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호소(시편 74:1-11)
이 시편에는 "마스길-교훈을 주기 위한 시"라는 표제가 붙어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환란의 날에 지어진 것으로서, 교훈 하려는 어떤 환란에 처해 있든지 믿음과 열렬한 기도로써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이 우리의 지혜이며 의무라는 교훈을 주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하는 것이 헛되지 않음을 발견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여기에서 다음 세 가지 일을 호소하고 있다.
Ⅰ. 자기들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 그것은 그들의 모든 재앙의 원인과 고통이었었다. 그들은 그들의 고통의 도구(사라들)를 넘어 바라보고 있다. 그들은 위로부터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 도구가 자기들을 칠 수가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 바로 그 하나님의 뜻에 의해 그들은 악하고 무자비한 자들의 손에 넘겨졌던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께 간할 자유를 지니고 있었던 것을 주목하자(1절). 우리는 지나친 자유를 바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자신도 십자가상에,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하고 부르짖으셨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여기에서, "하나님이여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하고 부르짖고 있다. 여기에서 그들은 그들의 현재의 암담하고 우울한 처지를 따라서 말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롬 1:1)라 하는 사실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들이 쓰러졌다고 해서 버림받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되며, 그가 잠시동안 그들을 버리신 듯이 보인다고 해서 정말로 영원히 버림받았다고 생가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러한 항변은, 그들이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버리시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두려워했다는 것, 사람들로부터는 고난을 당할지라도 하나님에게서는 인정받기를 원하며, 그가 이처럼 그들과 다투시는 까닭을 알고자 한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어찌하여 주는 진노의 연기를 발하시나이까?" 즉, 어찌하여 주의 진노의 연기가 이처럼 올라와, 우리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주목하고는, "이같이 크고 열렬하게 노하심은 무슨 뜻이뇨? 하고 묻게 하시나이까?"(신 29:24) 이것을 20절과 비교해 보라. 거기에서는 주위 진노와 그의 질시가 죄인들을 향하여 연기를 발한다고 했다. 그들은 지금 자기들이 하나님의 진노의 표적물이 되자, 어떻게 하나님과 변론하고 있는가를 주시하라.
1. 그들은 그에 대한 관계를 진술하고 있다. "우리는 주가 치시는 양입니다. 주께서 초장에서 기르시기를 기뻐하셨던 양, 주께서 주를 위해 주위 영광을 위한 영광으로 따로 떼어놓으신 주의 백성입니다. 이리들이 양을 위협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그러나 이처럼 자기자신의 양을 흩어놓기를 좋아했던 목자가 있었읍니까? 우리들이 주에 의해, 주를 위해 뭉쳐진, 그리고 주의 찬미에 바쳐진 주의 회중임을 기억하소서(2절). 우리는 주의 기업의 지파 또는 막대기로서 주께서는 다른 백성들보다도 우리가 특별한 소유물임을 주장하시기를 즐거워하셨고(신 32:9) 이웃 민족으로 보다도 우리로부터 더 많은 찬미와 경배의 수입과 결실을 받으셨나이다. 아니, 사람의 기업은 매우 먼 곳에 놓여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의 거하신 시온산을 위해 탄원하고 있읍니다. 그것은 주의 독특한 기쁨과 거주지의 장소가, 주의 소유지와 저택이 되어 왔던 것입니다."
2.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신 큰 일과 그가 그것에 막대한 비용을 들였던 것을 진술하고 있다. 그것은 주께서 한 마디 말씀으로써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한 백성이 형성되었을 때 여러 가지 긍휼의 이적들로써 옛적부터 얻으신 주의 회중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노예로 팔렸을 때, 주께서 구속하신 주의 기업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을" 멸망시켜 "그들(이스라엘)의 대속물로 주셨고," "그들에게 사람들을" 주셨고, "그들의 생명을 위해 열방을" 주셨다(사 43:3, 4). "이제 주께서는 주께 그처럼 귀중했었던 백성을 버리시렵니까?" 그리고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구속된 사실은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시지 않으리라는 소망을 격려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더우기, 그리스도께서 그 자신의 피로써 구속한 자를 하나님께서 버리시지 않으리라는 것을 능히 바랄 수 있다. 그가 사신 백성은 영원히 그를 찬미하는 백성이 될 것이다.3. 그들은 그들이 처한 재앙의 상태를 진술하고 있다(3절). "주의 발을 드시옵소서. 즉 곧 오셔서 황폐케 된 주의 성소를 보수하소서. 그렇지 않다면, 그 황폐함은 영원히 돌이킬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복은 철로 된 손으로 치는 것과 같다고 종종 해왔으며, 그것은 또한 납으로 된 발로써 온다. 그때에 주의 날을 기다린 자들은 "주여 주의 발을 드십소서. 주의 발걸음을 높이 들어올리소서." 주위 섭리로 행하실 때 주 자신을 높이소서 하고 외칠 것이다. 성소의 황폐함이 오래 계속되면, 그런 일이 영구하리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시험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가 택한 자들의 압제자와 핍박 자들에게 오래 참으시기는 하지만 반드시 그들에게 복수하실 것이며, 곧 복수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Ⅱ. 그들은 그 원수들의 난폭과 잔인함을 호소하고 있다. 이것은 그 원수들이 그들의 세속적인 유익을 손상시긴 것에 대한 것이 전혀 아니었다. 여기에 그들의 성읍이 불타고 그들의 마을이 파괴된 것을 불평하는 말은 업고, 오직 그들이 성소와 회당을 행한 것에 대한 마만 있다. 신앙에 대한 관심이 세상 적인 어떤 관심보다도 우리 마음에 더욱 가까이 있어야 하며, 우리를 더욱 사로잡아야 한다. 하나님의 집이 황폐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집이 황폐했을 때보다 더 슬퍼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도리 수 있다면, 우리와 우리의 가족들이 어떻게 되든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1. 시편 기자는 다니엘처럼(9:17)) 성소가 황폐되었다고 호소하고 있다.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이 계신 곳"이었으므로, "성소"(聖所)였다(7절). 이 속에서 원수들은 악을 행했다(3절).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노골적으로 경멸하고 모욕하면서 그것을 파괴했기 때문이다.(1) 그들은 "하나님의 회중에서 훤화했다"(4절). 하나님의 충성된 백성들이 겸손한 경의의 침묵이나 부드러운 말로써 그를 섬겼던 곳에서, 그들은 때때로 매우 무서운 곳이라는 소식을 듣고 있던 그 성소의 주인이 되, 매우 의기양양했으므로 떠들썩하게 흥청거리면서 훤화했다.
(2) 그들은 "자기 기를 세워 표적을 삼았다." 그들의 군기를 승리의 기념품으로서 성소(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꼭 붙어 있는 한 가장 견고한 성이었다)에 세웠다. 하나님의 임재의 표적이 있어왔던 그곳에다 이제 그 원수들이 깃발을 세웠다. 하나님과 그의 능력에 대한 대담한 도전은 그의 백성들이 지극히 사랑하던 곳을 건드렸다.
(3) 그들은 성소의 "모든 조각품을" 파괴하는 이로 긍지를 느꼈다. 이전의 사람들은 성전을 건축하는 데 손을 빌려주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고, 그 일을 위해 목재를 베는 사람은 유명한 자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그것을 파괴하는 직책을 맡은 것을 귀중히 여겼다(5,6절). 이처럼 이전에는 믿음에 봉사했던 지혜로운 자들을 축하했었으나 이제는 그 믿음을 쓰러뜨리는 그것을 돕는 자들이 재치있는 자들로서 박수갈채를 받았다. 어떤 사람들은 이 본문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저희는 마치 삼림에서 도끼를 드는 사람 같으니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그들은 성전의 조각품을 쳐서 부수기 때문이다. 즉 나무꾼이 숲에서 나무를 쪼갤 때에 그러한 것같이, 그들은 성전의 값진 벽판을 쳐서 부술 때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은 성소에 대해 이러한 분노를 품고 있으므로, 눈에 띄는 가장 공교한 조각품들은 성별된 것이요, 절묘한 예술 조각이므로 중요시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일반 병정들에 의해 훼파된다.
(4) 그들은 그것을 불사르며 "그곳을" 더럽혀, 두드려 "부수어 땅에 엎었나이다"(7절). 갈대아 사람들은 하나님의 전, 그 귀한 기명을 불살랐다(대하 36:19). 그리고 로마 사람들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않고"(마 24:2) 그것을 초속까지 부수고 부수었으며, 마침내 거룩한 산 시온은 베스파시안(Titus Vespasian)황제에 의해 밭처럼 파헤쳐졌다.
2. 그는 회당 도는 선지자의 학교가 황폐해진 것을 원망한다. 회당은 포로 후에 더욱 중대시되었지만. 성경 말씀이 해석되었으며, 그의 이름이 찬미되고 불려졌던 것이다. 이러한 것에 대해 그들은 또한 앙심을 품었다(8절). "우리가 그것을 진멸하자." 또 정전뿐만 아니라 종교적 예배가 행해지는 모든 장소에 거기에 있는 예배자들을 진멸하자. "우리가 그들을 진멸하자." 그들로 그 불길 속에서 죽게 하자. 이러한 불경스러운 것을 추구하는 자들은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회당을 불사르고," 그것을 모두 황폐히하기로 결심했다 신앙에 대한 그들의 분노는 매우컸으므로, 종교적인 집은 종교적인 집이라는 부수어졌다. 그리하여 하나님 경배자들이 종교적 집회에서 만나 하나님께 영광 돌리거나 서로를 권면할 수 없도록 했던 것이다.
Ⅲ. 이 모든 재앙을 크게 격화시킨 것은 그들이 위로를 얻을 만한 전망을 전혀 얻지 못하거나 그 결과를 그들이 예견할 수 없었던 점이었다(9절). "성소에는 우리 원수의 기가 세워진 것이 보이나, 우리의 표적은 보이지 아니한다. 하나님의 임재의 표적, 곧 구원이 가까와오고 있다는 희망을 주는 표지가 보이지 않고 있다. 이 환란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우리에 관한 일들이 언제 끝날 것인지를 우리에게 말해 주어, 마지막 결말에 대한 소망이 고통 중에 있는 우리를 도와 줄 수 있도록 해 줄 만한 선지자도 다시없다." 바벨론 포로 시대에는 그들에게 선지자들이 있었고, 그 포로 생활이 얼마나 계속 될는지를 들었었다. 그러나 그 날은 흐리고 캄캄했고(겔 34:12), 그들은 이 은혜로운 발견으로 인한 위로조차도 갖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우리 군대를 볼 수 없습니다. 우리의 군세를 지휘할 용사나, 우리 무리를 이끌고 나가 만한 자가 없습니다"라고 호소하지 않고, "선지자도 없으며,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랠지 아는 자도 없습니다"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을 주목하라. 그들은 여기에서 하나님께 항변하고 있다.
1. 이것을 하나님 자신의 존귀를 옹호하는 일을 지연시키는 일이라 했다(10절). "대적이 언제까지 훼방하겠으며 주의 이름을 영원히 능욕하리이까?" 성소가 황폐케 될 때 우리의 주된 관심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것이라야 한다. 즉 그의 백성들은 그의 것이기 때문에, 그로 인해 핍박하는 자들의 불경스러움으로 인해 성소가 손상되지 않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물음은, "우리가 언제까지 고통을 당하겠읍니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언제까지 고통을 당하겠읍니까?" 하는 것이라야 한다.2. 그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지연시키는 일이라 했다(11절). "주께서 어찌하여 주위 손을 거두시나이까?" 그리고 어찌하여 주의 백성들을 건지시고 주위 원수들을 멸하시기 위해 손을 펼치지 않으시나이까? "주의 품에서 빼사 저희를 멸하소서." 그르고 "놀라 벙벙하는 자 같으시며 구원치 못하며," 또는 구원치 않으려는 "용사같이" 하시지 마소서(렘 14:9). 원수들의 능력이 매우 위협적일 때, 하나님의 능력 안으로 날아가면 위로를 얻는다.
거룩한 능력에 대한 인정(시편 74:12-17)
탄식하고 있는 교회는 여기에서 자기가 생각해 내고 있는 어떤 것에 매달리고 있으므로(애 3:21 에서처럼) "소망을 가지고 있다." 그것으로써 그 교회는 자기 자신을 격려하고 있으며, 자기의 원망을 잠잠케 하고 있다. 예배의 모임 때문에 슬퍼하고 있는 자들의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은 두 가지가 나와 있다.
Ⅰ.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그의 백성과 언약하신 하나님이다라는 사실이다(12절), "하나님은 에로부터 나의 왕이시라."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기도의 탄원으로서(44:4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왕이시니"), 그리고 "옛날"을 생각해 볼 때(77:5) 그들의 구원을 격려하는 그들의 믿음과 소망에 대한 지주로서 제시되어 있다. 이 교회는 매 세대를 거쳐 똑같은 하나의 복합체로서 말하고 있으므로, 하나님을 "나의 왕, 예로부터"또는 "태고 때부터 나의 왕"이라 부르고 있다. 예로부터의 그는 친히 그들과 관계를 맺으셨고, 그 관계 안에서 그들을 위해 나타나셨고 행하셨다. 이스라엘의 왕으로서의 하나님은 세상 나라들 가운데에서 구원을 이루셨다. 왜냐하면 세상을 통치하시는 중에 그가 행하신 모든 것은 자기 교회의 구원을 위해 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위해 그들의 예로부터의 왕으로서 행하신 여러 가지 일들이 여기에 언급되어 있다.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그에게 의탁하고 그를 의지하고 격려했다.
1. 하나님은 그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모세의 힘이나 그의 지팡이의 힘에 의하지 않고 그 자신의 능력에 의해 그들을 막고 있던 바다를 나누셨다. 그리고 그것을 하실 수 있었던 그는 어떤 일이든 하실 수 있었다.2. 그는 바로와 애굽 사람들을 멸하셨다. 바로는 악어였고, 애굽 사람들은 사납고 잔인한 용이었다. 다음을 주목하라.
(1) 이 원수들에 대한 승리.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고통을 당하면 당할수록 그 수효가 증가되었을 때처럼, 하나님은 그들의 머리를 깨뜨리셨고, 그들의 계획을 좌절시키셨다. 하나님은 그들의 권세를 파쇄하셨다. 그리고 열 가지 재앙으로써 그 나라를 혼란시키고, 마침내 그들을 모두 홍해에 빠져 주게 하셨다. "이들은 바로와 그 모든 군대니라"(겔 31:18). 그것이 주의 행하심이었다. 그 이외에는 누구도 그런 일을 할 수 없었고, 그가 강한 손과 편팔로 그것을 행하셨다. 이것은,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첫 번째 약속에 의거한 사탄과 그의 나라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의 한 모형이었던 것이다.
(2) 교회의 격려를 위한 이 승리의 활용, "주께서 그것(애굽의 재물)을" 이제 "사막에 거하려"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식물로 주셨나이다." 애굽 사람들의 노략 물이 그들을 부유케 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죽인 자의 소유물을 빼앗았고, 애굽 사람들이 전에 자기의 보물을 탈취했던 것처럼 이제는 애굽 사람들의 무기를 탈취했다. 나아가서 이 섭리가 그들의 믿음과 소망에 식물(植物) 이 되어 그들이 광야에서 만났던 것과 같은 어려움들을 만났을 때 그들을 돕고 격려해 주었다. 그들이 먹을 수 있었던 모든 것들은 영적인 양식의 일부였다. 교회의 원수들의 머리를 깨뜨리는 것은 교회의 친구들의 마음에 기쁨과 힘이 된다. 이처럼 교회의 친구들은 악어로도 잔치를 베푼다(욥 41:6).
3. 하나님은 반석에서 물을 내시고, 바위로 물줄기를 돌리심으로써 자연의 진로를 변경시키신다(15절).
(1) 그는 바위를 녹여 물이 되게 하셨다. "주께서 샘과 큰물을 끌어내셨나이다"(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각 사람은 그 물이 바위, 곧 단단한 바위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을 결코 잊지 말자. 특히 그 반석이 그리스도였다는 것과 거기에서 나온 물은 영적인 음료수였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하자.
(2) 하나님은 물을 응결시켜 하위로 변화시키셨다. "주께서 길에 흐르는 급격한 강들을 말리우셨나이다." 특히 요단강 물이 온 뚝 위로 넘칠 때, 그 물을 말리셨다. 이러한 일들을 행하신 그는 이제 압제 당하는 그의 백성들을 건지실 수 있었고, 그가 이전에 행하셨던 것처럼 압제자들의 멍에를 깨뜨리실 수 있었다. 아니 그는 그의 의와 선하심, 그의 지혜와 진리를 위해서, 마찬가지로 그의 능력을 위해서 그런 일을 행하실 것이다.
Ⅱ.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자연의 하나님이시다(16,17절). 다음과 같은 것들의 일정한 연결과 변혁을 명하시는 자는 하나님이시다.
1. 즉 그는 낮과 밤에게 그러한 것을 명하신다. 그는 모든 시간의 주(主)이시다. 저녁과 아침은 그가 규정하신 것이다. 아침 햇살의 눈꺼풀을 여시고, 저녁 황혼의 장막을 내리시는 이는 바로 주이시다. "주께서 달고 해를 예비하셨다"(어떤 사람들은 이렇게도 해석하고 있다) 낮과 밤을 교대로 주관하는 두 개의 큰 광명을 예비하셨다. 그것들을 예비했다는 것은, 그것들이 항상 준비되어 있고 그것들의 때를 정확히 준수한다는 것을 뜻하며 그것들은 결코 한순간도 잘못되지 않는다.2. 여름과 겨울에게도 일정한 순환을 명하신다.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셨고 그 여러 지역의 다른 기후를 정하셨나이다. 왜냐하면 주께서 여름과 겨울은, 한대와 열대를 이루셨나이다. 또 연중의 일정한 변화와 그 여러 계절을 이루셨나이다." 자기에서 우리는 모든 자연의 법칙과 힘의 근원이 되 있는 하나님을 인정해야 한다. 어째서 그러한가?
(1) 최초로 천체의 하루와 일 년간의 운동으로써 이 자연의 진로를 정하셨고 지금도 그것을 지키시는 그는 인생을 구원하실 능력과 멸하실 능력을 분명히 갖고 계신다. 그리고 그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없으며, 이겨내기 어려운 난관이나 적수가 없다.
(2) 낮과 밤에 대한 그의 언약에 성실하시며, 범할 수 없는 하늘의 제도를 보존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그는 분명히 자기 백성들에 대한 약속을 잘 지키실 것이며, 택하신 자들을 결코 버리지 않을 것이다(렘 31:35, 36; 33:20, 21). 그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과 맺으신 언약은 노아와 그의 아들들과 하신 언약과 마찬가지로 견고하다(창 8:21).
(3) 낮과 밤, 여름과 겨울은 땅의 각처에서 자연의 순리 가운데 교체되기 때문에, 우리는 환란과 평안, 형통함과 역경이 이와 같이 교회의 각처에서 교체되리라는 것도 각오해야 한다. 우리는 밤과 겨울을 예상하는 것처럼, 고통을 예상해야 한다. 그러나 그 후에는 우리는 낮과 여름이 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또한 위로가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할 수도 없다.
열렬한 간구(시편 74:18-23)
시편 기자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그들의 원수를 치시고 그들의 현재의 환란을 종결시켜 주실 것을 교회의 이름으로 간절히 청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믿음을 격려하기 위해 하나님을 이 일에 관련시키고 있다(22절). "하나님이여 일어나서 주의 원통을 주소서." 우리가 그가 이렇게 하시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영예에 관해 매우 관심이 깊기 때문이다. 그의 원통함이 무엇이든지 그는 자기의 강한 손으로 해결하실 것이다. 그것을 대적하는 자들을 칠 것이며, 진심으로 그것을 지지하는 자들과 함께 하며, 그들을 위하여 원수들을 칠 것이다. 그는 얼마 동안은 그것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실지라도 일어나시어 자기의 원통(소송사건)을 해결할 것이다. 그는 스스로 분투하실 것이며, 그 자신을 드러내실 것이며 그 자신의 때에 그 자신의 일을 행하실 것이다. 신앙의 사유(성경 본문에는 "원통"-역주)는 하나님 자신의 사유이며, 하나님은 틀림없이 그 문제를 해결할 것임을 잊지 말자. 이제 그 사유가 하나님의 사유라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그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진술하고 있다.
Ⅰ. 학대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숙적이다. "주여 그들은 우리를 욕했을 뿐만 아니라 주께 모욕적이었었고 또 지금도 그러합니다. 주로 인하여 우리를 대적하는 행위는 결과적으로 주를 비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직접적으로 그리고 곧 주를 비난했고 도한 주의 이름을 능욕하였나이다"(18절). 그들이 성소에서 훤화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들은 마치 이처럼 위대한 일을 행하신 것으로 알고 있던 그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자기들이 지배하게 되었다는 듯 환호를 울렷다. 하나님의 이름이 능욕 당하는 것을 듣는 것은 성도들을 가장 근심되게 만든다. 마찬가지로 그들의 원수들이 하나님 자신을 비방할 정돌 악의 절정에 올라올 때는, 이제 하나님께서 원수들을 치시려고 나타나시리라는 것을 충분히 기대할 수 있는 그런 때이다. 이것은 그들의 죄악의 분량(한도)을 빨리 가득 채우며, 멸망을 재촉하나, 시편 기자는 그것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비방에 응답하려 하지 않습니다. 주여, 주께서 그들에게 답하신 우매한 백성이 주위 이름의 능욕하였고." 하나님을 비방하는 자들의 성격을 주목하자. 그들은 우매하다. 무신론주의가 어리석음인 만큼(14:1), 불경스러움과 모독도 그에 못지 않게 어리석다. 아마도 신앙과 신성한 것들을 존경하는 자들은 당대에는 지혜로운 자로서 칭찬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사실상 가장 큰 바보이며, 곧 온 세상 앞에 그러한 사실이 밝혀질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악의를 보라-그들은, 하나님의 성실한 경배자들이 끊임없이 그에게 기도하고 그를 찬미하는 것처럼, 날마다 그를 비방한다. 그들의 무례함을 보라-그들은 자신의 흉중에 있는 그 불경스러움을 감추지 않고 큰 소리로 발표하며(주의 대적의 소리를 잊지 마소서, (23절), 거룩하신 의에 대담하게 도전하면서 그렇게 행한다. 그들은 일어나 주께 항거하며, 그들의 불경스러움으로써 하늘과 싸우며, 무기를 들며 전능 자를 치려고 한다. 복수를 요청하는 소돔에 대한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들린 것처럼(창 18:21),그들의 소요와 "훤화가 항상 올라간다"(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그것은 항상 상달한다."(우리는 그것을 이렇게 풀이한다). 그들은 점점 더 악해지고 그들이 성공함에 따라 그들의 불경스러움을 고집한다. 이제 주여, "이것을 기억하소서. 그것을 잊지마소서." 하나님께는 우리가 기억을 되살려 주어야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처럼 그의 명예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보여야 하며, 그가 우리를 옹호하시리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Ⅱ. 학대받는 자들은 그의 언약의 백성들이다.
1. 그들이 어떤 환란 속에 있는가를 보라. 그들은 "들짐승"의 손에 덜어졌다(19절). "그들을 괴롭히는 자들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시 3:1 참조) 분노한 무리들, 특히 이들처럼 힘으로 무장한 무리들 앞에 설자는 없다. 그리고 그들의 수효가 많은 것만큼 그들은 또한 야비하다. "땅 흑암한 곳에 강포한 자의 처소가 가득하였나이다." 갈대아 사람들의 땅에는 참되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빛이 없었는데(비록 그곳은 학문과 예술로 유명했지만), 사실상 흑암한 곳이었다. 그에 거하는 자들은 "저희 안에 있는 무지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났"으므로 난폭했다. 참된 신(神)이 없는 곳에서는 일반적인 인간미도 거의, 발견할 수 없었다. 그들은 특히 하나님의 백성에 포학했다. "그들을 먹는" 자들은 분명히 무지한 자들이다(14:4). 그들은 가난하고 그들 자신을 도울 능력이 없기 때문에 압제 당한다(21절). 그들은 압제 당하여 황폐케 되며 가난하게 된다(27절).2.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로하시기 위해 나타나실 것이며 그들이 항상 이처럼 짓밟히도록 내버려두시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그들이 기대해야했던 이유가 무엇인가를 보라. 시편 기자가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어떻게 탄원하고 있는가를 주목하자.
(1) "악인의 무리에 의해 거의 삼키우게 된 것은 주의 멧비둘기입니다(19절)." 교회는 해함이 없고 온유한, 무죄하고 악의가 없는, 정결하고 결실을 맺는 비둘기이며 환란의 날에 슬퍼하는 비둘기들은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졌던 유일한 새였던 것이다. "주께 진실하며 주의 영광에 바쳐진 주의 멧비둘기를 그것을 곧 쉽게 그리고 만족스럽고 먹어버기려는 그 들짐승의 손에서 건지시겠읍니까? 주여 약한 것을 돕는 것은, 특히 주의 것을 돕는 것은 주의 영예가 될 것입니다."
(2) "그것은 주의 가난한 자의 목숨이며 그들이 가난하다고 해서 그들이 주께 덜 귀중한 자들은 아닙니다(왜냐하면 하나님은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셨기 때문이다. 약 2:5). 오히려 그들은 그들의 수가 많기 때문에 주께서 그들을 위해 나타나시리라는 것을 기대할 만한 이유를 더욱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의 가난한 자의 목숨입니다. 그들로 버림을 받아 영영히 잊혀지게 하지 마소서."
(3) "그들은 주와 언약을 맺고 있습니다. 주께서 언약을 돌아보지 않으시겠읍니까"(20절) 주께서 언약의 관계에 끌어들이신 자들을 인정하시지 않겠읍니까?"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건지실 때, 그것은 그의 언약을 생각하시기 때문이다(레 26:42). "주여 우리 비록 돌보심을 받기에 보잘 것 없을지라도 그 언약을 돌보소서."
(4) "그들은 주를 의지하며 주에 대한 그들의 관계와 그들의 기대를 자랑합니다. 그들이 실망했을 때에 그렇게 되는 것처럼,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소망에 대해 부끄러이 돌아가게 마소서(21절)."
(5) "주께서 그들을 건지신다면, 그들은 주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며 주께서 건지신 것에 대해 영광 돌릴 것입니다. 주여, 주의 이름을 찬송할 자들을 위하여, 그것을 모독할 자들을 대적하시어 나타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