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깊은 감정(시편 63:1,2)
이 시편에 붙어 있는 표제는 이 시편이 지어진 때, 다윗이 즉 "유다 광야"에 있었을 때 알려 주고 있다. 즉 그것은 "헤렛 수풀"이었거나(삼상 22:5) "십 황무지 수풀"이었다(삼상 23:15).
1. 가나안에는, 비록 비옥하고 백성들이 많은 땅이었을지라도, 다른 장소보다 덜 비옥하며 사람들의 수가 더 적은 광야가 있었다. 이 세상에서, 교회에서는 그렇게 될 수도 있으나, 천국에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거기서는 모두 성읍이며 모두 낙원이고 황무지는 없다. 거기서는 "광야에 화초가 필 것이다."2. 하나님의 성도들과 종들 중 가장 훌륭하고 귀한 자들도 때로는 광야에 던져지는 운명을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것은 그들에게 외로움과 고독, 적막함과 고통스러움, 궁핍, 방황, 불안정, 그리고 스스로 무엇을 해야 좋을지 매우 당황한 상태를 말해주고 있다.
3. 광야의 모든 역경과 어려움이 우리로 하여금 신성한 노래를 중지하도록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때에도 하나님과의 즐거운 교제를 지키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며 권리이다. 광야에 합당한 시편들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죄의 광야에 있지 않고, 유대 광야에 있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할 필요가 있다.
다윗은 여기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자기를 격려"하고 있다.
Ⅰ. 생동하는 믿음에 의해 그렇게 하고 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께는 우리가 아뢰는 모든 일 속에서 우리는 그를 하나님으로서. 그리고 우리 하나님으로서 주시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광야에 사는 우리에게 위로가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우리가 "하나님이여" 하는 진지한 단어를 말할 때 우리는 실존하시어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자에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 말이 때로는 농담으로 사용된다는 것은 딱한 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에 대한 그의 권위, 우리에 대한 그의 주권 그리고 그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인정해야 한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창조에 의해서 나의 하나님이시라. 그러므로 주는 나의 정당한 주인이시며, 지배자이시고, 언약과 나의 동의에 의해 나의 하나님이 시로다." 우리는 그것을 묵묵히 따르기를 결심한 자로서 우리 자신에 대한 즐겁게 그리고 하나님께 대해서는 매우 감사하게 그렇게 말해야 한다. "하나님이시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다."
Ⅱ. 그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과 또 그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선택한 것에 따라 오는 경건한 신앙심으로 격려하고 있다.
1. 그는 하나님을 구하고, 그의 은총과 은혜를 구하기로 결심하고 있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그러므로 "내가 주를 찾으리이다." 왜냐하면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옵니까?"(사 8:19) 우리는 그를 구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주된 유익으로서 그의 은총을 갈망해야 하며, 우리의 최고 목적으로서, 그의 영광을 고려해야 한다. 우리는 그의 긍휼을 구해야 한다. 우리는 그를(1) 일찌기 구해야 한다. 그를 잃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들로서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구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날을 그와 함께 시작해야 한다. 날마다 그와 함께 시작해야한다. "내가 일찌기 주를 찾으리이다."
(2) 간절히 구해야 한다.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즉, 내 온 사람이 이것을 추구하기에 열심입니다).
다음을 주시하라.
[1]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임재가 결여된 것을 원망하고 있다. 그는 마르고 곤핍한 땅에 있었다. 그는 그 사실을 그렇게 간주한다. 그 이유는 자기가 광야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세상은(단어 그대로) "피곤한 땅"이다. 그 속에 자기들의 분깃을 가지고 있는 세상적인 자들에게는 그러하다. 즉 세상은 바카 골짜기이다. 그들은 거기에서 자신들에게 아무런 보장도 할 수 없다.
[2]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끈질기게 구하고 있다.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앙모하나이다." 그의 빈곤은 그의 열망을 조장했으므로, 그의 열망은 매우 격렬했다. 그는 시냇물을 찾는 어린 사슴처럼 갈급했다. 그는 주의 임재가 결핍된 상태에서는 어느 것도 참을 수가 없었다. 그의 열망들은 거의 참을 수 없었다. 그는 그가 하나님의 규례에 대한 자유를 회복하게 될 때까지 열망했고 번민했다. 은혜로운 영혼은 거룩한 경멸감으로써 하나님을 우러러본다.
2. 그는 하나님을 즐거워하게 되기를 열망하고 있다. 그가 이처럼 열렬히 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의 탄원은 무엇이며, 그의 요청은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는" 것이었다(2절). 즉,
(1) "내가 장막에서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았던 것처럼 이 광야에서도 그것을 보는 것, 내가 그 엄숙한 집회에서 그것을 보았던 것처럼 여기서 은밀히 보는 것" 이었다. 우리가 공중 예배의 혜택을 박탈당할 때에는, 우리가 큰 회중 속에서 하나님과 나누었던 그러한 교제를 우리의 은거지에서도 지키기를 원하고 그렇게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골방이 작은 성소로 변할 수도 있다. 에스겔은 바벨론에서 전능자의 이상을 보았고, 요한은 밧모섬에서 그것을 보았다. 우리가 홀로 있을 때 우리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가질 수 있고 그것으로 족하다.
(2) "내가 이전에 성소에서 그것을 보았던 것과 같이, 거기에서 다시 그것을 보게 되는 것" 이었다. 그는 광야에서 나오기를 바라고 있는데, 그것은 그가 다시 그의 친구들을 보고 궁중의 환락을 다시 누릴 수 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소에 나아갈 수 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의 권능과 영광을(즉, 하나님의 모든 특성과 완전함을 제시하는 주의 영광스러운 권능이다. 주의 강력한 영광을)보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내가 더욱 더 그러한 특성과 완전함에 친숙하게 되고 또 내 마음에 그것에 대한 유쾌한 인상을 남기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그리하여 우리가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기 위한 것입니다(고후 3:18). "그것은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함입니다."
그는 내가 그것들을 보았나이다 라고 말하지 않고 "내가 주를 바라보았나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실체를 볼 수는 없으나 그 믿음에 의해 그의 속성과 완전함을 바라봄으로써 그를 본다. 이러한 광경을 기억하는 것으로써 다윗은 여기에서 스스로 즐거워하고 있다. 그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데 보낸 시각은 귀중한 시간이었다. 그는 그것들을 거듭 생각해 보기를 열망했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을 거듭 생각해 보기를 좋아했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의 손실을 그는 탄식했고 그것이 회복되기를 열망했다. 정식 예배에 참예하는 일에서 은혜로운 영혼의 즐거움이 되어왔고 또 소망이 되는 것은 바로 그 속에 잇는 하나님, 그리고 그의 권능과 영광을 보는 것임을 기억하자.
기쁜 찬양(시편 63:3-6)
얼마나 빨리 다윗의 원망과 기도가 찬양과 감사로 바뀌고 있는가? 하나님을 구하려는 그의 열망을 표현한 두 귀절 후에 여기에서는 하나님을 발견함으로써 얻은 그의 기쁨과 만족을 몇 귀절로 표현해놓고 있다. 성실한 기도는, 거기에 우리 자신의 과오가 없다면, 기쁜 찬미로 곧 변할 수 있다. "무릇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 지로다"(105:3). 그리고 그들 안에 그러한 열망을 역사하신 것에 대해, 그리고 그가 그들을 만족케 하시리라는 확신을 주신 것에 대해 그를 찬미하라. 다윈은 지금 광야에 있었으나 그의 마음은 하나님을 송축하는 일로 크게 넓혀졌다. 환란 속에서도 우리가 마음을 찬미에 기울이기만 한다면 그 소재는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Ⅰ. 다윗은 무엇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하려는가?(3절)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즉 생명들보다," 그러니까 생명과 생명의 모든 즐거움, 가장 좋은 상태에 있는 생명, 오랜 생명과 형통함보다 "나으므로," 내가 주를 찬양하리라. 그것이 우리의 영적 생명이며, 그것은 현세적인 생명보다 낫다(30:5).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죽는 것이 그의 분노 아래서 사는 것보다 수 천 배나 낫다. 광야에서의 다윗은 훌륭한 체험을 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이 생명보다 낫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다"고 그는 말한다. 하나님의 은총의 징표에 의해서 마음이 새롭게 된 자들은 찬양하는 일에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을 송축해야 하는 큰 이유는, 이 세상 재물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나은 식량과 더 나은 소유를 우리는 가졌고, 하나님께 봉사하고 그와 교제하는 중에 우리는 이 세상일과 생활에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나은 일과 더 나은 기쁨을 얻기 때문이다.
Ⅱ. 그는 어떻게 얼마나, 오래 하나님을 찬양하려 하는가?(4절)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 다음을 주시하라.
1. 하나님을 송축하는 그의 태도. "이러므로 "내가 지금 시작했던 것처럼 "주를 송축하리라." 현재의 이 열렬한 감정은 아침 구름처럼 사라지지 않고, 아침해처럼 더욱 더 빛나리라. 또는 "내가 주께 기도했던 것과 같은 진지함을 가지고 주를 송축하리라."2. 지속적으로 끈질기게 하려 했다. "내 평생에 주를 송축하리이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우리 온 생애의 과업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가 이전에 은총을 베푸신 것에 대해 항상 감사한 마음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그것에 대한 감사를 되풀이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매일 얻는 혜택에 대해 날마다 그에게 감사드려야한다. 우리는 매사에 감사드려야 하며, 현재의 어떤 고통이 있다고 해서 이 의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살아서 어떤 날을 보든지, 얼마나 어둡고 흐리든지, 또 우리가 "우리의 날은 즐거움이 없구나" 라고 말할 날들이 올지라도, 여전히 매일 매일은 감사의 날이어야 하며, 우리의 죽는 날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일로 우리의 시간은 보내야 한다.
3. 모든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께 대한 그의 꾸준한 관심.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내 손을 들리이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기도와 찬미 속에 하나님의 이름을 주목해야 한다(그는 그의 이름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스스로를 알리셨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와 찬미 속에서 "주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며"로 시작하고, 그리고 "영광이 아버지께 있사옵니다"로 끝맺도록 하라는 가르침을 받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사업과 직무 속에서 항상 이 점을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인하여, 즉 그의 성령의 힘과 은혜로 인하여, 우리의 의무를 향해서 그리고 우리의 특별한 원수들을 대적하여 우리의 손을 들어야 하는 것이다(71:16; 슥 10:12),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든 서원을 해야 한다. 우리는 그에게, 그리고 그의 은혜를 의지하여 약속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위로와 기쁨 속에서 축 늘어졌던 손을 들 때,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들려야 한다. 그로부터 우리의 위로가 나와야 하며, 그에게 그것이 바쳐져야 하는 것이다. "주안에서 우리가 온종일 자랑하나이다."
Ⅲ. 다윗은 어떤 즐거움과 기쁨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려 했는가? (5절)
1. 내적인 만족감을 가졌다.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영양을 주는 빵을 먹을 뿐만 아니라 기분 좋고 감미로운 골수를 먹는 것같이 (사 25:6) "내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다윗은 그가 하나님 예배를 다시 즐겁게 행할 수 있게 되고, 그때에 그가 이처럼 만족케 되기를, 그리고 그가 이처럼 한동안 제지 아래 있었으므로 더욱 그런 만족을 누리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또는, 그렇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인자하심 속에서, 그리고 하나님과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속에서 그가 이처럼 만족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은혜로운 하나님 안에는, 그리고 그와의 교제 안에는 은혜로운 영혼에게 줄 풍성한 만족이 있다(36:8; 65:4). 그리고 하나님에게서 그리고 그와의 교제에서 풍성한 만족을 취하는 은혜로운 영혼 속에는 풍족한 만족이 있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만족히 여긴다. 그들은 그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그의 은총 이외의 것은 바라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초월적인 만족감을 맛보고 있으며 그것과 비교해 볼 때 모든 감각적인 즐거움은 시들하고 풍미가 없다. 즉, 이 위안을 주는 포도주와 비교해 볼 때 흙탕물과도 같다.2. 이 만족함을 외적으로 표현한다. 그는 "기쁜 입술로"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다. 즉 그는 하나님을
(1) 공개적으로 찬송할 것이다. 그의 입과 입술이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다. 마음으로써 사람이 믿고 감사할 때, 입으로써 이 두가지를 자백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입의 동작이 마음 없이도 수락된다는 것이 아니라(마 15:8) 우리 자신의 경건한 감정을 자극시키기 위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교화하기 위해 마음에서 말이 넘쳐야 한다는 것이다(45:1).
(2) 즐겁게 찬송할 것이다. 우리는 기쁜 입술로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 우리는 매우 즐겁게 그것과 다른 종교적 의무에 착수해야 하며, 거룩한 기쁨의 원리에서 하나님께 대한 찬송을 나타내야 한다. 찬송하는 입술은 기쁜 입술이 되어야 한다.
Ⅳ. 다윗은 그가 매우 피곤했을 때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생각으로 그 자신을 즐겁게 했는가? (6절) "내가 침상에서 주를 기억할 때에" 주를 찬송하오리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억할 때마다 그를 찬송해야 한다. 이제 다윗이 공중 예배에 못들어오게 되자, 그는 하나님과의 은밀한 교제 속에서 더욱 풍성한 찬송을 드렸고, 그렇게 하여 그의 손실은 어느 정도 보충된다. 여기에서 다음을 주목하라.
1. 어떻게 다윗은 하나님을 생각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는가?하나님은 그의 모든 생각 안에 계셨다. 그런데 이것은 악인의 성격과 상반되는 것이다(10:4). 하나님께 대한 생각은 그에게 준비되어 있었다. "내가 주를 기억하나이다. 즉 내가 생각하고자 할 때, 나는 주께서 내 우편에 계신 것을, 내 마음에 임재하신 것을 발견합니다." 이 문제는 우리가 잊거나 간파할 수 없는 것으로서 제일 먼저 나타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은 그 안에 확고히 자리잡고 있었다. "내가 주를 묵상하나이다." 하나님께 대한 생각은 마음을 스쳐 지나가는 초월적인 생각이 아니라 마음 속에 거하는 영구적인 생각이어야 한다.
2. 다윗이 이처럼 그 자신을 몰두시켰던 때는 "침상에서" 잠못 이루는 때였다. 다윗은 당시 정착하지 못한 상태로 유리하고 있었지만 어디로 가든지 항상 신앙을 지녔다.나의 "침상들"에서로 보는 견해도 있다. 사울에 의해 쫓김을 당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이틀밤도 한 침상에서 누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디에 그가 누웠든, 야곱처럼 차가운 땅에 돌베개를 베고 누웠을 때에도 하나님께 대한 선한 생각은 그와 함께 있었다. 다윗은 하루 종일 일로 분주하면서 그 자신의 안전을 위해 이동해야 했으므로 엄숙히 신앙적인 일에 몰두할 여유가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그것을 위해 필요한 시간을 원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의 필요한 잠을 줄였다. 그는 당시 끊임없는 생명의 위기 속에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근심과 두려움이 여러 번이나 그의 눈을 붙이지 못하게 했고 그에게 지루한 밤을 주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때 그는 하나님께 대한 선한 생각으로 스스로를 즐기고 위로했다. 때로 우리는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눈물 속에 있는 것을 발견한다(6:6). 그러나 이처럼 그는 그의 눈물을 닦았다. 잠이(고통이나 몸의 병 또는 마음의 불안으로 인해) 우리 눈에서 떠날 때,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을 기억함으로써 편히 쉴 수 있다. 아마도 한 시간의 묵상이 한 시간의 잠보다 우리에게 더 유익할 것이다(16:7; 17:3; 4:4; 119:62 참조).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 밤에 장막에 서 있는 자들이 있었는데(134:1). 아마도 다윗은 자유로운 몸이었을 때 그 레위인들과 함께 하였던 것 같다. 그리고 이제 그가 그들과 함께 할 수 없게 되자 그들과 함께 시간을 지켰고 또 그 자신이 그들 가운데 있기를 원했다.
하나님께 대한 확신(시편 63:7-11)
다윗은 하나님께 대한 그리고 그를 찬송하고자 하는 그의 열망을 표현한 후, 여기에서 그에 대한 확신과 그에 대한 자기 기쁜 기대를 표현하고 있다(7절).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거이 부르리이다." 이것은 언약궤 위에 펼쳐져 있는 그룹의 날개, 꼭 하나님이 그 사이에 거하신다고 일컬어지고 있는 ("내가 주의 명령 속에서 그리고 주와의 언약과 교제 속에서 즐거이 부르리이다") 그 날개 말하는 것이거나,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고 있는 독수리의 어린 새끼나(출 17:4; 신 32:11) 하나님의 자비심을 나타내고 있는 암탉의 어린 새끼들처럼 (마 23:37) 돌보아 줄 사람이 없는 어린아이들이 그 밑에 은신처를 만드는 새의 날개를 말하는 것이다. 이 표현은 시편에서 흔히 사용되고 있는 구절이며(17:8; 36:7; 57:1; 61:4; 91:4). 이와 같은 의미로 쓰인 것은 시편 외에는 룻기 2장 12절밖에 없다. 거기에서 룻은 개종했을 때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왔다" 고 했다. "하나님의 날개의 그늘에서 즐거이 부르는" 것이 우리의 의무인데, 이것은 병아리들이 춥거나 놀랐을 때 본능적으로 암탉의 날개 아래로 뛰어드는 것처럼, 자연적으로 믿음과 기도로써 우리가 그에게 의지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것은 또한 그의 관심과 보호로써 우리를 도울 능력 그리고 우리의 원기와 만족감을 도울 능력이 있으며 도울 준비가 되어 있는 자로서 의뢰하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의탁한 후 우리는 편안하고 즐거워야하며 환란의 두려움에서 떠나 평온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더 상세히 살펴 보기로 하자.
Ⅰ. 하나님께 대한 다윗의 확신을 지지하고 격려하는 것은 어떠한 것이었나? 그 소망의 지주로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는데, 그 소망의 유일한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1. 그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과거의 경험, "주는 모든 도움과 돕는 자들이 내게서 끊어졌을 때에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주의 구원을 여전히 즐거워할 것이며, 앞으로도 주를 의지하고 즐거움과 거룩한 기쁨을 갖고 그것을 행하리라. 주는 나의 돕는 자가 되셨을 뿐만 아니라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도울 수 없었고 어떤 피조물들도 하나님에 의하지 않고서는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의 에벤에셀을 세우면서, "지금까지 주께서 우리를 도우셨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그를 버리지 않을 것을, 결코 그를 불신하지 않을 것을 결심하며, 뿐만 아니라 결코 그와 함께 동행하는 데에 위축되지 않을 것을 결심해야 한다.2. 이러한 일을 수행하도록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그의 현재의 깨달음(8절).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나이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간직하려는 매우 진지한 열망과 신중하고 열성인 노력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항상 우리의 가슴에 하나님을 모실 수 없을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상급이신 그를 향하여 달려나가면서 항상 그를 주목해야 한다(빌 3:14). 하나님을 열심히 추구한다는 것은, 그의 모습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가 되어 그를 빨리 쫓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다윗은 행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시나이다"하고 그를 시인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를
(1) 그의 환란 중에도 붙들어 주셨다. 그리하여 그가 환란에서 쓰러지지 않게 하셨다. "그 밑에 영원한 팔이 있다."
(2) 그의 신앙 속에서 붙들어 주셨다. 하나님은 그의 거룩한 열망과 추구 속에서 그를 붙드시어 그가 선행을 하는 데 지치지 않도록 해 주었다. 하나님을 열심히 쫓는 자들도 하나님의 오른 손이 그들을 붙들지 않으신다면 곧 쓰러져 활기를 잃을 것이다. 그를 쫓는 우리를 강하게 하시고, 우리의 선한 감정을 장려하시며,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직 얻지 못했을 때에도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떨어지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그것은 그의 오른 손이다)에 의한 것이다.
이제 시편 기자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합당한 때에 그가 간절히 바랐던 것을 주시리라는 소망이 그를 크게 격려해 주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은혜로써 그 안에 이러한 열망들이 일어나도록 역사 하셨고, 그 열망을 지속하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Ⅱ. 다윗은 어떤 희망 속에서 개가를 부르고 있는가 ?
1. 그의 대적들은 멸망할 것이라는 희망이다(9, 10절)."그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는"자들, 즉 그의 생명(그들은 그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리고 그의 지혜와 경건과 유용함을 시기하고 미워했으므로 그의 생명을 노렸다) 뿐만 아니라 그의 영혼까지 멸하려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영혼의 양식과 힘이 되는 하나님 예배에서 그를 추방함으로써(그렇게 하여 그들은 영혼이 굶어 죽게 하려 했다) 그리고 그를 보내어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함으로써(그렇게 하여 그들은 영혼에 독을 묻힐 수가 있었다. 삼상 26:19) 그의 영혼을 멸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다음과 같은 것을 예견하고 있으며 예고하고 있다,
(1) 그들은 "땅 깊은 곳," 음부에, 지옥에 "들어"갈 것이다.
다윗에 대한 그들의 적의는 그들의 사망의 원인이 될 것이며, 그들의 저주, 그들의 파멸, 그들의 영원한 파멸을 초래할 것이다,
(2) 그들은 칼에 의해, 하나님의 분노와 그의 의의 칼에 의해, 사람의 칼에 의해 쓰러질 것이다(욥 19:28, 29). 그들은 횡사할 것이다(계 13:10). 이것은 칼에 의해 자기 자신의 칼에 의해 쓰러진 사울에게서 이루어졌다. 다윗은 이것을 예고했으나, 두 번씩이나 그릴 기회가 왔었어도 실행하려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언이 아니라 계율이 우리 법도이기 때문이다.
(3) "저희는 여우의 밥이 될 것이다." 그들의 시체가 굶주린 짐승들의 먹이가 되거나(사울은 상당한 기간 동안 매장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의 집과 재산이 들짐승들의 거처가 될 것이다(사 34:14). 이러한 자들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 왕국과 그의 세력을 대항하는 그의 원수들의 운명이 될 것이다.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눅 19:27).
2. 그 자신은 마침내 그가 뜻한 바를 얻을 것이다 라는 희망이다(11절). 즉 그는 기름부음 받았던 그 보좌에 오르게 될 것이다.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로다."
(1) 그는 그 자신을 왕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뜻과 지명에 의해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바울은 갈등 속에 있으면서도 그 자신이 "넉넉히 이긴다고" 쓰고 있다(롬 8:37). 믿는 자들은 비록 부활의 아침이 되기 전에는 주권을 갖지 못할지라도 왕이 된다.
(2) 그는 그가 지금 눈물로 씨 뿌리고 있지만 기쁨으로 거두리라는 것만큼은 의심하지 않고 있다. "왕은 즐거워하리로다."
(3) 그는 "하나님을 그의 모든 즐거움의 알파와 오메가로 만들 결심을 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을 즐거워할" 것이다. 그는 이미 그 앞에 놓여진 즐거움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의 영광은 그의 재림 때에 완성될 것이다. 다윗의 승진으로 인한 좋은 결과는 다음 두 가지가 될 것이다.
[1] 그것은 그의 친구들의 위안이 될 것이다. "그로(즉 다윗으로) 맹세한 자마다," 즉 그의 세력 안으로 오고 그와 동맹하기로 서약한 자마다 그의 성공으로 " 자랑하리로다." 또는 "주로(즉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된 이름으로, 신 6:13) 맹세한 자마다" 자랑하리로다. 이렇게 해석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진실하게 그리고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모든 선한 백성들을 의미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자랑할 것이다. 그들은 다윗의 발탁을 자랑할 것이다. "우리가 그와 함께 고난을 받았으면 그와 함께 다스리게 되리라."
[2] 그것은 그의 대적들을 논박하게 될 것이다. "거짓말하는 자의 입," 즉, 사울과 도엑의 입, 그리고 마치 다윗의 경우가 절망적인 것처럼 그를 오도하고 그를 모욕하는 자의 입은 완전히 "막히리로다." 그들은 더 이상 그를 대적하는 말을 하지 못하고 영원히 침묵케 되어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대적들에게 모든 위선자들이 행하는 것처럼 그에게 거짓말하는 자들에게, 마음은 그와 함께 하지 않으면서도 그를 사랑한다고 그에게 말하는 자들에게 적용시켜 보자. 그들의 입은, "나는 네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노라"하는 그 말에 막힐 것이다. 즉 그들의 입은 영원히 유구무언일 것이다(마 22:22). 그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불경건한 죄인들의 입이 그에 대해 한 심한 말들을 모두 문책하시기 위해 주께서 오실 그날에 막힐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그의 성실한 친구들과 추종자들 모두의 영원한 승리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것을 믿는 소망 속에서 지금 개가를 부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