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 숭배의 허구성(시편 115:1-8)
여기에 자기 자랑과 우상 숭배자들의 비난에 답하기에 충분한 배려가 나타나 있다.
Ⅰ. 자랑하는 것은 여기에서 영원히 배제하고 있다(1절). 우리의 기도와 찬양에는 우리의 업적에 대한 견해가 어떤 자리도 차지하지 못하게 하며,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이 중심을 이루도록 해야할 것이다.
1. 우리는 어떤 자비를 받았으며 어떤 예배를 경험했으며 어떤 성공을 얻었는가? 우리는 그 영광을 우리들 자신에게 돌리지 말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을 위해 어떤 것을 한다고 생각지 말아야 하며, 우리 자신의 의(義)로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것을 받을 자격을 갖추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선한 것은 그의 은총의 능력에 의해서 이뤄지는 것이며, 우리가 갖는 모든 선한 것은 그의 전적인 자비의 은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크신 찬양을 받으실 분이다.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신 8:17)고 말하지 말라. "나의 의로움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내게 이렇게 크고 친절한 일을 베푸셨다고 말하지 말라(신 9:4). 아니다. 우리의 모든 노래는 이러한 겸손한 곡조로 불러져야 할 것이다. "여호와여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그리고 반복해서 "여호와여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시고,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 모든 영광이 주의 이름에 주어지게 하소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향해서 행해진 선한 것은 무엇이든지 그의 자비와 그의 진리를 위해서 이뤄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자비를 영화롭게 하시며, 그의 약속을 성취하시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씌워진 모든 면류관은 "보좌에 앉으신 그"의 발 앞에 던져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곳이 그 마땅한 위치이기 때문이다.2. 우리는 어떤 자비를 추구하고 있으며,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 일심불란(一心不亂)하 기도드리고 있는가? 우리는 기도로써 오직 하나님께로부터만 위로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주어진 우리의 이익보다 그의 영광을 바라보아야 한다. "여호와여 그리하소서. 우리에게 그리 행하소서. 우리가 그 신뢰가 위로를 갖는 것보다 주의 자비와 진리가 그 영광을 받으소서." 이것이 우리의 기도에서 있어야 할 가장 고상하고 궁극적인 목적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주기도문에서 최초의 간구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나머지 모두를 안내하고 있다. 즉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이다. 그 이후에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간구가 나온다. 우리의 기도가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이것 또한 우리를 만족케 한다. 우리는 어떻게 될지라도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요 12:37-28 참조) 해야 할 것이다.
Ⅱ. 열방의 비난이 여기에서 침묵당하며 정당하게 역습되고 있다.
1. 시편 기자는 열방의 비난을 탄식한다(2절). "어찌하여 열방으로 저희 하나님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1) "어찌하여 저희가 그렇게 말하는가? 저희는 하나님이 그의 섭리로 어느 곳에나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며 그의 약속과 은총으로 항상 우리에게 가까이 하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가?"
(2) "어찌하여 하나님은 그들이 그렇게 말하도록 허용하시는가? 아니 왜 이스라엘을 낮추셔서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취향을 허용하시는가? 여호와여 우리의 소생을 위해 나타나소서. 주는 주의 정당성을 입증하시며 주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소서."
2. 그는 저희의 문제에 대한 직접직인 응답을 주신다(3절). "저희가 우리의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가? 우리는 그가 계신 곳을 말 할 수 있다"고.
(1) "천상(天上)의 세계에 그의 영광과 현존이 있다.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 이방의 제신(諸神)들이 있지 않은 하늘에 계신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시야 밖에 계신다. 그러나 그의 위엄이 접근할 수 없는 할지라도 그의 의심스럽다고 말할 수 없는 병이다."
(2) "낮은 세계에 그의 권능의 산물이 있다. 그는 그의 뜻의 계획에 따라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다. 그는 주권적인 지배와 우주적인 무제약적 영향력을 행사하신다. 너희는 그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가? 그는 모든 것의 처음과 나중에 계시며 우리 중에 있는 어떤 자에게서도 멀리 계시지 아니한다."
3. 그는 저희의 물음을 그들에게 되돌리신다. 그들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상 그들이 눈에 보이기 때문에, "열방의 신들은 무엇이냐?"고 묻는다.
(1) 하나님은 저희의 신들이 비록 형체가 없지는 않으나 무의미한 것임을 보여 준다. 처음에 우상 숭배자들은 해와 달을 숭배했다(욥 31:26). 그러한 숭배는 악한 것이었지만, 그들이 지금 행하고 있는 것보다는 덜 악한 것이었다(악인들은 점점 더 악해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신상들을 예배하는 것이었다(4절). 그 우상의 재료는 땅에서 파낸 "은과 금이요"(인간은 그것들을 광산에서 비천하고 더러운 것으로 발견했다 - Herbert), 그것은 돈을 만들기에 적절한 것이지 신을 만들기에 적합한 것은 아니다. 그것을 만든 것은 기술공에 의한 것이었다. 그 우상들은 인간의 헛된 상상의 피조물이며 "사람의 수송물이라." 그러므로 그 안에 어떠한 신성(神性)도 있을 수 없다. 인간이 하나님의 손으로 지어졌다면(실히 그렇게 지으셨으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음이 그의 영광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생각은 터무니없는 것이며, 인간의 형상으로 하나님을 만드는 것보다 하나님께 대한 더 큰 불명예는 없다.
그 주장은 논박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공장이 만든 것이라 참 신이 아니다"(호 8:6). 여기에서 이러한 우상들은 가장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미천한 조롱거리로 나타나 있다. 그것은 어떤 것일 거라고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것은 성전보다도 장난감 상점에 더 적합할 것이며, 어른들이 갖고 놀기 보다는 어린애들의 노리개로서 적당할 것이다. 화가가 조각가와 조형가는 그들이 맡은 부분을 아주 잘 만들었다. 그들은 우상에다가 "입과 눈과 귀와 코와 손과 발"을 만들어 넣었지만, 그 안에는 아무런 생명도 없었고, 감정도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가질 수도 없는 죽은 우상보다 차라리 죽은 시체를 예배하는 편이 훨씬 좋았을 것이다(왜냐하면 시체는 전에 그 안에 생명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상들은 그들을 모욕하는 자들에게 응하여 "말하지 못한다." 능란한 제사장도 그들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바알의 신상(神像)에는 "아무런 음성도 없으며 누구에게도 응답해 주지 아니했다." 바알신상들은 그들 앞에서 예배하는 자들이 엎드리는 것을 "보지 못하며," 더욱이 저희의 짐과 결핍된 상황을 보지 못한다. 그들은 저희의 기도 소리가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듣지 못한다." 그들의 분향이 아무리 강하고 좋은 향기를 낸다고 할지라도 "맡지 못한다."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선물을 "만지지 못하며," 더욱이 저희에게 예배하는 자들에게 어떠한 은사도 베풀 수 없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저희의 손을 미칠 수 없다." 그들은 그들에게 애원하는 자들의 소생을 위해서 "걷지 못하며" 한 발자국도 내딛을 수 없다. 아니 그들은 저희의 "목구멍으로 소리도 못한다." 그들은 생명의 가장 적은 표징이나 징후도 갖고 있지 하며 마치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사제들은 그들이 앞에 있는 것처럼 그들에게 제사하는 척하며 그들을 신(神)으로 부른다.
(2) 이로부터 하나님은 그 숭배자들의 어리석음을 추해 낸다(8절). "우상을 만드는 자"는 저희의 재간을 보여 주며, 그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재치 있는 자들이다. 그러나 신으로 "그것을 의지하는 자"는 저희의 우둔함과 어리석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들은 감정없는 목석같은 것들처럼 "다 그와 같은 것이다." 그들은 창조의 역사에서 진실되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지 못한다." 그들은 모든 말과 언어에서 그의 영광을 선포하는 (19:2, 3) 밤과 낮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들은 이러한 어리석은 꼭두각시를 예배함으로써 그들과 같이 점점 더 자신들을 어리석게 한다. 그리고 영적인 모든 것으로부터 먼 곳에 떨어질 뿐만 아니라, 육욕의 수렁으로 그들 자신들을 침식시키게 된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하나님을 거역하여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버려 두셨다"(롬 1:28). "그것을 의지하는 자"는 매우 터무니없는 행동을 하며 불합리한 일을 행하며 그것들과 같이 무감각하고 무력하고 쓸모없는 자들이 된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 자신이 혼동 속에 빠지게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들은 우리의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지를 알아야 하며 그리하여 저희의 신들이 모두 사라질 때 저희가 모두 이 나서 정신을 차리도록 그들의 우상의 허구성과 우리 하나님의 실존을 밝혀야 할 것이다(렘 10:3-11; 사 44:9 등).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격려됨(시편 115:9-18).
이 대목에서는 다음 교훈을 듣는다.
Ⅰ. 하나님께 신뢰를 두도 집요하게 우리 모두를 권유하고 있다. 우리의 현재의 고통을 야기시키는 열방의 모욕 때문에 그에 대한 우리의 신뢰가 흔들릴 만큼 시험받지 말아야 한다. 죽은 우상을 신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를 의지하는 자"들에게 그는 "도움이시오 방패"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의지해야 한다. 한 집단 이스라엘 국민이 그 공적 이해관계를 위해서나, 이스라엘인 각 개인이 그 사적이해 간계를 위해서나 모든 것을 해결하시는 하나님께 의탁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가장 좋도록 모든 일을 해결하시며, "저희의 도움이시오 방패"가 되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할 것이다.2. 제사장들과 여호와의 방백들과 "안의 집"의 모든 후들은 "여호와를 의지하라"(10절). 그들은 대부분 비방을 받고 적의 공격을 받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특별히 돌보신다. 그들은 최악의 때에도 하나님을 기꺼이 신뢰하며, 그에게 충실한 복종을 한 사실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에게 이 되고 있다.
3. 이스라엘의 후손은 아니지만 "여호와 경외하며" 예배하고 그에게 의무를 양심껏 지키는 개종자들도 "여호와를 의지"하게 하라. 그는 저희를 파멸에 이르게 하거나 저버리지 않으시기 때문이다(11절). 하나님을 경외하는 곳에는 그에 대한 신실한 믿음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그의 말씀을 존경하는 자들은 거기에 의뢰하게 될 것이다.
Ⅱ.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커다란 격려가 나와 있다. 그리고 왜 우리가 안전한 만족 속에서 우리를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가하는 좋은 이유가 나와 있다.
1. 우리가 경험한 것을 생각해 보자(12절). "여호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사" 끊임없이 그리고 특별한 경우에 따라 현저하게 우리를 돌보셨다. 그는 결코 우리를 기억치 않으신 적이 없다. 그는 항상 우리의 처지와 우리의 부족한 상황과 좌의 짐을 기억하시며, 그에게 드리는 우리의 기도를 기억하시며, 우리에게 주신 그의 약속과 그와 우리 사이에 있는 계약 계를 기억하신다. 모든 우리의 위로는 "우리에게로 향하시는 하나님의 생각"으로 나온다. 우리는 비 그를 잊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우리를 생각하신다." 우리가 그를 신뢰하는 일에 전념한다면, 그가 신실하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2. 우리가 기대하는 것을 생각해 보자. 우리를 위해서 그가 행하신 것으로부터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라"는 고백을 할 수 있다. 우리의 "도움과 방"가 되어 주신 그는 장차도 또한 그렇게 되실 것이다. 전에 "우리의 천한 상황에서도 우리를 기억하셨던" 그는 장차도 우리를 잊지 않으실 것이다. 그는 전과 같은 분이시며, 그의 권능과 인자하심도 시종 같으며, 그의 약속도 손상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에 구원하셨던 그가 지금도 구원을 행하시며 또 앞으로 하실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는 우리에게 복을 주실 것이다." 그는 그렇게 하리라고 약속하셨다. 그는 자기의 모든 백성에게 축복을 선포하셨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은 우리에게 선한 것을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 더욱 좋은 것을 행하시는 것이다. 그가 축복하는 자들은 실제로 축복을 받았다. "이스라엘의 집에도 복을 주시리라"고 한 것은 특별한 약속이다. 즉 그는 국가를 축복하실 것이다. 즉 시정적(市政的) 측면에서 백성에겐 복을 주실 것이다. 또 "아론의 집에 복을 주시리라." 즉 교회와 목회가 그의 백성들에게 종교적인 측면에서 복을 줄 것이다. 제사장들은 백성을 축복해 주는 자들이었다. 그것이 저희의 직능이었다(민 6:23).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축복하셨다. 그래서 저희의 축복이 복을 받았다. 아니! 그는 저희가 이스라엘의 집이나 아론의 집에 속해 있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 복을 주시리로다"(13절). 베드로가 그것을 깨닫기 전부터 이것은 사실이었다. 즉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 10:34, 35). 하나님은 젊거나 늙거나 "대소를 무론하고 저희에게 복을 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선한 자들을 위해서 곧 축복을 준비하시며 세상에서 한 초라한 자들에게나 두각을 나타내는 자들에게 축복을 마련하신다. 가장 큰 자도 그의 축복을 필요로 하며, 그를 경외하는 가장 미천한 자에게도 축복은 거부되지 아니한다. 약한 자와 강한 자는 은혜 가운데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이며, 어린 양과 양떼가 될 것이다. 그것은 약속된 것이다(14절). "여호와께서 너희를 더욱 번창케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이 축복하는 자는 번창하게 된다. 최초의 그리고 가장 고대의 축복 중의 하나는 이것이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나님의 축복은 번창케 하신다. 가족을 형성하는 수적인 증가와 재산과 명예를 더하는 부유함의 증가는 물론이요, 특히 하나님의 축복은 영적인 축복도 가져다. 그는 너희에게 지식과 지혜의 증가는 물론 은혜와 거룩함과 기쁨을 번창케 함으로써 축복해 주실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번창케 하시는 축복을 받은 자들은 실로 점점 더 지혜롭고 선해지며, 하나님과 하늘에 더욱 적합하게 된다.
(1) 부단하고 영속적인 증가가 이뤄질 것이라고 약속되었다. "그는 너희를 더욱 번창케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러므로 너희가 살아 있는 한, 너희는 계속 번창케 될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너희는 비추이는 광명처럼 완전한 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다"(잠 4:18).
(2) 상속상의 증가가 이뤄질 것이라고 약속되었다. "너희와 또 너희 자을 더욱 번창하시기를 원하노라." 부모가 저희의 자녀들이 지혜와 강건함에 있어서 번창하는 것을 보는 것은 하나의 위로가 된다.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의 자에게 돌아갈 축복이 있다. "너희는 여호와께 복을 받는 자로다"(15절). 너희의 자손도 그러하리라. "그것들을 보는 모든 자는 그것들을 인정하게 될 것이요, 저희는 여호와께서 축복한 자이로다"(사 59:9). 여호와께 복을 받는 자들은 "여호와를 의지하며" 그를 저희의 "도움과 방패"로써 의지하는 데에 충분한 격려를 갖는다. 왜냐하면 바로 그가 "천지를 지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축복은 아낌없다. 왜냐하면 그는 그 자신이 어떠한 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희는 부요하다. 우리가 그를 경외하고 신뢰할 때는, 모든 것을 명하사 우리를 위해 작용하도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천지를 지으신" 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그를 신뢰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시며, 또 그렇게 행하실 것이다.
Ⅲ. 여기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찬양을 보전하리라는 결심으로 시편을 결론짓는 시편 기자의 모범을 보며, 우리도 하나님을 찬양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1. 하나님은 찬양을 받으실 분이시다(16절). 그는 크게 찬양받으실 분이시다. 왜냐하면(1) 그의 영광이 높으시기 때문이다. 그가 하늘에 예비하신 그의 보좌와 궁성이 얼마나 장엄한가를 보라. "하늘은, 모든 하늘들은 여호와의 하늘이라." 그는 하늘에 있는 더 좋은 세상에서의 모든 빛과 희열과 보화의 정당한 주권자이다. 그리고 그는 그것들을 안전히 소유하시는 분이다. 왜냐하면 그는 무한하게 밝고 행복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2) 그의 인자하심이 크기 때문이다. 그가 "땅을 인생에게 주셨도다." 그가 땅을 창조하실 때 저희의 필요를 위하여 먹을 것과 마실 것과 거할 곳을 마련하셨다. 그는 단지 그 소유장(所有長)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땅은 여호와의 땅이며, 그로부터 충만한 것이 나온다." 그는 이렇게 감사할 줄 모르는 하인들을 포도원으로부터 내어 쫓으며, 그들로부터 세금과 봉사를 기대한다. 그가 저희에게 땅을 주었다고 하더라도, 그의 눈은 저희에게서 떠나지 않으며, 저희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였는지, 그것에 대한 책임을 저희에게 요청하신다.
칼빈(Calvin)은 세속적인 사악한 사람들이 그 당시에 이 성경을 곡해하여 웃음거리로 만들었다고 탄식한다. 실로 우리 세대에도 어떤 사람들은 조롱하면서 하나님이 땅을 인간의 자녀들에게 주었기 때문에 더 이상 돌보지 않으며 관심하지 아니함으로 마음대로 하고 그 가장 좋은 것을 자기들의 몫으로 해도 괜찮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말하자면, 마치 저희에게 먹이처럼 던져진 것이라고 본다.
가능한 한 그것을 포획하게 하라는 것이다. 인간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관대하심과 그로부터 제기되는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의무가 이와 같이 남용되어진다는 것을 슬픈 일이다. 가장 높은 하늘로부터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자들을 살피신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가 그들에게 땅을 주셨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하늘이 주어져 있다는 사실이 더욱 명백하다.
2. 죽은 자는 그를 찬양할 수 없다(17절). "적막한 데 내려가는 자는 아무도 못하리로다." 실제로 영혼은 육체로부터 분리 상태에서 살아 있을 수 있으며, 그 때에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신실한 자의 영혼을 저희가 육에 속한 죄의 짐으로부터 구원받은 후에" 하나님을 찬양하며 끊임없이 그를 찬양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안전한 빛의 세계에까지 올라가며, 끊임없는 일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은 몸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다. 죽음은 시련과 갈등으로 가득찬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끝나게 하며, 땅에서의 우리의 모든 예배에 대한 종말을 고하는 것이다. 무덤은 어두움과 침묵의 땅이며 거기에는 아무런 일도 봉사도 없다. 그들은 저희의 적들의 손으로부터 구출해 줄 것을 하나님께 탄원한다. "여호와여, 저희가 우리를 멸하면 우상들이 들어오며, 당신을 찬양하며 주의 이름을 간직할 자가 없을 것이며, 우상 숭배자들에 대해 증거를 담당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 "죽은 자는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우리는 열심히 이 생의 위로를 위하여 찬양해야 한다. (30:9, 8:10 참조)3.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찬양하는 일에 관심해야 한다(18절). "그러나 우리는, 살아있는 우리는 여호와를 송축하리로다. 우리와 우리 뒤에 올 자들은 모두 이제부터 종말까지 그것을 하리로다. 우리와 우리가 전할 모든 자가 지금부터 영원까지 행할 것이로다. 죽은 자는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우리가 그것을 더욱 부지런하게 할 것이로다."
(1) 다른 사람들은 죽었고, 그래서 저희의 예배에는 종말이 임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모자라는 것을 보충하기 위해 더욱 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것이다. "나의 종 모세는 죽었다. 그러므로 이제 여호수아는 일어나라!"
(2) 우리 자신들도 곧 머지 않아 침묵의 땅에 내려가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여호와를 송축하리로다." 그리고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그의 업적을, 밤이 오기 전에 그를 찬양하기 위해서 우리의 시간과 업무를 증진시켜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밤이 오면 아무도 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12절). 그는 우리를 선대하실 것임으로, 우리는 그를 "송축하며" 찬양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받는 것에 비하면 이것은 너무 빈약하게 보답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우리는 우리 자신들만 그렇게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거기에 참여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여호와를 찬송하라." 우리 함께 그를 찬송하자. 우리가 우리의 처소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의 처소에서 그를 찬양하라. 우리가 잘 때에도 그를 찬양하자. 그는 "영원까지 찬송받으실 분이시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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