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망(시편 54:1-3)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을 살펴 볼 수 있다.
1. 다윗은 당시 큰 환란 가운데 있었는데, 그 표제가 그것을 이야기 해 주고 있다. 십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사울에게 와서 다윗이 있는 곳을 알려 주었고, 그러면서 다윗을 그의 손에 넘겨주겠다고 약속했다. 만일 다윗이 시골로 피신하여 한적한 곳으로 갔더라면 그가 추적 당하지 않았을 것이며, 자기가 살던 마을로 피신했더라면 일러주는 자들이 배신당하지 않으리라고 일반인들은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도 그가 천국에 가기 전에는 결코 안전이나 편함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십인들은 얼마나 패역하며, 얼마나 남의 일에 참견하기를 좋아하는가! 하나님이 미쁘시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미 7:5).
2. 그는 하나님께 도움과 구원을 간구하고 있다(1,2절). 그는 그를 도울 수 있는 하나님의 힘에, 그리고 그를 돕기로 약속된 그의 이름에 호소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그를 그의 대적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고 판단해 주시기를 간청하고 있다. 즉, 자기의 사정을 변호해 주시고, 자기를 위해 판단해 주시기를 간청하고 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 이외에는 의지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하나님의 힘 이외에는 의지할 수 있는 능력도 없었으며, 그가 의지하고 피난처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이러한 것들 이외에는 없었다. 그가 도망하는 중이었으므로, 하나님께 정식으로 아뢸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때에도 그가 때때로 하늘을 우러렀다는 것은 그의 기도가 효과적인 응답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절). "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3. 그는 그의 대적들의 성질에서 이끌어낸 사실을 탄원으로 제시하고 있다(3절).
(1) 그들은 외인(外人)이다. 십 인들은 이스라엘의 이름을 붙일 자격이 없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블레셋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보다 더 천하고 야비하게 나를 대하고 있습니다"고 했다. 인간 관계와 결연의 줄을 끊고, 스스로 외인이 된 자들로부터는 우리가 최악의 대우를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2) 그들은 "강포한 자"이다. 사울이 바로 그러한 자였다. 그는 왕으로서 자기 힘을 자기의 훌륭한 신하들을 보호하는 데에 사용했어야 마땅했지만, 그것을 그들을 멸망시키는 데에 남용했다. "재판하는 곳"에 강포가 있는 것보다 더 근심스러운 일은 없다(고후 3:16). 바울의 가장 큰 위험은 그의 "동족과 거짓 형제"에 의한 것이었으며(고후 11:26). 다윗의 경우도 역시 그러했다.
(3). 그들은 매우 거대하고 위협적이었다. 그들은 다윗을 미워하고 그가 잘못되기를 원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이을 행하기 위해 그들의 힘을 합하면서 일어나 그를 쳤다.
(4) 그들은 심한 악의와 원함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내 생명을 수색하나이다." 그들은 귀중한 생명을 사냥하며, 그 이하의 일로는 그들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것이 마치 호의를 나타내는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이처럼 잔인하고 냉혹한 자들에게 그의 섭리에 의해 성공을 허락하시지 않도록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다.
(5) 글들은 매우 불경스럽고 무신론적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해서,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대적하시어 나타나시는 것이 하나님 자신에게 영예로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나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생각을 완전히 팽개쳐 버렸다. 그들은 하나님의 눈이 그들 위에 있다는 것, 하나님의 백성들과 싸운다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싸우는 것이라는 사실, 뿐만 아니라 이처럼 균등하지 않는 싸움은 분명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리라는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하나님을 자기들 앞에 두지 않는 자들로부터는 어떠한 선도 악인들 범하지 않겠는가?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깨뜨린 자가 무슨 자연의 맹약이나 우정, 감사, 또는 언약을 지키겠는가? "셀라-이것을 주목하라."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도록 하자.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깊은 파멸에 빠질 것이다.
감사의 고백(시편 54:4-7)
우리는 여기에서 기도에 대한 다윗의 생생한 행위를 볼 수 있다. 그는 그 믿음 때문에 비록 그에게 닥친 문제가 거대해 보일 지라도 그 결과는 잘 되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Ⅰ. 그는 자기편이요 자기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4절). 그는 의기양양하고 환희에 찬 모습으로, "하나님은 나의 돕는 자시라"하고 말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그를 위한다면, 그도 우리를 위하신다. 그리고 그가 우리를 위하신다면 우리를 치고자 하는 어떤 세력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그러한 도움을 그에게서 얻을 것이다. 사람과 마귀들이 우리의 파괴자가 되고자 하더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돕는 자이신 한, 그들은 어떤 해도 끼치지 못할 것이다. "주께서 내 생명을 붙드는 자와 함께 하시나이다." 118편 7절과 비교해 보라.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도다. 그가 우두머리되는 자이시도다. 따라서 그가 그들을 돕지 않으셨다면, 그들 중에 아무도 나를 도울 수 없었으리라."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대로 우리에게 작용한다(그리고 그 이상 나타내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시다. 즉 "주는 내 생명을 붙드시는 자이며, 나로 하여금 내 일에 지치지 않도록, 그리고 내 짐에 눌려 쓰러지지 않도록 하시는 자이시도나." 섭리로써 모든 것을 붙드시는 그가, 은혜로써 그의 백성들의 생명도 붙드신다. 하나님은 때가 되면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이며, 그 동안 그는 그들을 부축해 주시고 지탱해 주신다. 그리하여 그가 만드신 영혼이 자기 앞에서 쓰러지지 않도록 해 주신다.
Ⅱ.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을 때 그는 그의 대적들이 패하여 그 앞에 쓰러지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았다(5절). "주께서 내게 재앙을 행할 기회를 찾는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라. 그들이 내게 행하려는 악을 의로운 하나님은 그들의 머리 위에 갚으시리라." 다윗은 그들에게 악을 갚으려 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귀머거리같이 듣지 아니하였으나. 주께서는 들으시리로다." 우리가 용서해 준 대적들이 회개하지 않을 떼.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우리 자신이 보복해서는 안 된다. 다윗은 "주의 성실함으로 저희를 멸하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다. 이것은 악의에서 나온 기도가 아니라 믿음에서 나온 기도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하고 단지 그것이 이행되기를 바라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약속 속에 뿐만 아니라 그의 경고에도 성실이 있으며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은 자기들의 경험으로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Ⅲ.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선하심을 베푸신 것을 경험한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감사제 드릴 약속하고 있다(6절). "내가 주께 제사를 드리리이다." 비록 제물은 비용이 들었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경배자들에게 이러한 방법만 아니라 후하게 그리고 인색하지 아낌없게 바치려 했다. 우리의 모든 영적 제물들은 이러한 의미에서 아낌없이 드리는 제물이라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기꺼이 드리는 자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다윗은 제물뿐만 아니라 그 그림자인 의식(衣食)까지도 바치고자 했다. 즉 그는 감사하는 마음과 그의 이름에 감사하는 우리 입술의 송아지는 하나님께서 기꺼이 받고자 하시는 제물이다. 주의 이름은 크실 뿐만 아니라 선하시므로 찬미되어야 합니다. 주의 이름을 찬미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일뿐만 아니라 선하고 즐거우며 합당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좋으므로(92:1) 나는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다."
Ⅳ. 그는 이미 이루어진 일처럼 자기의 구원을 말하고 있다(7절). 내가 주의 이름에 감사하고 "주께서 나를 건지셨으니 이것이 내 노래가 될 것이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완전한 구원을 기뻐하고 있으며-"주께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그의 마음에 만족하게 건지신 것을-"내 원수가 보응받는 것을 나로 목도케 하셨나이다-기뻐하고 있다. 즉, 그들이 죽임을 당하고 멸망한 것을 목도한 것이 아니라 사울에게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공격해 온다는 소식이 전해져 그가 억지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을 목도한 것이었다(삼상 23:27, 28). 다윗이 원했던 전부는 그 자신이 안전케 되는 것이었다. 사울이 그의 군대론 후퇴 시는 것을 보았을 때 다윗은 자기의 소망을 목도했다. "주께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셨나이다." 그것은 이런 것이다.
1. 다윗은 이러한 생각으로, 그가 환난에 처했을 때, 그 자신을 위로했을 것이다. "주께서 여지껏 모든 환란에서 나를 건지셨고, 나는 여러 번 내 뜻을 이루었으며 내 원수가 보응받는 것을 보아왔읍니다." 이처럼 우리는 큰 곤경에 빠졌을 때 우리의 과거의 경험으로 우리 자신을 격려해야 한다.2. 아니면, 이러한 생각으로 그는 그의 두려움이 걷히다. 그의 현재의 구원을 찬미하였는데, 그것은 앞으로도 구원해 주시리라는 증거였다. 비록 그의 앞에는 아직도 많은 환란이 있었지만, 자기의 구원을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서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약속했으므로 그는 마치 그것이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환난에서 나를 건지기 시작하신 주께서 나를 다른 보응받는 것을 목도케 하실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다윗이 그 모형이 되었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하나님은 굴욕의 상태로 만드는 모든 환란에서 그를 건지실 것이며, 그리스도는 그 사실을 완전히 확신하고 있었다.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었다고 적혀 있다. 왜냐하면 비록 우리가 아직 만물이 그의 발아래 있는 것을 보지 못했을지라도 그가 다스리시게 되어 마침내 그의 대적들이 그의 발등상이 되리라는 것과 그의 원수가 보응받는 것을 그가 목도케 되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 사도 바울이 언급한 그 특별한 구원을 그들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은 격려가 되고 있다. 사도 바울은(여기에서의 다윗처럼)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를 사자의 입에서 건지우신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라"(딤후 4:7,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