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시편 07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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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1

종교적 교훈의 중요성(시편 78:1-8)

이 귀절들은 이 이야기의 서문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이 시편이 그 표제에 부합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정말 "마스길-교훈을 주는 시"이다. 이것이 주는 교훈을 우리가 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잘못이다.

Ⅰ. 시편 기자는 그가 쓴 것을 경청해 주기를 요구하고 있다(1절). "내 백성이여 내 교훈을 들을지어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이 시편 기자의 말로 보고 있다. 다윗은 왕으로서, 또는 아삽은 그의 이름에 의해 장관으로서 혹은 이스라엘의 달콤한 노래를 부르는 자들에 대한 서기관으로서, 여기에서 그의 백성들이 그의 책임 하에 맡겨진 것처럼, 그 백성들에게 그의 교훈에 청종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는 그의 가르침을 "교훈" 곧 또는 "칙령"이라 부르고 있다. 그 가르침 속에 있는 명령하는 힘이 실제로 그런 것이었다. 사랑과 총명으로 받아들여진 모든 선한 진리는 반드시 칙령(곧 법)의 힘을 지닐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다윗은 왕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백성을 교화하는 데에 자기의 왕권을 개입시키려 했다. 만일 하나님이 은총을 베풀어 어떤 훌륭한 사람들을 선한 자로 만드신다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유익을 행할 능력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말은 그들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법 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위 사람들은 그것에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귀에와 닿는 거룩한 계시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즉 우리 자신을 겸손케 하여 그것을 듣고 그것에 유념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 계시가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또는, 시편 기자는 선지자였으므로 하나님의 대언자로서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나의 백성" 이라 부르고 있으며, 율법으로서 말한 것에 복종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이처럼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2:7).

Ⅱ. 우리가 여기에 언급되어 있는 내용에 열심히 집중해야 하는 여러 가지 이유가 여기에 제시되어 있다.

1. 여기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일들은 중대하므로, 심사숙고 해볼 만하며 그것을 필요로 하고 있다(2절). "내가 입을 열고 비유를 베풀어서" 즉 웅대하고 특이하나 매우 훌륭하여 너희의 주의를 요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써, "비밀한 말을 발표하리라." 그것은 동방의 왕들이나 학식있는 자들이 서로 시험해 보던 수수께끼와도 같이, 너희의 가장 깊은 관심에 도전하고 있는 말이다. 이러한 것들을 "비밀한 말"이라 불리우고 있는데, 그것은 그 말이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그 말이 크게 경탄되어야 하며, 주의 깊게 살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우리 구주께서 제시하신 그 비유 속에서 이루어졌는데(마 13:35), 그것은(이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들 중에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의 상태에 대한 묘사였다.

2. 그것들은 고대의 기념물-"우리 열조가 우리에게 전한 옛 비밀한 말"이다(3절). 이것은 의심할 수 없는 분명한 일들이다. 우리는 것들을 들어 알았고 그 진실성을 의심할 여지도 없다. 누가복음은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이라 불리우고 있는데(눅 1:1), 여기에 언급된 것들도 그러한 것이었다. 우리가 우리 부모나 조상에게 바쳐야 하는 존경심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열조가 우리에게 말한 것을 유의하도록 명하고 있으며, 그것이 참되고 선한 것임이 나타나는 한 더욱 큰 경외감과 관심을 갖고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명하고 있다.

3. 그것들은 후손에게 전승되어야 하며 그것들을 조심스럽게 그들에게 물려 주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다(4절). 즉, 우리 조상들이 우리 후손을 일컬어 말하기를, "우리가 그것들(말씀)을 그것들(말씀)의 후손(우리의 자손)에게 숨기지 않으리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 말씀들은 그 말씀의 자손의 자손들을 위해서 보존되어 왔고, 또 그 자손들은 그(말씀)의 것으로 여겨 왔으므로, 우리의 자손들은 곧 "그것들의 것"이라고 불리는 것이라. 우리는 하나님의 지식을 우리 후손에게 가르쳐 줌으로써, 우리를 가르쳐 준 우리의 조상들에게 조금이라도 빚을 갚아야 한다. 아니,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자손이 없다면, 우리는 그것(하나님의 지식)을 "그것의" 자손인 다른 사람들의 자손에게 선포해야 한다. 우리의 관심은 우리 자신의 후손에 대한 것만이 아니고 전체적인 후손에 대한 것이라야 한다. 그리고 바로 다음에 일어나고 있는 세대와 태어난 자손들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그 후에 을 세대에 관한 것이라야 한다. 우리가 우리 자손에게 전승해야 하는 것은 언어와 예술, 과학에 대한 지식, 그리고 자유와 자산일 뿐만 아니라 특별히 주를 찬양하는 것과, 그가 행하신 이적속에 나타난 그의 권능에 대한 찬양이다. 우리의 큰 관심은 우리의 정결하고 흠없는 믿음, 그 큰 공탁금을 우리를 계승하는 자들의 손에 맡기는 것이라야 한다. 우리가 우리 후사에게 상속해야 할 완전하고 명백한 지식은 다음 두 가지이다.

(1) 하나님의 율법, 이것은 그들의 자손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쳐야 하는 특별한 책임과 함께 그들에게 주어졌던 것이다(5절). "여호와께서" 야곱과 이스라엘에게 "증거" 곧 언약을 "세우시며," 법도를 정하시고 그들에게 규례와 약속을 주셨는데, 그는 "그들의 자녀에게 그것을 강론하도록 명하셨다"(신 6:7, 20). 하나님의 교회는, 역사가들이 로마 공화국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한 세대의 것이 아니라, 대대로 지켜져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레위 지파와 아론의 집에서 사역자들이 계승되도록 마련해 놓으신 것과 마찬가지로, 그 부모들이 주의 율법에 대한 지식으로 그들은 일어나 그것을 "저희에게 알게 하여"(6절), 하나님의 종들과 경배자들의 한 세대가 사라졌을 때, 다른 세대가 올 수 있도록, 그리고 교회는 땅처럼 영원히 거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그리고 이처럼 사람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이름이 천국의 날들 같도록 해야 한다.

(2) 긍휼과 심판 가운데 있는 그들에 관한 하나님은 섭리. 앞의 것은 이것을 위해 언급되어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은 그의 법도를 후손들에게 알리도록 명령하셨기 때문에, 그것과 함께 그의 행적도, 즉 순종하는 자에게는 그의 약속이 이행되었고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진노가 통고되었다는 것도 알려지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었다. 다음과 같은 일들을 우리 자손에게 그리고 우리 자손의 자손에게 이야기하도록 하자.

[1]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야 한다(7절). "저희로 그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이전에 행하신 "하나님의 행사를 잊지 아니하고 그 계명을 지켜서," 그의 명령을 그들의 규례로 삼고, 그의 언약을 그들의 지주로 삼도록 하려 하심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마음에 두는 자들만이 확신을 갖고 하나님의 구원을 바랄 수 있다. 하나님의 행사를 잘 생각해 볼 때, 그것은 우리의 소망을 그에게 두고 계명을 지키려는 우리의 결심을 매우 강하게 할 것이다.

[2] 그들은 그들 열조의 본보기를 따르지 않도록 경고받을 수 있다(8절). 저희로 "그 열조 곧, 완고하고 패역한 세대와 같지 않게 하려 하심이로다. "여기에서 다음을 살펴 보라. 첫째, 그들 열조의 특성은 어떠했는가. 비록 그들의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고, 우리가 잘은 모르지만, 그 당시 세상에서 신앙을 고백하는 유일한 백성이었을지라도 그들은 완고하고 패역했으며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행했다. 그들은 실지로 그에 대한 관계를 고백했지만 그들의 마음을 정직하게 두지는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계약 속에서 뿐만 아니라 그를 숭배하는 내심에서 충실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심령은 하나님께 충성치 아니했고," 시시 때때로 그들은 그로부터 도망했던 것이다. 위선은 배신에 이르는 고가도로임을 명심하자. 마음을 정직하게 하지 않은자들은 하나님께 대해 확고 부동하지 않고 방종 상태에 있을 것이다. 둘째, 그 자손들의 책임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저희로 그 열조와 같지 않게 하려 하심이로다. "악하고 불경건한 조상의 뒤를 이은 자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행사를 깊이 생각하기만 한다면, 그 조상의 길을 밟아서는 안되는 이유를 충분히 볼 것이다. 망령된 행실이 우리 조상의 유전에 의해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변명이 되지 않을 것이다(벧전 1:18). 왜냐하면 우리가 그들의 나쁜 점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 경고가 되어, 그들의 건강이나 가산을 몰락시킨 그 경로를 우리가 피하려는 것처럼 그것을 유해한 것으로 여겨 두려워해야 하기 때문이다.

 

78:2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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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을 위한 이적(시편 78:9-39)

Ⅰ. 시편 기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패역하게 행했기 때문에 최근에 섭리의 경책을 받게 된 것을 지적하고 있다(9-11절). 에브라임 지파 땅에는 실로가 있었고, "그 자손은" 병기를 갖추며 활을 가졌지만 "전쟁의 날에 물러갔다." 이것은 엘리 시대에 그들이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수치스럽게 패하여 하나님의 궤를 빼앗긴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삼상 4:10, 11). 이것에 대해, 시편 기자는 여기에서 말하기 시작하고 있으며, 오랫동안 다른 것을 이야기한 후 다시 이 내용으로 돌아보고 있다(61절). 그 사건이 40년이 지난 다윗 시대에 이처럼 새롭게 상기되는 것은 타당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 잊을 수 없는 전쟁으로 블레셋 사람에 의해 빼앗긴 그 궤는 비록 빨리 되찾아졌다 할지라도 다윗이 기랏여아림에서 그의 성읍으로 가져올 때까지는 어두운 곳에 쳐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을 주목하자.

1. 에브라임 자손들의 치욕적인 비겁. 호전적인 지파였던 에브라임은 여호수아가 속했던 지파로서, 용맹한 사람들이 많기로 유명 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지파의 자손들은 여느 때처럼 잘 무장되어 있었지만, 그들이 대적들을 대면했을 때에는 물러났다. 전쟁 무기는 그것에 무사적인 정신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사람에게 거의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며, 하나님께서 그것과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아무소용이 없어진다.

2. 그들이 비겁해진 동기. 그것은 적지 않게 부끄러운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1) 하나님의 율법을, 그리고 그와 맺은 그들의 언약을 수치스럽게 위반한 것이었다(10절). 그들은 야비하게 배반했고 불성실했다. 왜냐하면 "저희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8절에 묘사되어 있는 것처럼) 야비하고 완고하게 패역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기를 단호하게 거절했고, 사실상 그들이 그의 다스림을 받지 않을 것을 그와 대면하여 말했던 것이다.

(2)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은총에 대한 수치스러운 배은망덕. 그들은 여호와의 행하신 것과 기사를, 그들이 숭앙해야 하는 그의 이적의 행사를 잊었다(11절). 우리가 하나님의 행적을 잊어버리려는 것이 그의 율법을 복종하지 않으려는 마음의 근저에 깔려있다.

Ⅱ. 그는 여기에서 전례와 상의해보고 이것을 그들 열조의 경우와 비교해 볼 기회를 마련해 놓고 있는데, 그 열조들도 또한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을 마음에 두지 않고, 그들의 조물주와 큰 은인에게 감사하지 않았으므로 자주 그의 진노 아래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있는 이야기는 매우 주목할 만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람의 악 사이에 있는 일종의 갈등을 언급하고 있으며, 마침내 긍휼이 심판을 물리치고 즐거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1. 하나님은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하나의 백성으로 형성하셨을 때, 그들을 위해 놀라운 일을 행하셨다. "하나님이 기이한 일을 저희 열조의 목전에서 행하셨다." 그리고 그들의 목전에서 뿐만 아니라, 그 사건을 통해서, 또한 그들의 이득을 위해서 행하셨다. 따라서, 그 일이 매우 놀랍고 매우 친절했으므로, 결코 잊혀지지 안으리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가 그들을 위해 애굽 땅에서 행하셨던 것이 바로 여기에서(12절) 언급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다시 언급되어 있다(43절). 그는 여기에서 계속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1) 하나님은 이렇게 그들을 위해 홍해를 갈라 길을 내셨으며, 비록 물이 무더기같이 서 있었을 지라도, 어떻게 그들로 하여금 지나갈 수 있는 용기를 주셨는가? (13절) 이사야 63장 12,13절을 보라, 거기에 보면, 하나님은, "그 팔로서 그들을 깊음으로 인도하시되 넘어지지 않게" 하셨다고 적혀 있다.

(2) 어떻게 그는 그들이 사람이 다니지 않은 광야의 길을 지나가도록 안내하셨는가? (14절) 그는 "낮에는 구름으로" 그들을 한걸음씩 인도하셨는데, 그 구름은 또한 태양 옆에서 보호해주었다. 그리고 "온 밤에는 화광"으로 인도하셨는데, 그것은 차가운 밤공기를 따뜻하게 해 주었을 것이다. 적어도 그것은 밤의 흑암을 덜 무섭게 만들었고, 또 들짐승들을 쫓아낼 수 있었다(슥 2:5).

(3) 어떻게 그는 물이 없는 메마른 땅에서 그들의 진영에 신선한 물을 공급해 주셨는가? 그것은 하늘의 병마개를 여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그것은 일반적인 방법이었었을 것이다) 반석을 쪼개는 것에 의해서 였다(15,16절). "저는 광야에서 반석을 쪼개셨다." 반석은 위에 있는 구름으로부터, 또는 밑에 있는 샘물로부터 물을 받아 수용할 능력은 없었지만 물을 냈던 것이다. 그는 건조하고 딱딱한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셨는데, 그것은 증류수처럼 방울 방울 새어 나온 것이 아니라, 시냇물같이 "물이 강같이 흐르게" 하신 것이며, 또 깊은 수원에서 나는 것 같았다. 하나님은 풍성히 주시며 긍휼이 풍부하시다. 그는 알맞는 때에 주시나, 우리가 긍휼의 가치를 더 잘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때로 우리로 하여금 그 긍휼에 대해 갈급을 느끼게 만드신다. 하나님께서 반석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물은 영적인 음료수이므로, 더욱 귀중했다. "그리고 그 반석은 그리스도였다."

2. 하나님께서 이처럼 그들을 축복하기 시작하셨을 때, 그들은 그를 모욕하기 시작했다(17절). 저희는 비록 애굽에서도 매우 악을 행했지만(겔 20:8), 그것 이상으로 "계속하여 하나님께 범죄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구원을 위한 어려움보다는 노역의 비참함을 더 잘 참았다. 그리고 그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투덜거렸듯이 그들의 공사 감독에게 투덜댄 적은 없었다. 그들은 마치 자기들이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기" 때문에 구원을 얻은 것같이 행동했다(렘 7:10). 때로는 죄가 계명에 의해 기회를 잡는 것과 마찬가지로 또 어떤 때에 구원에 의해 죄가 기회를 잡아서 더욱 악랄해지기도 한다. "저희는 지존자를 배반하였도다." 비록 그가 지존자이시며, 그들은 그들 자신이 그에게 동등하지 못한 상대방이라는 것을 알았을 지라도, 그를 노하게 했고, 심지어는 그의 공의에 도전하기까지했다. 그리고 그가 광야에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으므로 그를 즐겁게 하려고 관심을 가져야 할 의무가 있으며, 그가 그들에게 그처럼 큰 긍휼을 보여 주셨으므로 감사한 마음으로 그를 즐겁게 해야 할 의무가 있는 바로 그 광야에서 이렇게 행했다. 그들은 그가 노하리라고 알고 있는 것을 말하고 행했다. "저희가 그 심중에 하나님을 시험하였다"(18절). 그들의 죄는 그 심중에서 시작되었고, 그곳에서 그 죄의 사악성을 이끌어 내었다.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었다"고 했다"(히 3:10). 이처럼 그들은 하나님을 시험했고, 하나님이 그들을 참으실 수 있는가 없는가 하고 끝까지 그의 인내를 시험해 보았다. 그리고 실상 하나님이 가장 악한 일을 행하도록 기도한 것이다. 그들이 그를 노하게 한 두 가지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기에 합당하다고 생각지 않으신것을 원함으로써 또는 오리려 요구함으로써이다. "저희가 저희 탐욕대로 식물을 구하였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건강에 유익하고 맛있는 음식 만나를 충분히 주셨다. 그는 그들의 믿음을 위해서는, 그가 "파쇄하신" 악어의 머리에서 식물을 주셨다(74:14).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그들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그들은 그들의 탐욕대로 식물을 얻어야 했다. 그 호화로운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호화롭고 다양한 식물을 가져야 했던 것이다. 우리의 몫에 대해 다투며 육신의 욕망에 탐닉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 진노케 하는 것은 없다.

(2)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시는 그의 능력을 불신함으로써이다. 이것은 사실상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고기를 달라고 촉구했다. 그리고 만일 그가 주시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것이 그들에게 합당치 않다는 것을 그가 아시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실 수 없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라고 말하려 했다(19절). 저희가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했다.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자들은 그를 대적하여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능히 식탁을 준비하시랴?" 하고 말하는 것은., 가장 치욕적인 비방이다. 그들은 만나를 얻었으나 애굽에서처럼 첫 번째, 두번째, 세 번째 과정을 거쳐 끓이고 굽지 않고서는 식탁을 준비했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들이 애굽에 있을 때는 고기와 생선, 그리고 양념도 있었고(출 16:3; 민 11:5), 고기 접시와 과일 쟁반이 있었던 것이다. 사치는 얼마나 불합리하고 만족할 줄 모르는 것인가! 이 미식가들은 훌륭하게 차려진 식탁을 매우 거대한 것으로 여겼으므로,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광야에서 그들에게 주실 수 있었던 것 이상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모든 생축"이 다 그의 것이다(50:10, 11).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그들의 불신은 더해갔으므로, 그들은 동시에 그가 행하신 것을 당연한 귀결로 인정했다(20절). "저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내시매, 그들과 그들의 가축이 마셨다." 부유한 사람이면 행할 수 있는, 광야에서 식탁을 준비하는 것과 땅 위의 가장 위대한 주권자도 행할 수 없는, 반석에서 물을 끌어내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쉬운가? 결코 불신앙은-언제나 터무니 없기는 하지만-이처럼 어리석은 질문은 하지 않았다. "바위를 녹여 시내가 되게 하신 그가 또한 떡을 주실 수 있는가? 혹은 떡을 주신 그가 고기도 또한 주실 수 있는가?" 전능자에게 매우 어려운 일이 있겠는가? 일단 자연의 평범한 힘이 탁월해질 때 하나님은 그의 팔을 드러내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에게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이 아무리 큰 것일지라도, "주께서 원하시면,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마땅하다.

3. 하나님은 당연히 그 자극에 분노하셨고, 그들을 매우 불쾌하게 여기셨다(21절). "여호와께서 듣고 노하시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불만과 불신을 아시는 증인이다. 그는 그것을 들으시고 매우 언짢아 하신다. 이 때문에, "야곱을 향하여 노가 맹렬하였다." 즉, "여호와의 불로 그들 주에 불어서 사르게 하셨다"(민 11:1). 또는, 이것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불붙는 하나님의 진노의 불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믿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친히 불이 되신다. 하나님의 긍휼의 능력을 믿지 않으려는 자들은 그의 분노의 능력을 맛볼 것이며, "하나님의 손아귀에 빠지는 것은 두려운 일이로다" 라고 고백하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읽을 수 있다.

(1) 왜 하나님은 이처럼 그 자극에 노하셨는가? (22절) 그 이유는 이것에 의해,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아니한다"는 사실이 나타난 "연고"였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 자신에 대해 계시하신 것을 신용하지 않았다. 즉 그들은 자신들을 하나님께 맡기거나 그에게 나아가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시작한 "그 구원을 의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처럼 그 과정을 탐구해 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전히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양식을 위해 하나님의 섭리를 의지하는 마음을 자신들 안에서 발견할 수 없는 자들은 결국 하나님의 구원을 자기들의 지극한 축복으로 의지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의 불신앙을 한결 무겁게 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을 체험했다는 일이었다(23,25절). 그는 그들에게 아래에 있는 땅에서 뿐만 아니라 위에 있는 하늘에서도 자기의 능력에 대한 부인할 수 없는 증거를 보내 주셨다. 즉 "저가," 궁창을 창조하시고 그것이 존재하도록 명하신 자로서 "위의 궁창을 명하셨다." 그는 하늘을 마음대로 이용하시는 분이시다. 하늘은 비를 내려 땅에서 열매를 내는 곡식에 기여한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명하셨을 때는, 양식을 비같이 땅에다 쏟았다. 그러므로 그것을 "하늘 양식"이라 부르고 있다. 따라서 하늘은 땅 없이도 일할 수 있으나, 땅은 하늘 없이는 일할 수 없다. 궁창의 열쇠를 지니신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셨다." 그리고 그것은 "창문을 여는 것"에 불과하나 큰 축복으로서 언급되어 있다(말 3:10). 믿음과 기도로써 묻고 구하고 두드리는 자들에게는 언젠가 이 문들이 열려질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의 하나님은 그를 청하는 모든 자들에게 긍휼이 풍성하시기 때문이다. 그는 훌륭한 집을 지니고 계실 뿐만 아니라 그 집을 열어놓고 계신다. 그가 그들에게 매우 친절하시어 "만나를 비같이 내려 먹이셨을 때, 그들이 그를 불신하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언짢게 여기시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이 천사의 떡" 즉 천사들이 음식을 먹을 경우가 있다면 그들도 감사하며 먹을 정도의 떡을 "먹었다." 또는 그 만나는 천사들을 통해 주어졌고("갈대아" 판에 적혀 있는 것처럼), 천사들의 거처에서 내려왔다. 각 사람은, 심지어 이스라엘의 가장 작은 아이도(난외에 적혀 있는 것처럼) "권세있는 자의 떡을 먹었다." 위가 가장 약한 사람도 소화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영양이 풍부했으므로, 강한 자들에게 강한 힘을 주는 양식이 되었다. 그리고 그 양식이 매우 훌륭할지라도 인색하게 분배하지 않았다. 또 그 할당량이 감소되지도 않았다. 즉 "하나님이 식물을 충족히 주셨던" 것이다. 그들이 조금밖에 모으지 못했다면,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었으며 그러할지라도 그들에게는 부족함이 없었다(출 16:18). 하나님께서는 일용할 양식을 우리를 위해 만들어 주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이 비록 이처럼 큰 경이는 아닐지라도 우리가 이 세상에 온 이래로 계속 만들어 오셨으며, 긍휼도 또한 그것에 못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불신한다는 것은 큰 죄이다.

(2) 그는 그들이 지나치게 탐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고 허락해 주심으로써, 그러한 죄악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셨다.

[1] 그들은 그의 능력을 의심했는가? 그는 그가 "광야에서 능히 식탁을 준비하실"수 있다는 것을 현저히 깨닫게 해 주셨다. 비록 바람이 그 원하는 대로 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그는 바람을 통해서 양식을 운반하는 조달자로 삼을 수 있다(26절). "저가 동풍으로 그리고 남풍으로 일게 하신다." 즉 저가 동남풍이나 동풍으로 하여금 먼저 그 방향에서 메추라기들을 끌어오도록 하신 다음, 남풍으로 하여금 그 쪽에서 더 많이 끌어 오도록 하신다. 그리하여 저가, 이스라엘의 가장 비천한 자도 충분히 먹을 수 있도록, "저희에게 고기"와 가장 맛있는 종류의 것, 즉 짐승 고기가 아닌 들의 새고기를 "티끌같이 내리시니" 곧 "바다 모래같이" 풍성히 내리셨다(27절). 그들은 그 고기를 위해 비용을 들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산에서 그것을 가져 오느라고 수고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그 진중에 떨어지게 하사, 그 거처에 둘리셨기" 때문이다(28절). 우리는 그 이야기를 민수기 11장, 31,32절에서 읽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악하며 감사할 줄 모르는 자들에게까지도 얼마나 선하신가를, 그리고 얼마나 놀랍게 그의 선하심으로 저들의 악을 압도하지 않으시는가를 보라. 이처럼 하나님이 하사하시는 선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부조리한 것인가를 보라. 맛있는 음식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의 표적이 아니 것이다.

[2] 그들은 그의 의를 무시하고, 그들의 뜻한 바를 이룬것을 자랑했는가? 그는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메추라기에 대해 큰 댓가를 치르도록 했다. 왜냐하면, 그가 "저희 소욕대로 주셨"을지라도 "저희가 그 욕심에서 떠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29,30절). 그들의 욕구는 만족할 줄을 몰랐다. 그들에게 충족히 주었으나 그들은 만족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이 원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이 욕심의 본질이다. 그것은 어떤 것에도 만족하지 못하며, 그것에는 잘해 줄수록, 그것은 더욱 변덕스러워진다. 탐심에 빠진 자들은 결코 그것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또는, 그것은 하나님의 후하심이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배은망덕한 욕심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만들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만일 그들이 도의심을 갖고 있었다면, 그들은 그것을 부끄러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는가? "저희 식물이 아직 그 입에 있을 때에." 달콤한 사탕처럼 혀 밑에 구르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이 저희를 대하여 노를 발하사 저희 중 살찐 자를," 즉 매우 호사스럽고 매우 대담한 자를 죽이셨다"(31절). 민수기 11장 33,34절을 보라. 그들은 "도살당한 양"처럼 먹었다. 도살자는 가장 살찐 것을 제일 먼저 잡는다. 물론 알맞게 메추라기를 먹고 그 도를 지나치지 않는 경건하고 만족할 줄 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느 정도 있었으리라는 것은 추측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을 타락시킨 것은 그 식물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욕심이었기 때문이다. 미식가와 관능주의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파멸을 읽도록 하자. 자기들의 배를 신으로 삼는 자들의 마침은 멸망이다(빌 3:19).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킬" 것이며, 그들의 멸망은 더 클 것이다.

4.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긍휼처럼 그들을 개심시키지 못했다. 또 그 목적은 이루지도 못했다(32절). "그럴지라도, 저희가 오히려 범죄하였다"고 말했다. 그들은 이전처럼 하나님과 모세에게 투덜거렸고 논쟁을 벌였다. 비록 하나님이 "노하여 그들을 치셨으나 오히려 자기 마음의 길로 행하였다"(사 57:17). "저희가 그의 기사를 믿지 아니하였다." 비록 하나님의 공의의 행적이 그의 긍휼의 행적만큼 그의 능력을 놀랍고 위대하게 증명했을지라도,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만들지 못했고, 그를 그들의 친구로 삼는 것이 얼마나 유익한 것인가를 깨닫도록 만들지도 못했다. 하나님의 긍휼에 의해 녹여지거나 그의 심판에 의해 부러지려 하지 않는 자들의 마음은 정말로 완악한 것이다.

5. 그들이 계속 죄를 범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은 계속 진행되었다. 그러나 갑자기 오는 심판이 아니라 천천히 진행된 다른 종류의 심판이었다. 그는 지금, "저희 중 살찐 자를 죽이시"는 것과 같은 급작스러운 병이 아니라 질질 끄는 만성병으로써 그들을 발하셨다(33절). "하나님이" 광야에서 "저희 날을 헛되이 보내게 하시며 저희 해를 두렵게 지내게 하셨도다." 취소될 수 없는 멸망에 의해, 그들은 광야에서 38년이나 되는 지루한 해를 보내도록 선고 받았는데, 그것은 실상 저의 날을 헛되이 보낸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햇수 동안에는 한 발자국도 가나안 가까이로 내딛을 수 없었고 다시 돌아와 미궁에 빠진 것처럼 이리저리 방황했으나 그들이 가한 일격도 가나안의 정복을 향해 나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월을 헛되이 보냈을 뿐만 아니라 두렵게 지냈다. 즉 그들은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하고 모두 죽어 버렸던 것이다. 계속 죄를 범하는 자들은 계속 두려움에 빠질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날들이 이처럼 헛되고 두렵게 보내야 하는 이유, 즉 우리가 거의 위로를 받지 못하고 매우 무익한 상태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6. 이러한 책망 아래서, 그들은 회개를 고백했지만, 그 고백은 성실하고 진실된 것은 아니었다.

(1) 그들의 고백은 매우 그럴 듯했다(34,35절). "하나님이 저희를 죽으실 때에," 즉 저희를 죽이실 것을 선고하실 때에, "저희가 그에게 구하였다." 즉 그들은 잘못을 자백했고, 용서를 구했다. 사람이 죽게 되자, 다른 사람은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긍휼을 구했으며, 개심하며 매우 선하게 될 것을 약속했다. 그때에, "저희가 돌이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던"것이다. 따라서, 그들을 진정으로 하나님 찾기를 원하는 자로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비록 이전에는 잊었다 할지라도, 이제 "하나님이 저희의 반석"이시므로 그들이 그에게로 날아가 그 안에 피신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고, 또 "지존하신 하나님"이 저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셨으므로 그들이 그에게로 담대히 나아갈수 있는 "저희 구속자이심을 기억하셨기"때문에 이렇게 행하는 척했다. 환란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우리의 반석이시며 우리의 구속자로서 생각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형통할 때는, 우리가 그를 잊기 쉽기 때문이다.

(2) 그들은 이 고백을 진심으로 하지는 않았다(36,37절). "저희가" 마치 그럴 듯한 말로써 그로 하여금 그 선고를 철회하고 그심판을 취소케 하며, 그 위험이 끝났을 때는 그들의 말을 어길 뜻을 은밀히 품고서, "입으로 그에게 아첨했다." 즉 그들은 "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오지 아니하고 거짓으로 말했다"(렘 3:10). 그들의 모든 고백과 기도와 약속은 고문에 의해 억지로 갖다 붙인 것이었다. 그들에게 그들이 말한 그대로를 의미하지 않았다는 것은 명백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햇볕에 녹지 않고 응달에서 얼어버렸다. 그들은 그저 "그에게 거짓을 말하였으니, 이는 하나님께 향하는 저희 마음이 없으며," 그 결과로써 나탄난 바와 같이, 저희 마음이 그에게 올바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즉, "그 언약에 성실치 아니하였음이었다." 그들의 개심은 진실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꾸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처럼,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그들은 실상 하나님을 비방함으로써, 그를 모욕하는 것과 같은 큰 모욕을 그에게 행했다.

7. 여기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두렵게 하시고 부분적으로 수행되어진 그 심판을 중지하셨다(38,39). 하나님은 자비하시기 때문에 죄악을 사하시었다. 이 거짓된 회개가 그들의 죄악의 도를 가득 채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거룩하신 하나님을 속이는" 것, 이처럼 그 주된 부분인, "값 얼마나 감추는" 것보다(행 5:3) 하나님을 더욱 진노케 할 수 있는 것이 또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오직 하나님은 자비하심으로" 이처럼 크게 "죄악을 사하셨다." 그가 마땅히 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멸하시며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게 하지 않고, 그들이 그 약속된 땅에 들어갈 다른 세대를 일으켜세울 때까지 그들의 생명을 남겨 두셨다. "그것을 상하지 말라. 거기 복이 있느니라"(사 65:8). 그는 "그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왜냐하면 그는 진노의 여호와 이시기 때문이다) 그 분을 다 발하지 아니하셨다." 즉 그들의 행위대로 보응하지 않았다. 왜 보응 하시지 않았는가? 그것은 글의 멸망이 하나님에게 어떤 손실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1) 그가 "자비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그들을 멸하고자 하실 때 "그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하였으며, 그는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하고 말씀하셨던 것이다(호 11:8).

(2) 비록 그가 반석이시라는 것을 그들이 바로 기억하지 않았을지라도, 그는 "저희가 육체뿐임을 기억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악으로 기울어지기 쉬운 그들의 부패한 본성을 고려하셨으며, 비록 그것이 실지로 그들의 죄에 대한 변명은 안 되지만, 그들을 아끼시는 마음으로 그것을 실수로 여기셨다(창 6:3 참조). 그는 그들 성품의 연약함과 결점을 고려해 주셨고, 그것을 박멸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가를 생각하셨다. 저희는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이라. 그들은 곧 불려 가버리나 그들이 가버렸을 때, 그것은 돌이킬 수 없게 된다. 그러면 아브람과의 언약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들은 육체이며 바람이다. 따라서 그들이 마땅히 그리고 즉시 가버릴 것이며, 그것은 아무런 손실도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주장하기가 쉽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멸하지 않으시겠다고 주장하셨다. 그 참된 "이유는 하나님이 자비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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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과 긍휼(시편 78:40-72)

이 대목의 소재와 범위는 앞의 것과 같은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베푸신 큰 긍휼과,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진노케 했는가를 보여 주고 있으며, 그가 그들의 죄에 대해 심판하신 것과, 또 그러할지라도 마침내 그가 심판 속에서 긍휼을 기억하셨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받은 자들은 죄에 대담해지지 말자, 왜냐하면, 그들이 받는 긍휼은 그들의 죄를 더 무겁게 하고, 그것에 대한 형벌을 재촉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죄를 인해 하나님이 징계로 받는 자들은 낙심한 나머지 회개하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하자. 왜냐하면 그들의 형벌은 회개케 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을 위해 그가 아직도 저축해 두신 그 긍휼을 막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범한 죄가 다시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경고가 되기 위해 기록되어진 것이다(40,41절). "저희가 광야에서 그를 반항함이 몇 번이고?" 한 두번이 아니고 여러 번이었다. 그리고 그 범죄의 반복은 그 장소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매우 가중시켰다(17절). 하나님은 그들이 기억하지 않았을지라도 몇 번이나 그들이 그를 격노케 했는가를 기록해 두셨다. "저희가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였다"(민 14:22). 그를 진노케 함으로써, 그들은 그를 노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슬프시게 했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을 그의 자녀로서 간주하셨으며(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자녀의 불효하고 무례한 행동은 자상한 부모들을 노하게 하는 것 이상으로 그들을 슬프게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것을 명심했지만 고맙게 여기지는 않았다(사 1:2). 그들은 그로 하여금 그들을 징계할 필요를 느끼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그를 슬프시게 했다. 그는 그렇게 하는 것을 즐기시기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그 앞에 그들 자신을 겸손케 한 후, 이전처럼 "돌이켜 하나님을 재삼 시험하며," 그에게 그의 능력에 대해 그리고 그가 그들과 함께 하심에 대해 어떤 증거를 보이셔야 하고 또 그들은 인도하시고 부양하시는 일에 있어서 어떤 방법을 취하셔야 하는가를 명령하면서,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격동하였다." 그들은 마치 그들이 그에게 트집잡는 것을 그가 모르고 있다는 듯, 그를 그들의 방법과 그들의 때에 한정시켜 버렸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제한하는 것은 외람된 일이다. 왜냐하면 "거룩한 자"이시므로 그는 대부분 그 자신의 영광을 위해 행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이시므로, 그는 대부분 유익을 위해 행하실 것이다. 우리가 만일 그에게 처방을 내리려 한다면, 그것은 그의 지혜를 모독하는 것이며, 우리 자신과의 교만과 어리석음을 들어내는 것이다. 그들로 하여금 미래에 대해 하나님을 제한하도록 만들었던 것은 그들이 이전의 그의 은총을 잊은 때문이었다(42절). "저희가 그의 손," 즉 그것이 얼마나 강하며, 어떻게 그것이 그들을 위해 펼쳐졌는가를 "기억지 아니하며 대적에게서," 즉 그들의 파멸을 노렸던 그 큰 대적 바로에게서, "구속하신 날도 생각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현저한 구원에 의해 주목될 만한 날들이 있는데, 그것은 결코 잊혀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억하는 일은 큰 공경 속에 있는 우리를 격려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Ⅱ.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 그들이 하나님을 시험하고 제한했을 때, 그들은 그 긍휼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역사하신 기이한 일들에 대한 이 목록은 12절에서 보다도 더 이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으며 더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1. 이것은 그들이 애굽에서 건지웠던 사실과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게 하기 위해 애굽 사람들을 재앙으로써 복종시켰던 일로써 시작되어 있다.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이 "애굽에서 나타내신 징조였고"(43절) 소안 들에서 나타내셨던 그 "기사"였다.

(1) 애굽의 여러 재앙들이 여기에 열거되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이스라엘에 대한 그의 은총을 크게 나타내고 있는 반면에, 그와 그들의 대적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 재앙들은 다음과 같다.

[1] 물이 피로 변함. 그들은 그들 자신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의 피를, 심지어 어린 아기의 피를 마시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은 그들에게 피를 주시어 마시게 했다. 그것이 "그들에게 마땅하기 때문이었다"(44절).

[2] 그들에게 만연된 파리와 개구리, 즉 "저희를 물게 하고" "저희를 해하게 한" 여러 가지 벌레들(45절).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원하실 때는, 아무리 약하고 보잘 것 없는 동물들도 그의 진노의 도구로 만드실 수 있다. 힘이 약한 것들은 수효로 보충될 수 있기 때문이다.

[3] 메뚜기의 재앙, 메뚜기는 그들의 토산물과 그들이 수고한 것을 먹어버렸다(46절). 그것들은 "하나님의 큰 군대"라 불리우고 있다(욜 2:25).

[4] "우박" 그것은 그들의 나무, 특히 가장 약한 나무인 "저희 포도나무를 죽였으며"(47절), "저희 가축"을 죽였다(48절). 그리고 "서리" 또는(단어가 의미하듯) 응결된 비가 심하게 와서 "뽕나무"까지도 죽였다.

[5] 장자의 죽음은 애굽의 재앙 중에 최종적이고도 가장 심한 것이었으며, 그것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완전케 했다. 그것은 제일 첫번째로 의도된 것이었으나(출 4:23), 마지막으로 집행되었다. 만일 좀 더 부드러운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면, 이러한 방법은 쓰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그것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49-51절). 첫째, 하나님의 노가 그 원인이었다. 진노가 이제 애굽 사람들위에 극심하게 임하게 되었다. 바로가 작은 심판을 당하고 난 후에도 계속 그 마음을 강퍅하게 했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은 "모든 진노를 발하셨다." 즉 그는 "맹렬한 노," 가장 극심한 노와" 그 원인인 "분과 분노"와 그 결과인 "고난(환란과 곤고" 롬 2:8, 9)을 저희에게 내려 보내셨다." 그는 높은 곳에서 이것을 그들에게 내려보내셨으며, 조금도 아끼시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그의 손에서 피할" 수가 없었다(욥 27:22). "하나님이 그 노를 위하여 길을 만드셨다." 곧(말 그대로) "길을 심사숙고 하셨다." 그는 그들에게 그것을 불확실하게 보내신 것이 아니라 치밀한 계산 하에 보내셨던 것이다. 그의 분노는 공의의 저울로 가장 정확하게 재어졌다. 왜냐하면 가장 언짢으셨을 때에도, 그는 그의 어떤 피조물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셨고, 또 앞으로도 끼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분노의 길은 항상 심사숙고 되어진다. 둘째, 하나님의 사자들이 이 처형에 쓰여진 도구였다. 저가 "벌하는 사자(천사)들을 저희에게 보내셨는데." 벌하는 것이 천사들의 본성은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심부름을 위해 파송되었을 따름이었다. 그들은 멸하는 천사 곧 처형하는 천사로서, 모든 사람이 아니라 장자만 죽이라는 명령을 받고, 하나님의 진노의 심사숙고된 길을 따라 애굽 온 땅을 두루 다녔다. 선한 천사들도 죄인들에게 벌하는 천사들이 된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적으로 삼는 자들은 거룩한 천사들이 그들이 친구가 되기를 결코 기대해서는 안 된다. 셋째, 처형 자체가 매우 혹독했다. 하나님은 "저희 혼의 사망을 면제 아니하시고," 사망으로 하여금 저희 중에서 개가를 부르도록 내버려 두셨다. 그리고 "저희 생명을 역병에 묻히시어," 곧 생명의 줄이 끊기게 하셨다. 즉 그는 "애굽에서 모든 장자, 곧 기력의 시작," 곧 가정의 소망을 "치셨다"(51절). 자손은 부모들의 힘이며, 장자는 "그 기력의 시작"이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귀중했으므로, "저희의 생명을 위해 사람들을 내어 주셨다"(사 43:4).

(2) 애굽 사람에게 내건 이 재앙에 의해 하나님은,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별하듯이, 그들과 애굽 사람들을 구별하시면서, 문설주 위에 뿌려진 양의 피로써 이 양들에게 그의 표적을 남기셨고, "자기 백성을 양같이 인도하여 내셨다." 그는 저희들"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양같이 "인도하여 내시고," 목자가 그의 양떼를 지도하듯, 온갖 배려와 친절로써 "광야에서 양떼같이 지도하셨다"(52절). 그가 "저희를 두려움이 없었다." 즉, 저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사실상 홍해에서 놀랐으나(출 14:10) 그들에 대해 언급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을 위해 행하여진 것으로써, 효과적으로 그들의 두려움을 잠잠케 했던 것이다. "그러나" 감히 저희를 추격했던 "저희 원수는 바다에 엄몰되었다"(53절). 그것은 그들에게 수로가 되었으나, 그들의 핍박자들에게는 지옥이 되었던 것이다.

2. 그것은 그들이 가나안에 정착하는 데에까지 이어지고 있다(54절). 그가 저희를 "성소의 지경," 곧 하나님이 자기의 성소를 세워 두신 그 "땅으로 인도하셨"는데, 그 성소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그 중심부이며 수도였고, 그 면류관이며 영광이었다. 하나님의 성소의 지경은 행복한 땅이다. 하나님께서 그 땅에 알리신 바 되었다는 것은 그 곳의 행복이었고, 거기에 그의 성소와 처소가 있었다(76:1, 2). 일반적으로 그 온 땅, 특별히 시온은 "그의 오른 손이 취하신 산"이었으며, 그는 그 자신의 권능으로써 그 자신을 위해 그것을 따로 떼어 놓으셨다(44:3 참조). 그는 "그들을 땅의 높은 곳에 올리셨다"(사 58:14; 신 32:13). 그들은 가나안 사람들이 그 땅을 충족하고도 평안하게 소유하고 있음을 발견했으나 하나님은 "열방을 저희 앞에서 쫓아내셨다." 온 땅의 주(主)로서 그 땅에 대한 그들의 권리를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 대한 심판을 손수 행하셨다. 그리고 만군의 주로서 그들을 그 곳에서 몰아내셨고, "줄로" 각 지파의"기업을 분배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죽였던 자들의 집에 "거하게" 하심으로써 그의 백성 "이스라엘로 저희의 높은 곳을 짓밟게" 하셨다. 하나님은 사람이 살지 않는, 경작되지 않는 광야를(그것이 아마도 가나안 전역이었을 것이다) 비옥한 토양으로 바꾸실수 있으며, 거기에 식물이 자라게 하실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그들을 위해 의도하셨던 땅은 천국의 모형이었으므로 "온 땅의 영광"임에 틀림없었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싸워서 쟁취해야 했다. 왜냐하면 "하늘 나라는 침략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Ⅲ.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 이스라엘이 범한 죄(56-58절). 그 자손은 "저희 열조 같았고," 그들의 옛 타락성을 그 새로운 거주지로 가지고 왔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이처럼 많은 일들을 하셨지만, "지존하신 하나님을 시험하며 반항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말씀을 주셨으나, 그들은 지키지 않았다. 그들은 매우 유망하게 시작했었지만, 다시 되돌아섰고 하나님께 좋은 말씀을 드렸지만, 불성실하게 해하여 "속이는 활 같았다." 그 활은 표적을 향해 살을 보내는 것 같지만, 그것을 쏘았을 때는 부러져, 궁수의 발 아래 떨어지거나 혹은 그의 얼굴로 다시 튀게 되었다. 그들의 약속이나 고백에는 뒷받침이 될 만한 것이나 확신을 둘 만한 것이 없었다. 그들은 때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곧 "빗나가서 자기 산당으로 그리고 저희 조각한 우상으로 그 노를 격동하였다." 우상숭배는 그들을 매우 쉽게 사로잡는 죄였고, 그들이 흔히 회개를 고백할지라도 또 금방 빠지는 죄였다. 마치 그가 우상이기나 한 것처럼 우상을 숭배하거나 조각한 우상에 의해 하나님을 숭배하는 것은 영적인 간음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으로 그들은 "그의 질투를 일으켰다"고 기록되어 있다(신 32:16, 21).

Ⅳ. 그들의 죄로 인해 하나님이 그들에게 내리신 심판. 그들이 이스라엘의 혈통을 물려 받은 사실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가나안을 차지했다는 사실은 그들을 죄악의 길에서 안전을 보장해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암 3:2). 우상 숭배는 이방인들 가운데에서는 묵인되나, 이스라엘에서는 묵인되지 않는다.

1. 하나님은 그들을 불쾌하게 여기셨다(59절). "하나님이 들으시고," 즉 그 앞에 올라온 저희 죄악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분내어," 당연히 가증스럽게 여기셨다. 그리고 그가 매우 사랑하시고 기뻐여기셨던 이스라엘을 크게 미워하셨다.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었던 자들은 그의 진노의 자손이 되었다. 가증스러운 죄, 특히 우상 숭배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해 이스라엘마저도 추악하게 만들었고 그의 고의에 대해 불쾌한 존재로 만들었다.

2. 그는 그들 가운데 있는 그의 장막을 버리셨으며 그 영광의 방편을 제거하셨다(60절). 하나님은, 우리가 먼저 그를 떠나기 전에는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우리가 그를 우리에게서 쫓아내기 전에는 결코 우리에게서 물러가시지 않는다. 그의 이름은 질투이며, 그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그와 사랑의 언약을 맺은 백성이 낯선 자의 품에 안겼을 때, 그가 그들을 미워하시고 거절하시며, 더 이상 그와 동거하기를 거부하신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실로의 성막은 하나님께서 인간에 세우신 장막"이었는데, 하나님은 그 속에서 "실제로 땅 위에 있는 사람과 함께 거하셨던"것이다. 그러나 그의 백성이 패역하게도 그를 버렸을 때, 그도 당연히 그들을 버리셨고, 그 다음에는 그의 모든 영광도 떠나갔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장막에서는 큰 기쁨을 얻지 못한다.

3. 그는 모든 사람을 대적의 속에 넘기셨다. 하나님께서 버리신 자들을 쉽게 파괴자들의 희생물이 된다.,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의 숙적이며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도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사용하시어 그의 백성들의 채찍이 되게 하실 것이다.

(1) 하나님은 그들이 그 궤를 빼앗아 가는 것을 허락하시어, 그것을 그들의 전리품으로서 가지고 가, 그가 그 장막을 버리셨을 만 아니라 그 궤마저도 버리셨다는 것을 보이신다. 왜냐하면 이제 그 궤는 더 이상 그의 임재의 표적이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6!절). "저가 그 능력을"- 마치 약해져 정복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포로에 붙이시며 자기 영광을 대적의 손에" 버리시어 치욕을 당하게 하셨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사무엘 상(삼상 4:11)에서 읽을 수 있다. 법궤가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낯선 자처럼 되었을 때, 그것이 곧 블레셋 사람들의 포로가 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2) 그는 이스라엘 군대로 하여금 블레셋 사람에 의해 패주당하도록 내버려 두셨다(62,63).저가 "그 백성을 칼에," 그의 공의의 칼과 대적들의 분노의 칼에 "붙이셨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기업에게 분내셨기 때문이다. 그의 그 진노는 "저희 청년," 곧 그들의 한창 때에 칼이나 병에 의해 "살라진 불"이었다. 그리고 이처럼 황폐케 되었으므로, "저희 처녀에게는 칭송이 없었다." 즉, "혼인 노래가(그것은 그 무엇보다도 영예로운 것이다) 없었다." 왜냐하면 그 처녀들을 맡길 만한 청년들이 없었고 또 이스라엘의 환란과 재앙이 너무 많고 컸으므로, 결혼 예식의 기쁨은 부당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산하지 않는 태에게 복이 있다"고 하고 있다. 전국적인 멸망이 남자들의 부족을 가져온다. "내가 사람을 정금보다 희소케 하리라"(사 13:12). 그리하여 "일곱 여자가 한 남자를 붙잡으리라"(사 4:1; 3:25). 그러나 이것은 최악의 사태가 아니었다.

(3) 심지어 그 궤를 시종드는 "저희 제사장들," 곧 홉니와 비느하스는 "칼에 엎드려졌다." 그들이 엎드러진 것은 당연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를 타락시켰고, 여호와 보시기에 엄청난 죄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사장이라는 직책이 그들을 악에서 보호해 주기는 커녕 오히려 그들의 죄를 가중시켰고, 그들의 몰락을 재촉했다. 그들이 칼에 의해 쓰러졌다는 것은 당연했다. 그들은 명령이나 지시없이 전쟁터에 나갔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장소에서 그리고 우리 의무의 길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에서 떠나는 것이다. 제사장들이 엎드러졌을 때, "저희 과부들은 애곡하지 못하였다"(64절). 애도하는 의식은 사라졌고 실질적인 슬픔 속에 묻혀 버렸다. 비느하스의 남편의 죽음을 애곡하는 대신에 그녀 자신이 죽어갔고, 그때에 난 그녀의 아들을 "이가봇"이라 불렀다(삼상 4:19 이하).

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긍휼 가운데 돌아오시고, 이 일 후에 그들에게 은혜롭게 나타나심. 우리는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에 대해 읽지 못했으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곤고를 인하여 마음에 근심하셨고"(삿 10:16), "대적을 격동하여 저희가 오해하고 말할까 염려하시면서"(신 32:27), 그 자신의 영예에 관심을 기울이셨다. 그러므로, "때에 주께서 자다 깬 자같이, 포도주로 인하여 외치는 용사같이 일어나셨다"(65절). 즉 술 취하여 잠들었었으나 이제 깨어나 정신을 되찾고, 이전에는 완전히 소홀히 한 것처럼 보였던 일을 주시하는 자와 같이, 뿐만 아니라 잠으로써 원기를 회복하고 또 적당히 포도주를 사용하여 마음이 즐겁게 되었으므로, 더욱 활기있게 되고 일하기에 좋은 상태가 된 자와 같이 일어나셨다.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의 궤, 곧 그의 영예를 질투하는 자이므로, 포로에 붙이신 후, 그는 곧 그것을 구하시기 위해 그의 능력의 팔을 뻗치셨다. 즉 그의 백성들을 위해 큰 일을 행하기 위해 능력을 발휘하셨다.

1. 그는 궤를 빼앗아간 블레셋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셨다(66절). 그는 독종으로써 그 대적을 쳐 "물리치셨다." 그들이 그들 자신을 정복자들 이상으로 생각했을 때에도, 마치 그들이 그에게서 도망하고 있었던 것처럼 그들의 후진을 상하게 하셨다. 그는 그들을 욕되게 하셨고, 그들이 금독종을 만들어 그것을 영원한 치욕으로 만드는 것을 도왔다. 그들은 그것을 속건제로 하여, 그 궤와 함께 돌려 보냈고(삼상 6:5). 그것은 "영원한 기념"으로 남게 되었던 것이다. 조만간에, 하나님은 그 대적들이 성공을 거두어 매우 의기양양할 때에도, 그들을 수치스럽게 하심으로써 그 자신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2. 그는 그 궤가 여러 달 억류되어 있었고, 또 여러 해 어두운 곳에 있는 후에, 그것을 위한 새 정착지를 마련하셨다. 그는 실지로 "요셉의 장막을 싫어하여 버리셨다." 그는 결코 법궤를 에브라임 지파에 있는 실로로 되돌려 보내시지 않았다(67절). 그 장소의 훼파는 거룩한 의에 대한 영구한 기념물이었다. "가서, 내가 어떻게 행한 것을 보라"(렘 7:12).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에서 그 영광을 완전히 제거하시지 않았다. 궤를 옮기는 것은 궤를 제거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실로는 궤를 잃었지만, 이스라엘은 잃지 않았다. 하나님은 이 세상 안에, 그리고 사람들 가운데 있는 나라 안에 교회를 두실 것이다. 이 장소나 저 장소에서 교회의 촉대를 제거하실른지도 모른다. 아니, 실로의 폐기는 시온의 등귀이다. 마찬가지로 오랜 후, 유대인의 실패가 이방인을 부요케 했다(롬 11:12).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의 출생 지파인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유다 지파를 택하셨다"(68절). 왜냐하면 유다 지파는 여호수아보다 더 큰 자인 예수의 지파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기랏여아림, 즉 그 궤가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조된 후 놓여졌던 그 장소는 유다 지파 안에 있었다. 거기에서 그것은 그 지파를 소유했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것은 시온으로, "그 사랑하시는 시온 산"으로 옮겨졌는데(68절) 그것은 "온 땅 같이 지으셨다"(69절). 사실상 다윗은 궤를 위해 장막만을 세워두었으나, 그 때에 성전이 계획되어졌고, 그것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그의 아들에 의해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1) 매우 위엄있는 장소였다. 그것은 왕궁과 땅의 지위 높은 사람처럼 지어졌다. 아니, 그것은 그 훌륭함과 장엄함에 있어서 그 모든 것을 능가했다. 솔로몬이 그것을 지었으나 여기에서는 하나님이 지으셨다고 적혀 있다. 그것은 아마도 그의 아버지가 -이 사업에 연관시켜서-"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그것을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127:1)는 것을 솔로몬에게 가르쳐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솔로몬을 의한 시이다.

(2) 땅같이 매우 견실한 장소였다. 비록 그것이 땅처럼 오래 존속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존속해야 하는 한은 하나님께서 "권능의 말씀으로 붙들고 계시는" 땅처럼 견고했다. 그리고 그것은 복음의 성전 즉 "해와 달같이 장구할"것이며(89:36, 37)) "음부의 권세도 이기지 못할" 그 복음의 성전이 세워졌을 때까지도 종내 무너지지 않았다.

3. 그는 그들에게 훌륭한 통치자, 그의 마음에 합한 군주를 두셨다. 저가 수천의 모든 이스라엘 중에서 "그 종 다윗을 택하시어" 그의 손에 홀을 두셨는데, 그 태에서 그리스도가 나오게 되어 있었고 그는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었던 것이다(70절). 다윗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목하자.

(1) 그의 시작은 보잘 것 없었다. 그의 혈통은 사실상 훌륭했다. 왜냐하면 그는 유다 지파의 왕족 태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교육은 보잘 것 없었다. 그는 학자로서, 군인으로서가 아니라 목자로서 이 교육을 받았던 것이다. 그는 모세처럼 "양의 우리에서 취하심"을 얻었다. 하나님은 겸손하고 부지런한 자를 존귀하게 하시고, 티끌 속에서 초라한 자를 일으켜 세우시며 방백들 중에 그들을 두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리고 때로 초년을 고독과 묵상 속에서 보낸 자들이 공적 인물에 매우 적합한 자임을 발견하신다. 다윗의 아들은 그 혈통이 알려지지 않은 채 자라났다. "이는 목수가 아니냐?"고 했다. 다윗은 수양을 이끄는 중에서가 아니라, "암양을," 특히 "젖먹이는 암양들을 이끄는 중에" 택함을 받았다. 이것은, 목자로서의 모든 훌륭한 특성들 가운데에서도 보살핌을 매우 필요로 하고 있었던 그의 양떼에 대한 그의 자상함과 동정심에 있어서 매우 뛰어났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그의 마음의 기질은 통치자가 되기에 적합했고, 그것은 그를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만들었다. 그리스도는 목자같이 양무리를 먹이실 때, 특별한 배려로서 "어린양을 온순히 인도하신다"(사 40:11).

(2) 그의 승진의 중대함. 하나님은 그를 발탁하시어 "그 백성인 야곱을 기르게 하셨다"(71절). 하나님께서 그를 왕이 되게 하신 것은, 특히 야곱과 이스라엘의 왕, 하나님께 가깝고 귀한 그의 친 백성의 왕이 되게 하신 것은, 그에게 있어서 큰 영예였다. 더우기, 그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의 기업이었던 자들을 통치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큰 신임을 두셨던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그가 그들을 먹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나 그 자신을 먹이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또한 그의 집안을 크게 만들도록 하기해서가 아니라, 그가 선행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를 보좌로 승진시켰다. "하나님의 양 떼를 먹이는" 것은, 종속 목자들, 치리자들과 사역자들에게 맡겨진 책임이다.

(3) 그의 경영으로 인한 행복, 이처럼 큰 신뢰를 그 손에 얻은 다윗은 또한 주의 긍휼을 얻어 그 책임을 익숙하고 충성되게 행할 수 있었다(72절). "이에 저가 길렀다고 했다. 그는 그들을 다스렸고 가르쳤으며, 그들을 안내했고 보호해 주었다.

[1] 즉 매우 정직하게 행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뿐만 아니라 그의 책임에 맡겨진 백성의 유익을 지향하면서 "그 마음의 성실함으로" 그것을 행했다. 그의 신앙의 원리는 그의 통치의 격언이었다. 그는 세속적인 정책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경건한 성실로써 나라를 다스렸던 것이다. 그는 일을 행할 때마다 선한 의도를 가졌고, 부차적인 목적을 계획하지는 않았다.

[2] 매우 신중하게 행했다. 그는 "공교함으로" 그 일을 행했다. 그는 "그 손의 공교함으로" 그 일을 행했다. 그는 그가 계획하는 일에 매우 성실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행한 일에 매우 조심성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목적을 수행하는 데에 가장 적합한 방법을 택했다.왜냐하면, 그의 하나님은 그를 분별있게 지도하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부 아래 있는 백성들은 얼마나 행복한가! 시편 기자가 이것을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예로서 내놓고 있는 데에는 좋은 이유가 있다. 즉 그것은 다윗이 그 위대하고 훌륭하신 목자인 그리스도의 모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는 처음에는 비천했지만. 그 다음에는 높이 들리우셨던 것이다. 그에 관해서는, "지혜와 총명의 신"이 그에게 강림하실 것이며,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판단할"것이라는 사실이 예언되었다(사 11:2). 그의 마음의 성실함과 그 손의 공교함을 그의 모든 신하들은 전적으로 의지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나라의 권세와 백성이" 더하여, 끝이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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