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시편 06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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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1

역경을 아룀(시편 69:1-12)

여기서 다윗은 자기의 환란을 호소하면서, 그 호소에 위안을 구하는 약간의 요청을 섞고 있다.

Ⅰ. 그의 호소는 매우 슬프며, 그는 자기를 무겁게 짓누르는 짐을 덜기를 원하는 자가 되어 주 앞에 그 짐을 내려놓고 있다.

1. 그는 그의 환란이 그의 영혼에 끼친 깊은 영향을 호소하고 있다(1,2절). "고통의 물들, 곧 그 쓴물이 내 영혼까지 들어왔나이다. 그리하여 나의 생명을 위협할 뿐만 아니라 내 마음을 소란스럽게 하고 있나이다. 그들이 내 머리는 혼란스러운 걱정으로, 내 마음은 가혹한 슬픔으로 채우고 있나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전처럼 하나님과 나 자신을 기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마음에 고통이 밀어닥치지 않을 수만 있다면, 고난을 견디어 낼 것이다. 그러나 고난으로 인해 우리가 우리 영혼의 평정을 소유하지 못한다면, 그 사태는 심각한 것이다. "사람의 정신은 그의 연약함을 도울 것이다." 그러나 그 정신이 상처를 입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이 바로 여기에서의 다윗의 경우였다. 그의 생각은 그가 신뢰할 수 있고 자기의 소망을 부축해 줄 수 있는 어떤 것을 구했으나,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설 곳이 없는," 곧 견고한 발판이 될 곳이 없는"깊은 수렁에 빠졌다." 그를 부축하고 격려해 오던 여러 가지 이유들은 그를 실망시키거나 길을 떠났고, 그는 곧 자폭할 지경에 있었다. 그는 그 자신을 위로할 만한 그 어떤 것도 구할 수 없었고, 오직 그 자신이 그에게 "넘치는"위압하는 "깊은 수렁"에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과도 같이 혼돈과 놀람 속에 있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영혼이 고난을 당하신 것과, 그가 "이제 내 마음이 괴롭도다." 그리고"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도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내적으로 번민하셨던 것을 가리키고 있다. 왜냐하면 그가 죄를 위해 제물로 바치셨던 것은 바로 자기 목숨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우리가 고통 중에 있을 때도, 우리가 불만이나 절망 속에 빠지지 않기 위해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도록 의탁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2. 그는 그의 환란이 오래 지속되는 것을 원망하고 있다(3절).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나이다." 비록 그는 자기 머리를 물 위에 둘 수 없었을지라도 하나님께 부르짖었으며, 죽음이 그의 시야에 들어올수록 그는 더욱 그의 생명을 위해 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즉시 평화의 응답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기도 속에서 힘과 위로를 얻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는 부르짖음으로 피곤했고, 그의 목은 점점 쉬었다. 그리고 그의 "목이" 매우 "말랐으므로," 그는 더 이상 외칠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예전처럼, 믿음과 소망과 기도하는 위로에서 만족을 얻지도 못했다." 내 하나님을 바람으로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그는 거외 눈이 쇠하도록 구원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믿음과 기도를 포기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있다는 표시이다. 그의 목은 말랐으나, 그의 마음은 마르지 않았다. 그의 눈은 쇠하였으나, 그의 믿음은 그렇지 않았다. 이처럼, 우리 주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부르짖으셨지만, 동시에 하나님께 대한 그의 관계를 굳게 지키고 있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3. 그는 그의 대적들의 악의와 대세, 그들의 불의와 잔인성, 그리고 그에 대한 그들의 학대를 호소하고 있다(4절). 그들은 그를 미워했고, 그를 멸하려 했다. 왜냐하면 미움은 미워하는 사람의 멸망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그처럼 앙심을 품을 만한 그의 불의가 무엇이었으며, 그의 죄는 무엇이었으며, 그가 그들을 격노케 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아무 것도 없었다. "저희가 무고히 나를 미워하나이다. 그들이 내게 그처럼 악의를 품을 만한 해를, 나는 조금도 그들에게 끼치지 않았습니다." 우리 구주는 이것을 그 자신에게 적용시키고 있다(요 5:25). "저희가 연고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우리는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우리를 미워할만한 이유를 결코 주지 않았다는 것을, 그들에게 대한 우리의 감정을 정당화하는 데에 사용하기 쉽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우리가 그것을 참을성 있게 견뎌야 하는 요지이다. 왜냐하면, 그때에 우리는 그리스도가 당하셨던 것처럼 고난을 당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리라는 것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유없이 내 원수가 되었나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에게 적의를 품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의가 이처럼 지배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부당하게도 우리의 원수를 만난다고 해서 이상하게 여겨서는 안된다. 우리는 결코 그릇되게 행하지 않도록 유의하자. 그러면, 우리는 해를 당하더라도 더 잘 견디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 원수들은 멸시할 수 없었고, 그 수효가 매우 엄청났다-"저희가 내 머리털보다 많고"(그리스도의 원수들은 무수했었다. 즉 그를 잡으려고 온 자들은 큰 무리였던 것이다. 그를 괴롭히려는 자들은 얼마나 불어났던가!), 그 힘도 거대했다-"저희가 권세와 능력에 강하였나이다." 우리는 약하나 우리의 원수들은 강하다. 즉"우리는 정사와 능력과 싸우고 있다." "내가 취하지 아니한 것도 물어 주게 되었나이다." 이것을 다윗에게 적용시킨다면, 그것은 그의 원수들이 그를 억지로 복종시킨 것이었다(그들은 그가 결코 범하지 않은 죄목으로 그가 고통을 당하게 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동의했던 것이었다. 만일 가능했다면 그는 그들을 진정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그와 화목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그는 공의와 영예에 관한 법을 주장했을지도 모른다. 전자의 것은 우리가 취하지 아니한 것을 물어 주도록 요구하지 않으며, 후자의 것은 일반적으로 그것을 금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재물과 우리의 명성을 해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태는 때로 그렇게 되어 그것이 우리의 의무가 될 수도 있다. 축복받은 바울은 비록 모든 사람들로부터 자유로왔지만, 그리스도의 영예와 교회의 교화를 위해 그 자신을 모든 사람들의 종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을 그리스도께 적용시킨다면, 그것은 그가 그의 피로써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대속했던 것에 대한 주목할 만한 묘사가 된다. "그 때에 그는 그가 취하지 아니한 것도 물어 주셨다." 그는 우리에게 합당한 벌을 받으셨고, 우리의 빚을 갚아 주셨으며, 우리의 잘못으로 고난당하셨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것에 대한 몇가지 사례에서, 사람의 죄로 인해 탈취되어 버렸다. 사람의 영예와 화평과 행복도 탈취되었다. 그것들을 탈취한 자가 그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의 공로로 그는 그것들을 물어 주셨던 것이다.

4. 그는 그의 친구들과 친척들의 불친절을 호소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 어떤 것 못지 않게 그의 마음을 깊게 도려내는 슬픔이 된다(8절). "내가 내 형제에게 객이 되었나이다. 그들은 나를 외면하며 나를 객으로 취급하며, 나와 대화하기를 부끄러워하고, 나를 인정하기를 창피하게 여깁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에게서 실행되었다. 즉 그"형제들이; 그를 믿지 않았고"(요 7:5), 그가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다"(요 1:11). 그리고 그는 그의 형제들을 대하는 것처럼 허물없이 대하셨던 그의 제자들에 의해 버림받으셨다.

5. 그는 그가 당한 경멸과 끊임없이 그에게 퍼부어진 비난을 호소하고 있다. 그리고 이 속에서 특히 그의 호소는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 때문에 가장 큰 모욕에 복종하셨고, 그 자신의 명예를 돌보지 않으셨던 것이다. 우리가 죄로써 하나님의 영예를 손상시켰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성육신의 신성(神聖) 에 합당한 존귀를 벗어버릴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치욕을 당하심으로써 자기를 대속물로 만드셨다. 다윗은 여기에서 다음 두 가지를 자기에게 가해진 심한 모욕으로서 지적하고 있다.

(1) 비방의 근거와 내용(10,11절). 그들은 그가 그 자신을 겸손히 하고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사실 때문에 그를 조롱했다. 사람들이 교만과 헛된 영광으로 스스로를 높일 때, 그들은 그들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비웃음을 당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다윗은 그의 영혼을 경계하였고 그 자신에게 베옷을 입혔다. 그리고 그 자신을 낮추는 것에서 그들은 그를 짓밟을 구실을 끄집어 냈던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욕할 때, 그들의 그러한 그 행동이 마땅히 그들의 수치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다윗은 순수하게 하나님께 헌신하는 가운데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그의 존경을 입증하기 위해 "곡하고 금식함으로 그의 영혼을 경계하였으며," 겸손한 회개자가 하는 것처럼 "굵은 베로 그의 옷을 삼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경건의 훌륭한 예로서 칭찬하고 장려하기는커녕, 그렇게 하는 그의 용기를 꺾고 다른 사람들이 그의 훌륭한 본보기를 따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온갖 힘을 기울였다. 즉, "그것이 도리어 그의 욕이 되었다." 그들은 이처럼 그 자신이 굴욕을 느끼게 하는 어리석은 자로 그를 비웃었다. 그리고 심지어 이것 때문에 그는 "저희의 말거리가 되었다." 그들은 그를 그들의 희롱거리의 공동 화제로 삼았다. 우리가 잘 행한 것에 대해 좋지 않은 평을 듣는다 하더라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되며, 그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용납되리라는 것을 바랄 수 있다. 우리 주 예수는 그이 선한 일로 인해 돌을 맞으셨고(요 10:32) 그가 "엘리 엘리-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하고 부르짖으셨을 때, 마치 그가 엘리야를 부르시는 것처럼 조롱하셨다.

(2) 그를 비방한 사람들(12절).

[1] 가장 엄숙하고 가장 존경받는 사람들, 즉 기대를 걸 수 있는 사람들까지도 그를 조롱했다. "성문에 앉은 자가 나를 말하며," 그들의 비방이 참모들의 명령과 재판장의 판결로 간주되며, 신뢰할만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나이다.

[2] 가장 비천한 자들, 가장 멸시받는 자들, 비류들(35:15), 시골의 쓰레기들, "미련한 자의 자식, 비천한 자의 자식"(욥 30:8)도 그를 조롱했다. 이렇게 술취한 자들은 자신을 비천하게 만들었으며, 그는 취한 무리의 노래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를 희롱함으로써 그들 자신과 그 동료들을 즐겁게 했다. 술취하는 죄의 나쁜 결과를 보라. 그것은 사람들로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게" 만든다(딤후 3:3). "왕이 술의 뜨거움을 인하여 병이 났을 때, 오만한 자들로 더불어 악수했다" (호 7:5). 술취한 자들의 의자는 오만한 자의 자리이다. 인간 중 최선의 자들이 일반적으로 어떤 대우를 받는가를 보라. 지혜로운 자가 찬미하는 것을 어리석은 자는(조롱으로)노래한다. 그러나 사리를 옳게 판단하는 자들은 이처럼 자기들이 당하는 멸시를 쉽게 멸시할 수 있다.

Ⅱ. 죄에 대한 그의 자백은 매우 진지하다(5절).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우매함을 아시나이다. 주는 나의 어떠함을 아시나이다. 내가 범한 죄를 주께 감추지 않았사오니, 주께서는 그들이 나를 책망하고 있는 그 범죄에서 내가 얼마나 무죄한지를 아시나이다." 사람들의 부당한 고소에 대해 우리가 "범죄하지 않았다"고 우리 자신을 변호할 때에도,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가 오히려 그보다 더 나쁜 사태를 당할 만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이 회개하는 자 즉, 자기의 죄를 덮어 두고서는 형통할 수 없다는 것과 그 죄가 하나님 앞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므로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지혜로운 일이라는 것을 아는 자의 참된 자백이다.

1. 그는 우리 본성의 타락성을 알고 계신다. "주께서" 내 마음속에 담겨져 있는" 우매함을 아시나이다." 우리의 모든 죄는 우리의 우매함에서 나온다.

2. 그는 우리 인생의 범죄함을 알고 계신다. 그것은 그에게 숨기울 수 없다. 우리 마음의 죄나 아주 은밀히 범한 것들도 그에게 숨기울 수 없다. 그런 일은 모두 그가 보시는 가운데 일어나며, 회개하고 사함받기 전에는 잊혀지지 않는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께 잘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죄를 모르셨을지라도, 우리를 위해 죄가 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꺼이 그를 상하게 하고 그를 슬프게 하는 때에도, 하나님은 그 점을 알고 있었으니, 그것은 그에게 숨기워지지 않았다.

Ⅲ. 그의 간구는 매우 열렬하다.

1. 그 자신을 위한 간구(1절).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침잠하지 않도록, 절망하지 않도록 나를 구원하소서."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그가 경외함으로써 응답을 얻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의 사명 좌절로부터 구원되셨기 때문이다(히 5:7).

2. 그의 친구들을 위한 간구(6절). "만군의 주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로 나로 인하여 수치와 욕을 당케 마옵소서"(이러한 두 가지 특성 아래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도우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만군의 하나님"으로서, 그리고 그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셨으므로 명예와 진리로써 도우시기로 약속한 "이스라엘의 하나님" 으로서 하나님을 구해야 하며 그를 구하면서 바라야 한다). 이것은 다윗은 두려움을 암시하는 말이다. 즉 만일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나타나시지 않는다면, 결국 다른 모든 선량한 사람들은 낙심할 것이며, 그들의 적들에게 개가를 부를 수 있는 기회를 주게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것은 그의 진지한 열망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기는 어떻게 되든, 하나님을 찾고 그를 바라는 모든 사람들은 용기를 잃지 않고 마음의 평정을 지킬 수 있으며, 낙심하거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멸시당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고난 중에 아버지의 인정과 용납을 얻지 못했다면, 하나님을 찾고 바라던 모든 사람들은 수치와 욕을 당했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확신을 갖고, 그의 이름으로 담대히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고 있다.

Ⅳ. 그의 탄원은 매우 강력하다(7,9절). 비방은 그의 가장 큰 고통 중의 하나였다. "주여, 훼방을 거두어 주시고, 나의 사정을 변호해 주십시오," 왜냐하면

1. "내가 훼방당하는 것은 주로 인한 것입니다. 주를 섬기고 주를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를 위하여 훼방을 받았나이다." 선행한 것에 대해 나쁜 평을 듣는 자들은, "자기들의 의로움을" 하나님께서 "빛처럼 드러내시도록" 겸손한 확신으로 맡길 수 있다.

2.. "내가 훼방을 받는 것은 주와 함께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집을 위한 열성이 나를 삼켰나이다. 즉 나로 하여금 나 자신을 잊고, 그들이 사악하게 내 비방거리로 만드는 그 일을 행하게 했나이다. 주와 주의 집을 미워하는 자들은 그 이유로 인해, 즉 내가 얼마나 그것을 열심히 사모하는가를 그들이 알기 때문에 나를 미워하나이다. 그들이 곧 나를 삼킬 것 같은 태도, 내가 그들 가운데서 얻은 모든 사랑과 존경을 삼킬 것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모독했고, 그의 말씀과 도를 나쁘게 말한 자들은 다윗이 그의 말씀을 믿고 그의 길로 행한다고 해서 그를 비방했다. 또는 이 귀절을, 다윗이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모든 무례함을 마치 자기 이름에 대한 모욕처럼 분개한 열성, 곧 하나님의 집에 대한 그의 열성의 일례로서 해석할 수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가해지는 모든 모욕과 또 믿음 위에 퍼부어지는 모든 경멸을 마음에 두었다. 그는 이것을 그 자신의 어떤 외적 환란보다도 더 깊이 그의 마음속에 두었던 것이다."그러므로," 그는 그가 하나님께서 퍼부어지는 비방에 항상 관심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에게 퍼부어지는 비방에 관심을 기울이시리라는 것을 바랄 수 있었다. 이 귀절의 두 가지 해석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적용될 수 있다.

(1)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그를 삼키리라"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그의 사랑의 일례였고, 그가 물건을 팔고 사는 사람들을 성전에서 내어 쫓으셨을 때, 그 사건은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이 성귀를 생각하게 했다(요 2:17).

(2) 그것은 그의 자기 부정에 대한 일례이며, 그가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았다는 것, 하나님을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그에게 미쳤다는(롬 15:3)증거이다. 그리고 이로써 그는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었다.

 

69:2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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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원(시편 69:13-21)

다윗은 앞에서 그의 원수들이 그에게 앙심 깊은 비방을 던진 것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여기에서는 "나는 주께 기도하오니"라는 말을 덧붙여 놓고 있다. 그들은 그가 금식하고 기도하는 것을 비방했으며, 그 때문에 그는 취한 자들의 노래거리가 되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기도하기로 결심하고 있다. 비록 우리가 선행을 한 것 때문에 조롱을 받을 수는 있지만, 결코 선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롱 거리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조롱과 심한 말을 참을 수가 없어서 자기의 임무를 중단해 버리는 자들은, 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고백한 그 신앙을 위해 거의 아무 것도 견디어 내지 못한다. 다윗의 원수들은 그를 매우 모욕했으나, 그가 나아가서 사정을 토로할 수 있는 하나님이 있었다는 사실이 그에게 위로가 되었다. "그들은 오만과 중상으로써 그들의 주장을 관철하려 하지만 나는 다른 방법들을 사용합니다. 그들이 어떻게 행하든, 여호와여 나는 주께 기도 하나이다." 그리고 그때는 열납의 때였다. 환난의 때라고 해서 하나님께 열납되지 못하는 때인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에게로 이끄실지언정, 그에게서 내어 몰지는 않으실 것이다. 아니, 하나님의 백성들의 비참함과 환란은 그들을 그들을 더욱 하나님의 동정의 대상으로 만들기 때문에, 그때는 더욱 잘 열납된다. 모든 도움이 끊어져 그들이 파멸하게 되고, 만일 그가 그들을 도우시지 않는다면 그들이 파멸하리라고 느낄 때에, 그가 그들을 도우신다는 것은 더욱 합당하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관해 이런 표현이 사용된 것을 볼 수 있다(사 49:8).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다." 이제 다음과 같은 것을 관찰해 보자.

Ⅰ. 그의 요청은 어떠한 것인가?

1. 하나님께서 그의 호소, 그의 고통의 부르짖음, 그리고 그의 마음의 소원을 은혜롭게 들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네게 응답하소서(13절). 그리고 다시, "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소서"(16절), "내게 속히 응답하소서(17절). 내가 말하는 것을 들으실 뿐만 아니라, 내가 청하는 것을 허락하소서." 그리스도는 "아버지께서 항상 그의 말을 들으시는 것"을 아셨다(요 11:42).

2. 그가 그의 환란에서 구조되기를, 슬픔의 짐에 눌리워 가라앉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나를 수렁에서 건지소서." 내가, 어떤 사람들의 말대로 수렁 속에 빠져 있지 않게 하시고, 나를 도와 건지소서. 그리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소서." 40:2). 또 그의 원수들에게서 구원되기를, 즉 그들이 자기를 삼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를 칠 뜻을 품지 않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나를 사자의 발톱에서 건지우는 어린 양처럼,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소서(14절). 비록 내가 깊은 물에 빠져(2절) 그 큰 물이 나를 엄몰하리라는 결론을 내릴 정도까지 되었을지라도, 내 두려움을 막으시고 잠잠케 하소서. 큰 물이 내게로 흐르더라도 나를 엄몰하지 않게 하소서(15절). 내가 절망의 심연에 떨어지지 않게 하소서. 그 깊음이 나를 삼키지 못하게 하시며, 웅덩이로 내 위에 그 입을 닫지 못하게 하소서. 그렇지 않으면 내가 멸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 시편의 서두에서 파멸 속에 자신을 포기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의 머리를 물 위로 들고 있으며, 그가 생각했던 것만큼 그렇게 피곤을 느끼지 않고 있다.

3. 하나님께서 그에게로 돌이키사(16절), 하나님께서 그에게 미소하시며, 그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않으시기를(17절) 바라고 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의 표적과 우리에게 비추시는 그의 얼굴 빛은 우리의 영을 외적 환란의 깊은 수렁에 빠지지 않게 하기에 충분하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안전하고 편하게 만들기 위해 우리는 그 이상의 것을 원할 필요가 없다(18절). "내 영혼에게 가까이 하사, 주를 나타내소서. 그리하면 내 영혼이 구속될 것입니다."

Ⅱ. 이러한 청원들을 시행하기 위한 그의 탄원은 무엇인가?

1. 그는 하나님의 자비와 진리를 탄원하고 있다(13절). "많은 인자로 내게 응답하소서." 하나님 안에는 인자하심이 있다. 많은 인자하심, 모든 종류의 인자하심, 무진장한 인자하심, 모두에게 충분하고 각자에게 충분한 인자하심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는 일에 용기를 얻어야 한다. 그의 구원의 진리(그를 의지하는 자에게 하신 구원에 대한 모든 약속의 진리)도 또한 격려가 된다. 그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에서 얻은 논증을 반복하고 있다.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오니, 내게 응답하소서. 주의 인자하심 자체가 그러합니다. 그것은 부요하고 풍성하며 풍부합니다. 모든 성도들도 그것을 그렇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매우 귀합니다. 즉 그것은 그들의 생명이며 기쁨이며, 그들의 모든 것입니다. 나로 그 혜택을 얻게 하소서 !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게로 돌이키소서"(16절). 그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얼마나 고귀하게 말하고 있는가를 보라! 그 안에 긍휼, 온유한 긍휼과 많은 긍휼이 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선히 여기며, 아무리 심한 곤고 속에서도 계속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선히 행하시리라는 것 만큼은 염려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기 때문이다(147:11).

2. 그는 자기의 환란과 고통을 탄원하고 있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환란 중에 있사오니(17절), 주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지금 오는 것이 알맞으며 따라서 내가 그것을 귀하게 여기는 법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는 특히 그가 당한 훼방과 그에게 가해진 모욕을 탄원하고 있다(19절). "주께서 나의 훼방과 수치와 능욕을 아시나이다." 이것은 얼마나 강조되어 있는가 보라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심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예를 그처럼 손상시켰던 죄를 그가 대속하기 위해서 치르는 것 중 그가 겪은 비방과 수치와 능욕보다도 더욱 중대한 것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아셨고, 그것을 우리의 죄가 마땅히 받아야 할 영원한 수치와 경멸에 상응하는 이상의 것으로서 받아들이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로써 우리 자신에게 수치를 돌려야 하며, 우리 혈기의 비방을 견디어 내야 한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어느 때든 그리스도로 인해 비방과 수치와 능욕을 당하도록 부름받는다면, 그리스도께서 그 사실을 아신다는 것과 그가 우리앞에 계시며 결코 모른 척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은 우리의 위로가 될 것이다. 시편 기자는 여기에서 독창적인 말을 하고 있다(20절). "훼(비)방이 내 마음을 상하여, 근심이 충만하나이다." 왜냐하면 명예의 진가를 알고 있는 자가 나쁜 평판을 받는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해 능욕을 당하는 것이 얼마나 영예로운 일이며, 그의 이름을 위해 수치를 겪는 것이(그들이 그렇게 여기고 있는 것처럼, 행 5:41) 얼마나 귀한 은총으로 간주될 수 있는가를 깊이 생각해 볼 때, 우리는 그러한 비방은 우리를 무겁게 누르거나 마음을 상하게 할 이유가 조금도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3. 그는 그의 원수들의 오만과 잔인함을 탄원하고 있다(18절). "내 원수를 인하여 나를 속량하소서." 왜냐하면 그들은 앞에서 묘사한 것과(4절) 같은 자들이기 때문이었다. "나의 대적이 다 주 앞에 있나이다(19절). 주께서 그들이 어떤 종류의 사람들인지, 내가 그들로부터 어떠한 위험을 당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나를 치기위해 행하고 계획하는 일에서 주께서 얼마나 비방당하시는지를 아시나이다." 그들의 야만성에 대한 하나의 예가 나와 있다(21절).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원어는 쓴 풀을 의미하고 있으며, 흔히 쓴쑥으로 사용된다) 갈할 때에 초를 마시웠나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에게서 글자 그대로 실행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직접적으로 그를 가리키고 있었으므로, 그리스도는 이런 일이 있기 전에는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시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원수들이 그것을 이룰 기회를 가질 수 있게 하기 위해, 그는 "내가 목마르다"하고 말씀하셨다(요 19:28, 29).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그의 입에 해융과 함께 드린 우슬초는 그들이 그의 식물로 해융과 함께 드렸던 쓴 풀이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얼마나 상세하게 예고되었는가를 보라. 그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 예언이 얼마나 정확하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행되었는가를 보라. 이것은 그가 참된 메시야임을 증명하고 있다. 올 자는 그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4. 그는 그의 친구들의 불친절과 그들에 대한 그의 실망을 탄원하고 있다(20절). "내가 안위할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나이다." 그들은 모두 여름의 시냇물처럼 그를 저버렸다. 이것은 그리스도에게서 이행되었다. 왜냐하면 그가 고난 중에 있을 때 그의 모든 제자들은 그를 버리고 도망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거의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다(그들은 모두 번뇌케 하는 위로자들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매우 큰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자비의 아버지이시며, 모든 위로와 위안의 하나님이시 때문이다.

 

69:14 없음.

 

69:15 없음.

 

69:16 없음.

 

69:17 없음.

 

69:18 없음.

 

69:19 없음.

 

69:20 없음.

 

69:21 없음.

 

69:22

예언적인 저주(시편 69:22-29)

이 저주는 원수들에 대한 다윗의 기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핍박자들, 특히 유대 민족들의 멸망에 대한 예언이다. 우리 주께서 친히 이것을 눈물로써 예고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 후 약 40년 경에 이루어졌다. 이 대목의 첫 번째 두 구절은 바울 사도에 의해, 믿지 않은 유대인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에 특별히 적용되었다(롬 11:9, 10). 그러므로 이것은 전체적으로 그러한 방향에서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거절한 유대인의 거절. 그것은 계속 불신을 고집하는 모든 사람에게 마침내 내리게 될 하나님의 공의의 전조였고, 그 보복의 징조였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기독교 진리에 대한 설득력이 있는 증거였고, 지금도 계속 그러한 증거가 되고 있다. 기독교에 대한 하나의 큰 반대는, 우선 기독교가 의식상의 율법을 무시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의 행실은 사실상 외롭다 함을 얻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전을 완전히 멸하심으로써,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끝까지 완고하게 대항하던 자들을 모세의 율법과 함께 쓰러뜨림으로써 율법을 무효화하셨을 때, 그 반대는 제거되었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살펴 보자.

Ⅰ.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에게 임할 심판들은 어떠한 것인가? 물론 그 심판이 그들 모두에게 임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를 죽이는 일에 가담했을지라도 회개하여 긍휼을 얻은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행 2:23; 3:14, 15). 그 심판은 그의 복음에 대해 계속 불신하고 거절하고, 그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에게 뿌리 깊은 적의를 가짐으로써 자기들의 불신을 정당화한 자들과 그 후계자들에게 임했다(살전 2:15, 16). 여기에서 예고되어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그들의 제사와 제물은 그들에게 재앙이 될 것이며 해로울것이다(22절). "저희 앞에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소서." 이것은 여호와의 재단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제단은 제물을 바친 자들이 그 제물을 먹는 잔치에 참여하는 곳이기 때문에, "주의 상(床)과 저희의 상"이라 불리우고 있다. 이것은 그들의 안녕이나 평안을 위한 것이어야 했으나(왜냐하면 그것은 화목제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올무와 덫이 되었다. 왜냐하면 제단을 사모하고 고집함으로써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불신을 더했고, 그에 대한 편견을 고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계속 성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그리스도)에서 먹을 권한이 없는 자들이다(히 13:10). 또는 이것을 그들의 일반적인 의식주, 심지어는 필요한 양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 쓸개와 신포도주를 드렸으므로 마땅히 쓸개와 신포도주가 그들의 양식과 음료가 될 것이다. 생명의 부양물과 감각적 쾌락의 부양물이 인간 본성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죄를 범하게 하는 원인이 되고 우리 육욕의 양식과 연료가 될 때, 우리의 밥상은 올무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조심없이 함부로 우리가 먹어서는 안 되는 법이다(유 12).

2. 그들은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축복받는 그 지식이나 그 평안으로 인한 위로를 결코 얻지 못할 것이다(23절).

(1) 그들은 천벌로 눈이 멀게 될 것이다. "저희 눈이 어두워," 그리스도의 얼굴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게 하소서. 그들의 죄란 그들이 보려 하지 않고 빛에 대해 눈을 감아버리고 오히려 어둠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형벌은, 그들이 보지 못하게 되어, 완악한 그의 마음의 정욕에 빠져버리는 것이었고, 이 세상 신이 그들의 마음의 눈을 멀게 하도록 버려두는 것이었다(고후 4:4). 이러한 것이 그들에 관해 예고되었고(사 6:10), 그리스도는 그것을 비준하셨다(마 13:14, 15; 요 12:40).

(2) 천벌로 두려움을 당할 것이다. 사도 바울의 경우와 같이 위로에 이르는 길을 열어 주는 은혜로운 두려움이 있다(행 9:6). 그는 떨었고 놀랐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두려움은 평안 속에서도 결코 그치지 않으며, 벨사살의 경우처럼 허리 마디가 편했을 때에도 양심의 공포로 인해 그 허리가 항상 떨려야 하는 그런 두려움이다. "저희가 실망하여 항상 부끄러워하게 하소서." 이것은 로마 사람들이 유대인들을 습격했을 때 유대인들의 의도가 수포로 돌아간 사실에서 이루어졌다.

3.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와 맹렬한 분노 아래 놓일 것이다(24절). "주의 분노를 저희 위에 부으소서." 자기에게 제공된 하나님의 위대하신 구원을 거절하는 자들이 그의 분노가 그들위에 떨어진 것을 두려워하게 될 것은 당연하다. 그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들은 분명히 그의 진노의 자손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 임하는 운명이다(요 3:36). 그것은 그들을 붙잡고 결코 놓아 주지 않을 것이다. 구원 자체가 바로 그 구원에 순종하게 하지 않는 자들을 구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냉엄하심을 보라 !

4. 그들의 땅과 민족은 완전히 빼앗길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두려워하던 것이요, 그들의 주장대로 이 일을 막기 위해 그들이 그리스도를 핍박했던 것이다(요 11:48). "저희 거처로 황폐케 하소서"(25절). 이것은 그들의 나라가 로마 사람들에 의해 황폐케 되었을 때 실현되었다. 그리고 "그들로 인하여 시온은 밭 갈이 갊을 당하였다"(미 3:12). 성전은 그들이 특별히 자랑하던 집이었으나, "황폐하여 버린 바" 되었다(마 23:38).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었다. 무리가 쫓겨나고,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준다면, 우리가 소유의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어떤 면에서 만족하게 여겨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 보면, "그 장막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를 덧붙이고 있는데, 이것은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실현되었다. 왜냐하면 그 나라에 사람들이 어떤 목적을 위해 거하게 된 것은 유대인이 멸망한 오랜 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도 바울에 의해 특히 가룟 유다에게 적용되었다(행 1:20). 왜냐하면 그가 "자살한" 후 그의 가산이 몰수되었을 것이므로, "그의 거처가 황폐케" 되었고 "그 장막에 거하는 자" 그의 친족 중 아무도"없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5. 그들의 멸망의 길은 내리받이 길일 것이며, 그 어느 것도 그들을 정지시키거나 막아 주지 않을 것이다(27절). "주여, 저희를 그대로 내버려 두사, 저희 죄악에 죄악을 더 정하소서." 악한 자들이 그들 마음의 정욕대로, 내버려둠을 당할 때는 분명 더 악해질 것이다. 그들은 죄에 죄를 더 할 것이다. 아니, 그들은"그 죄 위에 패역을 더 할"것이다(욥 34:37). 유대인들은 "자기 죄를 항상 채웠다" 고 말하고 있다(살전 2:16). "저희 죄악을 더 벌하소서"(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이렇게 읽고 있다). 왜냐하면 같은 단어가 죄와 벌을 의미할 정도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억하실 것이다. 그러나, 죄를 더욱 가중시키는 자들도 긍휼을 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중보자의 의로우심으로 말미암아 용서를 더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긍휼의 소망에서 제외될 수 있도록, "저희로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믿음으로 인해 중보자 안에 있는(빌 3:9) 하나님의 의로우심의 유익을 얻지 못하게 하기를 덧붙이고 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의(義)에서 내어쫓으시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불신앙으로 인해 스스로를 배제하지 않는 자들은 그 누구도 물리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 자신의 진로를 택하도록 내버려 두라. 그러면 그들은 결코 이 통치 안으로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의의 요구를 모르고 그들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려 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아니하였다"(롬 10:3). 아주 교만하고 제멋대로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에 들어오려 하지 않는 자들은 그것에 따라 판결받게 될 것이다. 그들 자신이 그것을 결정했다. 그들은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자진하여 은혜를 입기를 기뻐하지 않는 자들은 어떤 혜택도 기대하지 않도록 하자.

6. 그들은 행복의 모든 소망에서 끊어질 것이다(28절).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소서." 저희를 더 오래 살도록 내버려 두지 마소서. 그들이 오래 살수록 더 많은 죄악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많은 유대인들은 칼과 기근에 의해 쓰러졌으나, 그리스도의 신앙을 지킨 자들은 그 누구도 멸망당하지 않았다. 민족으로서의 그들은 도말되었으므로 하나의 백성이 되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그들이 하나님이 언약과 그것의 모든 특권, 즉 "생명책"에서 거절당한 사실로 해석하고 있다. "이스라엘 국가로 혈육에 의한 이스라엘이 여지껏 독점해 왔던 그 약속의 언약에서 이제 떠나게 하소서. 그들은 결코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 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시고, 하나님이 저희를 버리셨으므로 사람들이 저희를 버림받은 은이라 부르게 하소서. 저희를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 즉 하늘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의 총회에 성도들이 모일 때 저희를 그 회중에 참석치 못하게 하소서"(1:5).

Ⅱ. 이 무서운 심판을 그들에게 임하게 할 죄는 무엇인가? (26절) "저희가 주의 치신 자를 핍박하며 주께서 상케 하신 자의 슬픔을 말하였나이다."

1.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께서 치신 자였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하는"것으로 간주 되었으므로,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았다(사 53:3, 4, 10). 그들은 분기충천하게 그를 핍박했다. 그들은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했다. 이것과 사도 바울의 말을 비교하라(행 2:23). 비록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내어 준 바" 되었지만, "그들은 법없는 자들의 손을 발에 못박아 죽였다"고 했다.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구원하실지라"하는 그들의 말은 그 무엇보다도 그를 가장 슬프게 했다.

2. 고난당하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상처받은 자들, 하나님 때문에 상처입은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성도들을 핍박했고 저희의 "슬픔은 이야기하였다." 이러한 것들로 인해 "노하심이 끝까지 저희에게 임하였다"(살전 2:16; 마 23:34 이하 참조). 이 말은 더욱 일반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치신 자들을 욕하고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고통을 더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욱 격노케 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 저희 "죄악에 죄악을 더 정하사"하고 덧붙이는 것이 마땅하다(슥 1:15 참조). 상한 심령을 지닌 자들, 영적인 상태에 대한 고통과 두려움을 겪고 있는 자들을 잘 보살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슬픔을 말하지" 말며, "의인의 마음을 슬프게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Ⅲ. 시편 기자는 그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29절)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옵니다. 이것은 외적 고통 중에서 나의 최악의 경우입니다. 그러나 나는 의인과 함께 기록되었으며, 그들처럼 하나님의 분노 아래 있지 않습니다." 부유하고 유쾌하며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것보다는 가난하고 슬프더라도 그의 축복과 함께 있는 것이 낫다. 하나님의 의로 들어오는 자들은 곧 핍함과 슬픔이 끝나는 것을 볼 것이며, 그의 구원은 그들을 높여 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다윗이 여기에서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사 61:10). 이것은 그리스도께 적용될 수 있다. 그는 굴욕 속에서 가난하고 슬펐으며, 슬픔의 사람이었고, 머리 둘 곳이 없는 자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높이 들어 올리셨다. 그를 위해 역사된 구원, 그에 의해 역사된 구원은 "모든 정사와 권세 위에 그를 높이셨다."

 

69:23 없음.

 

69:24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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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30

감사와 찬송(시편 69:30-36)

시편 기자는 호소와 슬픔의 항의로 시작했던 이 시편을, 여기에서는 그리스도의 모형이며 그리스도인의 본보기로서 거룩한 기쁨과 찬송으로 끝내고 있다.

Ⅰ. 그는 하나님을 찬송하기로 결심하고 있으며, 그 일로 자기가 하나님의 용납하심을 얻으리라는 것만큼은 의심하지 않고 있다(30,31절). "내가 내 마음으로만이 아니고, 내 노래로도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라,"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감사 찬송으로 그 자신이 높임을 받으신 것으로 간주하시기를 기뻐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찬미와 함께, "시와 찬송과 영적인 노래"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뿐만 아니라 우리 찬송의 중보자도 되시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것은" 가장 값비싼 율법의 제물인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다"(31절). 이것은, 메시야의 날에는 속죄물뿐만 아니라 의식상의 율법에 의해 제정된 찬미와 감사의 제사도 끝나게 되리라는 것을 명백히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것 대신에 찬미와 감사의 영적 제물, 즉 마굿간의 송아지가 아니라 우리 입술의 송아지가 열납될(히 13:15) 것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암시하고 있다. 현재나 과거의 가장 값지고 화려한 제물보다는 겸손과 감사의 찬송이 하나님을 더욱 기쁘시게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

Ⅱ. 그는 다른 선한 사람들도 하나님을 기뻐하고 계속 그를 구하도록 격려하고 있다(32,33절). "온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리라." 그들은 즐겁게도

1. 성도들의 체험을 주목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는 궁핍한 자들이 그에게 부르짖을 때 들으실 준비가 되어 있으며, 그들이 요구하는 것을 주실 준비가 되어 있으며, 또 하나님은 그의 수금된 자들을 멸시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게 될 것이다. "온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할 것이다." 그것은 한 구성원이 영화롭게 될 때 모든 구성원들이 그것을 기뻐하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곤경과 어려움 속에 있을지라도 오히려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격려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찾는자들의 마음을 소생시키어, 이 진리 즉 야곱의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후손에게 "너희가 나를 구함은 헛되도다"라고 말씀하신 일이 결코 없다는 것을 더욱 명백히 보게 할 것이다.

2. 구세주의 높이 들리우심을 주목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시편 기자는 구세주에 관해, 그리고 구세주의 모형으로서의 그 자신에 관해 이야기해 왔기 때문이다. 그의 슬픔의 끝나고 그가 그 앞에 있던 기쁨 속으로 들어 올 때, 그의 간구가 들려 음부의 감금에서 풀려날 때, 온유한 자가 그것을 관찰하고는 기뻐할 것이며,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을 찾는 자들은, 만일 그들이 그와 함께 고난을 당한다면 또한 그와 함께 다스리게 되리라는 결론을 내림으로써 살면서 위안을 얻을 것이다.

Ⅲ. 그는 모든 피조물들, 곧 천지, 바다, 그리고 그 중에 거하는 모든 것들에게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요청하고 있다(34절). 하늘과 땅, 그리고 그곳의 무리들은 모두 하나님에 의해 지어졌으므로, "천지가 그를 찬송할지로다"하고 있다. 하늘의 천사들과 땅의 성도들은 각자의 거주지에서 항상 찬미하기에 충분한 소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바다의 물고기들로 하여금-비록 그것들이 말을 못한다 할지라도-여호와를 찬미하게 하라. 왜냐하면 바다가 그의 것이고 그는 그들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세상의 찬미가 그의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에 바쳐져야한다(35,36절).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에 대한 예배가 거행되던 시온, 그 거룩한 산을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성별케 되어 자기에게로 분리되어 있는 모든 사람들, 그를 섬기는 일에 종사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시온 성산의 왕이셨기 때문이다. 그는 유다 성읍을 위해 긍휼을 예비해 두시는데, 그리스도는 바로 그 지파에 속했다. 하나님은 그 복음의 교회를 위해 큰 일을 행하실 것이다. 복음의 교회가 잘되기를 바라는 모든 사람들은 즐거워하라. 왜냐하면

1. 그곳에 사람들이 모여 거할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구원받을 자들이 더 들어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유다 성읍들을 건설하시리로다." 각각의 교회들이 복음의 모형대로 형성되고 결합될 것이다. 그리하여 거기 "거하여 소유를 삼는" 자들, 거기에 부여된 특권을 즐기며 그것이 요구하는 공물과 봉사를 바치는 남은자들이 있게 될 것이다. 그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 즉 대체로 신앙에 호의를 갖고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신앙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며, 기독교 안에 자리잡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거기에, 시민으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거하게 될 것이다.

2. 복음의 교회가 영존하게 되고 상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일시적인 것"일 수가 없었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 종들의 후손이 또한 이를 상속하리로다."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자기를 섬길 후손을 안전케 하시고 일으키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열조의 특권을 상속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약속은 옛 사람에 대한 것이었던 것과 같이 우리와 우리의 후손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네게와 네 후손에게 하나님이 되리라." 약속의 땅은 결코 후사가 모자라서 없어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으며, 상속인을 끊으시기보다는 차라리 그렇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다윗에게는 자기 앞에 세울 사람이 결코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구속자가 그의 후손들을 볼 것이며, 그들 속에서 그의 날이 연장될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님이 비밀이 필역되고, 신비한 몸이 완성될 것이다. 그리고 그 거룩한 씨가 세상의 알맹이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이 세상에 모두 모이는 것이 빨리 끝난다면, 그것은 보존을 확신하게 해 주신데 대해 천지가 그를 찬송하는 것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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