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자에 대해 (시편 94:1-11)
Ⅰ. 하나님의 백성을 잔인하게 압제하는 자들에게 대한 호소가 하나님께 나열되고 있다(1,2절). 이것은 그들에게 공포가 되고도 남음이 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이 그들의 학대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로 호소하는 까닭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대적들에게 복수해 주시도록 주야로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그런데 하나님이 속히 보수해 주시지 않겠는가?(눅 18:3, 7) 여기서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그들은 이 호소를 드리면서 자기들의 신앙을 격려하기 위해 하나님께 칭호를 드린다. "여호와여! 보수하시는 하나님이며, 세계를 판단하시는 주여" 우리가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1) 그는 판단하시는 주이기 때문이다. 그는 재판관이시며 최고의 재판이시고 오직 한 분이신 재판관이다. 인간의 모든 판단은 그에게서 나온다. 법을 주시는 자는 그 법의 규칙을 따라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결을 내리신다. 그는 심판을 위해 자기 보좌를 예비하셨다. 그는 사직 당국자들을 임명하셔서 자기의 보수가자 되게 하셨다(롬 13:4). 그러나 그는 보수의 총 책임자여서 모든 치안 판사들은 그에게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의 보좌는 무죄한 피압박자의 영원한 피난처(법률 용어로 dernier ressort - 즉 최후의 의지수단)이다. 그는 우주적 재판관이시다. 이 도시나 이 나라의 재판관이 아니라 세계의 재판관 곧 온 세계의 재판관이시다. 그의 사법관에서 면제받는 자는 아무도 없다. 하나님께 드리는 호소는 그것이 법적으로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coram non judic)는 이유로 대당하지도 않는다.
(2) 하나님은 정당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릇된 자에게 복수할 권세를 가지시듯 그것은 그의 본성이고 속성이며 명예이다. 이것은 여기에 나오는 칭호에도 암시되고 있다. "보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보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반복해서 나오는 것은 강조를 위해서다. "하나님이여 보수는 주께 속하나이다. 당신께서는 항상 힘이 정의를 이기도록 놔두시렵니까? 그렇진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왜 우리가 직접 복수해서는 안 되는지에 대한 좋은 이유이다. 하나님은 "보수는 내게 속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특권을 빼앗고 그의 보좌에 올라서려는 것은 대담하고 어처구니없는 망상이다(롬 2:19). 들키지 않으려고 은밀한 수단으로 행악하든지 아니면 제지받지 않으려고 강압적 수단으로 학대하든지 간에 학대자들은 복수의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경종으로 삼아야 한다. 하나님은 틀림 없이 그들을 불러 따지실 것이다. 그리고 묵묵히 학대를 참으면서 의로운 재판에게 맡기는 자들은 이로써 용기를 얻어야 한다.
2. 그들이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1) 하나님께서 스스로 영화롭게 하사 자기 이름을 존귀롭게 하시리라는 것. 악한 박해자들은 하나님이 철수하시고 세계를 버리셨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여, 빛을 비추소서(스스로 나타내소서). "저들에게 주가 계시다는 것과 주는 마음이 주께 정직한 자들을 위해 강함을 즉시 나타내신다는 것을 알리소서." 원수들은 하나님백성이 정복되었으므로 하나님도 정복당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의 백성들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주의 힘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당신 자신을 들어올리사 보이게 하시며 경외받게 하소서, 주의 이름이 짓밟히고 영락되지 않게 하소서."
(2) 하나님이 학대자들을 낮추시라는 것. "교만한 자에게 상당한 형벌을 주소서. 그들의 모든 무례와 그들이 주의 백성에게 입힌 모든 피해에 대해 그들과 셈하소서." 이 기도는 모든 강포의 자식들에게 공포감을 주는 예언이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공로대로 그들을 다루실 것이다.
Ⅱ. 압제자의 잔혹과 교만에 대해 하나님께 드리는 겸손한 호소와 충간(3-6절). 다음에는 그들이 호소하는 것은 무엇인지 관찰하자.
1. 그들이 호소하는 대적들의 특성. 그 원수들은 악하다. 그들은 죄악을 행하는 자이다. 그 원수들은 악하며 매우 나쁘다. 그래서 자기들을 부끄럽게 하고 정죄하는 선의 소유자들을 미워한다. 무죄한 자에게 잔인하며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참으로 악하고 또 극히 나쁜 죄악을 행하는 자이며, 모든 존귀와 미덕을 상실한 자다.2. 그 원수들의 거만하고 야만적인 태도.
(1) 그들은 오만 무례하여 자화자찬하기를 즐거워한다. 그들은 큰 소리치며 건방지게 말한다. 그들은 뻐긴다. 그들은 마치 입과 손이 다 자기들 마음대로 움직이기라도 하는 듯이 의기양양하며 자기들의 말이나 행동에 대해 아무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는 듯이 우쭐댄다. 그들은 하나님과 종교를 참소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의기 양양해하며 자부심이 강한 자들 즉 스스로를 높여 말하는 자들은 남을 혹평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 그의 진리와 길과 백성에게 대해 불경건한 죄인들이 악평하지만 그 모든 악평에 대해 계산할 날이 이를 것이다(유15).
(2) 그들은 경건치 않으며 하나님은 백성이 하나님께 속한다는 이유로 멸망시키기를 기뻐한다(5절). "여호와여 저희가 주의 백성을 파쇄하며 그들의 회중과 재산과 가족과 개인을 다 난산조각대어 온갖 수단을 다해 주의 기업을 괴롭히며 슬프게 하며 분쇄하며 망치며 뿌리채 뽑아 버리나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의 기업이다. 하나님을 인해 그들을 미워하고 그 파멸을 도모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교회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할 때 좋은 근거가 된다. "주여 이 교회는 주의 것입니다. 주께서는 이 교회로 재산을 소유하십니다. 교회는 주의 기업입니다. 그래서 교회로부터는 이 세상에서 주가 받으시는 영광의 세가 나옵니다. 그런데 주께서는 이 악인들이 교회를 이처럼 짓밟도록 놔두시렵니까?"
(3) 그들은 비인도적이어서 스스로 도 능력이 없는 자들을 학대함으로써 쾌감을 얻는다(6절). 그들은 과부와 나그네를 학대하고 가난하게 만들 뿐만 아니다 죽이기도 한다. 또 그것은 고아를 돌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먹이로 삼으며 살해하기도 한다. 약한 고아들은 때때로 생명이 그들의 손에 좌우된다. 그들은 고아나 과부나 나그네를 피해로부터 보호해야 마땅함에도 도리어 극히 많은 해를 끼친다. 더욱이 그들은 아마 하나님께서 특별히 고아나 과부를 돌보신다는 이유로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인간의 자손이 이처럼 야만스러울 것이라고 누가 생각하겠는가?
.박해의 계속에 의해 하나님께 드리는 온당한 호소가 나온다. "여호와여, 그들이 언제까지(두 번 반복됨), 이렇게 행동할 것입니까? 악인의 악이 언제 종식될 것입니까?"
Ⅲ. 박해자들에게서는 무신론의 주장이 나타나며 그런 주장에에 대한 충고가 여기 나온다.
1. 무신론적 세상이 드러나고 있다(7절). "그들이 말하기를 여호와가 보지 못하리라 하나이다." 그들의 악의 부르짓음이 매우 크고 높더라도, 그들이 본능의 지식과 양심의 명령에 반역하여 행동하면서도 대담하게 "여호와가 보지 못하리라. 그는 작은 잘못을 못본 체할 뿐만 아니라 큰 과오도 눈감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아니면, 그들은 자기들이 정의와 종교의 구실하에 너무나 감쪽같이 처리했으므로 살인이라고 판단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비록 그 백성이 하나님께 영향력을 갖는다고 하나 야곱의 하나님은 그 일을 정의나 자기 백성에게 배치되는 일로 간주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는 결코 그 일로 우리를 불러 따지지 않으실 것이다." 이와 같이 그들은 하나님의 이 통치를 부인하며 자기 백성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을 희롱하고 심판을 무시한다.2. 그들은 터무니 없이 어리석다고 경고받는다. 사신 하나님 여호와가 보지 못하고, 야곱의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피해를 주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자는 그 이름이 나발(Nabal)이어서 그에게는 미련함이 있다. 그럼에도 여기서 지당한 이르는 것은 그의 혼란을 방지하고 각성시키며 회심시키기 위해서다(8절). "백성 중 우준한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이 성을 인도자로 삼으라." 무신론자들은 비록 재사와 철현과 책략가로 자처하더라도 백성중 참으로 우준한 자임을 명심하자. 그들은 만일 만 한다면 믿게 될 터였다. 하나님은 마치 오랜 이 걸려야 그들이 인간다운 인간이 되며 깨달음과 깊음을 갖추게 될 것으로 하기라도 하듯 말씀하신다.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꼬. 우매자들아 너희가 언제 지혜롭게 되어 하나님이 너희 모든 말과 행동은 보시며 하는 깨달으며 그에 따라 하나님께 책임적 존재로서 말하고 행동하게 될 것인가?" 그들 만큼 악한 자는 없지만 그들을 교화시키고 개혁시키기 위한 수단이 사용되고 있으며 그토록 야만적이고 미련한 자들도 없지만 그들이 지혜롭게 될 지 안 될지를 시험해 봐야 한다는 데 주목하자. 생명이 있는 동안 희망은 있다.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그 공의를 의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증명하기 위해 기자는 다음과 같은 논리를 댄다.
(1) 창조의 업적(9절). 인체의 형성은 신은 존재를 증명하는 동시에 하나님이 초월적으로 무한하게 완전한 분이시라는 것도 동시에 증명한다. 귀를 지으신(원의:심으신)자가 듣지 아니 하시랴? 귀는 나무가 땅에 심긴 것처럼 머리에 심어져 있다. 물론 그는 우리보다 더 많이 더 잘 들을 수 있으실 것이다.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 하시랴? 해부학자는 눈이 신체 중 어느 부분보다 기묘하게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알며 해부도로써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런 하나님께서 온전하지 못한 피조물에게 그 온전함을 주실 수 없으시며 주려고 아니하실 것인가?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1] 자연계의 모든 능력은 자연의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출 4:11).
[2]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을 통해 하나님의 지식으로 크게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와 감각기관을 앎으로써 하나님을 인지할 수 있다. 우리가 보고 들을 다면 하나님이야 말해 무엇하랴! 더욱이 우리는 우리의 영혼과 그 고귀한 기능을 앎으로써 하나님을 인지할 수 있다. 이방인의 신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처럼 눈과 귀를 갖고 계시진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보기도 하시고 듣기도 하시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시력과 청력을 하나님께로부터 얻으며 그 사용에 대해서 하나님께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2) 섭리의 업적(10절). 다신교와 우상 숭배에 대해 열방을 징벌하시는 자가 자기 백성의 무신론과 독신에 대해 그들을 정치하지 않으시겠는가? 서로 학대하며 압제한다는 이유로 인간들을 징계하시는 분이 그들을 교도하시지 않으랴!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고백하며 또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면서 실제로는 하나님의 참자녀된 자들을 핍박하기 때문이다. 온 세상이 하나님의 다스림 하에 있는데 우리가 그의 징치 하에 있지 않을 것인가? 그는 열방의 왕으로서 주목하시는데 하물며 야곱의 하나님으로서 눈여겨 보시지 않으실 것인가? 하몬드 박사는 이에 대해 또 다른 견해를 그럴 듯하게 피력한다. "열방을 교훈하시는 자가 징치하지 아니 하시랴! 즉 열방에서 자기 법을 주시는 이가 그들을 자기 법대로 판단하지 않으실 것이며 그 법의 위반에 대해 그들과 셈하지 아니 하시랴? 법에 대한 심판이 없다면 그 법은 헛된 것이다." 정치와 교훈이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틀림 없다. 왜냐하면 징치는 훈계를 목적으로 하며 훈계는 징치와 동행하는 까닭이다.
(3) 은혜의 업적. "지식으로 사람을 교훈하시는 자가 알지 아니하시랴?"(흠정역:역주) 그는 자연의 하나님으로서 이성의 빛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은혜의 하나님으로서 계시의 빛도 주셨고 참 지혜와 명철이 무엇인지도 사람에게 보여 주셨다. 이렇게 하시는 분이 모르실 리가 있겠는가? (욥 28:23, 28) 시내의 흐름은 물 근원이 가득 차 있다는 증거이다. 모든 지식이 하나님께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라면 하나님께 모든 지식이 있다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대한 일반적 교리로부터 시편 기자는 "여호와가 보지 못하리라. 그는 우리 행위를 인식하지 못하리라"고 말한 무신론자들을 논박할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우리의 생각조차 인식하고 계신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고 있다(11절). "여호와께서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1]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 특히 하나님이 악인의 악을 묵과하실 것이라는 인간의 생각을 아시며 그런 생각이 헛되다는 것도 아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헛된 망상으로 죄 가운데서 자만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비웃으신다.
[2]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생각을 아시며 또 그 생각들이 대부분 헛되며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과 상상이 악하며 끊임없이 악할 따름이란 것도 아신다. 심지어 선한 생각에조차 변덕과 불안정한 점이 있어서 허무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특별히 우리 생각을 주목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생각을 엄하게 감시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생각은 하나님께 대한 말이며 허무한 생각은 하나님을 노엽게 한다.
고난받는 성도의 위로 (시편 94:12-23)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자에게 난을 선고했으므로 여기서는 고난당한 자들에게 안식을 확신시켜 준다(살후 1:6, 7 참조). 그는 고난받는 성도에게 하나님의 약속과 자신의 체험으로 위로의 말을 해 준다.
Ⅰ. 하나님의 약속으로부터 하는 말. 하나님의 약속은 그들을 불행에서 건져낼 뿐만 아니라 행복을 확보해 준다(2절). "주께서 징벌하시는 자는 복이 있다." 시편 기자는 여기서 고난을 도구로 보며 그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의식한다. 하나님의 손길은 난에 다른 이름을 부여하며 전혀 색다른 해석을 가한다. 원수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파쇄한다(5절). 그들이 노리는 것은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다. 그러나 진상은 하나님이 징계하신다는 것이다. 아비가 그 기뻐하는 자식을 징계하듯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자기 백성을 징치하신다는 것이다. 또 박해자들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막대기와 채찍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뜻은 이 같지 아니하며 마음의 생각도 이 같지 아니하다"(사 10:5-7). 이제 여기서 약속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백성은 그 고난으로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징계하실 때는 교육하시는 때이며 이처럼 하나님의 훈련 하에 있는 자는 복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처럼 가르치는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1) 성도의 고난은 그들의 훈계와 개혁과 개선을 의도하는 아버지의 징벌이다.
(2) 섭리의 책망에 말씀의 가르침과 성령이 동반될 때는 그 사람이 복되다는 증거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아들로 삼는다는 표시이며 성화시키는 수단인 까닭에서다. 우리는 징계받을 때 교훈을 받기 위해 기도해야 하며 섭리의 가장 좋은 강해자로서 하나님의 법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 유익을 주는 것은 징계 그 자체가 아니라 징계와 함께 다니며 징계의 해설자인 교훈이다.
2. 그들은 자기들의 고난의 참 의미를 간파하게 될 것이다(13절). "이런 사람에게는 환난의 날에 평안을 주시리이다."
(1) 역경의 날이 지나면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평안이 있다. 환난의 날이 비록 많고 길지 모르나 때가 되면 끝이 날 것이며 언제나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난을 보내시는 분은 평안도 보내실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괴롭히신 기간대로 그들을 위로하시기 위해서다.
(2)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 자기 백성을 가르치시는 것은 그들을 구원에 예비시키시며 환난에 있는 그들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들을 개혁시킴으로 구원을 받게 하며 제 구실을 다한 후 난을 제거시키기 위해서이다.
3. 그들은 자기들을 괴롭히던 자들의 파멸을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의 파멸은 약속된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이바지하기 위한 것이다. "악인을 위하여 구덩이를 팔 때까지"(또는 파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평안을 주시며 박해자들에게는 화살을 마련하실 것이다.
4. 그들은 비록 실패를 당하더라도 결코 버림을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14절). 하나님의 백성은 비록 고난받더라도 이 점을 확신해야 한다. 그들의 친구들은 어떤 행동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시며 자기의 언약이나 돌보심 밖으로 내쫓지 않으실 것이다. 그들은 그의 기업이기에 그는 그들을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대한 자기 권리나 소유권을 내놓지 않을 것이다. 성 바울은 이 점을 위로로 삼았다(롬 11:1).
5. 사태는 비록 악화돼 있지만 그들은 수선할 것이며 그들이 비록 정로에서 벗어나 있더라도 그들의 올바른 옛 길로 돌아갈 것이다(15절). "판단이 의로 돌아가리라. 무질서한 듯이 보이는 섭리도 교정될 것이다(그러나 실제로 섭리가 무질서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판단 즉 그의 통치는 때때로 의로부터 멀리 있는 듯이 보인다. 악인이 번영하는 반면 극히 착한 사람들이 무척 악한 대접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판단은 의로 돌아갈 것이다. 이 세상에서나 아니면 모든 것을 올바로 정리할 저 큰 날의 심판에서 다시 의로 돌아갈 것이다. 그 때에는 마음이 정직한 자가 다 그것을 좇을 것이다. 그들은 찬송과 온전한 만족심으로 그것에 따를 것이다. 그들은 번영하고 형통한 상태로 돌아갈 것이며 미미한 데서 빛을 비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할 것이며 적당한 애착심으로 그 모든 움직임을 주시할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를 따라 행할 것이다(호 11:10). 하몬드 박사는 이것이 괄목할 만하게 성취된 것은 맨 먼저 예루살렘이 멸망한 때라도 생각한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로마는 그 다음에 멸망했으며 그로써 교회는 평안을 얻었던 때문이다. 그 때 판단이 의로 돌아갔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대한 자비와 인자와 은총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전에 짓밞힌 만큼 많은 애고를 받은 것이다.
Ⅱ. 그 자신의 경험과 관찰에서 위로를 말한다.
1. 그와 그의 친구들은 잔인하고 방자한 인간들에게 압제를 받았다. 그들은 수중에 권세를 잡고 그 권세로 선한 자들을 학대했다. 그들은 행악자였고 죄악을 행하는 자들이었다(16절). 그들은 온갖 불경건과 부도덕에 투신하였고 그들은 악한 재판장이었다(그들의 위는 악의 위였다:흠정역). 그들의 위엄은 죄악을 호도하는 데 이용되었고 그들의 권세는 죄를 후원하고 그들의 악한 계책을 성사시키는데 사용되었다. 행악자에게 공포가 되고 선행자에게는 보호와 칭찬이 되어야 할 재판장 자리가 불의의 자리와 악의 피난처가 된다는 것은 유감천만이다. 그것은 모략 회의로 잔해를 도모하며 최고 권력으로 그것을 시행하고 또 법으로 바꾸는 악의 위(보좌)다. 불의는 인간의 법이 대항해 와도 겁이 없으며 법은 흔히 악을 효과적으로 억제하기에는 너무 무력한 것으로 판명된다. 그러나 악이 법의 비호를 받을 때는 얼마나 무례하며 얼마나 해를 끼치는가! 악이 법에 의해 시행될 때는 더 나아지긴커녕 더 악화된다. 법대로 그 일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변명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 행악자들은 율례를 빙자하고 잔해를 도모했으므로 그 법의 시행을 위해 애를 쓴다. 그들은 모여 의인의 영혼을 치려 한다. 의인들은 오므리의 율례와 아합 집의 모든 행위를 감히 지키려 하지 않았다(미 6:16). 그러나 그들은 법을 위반한다는 이유로 무죄자를 정죄하여 피를 흘리려 했다. 다니엘의 대적들의 예를 보자 그들은 기도를 금지하는 불경건한 칙령을 얻어 내었으나(단 6:7) 다니엘이 순종하지 않자 다니엘을 치려고 모였고(11절), 무죄한 그를 정죄하여 사자에게 던졌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인류의 가장 훌륭한 은인이 법과 정의란 미명 하에 가장 악한 행위자로 처단된 것은 비일 비재이다.2. 그들이 당하던 압제는 그들을 몹시 구박했고 그들의 정신도 무척 억압하였다. 고난받는 성도는 설사 핍박받을 때 당황하여 자신의 곤경을 느끼더라도 절망하지 말 일이다. 시편 기자도 마찬가지다. "내 혼이 벌써 적막 중에 처하였으리라"(17절). 그는 어쩔 줄 모르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행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는 자기 생명이 끝날 줄로 생각하고 적막한 땅 곧 묘지에 내려갈 준비를 했다. 사도 바울도 같은 경우에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후 1:8, 9)고 했다. 시편 기자는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18절). 나는 회복의 가망이 없고 치유 불가능이다. 나는 엎드려지지 않을 수 없다나는 언젠가 사울의 손에 망하리라. 내 희망도 끊어졌다. 나는 전처럼 내 믿음의 견고한 디딤돌을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시 73:2 참조).
3. 그는 자기 처지에 대해 복잡한 생각을 많이 하였다. 그는 자기 처지를 어떻게 해서 어떤 경로를 밟아야 할지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생각을 많이 하였다.
4. 그들은 이 궁지에서 구조와 도움을 모색했다.
(1) 그들은 주위에서 도움을 찾았으나 실망에 부딪혔다(16절). "누가 나를 위해 일어나서 행악자를 칠꼬? 내게 대한 사랑으로 위해서 나타날 친구가 있는가? 불의에 대한 경건한 분노심으로 나의 피해를 변호해 줄 만치 정의감에 불타는 친구가 있는가?" 그는 돌아다 보았지만 건져 줄 자가 아무도 없었고 후원할 자도 없었다. 압제자의 편에 권력이 있을 때 피압제자에게 위로자가 없고 그들은 감히 인정하려거나 좋은 말을 들려 줄 자가 없다고 해도 이상한 것은 없다(전 4:1). 사도 바울이 네로의 악한 보좌 앞에 끌려나갔을 때 그를 위해 변명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딤후 4:16).
(2) 그들은 위로부터 도움을 기대했다(20절). 그들은 겸손히 하나님께 간하였다. "여호와여, 악한 재판장(악한 위가)이 어찌 주와 교제하리이까? 주께서는 악한 중에 있는 폭군을 비호하며 후원하시렵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재판장의 자리가 정의의 위가 되고 세운 본래 목적에 부응할 때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통치자는 하나님께로 말미암아 다스리며 또 그들이 하나님 대신 다스릴 때 그들의 판단은 하나님의 판단이 되고 하나님은 그들을 자기 사역자로 인정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구든지 그들에게 항거하며 그들을 치려고 궐기하면 스스로 저주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보좌가 악한 위로 될 때에는 더 이상 하나님과 교제하지 못한다. 공의롭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불의의 후견자가 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비록 왕이나 권좌에 앉은 자들 아니 다윗 집의 위에 앉은 이들의 불의라 해도 그렇다.
5.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구조와 구원을 얻었다. 하나님만이 그들의 구원자셨다. 다른 친구들이 다 거절하고 실망시켰을 때 하나님이 그들에게 신실하고 강력한 친구가 되어 주셨다. 그리고 고난받는 하나님의 모든 성도들에게는 그를 신뢰할 것이 권장되었다.
(1) 하나님은 절대 절명의 순간에 도우신다(17절). "내가 거의 적막 중에 처할 찰라 여호와께서 나의 도움이 되셨고 나를 살리셨으며 내 마음을 소생시키셨다. 만일 내가 그를 신뢰하고 그에게서 구원을 기대함으로써 그를 나의 도움으로 삼지 않았다면 나는 결코 내 영혼을 소유할 수 없었으리라.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산 까닭에 내 머리는 물 위로 나오게 되었고 호흡을 하게 되며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2) 하나님의 선하심은 쇠약해 가는 심령에게 큰 지주가 된다(18절). "여호와여 나의 발이 죄와 파멸과 절망으로 미끄러진다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셔서 나로 실족치 않게 하시며 나를 붙드셔서 나로 실족치 않게 하시며 나를 높은 위에서 떨어뜨리려고 도모하는 자들의 궤계를 좌절시키셨나이다"(시 62:4).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뿐만 아니라 그의 긍휼에도 우리의 영적 지탱을 위해 은혜를 입고 있다. "주의 인자하심 즉 주의 자비의 은사와 주의 인자에 대한 나의 소망이 나를 붙들었나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좌우편을 돌아봐도 붙들어 줄 자가 아무도 없을 때 하나님의 우편 손이 그들을 떠받쳐 주신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지지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무력성을 의식하고 자기 힘으로 서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하나님께 나아와 그것을 인정하고 우리 발이 미끄러진다고 말해야 한다.
(3) 하나님의 위로는 곤고한 심령의 효과적 치료제이다(19절). "내 속에 생각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나이다. 내 마음 속의 생각이 군중처럼 소란스럽고 혼잡하고 서로 엎치락 뒷치락 슬프고 애타고 소심한 많은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날 때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나이다. 주의 위안은 아주 적절한 때에 들어와서 나의 불안한 생각을 잠잠하게 하며 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나이다. 이보다 더 즐거운 일은 없습니다. " 영혼이 우울한 생각으로 번뇌할 때 세상의 위안물은 거의 즐거움을 주지 못한다. 무거운 마음에는 그것이 역겨운 노래가 되어 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로는 영혼에 도달하며 마음을 즐겁게 할 뿐 아니라 평화도 가져다 준다. 이 평화와 즐거움은 세상의 미소도 주지 못하고 세상의 찡그림도 뺏지 못하는 것이다.
5. 하나님은 이제나 저제나 의로운 재판관으로서 정의의 수호자요 보호자시며 악의 징벌자요 복수자시다. 시편 기자는 이것을 경험했고 확신했다.
(1) 하나님은 피해자의 억울함을 풀어 주실 것이다(22절). "나를 감히 보호해 줄 자도 없고 줄 수 있는 자도 없을 때 여호와는 내 산성이셔서 환난의 재앙에서 나를 보존하시며 파멸을 당치 않게 하신다. 그는 나의 피할 반석이셔서 그 틈 사이에 내가 숨을 수 있고 그 꼭대기에 발을 딛고 서면 위험이 내게 다다를 수 없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피난처시다. 그들은 하나님께로 도망할 수 있고 그 안에서는 안전하다. 그는 그들의 피할 반석이셔서 반석처럼 강하고 곤고하며 난공 불락이며 움직이지 않으신다. 천연의 요새는 왕왕 인공적 요새를 능가한다.
(2) 그는 가해자와 회계하실 것이다(23절). "그는 저희 죄악을 저희에게 돌리실 것이다." 그는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대한 그들의 악행과 악한 계획은 다 그들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다. 또 그는 "저희의 악을 인하여(또는 악 가운데서) 저희를 끊으시리라." 하나님이 그 악으로 갚으신다면 그보다 불행한 자는 없다. 악은 악에 대한 기억 중에서 악인을 끊을 것이며 악에 대한 보상 가운데서 그를 끊을 것이다. 시편 기자는 이에 대한 승리의 확신으로 본 시편을 끝맺고 있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 저희를 끊으시로다. 우리를 편드시고 우리를 자기 소유로 인정하시는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와의 교제에서 끊으실 것이며 따라서 그들을 완전히 비참하게 만드실 것이다. 그들의 위용와 권세도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