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하나님 (시편 46:1-5)
여기에서 시편 기자는 그 자신을 본보기로 하여 우리를 가르치고 있다.
Ⅰ. 하나님 안에서 그리고 우리에 대한 그의 관계와 임재 속에서 개가를 부르도록 가르치고 특히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 되신 새로운 경험을 했을 때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고 있다(1절).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우리는 그가 그러하다는 것, 그리고 그가 그렇게 되시겠다고 약속했다는 것, 그리고 그가 영원히 그렇게 되시리라는 것을 발견했다. 우리가 쫓기고 있는가?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가 도망할 수 있고, 또 그 안에서 안전하며 우리 자신이 안전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우리의 피난처이시다. 견고한 토대 위에서 안전케 하라(잠 18:10). 우리는 고난에 눌리고 있는가? 우리는 할 일이 있고 또 싸워야 할 대적이 있는가?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짐을 견디게 해 주며, 모든 봉사와 고난에 합당케 해주시는 우리의 힘이시다. 그는 은혜로써 우리에게 힘을 주실 것이며 우리는 그에게 우리 자신을 체류시킬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환난 가운데 있는가? 그는 우리가 궁핍할 때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행해주시는 도움,(단어 그대로) "현재의 도움," "발견할 수 있는 도움"이다. 그는 우리가 그러하다는 것을 발견할 자로서, 그리스도가 "시험한 돌"이라 불리우는 것처럼(사 28:16), probabum est- 즉 그것이 시험되도다라고 기록할 수 있는 도움이다. 혹은 그는 "가까이에 있는 도움" 즉 결코 구할 필요가 없이 항상 옆에 있는 도움이다. 또는 "충분한 도움," 모든 경우와 위기에 적합한 도움이다. 우리는 그보다 더 나은 도움을 바랄 수 없으며 또한 어떤 피조물 속에서도 그와 같은 것을 결코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Ⅱ. 가장 큰 위험을 극복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시니," 즉 우리에게 모든 것을 충족케 하시는 하나님이시니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거룩한 경외감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놀라움을 갖고 음부나 세상의 권세를 두려워해야 할 필요가 조금도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대적하리요." 누가 우리를 해하리요? 이처럼 두려움 없이 되는 것은 우리의 의무며 동시에 특권이다. 정직한 마음을 갖고 하나님과 그의 섭리와 약속에 대해 생동하는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양심이 깨끗하다는 증거이다. "땅이 변하고, 피조물에 대한 우리의 모든 기대가 우리를 실망시키고 좌절시킬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고라에게 그러했던 땅처럼" 우리를 부축해야 하는 땅이 우리를 삼키려고 위협하더라도 두려워 아니하리로도다." 그의 아들들을 위해 이 시편이 지어졌으며, 어떤 사람의 견해대로 그들에 의해 지어졌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철저히 따르고, 그가 우리편이 되시는 한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두려워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우뢰 를 통해 쥬피터의 무서운 팔이 창공을 찢게 하라. 세상이 무너진 그 밑에서 아래서 그는 담대히 타나나리도다.
여기에서 다음을 살펴보자.
1. 그 위협은 얼마나 긴박했는가? 우리는 땅이 변하여 바다에 던지워지고, 심지어 땅의 가장 튼튼하고 견고한 부분인 산까지도 깊이를 잴 수 없는 대양에 묻히우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바다가 노호하고 성난 것과 무서운 소시를 내는 것, 그리고 "산이 요동할" 정도로 (3절) 매우 격렬하게 해안을 침입하는 그 거품이든 파도를 짐작할 것이다. 비록 왕국과 나라가 혼란 가운데 있고 전쟁에 휩쓸리며 폭동으로 시달리어 그들의 통치가 끊임없이 변혁되더라도-비록 그것들이 능력을 합하여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며 그들의 멸망 이상의 것을 노리고, 또 그들의 목적을 매우 가까이 성취하게 되었다 할지라도-우리는 이 모든 환난에 교회에 유익하도록 끝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93:4 참조). 땅이 변한다면, 땅에 보화를 쌓아두고 거기에 마음을 둔 자들은 두려워할 수밖에 없을 것이나, 보화를 하늘에 쌓아 두고, "땅과 거기에 있는 모든 것들이 불살라질" 때 매우 행복하게 되리라고 기대하는 자들은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부유(浮游)하는 토대 위에 신뢰를 세운 자들은 물이 요동할 때 괴로워하는 것이 마땅하나, "그것보다 높은 바위"로 인도받고 그 바위가 견고한 발판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자들은 괴로워하지 않을 것이다.2. 교회가 매우 잘 지켜지고 있다는 점과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는 그 세력을 고려해 볼 때 이 위험에 대한 도전은 얼마나 견고한 토대를 지니고 있는가? 우리가 걱정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어떤 사적이고 특별한 관심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궤이며, 우리의 마음은 그것으로 인해 떨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교회를 위해 위로와 발전을 마련해 두신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확고히 할 수 있는 이유를 발견하게 될 것이며 악한 조류에 대한 두려움을 초월하게 될 것이다.
(1) 여기에 교회의 기쁨이 있다. 그것은 가장 우울하고 슬픈 세대에도 존재한다(4절).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바닷물이 포효하고 그것을 위협할 때라도, 그것을 "기쁘게 하도다." 그것은 "예루살렘 옆을 천천히 흐르는" 실로암 물을 시사하고 있다(사 8:6, 7) 비록 그 물이 그리 깊거나 넓지는 않았지만 히스기야 시대에 예루살렘을 방어하는 데 유용했다(사 22:10, 11).
그러나 이것은 영적으로 풀이되어야 한다. 즉 강은 은혜의 언약이며 시내는 약속이다. 또는 강은 은혜의 성령이며(요 7:38, 39) "시내는 하나님의 소를 기쁘게 하는"위로다. 하나님의 말씀과 의식은 하나님께서 흐리고 어두운 날에 그의 성도들을 기쁘게 만드시는 강과 시내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 자신은 그의 교회에 있어서 "넓은 하수나 강"이 되신다(사 33:21). 하나님의 성을 기쁘게 만드는 시내는 격하지 않고 실로암의 것처럼 유하다. 즉 부드럽고 조용한 속삭임에 의해 성도들에게 전달되는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은 채 오는 영적인 위로는 분노하고 악의에 가득 찬 세상의 가장 크고 소란한 위협을 진압시키기에 충분한 것이다.
(2) 교회의 견고함이 있다. 비록 천지가 진동할지라도 "하나님의 그 성 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다"(5절). 하나님은 그의 교회에게 특별히 임재하실 것과 돌보실 것을 단언하셨다. 그의 존귀는 교회 속에 있으며 그는 그의 장막을 그 속에 세우셨고, 또 그것을 보호해 오셨다. 그러므로 그것은 요동치 아니할 것이다.
[1] 즉 땅이 변할지라도(2절) 그것은 파괴되거나 제거되지 않을 것이다. 교회는 세상보다 오래 남을 것이며 세상이 멸망될 때는 축복 가운데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반석 위에 세워져, 음부의 문도 그것을 이기지 못하리라."
[2] 그 결과를 두려워하여 동요되거나 매우 충격을 받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고 우리와 함께하시면 우리는 우리에게 가해지는 가장 과격한 시련에도 흔들릴 필요가 없다.
(3) 교회의 구원이 된다. 아무리 큰 위험이 있다 하더라도 교회는 구원된다.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따라서 누가 교회를 해할 수 있겠는가? 그는 환난 중에 있는 교회를 도와 쓰러지지 않게 하실 것이다. 아니, 환난 당할수록 교회는 더욱 더 증가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새벽에"-아침에 나타날 때에-환난에서 도울 것이다. 즉 매우 빨리 도울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큰 도움"이시며 (1절) 일이 극한 상황에 이르고 또 위로가 가장 요청되는 때에, 즉 매우 적절한 때에 도우시는 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믿는 자들 각자에게 적용될 수 있다. 하나님이 그의 말씀에 의해 우리 마음 속에, 우리 한가운데, 우리 안에 풍요하게 거하시면 우리는 견고할 것이고 도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을 가져 두려워하지 않도록 하자. 모든 것은 잘될 것이고 또 그 결과도 좋을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확신 (시편 46:6-11)
이 구절은 하나님께 만국의 왕으로서, 그리고 성도들의 왕으로서 영광돌리고 있다.
Ⅰ. 그의 능력과 섭리에 의해 세상을 다스리시고 그의 영광이 되도록 인간의 모든 형편을 지배하시는 만국의 왕으로서, 그는 세상에 거하는 자들 가운데에서 그의 뜻대로 행하신다. 그리고 그 누구도 "주께서 무엇을 하셨나이까?"하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1. 그는 이 세상에서 그와 그의 세력에 대항하는 열방의 노를 저지하시며, 그들의 힘을 꺾으신다(6절). 다윗이 보좌로 오고 다윗 자손의 왕국이 세워졌을 때 "이방이 훤화(喧譁)하였다"(2:1, 2 와 비교). "열국이"분노로 "동하였고, 소란스럽고 분노한 모습으로 그의 왕국에 대항하여 일어섰다. 그러나 하나님은 "소리를 발하시어, 진노로 그들에게 말씀하였고"그들은 또 다른 면으로 동하였고, 혼돈과 놀라움 속에 빠졌으며 균형을 잃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모든 방범은 깨어졌다. 그들을 받히고 있던 땅도 녹았으므로 그들은 확고한 발판을 발견치 못하게 되었다. 그들의 세속적인 마음은 그들을 두려움으로 몰아넣었고, 햇빛을 받는 눈처럼 녹아 버렸다. 이처럼 대적의 마음이 녹는 것이 사사기(5:4, 5)에 묘사되어 있다(눅 21:25, 26 참조).2. 그가 칼을 빼시고 그것에 명을 내리기를 기뻐하실 때, 그는 열국 가운데 큰 위력을 발하시어 열국을 모두 황폐케 하신다(8절).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 그것은 주시되어져야 하며(66:5). 연구되어져야 한다(111:2). 섭리의 모든 작용은 하나님의 행적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그의 속성과 목적은 그 행적 속에서 주목되어져야 한다. 특히 그가 이스라엘의 땅을 황무케 하려고 생각했던 그의 교회의 대적들 가운데에 있는 "땅을 황무케 하신" 것을 주시하라. 그들이 교회에 대해 계획했던 그 멸망은 그들 자신에게로 돌라온 것이다. 전쟁은 흔히 그것이 행해지던 무대를 파괴하는 비극이다. 따라서 다윗은 전쟁은 흔히 그것이 행해지던 무대를 파괴하는 비극이다. 따라서 다윗은 전쟁을 그 대적들의 나라로 끌고 갔다. 이것은 얼마나 그 나라를 황무케 했는가! 성들은 불탔고 나라들은 황폐케 되었으며 사람들의 팔이 잘리워 산더미를 이루었다. 황폐케 하는 심판의 결과를 와서 보라.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이렇게 말하라. 즉 "주의 일이 어찌 그리 엄위하신지요!"(66:3) 그를 대적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고 이것을 보도록 하고, 똑같은 떨림의 잔이 그들의 손에 놓여지리라는 것을 예상하게 하라. 반면에 그를 두려워하고 그에게 의지하는 모든 자들은 기쁜 마음으로 그것을 보도록 하고, 교회를 대적하여 무장한 매우 엄청난 힘을 무서워하지 않도록 하라. 그들이 전투 태세를 갖출지라도 "그들은 산산조각이 될 것이다."
3. 그가 칼을 칼집에 넣고자 하실 때는 열국의 전쟁을 끝나게 하시고 그들에게 평화를 부여하실 것이다. (9절). 전쟁과 평화는 바다의 사나움과 잔잔함과 마찬가지로 그의 말씀과 뜻에 달려 있다(107:25, 29). 서로의 오랜 전쟁으로 인해 그들의 숨이 가빠졌을 때, 하나님은 때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저가 땅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시어" 숨쉴 시간을 갖게 하신다. 아마도 양방은 싸움에 지쳐 그것을 종결시키기를 원할 것이다. 수단은 편의를 위해 발견되어진다. 즉 호전적인 왕들은 제거되며 중재자들이 그들의 자리에 배치된다. 그 때에 활은 동의에 의해 꺾어지며, 창은 끊어져 낫이 되고, 칼은 두들겨져 보습이 된다. 그리고 아무런 필요가 없게 된 전쟁을 수레는 불태워진다.
또는 그것을 이것과 다른 경우에 그의 백성들에 대한 은총 가운데서 그가 행하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그들을 대적하여 행해지고 그들의 파멸을 위해 계획되어진 전쟁을 끝나게 하신다. 그는 그들을 대항하기 위해 당겨진 대적들의 활을 꺾으신다. "무릇 시온을 치려고 제조된 기계가 날카롭지 못할 것이다"(사 54:17). 큰 방패와 작은 방패의 완전한 멸망은 예언적으로 그들의 전쟁 무기가 불타는 것으로써 묘사되어 있는데 (겔 39:9, 10), 그것은 또한 전쟁 무기가 소용없게 되어 쌓아 두게 될 정도로 교회가 완전히 안전케 되고 그 평화가 확고히 지속되리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오랜 전쟁이 좋은 결과로 끝나고 것은 바로 하나님의 행적이며, 우리는 이것을 경탄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시하여야 한다.
Ⅱ. 성도들의 왕으로서, 그리고 "그의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해야 한다(계 15:3). 그는 큰 일을 행하시며 또 행하실 것인데, 그것은 다음 두 가지를 위해서이다.
1. 그의 영광을 위해서(10절).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됨을 알지어다."(1) 그의 대적들로 잠잠히 있어 더 이상 위협하지 말고 그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그들보다 무한히 높으시어 그들이 도저히 겨룰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두려워하도록 하라. 그들로 더 이상 분노하지 않게 하라. 그것은 모두 헛된 일인 것이다. "하늘에 계신 자가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그리고 그의 이름과 영광을 대적하는 그들의 모든 무기력한 악의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자산의 백성 가운데에서만이 아니고 열방 중에서 높임을 받을 것이며, 그의 교회에서만이 아니고 이 세계에서 높임을 받을 것이며 그들 자신의 방법을 강구하고 자신의 뜻대로 행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높임을 받으시리라는 것을, 그가 그의 방법을 갖고 자신의 뜻대로 행하시고, 그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시며, "그들이 교만하게 행하는 가운데에서 그들보다 위에 계시며, " 또한 그들로 하여금 그의 그러하심을 알게 하시리라는 것을 깨닫게 하라.
(2) 그의 백성들도 잠잠히 있게 하라. 그들도 조용하고 침착하게 있게 하라. 그리하여 더 이상 떨지 말고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며, 그만이 하나님이시고 열방 중에서 높임을 받으시리라는 사실을 알아 위로를 삼도록 하라. 그라 혼자서 그의 영예를 지탱하시고, 이 세상에서 그의 뜻을 이행하시며 그 자신의 세력을 도우시게 하라. 비록 우리의 사기가 위축될지라도 낙담하지 않도록 하자.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높임을 받으시고 그것이 우리를 만족케 하리라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위대하신 이름을 위해 역사하실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작은 이름이 어떻게 되는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아버지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며" 하고 기도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것을 간구하셨을 때 그 기도에 대해 주어진 응답을 즉 "내가 그것을 거룩하게 하였고 또 다시 거룩하게 하리라"는 응답을 믿어야 한다. 여호와여, 그렇게 하옵소서, 아멘.
2. 그의 백성들의 안전과 보호를 위해서, 그는 앞에서 개가를 울렸다.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그들은 이에 대해 7절에서, 그리고 다시 11절에서 개가를 부르고 있다. 이것은 노래의 후렴이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도다. 그는 우리 쪽에 서시고 우리 편에 계시며,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의 우두머리가 되시도다.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에게로 도망갈 수 있고 그를 신뢰하여 우리의 안전을 확신할 수 있다." 모든 믿는 자들로 이 속에서 개가를 부르도록 하라.
(1) 그들은 능력의 모든 능력의 하나님의 임재를 얻고 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도다."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다. 왜냐하면 그는 "하늘과 땅의 만군'이라 불리우는 모든 피조물을 마음대로 명하시며, 그의 심판이나 긍휼의 도루로서 그가 원하시는 대로 그들을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최고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의 편이 되시고 우리와 같이 행하신다. 그리고 그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실 것을 약속하셨다.
(2) 그들은 언약에 의해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다. 하나님은 그들을 도울 능력이 있으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도울 명예와 신실함을 지니고 계신다. 그는 야곱의 하나님, 즉 야곱 개인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야곱의 백성들의 하나님이시다. 아니, 모든 기도하는 백성들, 즉 씨름하는 야곱의 영적 후손들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또한 우리의 피난처이시므로 우리는 그에 의해 보호를 받고 그의 안에서 만족을 얻는다. 그리고 외적으로 싸움이 있을 때 그의 섭리로 우리의 안녕을 지키시며, 내적으로 두려움이 있을 때 그의 은혜로 우리 마음을 평안케 하시고 견고케 하신다. 만군의 여호와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또 앞으로도 계실 것이다. 즉 우리가 피난처가 되셨고, 지금도 되시며, 또 앞으로도 되실 것이다. 원문은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으며, 거기에 "셀라"라고 덧붙이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이것을 주목하여 그 위로를 취하라. 그리고 이렇게 말하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