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시편 102장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102:1

곤고한 자의 기도(시편 102:1-11)

이 시편의 표제는 매우 주목해 볼 만한 것이다. 그 표제는 "곤고한 자의 기도"이다. 이 시는 스스로 곤고하며, 또 교회와 더불어 함께 근심하는 사람에 의해서 저작되었다. 그리고 다른 어떤 사람보다 공공의 정신으로 무거운 영혼의 고뇌를 가진 사람에 의해 쓰여졌다. 이 시편은 곤고한 상태에 적합하며, 그와 같은 고뇌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사용을 위해 씌어진 것이다. 왜냐하면 "앞서 쓰여진 것은 무어시든지" 계획적으로 "우리의 사용을 위해서 된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와도 마찬가지로 여기서는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우리에게서 간구를 이끌어 내며, 우리의 입에 말씀을 넣어 준다. "너는 말씀을 가지고 오라"(호 14,2). 여기에 곤고한 자의 손에 놓인 기도가 있다. 저들로 하여금 손으로가 아니라 마음으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도록 하라. 다음 사실을 주목해 보자.

1. 이 세상에서는 많은 성도들이 종종 큰 고통을 받게 된다.

2. 심지어는 선한 사람들까지도 고뇌로 거의 압도당하며, 곤고로 인하여 나약해지기 쉽다.

3. 우리의 처지가 곤고하며 우리의 영혼이 압도당할 때는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요 유익이다. 기도로써 "그 근심을 여호와 앞에 토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접근할 자유는 물론 그 앞에서 말할 자유를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것은 곤고한 자는 탄식과 비애의 겸손한 표현에 의해서 그 무거운 짐을 쉽게 벗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표현이 여기에 나타나 있다.

Ⅰ. 시편 기자는 자기 고뇌와 고뇌 중의 자기의 간구를 알아달라고 하나님께 겸손하게 간청한다(1,2절)

1. 우리가 곤고한 중에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은혜롭게 듣고 돌보신다. 만일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서 기뻐받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응답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가 "주께 상달되도록" 해야 하며, 심지어는 "그의 귀에"(시 18:6) 들려지도록 힘써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기도를 드리고 그것과 함께 우리의 영혼도 그려야 한다.

2. 우리가 곤고한 중에 기도할 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은혜롭게 들으실 것이라는 우리의 희망이 된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를 찾으라고 명하시고 또 약속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쓸 데 없이 찾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믿음의 기도"를 드린다면, 우리는 믿음으로써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1) "주께서 내게 나타나시며,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주께서 나를 빨리 자유하게 하시지 않더라도 나로 하여금 주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소서. 나를 향한 주의 손길의 역사를 볼 수는 없다 하더라도, 나를 향한 주의 얼굴의 미소를 보게 하소서."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는 것은 선한 사람에게는 비록 그가 번영 가운데 있더라도 근심이 되는 일이다(시 30:7,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곤경에 처했을 때 하나님이 그의 얼굴을 가리운다면 그 경우는 실로 슬플 것이다.

(2) "나를 위해서 주께서 나타나소서. 내 기도를 들으실 뿐만 아니라 응답도 하소서. 내가 부족하여 찾아 헤멜 때 구원을 허락하소서.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근심이 우리를 혹독하게 억누를 때는, 이와 같이 겸손과 인내로써 기도하도록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허락하셨다.

Ⅱ. 그는 환난으로 인해서 처한 곤란한 상태에 대해서 슬픈 탄식을 한다.

1. 그의 몸은 야위고 쇠약해졌다. 그는 피부와 뼈뿐인 완전한 해골이 되었다. 번영과 기쁨은 뼈가 강건하게 되고 "뼈가 풀같이 번창하는" 것으로 표현한 것처럼, 여기서는 그 반대로 곤고와 비애가 표현되었다. "내 뼈가 숯불처럼 탔나이다"(2절). "나의 살이 뼈에 붙었나이다"(5절). "내 마음이 풀같이 쇠잔하였나이다"(4절). 이것은 주요 기관(器官)에도 영향을 미치며, 각 부분이 의식할 수 있는 쇠약을 가져 온다. "내가 근심의 뜨거운 열기로 시들은 풀의 쇠잔함 같으니이다"(11절). 이와 같이 신체적인 병으로 이상이 생기면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지 말자. 육체가 풀과 같이 약하고 시든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니다.

2. 그는 매우 서럽고 슬픈 자가 되었다. 그는 너무 근심된 생각들로 가득 차서 "음식 먹기도 잊었다"(4절). 그는 필요한 음식에도 식욕이 떨어졌으며, 맛볼 수도 없었다. 하나님이 얼굴을 가릴 때는 정신의 기쁨이 시든다. 그는 지나치게 압박당한 자와 같이 항상 탄식하고 신음해서(5절) 기력이 소모되어 지쳐버렸다. 그는 서글픈 사람같이 고독에 휩싸였다. 그의 친구들은 그를 버리고 조롱했다. 그는 동료로부터 거의 소외되었다. "나는 슬픈 소리를 지르는 광야의 당아새 같으며, 황폐한 건물에 기거하기를 좋아하는 황폐한 곳의 부엉이같이 되었다(6절).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에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 나는 다락방에서 살며 거기에서 나의 근심거리를 숙고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내 자신을 한탄한다." 슬픔에 처할 때에 이와 같이 행하는 자들은 저들 스스로 만족을 얻게 된다. 그러나 저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며, 행할 바를 모르며, 그렇게 한다고 어떤 유익이 올는지도 모른다. 곤고할 때, 우리들은 환자 앉아서 우리의 길을 생각하여야 할 것이지만(애 3:28) 심한 비애에 빠져서 홀로 앉아 있어서는 아니 된다.

3. 그는 그의 적들에게 악평을 들었다. 그의 친구들이 그에게서 떠났을 때 그의 적들이 그를 에워쌌다. '나의 적들이 종일 나를 훼방하나이다"(8절). 그렇게 함으로써 저에게 고민거리를 만들어 주고(현명한 마음은 비난을 후회한다). 사람들 앞에서 그를 조롱하려 한다. 그들이 다른 방도로 그에게 접근할 수 없을 때, 그들은 이러한 화살 같은 혹독한 말을 그에게 쓴다. 여기에 보면 그들은 지칠 줄 모르고 그것을 "종일"했다. 그것은 끊임없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의 적들은 매우 난폭했다. 그들은 "나를 대하여 미칠 듯이 날뛰는 자이며" 매우 완강하며 무자비한 자들이다. 저들은 바울을 죽이려고 맹세한 유대인들처럼 "나를 가리켜 맹세한다." 또한 나의 생명을 앗아가려는 고소인처럼 "나를 가리켜 맹세한다."

4. 그는 하나님의 불쾌의 표로 인하여 금식하고 눈물을 흘렸다(9, 10절). "나는 빵을 먹는 대신에 재를 양식같이 먹으며, 먼지와 재 가운데 누워서 나의 음료에 눈물을 섞었다. 내가 마심으로 원기를 회복하고자 했을 때 오히려 눈물을 마셨다."

그는 "주의 분과 노를 인함이라"(절)고 말한다. 그것은 그에게 주어진 곤고 자체라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곤고의 원인으로 이해한 것이다. 이것은 바로 고뇌와 불행 중의 "쑥과 쓸개"와 같은 것이었다. 우리가 무엇을 조각내려할 때 땅에 던지는 것과 같이, "주께서 나를 드셨다가 던지셨나이다." 처음에 우리는 우리가 그것을 더욱 격렬하게 집어 던질 수 있도록 들어 올린다. 혹은 "당신은 나를 영광과 기쁨과 비범한 번영 중에 나를 먼저 들어 올렸나이다. 그러나 그러한 추억은 현재의 비애를 악화시키고 그것을 더욱 애처롭게 할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들어올리고 내리 치시는 하나님의 손을 보아야한다. 그리고 주시기도 하고 빼았으시기도 하는 여호와의 이름이 복되시다고 말해야 한다.

5. 그는 자신을 죽어가는 자로서 간주했다. "내 날이 재빨리 사라지는 연기같이 소멸하나이다."(3절). 또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 "연기같이" 소멸된다. 나의 날들은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11절), 밤의 그림자 또는 다가 오는 밤의 전조(前兆)와 같다.

비록 이 시편이 시편 기자의 개인적 재난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보여서 특정한 곤고한 사람을 위한 기도에 적절한 것 같지만 그것은 시편 기자가 그 자신이 공적인 비애를 발하여 공감하면서 하나님의 교회의 고뇌를 서술하려고 계획된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스도의 신비적인 몸은 때때로 여기에 나타난 시편 기자의 몸과 같이, 오히려 죽고 말라버린 뼈와 같이 시들고 말라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교회는 때때로 하나님의 분노의 표징 아래 광야로 이끌려 나가고 사라져버린 것같이 되며 절망적으로 자신을 포기해 버리게 되는 것이다.

 

102:2 없음.

 

102:3 없음.

 

102:4 없음.

 

102:5 없음.

 

102:6 없음.

 

102:7 없음.

 

102:8 없음.

 

102:9 없음.

 

102:10 없음.

 

102:11 없음.

 

102:12

미래의 시온의 영광(시편 102:12-22)

여기서는 앞 에나온 탄식 에비해서 굉장히 크고 고귀한 위로가 모아지고 있다. 왜냐하면 비록 저들이 던져졌지만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똑바로 어두움 속에 빛을 비추기 때문이다." 시편 기자 자신에게도, 하나님의 백성에게도 그것은 좋지 않은 상태이지만, 그는 자신을 소생시키기 위한 많은 숙고를 하고 있다.

Ⅰ. 우리는 죽어가고 있는 피조물이며 우리의 관심과 위로도 죽어가고 있으나,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 계시고 영원히 존속하실 하나님이다(12절). "내 날이 그림자 같나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구제책도 없나이다. 밤이 나에게 다가오고 있나이다.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나이다. 우리의 삶은 일시적이나 주는 영원하시나이다. 우리의 친구들은 죽지만 우리 하나님은 죽지 않으시도다. 우리를 위협하는 것이 저를 건드릴 수 없나이다. 우리의 이름은 재 가운데 쓰여지고 세상에서 잊혀질 것이나 주의 기념 명칭은 대대에 이를 것이나이다. 시간의 끝까지, 아니 영원까지 주는 알려질 것이며, 영광받으실 것이니이다."

선한 사람은 그 자신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슬픔과 죽음을 영원한 마음(the Eternal mind)의 불변하는 축복으로 기쁘게 생각하면서 균형을 맞출 수 있다. 하나님은 "영원히 계시며" 그의 교회의 신실한 수호자와 보호자로서 영원히 계신다. 그의 영광과 영속하는 기념은 교회의 관심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우리는 그것이 소홀히 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Ⅱ. 가난한 시온이 지금 곤고한 중에 있지만 구원과 소생을 위한 때가 올 것이다. 구원의 희망은 하나님의 선하심 위에 세워진 것이다. "주께서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라. 왜냐하면 시온은 그의 동정의 것이다. "저는 일어나서 긍휼을 베푸시며 그 스스로 그것을 홀연히 행하시고 교회의 적들에 의해 만들어진 모든 적대 행위를 미워하시며 행하실 것이다." "모든 주인들의 주님이 열심히 이것을 행할 것이다." 매우 고무되는 것은 교회를 구원하기 위해 예비된 시간이 있다는 것과 어떤 시간이 올 뿐만 아니라 지정된 시간에 올 것이라는 것이다 .무한한 지혜가 그 시간을 정했으며(따라서 그것은 가장 좋은 시간이다) 영원한 진리가 그것을 결정했다. 그러므로 그것은 어떤 특정한 시간이며 결코 잊혀지거나 폐지될 수 없다. 70년이 끝난후에 바벨론의 딸로부터 구원됨으로 말미암아 시온이 기뻐할 시간이 오기로 되어 있었으며 결국 그것은 오고야 말았다. 시온, 즉 다윗의 도성에 세워진 성전이 파괴되었다. 시온의 기쁨은 16절에 설명된 바와 같이 성전의 재건설인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예상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니엘은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 빛을 주의 황폐된 성소에 비취시옵소서"(단 9:17)하고 기도한다. 시온에서의 건설은 저들이 갈망하는 것처럼 어떠한 사람에게도 큰 기쁨이 된다. 황폐된 상황에서 교회의 특권의 회복과 재건보다 더 바람직한 축복은 없을 것이다.

1. 여기에서 이러한 것은 시온의 친구들에게 큰 기쁨이 됨으로 기대되고 열망되었다. 주의 종들이 던져지고 흩어졌지만 성전의 돌들은 즐거워하며 그것의 티끌, 바로 그 쓰레기와 파괴를 연휼히 여긴다(14절). 성전이 파괴되었을 때 그 돌들이 새 건물을 위해 취해졌을 때 그것으로 인해 격려된 자들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티끌도 사랑하기 때문이다. 진실하게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는 자들은 교회가 번영 중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곤고한 중에 있을 때에도 교회를 사랑한다. 하나님이 시온의 파멸을 그의 백성의 마음속에 긍휼히 여기도록 했을 때 그가 그것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는 것은 좋은 희망의 근거가 된다. 그리고 그들이 그들의 기도와 노력에 의해서 그렇게 하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근거가 된다. 또한 열정적으로 시온에 대해서 관심하는 자들이 있고 여호와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자들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를 기다리는 좋은 간구가 되는 것이다.

2. 그것은 시온의 이웃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에 기대되고 열망되었다(15절). 그것은 아마도 저들의 회개, 최소한 저들의 확신의 행복한 수단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열방이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며" 그에 대한 그리고 그의 백성에 대한 숭고한 생각을 가지게 될 것이며 땅에 있는 왕들이 그의 영광을 경외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나님이 그의 섭리로 교회에 이와 같은 영광을 부여했을 때 그들은 가지고 있던 생각보다 하나님의 교회에 대해서 더 좋은 생각들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참여하시는 것을 볼 때 교회에 대해서 어떠한 일을 행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아니 오히려 저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너와 함께 가리다"(슥 8:23)고, 그것은 이와 같이 "본토 백성이 유다인을 두려워하며 유다인이 되는 자가 많더라"(에 8:17)고 했다.

3. 그것은 시온의 하나님의 영광에 돌려지기 때문에 기대되고 열망되었다(16절). "대저 여호와께서 시온을 건설하신다." 그들은 그것이 이뤄질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그것을 수행하셨기 때문이며 그는 "그 영광 중에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저들이 최고목표는 그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갈망하고 기도하는 것이다.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그것이 정한 때에 이뤄질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믿음으로 "아버지, 당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소서"하는 기도하는 자들은 하늘로부터 그리스도 자신에게 주어졌던 똑같은 응답을 받게 될 것이다. '나는 영광을 받았고, 다시 영광을 받을 것이다." 지금이 비록 쇠잔해가는 시기일지라도 그러하다.

Ⅲ.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기도는 등한시된 것 같고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으로 보였으나, 저들은 과거를 회고하면서 크게 용기를 얻게 될 것이다(17절). "여호와께서는 빈궁한 자의 기도를 들으신다" 하나님은 세계의 왕들이 "경외할" 그런 "영광 중에 나타나실 것"이라고 했다(15절). 지위 높은 사람들은 영광 중에 행차할 때 자기들에게 탄원하는 가난한 자들을 경멸하기 쉽다. 위대하신 하나님은 이렇게 하지 않으신다.

1. 이제 간구하는 자의 비천함을 주목해 보자. 그들은 "빈궁한 자들"이다. 여기에서 사용된 말은 고상한 말이다. 그것은 광야에 있는 관목, 작은나무 또는 담장에 있는 우슬초와 같은 풀을 의미한다. 그들은 낮고 파괴된 상태에서 영적인 축복으로 부요하게 된 것처럼 여겨지지만 일상적인 선한 것들의 빈궁 - 가난함, 약함, 황폐함, 헐벗음 -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그 말은 다양하게 언급되었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에게로 가까이 인도하시기를 원하며 은총으로 돌보기를 원하는 낮고 파괴된 영혼을 의미한다. 이 사실이 저들을 굴복시킬 것이다. 빈궁한 사람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딤전 5:5).

2. 저들의 비천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살펴 보자. 그는 저들의 기도를 들으실 것이며 그 기도를 바라보며 저들의 탄식을 음미하시며(대하 6:40) 그는 저들의 간구를 경멸하지 않을 것이다. 표현된 것 이상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는 그것을 값지게 여기며 그것을 기뻐하며 평화의 응답을 준다. 그것은 주어지는 가장 큰 영광인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저들의 기도를 경멸하면서, 하나님이 그것을 경멸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저들의 곤고가 지속되고 저들의 간구가 응답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경멸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우리의 비천함과 야비함, 우리의 어두움과 죽음, 그리고 우리의 기도에 있어서의 많은 결점을 생각할 때는, 우리의 기도가 하늘에서 멸시받을 것이라고 추측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그 반대되는 것을 보장받고 있다. 왜냐하면 성부께서 옹호해 주고 있으며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은총 아래 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비록 곤고한 중에 있으나 그에게 기도하는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의 이러한 사례는 끊임없이 기도하도록 격려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경험한 위로를 가진다면 우리가 저들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 또한 적합하다. 그가 저들에게 저들의 선조에게 행한 것으로 말미암아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많은 자들이 교회의 역사를 읽음으로써 개종자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새롭게 창조될 사람들 즉 그의 "창조의 처음 열매'가 되는 자들은 그들이 더욱 곤궁하게 될 때 저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인하여 여호와께 찬양할 것이다.

Ⅳ. 저주 아래 갇힌 자는 부당하게 도살할 양같이 보이지만 저들의 해방을 위한 배려가 취해진다(19, 20절). 하나님은 그가 그의 보좌 높은 곳 성소로부터 하감하시며 감찰하신다. 그것은 관망의 장소이며, 지상의 어떠한 것도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그의 눈에 숨겨질 수 없다. 그는 세상의 왕국들의 모습과 그들의 영광 보기 위해서가 아니다 "갇힌 자들의 탄식을 들으시고" 은총의 행위를 하기 위해서 감찰하신다. 저들의 소리를 들을 뿐만 아니라 "죽기로 정한 자들을 해방하기 위해서" 저들을 도운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바벨론으로부터의 유대인들의 해방이라고 이해한다. 하나님은 저들이 애굽에 있을 때 저들을 구출하려 하감하신 것같이(출 3:7-9) 거기에서도 그들의 탄식을 들었다. 하나님은 은총의 언어인 그의 곤고한 백성의 기도를 감찰하실 뿐만 아니라 본성의 언어인 저들의 탄식도 감찰하신다. 저들이 죽기로 정해지고 속박되고 쇠사슬로 묶여져 있을 때일지라도 갇힌 자의 탄식을 듣는 하나님의 연민과 갇힌 자의 속박을 풀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라! 우리는 베드로에게서 그러한 예를 볼 수 있다(행 7:6). 하나님의 겸비와 연민의 이러한 예는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다.

1. 그것은 "시온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도록" 도와 줄 것이며, 그 자신이 선포한 그의 이름에 응답일 되 것이며, "은혜롭고 자비하신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불리울 것이다. 시온에서 그의 이름의 이러한 선포는 예루살렘에서 그를 찬양할 소재가 될 것이다(21절). 만일 하나님의 섭리로써 그의 이름을 선포하면, 우리는 그로 인해 그의 찬양을 선포해야 하며, 그의 이름의 메아리를 울려 퍼지게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바벨론에 포로되고 갇힌 자기 백성을 해방시킬 것이며, 저들은 하나님이 이름을 두기로 택한 "시온에서 그의 이름을 선포할 것이며" 그들의 귀환지인 "예루살렘에서 그의 찬양을 선포할 것이다." 저들이 포로된 땅에서는 시온이 노래를 부를 수 없었다(137:3, 4). 그래서 하나님은 저들이 노래할 수 있도록 다시 예루살렘으로 인도하였다. 결국 하나님은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주시며("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케 하소서." 시 142:7),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주신다. "내 혼을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를 찬송하리이다"(시 119:175).

2. 그것들은 하나님의 예배에 다른 사람들을 이끌도록 도울 것이다(22절)(저들이 바벨론으로부터 귀환된 후에).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모였을 때" 열방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저들과 함께 연합하여 "여호와를 섬길 것이다." 이것은 포로에서 구출된 이스라엘의 자녀들 뿐만 아니라 열방 중에 흩어진 많은 자들이 기쁨으로 떡을 나누는 잔치를 유지한 데서 성취하였다(에 6:21). 그러나 그것은 좀더 멀리 후세에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의 신앙에의 개종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스도는 갇힌 작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속박된 자들에게 석방을 선포했다. 그로 인해 저들은 복음의 교회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할 것이며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연합하여 선포할 것이다.

 

102:13 없음.

 

102:14 없음.

 

102:15 없음.

 

102:16 없음.

 

102:17 없음.

 

102:18 없음.

 

102:19 없음.

 

102:20 없음.

 

102:21 없음.

 

102:22 없음.

 

102:23

긍휼을 비는 기도(시편 102:23-28)

Ⅰ. 우리는 여기에서 유대교가 바벨론 포로에 의해서 근절되고 제거되는 급박한 위엄을 관찰할 수 있다(23절). "그가 내 힘을 중도에 쇠약케 하셨다." 저들은 여러 세대 동안, 여행자가 그의 여행의 목적지에 도달하기를 무척 갈망하는 것처럼 메시야에 관해서 저들의 조상에게 주어졌던 커다란 약속의 수행 도상에 있었다. 합법적인 제도들이 그 도중에서 저들을 인도했다. 그러나 열 지파가 앗수르에게 상실되고, 두 지파마저도 바벨론에게 빼앗겼을 때, 그 나라의 힘은 약해지고 모든 점에서 볼 때 그 날이 단축되었다. 그러므로 저들은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고 했다. 그러면 유다로부터 실로가 일어나며, 야곱으로부터 별이 나오며, 다윗의 가계에서 메시야가 일어날 것이라는 약속은 어떻게 될 것인가? 만일 이것이 이뤄지지 않으면 그 약속은 거짓이 되고 만다. 시편 기자는 이 일을 자신의 일처럼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 시대의 공통적인 두 환난에도 대단히 잘 적용될 수 있다.

1. 쇠약케 되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육체적인 병이 곧 "우리 힘을 중도에 쇠약케 하며," 집을 지키는 자를 떨게 하며, 강한 자들을 굴복 한다.

2. 명을 단축케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몸이 쇠약해진 것을 느낄 때 단명을 두려워하게 된다 .우리의 생애 가운데서 자연의 과정을 따라서 우리의 힘이 약해질 때 우리의 연수가 중도에 끊어질 것이라는 것 이외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따라서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우리의 생명을 두어야 하며(왜냐하면 그의 손에 우리의 힘과 연대가 있기 때문이다) 그의 사랑으로 화해해야 할 것이다.

Ⅱ. 생명을 지속하도록 간구하는 기도가 여기에 나타나 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중년에 나를 데려 가지 마옵소서"924절). 이 연약한 교회를 약속이 이뤄지기 전 그 도중에 근절되지 않도록 하소서. 그것을 메시야가 올 때까지 제거하지 마옵소서. "그것을 멸하지 마옵시고, 축복이 그 안에 있게 하옵소서"(사 65:8). 죄가 가득 하지만 축복을 주사 구제해 주기를 위해서 탄원한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 믿음으로 고백하는 곤고한 자들을 위한 기도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중도에 데려 가지 않으시도록 간구하는 기도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원하시면 우리에게 더 봉사할 수 있도록 여유를 주실 것이며 우리는 하늘을 위해 더 무르익어 가게 된 것이다.

Ⅲ. 이 기도는 약속된 메시야의 영원성으로부터 취한 것이며, 그것을 실현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다(25-27절). 사도는 이 구절들을 인용해서 우리에게 말해 준다(히 1:10-12). "그는 이것을 아들에게 말씀하신다." 우리는 그 해석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교회를 지나가는 모든 변화와 모든 위험에 대하여 매우 위로되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영원까지 변함이 없으시다." "주의 연대가 여전하여 다함이 없으며" 단축될 수 없다. 또한 우리의 몸의 쇠퇴와 죽음 그리고 우리의 친구들이 우리를 떠나는 것에 대해서 위함을 주고 있다. 즉 하나님은 영존하시는 하나님이시며 따라서 그가 우리의 하나님일 때 우리는 그에게서 영원한 위로를 얻는다.

이 간구에서 우리는 다윗이 어떻게 창조자의 영원성을 묘사하면서 그것을 피조물의 변덕성과 비교하는지를 주시하며 보라! 왜냐하면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유일한 특권이기 때문이다.

1.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고, 따라서 영원 전부터, 세상보다 먼저 존재하신다. 하나님의 아들 즉 영원한 말씀이 세상을 창조하였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묘사되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태초로부터 영원까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즉 하나님이시니라"(요 1:1-3; 골 1:16; 엡 3:9; 히 1:2). 하늘과 땅, 그리고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들은 그의 아들에 의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생겨난 것들이다(25절).땅이 존재하기 전 바다와 물 위에다 "주께서 옛 적에 땅의 기초를 두셨사오며,"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실 것이다. "하늘도 주의 지으신 바"이며, 그에 의해서 저들의 모든 동작과 영향이 지배받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근원일 뿐만 아니라 모든 권력과 지배의 근원인 것이다. 하늘과 땅에서 모든 권세를 위임받은 위대한 구속주에게 이것이 얼마나 적중하는지를 보라! 왜냐하면 그는 양자(兩者)의 창조주로서완전하게 알고 있고, 그것들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은 세상을 다시 파괴할 것이다 .그러므로 영원까지 존재할 것이다(26,27절). "저들은 멸망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저들을 창조했던 권능의 권세로 "저들을 변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심할 여지없이 "저는 영존하시겠고 여상하신 분이다." 하나님과 세상, 그리스도와 피조물은 인간의 영혼, 불멸의 영혼 안에서 가장 깊은 내부와 가장 높은 자리에서 적대자가 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언급된 것만으로 즉각적으로 그 논쟁을 종결짓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1) 왜냐하면 피조물의 일정한 분량은 죽어가고 시들고 있기 때문이다. "저들은 멸망할 것이다' 저들은 우리가 존속하는 만큼도 존속하지 못할 것이다. 땅과 거기에 속한 모든 수고가 불 살라질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거기에 저들의 보화를 쌓아 놓은 자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늘과 땅은 "옷같이 낡으리니" 점진적인 쇠퇴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한 때가 오면, 우리가 더 이상 철에 따라 입지 않는 낡은 옷과 같이, 바꾸어질 것이다. "옷과 같이 그가 저들을 바꿀 것이며," 저들은 바꾸어질 것이다. 폐지시키는 것이 변경시키는 것이며, 그것은 전과 같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이 되어질 것이다. 하늘과 땅에 대한 하나님의 주적인 지배를 보라! 그는 그가 원할 때 저들을 바꾸신다. 저들에게 속해 있는 낮과 밤, 여름과 겨울의 개혁에 따르는 부단한 변화는 하늘과 시간이(저들에 의해서 측정되는) 더 이상 있지 않을 때, 즉 저들의 마지막, 최종적인 변화의 징조인 것이다.

(2) 하나님에게 속한 것은 영존하며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은 아무런 변화에 속하지 않는 여상하신분 이며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27절). 그리스도는 그의 약속에서 행하신 것에서 여상하실 것이며, 그가 그의 교회를 자유하게 만드신다는 약속도 그의 포로된 교회에 대해서 변함이 없는 것이다. 교회로 하여금 그힘의 약함을 두려워하게 하지 말고, 그 날의 단촉을 인하여 두려워하게 하지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 자신이 교회의 힘과 교회의 생명이 된다는 것을 확실케 해야 한다. 그는 여상하시며, "내가 살았기 때문에 너희도 또한 살 것이다"라고 말하셨다. 그리스도는 때가 찼을 때 오셨으며, 그의 나라를 구약 바벨론의 권세에도 불구하고 건설하셨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신약의 바벨론의 권세에도 불구하고 보존하실 것이다.

Ⅳ. 이 기도의 응답으로써 위로의 확증이 주어진다(28절). "주의 종들의 자손이 항상 있으리이다." 그리스도가 변함없는 것같이 교회도 여러 세대에 걸쳐 지속될 것이다. 우리는 머리의 영원성으로부터, 비록 우리가 약하고 병걸리고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다고 하더라도, 몸의 영속성을 이어받을 것이다. 지고(至高)한 자의 성도들을 지치게 하기를 희망하는 자들은 잘못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종들은 자녀들을 가질 것이다. 그 자녀들은 씨를, 후계자를 가질 것이며, 백성을 가질 것이다. 세상과 마찬가지로 교회는 그러한 축복 아래 있게 된다. "자손을 낳아 창대하되리라." 이러한 자녀들은 인간으로서 죽음의 연고로 존속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그들의 씨에게 계승될 것이다(즉 그에 대한 예배에서 그의 은총으로 말미암아서). 종교의 계승은 세상이 하는 한 근절되지 않을 것이며 한 세대의 선한 백성이 지나가고 또 다른 세대가 오고 이와 같이 해서 그리스도의 보좌는 굳게 설 것이다.

 

102:24 없음.

 

102:25 없음.

 

102:26 없음.

 

102:27 없음.

 

102:28 없음.




































 


Articles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