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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1

하나님의 자비와 신실하심(시편 89:1-4)

시편 기자는 이 당시 매우 비참한 처지에 놓여 있던 다윗 왕가에 대해 아주 슬픈 호소를 해야 할 입장이었으나 찬양의 노래로 이 시편을 시작한다. 그러므로 우리도 모든 일에 있어서, 어떤 처지에 놓이게 되더라도 감사를 드려야 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화재나 쓰라린 시련 가운데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려야 한다. 환란을 당하게 되면, 우리는 하소연함으로써 편하게 될 줄로 생각하나 기실은 찬양함으로써 더욱 편안을 얻을 수 있으며, 기쁨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불평을 감사로 전환시키도록 하자, 이 시편 구절에서 우리는 개인적인 이유에서든 공적인 이유에서든 가장 험악한 시절에도 찬송과 감사의 제목이 되는 것은 어떤 것인지 알게 된다.

1.. 그 역경이 어떤 것이든 간에 하나님은 선하시고 진실하시다(1절). 설사 우리가 현재의 암담한 차지와 하나님의 선하심이나 진실하심 사이에서 조화점을 발견하기가 어렵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남의 자비가 무진장한 것이며, 그의 진실하심은 깨뜨려질 수 없는 것이라는 원칙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우리가 기뻐하고 찬송해야 할 제목인 것이다. "나는 여호와의 지배하심을 영원히 노래하겠사오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찬양의 노래를 부르겠사옵고 내 자신의 위로를 위해 즐거운 노래를 부르겠으며, 타인들의 교화를 위해 마스길-즉 교훈의 노래를 부르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를 영원히 노래한다고 해도 그 제목은 마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동안은 하나님의 자비를 노래하지 않으면 안 되며, 우리가 가고 없더라도, 타인들이 또 뒤를 이어 하나님의 자비를 찬양할 수 있도록 훈련을 시켜야 하고, 천상의 세계에서도 그 찬양을 끝없이 부르게 될 것을 희망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비를 영원히 찬송하는것"이다. "내 입"과 내 "붓으로"(왜냐하면 우리는 펜으로써도 말하기 때문에) "나는 주의 성실하심을 대대로 알게 하겠사오며," 나 자신의 관찰과 경험으로써 하나님은 자기가 하신 모든 말씀에 진실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후손들에게 확신시키겠사오니 이는 그 후손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신뢰를 두도록" 가르치기 위함입니다(시 78:6).

2. 그 고난이 무엇이든지 간에 영원한 언약은 견고하며 확실하다(2-4). 여기서 우리가 대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시편 기자의 믿음과 희망. "현재 사태는 캄캄하게 보이며 다윗의 집이 완전히 뿌리 뽑힐 것처럼 불안하나 나는 인자하심이 영원히 세워질 것이라고 말했사오며 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정당한 근거를 얻습니다." 하나님 본성의 인자하심이 우리의 노래 제목이 되는 것처럼(1절), 우리를 위하여 언약속에 세워두신 자비는 더욱 그러하다. 그의 자비는 건축 중의 집의 영원한 안식처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영원히 세워질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새 예루살렘에서 얻을 것이라고 희망하는 영원한 거소도 이런 건물일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자비가 영원히 세워질 때에는 "무너진 다윗의 장막도 페허로부터 일으켜져서 옛적과 같이 세워질 것"이다(암 9:11). "그러므로" 자비는 영원히 세워질 것이니 "이는 주께서 자기의 성실하심을 바로 하늘에 견고히 세우실 것이기 때문이다. 빌 우리 기대에 어긋나는 몇몇 특수 사례가 있다고 하더라고 하나님의 약속은 취소된 게 아니다. 즉 그 약속들은 바로 하늘에(곧, 그의 영원하신 계획에) 확립되어 있다. 또 그 약속들은 이 하계의 변화에 영향받지 아니하며 지옥과 땅의 반대도 미치지 아니하는 곳에 있다. 물질계 하늘의 공고함은 하나님 말씀의 진실성을 상징한다. 땅에서 솟아오르는 수증기로 인하여 하늘에는 구름이 끼이지만 그런 구름조차 하늘에 닿지는 못하며 하늘을 변화시키지도 못한다.

(2) 이 신앙과 희망이 건축의 기초로 삼고 있는 언약을 추출해냄. 하나님께서 그것을 맹세하셨으므로 나도 그것을 말하였으니. 이는 약 속의 상속자들로 하여금 하나님 계획의 불변성을 만끽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로하려고 하신 말씀과(3절) 독백을 끌어 들인다, 내가 언약을 맺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 언약을 수행하겠다. 이 언약은 다윗과 맺은 것이다. 즉 다윗과 맺은 계약은 왕권에 관한 것으로 그를 다윗 왕가의 시조로 삼으며, 그를 통하여, 또 그를 위하여 왕손을 계속 나오게 하겠다는 것이었으니 이는 교회머리가 되신 그리스도와, 그의 영적 자손인 모든 신자들과 맺으신 은혜의 언약을 상징한다. 다윗은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요, 하나님의 종이라고 불리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스스로가 택하신 자로부터 물러나시는 변덕장이가 아니실 뿐더러 자기를 섬기는 자를 일축할 만큼 불의한 분도 아니시다. 두 가지 일이 이럼 언약 위에 자기 신앙을 구축하려는 시편기자에게 용기를 나게 해 준다.

[1] 그 언약의 비준, 그 언약은 맹세로 확증되었다. 여호와께서 맹세하셨으며, 그는 후회하지 않을 것인가.

[2] 그 언약의 영속성. 그 언약의 축복은 다윗 본인에게 확실히 한 것일 뿐만 아니라, 다윗 가문에서도 부과한 것이었다. 그의 가계는 계속될 것이라고 약속되었다-"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하게 할 것이니 다윗에게는 다스릴 아들이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렘 33:20, 21). 게다가 그 가게는 왕가의 가계를 계속 유지하리라는 것이다.-"내가 네 왕위를 대대로," 자손 만대에 걸쳐 "세우리라."

이 약속은 다윗의 자손에게서 나신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를 보았으니 그는 영원히 살아 계시며, 하나님께로부터 그 조상 다윗 왕위를 받으셨고, 의의 통치와 평강에는 끝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언약에 대해서는 시편 기자가 다시 더 풍부하게 언급할 것이다(19절 이하).

 

89:2 없음.

 

89:3 없음.

 

89:4 없음.

 

89:5

하나님의 영광 찬양(시편 89:5-14)

이 문단은 하나님께 대한 칭송으로 가득차 있다.

Ⅰ. 하나님은 어디서 또 누구에 의해서 찬송을 받으시는가?

1. 하나님께서는 위에 있는 천사들에게 찬양을 받으신다. 여호와여, 주의 기사를 하늘이 찬양할 것이요(5절), 즉 위 세계에 거주하는 영화스러운 주민들은 끊임없이 당신을 찬미하나이다. 너희 하나님의 천사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103:20).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그 일들을 가장 잘 알며 극히 친숙하게 정통하고 있는 자들에게조차 경이로운 일이 된다. 하나님의 일이 많이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그 일은 더욱 경탄의 대상이 되고 더 한층 찬양을 받는다. 우리는 이 일로 해서 하늘 나라를 사랑해야 하며 그 곳에 자기를 사모해야 하는 것이니 하늘 나라에서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의 기사를 찬양하는 일 이외에 우리가 할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은 땅 위에 있는 그의 성도들의 회중에게 찬양을 받는다(시은에서 찬양이 그를 기다린다). 비록 성도들의 찬양이 천사들의 찬송에는 전혀 미치지 못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그들을 주목하시고, 그 글을 기뻐 받으며, 그들로 인해 자기가 영광을 받으신다고 생각하신다. 주의 성실 설과 당신이 하신 약 속의 진실성은 바로 교회가 세워져 있는 반석으로서 성도들의 회중에서 찬양을 받을 것이니 성도들의 모든 것은 바로 그 성실성에 힘입으며 그들에게 항구적인 위로가 되는 것은 약속을 주셨다는 것과 그 약속을 하신 이는 신실하시다는 것이다. 땅 위 하나님의 성도들에게서 기대되어지는 일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다. 성도들이 찬송하지 않는다면 누가 할 것인가? 모든 성도는 하나님을 찬양하라. 특히 성도의 회중마다 그리할 것이다. 성도들이 함께 모일 때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참여할 것이다. 찬송을 드리는 성도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좋다. 그러면 한층 하늘 나라에 흡사할 것이다. 성도의 회중이 하나님께 드리는 영광에 대하여 그는 다시 말하고 있다(7절). 하나님은 거룩한 자의 회중에서 심히 엄위하시나이다. 성도들은 경건한 예배를 위해 회집하여야 하는 것이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공적으로 시인하고 서로를 격려하여 하나님께 영예를 돌리게 하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유지하는 중에서 또한 성도의 교제도 두터이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회중에서 하나님의 영화스러운 임재를 유의하여야 하는데, 이것은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친교가 추호라도 소홀히 여김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의 성소에서 엄위로우신 분이 신고로 크게 두려워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때에는 언제나, 은밀히 하나님께 접근하는 때에조차도,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경외감이 우리를 사로잡으며 우리에게 충만하여야 할 것이다. 하물며 많은 사람이 참석하는 공공 집회에서는 그 집회의 엄숙성으로 인하여 경외감이 한층 더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그를 둘러 있는 모든 자 위에 더욱 두려워할 자 시니 그를 둘러있는 모든 자는 그의 종으로서 끊임없이 그를 시중하는 자나 어떤 특별한 볼 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자들이다(레 10:3 참조). 존경과 경건한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만이 하나님을 흡족하게 섬길 수 있다(히 12:28).

Ⅱ.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곧 그가 완전무상한 존재시라고 고백하는 일이며, 그는 너무나 완전하신 분이라서 그와 같은 자는 아무도 없으며, 그에게 비견할 자는 아무도 없다고 고백하는 일이다(6절). 만일 하나님과경쟁할 수 있는 존재로 지목되는 자가 있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천사들 중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천사들은 하나님보다 무한히 뒤떨어진 존재들이다. 궁창에서 누가 여호와와 능히 비교될 수 있으랴? 여호와께만 돌아갈 경외와 찬양을 나누어 가지려고 도전하거나 인간의 충성을 가로채기 위해 하나님의 적수로 나설 자가 누구이냐? 그들은 권능있는 자의 아들들이긴 하지만 그들중 어느 누가 여호와께 비유될 수 있는가? 귀족들은 왕족들에게 버금가는 자들이다. 그들 사이에는 어느정도 맞먹는 지위가 인정된다. 그러나 하나님과 천사들 간에는 천양지차가 있다. 천사들은 그에게 필적하지 못한다. 거룩하신자 가라사대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나로 누구와 동등이 되게 하겠느냐? 고 하시느니라(사 40:25). 이 말씀에 대한 주장은 반복된다(8절). 주와 같이 강한 자가 누가 되지 않으며, 그와 같은 팔을 가지고 있지 못하거나 그의 목소리처럼 뇌성을 발하지도 못한다. 당신의 성실하심이 당신을 들렸나이다. 즉 당신 주위에 둘러서서 찬송으로 당신께 시중들며 당신의 심부름을 즐겨 다니는 천사들은 모두가 성실합니다. 혹은 당신이 사면팔방으로 행하시는 모든 일 가운데에서 당신께서는 자신의 말씀에 신실한 분이심을 증명하시고 어떤 왕이나 권력자보다 빼어난 분이심을 나타내십니다. 인간들 중에서 너무나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식언하기를 식은 죽먹듯 하는 자들이 자기가 한 말에 대해서 지켜야 하겠다는 생각이란 눈꼽만큼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강하시면서도 신실하시다. 그는 모든 일을 능히 행하실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정한 일이라고는 결코 행치 않으신다.

Ⅲ. 우리가 찬송할 때에 우리는 무엇에 대한 영광을 하나님께 드려야만 하는가? 여러 가지 일들이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다.

1. 극히 제어하기 힘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자유로운 지배력(9절). "주께서는 바다의 흉용함을 다스리시나이다." 그 어떤 것도 이보다 두려운 것은 없으며 이보다 위협적인 것은 없고, 인간의 힘으로 이것을 억제할 수가 없다. 성난 바다가 제 아무리 방종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보다 더 높이 솟아 오를 수는 없으며, 더 멀리 요동하지도 못하고, 더 세게 때리지도 못하며 더 이상 계속하지도 더 많은 해을 입히지도 못한다. "바다에서 그 파도가 일어날 때에 주께서는 즉시 그 노도를 진정시킬 수가 있으며 평정시킬 수 있으시며, 고요하게 하실 수 있으시며, 폭풍을 평온하게 바꾸어 버릴 수 있으십니다." 이것이 여기에서 전능한 행위로 등장하게 되었다고 할 것 같으면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였던 주 예수는 어떤 종류의 인간이었겠는가?

2, 하나님이 자기 교회의 원수들에게서 거두신 승리. 하나님께서 흉용한 바다를 다스리시고 그 파도를 평정케 하신다는 것은 이일을 상징하였다(10절). "주께서는 라합" 곧 많은 "교만한 대적"들을(이 말의 의미는 그렇다) "파하셨나이다." 당신께서는 특히, 때때로 "라합" 이라고 불리던 애굽을 살해당하여 전적으로 재기 불능한 자같이 분쇄하셨나이다. "주께서는 그 머리를 부수뜨렸으므로 능력이 강한 당신의 팔로 그 나머지를 흩으셨나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원수 및 자기 교회의 원수들을 다루심에 있어서 한 가지 길 이상의 수단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원수들을 즉시 살륙하셔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때때로 하나님은 그들을 흩으시는데, 이것은 그가 그들을 널리 보내셔서 자기 정의에 대한 기념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이다(시 59:11). 애굽을 산산조각이 나도록 깨뜨리신 일에 대한 기억은 바벨론이 가진 현세적 능력으로 갈팡질팡하던 교회에게 위로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동일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3. 상계와 하계의 모든 피조물 중에서 그가 가지고 계신 바, 이론의 여지가 없는 그의 재산(11,12 절). "인간들은 자기들이 가진 큰 소유물로 인해 영광을 받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여, 하늘은 당신의 것입니다. 땅도 또한 당신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신을 신뢰하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이 어떤 해를 가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 세계 안에 들어있는 모든 부와 이 세계의 모든 주민들, 곧 차용한 땅이나 차용한 사람이 양자가 모두 당신의 것이니 이는 "주께서 그들을 건설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건설하신 이가 소유권자로 자처함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가 열거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세계에서 가장 먼 지역, 곧 남과 북. 이 남과 북은 양극지방으로 사는 이도 없고 거의 알려져 있지도 않은 곳이다. "당신께서는 그 남과 북을 창조 하셨으므로, 그 지방을 잘 아시고 그곳들을 보살펴 주십니다. 그래서 그들로부터 찬사를 받으십니다." 북은 "공허한 곳 위에" 뎅그라니 "달려 있다"고들 한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소유주가 되시는 그곳에는 얼마나 풍부함이 있는가!

(2) 세계에서 가장 높은 지역. 그는 가나안에서 가장 높은 두 봉우리. 곧 "다볼과 헬몬" (전자는 서쪽으로. 후자는 동쪽으로 뻗어있다)을 언급하고 있다. "이들이 주의 이름을 인하여 즐거워할 것이니 이는 그 두 산이 당신의 섭리의 보살핌 아래 있으며, 당신의 제단을 위하여 제물을 산출하기 때문입니다." 작은 산들은 그들 자신의 풍부한 수확을 기뻐한다고 일컬어진다(시 65:12). 다볼산은 갈릴리에 있는 높은 산으로 이 산의 꼭대기에서 그리스도가 변화하셨다는 변화산으로 보통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이 들렸을 때, 이산은 참으로 그 소리를 즐거워 하였는지도 모른다.

4. 하나님께서 세계를 통치하시고 인간들의 일을 다스리실 때 그의 수단을 사용하시는 권능과 정의와 진리(13,14절)

(1)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능히 행하실 수 있으시다. 왜냐 하면 그는 전능하신 주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의 팔, 그의 손은 힘이 세고 강하여 자기 백성을 구하며, 자기 원수들을 멸망시키실 수 있다. 아무도 그 강력한 손의 힘에는 저항치 못하며 그 강한 손의 무게를 감당할 수도 없다. "그의 오른 손은 높아서 가장 높은 곳에도 이르르며" 그들의 그물을 별들 사이에 치고 있는 자들에게 조차 닿으신다(암 9:2, 3; 욥 1:4). 그의 "오른 손은" 자기가 하신 일 가운데에서 "높이우는데," 이는 그가 천만가지 사례속에서 그의 권능을 표시하시기 때문이다(시 118:16).

(2) 그는 공의롭지 못하거나 지혜롭지 못한 일리라고는 행하지도 않으셨고 또 결코 행차지도 앉을 것이다. 왜냐하면 "주의 보좌의 기초가 되는 것은 의와 공의이기" 때문이다. 그가 하신 모든 명령과 법령 중 그 어떤 것도 형평의 원칙과 지혜의 원리에서 어긋나는 것은 없으며, 하나님이 의롭지 못하다거나 어리석다는 비난을 들을 명령이나 법령은 하나도 없다. 정의와 심판은 주위 보좌의 "기초 준비요"(어떤 이는 그렇게 해석한다). 그 보좌를 "굳게 세우는 것"이다(또 딴 사람들은 그렇게 해석하다). 영원 전부터 자기 계획 중에서 통치를 예비하고, 영원까지 그 결과 중에서 통치를 확립시키는 것은 모두 그의 정의의 심판이다. 그는 언제나 자기 백성에게 친절한 일과 자기가 하신 말씀에 부합되는 일을 행하신다. "인자와 진실이 주의 얼굴보다 앞서 기며 당신을 위해 길을 비키라는 전령과 같이 당신의 길을 예비합니다-즉 주의 약속에는 진실함이 있으며 당신의 행함에는 인자가 있습니다-또 당신의 말씀과 다름없는 즉 당신의 말씀을 지키는 데에는 진실이 있고, 또 더 선한 행위 속에는 자비가 있습니다." 위대한 자들이 이렇게 행한다고 하더라도 칭찬이 자자할 터인데, 하물며 그 진실과 인자가 완전하신 위대한 하나님께 있어서랴!

 

89:6 없음.

 

89:7 없음.

 

89:8 없음.

 

89:9 없음.

 

89:10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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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14 없음.

 

89:15

이스라엘의 행복(시편 89:15-18)

시편 기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복되시다는 것을 충분히 설명하고 난 뒤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복되시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여수룬의 하나님과 같은 자는 아무도 없으니, 오, 이스라엘아! 너는 행복하도다! 백성이여! 너와 같은 자는 아무도 없도다." 이 백성은 특히 모든 진정한 신자들로 구성되는 복음 이스라엘의 상징으로 본문에서는 그들의 행복이 묘사되고 있다.

Ⅰ. 그들에게는 영광스러운 일들이 발견되며, 복된 기쁜 소식이 전달된다. "그들은" 즐거운 소리를 들으며 "기쁜 소리를 아는 백성이다"(15절).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암시해 준다.

1. 승리한 군대의 환호성과 왕을 부르는 소리(민 23:21). 이스라엘이 전쟁할 때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임재하심을 알리는 표징을 주셨다. "뽕나무 꼭대기에서" 들리는 "걸음걷는" 소리는 실로 "즐거운 소리"였다(삼하 5:24). 그들은 지축이 울리도록 개선의 노래를 부르면서 돌아오는 때도 있었다. 이러한 소리들은 즐거운 소리였다. 아니면

2. 제사를 드릴 때나 엄숙한 축제일에 나는 소리(시 81:1-3)였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행복이었으니, 곧 그들은 이러한 행사들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종교에 대하여 자유롭고도 개방된 고백을 드릴 수 있었고, 저희 제사시에 충만한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아니면

3. 희년의 나팔 소리이다. 그 소리는 노예된 자나 빚진 자에게 는 즐거운 소리였으니, 그들에게는 이 나팔 소리가 사면을 선포하였던 까닭이다. 복음은 참으로 즐거운 소리이니 그것은 곧 승리의 소리요, 자유하게 하는 소리요, 하나님과의 교통을 알리는 소리며 "풍부한 단비의 소리"이기 때문이다. 복음을 듣고 알고 영접해 들이는 자는 복이 있다.

Ⅱ. 하나님의 은총을 알리는 특별한 표상이 그들에게 허락됨. "여호와여, 저희가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서 걸어다닐 것입니다. 그들은 당신의 지시하심에 의거하여 스스로를 다스리며 당신의 눈길을 따라 인도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당신의 위로하심을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그것을 소유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은 항상 기쁨의 소재가 되며, 그들에게 끊임없이 즐거운 일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베푸시는 강력한 영향력 아래에서 경건한 생활의 요소가 되는 모든 행사를 골고루 섭렵하게 될 것이니 당신의 인자하심은 저들의 의무를 즐거운 것이 되게 할 것이며, 그들이 의무를 수행할 때에 진지한 태도를 지니게 할 것이고 여호와께서 기뻐받으시는 것을 저희 목표로 삼도록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모든 위안을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얻으며, 또 그의 사랑 안에 우리 자신을 붙잡아 매두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는 때에라야 우리는 여호와의 빛 가운데에서 다닌다고 할 수 있다.

Ⅲ. 그들에게는 기쁨의 재료가 부족한 때는 없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복이 있다. 왜냐하면 만일 그들 자신의 잘못만 없다면, 그의 이름 안에서, 즉 하나님이 자기 스스로를 알리시는 모든일 가운데서, "그들은 종일토록 즐거워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뻐하며, 하나님을 자기들의 지극한 즐거움으로 삼는 자들은 괴로움을 상쇄시키고, 자기의 슬픔을 침묵시키기에 충분한 것을 얻는다. 그러므로 그들의 기쁨은 완벽하며(요일 1:4) 항구적이다. 항상 기뻐하는 것은 그들의 의무이다.

Ⅳ. 저들이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들의 영광이요 위엄이다. 그들은 복되다. 왜냐하면 그들은 높기 때문이다. 실로 주안에서, 주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은 의와 힘을 얻게 되며 그로 말미암아 신께 용납되도록 천거함을 받는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은 그를 영광으로 여길 것이다"(사 45:24, 25).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그러하다(16,17).

1. "그들은 주의 의로 높아질 것이며 그들 자신의 의로움으로 높아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순전히 그리스도의 의로 인하여 위험 속에서 높이 들려서 존귀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는 위엄을 얻게 하는 의복일 뿐만 아니라 방어용 의복도 된다.

2. "당신께서는 저희 힘의 영광이십니다." 즉 "주께서는 그들의 힘이시오, 당신께서 그들의 힘이시라는 사실은 곧 그들의 영광이며, 바로 그들이 자랑으로 여기는 일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언제나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돌릴지어다."

3.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소망하는 당신의 은총으로 "우리의 뿔은 높아질 것입니다." 뿔이 나타내는 것은 아름다움과 풍요로움과 능력이다. 사랑하는 자로 용납되는 자들은 이 모든 것을 받게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총애하시는 자가 되는 것보다 더 큰 인간출세가 이 세상에 또 어디 있으랴?

Ⅴ. 저들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은 곧 그들을 보호하는 것이며 완전하게 하는 것이다(18절). 왜냐하면 "우리의 방패는 여호와께 속하여 있으며, 우리 왕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스리는 분이시라면 그는 또 우리를 지켜 주시는 분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해를 가할 자가 누구이냐?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성채를 세우시며 그들의 왕을 지명하신 것은(어떤 사람은 이렇게 해석한다) 이스라엘의 행복이었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 주위에 불벽"이 되어 주시고, 거룩한 자로서 저희 거룩한 종교의 창시자요, 중심점이 되셨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행복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의 왕이었고 그들의 한가운데에서 그들의 영광이 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며, 바로 그 거룩한 분이시다. "그가"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셨다는 사실보다 더 복된 이은 이 특수 백성에게 있을 수 없었다. 이제 여기에 등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복된 백성이라는 설명과 그들이 현재 처해 있는 비극적 상황을 조화시키기 어렵다는 점이다.

 

89:16 없음.

 

89:17 없음.

 

89:18 없음.

 

89:19

다윗과 맺었던 언약(시편 89:19-37)

하나님께서 다윗과 그 자손에게 하신 언약은 먼저 언급 되었었는데(3, 4) 이 문단에서는 그것이 부연되고 있으며, 이전에 왕가에게 베풀어 주셨던 은총이 이제는 거의 사라지고 몰락하게 된 현실을 들어 하나님께 항변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확실히 그리스도를 겨냥하는 것이어서 다윗에게서 보다 그리스도에게서 더 한층 그 성취를 보았던 것이다. 아니, 여기에 나오는 어떤 구절은 다윗에게 전혀 적용할 수가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께 대한 것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되고(그러므로 호세아 3장 5절에서는 그를 "우리 왕 다윗"이라 칭한다). 여기에서 구속주께 대해 하시는 약속은 매우 크고도 귀한 약속이어서 구속받는 자들이 믿음과 희망을 건축하기 이한 튼튼한 기초가 된다. 우리가 구속을 얻는데 대한 위로는 구속의 언약에서 흘러나온다. 우리의 모든 근원은 그것에 있다(사 55:3). "내가 너와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맺을 것이니 곧 다윗에게 약속한 확실한 은사니라." 이제 본문에서 우리는 그 확실한 은사들에 대한 설명을 듣게 된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관찰하자.

Ⅰ. 우리로 하여금 그 약속 위에 믿음과 소망의 집을 세울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는 그 약속의 진실성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확신을 주는가!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다음과 같다.

1. 그 말씀은 어떻게 전달되었는가?(19절) "주께서는 이상 중에 당신의 거룩한 자에게 말씀하셨나이다." 다윗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여기에서 특히 언급되는데 그것은 선지자 나단에게 환상으로 전달되었다(삼하 7:12-17).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가 그들의 왕이었던 그때에"(18절), 하나님은 다윗을 자기의 부왕으로 임명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거룩한 자들이 되는 모든 예언자들에게는 주께서 그리스도께 대하여 이상 중에 말씀하셨고, 특별히 영원 전부터 자기 품속에 누워있던 그리스도 자신에게는 전체적인 구속 계획을 완전히 알게 하셨던 것이다(마 11:27).

2. 그 약속은 어떻게 맹세하셨으며 어떻게 인준하셨는가?(35절) "내가" 바로 소중한 내 속성인 나의 거룩함으로 한 번 맹세하였도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거룩함으로 맹세하셨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들어 맹세하신 것이다. 왜 그런고 하면, 하나님은 거룩함 이외의 다른 요소로 둔갑하는 경우에는 곧 하나님이 아니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맹세는 한 번으로 충분하다. 하나님은 다윗이 한 것과는 달리(삼상 20:17) 재차 맹세하실 필요가 없으시다. 그 이유는 그의 말씀과 맹세가 두 가지 변치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맹세로" 제사장이 되신 것과 같이(히 7:21) 또한 그는 맹세로 왕이 되셨다. 그것은 그의 왕국과 제사장 되심이 둘다 불변하는 일인 까닭이다.

Ⅱ. 약속을 주실 자에 대한 선택(19,20). 다윗은 하나님께서 손수 선택하신 왕이었고, 그리스도 역시 그런 분이시다. 그러므로 이 양자는 "하나님의 왕들"이라 칭찬을 받는다(시 2:6). 다윗은 위력이 있었고, 용사여서 대업을 이루기에 적합하였다. 그는 백성 중에서 뽑힘을 받았다. 그는 존귀한 자들 속에서 택함을 입은 게 아니라 목자들 중에서 선택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발견하셨고 그를 높이셨으며, 그에게 도움을 내리셔서 그에게 기름 붓도록 사무엘에게 명령하셨다. 그러나 이 사실은 특별히 그리스도께 적용할 수가 있다.

1. 그는 능력이 크신 분이시다. 그는 어느 모로 보아도 자기가 맡을 대 사업에 대한 자격을 갖춘 자로서 "최대한도로 구하실 능력이 있으시며"-힘에 있어 크신 분이시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사랑에 있어서도 크신 분이시니 그는 시험당하는 자들을 측은히 여기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는 "능하신 하나님" 이시다(사 9:6).

2. 그는 "백성 중에서 택함을 입으셨으니," 우리 중의 하나요, 우리 뼈 중의 뼈요, 혈과 육으로 우리와 동참하시는 분으로 선택되셨다. 그는 인간을 위해 정해진 분으로 인간들 사이에서 취하심을 입으셨으니 이는 그의 엄위로우신 공포로 인하여 우리 인간들이 두려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3. 하나님께서는 그를 찾아내셨다. 그는 하나님께서 친히 제공해신 구세주시다. 왜냐하면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보상하는 "대속물을 발견하셨다"(욥 33:24). 우리 인간은 이런 위업을 떠맡을 적임자를 찾아낼 수 없었다(계 5:3, 4).

4.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돕는 힘을 더하셨으니" 그를 도와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 그의 안에 도우는 힘을 비축해 두기도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넘어진 자를 도와 다시 일으키는 일과 택함받은 잔존자들을 도와 하늘 나라로 갈 수 있게 하는 일을 그에게 책임지우셨다. "내 안에는 당신의 도움이 있나이다"(호 13:9).

5. 하나님께서는 그를 선지자로, 제사장으로 자기 교회의 왕으로 임명하시고, 권능으로 옷입히시며,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셔서 자기의 우편에 앉히심으로써 그를 높이셨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선택하여 사용하시는 자들을 높이실 것이다.

6.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기름을 부으셨고, 그의 직분에 합당한 자격을 그에게 부여하시며, 그로 하여금 그 일에 견고히 서도록 하셨으니 곧 그에게 성령을 부으시되 헤아릴 수 없는 양의 성령을 부으셔서 그의 동료들보다 무한히 높게 하신 것이다. 그는 "메시야"라 "그리스도"라,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 불리워진다.

7. 이 모든 일에 있어 하나님은 그를 자기 자신의 종으로 예정하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원한 목적의 성취와 자기 왕국의 세력을 인간들 중에서 확장시키기 위해서였다.

Ⅲ. 이 택함받은 자에게 하신 약속, 곧 모형이 되는 다윗과 원형이 되는 다윗의 자손에게 하신 이 약속에는 은혜로운 일들뿐만 아니라 영광된 일들도 언급되어 있다.

1. 왕이자 하나님의 종인 그에게 관하여. 그런데 그를 위해 마련하시는 일은 동시에 그가 사랑하는 모든 추종자들을 위해 마련하는 일도 된다. 여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약속되고 있다

(1) 하나님이 그 곁에 지켜 서서 그가 하는 매사에 있어 그를 강하게 하시리라는 것(21절). "내 손이 그와 함께"할 뿐만 아니라 약속에 의하여 "견고히 될 것이니," 내 손은 너무나 견고하게 되어 그는 그로 인하여서 확실하게 설 것이며, 그의 모든 직분에 있어서 조금도 흔들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죄인에게 그의 일들이 침해를 당하며 도전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의 일들은 추호도 침식되지 않을 것이며, 어느 하나도 전복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에게는 행해야만 하는 많은 어려운 일들이 있었고 꺾지 않으면 안 되는 많은 가혹한 대우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임무를 부여하신 분이 그가 위임받은 일을 실행하는데, 모자라지 않는 충분한 힘을 그에게 주셨다. "내 팔이 또한 그를 강하게 할 것이니 그로 하여금 모든 난관을 돌파할 수 있게 하며, 그 모든 시련 중에서 버티어 낼 수 있도록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강하게 하시려고 도모하시는 자의 손에서 좋은 일이 성사되지 않는 법이라고는 없다.

(2) 그는 자기 대적에게 승리할 것이며, 그의 원수들이 그를 침해하지 못하리라는 것(22절). "악인의 자손이 그를 강탈하지 못할 것이며," 그를 곤고하게 하지 못할 것이다. 최초에 화평을 깨뜨린 자는 화평을 이룩하고자 노력하는 자에게 대항하려고 할 것이며 그의 계획을 폭파시킬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려고 덤빌 것이다. 그러나 그 자는 단지 그의 발뒤꿈치에 상처를 줄 정도밖에 미치지 못하였다. 더 이상은 그를 강탈할 수도 괴롭힐 수도 없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부채를 위하여 보증이 되셨으며, 사탄과 사망은 그것으로써 그에게 타격을 입힐 유리한 고지로 삼고자 하였으나 그는 하나님의 공의가 요구하시는 바를 충족시키셨으므로, 그리고 난 다음에는 사탄이나 사망도 그에게 강요할 게 없었던 것이다. "이세상의 통치자가 오지만 그는 내게 아무 권한도 없다"(요 14:30). 아니, 그들은 그보다 더 우세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앞에 엎드러질 것이다(23절). "내가 그의 얼굴 앞에서 그 대적을 때려 뉘겠다." 이 세상의 통치자는 추방될 것이며, 주권자와 권세 자들은 늑탈당할 것이니 그는 사망 그 자체에게 죽음이 되며, 음부에게 멸망시키는 것이 될 것이다(호 13:14). 어떤 이는 이 구절을, 유대 민족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파멸에다 결부시키는데, 그들은 그리스도를 핍박하여 사형시킨 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미워하며 그로 하여금 자기들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모든 원수들은 그 앞에 끌려 나와 살륙을 당할 것이다(눅 19:27).

(3) 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계약을 위임받은 위대한 수탁자(受託者)가 되실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로우시고 진실하시리라는 것(24절). "내 성실함과 인자함이 저와 함께 할 것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인자하심은 다윗과 함께 하셨다. 하나님은 계속 그에게 자비로우셨고 그는 스스로가 신실하신 분임을 그렇게 입증하셨다. 하나님의 신실과 인자는 그리스도와도 함께 하셨으니 하나님은 그에게 하신 자기의 모든 약속을 실행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다는 아니었다.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자비와 우리에게 대한 그의 신실하심은 그리스도와 더불어서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기뻐하실 뿐만 아니라 그리스고 안에서 우리도 기뻐하신다.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긍정을 얻고 "아멘" 하는 응답을 얻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되는 일이다. 그래서 만약 하나님의 성실성과 자비로 은혜를 얻고자 희망하는 불쌍한 죄인이 있다면 그는 그것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되는 일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성실과 자비는 그리스도의 수중에 기탁돼있으므로, 누구든지 그것을 얻고자 하거든 그리스도께 구하지 않으면 안된다(28절). "저를 위하여 내가 내 자비를 영구히 지킬 것이니 " 이는 그에 의해 내 자비가 처분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의 중재라는 수로(水路)를 따라 하나님의 인자하심이라는 모든 지류가 영원히 흘러내린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생에 이르도록 바라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이다"(유21절:요 17:2).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가 그를 통해 우리에게 흘러나오듯 하나님의 약속도 그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확실해진다. "내 언약은 그와 함께 꿋꿋이 서 있을 것이다." 이 언약은 곧 그와 맺은 구속의 언약인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맺은 은혜의 언약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새 언약은 언제나 새롭고 굳게 확립되어 있으니, 이는 그 약속이 중보자의 손에 맡겨져 있기 때문이다(히 8:6). 이 언약은 꿋꿋이 서 있으니, 이는 그 약속이 이런 기초 위에 서 있는 까닭이다. 그리고 이것은 주 예수의 영원하신 영광에 이바지하는 것이니, 곧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큰 소송이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이관되었고, 아버지께서 모든 심판을 그에게 위탁하셨는데 이는 온 인간으로 하여금 그를 존귀하게 하도록 하시기 위해서였다(요 5:22, 23). 그러므로 본문에서는 "내 이름을 인하여 그의 뿔이 높아질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이름이 그에게 있다"는 것과(출 23:21), 그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곧 그의 영광이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명령하셨으므로 나는 그대로 행하노라."

(4) 그의 나라는 광대하게 확장되리라는 것(25절). "내가 그의 손을 바다위에 세우며"(그로 하여금 바다와 바다의 섬들을 지배하도록 하겠다) "그의 오른 손을 강들 위에 세우게 할 것이니" 곧 강들로부터 물을 공급받는 내륙 지방을 지배하게 할 것이다. 다윗 왕국은 대해(大海)와 홍해까지 그리고 이집트의 강하와 유프라데스의 하수까지 넓혀졌다. 그러나 이 말씀이 그 완전한 성취를 보게 되는 것은 메시야의 왕국에서이니 "이 세상의 나라들이 주 여호와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고(계 11:15) 섬들이 그의 율법을 기다리는 때"에는 더욱 더 그 성취를 보게 될 것이다.

(5) 그는 하나님을 그의 아버지로 인정할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자기 아들로 인정하시리라는 것(26, 27절). 이 말씀은 나단이 솔로몬에게 한 전언 곧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삼하 7:14)라는 말씀에 대한 주석이다. 그런데 이 관계는 양쪽에 다 인정이 된다.

[1] "당신은 내 아버지십니다"고 그는 내게 부를 것이다." 솔로몬이 그렇게 불렀음직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도 육신으로 계시던 날에 그렇게 부르셨음을 우리는 확실히 믿고 있으니 곧 그는 하나님께 강력한 부르짖음을 드렸고, 그를 "거룩하신 아버지라", "의로우신 아버지" 라 부르셨으며, 또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라고 부르도록 가르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고뇌 중에 "당신은 나의 아버지십니다"고 하나님께 부르짖으셨고(마 26:39, 42 "나의 아버지여!"), 십자가 위에서는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아버지여, 당신의 손에 내 영혼을 맡기나이다"라고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같이 그를 자기 하나님으로서 바라보셨으므로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셨고, 그의 전 구속 사업 중에서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복종하신 것이며(그는 "내 하나님이요 너희"의 하나님이시다. 요 20:17), 또한 자기 구원의 반석으로서 바라보셨으니, 곧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사업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지탱시켜 주시며 끝까지 버틸 수 있도록 지원해 주시고, 그를 승리자 이상으로까지 만드셔서 완전한 구주로 삼으실 분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꺾이지 않는 결의를 가지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견디셨으며, 수치를 안중에 두지 않으셨으니" 이는 그가 의롭다고 여김을 받으며, 영화롭게 될 줄을 아셨기 때문이다.

[2] "내가 저를 나의 장자로 삼을 것이다." 나는 이 말씀이 어떻게 다윗과 결부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가" 되고 "만물의 상속자"가 되심은 그의 큰 특권이다(골 1:15:히1:2, 6).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그리스도께 주어지고 아버지가 만물을 그에게 양도하셨을 때" 에는 하나님께서 그를 자기의 맏아들로 삼으신 것이요, 세상의 임금들보다 그를 훨씬 높고, 더 위대하고, 더 명예로운 분으로 삼으신 것이니 이는 그가 왕 중의 왕이요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고 있기" 때문이다(벧전 3:22).

2. 그의 자손에게 언급하여. 하나님의 언약은 언제나 계약자의 자손까지도 포함하는데 이 말씀도 그러하다(29,36절). "그의 자손은 영원히 지속하게 될 것이며" 그 위도 영구케 될 것이다. 이제 이 말씀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적용하거나 다윗과 결부시킴에 따라서 상이하게 이해될 것이다.

(1) 만약 우리가 이 말씀을 다윗에게 적용한다면 우리는 그의 자손이 되는 솔로몬 왕이나 유다의 그 다음 임금들, 즉 다윗의 허리에서 나온 열왕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 임금들은 타락하여 그들의 아비 다윗의 정신대로 살지 않고, 다윗의 걸음대로 걷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런 경우 그들은 이때에 다윗 가문이 그러했던 것처럼 신의책망을 받을 것이라고 각오하지 안으면 안 되었다(38절). 그러나 비록 그들의 잘못을 교정시킨다고는 하나 그들을 포기하지는 않으시며, 그들의 상속권을 박탈하지는 않으시리라는 이 말씀은 그들에게 격려가 된다. 이 범은 나단의 전언(傳言)에서도(삼하 7:14, 15) 언급되어 있다. "그가 불의를 범하면 내가 그를 징계하겠으나 나의 인자함이 그로부터 떠나지는 아니할 것이다." 다윗의 많은 후손들이 악행으로 인하여 그 의 가문에 추문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다윗가(家)는 존속하였으며, 아주 오래도록 왕의 권위를 유지하였고,-유다 왕국이 계속되는 동안은 다윗의 후손이 왕위에 있었으며, 유다 왕국의 왕권은 딴 가문에 넘어간 적이 없었으니 이것은 여로보암 가문이 처음 왕가였고, 그 다음에는 바아샤 가문이 왕가로 들어섰던 열지파의 왕국과는 대조적이었던 것이다-게다가 다윗 가는 그 왕위가 영원히 지속될 다윗의 자손이 올 때까지 계속 유명한 가문으로 보존되어 왔던 것이다(눅 1:27, 32; 2:4, 11 참조). 만일 다윗의 후손이 후대에 하나님을 버리고 그들의 의무를 방기하며 반역하여 죄악의 길로 나아간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 위에 심판을 내리셔서 그들을 황폐케 하며 다윗 가문을 파멸케 하실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윗에게서 자기 인자를 거두어 가 버리지 않으시며, 다윗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지 않으실 터였다. 왜냐하면 다윗의 허리에서 나오실 메시야 대에 이르러서는 이 모든 약속이 완전히 성취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유대인들이 버림을 당하는 때에도 사도는 아브라함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이 파기되지 않은 것이라고 설명하는데, 이는 그 약속이 믿음의 의로운 상속자들인 아부라 함의 영적 자손에게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롬 11:7).

(2) 우리가 만약 이 구절을 그리스도께 적용한다면 우리는 그의 백성들이 되는 모든 신자들이 곧 그의 영적 자손이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자녀라고 해석해야 된다(히 2:13). 이것이야말로 영원히 존속하게 될 자존이며, 그들의 마음과 교회 안에서, 그들 신자들의 가운데에서 누리는 그의 왕위는 "하늘의 날과 같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끝까지, 자기를 섬기며, 자기를 영광되게 할 백성을 이 세상에서 소유할 것이다. "그는 자기의 후손을 보게 될 것이다." 즉 "그의 날들은 장구할 것이다." 이 거룩한 자손은 시간과 날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때에 영화스러운 상태에서 영원히 존속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보위와 왕국도 영속적일 것이니, 그의 은혜의 나라는 온 시대를 통하여 계속될 것이며, 그의 영광의 나라는 영원 무궁토록 지속될 것이다.

[1] 여기에서 그리스도 왕국은 그의 백성들의 죄와 고통으로 말미암아 그 존속이 의심스러워진다. 그들의 불의와 재난은 그 왕국의 파멸을 예고한다. 여기에 이런 사례가 제시됨은 사실상 그런 경우에 부딪치는 때에라도 우리가 범죄치 아니하고, 그 언약의 공고함을 이 사실과 조화시켜 확실히 믿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첫째, 그리스도 왕국의 신민들에게는 많은 잘못이 있으리라는 암시가 여기에 주어지고 있다. 그의 자녀들은 태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법을 저버릴 수"도 있으며(30절), 오류로 말미암아 "그의 규례를 어길 수" 도 있다(31절). 흠에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지는 흠도 있다(신 32:5). 교회의 내부에는 많은 부패한 것들이 있으며 마찬가지로, 교회의 지체들이 되는 신자들의 심중에도 많은 부패한 것이 있어서 이들을 썩게 하는 것들이 겉으로 나온다.

둘째, 그들은 그런 잘못으로 인하여 따끔한 맛을 보리라고 여기에서 경고받고 있다(32절). "내가 지팡이로 저희 범과(犯過)를 다스리겠으니" 저희 허물은 타인의 잘못보다 더 일찍 갚을 것이다. "내가 너희만을 알았으니 그러므로 나는 너희를 벌하리라"(암 3:2). 그들이 그리스도께 연관을 맺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셈을 치르도록 호출을 당하면 변명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닥치는 고난은 어떠한지 관찰해 보자.

1. 그것은 도끼나 칼이 아니라 단지 막대기이다. 그 지팡이는 멸망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교정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그 고난의 부드러움을 의미한다. 그 매는 사람들이 자기 자녀들을 가르칠 때 사용하는 그런 막대기이다. 그래서 그것은 의로움의 화평한 열매를 열게 하는 막대기 고도고난 속에서 또 고난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선한 계획을 의미한다.

2. 그것은 하나님의 수중에 들려 있는 막대기이니("내가 그들을 벌하겠다"), 그는 지혜로우셔서 자기가 행하시는 일을 알고 계신 분이시고 은혜로우셔서 최선의 일을 행하실 분이시다.

3. 그것은 극히 필요한 때가 아니면 아픔을 느끼지 않게 할 막대기이다. "만일 그들이 내 법을 깨뜨리면 나는 매로 저들의 죄과를 다스리겠지만," 그 이외의 사람들은 그러치 않겠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명예가 그 정당성을 입증받고, 그들이 겸손해져서 원래의 선한 상태로 환원되리라는 것은 필수적이다.

[2] 그리스도 왕국의 존속은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하신, 깨뜨릴 수 없는 약속과 맹세로 말미암아 확실한 것이 된다(33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에게서 내 인자함을" 전체적으로 또 최종적으로 "거두어 들이지는 아니하겠다." 첫째, "그들의 도발에도 불구하고, 내 언약은 깨뜨려지지 않을 것이다." 고난은 언약의 사랑과 일치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는 여러 가지 고난이 그 언약의 사랑으로부터 유래하기도 한다 . 비록 다윗의 자손이 징계를 당하는 때라도 그들의 상속권이 박탈되는 결과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이 넘어지는 수는 있으나, 축출당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은총은 자기 백성에게 계속 내리는데 이는 다음 두 가지를 위해서이다.

1. 그리스도를 이하여. 그에게는 우리를 위한 자비가 저축되어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가 그에게서 나의 인자함을 거두지 아니하겠노라"(33절). "내가 다윗에게 거짓을 말하지 않겠노라"(35절) 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무가치 하나 그는 가치가 있으시다.

2. 언약을 위하여. "나의 성실함도 페하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내가 파하지 아니하리로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력을 깨뜨리고 모독하며, 그 규례들을 더럽혔던 것으로(그 단어의 의미는 그러하다) 생각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나 나는 내 언약을 깨뜨리지 아니하며 모독하지 아니하며, 더럽히지 않겠노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꼭 같은 말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맹세하신 것은 그가 해와 달이 존속하고 있는 한, 세상에 교회를 존재하도록 하시리라는 것이다(36,37절). 해와 달은 창조주의 지혜와 능력과 인자하심에 대해 궁창에 있는 충실한 증인이며, 시간이 계속되는 동안 존속할 것이니 해와 달은 시간이 척도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자손은 세상의 빛으로서 영원히 견고케 될 것이니," 세계가 서 있는 동안에는 이 세상 안에서 빛나며, 이 세계가 종막을 고하면 그들은 아버지의 궁창에서 빛나는 빛으로 견고히 서 있을 것이다.

 

89:20 없음.

 

89:21 없음.

 

89:22 없음.

 

89:23 없음.

 

89:24 없음.

 

89:25 없음.

 

89:26 없음.

 

89:27 없음.

 

89:28 없음.

 

89:29 없음.

 

89:30 없음.

 

89:31 없음.

 

89:32 없음.

 

89:33 없음.

 

89:34 없음.

 

89:35 없음.

 

89:36 없음.

 

89:37 없음.

 

89:38

하나님께 대한 탄식(시편 89:38-52)

이 귀절들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읽게 된다

Ⅰ. 다윗 가문이 현재 처해 있는 참상에 대하여 매우 우울한 불평을 하고 있는데, 시편 기자는 다윗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과 다윗 집이 처한 현재의 참상 사이에서 조화점을 찾기가 힘든 줄로 생각하고 있다. 주께서는 물리치셨나이다. 때때로, 하나님의 섭리와 그의 약속을 조화시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간에 일치점이 있으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행위는 자기의 말을 이루는 기이며,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과 말은 서로가 모순되지 아니한다.

1. 다윗의 집은 하나님께 대한 이해 관계를 상실하였던 것같이 보이는데, 실은 하나님께로부터 얻는 이익보다 더 큰 것은 없으며 그보다 다윗 집의 아름다움이 되는 것은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기름부은 자를 기뻐하였었으나 이제는 그에게 노하였고 (38절)이전에는 그 가문과 언약을 맺으셨으나 이제는(시편자가 아는 한)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무효화시켜 버리셨으니 그 계약의 일부 조항만 폐기하신 것이 아니라 전면 취소하셨다(39절). 그러나 우리가 만약 섭리의 꾸짖음이 언약의 백지화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신의 책망을 잘못 이해하는 거이 된다. 기름부음을 받은 크신 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 달리셨을 때는 하나님께서 그를 물리치신 것 같고 그에게 화를 내신 것처럼 보이지만 그리스도와 맺은 언약을 무효로 만드신 것은 아니었으니, 왜냐하면 그 계약은 영원히 확립되었기 때문이다.

2. 다윗 집의 명예는 사라졌고 티끌 속에 묻혔다. 주께서는 그의 관을 땅에 던져 밟히게 하심으로써(그 관은 언제나 신성한 것으로 간주되었었는데) 그것을 욕되게 하셨나이다(39절). 주께서는 저의 영광을 그치게 하시고(모든 지상의 영광은 너무나 불안정하며 너무나 쉽사리 시들어 버린다) 주께서는 그의 위를 땅에 엎으셨으니, 왕을 폐위시키실 뿐만 아니라 왕국에 종막을 내리게 하셨습니다(44절). 만약 이 시편이 르호보암 시대에 저작되었다면 이 왕국의 최대 지역 즉 6분의 5에 해당하는 지역에 대해서는 이 말씀이 타당하다. 만약 집필 시기가 시드기야 시대라면 가련할 정도로 조금 남은 부분에 대해 이 말씀은 아주 현저하게 타당하다. 왕좌와 왕관은 흔들리기 쉬운 것들이고 티끌 속에 묻히는 수가 많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적 자손에게는 영광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으니, 이것은 사라져 버리지 않는 왕관이다.

3. 그것은 노출되어 있어서 모든 인근 사람들에게 먹이가 되었으며 그들은 저 오래되고 고귀한 가문을 모욕하였다(40절). 주께서 저의 모든 울타리를 파괴하셨으며 (그들을 막아 주던 모든 것들 특히 하나님의 계약과 약속이 자기들 주위에 만들어 주셨다고 그들이 생각한 보호의 울타리들) 그의 성채조차 훼파하셨으므로, 그 울타리나 성채는 그들을 보호해 주는 피난처가 된다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에게는 치욕이 되었다. 그러자 길로 다니는 모든 자들은 그를 다 탈취하며 (49절).그를 쉽사리 먹이로 삼습니다(시 80:12, 13 참조).그 원수들은 무례하게 말한다. 그는 그의 이웃에게 치욕거리이며 그의 이웃들은 그토록 대단하던 명예로부터 그가 몰락함을 보고 의기 양양해 한다. 아니, 모든 사람이 그의 재난을 더 조장한다(42절). 주께서 저의 대적의 오른 손을 높이셔서 그들에게 능력을 주시기도 하고 그들로 하여금 저희 힘을 이쪽으로 돌릴 마음이 일어나게 하시나이다. 만일 교회의 원수가 교회를 치려고 저희 손을 드는 때에는 저희 손을 들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위로부터 받지 않는다면 그들은 아무런 능력도 소유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이 그의 교회에 화를 입힐 수 있도록 허락하시는 때에는 이로 인하여 저희는 기쁨을 얻는다. 주께서는 저의 모든 원수로 기쁘게 하셨나이다. 이것은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당신을 미워하는 자들은 당신을 사랑하는 자들의 눈물과 고난을 보고 즐거워하나이다

4. 그것은 스스로 도울 능력도 없었다(43설). 주께서는 그의 칼날을 둔하게 하셨고 무디게 만드셨으므로 그 칼이 사용되던 종래의 기능을 수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설상가상으로) 주께서는 그의 영혼의 예리한 면을 둔하게 하셨고 그의 용기를 제거하셨으며 전처럼 그가 전장에 서 있도록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인간의 영혼은 영혼의 형성자 되신 아버지께서 해 주시는대로 나타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뒷받침해 주시고자 하는 것보다 더 큰 힘이나 각오로 설 수는 없다. 만약 인간이 낙담하는 경우 마음의 기를 꺾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교회를 위해 의당 일어나서 옹호해야만 하는 자들이 일어나지 않을 때에는 교회에게 슬픈 일이 된다.

5. 다윗 집의 명예는 불명예의 출구로 나서기 일보전이었다 (45절). 주께서는 그 소년의 날을 단촉케 하셨나이다. 꽃다운 청춘 젊은이가 요절하는 것처럼 그는 이제 곧 끊어지려 하고 있다. 이것은 이 시편이 르호보암 시대에 저작된 것임을 시사해 주는 것 같은데, 그것은 다윗의 집이 청춘기에 접어 들었으나 벌써 노쇠하여 시들기 시작하였던 때문이다. 다윗가(家)는 수치로 뒤덮였고, 그 영광이 돌변하여 치욕으로 되었으니 초대, 차대 치세시에는 그토록 위대하고 두각을 나타내던 가문이 3대에 와서는 희미하여 보잘 것 없이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르호보암 시절의 다윗 가문이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 간 것에 적용할 수도 있으니 기대하던 것과 비교해 보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때는 유다 왕국의 청년기에 불과하였다. 또 당시의 왕들은 눈에 띄도록 그 소년의 날들을 단축시켰으니, 여호야긴과 시드기야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것은 그들의 나이 30세 되던 청년기에 있던 일이었다. 모 모든 호소에서 우리는 다음 사실을 배울 수 있다.

1. 죄라는 것은 여러 가정들, 곧 고귀한 왕가나 종교적 신앙으로 뛰어난 집안이라 하더라도 그 가정들에게 얼마나 심한 파괴 공작을 할 수 있는가! 후손이 타락하는 때에는 그 가문이 치욕적으로 떨어지고 그들의 영광에는 얼룩이 진다.

2. 우리는 교회의 행복과 약속 받은 영광을 어떤 외적인 것으로 대치시키기가 매우 쉬우며 만약 우리가 외적인 어떤 것에서 실망을 느끼게 되면 그 하나님의 약속이 어긋나는 줄로 생각하며, 계약이 휴지처럼 파기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만일 우리가 이런 잘못에 빠져 들어간다면 후일 변명할 여지가 없게된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는 자기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왕국이 아님을 우리에게 명백히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Ⅱ. 이런 사태에 대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매우 감상적인 간언.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자비를 바라서 네 가지 일을 하나님께 탄원 허고 있다.

1. 고통의 장기적인 계속(46절). 여호와여! 얼마나 오랫 동안입니까? 당신께서는 영원히 스스로 숨기실 것입니까? 그들을 가장 비탄스럽게 한 것은 하나님 자신이 그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자기들을 위로하러 나타나 주지 않으신 것이었고, 자기들을 구원하는 섭리로써 자기들 앞에 나타나지 않으신 데에 있었으며, 또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오래도록 어두움 속에 가두어 두신 데에 있었다. 하나님이 물러가시자 그들에게는 영원한 밤만 지속될 것처럼 보였다. 주께서는 스스로를 영원히 숨기시나이다.아니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스스로 숨으신 정도가 나이라 자가들과 대항하시는 것처럼 보였다. 주의 분노가 불붙듯 하시겠나이까? 그 분노의 불은 얼마나 오래 탈것입니까? 그 불은 절대로 꺼지지 않을 것입니까? 하나님의 분노하심 외에 불타는 지옥이 무엇입니까? 당신께서 기름 부으신 자가 받을 몫이 겨우 그것입니까?

2. 생명의 단축과 죽음의 확실성. 여호와여, 나의 때가 얼마나 단축하며 나의 정한 기간이 얼마나 확실한지를 기억하셔서 당신의 분노를 그치시고 우리에게 자비로이 돌아오소서. 여호와여, 나의 생명은 너무나 무상하여 멀지 않아 종막을 고할 것이오니, 내 생명으로 하여금 항상 비참하게 하지만은 마소서. 나는 그런 존재가 되기 보다는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 게 낫겠나이다. 욥도 그와 같이 탄원한다(욥 10:20, 21). 그런데 시편 기자는 여기서 그 소년의 날이 단촉된(45절) 다윗 가문과 현재 임금으로 있는 자의 입장에서 이런 하소연을 하는 것 같다.

(1) 그는 인생의 단명과 허무를 주장하고 있다(47절). 내 때가 얼마나 단촉하며, 내가 얼마나 덧없는 존재인지(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기억하소서. 그러므로 나는 당신이 되기에 알맞은 자입니다. 주께서는 모든 인생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지으셨는지요? 혹은 주께서는 아담의 모든 자손을 얼마나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 이 말씀은 다음 두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1] 위대한 진리의 선포로서. 만일 49절에서 말씀하신 옛적의 인자하심이 잊혀진다면(다른 생명과 관련하여), 인간은 실로 헛되이 창조된 셈이다. 인간이 죽어야 할 존재임을 감안할 때 만약 죽음 저 편에 또 다른 미래의 상태가 없다면 우리는 인간의 창조가 헛되며, 인간이 아무리 이성이라는 귀한 능력과 기능을 부여받고 원대한 계획과 욕망으로 꽉 채워져 있다 해도 헛된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헛되이 창조하고자 아니 사셨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이전의 인자하심을 기억하소서!

[2] 혹은, 시편 기자가 받고 있던 강력한 유혹을 의미하여. 하나님께서 모든 인생을 헛되이 창조하신 것은 아니며 어떤 인간도 헛되게 창조하신 게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사 45:18). 왜냐하면 첫째, 우리가 만약 이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오랜 수명을 누리지 못하며 오랫동안 고통을 당하는 자들도 많다고 하여 하나님이 인간을 헛되이 창조하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런 인간을 만드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생이 헛되이 지어졌다는 것은 옳지 못하기 때문이다. 많은 세월을 살지 못하고 고난에 찬 생애를 보내는 이들이라 해도 그런 중에나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도 있으며 어떤 유익한 일도 행할 수 있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유지하다가 하늘 나라로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들은 헛되이 창조된 게 아닌 것이다.

둘째, 우리가 만약 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거나 그를 달가와하지도 않는다고 하여 하나님이 인간들을 창조하신 것은 헛된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인간의 창조가 헛된 일이라는 말은 그런 인간들 자신에게는 타당한 것이 된다. 그런 자들에게는 거듭 나지 못하는 일은 고사하고라도 태어나지 않는 게 오히려 나을 뻔 하였다. 그들이 헛되이 창조된 것은 하나님 탓이 아니라 그들 자신 때문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것이 당신 자신을 위해서 이기 때문이며 악인조차도 악의 날을 위해 창조 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지 못하는 자들에게서도 그는 영광을 얻으실 것이다.



(2) 그는 죽음의 보편성과 불가피성을 역설하고 있다(48절).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아니할 자가 누구(이 단어는 어떤 강한 자란 뜻이다)이냐? 다윗가의 임금 자신도 사망이란 사형 선고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며 죽음의 일격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여호와여, 그왕도 죽음이란 필연적 숙명 아래에 있으므로 그의 전 생애가 이처럼 불행하도록 하지 마소서. 그가 그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건질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는 자기 때가 오는 날 자기 영혼을 건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때가 올 때까지 죽어가는 목숨의 비참한 것에서 건지시고 음부의 손아귀로 그를 넘기지 마소서. 우리는 여기에서 죽음이 모든 인간의 종말이 됨을 깨달아 알아야 한다. 우리 눈은 죽음을 보는 대로 곧 감겨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전쟁에서 면제받는 길은 없으며, 죽음이란 감옥에서 우리를 구해낼 보석금은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사는 죽음과 무덤 저편에 있는 행복을 확신하는 일에 있으니 이는 우리가 망하는 날 영원한 거소로 영접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 이다.

3. 그 다음에 탄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종 다윗을 위해 베푸셨던 인자하심과 그와 맺으셨던 계약에서 연유한다(49절). 여호와여, 주의 이전 인자하심은 어디 있습니까? 당신의 진실하심 속에서 다윗에게 보여 주셨고 맹세하셨던 인자하심이 어디 있습니까? 당신은 당신께서 약속하셨던 일을 행하지 않겠습니까? 당신은 당신께서 행하신 것을 취소하시겠습니까? 당신은 여전히 예전의 여호와가 아니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라고 해서 왜 다윗이 이전에 받았던 확실한 자비의 은총을 받을 수 없습니까? 하나님의 불변성과 성실성은 자기가 택하시고 언약을 맺으신 자라면 결코 물리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심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준다.

4. 마지막 탄원은 원수들의 무례함과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에게 대한 냉대로부터 연유한다(50,51). 주여, 그 치욕을 기억하소서 그 훼방을 우리에게서 걷어 가시며 우리 원수에게 돌아가게 하소서.

(1) 치욕을 당한 것은 하나님의 종들이었으며, 종들에게 가해진 학대는 곧 그 주인에게 대한 모욕을 반영하는 것이었으니 특히 그들이 모욕을 당했던 것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구실 때문이었다.

(2) 하나님의 종들에게 퍼부운 비난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애쓰는 모든 자들에게 매우 슬픈 부담이었다. 유력한 모든 민족의 훼방이 내 품에 있으며, 나는 그 수치로 사로잡혀있기까지 합니다. 그것은 내가 잊을래야 잊을 수 없을 만큼 마음에 새긴 바가 되었으며, 나는 그 비난의 중압감으로 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습니다.

(3) 이와 같이 당신의 종인 우리를 욕하는 자들은 당신의 원수들입니다. 그런데도 주께서는 그런 자들을 벌하러 나타나지 않으십니까?

(4) 그들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의 발자욱을 훼방한 것입니다. 그들은 왕이 통치하는 과정에서 취한 모든 조처를 비난하였고, 그의 모든 움직임을 탐지하였으니 이는 왕이 말하거나 행하는 것이라면 모조리 악평하기 위해서였다 혹은, 우리가 만일 이 구절을 여호와의 메시야가 되신 그리스도께 적용한다면, 그들이 그의 행적과 그의 도래가 늦음에 대하여 유대인들을 비난하였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그들은 메시야의 도래가 지체되고 있음을 비난하였다. 하몬드 박사는 그렇게 해석한다. 그들은 메시야를 와야만 할자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는 오지 않았고, 그들을 구해 줄 자가 아무도 없는 데에도 그가 원수들의 수중에서 그들을 구원해 내려 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 원수들은 그가 결코 오시지 않을 것이며 그를 기다리는 일은 포기해야 한다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마찬가지로 훗날 조롱하는 이들은 그가 오리라던 약속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면서 메시야의 발자욱을 비난한다(벧후 3:3, 4).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발자욱이 훼방 당한다고 하는 것은 여인이 낳은 자손의 발꿈치를 뱀이 상하게 한 것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하는 자도 있으며, 또 그것은 그리스도의 발자욱을 따라 걷다가 그의 이름을 위해 수치를 당하는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이 받는 수난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자들도 있다.

Ⅲ. 이 시편은 이와 같은 슬픈 하소연을 한 뒤에도 찬사로써 끝맺고 있다(52절). 여호와를 영원히 찬송하리로다. 아멘, 아멘, 이와 같이 그는 자기 원수들의 비난에 직면하고 있다. 타인들이 하나님을 훼방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 더욱 그를 찬송해야 한다. 이와같이 그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말썽을 부리고, 그의 약속에 대해 의아심을 품었던 자기 자신을 꾸짖으면서도 자기 자신의 불평을 바로 고치고 있다 이런 두 가지의 죄스런 정열은 하나님께 대한 찬양으로 침묵시켜 버리도록 해야 한다. 좌우간에 하나님은 선한 분이시므로 우리는 결코 그를 혹독한 분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진실하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불신해서는 안 된다. 비록 다윗 가문의 영광은 얼룩이 지고 훼손을 당했을 망정 우리 하나님께는 영원히 복되시며 그의 영광은 빛을 잃지 않으리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위로가 될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은 확실하여 변치 않는다는 위로를 얻는다면 우리는 그에 상응하는 찬사를 하나님께 돌리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을 송축하는 일에서 우리는 스스로 용기를 얻는다. 여기에서 아멘 이 이중으로 나오는데 이것은 이중적인 의미를 따라서 쓴 것이다. 아멘-그것은 그러하다. 하나님은 영원히 송축받는 분이시다. 아멘-그렇게 되소서. 하나님을 영원히 송축할지어다. 시편 기자는 이 하소연을 호소하기 전에(1절), 감사로 이 시편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신 예찬론으로 이 시편을 끝맺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해오신 일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자들은 그가 장래에 하실 일에 대해서도 또한 감사를 드릴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올바른 모양으로 자기를 따르며 저희 찬송을 돌리는 자에게 자비로써 따라가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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