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난처되신 하나님 (시편 91:1-8)
Ⅰ. 하나님과 더불어 교통하는 삶 을사는 모든 사람들은 그의 보호 아래서 안전하다. 그러므로 항상 마음의 안정과 거룩한 평온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하는 한 위대한 진리가 일반적인 말로 주장되어 있다(1:1). "자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믿음으로써 하나님을 자기 보호자로 선택한 사람은 그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서 발견하며 또 요구할 수 있다.
사람이 "자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것은" 참된 신자의 특성이다. 그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그를 휴식처로 삼고, 거기서 쉰다. 그는 내적인 교통을 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자기 마음의 임무로 삼아 하나님과 더불어 있는 것을 좋아하며, 하나님과 대화한다.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는 것"이 그렇게 하는 자의 특권이며 위로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숨기시고 그들과 그들을 방해하는 자(그것이 폭풍이거나 햇빛이거나 간에)의 중간에 서신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서 집을 가진다. 하나님은 영원히 그들의 피난처와 안식처가 될 것이다.
Ⅱ. 시인은 이것을 즐거이 그 자신에게 적용한다(2절). 다른 사람은 무엇이라고 하든, "나는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라고 하리라." 이렇게 선택하고 믿는다. 다른 사람들은 우상을 그들의 피난처를 삼지만, 그는 진실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라고 한다. 다른 어떤 것도 거짓된 피난처이지만, 그는 실망시키지 아니할 피난처이시다. 왜냐하면 "그는 나의 요새"요, "산성"이시기 때문이다. 우상 숭배자들은 그들의 신을 "마후심" 곧 "크고 견고한 산성"이라고 부른다(단 11:39). 그러나 그들은 거기에서 속는다. 여호와를 자기의 하나님으로, 자기의 요새를 삼는 사람들만이 안전하다. 그의 능력을 의심할 이유가 없으므로 당연히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하는 말이 뒤따른다. 만일 여호와가 우리의 하나님이요, 우리의 피난처요, 우리의 요새가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바랄 수 있다. 그는 변덕스럽지 않으시며, 거짓되지도 아니하시고, 약하지도 죽지도 아니하신다. 그는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를 믿어서 실망될 위험이 없다. "우리는 우리가 신뢰하는 이가 누구인지를 안다."
Ⅲ. 그는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행하게 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을 크게 고무한다. 그것은 자기가 위로를 받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왜냐하면 어쩌면 자기 경험 안에는 잘못된 생각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떤 속임수도 없으며, 또 있을 수도 없는 진실한 하나님의 약속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을 크게 고무한다.
"확실히 저가 너를 건지실 것임이로다.' 하나님을 자기들의 피난처로 살아서 위로를 얻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도록 원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그 약속이 있다.
1. 신자들은 그들이 현재 처해 있으며, 또한 그들에게 치명적인 긴급한 위험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것이다(3절). "새 사냥군의 올무에서" - 그것은 보이지 않게 놓여져서 부주의한 먹이를 갑자기 잡는다. - "극한 염병에서" - 그것은 불의의 사람에게 엄습한다. 거기에는 방호물이 없다. 이 약속은 다음 것을 보호한다.(1) 육체의 생명이다. 그것은 때때로 심하고, 대단히 가까이에 있는 위험에서의 구출에서 실현된다.
(2) 영적 생명이다. 이것은 새 사냥군의 올무와 같은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보호를 받는다. 또 "극한 염병"인 죄의 감염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영혼을 영광스럽게 하려고 은혜를 주신 하나님은 그 영혼의 모든 영광을 방위하실 것이다.
2.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보호자가 되실 것이다(4절), "저가 너를 덮으실 것이다." 그리고 "은밀히 감추실 것이다"(31:20). 그렇게 너를 안전히 지키신다.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보호하심에 있어
(1) 가장 큰 포근함과 애정으로 보호하신다. 그것은 다음 구절에서 암시된다.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라." "그 날개 아래 병아리를 모으는 암탉"은 이것을 암시한다(마 23:37). 암탉은 자연적인 본능으로 병아리를 보호할 뿐 아니라, 그들의 위험한 것을 보았을 때 자기의 보호 아래로 그들을 부른다. 그들을 안전히 보호할 뿐 아니라 소중히 여기고 따뜻하게 한다. 위대하신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돌보시는 것을, 이것에게 비교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그들은 병아리와 같이 도움이 없고, 쉽게 먹이가 되지만, 하나님의 약속과 섭리의 그늘 아래 위탁된다. 이것은 참된 종교로 개종한 사람들에게 관하여 넌지시 말한 것이다(룻 2:12).
(2) 가장 큰 능력과 효력으로 보호하신다. 날개와 깃털은 가장 부드러운 것으로 펼쳐지기는 하지만 약하고 뚫어지기 쉬운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 말씀이 추가된다. "그의 진실하심은 방패와 손방패가 되시느니라." 이는 강한 방어물이다. 하나님은 암탉이 병아리를 지키는 것같이 그의 백성을 지키시기를 원하시고, 갑옷 입은 군인과 같이 능력이 있으시다.
3. 하나님은 그들을 악으로부터 보호할 뿐만 아니라 악에 대한 공포로부터도 보호할 뿐만 아니라 악에 대한 공포로부터도 보호하신다(5,6절). 여기에서는
(1) 큰 위험이 가정되어 있다. 그것에 대한 언급은 우리를 두려워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밤낮 우리는 위기에 노출되어 있다. 마음이 약해지기 쉬운 사람은 어느 시기에나 자기들이 안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의 사실(私室)로, 우리의 잠자리로 물러가며 할 수 있는 데까지 우리를 안전하게 만든다 할지라도, 밤에는 도둑과 강도와 바람과 공포가 있고, 이외에 공상과 상상으로 만들어지는 것들로 인한 공포가 있다. 그것은 때때로 모든 것 중에 가장 무서운 것이다. 우리는 "밤의 공포"에 대하여 읽는다(아 3:8). 또한 애굽인의 장자와 앗수르군을 죽인 것과 같은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이 있다. 우리가 우리의 몸으로 그 병균을 옮기는 한 자물쇠도 빗장도 병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확실히 우리가 자신을 볼 수 있는 낮에는 그렇게 크게 위험하지 않다. 그러나 "잔에도" 또한 흐르는 "살"이 있다. 그것은 보이지 않게 나른다. 우리가 깨어 있고 주위에 모든 친구들이 있는 "백주에도 황폐케 하는 파멸'이 있다. 그때에라도 우리는 자신이 안전할 수 없고, 친구들이 우리를 안전하게 할 수 없다. 다윗이 백성을 계수한 때문에 징벌하기 위하여 보내어진 염병이 황폐케한 때는 낮이었다. 때때로 어떤 사람은 이 시편이 그때에 쓰여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2) 여기에는, 이 위험한 가운데도 신자들에게는 위대한 안전이 약속되어 있다. "너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하나님은 그의 은혜로 가장 큰 위험 중에서 동요하는 의심스러운 공포로부터(그 공포는 고통을 가져 온다) 너를 지키실 것이다. 지혜는 너를 우발적인 두려움에서 지킬 것이며, 믿음은 너를 과도한 두려움에서 지킬 것이다. 너는, 화살이 너를 맞출 수는 있지만 너를 상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화살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것이 육체의 생명을 가져 간다고 할지라도 영적 생명을 침해하는 것에서 부터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그것은 영을 완전하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신자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어떤 "화살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왜냐하면 그 끝은 빗나가며 그 독은 제거되기 때문이다. "사망아 너의 쓰는 것이 어디 있느냐?" 그것은 또한 지명하신 곳을 맞추며, 다른 곳은 맞추지 아니할 것이다. 모든 탄알은 명령을 받는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가 뜻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그대로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4. 그들은 총괄적인 재앙 속에서도 특별한 방법으로 보호를 받을 것이다(7절), 죽음이 승리하고 다닐 때, 질병이 분노할 때, 그러므로 병으로 인하여 천인과 만인이 엎드러질 때 또는 전쟁에서 칼날로 엎드러질 때, "네 곁에서, 네 우편에서" 엎드러질 그 때에라도, 그들의 엎드러지는 광경이 너를 두려워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할지라도 그리고 만일 그들이 염병으로 엎드러진다면 그 엎드러짐이 네게 너무도 가까워서 네가 감염이 될 수 있을지라도, 그 죽음이 "네게 가까이 오지 못하며," "죽음의 공포가 네게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다." 보편적으로 타락한 때에도 순결을 지키는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황폐시키는 때에도 그들의 안전을 하나님께 위탁할 수가 있다. 대중이 우리 주변에서 죽을 때,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도 죽음을 위하여 준비하도록 일깨워질 수밖에 없는 때에라도, 우리는 "놀라서 두려워해서는"안 된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그들의 일생을 중노릇하는 것처럼, 그렇게 죽음의 공포와 노예가 되어서도 안 된다(히 2:15), 피뿌림은 천 사람이 엎드려 질 때에도 이스라엘의 장자를 안전하게 하였다. 하나님의 약속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루어지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경고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준 약속이다(8절), "오직 너는 묵도하리니, 악인의 보응이 네게 보이리로다." 이것은 아마도 염병으로 말미암아 애굽의 장자들이 멸망한 것에 대해서 언급한 것일 것이다. 그것은 압박하는 자들과 압박받는 자들의 확대에 대한 벌이었다. 이 이스라엘은 그들이 상하지도 아니하고 접촉되지도 아니한 것을 보았다. 죄인에 대한 저주가 삽화 될 때에 죄인들은 자기들의 눈으로 직접 의인에 대한 보상을 볼 것이다(눅 13:28). 그와 같은 성도들이 그들의 눈으로 악한 자의 보상을 보는 것은 성도들의 구원을 더욱 귀중하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사 66:24; 시 59:10).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복(시편 91:9-16)
여기에는 앞에 있는 약속들과 같은 취지를 가진 약속들이 계속된다. 이 약속들은 특별히 크고 귀중하다. 그리고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확실하다.
Ⅰ. 시인은 그 자신의 경험으로써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보호를 보증한다. 그리고 그가 말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우리는 그것에 의존할 수 있다. 관찰할 것은 다음과 같다.
1. 이 약속들로부터 유익과 위로를 받을 사람들의 특성. 그것은 1절과 거의 같다. 그들은 "자존자"를 "거처"로 삼는 자들이다(9절). 그들은 계속적으로 하나님과 같이 있으며 그 안에서 안식하는 사람들이며, 그의 이름을 성전과 강한 망루로 삼는 사람들이며 사랑 안에 거하며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그를 선택하기 위하여는 하나님 안에서 거주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그리고 나서 우리의 거처로서 그 안에서 우리의 삶을 살며, 그와 더불어 대화하고, 그를 기뻐하고, 그에게 의존하는 것도 우리의 의무다. 그리고 나면 하나님 안에서 거주하는 것이 우리의 특권이 된다. 우리는 법의 억류나 양심의 부르짖음을 시키거나 장애하거나 간섭함이 없이 우리 자신의 거처에 받아들여지면 그에게도 환영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면 우리는 또한 그 안에서 안전하고 완전한 평강으로 지켜질 것이다(사 26:3).
우리로 여호와를 우리의 거처로 삼도록 고무하기 위하여, 시인은 그가 그렇게 행함으로써 얻은 위로를 암시한다. "네가 너의 거처로 삼은 그분은 나의 피난처이시다. 나는 그가 견고하고 믿음직스러운 것을 발견하였다. 그의 안에는 너와 나 두 사람 모두를 위한 충분한 방이 있으며, 충분한 은신처가 있다."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도다." 사람들이 서로 밀칠 필요가 없다.
그 자존자를 거처로 삼은 모든 사람들에게는 확실한 약속이 있다.
(1) 그들에게 일어나는 것은 무엇이나 그들을 상하지 아니할 것이다.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근심이나 고통이 네게 일어난다 할지라도 그 안에는 진정한 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오며, 너를 성화(聖化)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너를 상하기 위하여 오는 것이 아니고, 너를 유익하게 하려고 오는 것이다. "현재는" 그것이 "기쁘지 않고 슬퍼보이지만,' 결국은 네가 좋게 되어 나옴으로 네 자신이 "화가 네게 미치지' 않았다고 고백할 것이다. 그것은 그 화가 단순한 화가 아니고 그 안에 선(善)이 혼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그것으로 말미암아 선이 생산된다. 아니 너의 인격뿐만 아니라 너의 거처까지도 하나님의 보호아래 있을 것이다. "재앙이 네게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너를 해하거나 또는 어떤 손해를 끼치지 않는다. Nihil accidere bono vrio malipotest - 즉 선인에게는 어떠한 화도 미치지 못한다(철학자 세네카).
(2) 빛난 천사가 그들에게 쓸모있게 될 것이다(11,12절). 이것은 귀중한 약속이며, 성도들의 위로요, 명예를 말한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시험한 마귀가 인용하여 남용하였다 해서 더 나쁘지 않다(마 4:6).
[1] 성도들에 관하여 천사들에게 주어진 명령을 보자. 천사들의 주(主)이신 하나님은 그들을 존재하게 하고, 그들에게 법을 주셨고, 그들의 소유자이시며, 자기를 봉사하게 하기 위하여 그들을 지으셨고, 일반적으로 교회를 위하여 뿐만 아니라 모든 각각의 신자들을 위하여, '그 사자(천사)들을 명하실 것이다." 그 천사들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킨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이 그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명령이다. 이것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위대한 돌보심을 표시한다. 그 명령은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되어 있다. 여기에 그 약속의 제한이 있다 .그들은 "너의 길에 너를 지킬 것이다." 그것은 "네가 너의 본분의 길을 지키는 한"이다. 그 길에서 바깥으로 나가는 사람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보호 밖으로 도망치는 것이다. 마귀는 이 말씀이 크게 자기를 반대하는 말씀임을 알기 때문에 유혹을 강요하기 위하여 이 말씀을 인용할 때 이 부분을 빠뜨렸다. 그러나 그 약속의 범위를 보라.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는" 것이다. 분명한 위험이 없는 곳에서까지도 우리는 그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가장 위급한 위험이 있는 곳에서도 그들은 우리의 길을 지 킬 것이다. 성도들이 가는 곳은 어디나 천사들이 그들과 함께 있도록 명령을 받는다. 종들이 어린 아이들과 함께 있도록 명령을 받는 것과 같다.
[2] 이 명령에 따라서 천사들이 성도들에 관하여 행하는 돌봄을 보자.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큰 능력과 큰 사랑을 표시한다. 그들은 위험에서 성도들을 돌볼 수 있다. 그들은 간호원들이 자기 품 속에서 어린아이를 돌보는 것과 같이 모든 친절과 사랑으로 성도들을 붙든다. 이것은 우리의 무력함과 그들은 우리에게 도움이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그들은 그들의 섬김에 있어서 겸손해 한다 "돌 이발에 부딪치지 않도록," 죄와 고난으로 걸려 성도들이 넘어지지 않도록 성도들의 발을 지킨다.
[3] 그들에게 정복될 어두움의 권세(13절)가 있다.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리라." 악마는 우는 사자, 옛 뱀, 붉은 용으로 불려진다. 그러므로 사도는 이 약속을 언급한 것같이 보인다(롬 16:20).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그리스도는 사탄의 머리를 깨뜨리고 영적 원수들을 결단 내셨다(골 2:15). 그를 통하여 우리는 정복자보다도 더 나은 자가 된다. 왜냐하면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족장들을 불렀듯이, 그리스도가 정복당한 원수들의 목에 우리의 발을 올려 놓으라고 초청하시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병을 고치고 마귀를 쫓아내고 특별히 뱀을 집을 수 있도록 그의 제자들에게 주신 모든 기적적인 능력 안에서 충분히 완성되었다고 생각한다(막 16:18). 또 이것은 굶주린 짐승으로부터 우리가 보존되는 하나님의 섭리에 적용될 수도 있다(들짐승이 너와 화친할 것임이라. 욥 5:23).
Ⅱ. 하나님 안에서 성도들에 대한 위로의 말씀을 그 자신이 말게 되고, 하나님이 그들을 위하여 저장하신 자비를 선포하게 된다(14-16절). 어떤 사람들은, 성도들을 위하여 천사들에게 주어진 명령으로 인하여 시인이 천사들에게 말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을 보호하라. 그들은 나를 사랑하며, 나는 그들에게 애정에 찬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1. 다음과 같은 사람들에게 이 약속들이 해당된다. 그들은 세가지 성격으로써 묘사된다.(1)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본성을 충분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그 자신을 알리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이름을 친숙하게 알지 않으면 안 된다.
(2)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또한 하나님을 바로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할 것이며, 그가 사랑할 유일하고 적합한 대상으로 알아, 하나님에게 그의 사랑을 둘 것이며, 그의 사랑을 어느 다른 경쟁자에게로 결단코 옮기지 아니할 결심을 가지고 하나님에게 그들의 사랑을 고정시킬 것이다.
(3) 그들은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들이다. 기도로써 하나님과 계속적인 교통을 유지하며, 어려운 경우에는 직접 하나님께 문의한다.
2.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하신 약속들을 보자.
(1) 하나님은 머지 않아 그들을 고난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내가 저를 건지리라"(14,15절). 이것은 이중의 구원을 표시한다. 삶과 죽음에서의 구원, 즉 고난 안에서 구원하는 것과 고난에 들지않게 구원하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의 능력과 우리가 당하는 고난의 정도를 조화시킨다면, 즉 만일 하나님이 고난 중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을 노하시게 하지 않도록 우리를 지키신다면 그리고 적어도 고난으로 인한 우리의 죽음을 면제하신다면, 그때 이 약속은 성취된다(34:19; 딤후 3:11; 4:18 을 보라).
(2) 그러는 동안에 그는 "환난 때에" 성도들과 "함께' 하실 것이다(15절). 만일 하나님이 그들의 고난을 즉시 끝내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은 그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는 은혜를 받을 . 하나님은 그들의 슬픔에 유의하시고 그들의 영혼이 역경 중에 있는 것을 아신다. 그리고 그의 말씀과 영으로 그들을 은혜스럽게 방문하실 것이고 그들과 대화하신 것이고, 그들의 하는 일일에 참여할 것이고, 그들을 지지하고 위로하실 것이며, 그들의 당하는 고통을 신성하게 하실 것이다. 이것이 고난 중에서도 그들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현존의 증거를 확실하게 할 것이다.
(3) 여기에서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실 것이다.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나는 기도의 영을 그에게 부을 것이다. 그리고는 약속들에 따라서 응답할 것이다. 때에 적합한 구원을 가지고 오는 섭리에 따른 응답, 그들의 영혼에 능력으로 그들을 강하게 하는 은혜에 따른 응답(138:3)을 하실 것이다. 이와 같이 충만한 은혜로 하나님은 바울에게 응답하셨다(고후 12:9)
(4) 하나님은 그들을 높이시고 고귀하게 하실 것이다. 환난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폭풍우가 없는 지역으로, 파도 위에 솟은 바위로, "내가 저를 높이리라"(사 33:16).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거룩한 경멸과 무관심을 가지고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내려다 볼 것이며, 또한 거룩한 야망과 관심을 가지고 저 세상에 있는 것들을 올려다 볼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높여질 것이다. "내가 그를 영화롭게 하리라." 하나님께서 계약을 맺으시고 교통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영화를 두시는 그런 사람들은, 그리고 그들로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하여 쓰시려고 의도하시는 그런 사람들은 참으로 영화롭다(요 12:26).
(5) 그들은 이 세상에서 충만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16절),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리라."
[1] 그들은 충분히 오래 살 것이다. 그들은 이 세상에 보내어진 목적된 일을 끝마치기까지, 그리고 하늘 나라를 위한 준비가 갖추어지기까지 이 세상에서 삶을 계속할 것이다. 그것은 충분히 긴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하여 또는 자기에 대하여 하실 일이 없으신데, 누가 하루인들 더 살기를 원할 것인가?
[2] 그들은 그것을 충분히 긴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은혜로 그들을 이 세상에서 떠나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그것을 원하도록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젊어서 죽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날들의 충만 속에 죽는 것이다. Satur diehum - 즉 삶이 만족하였다 악하고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만족하지 못한다. 아니 긴 생애로도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주시오, 주시오"라고 부르짖는다. 그러나 그의 보물과 마음이 저 세상에 있는 사람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그는 항상 살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6) 그들은 저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가질 것이다. 이것이 행운의 면류관이다. "나의 구원을 보이리라." 그에게 메시야를 보이리라(어떤 사람은 그렇게 되었다). 착하고 늙은 시므온은 그때 오래살아서 만족하였다. 그는 다음 같이 말할 수 있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나이다." 구약의 성도들에게는 비록 멀리 있으나 그리스도의 날을 보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없었다. 그 말씀은 더 좋은 나라, 하늘에 있는 조상들이 원하고 찾은 나라에 관하여 더욱 언급한 것인 듯싶다. 하나님은 그에게 그가 축복받은 상태(천국의 삶)가 되는 것을 보이실 것이다 그 상태는 우리가 여기서 희미한 거울을 통하여 보는 것을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듯이 되어져 있는 최고의 행복된 상태인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그는 그로 하여금 그것을 기대하게 하실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모든 약속들이 근원적으로 그리스도를 지시한다고, 그리고 그의 부활과 승천에서 성취된 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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