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의 자비를 감사함 (시편 44:1-8)
"마스길" 즉 "교훈의 시"라고 표제가 붙은 거개의 시편은 슬픈시라고 보는 자들이 있다. 그 이유는 고난이 교훈을 주며 심령의 슬픔은 훈계에 대한 귀를 열어 주기 때문이다. "주께서 시련을 내려서 가르쳐 주시는 자는 복된 자이다."
이 구절에서 교회는 비록 현재 유린당하고는 있으나 그 승리의 날들을, 즉 하나님 안에서 누렸던 개선의 시절과 교회의 대적에게 거두었던 승리의 시절을 상기하고 있다. 이것은 본문에서 광범위하게 언급하고 있다.
1. 현재의 불행을 더 뼈저리게 하는 일로서, 승리의 월계관을 줄곧 써 왔던 자들의 목에 걸린 굴종의 멍에는 그들을 더욱 무겁게 내리누르게 마련이다. 하나님의 불쾌를 표시해 주는 증거는 그의 은총을 나타내는 표상에 오래도록 익숙해 왔던 자들에게는 더욱 비탄스런 일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2. 그렇지만 하나님은 다시금 저희의 포로됨을 돌리키시고 자비로써 저희에게 돌아오시리라는 것을 희망으로 삼도록 하라는 격려이다. 따라서 그는 기도와 안락한 기대를 이전의 긍휼하심에 대한 자기 기록과 뒤섞고 있다.
다음 사실에 대해 살펴보기도 하자.
Ⅰ. 하나님께서 저들을 위해 이전에 베푸셨던 큰 일에 대한 저들의 기념.
1. 일반적으로(1절). "주께서 우리 열조의 날에 행하신 일을 저희가 우리에게 이르었나이다."(1) 섭리의 많은 작업이 여기에서는 단 한 가지 일로 표현되어 있다. "즉 "그들은 당신께서 행하신 일을 우리에게 말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 안에는 놀라우신 조화와 통일성이 있기 때문이며, 많은 바퀴가 단 하나의 바퀴를 이루고(겔 10:13) 많은 일들이 한 가지 일을 이루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경이로운 업적을 기록하며, 그 기적들에 대한 지식을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것은 각 시대가 후손들에게 지우는 부채이다. 우리 앞에 살았던 자들은 저희 시대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우리에게 말했고, 우리는 우리 시대에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우리 뒤에 나는 자들에게 말해 주어야 한다. 또 그들은 그들을 계승하는 자들에게 그와 같은 공평한 일을 행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대대로 주의 행사를 칭송"하고(145:4) "아비가 그 자녀에게 그의 신실을 알게 해야"할 것이다(사 38:19).
(3)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자신의 시대에 행하신 일을 언급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과 우리들의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의 날들보다 오래 전인 옛적에 행하셨던 일들도 주지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 성서 내에서 예언서의 말씀이 확실한 만큼 역사서의 말씀도 확실한 것이다.
(4) 자녀들은 부모들이 하나님의 놀라우신 기적에 관하여 일러 주는 것을 부지런히 경청해야 하며, 그것을 자기들에게 큰 쓸모가 있도록 기억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
(5) 하나님의 권능과 인자하심에 대한 이전 경험은 현재의 재난을 위해 드리는 기도의 믿음과 강력한 탄원에 대한 강한 지주가 된다. 기드온이 그것을 어떻게 주장했는지 살펴 보라(삿 6:13). "우리 열조가 우리에게 말한 이런 그의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2. 세무적으로 저희 열조가 그들에게 말한 것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께서는 맨 처음 얼마나 놀라웁게 이스라엘을 가나안에 심으셨는가?(2,3절) 그는 이스라엘에게 자리를 제공하시기 위하여 원주민을 축출하셨고 그들을 괴롭히셨으며 추방하셨다. 또 그들을 저희 조상의 칼날 아래 초개와 같이 내어 주셨으며 저희 조상의 활 앞에 추풍낙엽처럼 되게 하셨다.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지휘하에 가나안인들에게서 두었던 많은 완전한 승리는 저들 자신에게 돌아갈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또한 그들은 그 전승의 영광을 주장할 수도 없었다.
[1] 그것들은 저들 자신의 공적에 힘 입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과 무한한 은혜의 덕분이었다. 그것은 "주의 얼굴의 빛으로 하신 일이니, 저희를 기뻐하신 연고니이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고 네 마음의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며"(신 9:5, 6),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셨기" 때문이다(신 7:8). 이 일이 우리에게 대한 칭찬을 적게 허용하면 할수록 그것은 우리에게 더 많은 위로를 주도록 이바지하며,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모든 성공과 발전이 하나님의 은총과 그 얼굴의 빛으로부터 나옴을 알 수 있도록 한다.
[2] 그러한 일들은 저들 자신의 힘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저들을 위해 행사된 하나님 능력의 덕분이었으며, 만약 그의 능력이 아니었다면 저희의 모든 노력과 시도는 아무 성과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저들에게 비록 강력한자들이 많이 있었다고는 하더라도 저들이 그 땅을 소유하게 된 것은 저들 자신의 칼 덕분이 아니었다. 또 저들이 가나안인에게 격퇴되거나 수치를 겪는 일이 없도록 저희를 구해 준 것도 저들의 팔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오른손"과 "팔"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대신해 싸워 주셨으니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저들이 싸움은 허사로 끝났을 것이었다. 저들이 용감하게 싸워 승리하도록 해 주신 것도 하나님이셨다. 농부가 용의주도하게 나무를 심듯 이스라엘을 그 좋은 땅에 심으신분도 하나님이셨으며, 그는 그 열매를 즐겨 시대하시는 것이다(80:8 참조). 이것은 복음의 선포에 의해 그리스도 교회가 세상에 심겨진 사실과 부합된다. 이교 신앙은 가나안인들처럼 갑자기 일시에 축출된 게 아니라 조금씩 놀라웁게도 추방되었고, 어떤 인간의 책략이나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연약한 것이나 미련한 것으로써 그 일을 행하시려고 택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에 의하여 말살되어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영에 의하여 말살되어 갔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영에 의하여 정복하러 오셨으며 정복하시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기억은 반기독교적 독재의 멍에 아래서 신음하는 자들에게는 큰지주와 위로가 되며, 혹자는 (특히 학식 높은 아미랄두스는) 이 시편의 후반부에 나오는 호소가 신약의 바벨론 권세하에 놓인 교회의 사정과 매우 잘 부합된다고 생각한다. 자기의 권세와 인자하심으로 자신을 위해 이 세상에 교회를 심으신 그는 동일한 권세와 인자하심에 의해 반드시 그 교회를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2) 그 좋은 땅의 소유를 둘러싸고 저들을 교란시키려고 기도하던 저희 원수들을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빈번히 물리쳐 주셨던가?(7절). "주께서 우리를 우리 대적에게서 몇 번이고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로 패주하게 하셨으며 수치를 당케 하셨고 이스라엘을 압박하는 열방들에게 대한 심판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일에 증인 되셨다." 기독교회의 박해자들과 교회를 증오하는 자들은 진리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수 없이 수치를 당하여왔던 것이다(행 6:10).
Ⅱ. 이 기록을 그들이 선용했다. 저희가 이전에 하나님께서 저희의 옛 조상을 위해 베푸셨던 큰일들을 참작하고 활용했다.
1. 그들은 하나님을 자기들의 최고의 지고한 주 여호와로 받아들였으며, 그에게 대한 충성을 맹세하였고 그의 보호 하에 투신하였다(4절).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왕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은 예로부터 나의 왕이십니다." 라는 것을(74:12) 교회의 이름으로 고백하고 있다. 즉 하나님은 왕으로서 자기 교회의 평화와 선한 질서를 전제로 하여 자기 교회에게 법률을 제정해 주시고, 그것을 위해 판단해 주시며 그 송사를 변호해 주시고, 그 전투에서 싸워 주시어 교회를 보호하셨던 것이다. 교회는 세상에 있는 그의 나라이다, 교회는 그에게 복종하고 찬사를 그에게 공물로 바쳐야 마땅하다.아니면 시편 기자는 여기서 자기 스스로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왕이십니다. 내가 주께로 가지 않는다면 어디로 가서 내 청원을 드리겠나이까? 내가 요구하는 은총은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의 교회를 위한 것입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서 자기 개인의 이익을 하나님의 백성의 공공복리와 번영으로 승화시키는 것은 모든 사람의 의무이다. 즉 "내가 주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주의 백성을 인도하소서"라고 한 모세처럼(출 33:13) 말해야 하는 것이다.
2. 저들은 곤경에 처할 때는 언제든 구조를 기도로써 항상 하나님께 의뢰하였다. "야곱에서 구원을 베푸소서."여기에서 다음 두 가지에 유하도록 하자.
(1) 저희 소원의 확대. 그들은 구원들을 바라서 기도하는데 이는 하나를 말함이 아니라 많은 구원을 의미한다. 즉 그들의 기도는 저희가 필요로 하는 구원이 얼마나 많든지 간에 그 많은 요구에 대한 충분한 구원을 위한 것이었고, 일련의 구원과 모든 위험으로부터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다.
(2)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저희 믿음의 강도, 그들은 "구원을 행하소서"라고 말하지 않고, "구원을 베푸소서"라고 말하는데, 이는 구원을 행하는 일이 하나님께 얼마나 쉬운 일이며 즉각적인 것인지를 의미한다. 즉 "말씀하소서. 그리하면 이루어지리이다."(백부장의 믿음도 그러한 것이었다. 마 8:8 .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효과적으로 행하실 것임을 의미한다. "권세가진 자처럼 그 일을 명하소서. 그 명령은 이행될 것입니다." "왕의 말이 있는 곳에는 권세가 있다." 더구나 왕 중 왕의 말씀이 있는 곳에서는 더 더욱 그럴 것이다.
3.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였으며 그에게서 승리를 얻었다. 그들은 자기들을 구출한 게 저들 자신의 칼과 활이 아니었다고 고백할 뿐만 아니라(3절), 장래에도 자기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저들 자신의 칼과 활에 의지하지 않겠다고 (6절) 고백하였다.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며 마치 그런 무기가 하나님이 계시지 않더라도 내게 큰 도움이 되는 듯이 그 어떤 군비에도 의지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와는 달리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를 것입니다(5절). 우리는 당신의 힘이 안에서 그 일을 도모할 것이며 오직 당신의 힘만 의지할 것이고 우리 군대의 용사 수효에 의존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께서 우리 편에 계시매, 우리는 이 시도가 성사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주의 이름으로(우리에게 지시해 주시는 당신의 지혜와, 우리에게 힘을 주셔서 강하게 해 주시고 우리를 위해 역사하시는 당신의 권능과, 우리에게 성공을 확보해 주시는 당신의 약속에 의하여,) 우리를 치러 일어나는 자를 짓밟게 될 것입니다."
4. 그들은 하나님을 저희 기쁨과 찬양의 대상으로 삼았다(8절). "우리가 하나님을 자랑하였나이다. 우리는 날마다 그리고 하루 종일 그를 자랑하며, 또 자랑하겠나이다." 산헤립과 랍사게가 히스기야를 공격할 때 그러했듯 저희 대적들이 자기 힘과 성공을 뽐낼 때 그들은 하나님과의 저희 관계와 하나님 안에서 갖는 저희 이익 이외에는 그러한 원수들의 허세에 의하여 자랑할게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자인하였다. 만약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지지하신다면 그들은 온 세상이 덤빈다고 해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되었다."자랑을 하고자 하는 자는 여호와를 자랑할 것이니" 그에게 대한 자랑은 다른 모든 자랑을 영원히 배제할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그를 자랑할 것이니, 이는 저희가 신뢰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그는 신뢰하는 자는 "종일 그를 자랑할지니"이는 그것이 결코 다해지지 않는 주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들은 그 위에다 "그의 이름을 영영히 찬송"해야 할 것이다. 만일 그들이 그 이름의 위로를 받는다면 그들은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환난 (시편 44:9-16)
여기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저희 원수들과 압제자들의 우월한 세력 하에서 당시 그들이 처한 비천하고도 괴로움을 당하는 처지에 대해 하나님께 호소한다. 그런데 그들에게 더 큰 비탄을 안겨 주었던 것은 전까지는 항상 저희 인방들과의 투쟁에서 승전고를 올리며, 수위에 있곤 하던 "그들이" 이제는 짓밟힘을 당하기 때문이었고 저들이 여러 번이나 승리를 거두며 속국으로 삼았던 자들이 이제는 저희의 압제자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계속 보호해 주실 것이며 여전히 번영케 해 주시리란 확신을 가지고서 자기들의 하나님을 자랑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당하고 있던 고난과 수치를 더욱 치욕스럽게 느꼈다. 이제 그들의 호소가 무엇인지 알아 보기를 하자.
Ⅰ. 그들은 자기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은총과 그가 자기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에 대한 일상적 표징을 원하였다(9절). "주께서 우리를 버리셨나이다. 주께서 우리를 물리치시고 우리의 주장을 버리신 것같이 보입니다. 우리에게 늘 베풀어 주시던 주의 배려와 관심을 버리심으로써 우리로 수치를 당하게 하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당신의 은총의 항구성과 영속성을 자랑해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 군대는 여늬 때와 같이 출진합니다만 패배를 당하고 맙니다. 우리는 지반을 확보하는게 아니라 우리가 확보하였던 지반까지도 상실하오니 이는 당신께서 우리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 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당신께서 우리와 함께 진군하셨다면 우리가 어느 쪽을 향하든지 성공을 거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이 낙심하여 비관하게 될 때에는 자기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물리쳐지고 버림받은 것으로 생각하게 되기 쉽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잘못이다."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롬 11:1).
Ⅱ. 그들은 싸움터에서 그들의 대적에게 패배하였다(10절). "주께서 우리를 대적에게서 돌아서게 하시니" 이는 그들이 아이성에서 격퇴를 당했을 때 여호수아가 불평한 대로였다(수 7:8). "우리는 낙담하오며 이스라엘의 옛날 용기를 상실하였나이다. 우리는 늘 우리 앞에서 도주하며 넘어지곤 하던 자들 앞에서 도망하고 넘어지나이다. 그러자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은 우리 진영과 나라를 약탈하나이다. 저들은 저들 자신을 위해 전리품을 취하며 저희가 손댈 수 있는 것은 모두 저희 자신의 소유로 간주하나이다. 바벨론의 멍에를 떨쳐 버리려던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사오며, 오히려 그 일로 인해 기반을 상실하였나이다."
Ⅲ. 그들은 칼에 베여지고 포로로 될 운명에 놓여져 있었다(11절). "주께서 우리로 먹힐 양같이 하시나이다. 그들은 양을 잡듯 우리를 예사로 살해하고 도살자들처럼 그 일을 업으로 삼으며, 굶주린 자가 음식을 먹듯 우리를 죽이는 일에서 즐거움을 느낍니다. 우리는 양이 도살장에 끌려갈 때와 마찬가지로 아주 쉽사리 그리고 별반 저항없이 끌려갑니다. 많은 사람이 살육 을 당하였으며 남은 자들은 이방인들 중에 흩어져서 끊임없이 저희 악의로부터 모욕을 당하거나 불의에 전염되는 위험 속에 빠져 있습니다."또한 그들은 자기들이 사고 팔렸다고 간주하고 그 점을 하나님께 책임지워서 "주께서 주의 백성을 파셨나이다"라고 힐난하는데, 오히려 저들 자신의 죄한테 그 책임을 추궁했어야 마땅했다. "너희는 너희 죄악을 인하여 팔렸느니라"(사 50:1). 여태까지 저들이 자기들에게 환난이 된 그 도구 너머로 시선을 돌리고 하나님을 주목하였으며 더욱이 저이들 극악한 원수들이라고 하더라도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 이외에는" 저들을 칠 권세가 없는 줄로 알았던 것은 옳았다. 그들은 팔린 물건이 산 사람에게 넘기우듯 "자기들을 불경한 자의 수중으로 넘기신" 분은 하나님이셨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주께서는 주의 백성을 무료로 파시며, 저희 가격을 늘이지 않나이다"(이렇게 해독할 수도 있다). 즉 "당신께서는 공매에 의해 값을 제일 많이 부르는 자에게 우리를 처분하시는게 아니라 제일 먼저 값을 제일 많이 부르는 자에게 우리를 처분하시는게 아니라 제일 먼저 우리를 요구하는 자들에게 성급히 파시나이다. 원하는 자는 누구라도 우리를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혹은 우리가 읽는 대로 "주께서 저희 값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셨나이다"라고 해독할 수도 있다. 이것은 만약 그들의 수난에 의하여 하나님의 이익이 어떤 면에서 보장되며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기여야 된다고 확신할 수 있을 때에는 그들이 이 고난을 흔쾌히 참을 수 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그러나 그 일은 정반대였다. 이스라엘의 치욕은 하나님의 불명예로 변하였으니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매매하심으로써 그의 영광을 얻으신 분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그로 인해 큰 상실자가 되었던 것이다(사 52:5; 겔 36:20 참조).
Ⅳ. 그들은 멸시를 받았고 가능한 모든 치욕스런 행위가 그들에게 가해졌다. 그들은 이 일에 있어서도 또한 하나님께 고백하고 있다. "주께서 우리로 욕을 당케 하십니다. 주께서 치욕을 수반하게 될 재난들을 우리 위에 내리시며 우리를 대적하는 독설을 저희에게 허락하십니다." 그들이 불평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그들은 조소와 희롱을 당하였고 태양 아래서 가장 보잘 것 없는 백성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이다. 저들의 고난은 저희의 치욕으로 변하였고 그들이 당하는 고생으로 인하여 그들은 조롱거리가 되었다.2. 저들이 멀리할 수 없는 이웃이, 주위에 있는 자들이 그들에게 가장 모욕적이었다는 것이다(13절).
3. 이방인들, 즉 이스라엘 국민에게는 낯선 자가 되고 약속의 계약에는 이질적인 백성들이 되는 자들이 저들의 몰락에 으쓱거리며 그들을 말거리로 삼고 그들에게 머리를 흔들었다는 것이다(14절).
4. 그 비난은 항구적이었고 끊임없었다는 것이다(15절). "나의 능욕이 종일 내 앞에 있나이다." 전체적으로 교회가, 개인적으로는 시편 기자가 계속 놀림을 받았고 원수의 모욕으로 부단히 괴로움을 당했다. 내리막 길에서 계속 떨어지고 있는 자에게 대해서는 누구나가 "그를 타도하라"고 부르짖는 법이다.
5. 그것은 매우 비통하였고 어떤 의미에서도 그를 압도하였다는 것이다 "수치가 내 얼굴을 덮었나이다." 그는 죄를 인해 얼굴을 붉혔다. 아니, 그보다도 그는 하나님께 끼쳐드린 불명에 때문에 부끄러워하였으니, 그렇다면 그것은 성스러운 부끄러움이었다고 할 수 있다.
6. 그 일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치욕이 되었다는 것이다. 원수와 복수자가 그들에게 퍼부은 비난은 바로 하나님께 대한 노골적 모독이었다(16절; 왕하 19:3). 그러므로 바로 거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나타나 주시리라는 것을 믿을 만한 강력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관대하고도 솔직한 마음에게는 비난과 중상보다 더 지독한 고통이 없듯이, 거룩하고도 은혜로운 영혼에게는 하나님께 가하는 모독과 불명예 보다 자기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없다.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간청 (시편 44:17-26)
크게 고난을 당하고 압제를 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여기에서 하나님께 의뢰하고 있다. 그가 아니라면 그들이 갈 수 있는 자가 또 누가 있겠는가?
Ⅰ. 저들의 완전성에 대한 호소를 통하여 하나님만이 절대적으로 오류가 없는 재판관이시며, 정녕코 그들이 완전함에 대한 보상자가 되실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다음 두 가지 일에 대한 증인이 되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1. 비록 저들이 이런 혹독한 일을 당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과 저희 임무에 밀착하였다는 사실(17).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니 그것은 아마 최대로 악한 일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 하였으며 주에 대한 생각을 떨쳐 버리지 않았고 주에 대한 경배를 유기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우리는 우매하게 행하였음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당신을 물리치고 다른 신을 받아들일 만큼 주의 언약을 어기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상 숭배자들이 우리의 정복자였으나 그 까닭으로 해서 우리가 저들의 우상과 우상 숭배를 더 낫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습니다. 당신께서는 비록 우리를 버리시고 우리에게서 발뺌하신 것같이 보이셨지만 우리는 그렇다고 해서 당신을 잊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이 오래도록 당하였던 고통은 매우 큰 것이었다. "우리는 시랑(豺狼)의 처소에서, 승냥이와 이리처럼 사납고 광포하며 잔인한 사람들 가운데에서 심하게 상했나이다. 우리는 사망의 그늘로 덮였사옵니다. 즉 죽음에 못지 않는 깊은 우울증과 염려 아래에 있나이다. 우리는 애매모호한 중에 싸여져 있으며 산 채로 매장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이와 같이 우리를 상하게 하시고 덮으셨습니다. (19절). 그렇지만 우리는 당신께 대한 어떤 야속한 생각도 품지 않았으며 당신께 대한 봉사로부터 회피할 생각도 해보지 않았습니다. 비록 당신께서는 우리를 살해하셨지만 우리는 계속하여 당신을 의지 하였나이다. 우리 마음이 퇴축지 아니하였나이다. 우리는 우리의 애착심을 주께로부터 은밀히 회수해 들이지 않았으며, 우리의 경건한 예배나 일상 행위에 있어서도 당신께서 우리에게 걸으라고 지정해 주신 길, 곧 주의 길을 떠나지 않았읍니다.(18절). " 마음이 퇴축하면 발걸음은 곧 퇴보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로부터 떠나고자 하는 생각을 일으키게 하는 것은 불신앙의 악한 마음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환난 중에도 우리의 온전함을 계속하여 굳게 보존한다면 그 어려움이 아무리 긴박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괴로움을 더 잘 견디어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고난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로부터 우리를 쫓아내지 못하는 동안에는 하나님 안에서 얻는 우리의 위로도 내몰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한 그도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다.그들의 완전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증인으로 삼는데, 하나님의 전지하심은 위선자에게는 큰 공포가 되나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는 그에 못지 않게 큰위로가 된다(20,21절).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잊으셨다는 구실 하에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렸거나, 우리 불행 중 우리를 더 도와 줄 법한 자로 보여서 이방 신에게 우리 손을 폈더라면 하나님께서는 이를 더듬어 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그는 우리가 최대의 주의력과 최대의 열성으로 탐색해내어 알고 있는 것보다 그것을 더 완전하고 명백하게 아시지 않겠습니까? 그는 그 일을 판단하시고 그것에 대한 책임 추궁을 위해 우리를 호출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을 망각함은 마음의 죄이며 이방 신에게 손을 펼침은 흔히 은밀한 죄악 이었다(겔 8:12). 그러나 마음의 죄와 은밀한 죄악도 하나님께는 알려진 죄이며 반드시 계산될 것임에 틀림 없다. 왜냐하면 "그는 마음의 비밀도 아시는 분"이시며 따라서 말과 행실에 대해 절대 무오한 재판관이시기 때문이다.
2. 그들이 이런 가혹한 일들을 겪게 된 것은 저희가 하나님과 저희 의무에 밀착하였기 때문이라는 사실(22절).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니, 이는 우리가 당신과 관계를 맺은 상태에서 머물고 있으며, 당신의 이름으로 불리우고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다른 신들을 경배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예언의 영은 이점과 그리스도의 증거를 위해 죽음조차 불사하던 자들을 관련을 지으셨으며, 그것은 그리스도께 적용되고 있다(롬 8:36).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하였고 좀체 사라지지 않는 사망에게 잡혀서 하루 종일 죽음을 당하는 중에 있었다. 이 일은 너무나 보편적으로 행해졌기 때문에 사람이 크리스챤으로 될 때에는 스스로를 "도살할 양같이"여겼던 것이다.Ⅱ. 저희가 현재 당하고 있는 곤경에 관한 청원을 통하여. 그 청원은 하나님께서 그 자신이 정하신 때에 자기들을 위해 구원을 베풀어 주십사 하는 것이었다.
1. 저희 요구는 매우 간절하였다. "깨소서! 일어나소서!(23절)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를 구속하소서!(26절) 우리의 구원을 위해 속히 그리고 강력하게 오소서. 주의 용력을 내사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80:2)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팔았다고 불평하였는데(12절), 여기에서는(26절) 자기들을 구속해 주시도록 기도드리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호소를 드리지 아니하고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호소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를 파신다면 우리를 구속할 분도 그분밖에게 안계신 것이다. 찢은 바로 그 손이 고치지 않으면 안 되며, 쳤던 바로 그 손이 싸매지 않으면 안 된다(호 6:1). 그들은 "주께서 우리를 버리셨나이다"고(9절) 불평하였으나 여기에서는 "우리를 영영히 버리지 마소서"(23절). "우리가 마지막에 가서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다.2. 그 간언은 매우 감동적이었다. "주께서는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23절)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분께서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신다. 그러나 그가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 즉시 나타나지 않으시는 때에는 저들이 그가 주무신다고 생각하기가 쉽다. 이 표현은 비유적이다(78:65 같이,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다가 깬 자 같으셨다")그러나 그것은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께 적용할 만하였다(마 8:24). 그의 제자들이 폭풍우 속에 있었을 때 그는 주무시고 계셨는데 제자들은 그를 깨우며 말하기를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했던 것이다. "어찌하여 우리가 당신과 당신의 얼굴의 빛을 볼 수 없도록,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나이까?" 혹은 "당신께서 우리와 우리의 고통을 보지 않으시려고 주의 얼굴을 가리우십니까? 주께서는 우리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고 계신 것 같습니다. 이유는 이 일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열려진 길을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3. 그 탄원은 매우 온당하였다. 비록 그들이 저희 온전함에 대해 양심의 증거를 가지고는 있었을지라도, 그들은 자신의 공적과 의로움을 주장한게 아니라 불쌍한 죄인의 탄원을 역설하였던 것이다.
(1) 저들 자신의 참상, 이것은 하나님으로 저들을 불쌍히 여기에 하였다(25절). "우리의 영혼은 우세한 비탄과 공포 아래에서 진토에 구푸렸나이다. 우리는 가장 비천한 동물, 즉 기어 다니는 것이 되었나이다. 우리 몸에 땅에 붙었나이다. 우리는 스스로 일어날 수 없으며 우리 자신의 수그러진 영혼을 소생시키지도 못하고 우리의 낮고 슬픈 상태에서 스스로 회복하지도 못하며, 노출당한 채로 누워있다가 모든 모욕적인 원수에게 짓밟힘을 당합니다."
(2) 하나님의 자비.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우리를 구속하소서. 우리는 당신의 성품의 선하심에 의존하는데 이는 주의 이름의 영광입니다(출 34:6). 또 우리는 언약에 의하여 다윗의 모든 영적 자손들에게 전달되는 그의 그러한 확실한 자비들에 의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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