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시편 04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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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

호소와 탄원 (시편 43:1-5)

다윗은 여기에서 믿음과 기도에 의하여 하나님께, 그의 재판관이시며, 또 힘과 인도자와 기쁨과 희망이신 하나님께 적당한 사랑의 표현과 함께 의뢰하고 있다.

Ⅰ. 그의 심판관으로서, 즉 그의 의로운 심판관으로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심판하시리라 는 것을 알았고, 또 (그는 자신의 정직함을 의식하고 있었으므로)자기를 위해 심판해 주실 것도 알았다(1절).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고 내 송사를 변호하소서." 거기에는 그를 고발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그가 피고가 된다. 부당하게도 유죄 판결과 정죄를 받은 저희의 법정으로부터 그는 최고사법 재판소인 하늘의 법정으로 상고를 하는데, 그것은 그에게 내린 저들의 판결을 번복시켜 주시며 그의 결백이 드러나도록 해 달라는 기도이다. 거기에는 그에게 가해한 자들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그가 원고이며 억울한 일을 복수해 주시는 그에게 자기의 진술을 제시하고 자기와 그들 위에 공의를 나타내 주십사고 기도드리고 있다.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살펴 보자.

1. 그가 이와 같은 투쟁을 벌인 그 원수들은 누구였던가? 여기에는 그가 "경건치 않은 나라"혹은 "자비하지 않은 나라"라고 칭하는 일단의 죄많은 무리들이 있었다. 무자비한 자들은 경건치 못한 자들로 판명된다. 왜냐하면 자기 주인에 대해 경외감이나 사랑을 조금이라고 품고 있는 자들이라면 그 동료되는 종들에 대해서도 일말의 축은 지심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악인들 중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나쁜 자가 있으니 그는 사기성이 농후하며 불의한 자였는데, 아마 십중 팔구는 다윗에게 친절심을 보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아주 표리부동하고도 부정직하게 대하였던 사울을 가리킬 것이다. 그가 의미하는 인물이 압살롬이라고 하더라도 성격 또한 별반 더 나을 것도 없었다. 지옥밖에그런 나쁜 자들과 나쁜 나라가 존재하는 한 아직 천국밖에있는 선량한 자들이 가혹하고도 비천한 대우를 경험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혹자는 다윗이 예언의 영에 의하여, 바벨론 유배시에 있던 유대인이 사용하도록 하기 위해 이 시편을 지었으며 본문에서 의미하는 경건치 못한 나라는 갈데아라고 해석한다. 이 성구는 그들에게 매우 적절히 적용할 만하며, 그것이 단지 유사한 성서로서만 가능한 것은 성서의 어느 부분도 사사로운 해석을 허용치 않기 때문이다. 다윗이 그것을 의미했는지의 여부를 차치하고라도 하나님께서 저희의 사용을 위해 그것을 의도하셨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2. 저들과 관련된 그의 기도는 무엇인가? "나를 판단하소서." 그는 하나님이 죄 때문에 자기와 벌이신 언쟁에 대하여는 "내게 대한 심판에 착수하지 마소서. 그러시면 내가 유죄로 판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자기 원수들이 자기와 벌인 다툼에 대해서는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왜냐하면 나는 내가 의롭다고 인정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저들에게 향하여 내송사를 변호하소서. 내 편을 드시고 나를 위하여 주의 섭리 안에서 나타나 주소서"라고 기도한다. 정직한 사유를 가지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변호해 주시리라고 기대해도 좋다. "내게 대한 저들의 뜻이 얻어지지 못하도록 내 주장을 옹호해 주셔서 나를 저들에게서 건지소서." 비록 우리의 적들이 멸망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만약 우리가 구출되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우리이 송사가 충분히 변호받은 것으로 간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

Ⅱ. 그의 힘으로서, 그의 전능한 힘으로서 그는 하나님을 그렇게 보고 있다(2절).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오, 내 하나님이시며, 내 힘이시니, 내 모든 힘은 당신께로서 유래하며 당신안에서 나는 스스로 강하게 되나이다. 당신께서는 나를 자주 강하게 하셨으며 당신이 없다면 나는 물과 같이 약해져서 당신을 위해 전혀 아무 일도 행할 능력이 없으며 견딜 능력도 없습니다." 다윗은 당시 영적 기쁨이 결여된 채로 슬퍼하며 다녔으나, 하나님이 그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이심을 발견하였다. 설령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스스로 위안을 얻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그에게 계속 머무를 수 있으며, 영적 즐거움이 부족할 때에는 영적 지지를 받을 수 있다. 다윗은 여기에서 이 일을 가지고 하나님께 탄원하고 있다. "주께서는 내가 나의 힘으로서 의존하고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도 어찌해서 당신께서는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것은 잘못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저들이 자신들의 처지에 대해 어떤 울적한 염려를 하든지 간에 자기를 신뢰하는 자들을 결코 버리시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내 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내 대적은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강성합니까? 그리고 나는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녀야 합니까?" 교회의 하나님이 소유하시는 전능한 능력과 화해시킨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의 모든 원수가 그의 발등상이 되는 날에는 그들과도 화해가 이루어질 것이다.

Ⅲ. 그의 안내자로서 그의 충실한 길잡이로서(3절). "나를 인도하사 주의 성산에 이르게 하소서." 그가 기도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께서 섭리에 의하여 자기를 추방으로부터 돌아 오게 하시며, 하나님의 성소가 주는 특권을 다시금 자유로이 향유할 수 있도록 그 길을 열어 주십사고 하는 것이다. 그의 마음은 자기 가족의 위안이나 자기 궁정의 기호물이나 오락물에 쏠린게 아니라 "성산과 장막"을 향하고 있다. 그는 전자와 같은 것들은 없어도 견딜 수 있으나 하나님의 장막만은 다시 보고 싶어 못견딜 지경이다. 그의 눈에는 그 장막보다 더 사랑스럽게 보이는 것은 없다. 그는 거기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이를 위하여 '그는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소서. 나로 하여금 이것을 당신의 은총의 열매로서 얻게하소서. 그것은 진리니이다"라고 기도한다.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선과 그의 약속에 포함되어 있는 선 이상을 바랄 필요가 없다. 그 자비와 진리는 충분하며 전부가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들을 보게 될 때 우리는 자신이 매우 안전한 관리하에 있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인도하시는 자들을 그의 성산으로 인도하시며 그의 장막에 이르도록 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고 자처하면서도 제도화된 의식에 등을 돌리는 자들은 분명히 자기를 기안하는 자들이다.

2. 하나님은 그의 은혜로써 자신을 그와 친교하게 하실 것이며, 저 다른 세상에서 그의 모습을 대면하고 그를 향유할 수 있도록 자신을 준비시키시라는 것이다.

일부 유대인 기자들은 여기의 "빛"과 "진리"라는 말을 구주 메시야와 그의 선구자 엘리야로 이해한다. 이들은 구약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서 오셨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빛과 진리를 위하여, 즉 진리와 빛의 성령을 위해 여전히 기도를 해야 할 것이니, 빛과 진리의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신체적 현존의 결여를 보충해 주사 우리를 경건의 신비 속으로 인도하시며 하늘에 이르는 길로 안내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에 그의 빛과 진리를 보내실 때에는 이 빛과 진리가 우리의 모든 가늠과 기대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기도에 있어서도 우리를 천상계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의식적으로 그 빛과 진리를 따른다면 그들은 정녕코 우리를 위에 있는 성산으로 이끌어 줄 것이다.

Ⅳ. 그의 기쁨으로서, 그의 대단한 기쁨으로서 만일 하나님께서 그를 자기의 장막으로 인도해 주신다면 만일 그의 이전 자유를 회복해 주신다면 그는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단에 나아가겠나이다"(4절). 그는 그의 지극한 기쁨이 되시는 하나님께 가능한 한 가까이 접근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다음 사실에 주목하도록 하자.

1. 장막에 나아오는 자들은 제단으로도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종교 의식에 나아오는 자들은 스스로 자격을 갖춰야 하며 그리고 나서 특별한 의식, 즉 아주 감동적이고도 구속력 있는 제전에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면 갈수록 우리는 하나님께 더욱 더 밀착하게 되고 좋게 된다.

2. 하나님의 제단으로 나아가는 자들은 그 일 가운데에서 자기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되며, 가슴으로 즉 진심으로써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우리가 의식에 참석하면서도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는다면 거룩한 의식에 참례하는 일은 허사가 되는 것이다.

3.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은 저들의 지극한 기쁨으로서, 저희의 미래의 지복으로서 뿐만 아니라 현재적 기쁨으로서 그에게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통상적 기쁨이 아닌 비상한 기쁨으로서, 감각과 시간의 제약을 받는 모든 기쁨을 훨씬 능가하는 기쁨이 되신다. 원문에 나오는 성구는 매우 강조적이다.-즉 "내 기쁨의 즐거움 되신 하나님께," 혹은 기쁨의 극치되신 하나님께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의기양양해 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하나님은 그 일의 기쁨의 되셔야 한다. 우리 일에서 갖는 모든 희락은 하나님에게서 종결되어야 하며 우리의 모든 기쁨은 그 선물을 꿰뚫고 그 선물의 시여자에게까지 이르러야 하는 것이다.

4. 우리가 우리의 지극한 기쁨이 되시는 하나님께 나아올 때 그에게서 얻는 위로는 하나님, 즉 우리 하나님이 되신 그에게 드려야 할 찬송의 내용이 되어야만 한다.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다윗은 수금 타기에 아주 뛰어났었으며(삼상 16:16, 18), 그는 자기가 잘 하는 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자 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최선의 것으로써 찬양 받으셔야 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가 이와 같이 찬송 받으셔야 마땅한 것은 그가 최선의 분이시기 때문이다.

Ⅴ. 그의 희망으로서, 그의 결코 쇠하지 않으실 소망으로서(5절). 여기에서 다윗은 전처럼 자기의 낙심과 낙담에 대하여 자기 자신과 언쟁을 벌이는데 자기가 그런 것들에게 굴복한 것은 나빴다고 자인하고 그가 그렇게 할 만한 이유는 없었다고 자백하고 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는가?"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과(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그의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과 함께 영화를 누리는 일에 대해 자기가 품었던 믿음에 의한 기대 속에서 스스로를 진정시키고 있다. "그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이시다." 그 점은 우리가 아무리 역설을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니, 이는 그것이 우리가 살고 죽는 터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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