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안에서 승리(시편 76:1-6)
교회는 지금 교전 상태에 있지만 개가를 올리고 있다. 시편 기자는 교회의 이름으로 우리의 모든 환희의 중심이신 하나님 안에서 개가를 부르고 있다.
Ⅰ.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그들에게 계시하신 것을 기뻐하고 있다(1절). 유다와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님이 알린"바 되셨다는 것과 그를 알리신 곳에 그 이름이 크시리 라는 것은, 그들의 영예이며 특권이었다. 하나님은 그 자신을 알게 하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자신을 알리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 주는 자들은 행복하다-그 땅이 하나님의 대한 지식으로 가득차 있는 백성들은 행복하며, 그 지식으로 자기의 마음을 채운 자들은 행복하다. 하나님은 그 자신을 다른 족속에게 알리시지 않았을 때에도, 유다 에게 알렸으며, 이러한 일은, 그것이 특별했으므로 그 은총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147:19, 20).
Ⅱ. 하나님께서 그의 의식 속에서 그들에게 특별히 임재 하시는 표적을 기뻐하고 있다(2절). 하나님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온 땅에 알려 지셨고, 거기에서 그의 이름은 위대하게 여겨졌다. "그 장막"과 "그 처소"는 "살렘", 곧 "시온에" 있었다. 그는 거기에 궁중을 두셨다. 거기에서 그는 그의 백성들이 제물로써 표하는 경의를 받으셨고 제물로 잔치를 베풀게 하여, 그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그들은 그곳으로 와서 그들 자신을 그에게 아뢰었고 거기에서 그는 그의 신탁에 의해 명령을 보내셨다. 거기에다 그는 자기 이름을 기록하셨고, 그 장소에 대해 그는 "내가 여기 거하리니, 이는 내가 바라던 바이니라"라고 말씀 하셨다. 하나님이 정해준 규례대로 하나님을 모시는 것은 그 백성의 영광이며 행복이다. 그러나 그의 처소는 장막, 곧 이동할 수 있는 처소였다. "잠시간 그 빛이 우리와 함께 있도다."
Ⅲ. 그들이 그의 원수에 대해 승리한 것을 기뻐하고 있다(3절).
"거기서 저가 화살을 깨치시도다." 그 위험이 얼마나 긴박한가를 주목하라. 유다와 이스라엘, 살렘과 시온은 이처럼 특권을 갖고 있었지만, 전쟁이 일어났고, 그들을 치는 무기가 연마되었다.
1. 여기에 활과 살, 방패와 칼, 그리고 싸움에 쓰이는 모든 것이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부러져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일이(1)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백성들을 위해 유다와 이스라엘서 행해졌다. 전쟁 무기가 다른 민족들을 치는 데 사용되었을 때, 그것은 그 목적에 응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그 거룩한 민족을 향해 겨누어졌을 때는 즉시 부러졌다. 갈 대아 해설 판에는 이렇게 풀이되어 있다: "이스라엘 족속이 하나님의 뜻을 행했을 때, 그는 그들 가운데 그의 위엄을 두셨고, 거기에서 화살을 꺽으셨다."
그리하여 그들이 그를 성실하게 섬기는 동안에는 위대하고 안전했으며 모든 일들이 잘 되어갔다. 또는
(2) 시온에 있는 장막과 처소에서 그는 화살을 깨치셨다. 그것은 전쟁터에서 행해졌지만, 성소에서 행해졌다고 일컬어지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에게 한 기도에 응답하여서, 그리고 그가 거기에서 그들에게 하신 약속을 이행하여서 그것을 행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에 대한 사례를 역대하(역하 20:5, 14)에서 복 수 있다. 공적인 승리는 진영에서 행해지는 것에는 물론, 교회에서 행해지는 것에 크게 기인된다.
2. 이 승리는
(1) 이스라엘 하나님의 불멸의 영광에 매우 크게 이바지했다(4절). "주는 영화로우시며 약탈한 산에서 존귀하시도다." 그리고 주 자신이 그러하심을 명백히 나타내셨다.
[1]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크고 강한 자들보다 더욱 그러하시다.그들은 높으며 스스로가 산처럼 요지부동 하다고 생각하나 사실상 그들은 약탈한 산이나 다름없이 그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압제한다. 파멸시키는 것은 그들의 영광이나, 건지시는 것은 주의 영광이다."
[2] "특별히 우리의 침입자들보다 더욱 그러하시다. 그들은 유다 성읍을 포위했을 때, 그것들을 치기 위해 포를 탑재했고 포열을 세웠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들이 우리를 괴롭히는 것 이상으로 우리를 보호하실 수 있다." 교회의 원수들이 교만히 행동하는 곳에서, 하나님이 그들보다 위에 계심이 나타날 것이다.
(2) 이스라엘 원수들을 영원히 수치스럽게 하는 일에 이바지했다(5.6절). 그들은 "마음이 강한 자," 그들의 이전의 승리에 의기 양양하며, 이스라엘에 격분하고 성공에 자신 만만한 큰 용기와 결단력을 소유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건장하여 봉사하기에 적합한 "장사"였다. 그들은 "병거와 말"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 당시 전쟁하는 데 매우 귀중한 것으로 여겨졌고 또 큰 신뢰를 얻고 있었다(20:7). 그러나 이 모든 힘은, 그것이 예루살렘을 향해 조준되었을 때 아무 소용이 없었다.
[1] "강한 자는 탈취를 당하여 무력하게 된다"(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하나님은 자기가 원하실 때 자기의 원수들을 약하게 하시고, 저절로 멸망하게 만드실 수 있다. 저희는 예수 안에서 자는 의인의 잠을 자지 않고 "자기 잠" 즉 깨어났을 때 영원한 수치와 경멸이 될 죄인의 잠을 "잔다."
[2] 장사는, 마음이 강한 자이면서 용기를 찾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손을 찾지" 못한다. 대담한 자가 떠는 것과 마찬가지로 "강한 자도 절름"거리며 그들의 손이 그들 자신의 목숨을 구할 수 없음을, 더욱이 그들의 대적을 해칠 수 없음을 발견한다.
[3] 병거와 말은, 그것을 모는 자들과 타는 자들이 잠이 들었을 때, 정말로 "다 깊은 잠이 들었다"고 일컬어질 수 있다. 사람들이 멸망시키는 천사들에 의해 현장에서 죽은 채로 놓여 있을 때 병거와 말은 조금도 무서운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책망의 능력과 효험을 보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즐겁게 이 모든 것을 구속자에 의해 즐기는 그 유익에 적용시킬 수 있는가! 하나님이 알려 지시는 것은 그를 통해서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크신 것은 그 안에서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 안에 장막과 처소를 가지신 것은 그의 덕택이다. 무장한 강한 자를 격파시키고 정사와 권세를 탈취하며 그들로 하여금 공개 적으로 창피를 당하게 하신 것은 그였다.
이스라엘의 방어와 영광(시편 76:7-12)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축복 해주신 이 영광스러운 승리는 여기에서 다음 세 가지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Ⅰ. 하나님의 원수들에게 가려진 두려움(7-9절). "주 곧 주는 경외할 자시다. 주의 위엄은 숭상되어야 하며, 주의 주권은 복종함을 받아야 하고, 주의 의는 주를 거역한 자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온 세상이 이 사건으로 인해 위대하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배우게 하자.
1. 모든 사람이 대담하고 불경건한 죄인들을 치시는 그의 진노를 두려워하게 하자. "주께서 잠시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 하나님께서 태우는 불이 되신다면, 비록 그 "진노가 잠깐이라" 하더라도, 짚과 겨가 감히 그 앞에 설 수 있겠는가?2. 모든 사람들이 압제 당하는 무죄한 자와 그의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위하는 그의 빈틈없는 배려를 두려워하게 하자. "주께서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였나니, 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일어나신 때라. 그리고 그때에 땅이 주의 이 영광스러운 출현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기다리면서, 두려워 잠잠하였다." 다음을 명심하자.
(1)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의 겸손한 자들"(습 2:3), "평안히 땅에 거하는 자"(35:20)로서, 어떤 해도 견딜 수 있으나 아무 해도 끼치지 않는다.
(2) 비록 땅의 온유한 자들은 그들의 온유함으로 인해 해를 당할 위험이 클지라도, 하나님은 조만간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나타나시어 그들의 소송을 변호해 주실 것이다.
(3) 하나님께서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오실 때, 그는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실" 것이다. 그는 세상으로 하여금 자기가 자기 백성들을 압제하는 자들에게 노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행해진 것을 곧 자기에게 행해진 것으로 여기신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시는 것으로 보이나 조만간 그는 판결을 듣게 하실 것이다.
(4) 하나님 게서 하늘에서 판결을 말씀하실 때는, 땅이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침묵 속에 그 자신을 가라 앉히는 때이다. 법정이 열릴 때, 선포로서 장내가 조용하게 되는 것처럼, "땅이 두려워 잠잠하였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됨을 알지어다" (46:10). "무릇 혈기 있는 자들이 여호와 앞에서 잠잠한 것은 여호와께서 일어나시어" 판단하심이라(슥 2:13). 이 시편을 산헤립의 군대가 패주한 경우에 대해 지어진 것으로 추측하는 이들은, 판결을 집행하여 멸망시키는 천사들은 당연히 우레를 동반하고 내려왔을 것이므로, 그것에 의해 하나님은 판결을 선포 하셨고 땅은 두려워하였으나 (즉, 지진이 일어났다) 그것은 곧 끝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불확실하다. Ⅱ.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위로(10절). 우리는 우리를 매우 귀찮게 자극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한이 없는 것같이 보이는 사람들의 분노를 많이 느끼며, 그것을 더욱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사실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
1.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사람의 분노를 내뿜도록 허락하시는 한, 그는 그것을 그에 대한 찬송으로 변하게 하실 것이며, 그것에 의해 그 자신을 영화롭게 하고, 그의 목적을 돕게 하실 것이다. "진실로 사람의 분노는 장차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분노가 무력함을 고백할 수밖에 없게 될 때, 그 인간의 분노에 가해진 저지 때문에 만이 아니라, 잠시동안 분노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그 자유에 의해서까지도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원수들의 분노에 의해 당하는 역경은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은혜에 이바지하도록 된다. 그리고 "열 방이 분노"할수록, 또한 "여호와의 그의 기름 부은 자를 대적하려고 음모할수록,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것들에도 불구하고, 그의 왕을 그 거룩한 산 시온에" 세우신 것에 대해 더욱 찬미 될 것이다.(2:1, 6). 천군들이, 하나님께서 "이방들이 분노할지라도 큰 권능을 잡고 왕노릇하신" 것을 찬송의 소재로 삼을 때(계 11:17, 18) 그때에 사람의 분노는 하나님의 찬송에 광채를 더한다.
2. 그에게 찬송으로 돌아오지 않을 경우에는, 노를 발하도록 방치되지 않을 것이다. "그 남은 노는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사람들은 결코 죄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죄를 저지하고 싶을 때는 저지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나운 파도를 제한하시는 것과 같이, 사람의 분노도 제한하실 수 있다. "여기까지만 가고, 더 이상 가지 말라." 이에 "그 교만한 파도가 잔잔해지니라." 하나님은 산헤립의 남은 노를 제지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코를 꾀며, 자갈을 그의 입에 먹이셨기 때문이다(사 37:29). 그리고 하나님은, 그가 허풍을 떨도록 허용하셨을지라도, 그가 의도한 것을 행하지 못하도록 재재 하셨던 것이다.
Ⅲ.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의무(11,12절). 모든 사람이 이 위대하신 하나님께 굴복하여 그의 충성된 신하가 되게 하자. 다음을 주목하자.
1. 우리 모두에게 그의 주위에 있어 그를 의지하거나 그에게 접근할 기회를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의무, 이러한 경우에 해당되지 않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따라서 우리 각자는 왕들의 왕께 경의를 표하도록 명령받고 있다. "서원하고 갚으라." 즉,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것을 마음에 두어 지키라. 그의 것이 되기로 서원하고 네가 서 원한 것을 갚으라. 네 영혼을 그에 대한 맹약으로 묶으라 (왜냐하면 그것은 서원의 본질이다). 그리고 나서 네 스스로에게 지운 의무를 따라 행하라. "서원하지 않는 것이 서원하고 갚지 않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왕으로 삼은 후, 군주에게 예물을 드린 신하들처럼(삼상 10:27), 그에게 예물을 드리도록 하자. "너희는 이 땅 처리 자에게 어린양들을 드리라"(사 16:1). 이것은 하나님께 드릴 어떤 예물이 필요하다거나 그것에 의해 그가 혜택을 입으실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우리는 이처럼 그에게 존경을 바치고, 우리가 그로부터 모든 것을 얻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와 찬송, 그리고 특히 우리의 마음은 우리가 주 우리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예물인 것이다.2. 이 의무를 시행하여야 하는 이유. "모든 자들에게 줄 것을 주라...... 그리고 두려워 할 자를 두려워하라"(롬 13:7 참조).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께 돌려야 하지 않은가? 그렇다.
(1) 그는 경외함을 받아야 한다. "그는 (단어 그대로) 두려움이시다." 그의 이름은 영화로 우시며 두렵다. 그리고 그는 우리 두려움의 적합한 대상이다. 그에게 두려운 위엄이 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이삭이 경외하는"이라 불리우고 있다(창 31:42). 그리고 우리는 그로 우리의 두려워하는 자를 삼도록 명령받고 있다(사 8:13). 우리가 그에게 예물을 드릴 때, 우리는 그를 크게 두려워해야 할 자로서 주시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거룩한 곳에서 엄위 하시기 때문이다.
(2) 그는, 경외함을 받는 것을 자기의 독점적인 특권으로 생각하는 자들에게서도 경외함을 받을 것이다(12절). 그는 "방백들의 심령을 꺽으실" 것이다. 우리가 꽃을 줄기에서 따내듯이 또는 포도나무에서 포도송이를 따내듯이 그는 그것을 꺽으실 것이다 (그 단어는 그러한 뜻을 의미하고 있다). 그는 매우 대담한 자들의 기를 꺽으실 수 있으며, 그들을 용기 없게 만드실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세상의 왕들에게 두려움"이시며, 또 그렇게 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에게 굴복하지 않을만큼 지혜롭지 못하다면, 조만간 그는 그들이 "산과 바위에게 그들 위에 떨어져 그의 진노에서 그들을 가리우도록" 요청하는 것을(계 6:16) 헛되게 만드실 것이다. 하나님과 겨룰 자 없으므로, 우리가 그에게 복종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요 또한 우리의 지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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