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시편 10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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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1

즐거운 찬양(시편 103:1-5)

다윗은 여기에서 자신의 심령과 교제하고 있다. 그는 자신에게 말하며, 그 자신의 영혼에 선한 것을 불러 일으키는 일에 결코 어리석지 않다. 왜 그런지 주목해 보자.

Ⅰ. 그는 그 자신에게 찬양의 의무를 불러 일으킨다(1, 2절).

1. 축복받고 송축될 분은 바로 여호와이시다. 왜냐하면 수로(水路)와 연못이 어떠하든지 간에, 모든 선한 것의 원천(源泉)은 그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거룩한 기념에 감사하면서" 우리의 찬양을 봉헌해야 하는 것은 그의 이름 즉 그의 거룩한 이름에 대해서이다.

2. 하나님을 복되다고 해야 할 것은 "영혼"이며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마음 속에서 작용시킬 수 없다면 우리 속에 있는 것, 아니 우리 "속에 있는 모든 것"이 그것에 참여할 수 없다면 우리는 아무런 경건한 활동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일은 내적인 사람, 즉 전인(全人)을 요청한다.

3.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로부터 받은 은택을 감사하는 기억이 있어야 한다.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우리가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을 잊게 된다. 하나님의 모든 은총에는 많은 기억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을 잊는다는 것은 무정한 것이며 부당한 것이 된다. "오 내 영혼아! 너는 확실히 그 모든 것을 잊지 말라. 왜냐하면 저는 어떠한 것도 잊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Ⅱ. 그 자신이 크게 감동되어, 찬양할 풍부한 소재를 열거함을 보자. "오라, 내 영혼아, 하나님이 네게 행하신 일을 기억하라."

1. "하나님은 너의 죄를 용서해 주었다. 그는 용서했고,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신다"(3절). 이것은 첫째로, 용서로 말미암아 우리의 선을 가로막고 있던 죄가 사라졌으며, 따라서 우리에게 선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회복되었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무엇이 진노의 원인이었는지를 생각해 보라. 그것은 죄악이었다 하지만 용서되었다. 얼마나 많은 진노의 원인이 있었던가? 그러나 모두 사해졌다. "그는 우리의 모든 죄악을 사하셨다. "이것은 계속되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우리가 여전히 죄를 짓고 후회하지만, 그는 여전히 용서하신다.

2. "그는 네(얼굴) 모든 병을 고치셨다." 본성의 부패는 곧 영혼의 병이다. 그것은 영혼의 무질서이며 그 죽음을 가져온다. 그런데 이것은 성화(聖化)로 치유된다. 죄가 정화될 때 병도 고쳐진다. 비록 어렵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치유된다. 우리의 범죄가 한 가운데 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치료함으로써 우리의 생명을 구하신다. 이러한 두 가지 일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그의 활동이 완전한 것이지 부분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용서하시는 자비로 죄의 감정을 내어 쫓는다면 그는 새롭게 하시는 은총으로 죄의 권세를 파괴할 것이다. 그리스도가 어떠한 영혼에게 의인(義認)을 베푸는 곳에 성화(聖化)도 주신다(고전 1:30).

3. "그는 위험으로부터 저를 구출해 냈다." 인간은 그의 죄 또는 병뿐만 아니라 그의 적들의 권세에 의해서 위협 속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한다. "그는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4절), 파괴자로부터, 지옥으로부터, 두 번째 사망에서부터 네 생명을 구속하신다. "영혼의 구속은 귀중한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달성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을 행하는 하나님의 은총과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얻게 하는 그의 은혜를 더욱 힘입게 되는 것이다(욥 33:24, 28 참조).

4. "그는 죽음과 파멸에서 저를 구원할 뿐만 아니라, 저에게 영광과 기쁨과 장수로 참되고 완전한 행복을 주신다."

(1) "그는 네게 왕관만이 아니라 그와 못지 않는 진정한 명예와 위대한 영광을 주었다." "그는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신다." 비천한 영혼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 앞에 나아가게 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고귀한 일이 어디 있는가? "이러한 영광을 모든 성도들이 갖는다." 하나님의 은총이 없다면 영광의 면류관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2) "그는 네게 진정한 기쁨을 주었다." "그는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신다"(5절). 영혼에게 만족을 줄 수 있고 영혼의 수용력을 채우며 그 필요를 공급하고 그 요구에 응답할 수 있는 것은 단지 하나님 은혜와 은총뿐이다. 하나님의 지혜 이외에는 "그 재물을 채우게"(잠 8:21) 할 수 없다. 다른 것들은 과식하여도 배부리지 아니하다(전 6:7; 사 55:2)

(3) "그는 네게 장수의 전망과 서약을 주었다.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신다." 독수리는 장수한다. 박물학자에 의하면 독수리가 100세쯤 되면 그 모든 깃털을 떨쳐 버리고(실상 매년 털 가는 시기에 굉장한 정도로 변화하지만) 새로운 깃털이 나오게 되고 따라서 독수리는 다시 젊어진다고 한다. 하나님이 그의 성령의 은총과 위로에 의해서 그의 백성들을 저들의 파멸에서 회복하시고 새로운 생명과 기쁨으로 저들을 채우시고,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과 기쁨을 주시면 저들은 "저들의 소년 때를 회복할 것"(욥 33:25)이라고 말할 것이다.

 

103:2 없음.

 

103:3 없음.

 

103:4 없음.

 

103:5 없음.

 

103:6

하나님의 자비하신 찬양(시편 103:6-18)

지금까지 시편 기자는 단지 그 자신의 경험을 회고해 보고 거기에서 찬양할 소재를 가져왔다. 여기에서는 밖을 보며, 다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도 인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같은 식탁에서 음식을 나누며, 같은 축복을 받는 모든 성도들에게서, 그리고 그들로 인해 즐거워하고 감사해 야하기 때문이다.

Ⅰ. 진정으로 하나님은 모든 자들에게 선하시다. 그는 자기 백성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압박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판단하신다"(6절). 그는 일반 섭리에서도 무죄한 자의 후원자이며 압박자에게 해를 입는 자들의 호소를 들으실 것이다. 교만한 자를 비천하게 하며 무력한 자를 돕는 것이 그의 영광이다.

Ⅱ.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마음이 청결하고 정직한 이스라엘 사람 모두에게 특별히 선하시다. 그는 당시 살고 있던 자들에게 막대기로 뿐만이 아니라, 오고 오는 세대에 그의 붓으로 "그 행위를 모세에게, 그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7절). 하나님의 계시는 교회가 축복받는 제일의 가장 큰 은총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은 그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함으로써 우리를 그에게 돌아가게 하며, 우리에게 지식을 줌으로써 모든 선한 것을 우리에게 준다. 하나님은 "그 행위와 행사를(즉, 그의 성품과 인생들을 대하여 방법을) 알리셨다." 그로 인하여 인생들은 그를 인식하는 방법과 그로부터 기대할 것을 알게 되었다(하몬드 박사는 그렇게 풀이하고 있다). 그의 "행위"에 의해서 우리는 그의 섭리와 그가 우리에게 요청하는 길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의 "행사"에 의해서(그 말이 의미하는 것과 같이) 또는 그의 계획에 의해서 그의 약속과 그가 우리와 함께 하고자 하는 목적을 이해랄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공정하게 대하신다.

1. 그는 우리에 대해서 결코 포악하거나 혹독하지 않으며, 오히려 항상 부드럽고 연민으로 가득 차서 용서하려고 하는 분이다.

(1) 그렇게 하는 것은 그의 상품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다"(8절). 이것은 호렙산에서 모세에게 알리셨던 것이다(출 34:6, 7). 그 때에 그는 이와 같이 자기 이름을 반포하였다. 하나님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소서"(출 33:13)하는 모세의 간구에 응답하였다.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는 것이 나의 길이라고 말했다.

[1] 하나님은 곧 화를 내지 아니한다. 그는 "노하기를 더디 하신다'(8절). 그는 우리가 잘못한 것을 극단적으로 징책하거나 우리에 대해서 곧장 채찍을 가하려 하지 아니한다. 그는 괘씸한 자들을 오래 참으시며 벌하기를 연기하시며 그리하여 회개할 여유를 주고 그의 율법의 판결을 급하지 않게 수행하신다. 만일 그가 "인자하심이 풍부하신 분"이 아니고, 더욱이 "자비의 아버지"가 아니라면, 그는 이와 같이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분"이 아닌 것이다.

[2] 그는 노를 오랫 동안 품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비록 우리가 항상 죄를 짓고 경책받을 만하지만, "그는 항상 경책지 아니 하시기 때문이다"(9절). 그가 우리의 죄로 인하여 섭리자의 질책으로 우리에게 불만을 표시하고 우리 자신의 양심의 가책을 나타내고 결국 이러한 것들로 말미암아 슬픔이 야기되지만, 그는 동정심을 가질 것이며 우리를 고통과 두려움 속에 항상 두지는 아니한다. 그것은 우리의 죄를 위해서가 아니라 속박의 영 다음에 양자(養子)의 영을 주려고 하기 때문인 것이다. 하나님은 항상 질책하며 모든 경우에 질책으로 처리하며 그칠 때를 모르는 자들과 얼마나 다른가? 하나님이 그렇게 대하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는 그의 백성에 대해서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신다." 오히려 그는 "영원한 자비"로 저들을 모으실 것이다(사 54:8; 57:16).

(2) 우리는 그에게서 그러한 성품을 발견한다. 우리로서는 "그가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을 승인해야 한다(10절). 성서는 하나님의 자비의 풍부하심을 말한다. 우리는 그것이 사실이며 우리가 그것을 경험했다는 확증을 내어 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인내의 하나님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벌써 예전에 지옥에 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다." 죄가 있다는 것을 아는 자들은 그렇게 말할 것이다. 그는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심판을 가하지 않고, 우리가 상실한 위로를 송두리째 빼앗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의 과중함을 생각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참으심은 우리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신다"(롬 2:4).

2. 그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다. "나의 죄악"(3절) 뿐만 아니라 "우리 죄과"도 용서하셨다(12절).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자비로 인하여 위로받을 수 있게 된 것은 우리의 은택이지만, 다른 자들도 그로 말미암아 은택을 입게 됨으로, 우리는 그에게 영광을 돌려야 한다.

(1) 하나님의 초월적인 자비의 풍성함을 보자(11절).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너무 높아서 땅은 광활한 공간에서의 한 점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자비는 그를 가장 두려워하는 자들의 공로 위에 있으며, 그들보다 너무 초월하고 높이 있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는 전혀 비교될 것이 없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의 의무를 최대한으로 이행했더라도 하나님의 은총을 마치 빚받듯이 요청할 수는 절대로 없다. 그러므로 야곱의 모든 족속은 "하나님의 모든 은총을 조그만 이라도" 소유함으로써 하나님과 연합하게 되었다(창 32:10). 이와 같이 하나님의 자비는 "그를 두려워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큰 것이나 그와 대적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여호와와 그의 선하심을 두려워해야 한다.

(2) 그의 용서의 완전함과 그의 자비의 풍요한 증거를 보자(12절). "동이 서에서 먼 것같다"[세상의 동과 서는 너무나도 광대하다. 그래서 지리학자들은 그 경도(經度)로 그 길을 알려 준다],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다." 다시는 우리가 죄괴에 놓이지 않고, 우리에 대해서 심판이 내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죄과를 멀리 옮기셨다. 믿는 자들의 죄는 더 이상 기억되지 아니하며, 그것에 대해 언급되지 아니할 것이다. 찾고자 해도 그것들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철저하게 죄악을 버린다면, 하나님은 철저하게 그 죄악을 용서할 것이다.

3. 그는 우리의 슬픔을 불쌍히 여겼다(13, 14절).

(1) 그가 불쌍히 여기는 자들 - "그를 두려워하는 자들," 즉 이 세상에서 계속적으로 겪는 비애 때문에 동정의 대상이 되는 모든 선한 백성이 누구인지를 보자. 또 그가 불쌍히 여기는 자는 "영자의 영"은 받지 않았으나 "그의 말씀에 떠는 자"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그는 그들을 "불쌍히 여긴다"(렘 31:18, 20).

(2) 얼마나 불쌍히 여기는가? 그는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불쌍히 여기며, 그들에게 때에 따라서 신을 행하신다. 하나님은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 대해서 아버지이며 저들을 자녀로 삼는다. 그리고 그는 저들에게 아버지로서 부드럽게 대한다. 아버지는 지식이 연약한 그의 자녀들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을 지도하신다. 저들이 완고할 때 불쌍히 여기고 참으시며, 그들이 병에 걸렸을 때 불쌍히 여기고 저들을 위로한다(사 66:13). 저들이 넘어졌을 때 그들이 다시 일어나도록 도우며, 저들이 복종하지 않고 대항할 때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해 주며, 저들이 악을 행할 때에 불쌍히 여겨 그것을 고쳐 주신다. 이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

(3) 왜 그가 불쌍히 여기시는가? - 그것은 바로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의 체질을 아실 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가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이다. 그가 우리를 진토로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의 구조뿐만이 아니라 체질에 의해서도 "인간이 진토임을 기억하신다." "너는 흙이라." 그는 우리 육체의 약함과 우리 영혼의 어리석음이 얼마인가를 아시며 얼마나 참을성이 없는지도 아신다. 따라서 바로 여기에서 그의 불쌍히 여기는 친절이 나타나는 것이다.

4. 그는 그의 계약의 자비를 영속시켰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연약함을 위하여 생기를 공급해 주었다(15-18절).

(1) 여기에서 인간의 생이 얼마나 짧으며 얼마나 불확정한 존속인지를 살펴 보라! 아무리 위대한 사람도, 아무리 선한 사람도 그 생명은 짧다. 저들의 위대함도 선함도 저들의 속성을 변경시킬 수 없다. 인간에게 있어서 그의 날들은 땅에서 자라나는 풀과 같다. 즉 땅 위에 자라나서 곧 시들고 다시 땅으로 돌아가는 풀과 같은 것이다(사 40:6, 7 참조). 인간은 생애 최고시기에 있어서도 단지 풀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은 번창하고 유쾌한 것 같으나, 기껏해야 풀과 약간 구별되는 곧 시들어 버리는 "들의 꽃과 같다." 정원의 꽃은 주로 더 좋게 선택될 것이며 가치있는 것이지만 본질상 곧 시들어 버리는 것이나, 정원의 벽과 정원사의 손질에 의해서 보호되기 때문에 오랫동안 지탱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들의 꽃"(인생은 여기에 비유되고 있다)은 저절로 시들어 버릴 뿐만 아니라 추운 돌풍에 노출되며 들짐승에 의해서 꺾여져 짓밟히기 쉽다. 인생은 저절로 쇠약해질 뿐만 아니라 그 아간에 수천 가지의 사건들을 겪게 된다 .꽃은 강풍이 지나가고 나면 보이지 아니하며, 바람이 통과하고 나면 꽃도 찾아 볼 수 없게 된다. 꽃은 꼭대기에 달려 있어서 잎사귀가 떨어지면 다시 땅으로 떨어져서, 이제는 아무도 "다시 알지 못한다." 그러한 것이 인생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생각하시고 그를 불쌍히 여긴다. 인간은 이것을 스스로 생각해야 하며 이 세상을 비천하게 여기며 다른 것들도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한다.

(2) 우리는 여기에서 그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가 얼마나 길게 지속되는지를 볼 수 있다(17, 18절). 그것은 사람들보다 더 오래 지속되며 그 백성이 현재보다 더 오래 남아 있게 된다.

[1] 이러한 자비를 받는 자들에 관한 서술을 보자. 저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며, 본래 진실된 경건한 사람들이다. 첫째, 그들은 신앙의 삶을 살아간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계약을 지키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계약을 받고서 유지시키며 굳세게 잡는다. 그들은 그것을 보화로 여겨 간직하며, 상속물로 여겨 보존하며, 그것을 온 세상과도 바꾸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그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둘째, 그들은 복종의 삶을 살아간다. 그들은 그들에게 행하라 하신 계명들을 기억한다. 않으면 그들은 그의 계약을 지키지 않는 것이 된다. 하나님의 약속의 은택을 입은 자들만이 그의 법도를 기억한다. "좋은 지각"(시 111:10)은 물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자들과 "하나님의 법도를 기억하며" 말로서가 아니라 "그 법도를 행하며" 그 계명들에 의해서 지배받는 자들을 보라!



[2] 이러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자비의 존속을 보자. 그것은 지상에서의 저들의 생보다 더 오랫 동안 지속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의 생이 비록 짧다 하더라도 죽음 그 자체가 저들에게는 아무런 박탈도 침해도 아니며 오히려 더 없는 기쁨이므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자비는 삶보다 더 좋은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비는 삶(생)보다 더 오래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첫째, 불멸의 것인 저들의 영혼에 대해서 그 영혼들에게 여호와의 자비는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이른다." 여호와의 자비는 자비를 작정하신 영원 전부터 그 결과로 영원까지 지속되며, 세상이 있기 전 저들을 선택하신 때부터 이 세상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 저들을 영화롭게 할 때까지 지속된다. 왜냐하면 저들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고"(엡 1:11) 영생에 이르도록 여호와의 자비와 주 예수의 자비를 받기 때문이다.

둘째, 종말까지 지켜질 자들의 자에도 대해서(시 102:28). 그의 약속 즉 "그의 의는 자존대대에 미칠 것이다"한 그 약속은 신실하다. 만일 자신들이 그들의 선조들의 경건의 발자취를 따른다면 그리고 저들이 행한 대로 "그 언약을 지킨다면," 자비는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저들에게 보존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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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의 의무(시편 103:19-22)

Ⅰ. 여기에 보편적인 섭리의 교리가 들어 있다(19절). 그는 자기의 특수한 백성들(선민)의 행복을 약속과 계약에 의해서 보증하셨다. 그러나 인류의 질서와 세상 전반에 걸친 질서는 일반 섭리에 의해서 보증하신다. "여호께에서 그 보좌를 세우시는데," 그것은 영광의 보좌이며 통치의 보좌이다. 모든 것을 지으신 그는 모든 것을 다스리며 권능의 말씀으로 지배하신다. 그는 자기 보좌가 흔들리지 않도록 예비하시고 굳게 세우셨다. 그는 모든 것에 대해서 그의 통치의 규준을 미리 정하셨다. 그리고 그 자신의 뜻의 섭리에 따라 모든 것을 행하신다. 그는 그것을 우리 위에 있고 시야 밖에 있는 "하늘에 세우셨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의 보좌 앞을 가리고 자기 구름을 그 위에 펴신다(욥 26:9)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흑암 중에서 심판하시는 분이다"(욥 22:13). 그러므로 "하늘이 다스리신다"고 했으며(단 4:26), 그래서 우리는 보이는 하늘이 이 세상을 주관하는 것으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욥 38:33; 창 1:16). 그러나 비록 하나님의 보좌가 하늘에 있으며 거기에 그의 궁정을 두고 있다 하더라도, 그리고 우리가 그쪽으로 그에게 향하게 된다고 해도 "그의 왕국은 만유를 통치하신다." 그는 이 낮은 세상의 모든 거민들과 모든 일들을 인식하시며, 그의 뜻의 섭리와 그의 영광에 따라서 모든 사람들과 사물들을 다스리신다(단 4:35). 그의 왕국은 모든 들과 모든 왕국들을 지배하니, 그로부터 지배되지 않는 것이 없다.

Ⅱ. 보편적인 찬양의 의무가 그로부터 나타난다. 만일 모든 것이 하나님 지배 하에 있다면 모든 것은 그에게 경의를 표해야 한다.

1. 거룩한 천사들로 하여금 그를 찬양하게 하라(20, 21절). "너희 천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그리고 또한 "여호와를 봉사하며 그 뜻을 해하는 너희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다윗은 그 자신이 스스로 고무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하고, 결말에게 그는 천사들로 하여금 송축하도록 요청한다. 천사들에게는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해야 할 필요가 없으므로 그들은 계속해서 찬양할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거룩한 천사들도 하나님을 경배해야 마땅하다고 하는 고귀한 자기 생각을 그렇게 표현했다. 이리하여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도 의무를 자극하고 있다. 그것이 천사의 업무라는 사실이 그 의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의 다윗 자신의 약함과 결점에도 불구하고 다윗에게 위로를 준다는 하나님의 집에 거주하며, 계속해서 그를 찬양하는 천사들의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거룩한 천사들은 거룩한 하나님을 영화롭게 수종드는 자들이다.

(1) 그들은 그들이 처한 지위에 얼마나 잘 적합할지를 보자. 천사들은 유능한 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힘이 특출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힘이 강건하며, 커다란 것들을 옮길 수 있으며, 걱정없이 저들의 업무를 지킬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대로 기꺼이 일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할 일을 기꺼이 알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호와의 말씀의 소리를 듣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저들의 위대하신 여호와로부터 명령과 지시를 기대하며 서 있으며, '그의 얼굴을 항 상보고 있다"(마 18:10). 그리하여 그들은 그의 마음을 가장 잘 알게 된다. 그들은 그들의 임무를 기꺼이 한다. 그들은 "그의 뜻을 행한다"(20절). 그들은 "여호와를 송축한다"(21절). 그들은 하나님의 어떠한 계명에도 저항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들 자신에게 그 말씀들을 수행하도록 빨리 자세를 취한다. 그들은 지연하지 않으며, 신속하게 난다. 그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서" 또는 "그의 말씀의 음성을 듣자마자 그의 말씀을 이룬다." "순종하는 것은 제사를 행하는 것보다 낫다." 왜냐하면 천사들은 순종하고 있는 것이지 제사를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 저들의 봉사가 무엇인지를 보자. 그들은 "그의 천사"이며 "그에게 속한 천군"이다. 그의 것이라 함은 하나님은 저들을 직접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또 그의 것이라 함은 그가 저들을 비록 필요하지 에도 불구하고 부르셨기 때문이다. 또 그는 그가 저들의 주인이며 여호와이시기 때문이다. 저들은 그에게 속해 있으며 그는 저들을 마음대로 부린다. 모든 피조물은 그의 종이지, 그의 영광의 현존에 참예하는 천사들이 아니다. 병사와 선원 그리고 모든 신하들은 왕을 섬기지만 정신(廷臣)이나 주장관이나 궁내관(宮內官)같이 섬기지는 아니한다.

[1] 천사들은 때때로 이 낮은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긴다. 그들은 "그의 말씀을 이루며" 그의 심부름을 위해서 가며(단 9:21) 그의 싸움을 싸우며(왕하 6:17) 그의 백성의 후사를 위하여 섬긴다(히 1:14).

[2] 그들은 윗 세상에서 "그를 계속적으로 찬양한다." 그들은 때맞추어 찬양하기 시작했다(욥 38:7). 그것은 그들이 "밤낮쉬지 않고"(계 9:8) 하는 업무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수종드는 자들을 가졌다는 것은 그의 영광이며, 더욱이 그들을 필요로 하지도 않고 그들에 의해서 은택을 입지도 않는 것은 더한 그의 영광이다.

2.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 다스리는 모든 곳에 있는 자들로 하여금 그를 송축하게 하라"(22절). 왜냐하면 그들은 그의 작품이며, 그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은 그에게서 성호와 찬양을 드리도록 지어졌고 다스려지기 때문이다. 그가 지으신 모든 것과 세상 모든 곳에 있는 인간의 자녀들로 하여금 모두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라. 물론 그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열등한 피조물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 저들로 하여금 비록 그를 실제적으로 찬양할 수 없더라도 객관적으로 그를 찬양하게 하라(145:10).

하지만 이러한 모든 것이 다윗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면제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이 연주회에서 일익을 담당함으로써 더 즐겁게 찬양하도록 자극시켜 주는 것이 된다. 그는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1절)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결을 맺는다. 하나님을 송축하는 것과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은 우리의 모든 예배의 알파요 오메가임에 틀림 없다. 그는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시작했다. 그가 그의 영광에 대해서 이러한 최고로 훌륭한 찬송을 기록하고 노래했을 때 그는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시작했다. 그가 그의 영광에 대해서 이러한 최고로 훌륭한 찬송을 기록하고 노래했을 때 그는 "내 영혼아, 너는 여호와를 찬양하였다. 앉아라. 그리고 쉬라"고 말하지 않고,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반복하여 말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 이전에 많은 것을 행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는 더욱 여호와를 찬양하도록 우리 자신들을 고무시켜야 한다.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은 결코 없어져 버리는 주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작업이 우리가 하늘에 들려 올라갈 때까지 결코 중단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아니되며, 그것은 영원까지 행해져야 하는 것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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