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호소(시편 80:1-7)
시편 기자는 여기에서, 이스라엘의 현재의 고통스러운 상태와 연관하여, 교회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로써 문의하고 있다.
Ⅰ. 그는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은총을 간청하고 있다(1,2). 성소가 황폐해져 버릴때는, 이 은총이 성소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요, 그것은 먼저 하나님께 간구하여야한다. 다음을 주목하자.
1. 그가 하나님께 아뢸 때,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목자로서 어떻게 인식하고있는가? 그는 이스라엘을 "주의 기르시는 양"이라 불렀는데 (79:13), 그것은 양이 목자의 배려와 지휘 아래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이 주의 안내와 배려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위대하고 선하신 목자이므로 우리는 그에게 주어진 그의 양의 관리를 믿음으로써 그에게 맡길 수 있다. 그는 "요셉을 양떼같이," 가장 훌륭한 초장으로, 그리고 위험한 길을 피해서"인도하신다." 만일 요셉이 목자를 따르는 양처럼 순종하면서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의 잘못이다, 그는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어," 거기에서 탄원을 받으시고 지시를 내리실 준비를 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보좌는 그룹 사이에 있었다. 기도 속에서, 은혜의보좌에 앉으신 자로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매우 위로가 되며,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저 위대한 화목 제물의 덕택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보좌는 화해하기 위한 것이기 대문이다.2.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바라고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그들의 비참함과 그들의 기도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여 주시며 그가 그의 영광 속에서, 그의 백성에 대한 은총과 친절 속에서 빛을 발하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보이시어, 그것을 발휘하실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잠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주여, 그것을 깨우소서" 라고 했다. 그의 사유는 큰 반대에 부딪쳤고, 그 원수들은 그것을 위압하려고 위협했다. "주여, 더욱 더 주주의 능력을 나타내시고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소서. 주의 백성들을 힘차게 그리고 즉시 도우소서. 주여, 이것을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 행하소서." 즉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목전에서 행하시어, 그것을 보는 그들로 만족을 얻게 하소서" 라는 것이다. 이 세지파들 이었으므로, 여기에 지적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을 앞장 서서 가던 하나님의 능력의 궤가 그들의 원수들을 혼비백산 시켰던 것이다.
Ⅱ.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불쾌하게 여기시는 것을 탄식하고 있다. 하나님은 노하셨다. 그리고 기자는 그 어느 것보다 이것을 더 두려워했다.(4절).
1. 그것은 큰 노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노하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즉 그들의 기도에도 불구하고(그들은 기도로써 그들로부터 하나님의 노를 돌리기를 바랐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노하셨을 뿐만아니라, 그들의 기도까지도(비록 그것이 그의 백성들이 한 기도였지만) 불쾌히 여기셨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의 죄와 그의 원수들의 기도에 노하신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그의 백성들의 기도에 대해 노하신다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다. 그는 그들에게[(흔히 사람으로) 응답하시기를 지연시키셨을 뿐만아니라, 만일 그가 실제로 그의 백성들의 기도에 노하신다면 그것은 그들이 잘못 구하기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단언할 수 있다(약 4:3). 그들은 기도하나 기도 속에서 고투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목적이 옳지 않았다거나, 그들속에 머물러 있는 어떤 은밀한 죄가 있었다. 그들은 깨끗한 손을 들지 못했거나, 분노와 의심을 품고 손을 들었다. 그러나 이에 불쾌히 여기신다는 것은 단지 그들만의 느낌일지도 모른다. 즉 하나님께서 실제로는 그러하시지 않았는데, 그들의 기도에 노하신 것 같이 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처럼 그는 기도에 대한 그들의 인내와 끈기를 시험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가나안 여자를 시험하시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리라"2. 그것은 오랫동안 지속된 노였다.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 우리는 계속 기도해왔지만, 아직도 주의 노하심 아래 있습니다. "그들이 오랫동안 하나님의 진노의 표적 아래 있었다는 것은 그들의 슬픔인 동시에 수치였다.
(1) 그들의 슬픔(5절). "주께서 저희를 눈물 양식으로 먹이셨나이다. "그들은 매일 매일 눈물 속에서 음식을 먹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음식이 되었던" 식초였다(42:3). 그들은 눈물을 마셔야했다. 그것은 이따금씩 그 쓴맛을 보는 정도가 아니라 잔에 가득 담긴 것을 마셔야했다. 슬픔으로 날을 보내고 있지만 기쁨 속에서 영생을 누릴 자들도 많다.
(2) 그것은 그들의 수치였다(6절). 하나님은 그들에게 얼굴을 찌푸리심으로써 그들을 그 이웃에게 다툼거리가 되게 하셨다. 다투는 자들마다 그들을 공격했으며, 그들은 그들을 약탈하려는 자들의 손쉬운 먹이가 되었다. 그들이 실망하는 것을 보고서 원수들을 비웃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불쾌하게 여기실 때, 우리는 그들이 눈물을 흘리는 것과 그 원수들이 개가를 부르는 것을 보리라.
Ⅲ. 시편 기자는 그들이 하나님께 용납되고 구원될 수 있도록 다시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소서"(3절).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 빛을 비취사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하소서"(7절). 이것이 이 노래의 취지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것을 19절에서 다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이 하나님과 그들의 의무에서 빗나갔다는 것과 그들이 죄의 길로 빠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진노하시어 그의 길로 빠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진노하시어 그의 얼굴을 그들에게 숨기시고 그들을 그 원수들의 손에 넘겨주신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옳은 목적을 위해 다시 시작하기를 원하고 있다. "주여, 우리를 회개와 감화의 방법으로써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러면 틀림없이 주께서는 긍휼과 구원의 방법으로써 우리에게로 돌이키실 것입니다." 다음을 주목하자.
1.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만 구원이 나온다.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로 주의 사랑과 주의 얼굴 빛을 얻게 하소서. 그러면 우리가 구원받을 것입니다,"2.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서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얻을 수 없다. 우리는 세상과 정복을 떠나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그러면 그가 그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취실 것이다.
3. 그의 은혜에 의하지 아니하고서는 하나님께 전향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 행위로 하나님께 돌아가도록 하고 나서 (호 5:4), "나리라"(잠 1:23)는 그 은혜로운 약속을 탄원하면서, 그의 은혜를(주께서 내게 돌이키시면 내가 돌아서게 되리이다)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여기에 있는 기도는 민족적인 개심을 위한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는 민족적인 긍휼을 위해 기도하여 잘못된 것이 고쳐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의 슬픔이 곧 해결될 것이다. 민족의 성결함은 민족의 행복을 보장해 줄 것이다.
버림받은 포도나무 (시편 80:8-19)
시편 기자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위한 그의 청원을 제시하고 있으며 그 청원에 대한 긍휼과 은혜를 하나님께 부탁하면서, 그것을 은혜의 보좌로 가져가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교회는 여기에서 포도나무와(8,14절) 포도원(15절)으로서 상징되어 있다. 이 포도나무의 뿌리는 그리스도이시다(롬 11:18). 그 가지는 신도들이다(요 15:5). 교회는 포도나무처럼 연약하고 받침대가 필요하며, 보기 흉하게도 예기치 않은 가지가 밖으로 뻗어나오나, 널리 퍼져 과실을 맺으며, 그 과실은 매우 훌륭하다. 우리는 이 세상의 광야에 이러한 포도나무를 심으셨고 그것을 오늘날까지 보존해 오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정할 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이제 여기에서 다음을 살펴 보자.
Ⅰ. 구약 교회의 포도나무는 처음에 어떻게 심어졌는가? 그것은 지고한 손에 의해 "애굽에서 꺼내온" 것이다. 그것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열 방이" 가나안에서 쫓겨났다. "주께서 그 앞서 쓸어버리시어" (어떤 사람은 9절을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일을 명료케 하셨다. 열방은 멸망의 빗자루로써 티끌처럼 쓸림을 당했다. 하나님은 포도나무를 위한 자리를 만드시고 그것을 심으신 후에, 그것으로 하여금 교회와 국가의 행복한 통치 제도에 의해 뿌리를 깊이 박게 했다. 그것은 매우 견고했으므로, 꺽어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Ⅱ. 그 포도나무는 어떻게 퍼지고 번성했는가?
1. 가나안 땅에는 사람들이 가득 찼다. 처음에는 그곳에 사람이 가득 찰 정도로 그 수효가 많지 않았다(출 23:29). 그러나 솔로몬 시대에는 이미 "유다와 이스라엘이 바닷가의 모래와 같았다." 그 땅은 그들로 가득 찼으나, 매우 비옥했으므로 부족함이 없었다.(10절). 가나안의 산들은 그들로 덮였고, 그 가지들은 포도나무 가지처럼 길게 뻗쳐 있을지라도, 포도나무 가지처럼 길게 뻗쳐 있을지라도, 포도나무 가지처럼 연약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훌륭한 백향목의 가지처럼 튼튼했다. 이스라엘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뿐 아니라, 강한 용사들도 있었던 것이다.2. 그들의 정복과 지배권은 이웃 나라까지 미쳤다(11절). "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었으니" 서쪽 큰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이르렀으니, 남쪽의 애굽 강, 북쪽의 다메섹 강, 또 동쪽의 유브라데 강까지(창 15:18)미쳤다. 느부갓네살의 광대함은 무성한 나무로 표현되어 있다(단 4:20.21). 그러나 이 포도나무에 대해서는," 그늘과 그 가지로," 그리고 그 "넝쿨" 로 인해 칭송을 하거나 그 열매로 인해 칭송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열매 못맺는 포도나무였기" 때문이다(호 10:1). 하나님은 포도를 기대하여 오셨으나, 들포도를 보셨다(사 5:21).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 나무는 소용없는 가치없는 나무인 것이다(겔 15:2, 6)
Ⅲ. 그것은 어떻게 훼손되고 파멸당했는가? "주여 주께서 이 포도나무를 위해 큰 일들을 행하셨는데 왜 그것이 다시 아주 멸망되어야 합니까? 만일 그것이 하나님께서 심으신 나무가 아니라면, 그것이 뿌리채 뽑히는 것을 보아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친히 존재케 하신 것을 보아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친히 존재케 하신 것을 다시 버리시겠습니까?(12절)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헐으셨나이까?"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방법이 이처럼 변한 데에는 좋은 이유가 있었다. 이 귀한 포도나무는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되어(렘 2:21), 그 위대하신 주인을 비방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가 "그 울타리를 걷어 버리시는 것은(사 5:5)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포도나무에 대한 하나님의 옛 은총은 오히려 탄원의 제목이 되고 있으며,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전적으로 쫓아내시지는 않으리라는 믿음에 대한 격려로서 활용되고 있다. 다음을 주목하자.
1. 이스라엘에 대한 이방 민족들의 악의와 적개심. 하나님께서 "담을 헐으사" 그것을 버리시자마자, 그것을 멸할 기회를 노리던 원수들의 무리가 즉시 공격해 왔다. 길을 지나가던 자들은 그것을 꺾었다. "수풀의 돼지와 들짐승들"이 그것을 파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13절). 그러나2. 이 잔인한 원수들도 또한 속박되어 있음을 보자.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담을 헐으시기" 전까지는, 그들이 이 포도나무의 잎 하나라도 딸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욥을 산울로" 계속 "두르시는" 한, 마귀가 그를 해할 수 없었다(욥 5:23). 사람들이 자기를 하나님의 은총 안에 두는 것이 얼마나 유익한가를 보라. 그때에, 그 들은 어떤 들짐승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욥 5:23). 우리가 하나님을 격노케 하여 그를 물러가시게 한다면, "우리의 방패가 우리를 떠나므로," 우리는 멸망한다. 이스라엘의 비탄스러운 상태가 여기 묘사되어 있다(16절). "그것이 소화되고 작벌을 당하나이다. "그 백성들은 저주에 가까이 있으며, 결국은 불살라지는 가시와 덤불처럼 취급받을 뿐, 더 이상 포도나무처럼 보호받으며 소중히 여겨지지 않는다. 그들은 들짐승과 산돼지의 분노로 인해서가 아니라 '주의 면책을 인하여"망한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두려워했던 점이며, 또 그들의 모든 재앙을 초래한 원인이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미소 아래 있는가 또는 찌푸림 아래 있는가에 따라, 우리의 일이 잘되거나 못된다.
Ⅳ. 이에 대해 그들이 하나님께 요청한 것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1. 하나님께 그 포도나무를 도와달라는 것이었다(14,15절). 하나님께서 은혜롭게 그 형편을 인지하시고 그와 합당케 여기시는 대로 포도나무를 위해 일을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이키소서. 왜냐하면 주께서는 우리로부터 떠나가신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물러가신 그 하늘에서 굽어 보소서. 하늘에서, 그 전망대에서 굽어보소서. 그곳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행해지는 모든 잘못을 보셨고 권능의 자리에서 주님은 효가 적인 위로를 보내실 수 있었습니다. 주께서는 하늘에 주의 심판의 보좌를 두셨고 우리는 그곳에서 호소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주님은 참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해 더 나은 나라를 예비래 두셨습니다. 주여, 그곳에서 이 포도나무를 은혜롭게 굽어보시고 은혜롭게 영접하소서. 우리의 비참한 상태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리고 주의 긍휼의 이 특별한 열매를 위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주께 의탁합니다. 그 포도원 아니, 오히려 그 뿌리를 보기만 하소서. 주의 오른 손으로 그것을 심으셨으므로 주의 찬송을 부르게 하기 위해(사 43:21), 그 열매로써 주님이 영광 받으시기 위해, 주의 오른 손이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여, 그것은 주에 의해, 주를 위하여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겸손한 확신과 함께 주께, 그리고 주의 돌보심에 맡겨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사는 완전하시다." 우리가 히브리어에서 "가지로" 읽는 말은 "아들"(Ben)이다, 주께서는 아들을 위하여 가지로 그 계획 속에서 강하게 만드셨던 것이다. 그 가지는 이스라엘의 혈통("나의 종, 순" 슥 3:8)에서 나오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나올 때 까지 전반적으로 이스라엘, 특히 다윗의 집은 보존되어야 했으며, 존속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는 참 포도나무이시다"(요 15:1; 사 11:1)."그것을 상하지 말라. 거기 복이 있느니라" (사 65:8).2. 하나님께서 포도원지기를 도와달라는 요청이었다(17,18). "주의 우편에 있는 자, 이제(누구든지간에) 그 앞에서 들락들락 해야 할 다윗 집의 그 왕 위에 주의 손을 얹으소서. 주의 손을 그 위에 얹으시어 그를 보호하고 덮어 주실 뿐만 아니라 그를 시인하시고 힘있게 하시며 그를 성공하게 하소서." 우리는 이러한 구절을 읽을 수가 있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손이 나의 위에 있으므로 내가 힘을 얻었노라" (스 7:28). 그들의 왕은 그의 베냐민," 주의 우편에 계신 아들"처럼 하나님께 귀한 그 나라의 대표자였으므로, 그들을 올바른 길로 자신과 그들의 원수들로부터 방어해 주시고, 그들을 올바른 길로 지도해주시면서, 그들의 형편을 주관하시며, 하나님 우편에서 그들에게 많은 유익을 행사하시는 도구였으므로, 그리고 이스라엘의 큰 목자 아래 있는 종속 목자였으므로 "하나님의 우편에 있는자라" 불리우고 있다. 권세를 지닌 방백들은 그들이 "사람"(단어 그대로), 곧 "아담의 아들들" 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만일 그들이 강하다면, 그들을 강하게 만드신 것은 하나님이며, 하나님이 자기자신을 위하여 그들을 그렇게 만드셨다는 것을(왜냐하면 그들은 사람들 가운데 있는 그의 나라의 유익을 돕는 일군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성실하게 이것을 행한다면, "그들위에 주의 손을 얹으시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통치자들을 지지하신다면, 우리도 그를 지지하리라는 이 약속을 덧붙이면서, 그것이 그렇게 되도록 믿음으로 기도 해야한다. "그러하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리이다."즉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원해 주는 그 명분을 결코 버리지 아니하겠습니다라는 약속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안내자가 되시게 하고 우리는 그를 따르도록 하자. 여기에 또한 다음과 같은 기도를 우리는 덧붙일 수 있다. "우리를 소생케 하소서. 우에게 생명을 넣으시고, 사라져가는 우리의 이득을 회복시키며, 우리의 낙심한 심령을 소생시키소서. 그러하면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이다. 우리는 그렇게 하는 것이 헛되지 않음을 발견했으므로, 우리는 모든 경우에 계속 그러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소생시키지 않는다면, 옳은 방법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영혼에 생기를 넣으시는 분과 우리 기도에 활기를 불어 넣으시는 분은 곧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유대교와 기독교의 많은 해설가들은, 이것을 메시야, 곧 다윗의 아들이 교회의 보호자이며 구세주이시고 포도원지기라는 사실에 적용시키고 있다.
(1) 그는 하나님 우편에 있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은 "그의 오른 손으로" 그에게 "맹세하셨고" (갈대아 해설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그를 그의 우편으로 들어 올리셨다. 그리고 그는 정말 여호와의 오른 손, 그 팔이시다. 왜냐하면 모든 권세가 그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2) 그는 하나님께서 "주를 위하여," 그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 사람들 가운데 있는 그의 나라의 세력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힘있게 하신" 그 인자이시다.
(3) 하나님의 손은, 그를 보호사시고 그의 힘을 복돋우시어 "여호와의 선한 기쁨이고 그 손에서 번성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의 전 사업을 통해 함께 한다.
(4) 신자들의 확고함과 견고함은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안에 쌓아둔 그 은혜와 힘에서 전적으로 기인하고 있다(68:28). 그 안에서 우리의 힘이 발견되며, 그 힘에 의해 우리는 끝까지 견디어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주의 손이 그의 위에 함께 하소서. 강대하신 그 분 위에 우리의 도움이 있나이다. 그가 우리를 끝까지 구원하게 하옵소서. 그러면 우리는 안전할 것이옵니다. 그러하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오리다." 끝으로, 이 시편은 앞에서 두 번씩이나 올려진 것과 똑같은 탄원으로써 결론을 맺고 있다. 그러나 헛된 반복이 아니다(19절). "우리를 돌이키소서." 하나님께 대한 호칭이 다시 나타나고 있다(3절). "하나님이여" (7절). "만군의 하나님이여" (19절),"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가 하나님께 그 은혜로 구하러 나아갈 때, 곧 우리에게 대한 그의 선한 뜻과 우리 안에 있는 그의 선한 역사를 구하려 나아갈 때, 우리는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간곡하게 기도를 계속하고 더욱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Previous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