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시편 10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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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1

하나님의 존귀(시편 104:1-9)

우리가 어떠한 경건한 예배를 시작할 때에는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잡아야"한다(사 64:7). 다윗이 여기에서 그렇게 한다. "오라 내 영혼아! 너는 어디에 있느냐? 너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 여기에 이뤄진 업적과 좋은 업적 즉 천사들의 업적이 있다. 가장 진지하게 그것을 시작하라. 모든 권세와 재능들이 거기에 참여하고 쓰여지도록 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Ⅰ. 이 대목에서 시편 기자는 천상 세계에 비취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본다. 그것을 않는 것들 중에 하나이지만, 신앙이 그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는 존경과 거룩한 경외로, 감사함으로써 기도를 시작한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광대하시나이다!" 저들의 하나님이 광대한 하나님인 것이 성도들의 기쁨이다. 왕의 위대함은 그의 모든 선한 신민(臣民)들의 자랑이며 즐거움이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위대한 왕들이 저들의 공적인 등장에서 탐내는 모습을 묘사하면서 여러 가지 예로 나타나고 있다. 저들의 마차는(화려한 행렬을 가장 좋아했던 동방의 왕들의 것일지라도) 하나님의 것과 비교할 때, 마치 개똥벌레의 빛을 하나님이 권능으로 나아 갈 때의 태양 빛과 비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1. 왕들은 저들의 옷을 입고 장엄하게 나타난다. 그러면 하나님의 옷은 어떠한가? "주는 귀와 권위를 입으셨나이다"(1절). 하나님은 그의 작품에서 보여졌고, 이것들은 그에게 무한하게 지혜와 선과 모든 위대한 것이 음을 선언한다. 주께서는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신다"(2절). 하나님은 "빛이시다"(요일 1:5). 그리고 빛들의 아버지이시다(약 1:17). 그는 "빛 가운데 거하신다"(딤전 6:16). 그는 그것을 스스로 입으신다. 그의 영광의 거처는 가장 높은 하늘, 즉 첫날에 창조된 빛 가운데 있다(창 1:3). 모든 가시적(可視的)인 존재들 중 빛이 영의 본질에 가장 가깝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것으로 그 자신을 가리기를 즐기시며 인간들이 그들 자신을 가리는 옷에서 나타나는 것과 비슷하게 그 자신을 계시하시기 즐기신다. 그러나 오직 그의 얼굴은 볼 수가 없게 되어 있다.

2. 왕들은 저들의 궁전이나 광야의 누각에서 장엄하게 나타난다. 그러면 하나님의 궁전이나 누각은 어떠한가? 그는 "하늘을 휘장같이 치신다"(2절). 그는 최초로 그가 궁창을 만들었을 때 그렇게 했다. 궁창이란 히브리어에서는 "확장된 것" 또는 "펴진 것"이란 의미로 쓰여진다(창 1:7). 그는 방 사이를 나누는 휘장과 같다. 물을 나누어서 궁창을 지으셨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하신다. 그는 "하늘을 휘장같이 치시며," 저들에게 권력을 펴신다. 그들은 "이 날까지 그의 법도를 계속 지킨다." 하늘의 범위는 침대를 따뜻하게 하는 휘장과 같이 땅에 펼쳐져 있으며, 그 눈부신 빛을 가리기 위해서 우리와 천상 세계 사이를 분리시킨다. 비록 하나님은 "빛으로 그 자신을 가리지만" 우리를 긍휼히 여겨서 "그는 어두움으로 그의 누각을 만드신다." "두꺼운 구름들이 그를 가리고 있다." 이 누각의 광대함은 "하늘과 땅을 충만케 하시는' 그가 얼마나 위대하며, 얼마나 광대한지를 생각하도록 해 준다. 그는 방을 가지고 있으며, 그의 다락방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그것을 가지고 빛으로 "수면 중에 운행하시며," 그 위에 궁창을 지으셨다(3절) 그는 바다와 수면 위에 땅을 세우시고 궁창 바로 밑에 물을 두셨다. 비록 하늘과 바다는 유동체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서 방이 대들보다 서까래로 이뤄지는 것처럼 그들에게 할당된 장소에서 견고하고 굳세게 서 있다. 그의 임재소를 이렇게 건설하고 이와 같이 고정되게 하신 하나님, 얼마나 위대하신가!

3. 왕들은 장엄한 입성 때에 저들의 건장한 말들이 이끄는 위엄 있는 수레를 타고서 광대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그 수레를 강하고 빠르게 타고, 이 세상을 지배한다. 특별한 섭리로 행하고자 하는 때는 어느 때든 멀리 반대쪽에까지 다다르신다. 그는 시에서 율법을 주기 위해서 다볼산에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마 17:5), 수레를 탄 것같이 구름 속에서 하강하셨다. 그리고 그는 (실로 점잖은 걸음으로, 그러나 당당하게) "바람 날개로 걸으신다"(시 18:10, 11 참조). 그는 바람에게 명하시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인도하며, 그 자신의 목적을 이루신다.

4. 왕들은 저들의 사자와 수행원들에게서 장엄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람을 그의 천사들로 삼으셨다"(히 1:7). 그러기에 하나님은 매우 위대하시다. 이것은 천사들보다 그리스도가 우월한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사도에 의해 인용된 구절이다. 여기서는 천사들을 "그의 사자"와 "그의 사역자"로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지배 하에 있으며 그의 처분에 따라 행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람"이며 "화염"이다. 즉 그들은 바람이나 불꽃(또는 그러한 것) 가운데 나타났으며 또는 바람과 같이 재빠르며 불꽃같이 순수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는 그것을 인용했다. 그들은 영적인 존재들이다. 그들이 본성에 따라 적합하게 갖는 수레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들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육신을 입고 있지 않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들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이 가지는 장애물을 가지고 있지 아니하며, 오히려 하나님의 본성인 영광에 더욱 가깝다. 그리고 그들은 불과 같이, "화염과 같이" 밝고 빠르게 타올라 간다. 에스겔의 환상에서는 그들이 "번개의 섬광 같이"(겔 1:14)빠르게 왕래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스랍들 죽 불태우는 자들"이라고 불리워졌다. 그들이 어떤 존재이든지 간에 그들은 하나님이 지으신 자들이며, 그가 여전히 만들고 있는 자들인 것이다. 그들의 존재는 그에게서 파생된 것이며, 그들은 그가 그들에게 주는 존재를 가질 뿐이며 그에 의해서 존재하며, 그는 자기 마음대로 저들을 지으신다.

Ⅱ. 그는 이 낮은 세상에 비치는 하나님의 권능을 바라본다. 그는 그의 영토의 가장 먼 곳까지라도 소홀히 하지 않기 위해서 그의 궁정의 영광만을 취하시지 않는다 .그의 영토는 바다와 육지까지도 포함된다.

1. 그는 땅의 기초를 두었다(5절). 그가 땅의 기초를 "무(無) 위에 세우고"(욥 26:2), ponderibvs librata suis - 즉 그 자신의 무게로 균형을 잡았지만, 그것은 틀림 없는 기초 위에 세워진 것처럼 요동치 않는다. 그는 지구를 그 기초 위에 세웠다. 비록 그것이 인간의 죄에 의해서 위험한 충격을 받고 지옥의 악한 것이 그것을 치더라도 시간의 종말까지, 새 땅으로 바뀌어야 하는 때까지라도 "영원히 요동치 않게 될 것이다."

이 구절은 하몬드 박사(Dr Hammond)가 의해(義解)한 것으로 주시해 볼 가치가 있다. "하나님은 지구를 위해서 이상하게도 한 처소를 고정시켰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이 무거운 몸체이기 때문에 매 분마다 떨어지는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것이 요동치는 것으로 상상될 지라도, 그것은 다른 몸체의 본성과는 달리, 위로 떨어져야 하며 오히려 하늘로 떨어짐으로써 파멸이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2. 그는 바다에 대한 경역(境域)도 고정시켰다. 왜냐하면 그것도 그의 것이기 때문이다.

(1) 그는 창조 때에 바다의 경계를 정했다. 처음에는 무거운 몸체인 지구가 가라앉고, "깊음으로 덮였다." "물들이 산 위에 서게 되었다"(6절). 그래서 계획된 바와 같이 그것은 인간을 위한 거주지가 되기에는 부적합했다. 그러므로 제3일에 하나님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물이 드러나라"(창 1:9)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이러한 명령은, 땅이 물로 덮여 있어서 인간이 거주하기에는 부적합하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아서 땅을 "견책"한 것처럼 말했다. 권능이 이 말씀과 함께 따라갔고, 따라서 그것은 여기에서 "주의 우리 소리"라고 불리워졌다. 그것은 권능의 소리이며 이상한 결과를 산출한다(7절). "주의 견책을 인하여 그들은 도망하며 빨리 갔다"(그들은 바위와 산들에게 저들을 덮으라고 했다).

이것은 다른 경우에 대해서 말해진 것과 같다(77:16). "하나님이여!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 물들이 주를 보고 두려워하였나이다." 유통적인 물체들까지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여호와는 가들에 대해 불만족하셨는가?" 아니다. 그것은 "그의 백성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다"(합 3:8, 13). 여기에서도 그렇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서 그에게 처소를 준비하기 위해서 물을 꾸짖으셨다. 왜냐하면 "사람은 바다의 어족같이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합 1:14). 그들은 숨쉬기 위해서 고기를 취해야 한다. 그러므로 즉시 전속력을 다해 바다가 물러갔다. "그들은 산과 골짜기를 넘어서(우리가 말하는 대로) 산으로 올라갔고 골짜기로 내려갔다"(8절). 그들은 산에서 정지하지도 않고 골짜기에서 머물지도 않을 것이며 오히려 '그들을 위해 주가 정하신 처소로" 최선을 다해 달려가며 거기에서 저들의 안식을 구한다.

요동치는 바다의 추종(追從)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뜻에 복종하는 것을 가르쳐 준다. 모든 피조물 중에 인간만이 고하게 될 것인가? 우리는 저들에게 주어진 거처에서 저들이 은거하며 쉬고 있는 것을 인하여 우리에게 거주의 경계를 정하신 지혜로운 섭리의 처분에 묵종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2) 하나님은 그것을 경계 안에 보전한다(9절). 물은 저들에게 정해진 경계를 넘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그들은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되어 있으며 덮을 수도 없다. 하나님이 저들에게 명하셨기 노아의 홍수 때에 한 번 덮었지만, 다시는 세상을 물로 멸하시지 않기로 약속하시고 저들을 금하셨기 때문에 결코 다시는 물이 덮치지 아니할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그의 권능의 표징으로써 스스로 영광을 드러내며(욥 28:8) 그것을 우리로 하여금 그를 두려워하도록 하는 증거로써 사용하신다(렘 5:22). 올바르게 생각한다면 이것은 온 세상이 여호와와 그의 선하심을 경외하게 해 줄 것이다. 바다의 물을 하나님이 저들을 제한하지 않았다면 곧 땅을 뒤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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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관대하심(시편 104:10-18)

이 땅을 홍수로 넘치게 되는 것으로부터 구원하는 능력의 보호자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다윗은 여기에서 그를 모든 피조물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관대한 은혜를 베푸는 자로서 인정하고 있다.

Ⅰ. 하나님은 저들의 음료수를 위하여 신선한 물을 공급한다. "여호와께서 샘이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신다"(10절). 바다에는 우리가 얻기에 충분한 물이 있으나, 한 방울도 우리를 시원하게 해 주지 못하며 우리는 영원히 목마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바닷물은 모두 소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은혜롭게도 마시기에 적합한 물을 제공하였다. 학자들은 샘의 기원에 대해서 논쟁한다. 그러나 샘들의 2차 요인이었던 모든 것을 여기서는 1차 요인이라고 하고 있다. "골짜기에서 샘이 솟아나게 하시고" 내리는 빗물로 불어나게 하신 이는 바로 하나님이시다. 샘들은 인간과 또 인간에게 직접 유용한 피조물에게만이 아니라 "들의 각 짐승에게도"(11절)마실 물을 주고 있다. 하나님은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또한 생계(生計)를 허락하며, 모든 피조물들을 보호하신다. "들나귀들도," 비록 길들여지지 않고 인간에게 전혀 유용하지 않더라도 "해갈한다." 우리는 그것을 싫어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도 들나귀처럼 태어났으나 더 좋은 것을 공급받기 때문이다 .우리는 맑은 물이 풍부함을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물이 없으면 주거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것의 결핍은 커다란 불행이 됨으로 물의 풍요는 커다란 자비로 여겨져야 한다. 그것이 더 보편적일수록 더 큰 자비가 된다. U년 communis aquarum - 즉 물은 모두에게 공통적인 것이다.

Ⅱ. 하나님은 인간과 짐승을 위해 편리한 양식을 제공한다. 하늘은 기름진 것을 준다. "하늘은 땅에 응하고, 하나님은 하늘에 응한다"(호 2:21). "그는 누각에서 산에 물을 주신다"(13절). 그 누각을 3절에서 말해진 바와 같이 들보로 되어 있으며, 풍부한 소나기를 내릴 수 있는 구름으로 되어 있다. 애굽의 나일강가와 같이 강에 물을 주지 못하는 골짜기는 하늘로부터 내리는 비로 물이 흐르게 된다. 그것은 가나안에서와 같이(신 11:11, 12) "하나님의 강"(시 65:9)이라고 불리운다. 이와 같이 비를 머금고(땅은 그것이 언제 풍부한지 그 때를 안다. 사람이 그럴 수 없다면 그것은 불행이다), 또는 거기에서 나오는 산물 즉 "땅은 그의 업적의 열매로 만족한다." 인간의 이익을 위한 하나님의 업적의 열매는 땅에 대한 만족이다. 이리하여 땅은 그 창조의 목적에 부응한다. 하나님이 땅에서 자라나게 하는 식물은 땅이 만족하는 그의 업적의 열매이다. 그 산물들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가를 관찰해 보자.

1. 가축을 위한 풀이 있고, 풀을 먹고 살지 않는 육식 동물들은 육식을 먹고 산다. 인간을 위한 가축이 있고, 그것은 풀 종류보다 더 좋은 것이다.(그리고 가축과 뿌리의 식사를 경멸해서는 아니 된다). 아니! 그는 "포도주와 기름과 양식을" 풍족히 받는다(15절).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로 하여금 겸손하고 감사하게 하도록 도와 주는 우리의 양식에 관해서 관찰할 수 있다.

(1) 겸손하게 되기 위해서, 우리는 현재 생활의 유지는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의존되어 있음을 생각하자(우리는 은총의 분배에 의해서 살아간다. 우리는 그의 은혜로 존재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두 손은 우리에게 있어서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양식이 모두 땅으로부터 나오며, 우리는 땅에서 나으며 다시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만을 먹게 하는 "빵으로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아니 되며, 영원한 생명에까지 지속되는 양식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도 깊이 관심해야 한다. 또 우리는 이러한 점에서 짐승과 같은 자들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같은 땅, 같은 장소가 가축을 위해서 풀을 제공하며 사람을 위해서는 옥수수를 준다.

(2) 우리는 감사함으로써 다음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1]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만 아니라 우리의 종들에게도 공급하신다는 사실이다. 인간에게 유용한 가축은 특히 보호된다. 인간에게 전혀 필요하지 않은 "젊은 사자는 종종 굶주리고 고통을 당하게" 되지만, 풀은 저들을 위해서 풍족하게 자라게 되어 있다

[2] 우리의 양식이 우리에게 가까이 있으며, 구하기 쉽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땅 위에 거주하면서, 거기에 창고를 가지고 있어서, "먼 데 양식을 가져오는 상인의 배"(잠 31:14)에 의존하지 아니한다.

[3] 우리는 땅의 소산을 단지 필요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장식과 기쁨을 위해서도 취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섬기는 주인님은 그렇게도 고맙다.

첫째, 자연은 그 자체를 지탱해 주고 매일의 쇠퇴를 막는 어떤 것을 요구하고 있는가? 여기에 '사람의 마음을 강하게 하는 빵"이 있으며, 따라서 그것 을"삶의 소재"라고 한다. 그것을 가진 자라면 결핍을 불평하지 말자.

둘째, 자연은 더 나아가서 기뻐할 어떤 것을 바라는가? 여기에 "마음을 기쁘게 하고" 정신을 새롭게 하며 유쾌하게 해 주는 "포도주"가 있다. 그것이 냉정하고 적절하게 사용되어질 때 우리는 우리의 업무를 계속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을 즐거이 마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마음을 넘치도록 오용되며 저들의 의무에 부적합하게 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오히려 그것은 저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며 그들에게 저들의 의무로 재빨리 돌아가게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셋째, 자연은 아직 더욱 익살맞으며 장식을 위한 어떤 것을 역시 바라고 있는가? 여기에 땅으로부터 나오는 바 "사람의 얼굴을 윤택케 하는 기름"이 있다. 그리하여 응모가 청결할 뿐만 아니라 아름다와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더욱 잘 용납될 것이다.

2. 하나님의 섭리는 합당한 양식을 동물들에게 공급할 뿐만 아니라 채소에도 거기에 맞는 것을 공급한다(16절). "여호와의 나무," 인간이 정원이나 공원 그리고 그밖에 다른 경내에서 돌보는 인간의 나무는 물이지만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만 보호되는 광야에서 자라는 하나님의 나무도 "우택이 흡족하다." 그들은 "우택이 흡족하여" 아무런 자양분도 더 원하지 않는다. "레바논의 백향목"은 키가 크고 부피가 커서 자라나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우택이 필요하지만 땅으로부터 풍족한 것을 얻는다. 그것은 "그가 심으신" 나무들이며, 따라서 그가 보호해 주며 흡족하게 공급해 준다. 우리는 이것을 여호와의 심으신 의로운 나무들이 그의 포도원에서 자라나는 것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들은 우택에 흡족하다. 하나님은 자기가 심은 것에 대해서는 물을 주신다.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궁정에서 흥왕하리로다"(92:13).

Ⅲ. 그는 그들이 살기에 적당한 거주지를 주신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저들 자신을 위해서 집을 지을 자유를 주셨고, 가축들로 저들을 봉사하도록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이 더 직접적으로 정착지를 마련해 주는 짐승들도 있다.

1. 새들. 어떤 새들은 본능에 의해서 둥지를 강가의 숲에 짓는다(12절). "공중의 새들이 골짜기에서 솟아나는 물가에 깃들며, 나무가지 사이에서 소리를 발하는도다." 그들은 저들의 능력에 따라 저들의 창조자와 보호자의 영광을 노래한다. 그리고 저들의 노래는 우리의 침묵을 부끄럽게 한다. 우리의 "천부께서 저들을 기르신다.(마 6:26). 그러므로 그들은 편하고 즐거우며 내일을 위한 아무런 염려도 갖지 않는다. 새들은 "땅 위를 나르게끔'(창 1:20) 만들어졌다. 그들은 "그 둥지를" 높은 곳에, 나무 꼭대기에 "만든다"(17절). 마치 자연이 "레바논의 백향목을 심을" 때 이것을 염두에 두어, 새들을 위한 보금자리를 마련한 것처럼 생각게 해 준다. 하늘을 나는 것들은 안식처를 원하지 않는다. 학이 특별나게 언급되어 있다. 아주 높은 '잣나무"가 "학의 집"이며 그 성이다.

2. 작은 짐승의 종류도 있다(18절). 스스로 안전을 찾을 만큼 강하지도 빠르지도 않은 "산양"은 본능적으로 은둔처가 되는 "높은 산들'로 간다. 연약한 동물인 "너구리는 바위에서 피난처를 찾는다." 거기에서 그들은 육식 짐승에게 반항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열등한 동물에게 많은 것을 제공하시는데 그가 그 자신의 백성에게 피난처와 거주지가 되어 주시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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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시편 104:19-30)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라고 가르치는 교훈을 볼 수 있다.

Ⅰ. 낮과 밤의 변화와 부단한 연속, 그리고 저들에 대한 해와 달의 지배로 인하여 찬양하라. 이방인들은 해와 달의 빛과 영향력과 땅에 대한 그것들의 봉사에 감동되어 그것들을 신성한 것으로 예배했다. 그러므로 성서는 그들이 숭배하는 신들은 모두 참된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종들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91절). "여호와께서 달로 절기를 정하셨다." 즉 그것으로 달을 측정하며 사람들의 업무를 위한 절기를 지시하며, 때를 다스리게 하셨다. 달의 참과 변화, 증가와 감소는 정확하게 창조자의 명령을 준수하는 것이다. 해도 그렇게 운행한다. 왜냐하면 해도 마치 지성적인 존재이며 자기가 하는 것을 아는 듯 자기의 하강 시기와 장소를 정확하게 지킨다. 하나님은 이런 것들 속에서 인간의 위로를 생각하셨다.

1. 저녁의 그림자는 밤의 휴식을 돕는다(20절). "주께서 흑암을 지어 밤이 되게 하신다." 그것은 비록 검 지남 자연의 아름다움에 공헌하며 낮의 햇빛에 대한 강조점이 되고 있다. 밤의 보호 아래서 삼림의 모든 짐승은" 낮에는 먹기 두려워했던 것을 먹기 위하여 "기어나온다." 하나님은 "땅의 모든 짐승이 인간을 두려워하며 무서워하도록 만드셨다"(창 9:2). 이것은 인간의 영광과 그 안전에 많은 공헌을 한다 "저물기를 바라며"(욥 24:15) 어두움의 헛된 일과 관계를 갖는 자들은 야수의 성향(性向)과 얼마나 관계가 깊은가를 보라. 또한 이것과 영혼의 어두움인 무지와 우울의 위험을 비교하여 보라. 그렇게 될 때 즉 "밤이 되게 하시니 삼림의 모든 짐승이 기어나온다." 사탄의 시험은 우리를 공격하며 우리를 이용하고 있다. 그래서 "젊은 사자가 그 잡을 것을 좇아 부르짖는다." 박물 학자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 저들의 포효는 겁많은 짐승들에게 저들로부터 도망칠 힘도 정신도 갖지 못하도록 위협하며, 그렇지 않으면 다른 방법으로 해서 쉽게 먹이를 구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께 그 식물을 구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배려나 예측에 의해서 저들을 위해 준비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보다 직접적으로 준비된 것이기 때문이다. 젊은 사자의 부르짖음은 젊은 까마귀의 울음같이 "저들의 먹이를 하나님께 구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하나님은 자연의 언어에 대해, 표독한 짐승의 언어까지도 이렇게 해석하시는가? 그렇다면 그 자신의 백성에게서 "말로 다루는 수 없는 신음소리를' - 그것이 연약하고 상한 것이지만 - 은총의 언어로 은혜롭게 해석하지 않겠는가?

2. 아침의 햇빛은 낮의 일과를 돕는다(25,26절). "해가 돋으면(해가 하강을 아는 바와 같이 그의 돋는 것을 알므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들짐승들은 저들의 휴식을 취하러 간다. 그들이 그들 가운데 어떤 사회를 형성하듯이 "그들은 함께 모여 그 굴혈에 눕는다." 그것은 인생들에게 크나 큰 자비이다. 인생들이 낮 동안에 정직한 여행자가 될 때, 그 짐승들에 의해서 침입당하지 않도록 배려되는 셈이다. 그 동안에는 들에서 짐승들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게으른 자가 낮에 일하지 않으면서, "길에 사자가 있다"고 핑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는 "사람이 나와서 노동하며 수고"하게 된다. 육식수는 두려움으로 기어 나오지만, 사람은 지배하는 자로서 담대하게 나온다. 야수는 해를 입히기 위해서 기어 나오지만 사람은 노동하고 선을 행하기 위해서 나온다. 그 날에 끝내야 할 매일 매일의 일이 있다. 그것은 인간이 매일 아침에 전념해야 하며(햇빛은 우리로 일하게 하기 위해서 떠오르는 것이지 놀라고 떠오르지 않는다), 저녁까지 열심히 해야 할 매일 매일의 일이다. 밤, 곧 "인간이 일할 수 없는" 밤이 오면 그 때는 충분히 휴식할 때가 되는 것이다.

Ⅱ. 바다의 충만하게 됨을 인하여 찬양하자(25,26절). "하나님의 부요가 땅에 가득한 것과 같이" 즉 동물들이 가득 차 있고 잘 공급 받으며 따라서 어떤 피조물이라도 식량의 결핍으로 인하여 죽는 일이 거의 없는 것과 같이, 이 크고 넓은 바다에도 역시 그러하다. 바다는 지구의 불필요한 부분처럼 보이며, 적어도 그것이 차지한 자리 만큼의 유용성은 없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다에게 그 자리를 정해 주셨고, 바다를 인간의 항해를 위해서(먼 나라에 상품을 수송하며 육상 운반보다 더 값싸고 빠르게 상품을 수송하기 위해서 "배가 바다로 다닌다"), 그리고 고기를 위한 저장고가 됨으로써 봉사하도록 만들었다. 하나님은 바다를 공연히 만든 것이 아니라, 땅보다 더 소중하게 만들었다. 그는 "그것이 상속되도록 만드셨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물 속을 다니는 무수한 것들 즉 인간의 맛 좋은 음식에 제공되는 대소 생물이 무수하기 때문이다." 고래는 창조의 역사에서 특별하게 언급되어 있으며(창 1:21), 여기에서는 욥기 1장 21절과 같이 "악어"(leviathan)라고 불리워진다. 악어는 "바다속에서 놀도록' 만들어졌다. 악어는 인간이 "일하러 나가는 것"에 비하여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악어는 동물들이 굴에서 누워있는 데 비하여 아무런 두려움도 갖지 않는다. 그러므로 악어는 바다에서 노린다. 그러나 고상한 능력을 가지고 고상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인간의 자녀가 바다 속에서 놀며 모든시간을 놀이로 소비하는 악어처럼 세상에 보내졌다고 생각하며 산다면 유감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악어는 "바다에서 논다"고 했다. 왜냐하면 악어는 반항하는 모든 공격에 대한 충분한 무장을 했으며 따라서 "창 던짐을 우습게" 여기기 때문이다(욥 41:29).

Ⅲ. 모든 피조물을 위해 만들어진 시절에 따른 풍부한 양식을 인하여(27, 28절)

1. 하나님은 그들에 대한 지혜자이다. 그가 "저들에게 양식을 주신다." 그가 "손을 펴신즉 저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하게 된다." 그는 하늘과 땅의 대군(大群)을 부양한다. 가장 열등한 피조물일지라도 그의 관할 내에 있게 된다. 그는 그의 관대함의 은총으로 손을 펴시며 커다란 일가(一家)를 부양하는 위대하고 선한 가장(家長)이다.

2. 그들은 그를 열심히 인내하며 기다리는 자들이다. 그들은 "모두 그를 기다린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자연적인 본능에 따라서 저들의 양식을 구한다. 자연이 규정한 것보다 다른 양식을 구하지 않으며, 다른 시간에 구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 한때에 구한다. 그들은 그것을 얻기 위해서 저들의 일을 한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들이 모으는 것을" 주시며 저들의 입에 떨어지는 섭리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들이 모으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들은 좋은 것으로 만족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저들을 위해 합당하게 예비하신 것 이상의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풍부함을 불쾌해하고 불만족하게 여기는 것을 부끄럽게 할 것이다.

Ⅳ. 모든 종(種)들의 각 개체가 매일 죽어가고 있지만, 그가 지배하는 절대적인 권세와 주권적인 지배를 인하여 모든 종이 보존됨을 찬양하자.

1. 여기에서 모든 피조물들이 멸하는 것을 보라(29절).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즉 저의 유지력을 철회하고 공급하던 관대하심을 없이 하신즉, "그들은 즉시 떨었다"고 했다. 모든 피조물은 모든 성도가 느끼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의존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다윗은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30:7)라고 말했다. 인간의 죄로 인해서 생긴 이 낮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불만이 모든 공허의 원인이며,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는 짐의 원인이다. "주께서" 그의 손에 있는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저들의 처음 본질이었던 "본 흙으로 돌아간다." 인간의 영혼이 위로 올라가는 것과 같이, 땅으로 내려가는 짐승의 영혼도 하나님의 명령에 달려 있다. 가축의 죽음은 애굽의 재해(災害) 중의 하나였으며, 특히 세상의 홍수에서 이것이 나타났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존속하여 보존되는 것을 보라(30절).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였다." 최초로 그들을 창조한 동일한 영(즉, 동일한 하나님의 뜻과 권능)은 여러 종류의 피조물을 저들의 존재와 장소와 유용성에 따라서 보존한다. 즉 그들의 한 세대가 지나갔지만 다른 세대가 오도록 하기 위해서 때때로 저들이 창조된다. 옛 것 대신에 새 것이 일어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계속적인 창조인 것이다. 이와 같이 지구의 표면은 날마다 햇빛에 의해서(매일 아침 그것을 새롭게 아름답게 하는), 해마다 그 산물에 의해서 새롭게 다. 즉 그것은 봄에 새롭고 풍요하게 되고 겨울에 전혀 다른 얼굴에 띠게 되는 것이다. 세상은 아무 것도 죽지 않는 것처럼 풍부한 피조물들로 가득차 있다. 왜냐하면 죽는 것들의 장소에 다른 것으로 매워지기 때문이다. 이것은(유대인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옛 세상의 재로부터 새 세상이 나온다는 것을 상징해 주는 봄과 같이 부에 적용될 수 있다.

시편 기자는 이러한 이야기 가운데서 돌연히 하나님의 업적에서의 기적을 이야기하고 있다(24절). "여호와여! 주의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그들은 수없이 많고 여러 가지이며, 모든 종류로 이뤄져 있다. 그러나 "주께서 지혜로 저희를 다 지으셨다." 인간들이 많은 일을 할 때 그리고 다른 종류의 많은 일이라 할지라도 모두 지혜로 만들어지며 최고의 정확성을 가지고 있다. 예술 작품을 현미경으로 본다면, 더 정확하게 보면 볼수록 거칠게 나타난다. 그러나 자연의 작품은 이러한 렌즈를 통해서 본다면 더 아름답고 면밀하게 나타난다. 그들은 모두 지혜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이 봉사할 목적 즉 우주적인 군주의 영광을 위해서 우주의 선함을 부응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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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영광(시편 104:31-35)

시편 기자는 이 명상을 다음과 같은 결론 맺고 있다.

Ⅰ. "하나님을 찬양하라." 그것이 시편에서 주로 의도된 것이다.

1. 그는 찬양을 받으실 분이다.

(1) 위대한 하나님으로서, 그리고 대적할 수 없는 완전한 하나님으로서, "여호와의 영광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31절). 그것은 그의 창조와 섭리의 활동 속에서 시간의 종말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것은 성도와 천사들의 경축과 숭배에서 영원까지 계속될 것이다. 인간의 영광은 시들어 가는 것이나 하나님의 영광은 영원까지 지속되는 것이다. 피조물들은 변화하지만 창조자에게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2) 은혜로운 하나님으로서,"여호와는 자기 행사로 인하여 즐거워하실지로다.' 그는 그 자신의 지혜와 선하심의 산물에서 만족하신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그리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종종 회고해 보건대 우리는 우리가 기뻐할 수 없는 것을 행한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의 경영을 불쾌하게 여기며 다시 파멸되기를 원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자기 행사로 인하여 즐거워하신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지혜로 행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관대함과 선행을 우회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그는 그의 은총의 행위에서 기뻐한다.

(3) 전능의 하나님으로서(32절). "여호와의 면전에서" 시내산이 진동하였던 것처럼 "그가 땅을 보신즉 땅이 진동한다." '그가 산들에 접촉하신 즉 연기가 발하도다." 에트나(AEtna)와 같은 화산 또는 타오르는 산들은 교만하여 겸손하지 않은 죄인들에게 집중되는 하나님의 진노에 관한 권능의 표상이다. 만일 분노의 모습과 접촉만으로도 그러한 결과를 가져 온다면 그의 무거운 손의 중량과 내뻗는 그의 팔의 역사는 어찌될 것인가? "누가 그의 분노의 권능을 아는가?" 누가 감히 막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그들이 모두 그를 준봉하기 때문에 그의 업적을 기뻐한다. 그리고 그는 "그를 두려워하고 그의 말씀에 떠는 자들을 기뻐하실 것이다."

2. 시편 기자 자신도 그를 크게 찬양하려고 결심한다(33절). "나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 찬양할 것이며," 그를 여호와로서, 창조주로서 찬양하며 나와 계약하신 하나님 즉 "나의 하나님"께 찬양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뿐만 아니라 "내가 생존한 동안 내가 나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동안"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하나님으로 부터 취하며 그에게 생명의 유지와 존속을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우리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동안,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지상에서 더 삶과 존재를 갖지 아니할 때 우리는 더 좋은 세상에서의 더 좋은 삶과 존재를 갖기를 희망하며 더 좋은 방법으로 더 좋은 삶과 존재를 갖기를 희망하며 더 좋은 방법으로 더 좋은 사귐에서 이러한 일을 하게 되기를 희망한다.

Ⅱ. "스스로 즐거워하라"(34절). "그에 대한 나의 묵상은 즐겁게 될 것이다." 나의 묵상은 확고해지고 과감될 것이다. 그것은 감동될 것이며 감화를 줄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즐거운 것이 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가장 즐거운 것이 될 것이며 그 때 그들은 가장 권능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묵상은 성화된 모든 자에게 아주 즐거운 의무가 된다. "나는 주 안에서 기뻐하게 될 것이다." 그를 찬양하는 것은 내게 기쁨이 될 것이다. 나는 그의 영광에 나아 갈 모든 기회를 기뻐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항상 "주 안에서 기뻐하며," 그에게만 기뻐할 것이다. 나의 모든 즐거움은 그 안에 중심할 것이며 그 안에서 그들은 충만하게 될 것이다.

Ⅲ. "악인들은 두려워하라"(35절). "죄인을 땅에서 소멸하시며 악인을 다시 있지 못하게 하실지로다."

1. 하나님의 권능에 적대하며 그에게 대항하여 싸우는 자들은 확실히 소멸될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굳어진 사람들은 아무도 번영할 수 없다.

2. 하나님의 존재의 증명을 확신시키는 빛에 대해 반역하며 모든 피조물들의 섬기고 있는 그를 섬기기를 거절하는 자들은 마땅히 소멸될 것이다. 하나님이 그의 부요함으로 채운 세상을 자기들의 불경건의 짐 아래서 탄식하게 하는 자들은 그로부터 마땅히 소멸되어야 하며 세상은 그들을 토하여 내게 될 것이다.

3. 진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려고 갈망하는 자들은 그를 모독하며 불명예롭게 하는 자들에 대해서 거룩한 분노를 가지지 않을 수 없으며 저들의 파멸을 전망(展望)하면서 거룩한 만족을 가지며 하나님이 저들에게 주실 영광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것까지도 저들의 찬양의 사항이 되어야 한다.

"악인들이 땅에서 소멸하는 동 안내 영혼이 주를 송축하라. 즉 내가 부정한 일을 행한 자들과 함께 던져지지 않고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에 의해서 저들과 구별되도록 하기 위해서 여호와를 송축한다.

악인을 다시 있지 못하게 할 때, 나는 세상 끝날까지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희망한다. 그러므로 너는 여호와를 송축하라." 나와 결함된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하라. "할렐루야,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기서 "할렐루야"란 말이 처음으로 나온다. 그리고 그것은 여기에서 악인의 파멸의 경우에 나타난 것이다. 우리가 맨마지막으로 할렐루야란 말을 보게 되는 때도 이와 유사한 경우이다. 신약의 바벨론이 소멸될 때 반복되는 노래이다. "할렐루야"(계 19:1, 3, 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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