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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1

공중 예배의 즐거움(시편 84:1-7)

시편 기자는 여기에서, 공중 의식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강제로 제지당하고 있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도 그러한 예배의 가치를 절실하게 깨닫고 있다. 다음을 주목하자.

Ⅰ. 거룩한 제도 속에서 그가 본 놀라운 아름다움(1절).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어떤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의 성소에 천사들이 임재하는 것으로 인해, 여기에서 하나님을 "만군의 여호와"라 부르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장막에는 세키나(하나님의 엄위)가 뒤따랐고, (어떤 사람들의 견해대로) 그 그룹들로써 상징되었던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이러한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그 장막은 그의 것이다. 그 장막에는 백성들이 모이는 여러 뜰이 있었고, 장막 자체가 한 개의 성소와 한 개의 지성소로 되어 있기 때문에, 여러 개의 장막(원문은"당신의 장막들")으로서 언급되어 있다. 이것들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진실로 성별된 모든 사람이 보기에 그것은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은혜로운 영혼은 훌륭한 것, 이루 말할 수 없는 것, 거룩함 속에 있는 그리고 거룩한 역사 속에 있는 아름다움을 본다. 장막은 초라한 거처였지만, 외적으로 불리한 상황이 거룩한 법령을 덜 사랑스럽게 만드는 것은 전혀 아니다. 왜냐하면 거룩함의 아름다움은 영적인 것이었고 그것의 영광은 내부에 있기 때문이다.

Ⅱ. 공중 규례 또는 오히려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을 다시 즐기기를 바라는 열망(2절). 그것은 간절한 열망이었다. 육과 혼과 영이 그것에 동의했다. 그는 그 반대의 생각이 하나라도 일어나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그것은 격렬한 열망이었다. 그것은 야망에 또는 탐욕에 또는 방탕에 젖어있는 자의 열망과도 같았다. 그는 하나님의 뜰에 다시 그의 자리를 얻게 되기를 사모했고, 부르짖었으며, 그가 쇠약해질 정도로 끈질기게 졸라대었고, 지연되는 것을 거의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몹시 바라면서 기도로써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은 여호와의 뜰 자체가 아니었다. "내가 주를 알고 다시 주와 교제를 나눌 수 있다면!"(요일 1:3) 만일 우리가 규례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 규례는 헛된 것이다.

Ⅲ. 하나님의 제단에 인접해 있는 건물 안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작은 새들의 행복에 대한 그의 질투(3절). 이것은 하나님의 제단에 대한 그의 사모하는 마음을 훌륭하고 놀랍게 나타낸 표현이다.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이 작은 새들은 본능과 자연적인 지시에 의해 스스로 집에 거처를 마련하며, 마찬가지로 다른 새들도 안식하기 위해서 그리고 어린 새끼를 두기 위해서 나무 안에 기른다. 다윗은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의 전 뜰 주위에 있는 건물 안에 있다고 추측하고 있으며, 그 자신도 그들과 함께 있기를 바라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제단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궁전에서 살기 보다는 오히려 그 제단 가까이에 있는 새 둥우리에서 살기를 원했다. 그는 때로 "날아가서 광야에 거할 비둘기 날개"를 원했다.(55:6).

여기에서 그는 하나님의 궁정으로 날아가 숨기 위해 참새의 날개를 원하고 있다. 그리고 "지붕 위에 외로운 참새같이 밤을 새운다" 는 것은 매우 우울한 형편과 심령에 대한 묘사일지라도(102:7), 다윗은 하나님의 제단 가까이에 있기 위해 기꺼이 그것을 그의 몫으로 취하려 했다. 많은 군중과 함께 죄를 섬기는 것보다 고독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낫다. 참새라는 말은 어떤 작은 새를 의미하고 있는데(나의 추측으로는) 다윗 시대에 음악이 즉 성악과 기악이 그 신성한 봉사에 매우 많이 소개되었을 때, 하모니를 이루기 위해 그들은 성전 뜰 주위에 새장을 매달아 놓아 새가 노래하게 했던 것 같다.(왜냐하면 우리는 새가 소리를 발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주목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104:12). 그리고 다윗은 이들의 행복을 부러워하고 있으며, 기꺼이 그들과 자리를 바꾸려 하고 있다. 다윗이 제단 위를 날아다니면서 단지 하나님의 궁정을 잠깐 보는 새들의 행복이 아니라, 거기에서 자기 자신을 위해 보금자리를 만든 새들의 행복을 부러워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라. 다윗은 "하루 밤 지내기 위해 들어오는 나그네처럼," 하나님의 집에 묵는 것으로 충분히 여기려 하지 않았다. 이것을 그는 그의 보금자리, 그의 집으로 삼으려 했다. 즉 여기에서 거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는 이 새들이 거기에서 그들 자신을 위해 둥우리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그 새끼들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주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뜰 안에 자리잡고 있는 자들은 자기 자녀들도 역시 하나님의 집에 그의 성곽 안에 자리와 이름을 잡기를 바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이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새끼를 먹일"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 구절을 다른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주여, 주께서는 주의 섭리로써 새들에게 그들의 천성에 합당하게 보금자리와 안식처를 마련해 주셨고 그들은 그것을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보금자리이며, 나의 안식처인, 떠돌이 새가 그 둥지를 그리워하는 것만큼 내가 원하는 주의 제단에, 나는 접근할 수 없습니다. 주여, 주의 아기들을 위해서 보다도 더 나은 것을 주의 새들을 위해 마련해 주시겠습니까? " "보금자리를 떠도는 새와 같이," 나는 하나님의 제단을 떠나 유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잠 27:8). "나는 다시 내 장소로 돌아오기 전에는 결코 편치 못할 것입니다." 그 영혼이 하나님 안에 편히 있어 휴식하고 있는 자들은 그의 규례 가까이에 정주하기를 바라지 않을 수 없다. 성막에는 두 개의 제단이 있었는데, 하나는 제물을 위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분향을 위한 것이었다. 이 두 가지를 모두 주시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을 섬기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속죄와 증보를 주시해야 한다.

끝으로, 어떻게 그가 이러한 청원에서 하나님을 주목하고 있는 가를 관찰하자. "주는 만군의 여호와,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가난하며 고통당하는 신하가 그의 왕에게서가 아니고 어디에서 보호를 구하겠는가? 더욱이 "백성이 저희 하나님을 구하지 아니하겠는가?"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다. 그와 그의 제단을 지키면서 살고 죽도록 하자.

Ⅳ. 하나님의 제단에서 수종들 자유를 갖고 있는 사역자들과 백성들의 행복에 대한 찬사를 보라. "저희가 복이 있나이다. 언제 내가 그 축복의 기쁨으로 돌아가겠습니까?"

1. 장막 주위에 거주하면서 자기의 반차대로 그 봉사에 종사하는 사역자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복이 있다(4절). "주의 집에 거하는," 즉 거기에서 편히 쉬고 거기에서 일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그는 그들이 항상 봉사하도록 감금당하고 있으며 영구적으로 따분한 일을 맡아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고 하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기는커녕, 오히려 이 세상의 가장 큰 방벽보다도 그들을 부러워하고 있다. 탐욕하는 자를 축복하는 자들이 있으나 그는 신앙적인 자를 축복하고 있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그것은 그들이 좋은 임금을, 받기 때문이 아니라 즉 그들이 그들 자신을 위해 각 제물의 일부를 받아 그들의 식탁을 항상 훌륭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선한 사업을 하기 때문이었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그리고 지상 위에 천국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끊임없이 찬송하는 일 가운데 있다. 이것을 위에 있는 그의 집에 적용시켜 보라. 거기에 거하는 자들 곧 천사들과 영화롭게 된 성도들에게 복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찬송하기를 밤이나 낮이나 그치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될 수 있는 한, 우리가 즐거운 영원을 그 안에서 보내기를 바라고 있는 그 복된 일에 우리의 많은 시간을 사용하도록 하자.

2. 그 백성들, 그 나라의 거민들에게 복이 있다. 비록 그들은 제사장들처럼 하나님의 집에 항상 거하지는 않을지라도, 그들의 절기 즉 세 번의 큰 절기로 정해진 때에는 그것에 접근할 자유를 얻는다. 그 절기 때에, 모든 남자들은 거기에 참석할 의무가 있었던 것이다(신 16:16). 다윗은 이것을 부담으로 생각지 않았고 그들에게 고역을 치르게 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이처럼 참석할 수 있는 자들의 행복을 부러워하고 있다(5-7절). 그가 복된 자로 표명한 자들이 여기에 묘사되어 있다.

(1) 그들은 하나님께 의지하고 그에게 헌신하는 그 뿌리깊은 원리로부터 나온 믿음으로 행하는 자들이다. "주께 힘을 얻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주를 자기 힘으로 삼고 강하게 주를 의지하는 자는, 주의 이름을 자기의 견고한 망대로 삼고 그리로 달려가 안전함을 얻는(잠 18:10) 자는 복이 있다.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40:4; 146:5). 믿음의 행위를 자기 자신의 힘으로가 아니라(자기의 힘으로 한다면 그 일은 분명 성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힘으로 해나가는 자들은 진실로 행복하다. 우리의 모든 풍족함은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다윗은 다시 하나님의 장막으로 돌아가 여호와 그의 하나님께 힘을 얻어 봉사를 하고 고난을 견딜 수 있게 되기를 원했다.

(2) 그들은 거룩한 의식에 대한 사랑을 갖고 있는 자들이다.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다. 즉," 자기의 목적으로서 하나님 안에 자기의 행복을 둔 자는 주께로 인도하는 모든 길을, 그들의 은혜를 강하게 하고 주와의 교제는 지속시켜 주는 그 모든 방법들을 기뻐한다. 그들은 이러한 길로 행할 뿐만 아니라 그들 마음 속에 그것을 둔다. 그들 마음 곁에 그것을 둔다. 이것보다도 더 가깝게 그의 마음에 두는 걱정이나 관심, 즐거움이나 기쁨은 없다. 새 예루살렘을 자기의 눈안에 두는 자들은 그것으로 이르는 길을 마음 속에 두어야 하며, 그것을 지켜야 한다. 그들의 눈은 그것을 똑바로 바라보아야 하며, 그 길을 숙고해야 하고 그것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 그리고 좌우로 빗나가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의 힘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규율로 삼고 그것을 따라 행해야 한다.

(3) 그들은 거룩한 의식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어렵게 하고 위축되게 하는 것들을 이겨내려는 자들이다(6절). 그들은 그 명정에 예배드리기 위해 시골에서 올라 올 때, (일부의 견해대로) 메마르고 모래로 된 골짜기를 많이 지나야 하므로 거의 갈증으로 죽을 지경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편을 막기 위해 그들은 작은 웅덩이를 파서 빗물을 받아 담아 두고 그것은 그들과 다른 사람들의 원기를 회복시켜 주기 위해 마련되어진다. 그들이 샘을 만들 때, 하늘의 비가 그곳을 채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 은혜는 우리에게 부적하지 않을 것이며, 항상 우리에게 풍족한 것이다. 그들의 길은, Baca가 의미하듯이, 눈물 골짜기 가운데 놓여 있었다. 즉(다른 사람들의 해석처럼) 물기가 많은 골짜기 가운데 있었다. 그것은 습한 기후 지대에 있었으므로 "비로 은택을 입힐 때," 물이 고이거나 길이 더러워지기 때문에 통행할 수 없었다. 그러나 물을 빼내고, 도랑을 파냄으로써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는 자들이 편리하도록 거기에 길을 만들어 놓았다. 시장으로 이르는 길과 마찬가지로 교회로 이르는 길도 관심을 기울여 잘 수선해 두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여 주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

[1] 그들은 그 여행에 대해 선한 뜻을 갖고 있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그 엄숙한 명정에 참석해야 했을 때, 그들은 불순한 날씨로 인해 또는 나쁜 길로 인해 되돌아가려 하지 않았고 또 그것을 집에 머무르는 구실로 삼으려 하지도 않았다. 의무의 길에 놓여진 어려움은 우리의 결심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다. "풍세를 살핀자는 파종하지 않을 것이다."

[2] 그들은 시온으로 이르는 길을 가장 훌륭하게 만들었다. 나쁜 길을 고치기 위해 계획했고 수고했으며 제거될 수 없는 불편한 점은 될 수 있는 한 참았다. 우리가 하늘로 이르는 길은 바카 골짜기를 통과하게 되어 있으나 하나님께서 천성을 향해가는 순례자들을 위해 마련해 놓으신 그 위안물들을 우리가 잘 활용한다면, 그것은 샘의 곳이 될 수 있다

(4) 그들은 드디어 여행의 목적지에 올 때까지 계속 전진하는, 그리고 갑자기 중단하지 않는 자들이다(7절).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가리이다." 그들이 각 마을을 지나 목적지에 접근할수록 그들의 무리는 점점 불어나 마침내 매우 많게 된다. 길을 앞선 자들은 뒤에 오는 사람들이,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하고 말하면서(122:1, 2), 그들에게 요청할 때까지 머물러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상호적인 사랑의 표적으로 한 덩어리가 되어 함께 갈 수 있게 했다. 또는, 그 특별한 사람들은, 여행의 지루함과 그들이 당한 역경으로 인해 피로해지기는 커녕, 예루살렘으로 올수록 그들은 더 생기있고 활발해졌고 따라서 "점점 힘을 얻으려" 나아갔다(욥 17:9). 이처럼,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힘을 얻는"다고 약속되어 있다(사 40:31). 그들이 약할 수밖에 없는 곳에서도 그들은 강하다. 그들은 (일부의 견해대로) "덕행에서 덕행으로" 나아간다. 이것은 덕이 있는 여자에게 사용되는 것과 같은 단어이다. 그리스도인의 행로를 밀고 나가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은혜를 더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요 1:16). 그들은 영광으로 영광에 이른다(고후 3:18). 하나의 영광스런 은혜에서 또 하나의 은혜로 이르러, 마침내,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각 나타나" 그에게 영광을 드리고, 그로부터 축복을 받는다. 은혜 속에서 자라는 자들은 드디어 영광 속에서 완전해질 것이다. 갈대아 판에는 이렇게 해석되어 있다. "그들은 지성소에서 교훈의 집으로 간다. 그리고 율법에 대해 그들이 들인 수고는 그 위엄이 시온에 거하고 있는 하나님 앞에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한 가지 의무에서 또 한 가지 의무로, 기도에서 말씀으로, 우리가 배운 것을 실행하는 것에서 더 배우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한다면, 그 은택이 나타나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우리 자신에게는 영원한 위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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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움을 주는 하나님의 규례 (시편 84:8-12)

Ⅰ.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해 주시도록 원했던 것을 별달리 언급하지 않고서, 하나님이 귀를 기울이시고 용납해 주실 것을 기도하고 있다. 비록 이제는 하나님의 율례에서 추방당하고 제지되었지만, 그 율례에 대해 사랑과 존경을 고백했을 때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었던 때문이다. 그 고백 속에서 그의 모든 소망은 명백히 하나님께로부터 감취어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오직,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귀를 기울여 들으시기를, 그의 상태를 보시고, 그의 선한 마음을 보시고 그의 얼굴을 살펴 보시기를, 즉, 그것이 어떠한 상황에 있으며, 얼마나 그의 안색이 하나님의 궁정으로 향한 그의 갈망을 나타내고 있는가를 보시기를 기도하고 있다. 그는 그 자신을(많은 사람들의 견해대로) "하나님의 기름 부이신 자"라고 부르고 있다. 왜냐하면 다윗은 주에 의해 기리고 주를 위해 기름 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탄원 속에서

1. 그는 여러 가지 영광스러운 칭호 아래 있는 하나님을-모든 창조물을 지휘하시므로 하늘과 땅에 대한 모든 권세를 지니신 "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로서-그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 야곱의 기도하는 자손들에게 "너희가 나를 구함이 헛되도다"라고는 결코 말씀하시지 않은 하나님, 즉, "야곱의 하나님"으로서-그리고 그의 백성들을, 그들의 열조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에 의거하여, 그의 특별한 보호 아래 두시는,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으로서 주시하고 있다. "아브라함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이니라"(창 15:1). 다윗이 하나님의 장막 은밀한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숨을 수(시 27:5) 없었을 때에는, 그는 자기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그의 방패가 되실 준비가 되어있음을 발견하기를 바랐다.

2. 그의 중보자를 주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다윗의 그의 기름부음에 대해 언급했으므로(45:7), 나는 이 말을, "주의 메시야의, 주의 기름 부은 자의 얼굴을 살펴보옵소서" 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말씀을 아뢸 때, 우리는 그가 그리스도의 얼굴을 살펴 보시고 그를 위하여 우리를 용납하시며 그 안에서 우리를 기뻐하시기를 원해야 한다.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바라 보아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은총은 눈으로 "주의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 보실 것이다. 주의 기름 부으신 자는, 우리가 그 없이 감히 우리의 얼굴을 보일 수 없을 때, 그의 얼굴을 보이신다.

Ⅱ. 그는 하나님의 의문에 대한 그의 사랑을, 그리고 그가 하나님 자신을 의지하고 있음을 진술하고 있다.

1. 하나님의 궁정은 그가 택한 곳이었다(10절). 그는 거룩한 의문에 대해 매우 큰 존경심을 품었다. 그는 그것을 그 어느 것보다 귀하게 여겼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귀중하게 여기고 있음을

(1) 그 어느 시간보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시간을 택함으로써 나타내고 있다. 세속적인 일들을 모두 떠나 신앙적인 봉사를 수행하면서 지내는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낫사옵니다." 그것이 주의 궁정에서의 천 날보다 낫다는 것이 아니고 아무리 사람들의 자손들의 모든 즐거움 가운데서 지낸다 할지라도 이 세상 다른 곳에서 지내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다. 그는 "날"이(days)라고 말하지 않고 있다(역:개역 한글판에는 날로 해석되어 있음). 천보다 낫다는 말을, 여러분은 임의대로 연수로, 또는 세대로 적용시킬 수 있을 것이나, 다윗은 그것에 손을 대려하고 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 하루의 안식일, 하루의 명절이-비록 하루뿐일지라도-내게는 매우 반가울 것입니다."(유태인 율법 학자들의 일부는 그것을 그렇게 풀이하고 있다.). "아니, 내가 그것으로 인해 그 다음 날 죽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이 세상의 일과 즐거움 속에서 보낸 수 년보다 나을 것입니다. 이러한 즐거움이 있는 한 날은 "천날을 쫓을 것이요, 두 날은 불만을 쫓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비할 데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나이다."

(2) 다른 장소보다는 예배하는 장소를 택함으로써 나타내고 있다. 당당하게 주인으로써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가장 낮은 직책에서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옵니다." 그가 장막까지도 집이라 부르고 있는 것을 주목하라. 그 안의 하나님의 임재는 그 휘장을 궁전보다 더 위엄있게 만들며, 성보다 더 강하게 만든다. 그것은 나의 하나님의 집이다. 그의 하나님으로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 관계는 그가 수금으로 연주하기를 매우 사랑했던 달콤한 선율이었다. 좋은 근거 위에서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이라 부를 수 있는 자들은, 그리고 그러한 자들만이 그의 궁정을 기뻐한다. 나는 악인이 거하는 그 장막의 왕보다는 차라리 하나님 집의 문지기가 되겠다. 차라리(단어 그대로) 문지방에 눕겠다. 그것은 거지가 있는 장소였다(행 3:2), "그래도 괜찮다"(다윗은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집에 있지 못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거기에라도 있는 것이 낫다." 바리새인들은 회당을 매우 좋아했다. 거기에서 상좌를 차지하는 것을(마 23:6) 그들이 위대한 인물로 보이게 하는 것을 좋아했다. 거룩한 다윗은 그것을 갈망하지는 않고 있다. 그가 단지 문지방에 있도록 허락만 받는다면, 그는, "주인이시여, 여기 있는 것이 좋습니다"하고 말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종에 관한 율법을 시사하면서 그것을 이렇게 읽고 있다. "나는 악인의 장막에서 자유롭게 사느니 보다는 차라리 내 하나님의 집 문설주에 매여 있겠다." 종들이 떠나가서 자유하지 않으려 할 때는, 그종들을 문설주 앞으로 가 그 귀를 뚫어야 했던 것이다(출 21:5, 6). 다윗은 그의 주인과 그의 일을 매우 사랑했으므로 영원히 이 봉사에 묶여 있기를, 더 자유롭게 그 일을 행할 수 있기를 원했으며, 죄에 대한 가장 큰 자유보다는 의무에 대한 속박을 매우 사랑하였기 때문에, 결코 거기에서 떠나 자유케 되기를 원치는 않았다. 이처럼 최상의 기쁨은 거룩한 의무에 전념하는 거룩한 마음을 소유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얻는 만족감과 비교될 만한 것은 없는 것이다.

2. 하나님은 그의 소망이요 기쁨이며, 모든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그의 하나님의 집을 사랑했다. 왜냐하면, 그의 기대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었고 거기에서 그는 하나님과 교제하곤 했기 때문이었다(11절). 다음을 보자.

(1)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 대해 무엇이 되고 계시며, 또 되실 것인가,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우리는 여기에서 흑암 속에 있으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라면, 그는 우리에게 있어서 빛을 비추시고 활기를 부어 주는, 우리를 안내하고 지도하는 해가 되실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위험 가운데 있으나 그는 우리에게 빈번히 날아오는 맹렬한 창으로부터 우리를 방어해 주는 방패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사, 그의 은혜로 우리의 방패가 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주의 빛에 행하고" 결코 우리 자신을 그의 보호 밖으로 내어 던지지 말자. 그러면,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좋은 것을 모두 공급해 주는 해이며 모든 악에서 우리를 막아 주는 방패이시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2) 그는 그들에게 무엇을 수여하고 계시며, 또 하실 것인가.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리이다." 은혜는 우리에게로 향한 하나님의 선한 의지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선한 역사를 의미한다. 영화는, 그가 우리를 양자로 하시어 우리에게 부여하신 존귀와 그가 아들의 기업으로 우리를 위해 마련해 놓으신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영광의 준비로서 은혜를 그들에게 주실 것이며, 저 세상에서 은혜의 완성으로서 영광을 주실 것이다. 그리고 한편,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는 곳마다 영화를 주실 것이며(왜냐하면 은혜는 영화의 시작이며 그 전조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지금 은혜를 주시지 않는 또는 그가 주시는 은혜를 헛되게 하는 자에게는 이 후에 영화를 주시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양쪽 세상에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에 협력하는 두 가지 큰 것인 은혜와 영화를 하나님께서 주신다면, 우리는, 그가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 정직히 행하는 것,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 그리고 이세상에서 고지식함과 경건한 성실을 갖고 이야기하는 것은 모든 선한 백성들의 특성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즉, 이 세상을 지나가는 데에 필요 불가결한 것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은혜와 영화를 확고히 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이 더할 것이다." 이것은 포괄적인 약속이다. 그리고 이것은 성도들이 받는 현재의 위로에 대한 보증이므로, 그들은 그들이 원하며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무한하신 지혜자께서 그것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않은가를 살펴 보시거나 무한하신 자비자께서 그것을 합당한 때에 주시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우리는 정직히 행하도록 관심을 기울이도록 하자. 그리고서 우리에게 유익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시리라는 것을 믿도록 하자. 끝으로, 그는 앞에서와 같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이 복받을 것을 언명하고 있다(12절). 규례에 대한 자유와 하나님의 집에 대한 특권을 가진 자는 복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에 대해 방해를 받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우리는 축복 받는 일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우리가 주님의 전에 갈 수 없다면, 우리는 믿음으로써 그 전에 계신 주님께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행복해질 것이며 편안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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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12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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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4 시편 메튜 헨리 주석, 시편 088장
623 시편 메튜 헨리 주석, 시편 089장
622 시편 메튜 헨리 주석, 시편 09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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