계획도 없는 자들이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보존하신다. 왜냐하면 그들이 자신들을 그에게 맡기며 자신들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자신들을 하나님의 보호 아래 두는 자들은 안전하게 될 것이다.
(2) 다윗은 그 자신의 경험을 말한다.
[1] 하나님은 그의 환난 가운데서 그를 도우셨다. "내가 낮게 될 때에" "내가 깊은 불행 속에 빠졌을 때" 나를 도우셨으며 최악의 상태를 인내하며 가장 좋은 것을 희망하도록 도와 주셨으며 소망이 좌절되지 않도록 내게 기도를 도와 주셨고 믿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기다림을 도와 주셨다. 나는 하나님이 보존하신 어리석은 자들 중의 한 사람이며 여호와께 "구하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시는"(34:6) 곤고한 자이다.
다음 사실을 주목하여 보자. 하나님의 백성은 결코 낮아져서 영원한 빈곤이 저희를 주관할 수 없다. 그리고 이와 같이 보존되는 자들은 결코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도움을 주시는 것은 궁핍한 때이며, 그 때는 죽은 자들도 일어난다(신 32:36).
[2] 하나님은 그를 환난으로부터 구원하셨다(8절). "주께서 건지셨나이다." 이것은 그가 환난으로 떨어지려는 것을 막는 것을 의미하거나 또는 이미 그가 처해 있는 환난으로부터 회복한 것을 의미한다.
첫째, 하나님은 그 "영혼을 사망에서" 은혜롭게 건져내셨다. 우리가 살아 있는 것도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크신 은혜인 것을 기억해야 한다. 자비는 우리가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을 때 다시 덤으로 살게 되고, 일으켜졌을 때 더욱 실감나게 된다. 그 자비를 파멸을 되돌려 복귀하라고 명하시는 것과 같다. 그렇게 쉽게 빼앗기게 되고, 또 쉽사리 위험에 부닥치는 이 생명이 오랜 기간을 살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의 자비의 기적이라 하겠다. 영적이며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영혼이 건짐을 받는 것은 이제 성화(聖化)된 모든 자들과 장차 곧 영광받을 자들에 의해서 특별히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 하나님은 그 "눈을 눈물에서" 건져내셨다. 즉 그의 마음을 심한 슬픔에서 건져내셨다. 슬픔의 상황과 비애를 야기시키는 악으로부터 지키는 것과 과다한 슬픔에 쌓이게 되는 상태로부터 지키는 것은 크나 큰 자비이다. 하나님께서 던져진 자들을 위로하시며 통곡하는 자의 베옷을 풀어 주시고 저희에게 기쁨을 주실 때, 그는 저희의 "눈을 눈물에서" 건져 내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그 세상에 임할 때까지는 완전이 이뤄질 수 없을 것이다.
셋째, 하나님은 "내 발을 넘어짐에서," 죄에 빠지는 것에서, 불행으로 떨어지는 것에서 건져내셨다 우리의 발이 거의 넘어지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오른손을 붙드시는 것"(시 73:2, 3)은 커다란 자비이다. 우리가 극복할 수 없는 시험에 빠지고, 시험에 의해서 쓰러진다고 하더라도 붙들어 주신다. "주께서는 무덤에도 넘어짐에서 내 발을 건지셨나이다. 그때에 나는 이미 한 발을 거기에 두었나이다."
2. 다윗은 하나님께 대한 은혜의 보답으로 그 자신이 선한 사람임을 부여 주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다윗을 위해서 보여주셨다. 그러므로(1) 다윗은 하나님이 즐거워하는 생활을 할 것이다(7절).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지어다!"
[1] "편히 쉬고 안식을 취하라. 그리고 네가 전에 가끔 행하였던 것과 같이 믿음없이 동요하는 공포로 네 자신을 흥분시키지 말라. 평온하라. 그리고 스스로 기쁨을 가지라. 하나님께서는 너희를 친절로써 대하셨다. 그러므로 너는 그가 너를 무섭게 대하실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
[2] "하나님 안에서 편히 쉬어라. 그에게 너의 평안함을 돌리고 그에게만 있는 안식을 피조물에게서 구하지 말라."
하나님은 영혼의 안식처이다. 그에게만 편히 거할 수 있는 곳이 있다. 그러므로 그에게 들어가 그 안에서 즐거워해야 할 것이다. 그는 "우리를 후대하셨다." 그는 우리의 위로와 안식을 위하여 충분히 공급하셨다. 그리고 그는 모든 때에, 모든 경우에 그것을 위하여 자기에게로 나아오라고 우리를 격려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마 11:28)에게 주시는 그리스도의 안식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노아에게로 돌아가라. 그의 이름은 비둘기가 쉴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간 것과 같이 "안식"을 의미한다. 나는 밤에 우리의 두 눈을 감고 잠을 청할 때, 그리고 긴 잠을 자기 위하여 죽음 앞에서 눈을 감을 때 이 말보다 더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하겠다. 즉, "내 영혼아! 평안함에 돌아갈지어다!"
(2) 그는 하나님께 헌신하는 생활을 하기를 원한다(9절). "내가 생존 세계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 즉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계속 여호와 앞에서 행하리로다.
[1] "여호와 앞에서 행하는 것'은 우리의 큰 의무이다. 그의 현존과 그의 감찰하심 아래에서 모든 것을 행하는 것을 보심으로써 그가 거룩한 하나님이심을 시인하는 것, 그를 즐거이 신뢰함으로써 그는 모든 것에 넉넉하신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것이 우리의 커다란 의무인 것이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 "우리는 최대의 기쁨으로 여호와 앞에 행해야 할 것이다."
[2] 우리가 산 자의 세계에 있다는 것을 이렇게 숙고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그렇게 행하도록 재촉하며, 결국 거기에 참여하게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의 권능과 인내와 부드러운 자비로 말미암아 산 자의 세계에서 남아 있게 되고, 오래 살아 있게 되 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성심껏 행해야한다. "산 자의 세계"는 우리 감사해야 할 자비의 세계이다. 그것은 우리가 이용하고 개선해야 할 행운의 기회의 세계이다. 그것은 우리가 이용하고 개선해야 할 행운의 기회의 세계이다. 가나안은 "산 자의 세계"는 우리가 감사해야 할 자비의 세계이다. 가나안은 "산 자의 세계"는 우리가 감사해야 할 자비의 세계이다. 그것은 우리가 이용하고 개선해야 할 행운의 기회의 세계이다. 가나안은 "산 자의 땅"(겔 26:20) 이라고 불리웠다. 그리고 그러한 환상의 계곡에서 던져진 많은 자들이 특별히 "여호와께서 저희들 앞에 항상 계시는 것을 관심하게 되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져내셨다면, 우리는 그 앞에서 행해야만 할 것이다. 새로운 삶은 진정으로 새로운 삶이 되어져야 할 것이다.
경건한 결의(決意)(시편 116:10-19)
70인 역과 다른 고대 번역본들은 이 구절들을 앞에 나온 구절들과 구분하여, 하나의 독특한 시편으로 삼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일컬어 "순교자의 시편"이라고 하는데, 그것 은15절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윗은 여기에서 세 가지 사실을 고백하고 있다.
Ⅰ. 그의 신앙(10절). "내가 믿는고로 말하리라."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지만 그를 고백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그 자신과 동역자들에게 적용하면서 인용하였다(고후 4:13). 다윗은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와 약속을 믿었고 하나님께서 사무엘에 의해서 그의 목동이 지팡이를 왕의 홀(笏)로 변하게 하여 그에게 주신 확증을 특별히 믿었다. 그는 이러한 신념으로 많은 고초를 견디어내었다. 그러므로 그는 기도로써 말했고(4절), 찬양으로써(12절) 말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그에게 말하기를 원한다. 또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그가 믿었기 때문에 그의 영혼에게 "내 영혼아 네 편안함에 돌아갈지어다"라고 말했다. 비록 사울이 자기에 대해 분노하고, 다윗은 그로 인해 크게 고난을 겪었지만, 다윗은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고, 그의 희망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그 근거가 무엇인지를 그의 친구들에게 말했다. 마음으로 믿는 자들은 저희의 진실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들의 격려를 위하여 입으로 고백해야 한다(롬 10:10; 행 9:19, 20). 영광의 나라를 희망하며 사는 자들은 자기들을 위하여 하늘 나라를 값 주고 사신분께 대한 자기들의 의무를 인정하기를 두려워해서도, 부끄러워해서도 아니 된다(마 10:22).
Ⅱ. 그의 두려움(11절). "내가 큰 곤란을 당하였도다." 그리고 나서 "내가 경겁 중에 이르기를"(다소 성급하게, 경솔하게), 또는 "내가 놀랐을 때에," 내가 소스라쳤을 때에, 즉 '내가 싸울 때에"(등등으로 해석한다), 사울이 나를 추적할 때에,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라 하였도다." 그가 관계를 가졌던 모든 자들, 사울 그리고 그의 모든 정신(廷臣)들은 모두 거짓말쟁이라 하였다. 자기 편에 설 것이라고 생각했던 친구들은 궁정에서 그가 수치를 당할 때에 그를 버리고 모른다고 부인하였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그에게 왕국을 약속했지만 그를 속였던 사무엘을 비난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윗은, "내가 어느날엔가 사울의 손에 망하리라"(삼상 27:1)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 사실들을 주목해 보자.
1. 아무리 위대한 성도의 신앙도 완전하지 못하며, 항상 똑같이 강하고 활동적이 되지는 못한다. 다윗은 "믿고 말했다"(10절). 그러나 이제는 불신앙을 통해서 잘못 말하게 되었다.2. 우리가 크고 쓰라린 고뇌에 처하게 될 때, 특히 그것이 길어진다면 우리는 지치고 낙담하며, 좋지 못한 결과에 대해서는 절망에 빠지기 쉽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사람을 견책하는 데에 무자비하게 되지 말고, 오히려 우리가 곤경에 처해 있을 때 우리 자신들을 주의 깊게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39:1-3).
3. 만일 선한 사람들이 잘못 말한다면, 그것은 시험의 갑작스러움으로 인한 저희의 성급함 때문이지, 악한 사람이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아서"(1:1) '그 형제를 공박하는"(50:19, 20) 것과 같이 고의적이거나 미리 계획한 것은 아니다.
4. 우리는 경겁 중에 잘못 말한 것을 회개로써 다시 철회해야 할 것이다(다윗과 같이, 31:22). 그러면 그것이 우리의 짐으로 남아 있지 않게 될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결코 다윗의 성급한 말이 아니라고 한다. 그는 크게 고통을 겪고 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았고, 또한 그의 팔도 힘있게 하지 못했다. 아니다. 그는 이르기를 "모든 사람은 거짓말장이라 하였도다." "낮은 자들이 공허한 것같이, 높은 자들도 거짓말쟁이다." 그러므로 나의 신뢰는 하나님에게만 있었고, 절망할 수 없었다. 이러한 의미로 사도 바울은 이것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과 비교하여 볼 때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롬 3:4). 모든 사람들은 변하기 쉽고 변덕스럽고 변화를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을 포기하고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Ⅲ. 그의 감사(12절 등). 하나님은 그에게 그의 두려움보다 더 좋은 것을 주셨으며, 은혜롭게도 그의 환난으로부터 그를 건져 내셨다. 여기에서 그는 그것에 대하여 깊이 생각한다.
1. 그는 어떤 보답을 해야 될 것인가를 묻는다(12절). "여호와에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여기에서 그는 말한다.(1)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많은 자비들을 생각한다 - "그가 주신 모든 은혜"를 깊이 생각한다. 이 시편은 어떤 특별한 은혜의 경우에 기록되어진 것이라고 생각된다(6, 7절). 그러나 그는 아마도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은 마음에 받고, 이제는 자기를 향하신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을 크게 높여야 하며 칭송해야 할 것이다.
(2) 그는 그의 감사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 것인가를 염려하고 고심하는 자로서 말한다.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꼬?" 그는 그가 받은 것에 대한 적당한 보답으로 어떤 것을 돌릴 수 있는 지를 알지 못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은총을 받아야 마땅하지 그에게 보답을 드릴 수 있다고 자처해서는 아니 된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감사의 표시로써 기뻐하실 어떤 것을 돌리기로 갈망한다. 그는 하나님께 묻는다. "내가 무엇으로 보답하리이까?" 그는 그것에 대하여 제사장에게 묻고, 친구들에게 묻고, 자문하여, 그의 마음과 교통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많은 은택을 받았다면, 우리는 물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무엇인지를 보답할꼬?"
2. 그는 내가 해야 할 보답이 무엇인지를 결정한다.
(1) 그는 가장 열성적이고 장엄한 자세로써 그의 찬양과 하나님께 대한 기도를 드리기로 결심한다(13, 17절).
[1] "내가 구원의 잔을 들겠나이다. 즉 내가 하나님께 대한 나의 감사의 징표로써 율법에 명시된 전제를 드리겠나이다. 그리고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의 친구들과 더불어 기뻐하겠나이다." 이것은 구원을 기억하면서 마셨기 때문에 "구원의 잔"이라고 불리워졌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때때로 저희의 사식(私食)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잔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손에 두신 잔이라고 이해한다. 그것을 "내가 기꺼이 들겠나이다."
첫째, "고난의 잔을." 많은 유명한 주석가들은 그것이 성도들에게 성별된 쓴 잔이라고 이해하며, 그리하여 그것이 저희에게 구원의 잔이 된다고 이해한다(빌 1:19). "이것이 내 구원에 이르게 할 것이다." 그것은 영적인 건강의 매개이다. 다윗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모형이었으며, 우리가 그와 연합하면 그의 잔이 실로 구원의 잔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제게 많은 은택을 주셨기 때문에, 내 손에 주시는 어떤 잔이라 할지라도 나는 그것을 거절하지 않겠나이다. 그리고 주의 거룩한 뜻을 영접하겠나이다." 여기에서 다윗은 다윗의 자손에 대한 말을 한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나이까?"(요 18:11)
둘째, "위로의 잔을." "나는 하나님께서 그의 손으로부터 내게 주신 은혜를 기꺼이 받고, 그 안에서 그의 사랑을 맛보겠나이다. 그것은 저 세상에서 나의 유업의 몫일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나의 잔이 몫이 되기도 한다."
[2] "내가 감사의 희생을 주께 드리겠나이다." 즉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감사제물을 드리겠나이다(레 7:11, 12 등). 마음이 진실로 감사한 자들은 감사제로 저희의 감사한 심정을 표현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산 제사"로 드려야 할 것이다(롬 12:1; 고후 8:5). 그리고 나서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그의 영광을 위하여 경건과 자비로 행해야 할 것이다. 선을 행하는 것과 성전에 참예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인 것이다(히 13:15, 16). 그리고 이것은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는 것을 수반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관대하게 대하셨다면, 우리는 그 보답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적은 것일지라도 가난한 자들에게 관대해야 할 것이다(16:2, 3). 왜 우리는 우리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가?
[3] "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그는 이미 이것을 약속하였고(2절), 여기서 다시 그것을 반복한다(13절). 그리고 또 다시 되풀이한다(17절). 우리가 우리와 같은 사람에게서 친절을 받는다면, 다시는 그에게 신세를 지지 않겠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기도를 그에 대한 영광으로 받아주시며 기뻐하신다. 그러므로 이전의 자비에 대한 감사로써 우리는 그에게서 더 큰 자비를 찾아야 하며, 끊임없이 그를 불러야 할 것이다.
(2) 그는 항상 하나님을 생명의 보호자로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는 자로서, 선하게 생각하기를 즐긴다(15절).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성도의 죽음이 귀중하기 때문에 그의 죽음으로 사울을 기쁘게 하시지 않으시며, 압살롬이나 다윗의 적들 중 어떤 자에게라도 저희가 아무리 진지하게 그것을 원할지라도 허락치 않으셨다. 다윗이 그의 고통과 위험의 깊은 곳에서도 위로받은 사실은 바로 이러한 진리를 보여 준다. 다윗은 그와 같이 위험에 처해 있는 다른 자들을 위로한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도 그의 성도요, 그의 자비로운 자요, 자비의 사람들인 백성을 갖는다. 그들은 그로부터 자비를 힘 입으며, 그를 위하여 자비를 나타낸다. 하나님의 성도들은 죽을 운명에 놓여 있고 죽어가고 있다. 아니, 저희의 죽음을 갈망하는 자들이 있고, 그리고 모두 그것을 서두르며 일하고 때로는 그들의 죽음처럼 여겨질 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여호와 앞에서 귀중히 여김을 받는다. "저희의 생명"도 그러하다(왕하 1:13). "저희의 피'도 그렇게 귀중하다(72:14). 하나님은 그의 성도들이 죽음에 직면해 있을 때 종종 기적적으로 보호하신다. 그는 저희의 죽음을 특별히 돌아보시며, 모든 상황 가운데서 가장 좋은 것을 명하신다. 저희를 죽이는 자는 누구든지, 그들이 그것을 아주 가볍게 여기는 자일지라도, 심판이 성도들의 피를 흘리게 했다면 그 대가를 크게 치르게 될 것이다(마 23:35). "의로운 자들이 멸망할 때 아무도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마음에 두신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죽게 하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기꺼이 죽게 할 것이다. 우리가 죽음에로 이끌림을 받는다면 우리의 죽음은 하늘에 기록되어 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 귀중한 것과 우리에게도 귀중한 것이 될 것이다.
(3) 그는 그가 사는 날까지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을 의무로 여긴다. "내가 무엇으로 보답할꼬?" 라는 물음을 갖고서 자신을 내어 맡긴다. "여호와여! 나는 진실로 주의 종입니다"(16절). "번제와 희생제를 더욱 드리겠나이다."
[1] 여기에 다윗이 하나님께 대해 공연한 관계가 나타나있다. "나는 주의 종입니다. 나는 그렇게 택함을 받았나이다. 나는 그렇게 되기를 결심했나이다. 나는 주를 예배하면서 살고, 죽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사랑받는 자들을 "그의 성도라고 부르셨다. 그러나 다윗이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했을 때, 그는 "진실로 나는 주의 성도입니다"(자신에게는 너무 높은 칭호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라고 말하지 않고, "나는 주의 종입니다"라고 말했다. 다윗은 왕이었고, 거기서 영광을 받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종이었다.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왕들도 하늘의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이 결코 낮아지는 것이 아니요, 오히려 영광이 된다.
다윗은 여기에서 하나님을 찬사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 가운데서 평범하게 "주님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라고 말한다. 아니다. "여호와여 나는 진실로 주의 종이," "주는 모든 것을 아시며, 주는 나를 아시나이다." 그리고 그것을 반복하며, 그가 그렇게 살아가기로 결심하고, 그렇게 생각함으로써, 기쁨을 취했다. "나는 주의 종이요, 곧 주의 종이라."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주인이 원하는 바를 섬기게 할지라. "진실로 나는 주의 종이라."
[2] 여기에 그러한 관계의 근거가 있다. 두 가지 방법으로 간은 종이 될 수 있다.
첫째, 출생에 의해서이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나는 주의 여종의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것입니다." 하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큰 자비이며, 그것은 또 우리에게 위무가 되며, 자비로 인해 하나님과 더불어 기뻐하게 된다.
둘째, 구속에 의해서이다. 포로에게 해방을 가져 오는 자는 그 포로를 종으로 삼는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의 결박을 푸셨나이다." 나를 에워싼 죽음의 슬픔을 주께서 멀리 해 주셨으며, 나를 구하셨으므로, 나는 주의 종이요, 주의 일을 의무적으로 해야 할 것은 물론 주의 보호를 받을 자격을 가집니다." 주께서 푸신 바로 그 결박은 나를 주께로 더욱 단단히 매이게 할 것입니다"(패트릭 주교).
(4) 그는 그가 드리고자 맹세했던 감사제를 드렸을 뿐만 아니라, 그가 고난에 처해 있을 때 한 다른 모든 약속을 지켰다(14절)."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그리고 다시 "내가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을지라"(18절). 다음 사실을 주의 깊게보자. 맹세는 갚아야만 할 빚이다. 맹세하지 않는 것이 맹세하고 갚지 못하는 것보다 낫다. 다윗은 자기가 맹세한 것을 수행했다.
[1] 즉시 했다. 그는 다른 채무자처럼 빚을 갚는데 더디지 않았고 기일을 연장해 달라고 애걸하지도 않았다. "나는 지금 그 빚을 갚노라"(전 5:4).
[2] 공개적으로 했다. 그는 구석에서 움추려 찬양을 하지 않았다. 하나님께 대한 그의 예배는 모든 여호와의 백성 앞에서 행해진 것이었다. 그의 예비는 겉치레나 과시가 아니었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다른 사람들도 그와 함께 예배에 동참할 수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한 예배였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운집하여 참석하는 장막절의 궁성에서 그의 서언을 갚고자 한다. 그리하여 "예루살렘 가운데서" 예배를 더욱 큰 소리로 진행하고자 하였다. 그러면 신앙심이 더 큰 존중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과 약속(시편 116:41,42)
1. 여기에 여호와의 구원을 향한 다윗의 기도가 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구원이십니다. 나는 스스로 불행합니다. 오직 주만이 나를 행복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주의 구원을 내게 임하게 하소서. 나의 지금의 고통들에서 구하시고, 영원한 구원에의 필요한 자질과 위로의 약속을 주시고, 그것을 미리 맛보게 하심으로써 내게 영원한 구원이 임하게 하소서."2. 다윗은 그러한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은총과 약속을 의지한다. 이것들은 우리의 희망이 세워진 두 개의 기둥이다. 그것들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1) 하나님의 은총. "주의 인자하심과 주의 구원을 내게 임하게 하소서." 우리의 구원은 완전히 하나님의 자비에 속하는 것이지 우리 자신에게 속한 어떤 공적에 의한 것도 아니다. 영원한 생명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유시)로써 기대되어야 할 것이다. "여호와여 내가 신앙으로 주의 자비를 보옵니다. 내게 기도로써, 내게 자비가 임하도록 하여 주소서."
(2) 하나님의 약속. "주의 말씀대로, 주의 약속의 말씀대로 임하게 하소서. 내가 주의 말씀을 신뢰하나이다. 그러므로 약속의 실행을 기대할 수 있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우리의 신뢰는 말씀에 의한 우리의 은택의 조건이 된다.
3. 다윗은 하나님의 은총과 약속이 그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것의 좋은 보증을 갖기를 기대한다. "그리하시면 나를 속이는 것일지 몰라도 하나님에 대한 나의 신뢰로, 내가 나를 훼방하는 자에게 대답할 말이 있사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믿는 자들을 저희의 고난가운데서 구원하실 때, 그는 결과적으로 "가난한 자의 경영을 부끄럽게 하는"(14:6) 자들을 침묵하게 하실 것이다. 성도들의 구원이 완전히 성취될 때에 저희의 훼방은 영원히 침묵으로 화할 것이다. 그러면 논쟁의 여지없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공허하지 않다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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