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사랑 (시편 42:1-5)
우리의 주된 선과 행복으로서의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사랑은 경건의 능력이요, 종교의 생명력이자 영혼이 된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모든 외적 고백과 실행도 껍데기와 시체에 불과하다. 이제 여기서 우리가 대하게 되는 것은 바로 그런 사랑에 대한 표현들이다.
Ⅰ. 사랑의 날개를 타고 거룩한 열망 안에서 여호와와 그의 이름의 기억을 향해 위로 솟아오르며, 갈급해하는 거룩한 사랑(1,2절). "내 영혼이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하오며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 영혼이 구하는 것은 하나님 이상의 그 아무 것도 아니요, 주에게서 더욱 더 많은 것을 구하나이다."
1. 다윗이 하나님께로 향한 그의 사무친 열망을 이렇게 표현했던 것은 어느 때였던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때였다.(1) 그가 하나님께 시중을 들 수 있는 외면적 기회로부터 차단을 당했을 때, 그가 하나님의 집뜰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요단 저편 땅으로 추방당하였을 때였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자비의 결핍에 의해 우리가 그 자비의 가치를 알 수 있도록 효과적으로 가르쳐 주시며, 우리에게 대한 은혜의 방편을 중단하심으로써 그 방편에 대한 우리의 식욕을 더욱강하게 자극하신다. 우리에게 만나가 지천으로 많을 때는 그것에 물리기 쉽지만, 만일 그 만나의 기근을 알게되면 그것은 우리에게 매우 귀하게 여겨질 것이다.
(2) 그가 하나님 안에서 얻고자 하였던 대부분의 내적 위로를 박탈당하였을 때였다. 그는 그 때에 슬퍼하며 갔지만 계속 갈망하였다.
만약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 인에 역사 하셔서 그를 향한 진지하고도 간절한 소망을 불러 일으키신다면, 우리가 이따금씩 하나님 안에서 얻는 황홀한 즐거움들이 부족한 때에라도 이로부터 위안을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대한 비탄은 하나님 안에서 갖는 기쁨에 못지 않게,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데에 대한 확실한 증좌이기 때문이다. 시편 기자는 자기를 아프도록 뒤흔들었던 그의 의심과 불안과 비탄을 기록하기 전에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그의 주요 복으로 간주하였고, 따라서 자기 마음을 하나님께 두고 그에게 소망을 두었으며 하나님에 의해서 살거나 죽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우선 이와 같이 닻을 내림으로써 푹풍을 이겨내는 것이다.
2. 그가 열망하는 대상은 무엇이며 그가 이처럼 갈급해 한 것은 무엇인가?(1) 그는 하나님을 갈망하고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해 하며, 종교적 의식 그 자체를 갈급하는 것이 아니고 그 의식의 대상인 하나님을 갈구한다. 은혜로운 영혼은 만약 그곳에서 하나님을 직접 만나지 못한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궁정에서도 거의 만족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그를 발견할 수 있는 곳이 어딘지 알 수 있다면 좋으련만! 만약 알기만 한다면 그의 은총의 표상과 그의 영이 주시는 은혜와 위로, 그리고 그의 영광의 보증을 더욱 더 많이 얻을 수 있을 텐데!"
(2) 그는 여기에서 생존해 계시는 하나님이신 하나님께 그의 눈을 돌리는데, 그 하나님은 그 자신 안에 생명을 가진 분이시며 생명의 원천이시고 자기 소유가 되는 자들에게는 모든 행복이 되어 주시는 분이시다. 또한 그는 인간의 수제품인 우상에 대적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사용할수록 닳아 마멸되어 버리는 이 세상의 모든 빈사의 위안물에 대해서도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산 영혼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에서는 그 어떤 곳에서도 저희의 안식을 결코 취할 수 없을 것이다.
(3) 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뵈옵기"를 갈망하고 있다. 즉 그 자신의 성실성을 자각하고 있는 자로서 자기가 하나님께 알려지기를 갈망한다. 주인 앞에 나타나는 종과 같이 하나님께 시중을 들고 그에게 경의를 표하며 그의 명령을 받고 싶어하고, 우리의 판단이 유래하는 장본인이신 그에게 진술을 하기를 갈망한다. 하나님 앞에 나타난다는 것은 사특한 자에게는 두려움이 되는 것만큼 고결한 자에게는 많은 염원이 된다. 시편 기자는 그가 희생을 걸며지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알현하러 나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으니 "하나님 앞에 빈 손으로는 아무도 나아오지 못한다"는 율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나아오기를 갈망하여 그러한 의무를 기꺼이 감수하려고 한다.
3. 이 열망의 정도는 어떠한가? 그의 갈망은 매우 간곡하다. 헐떡이는 것은 그의 영혼이며 목이 말라 갈급해하는 것도 그의 영혼인데, 이는 그의 열망의 진지성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그 강도를 의미하기도 한다. 베들레헴의 우물물에 대한 그의 동경도 이에는 비할 바가 못되었다. 그는 이것을 더워서 목마른 "사슴" 특히 쫓기던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으로 비유하였다. 이와 같이 은혜스러운 영혼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충심으로 원한다. 이처럼 그 교제가 결여되고, 그 교제가 빠져 있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에서도 만족을 발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 기회가 도래하는 때에도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하늘 나라에서 하나님을 완전히 향유하기까지는 계속 갈급해 하는 것이다.
Ⅱ. 하나님께서 당장 물러나시고 그가 엄숙한 의식의 은전을 맛보지 못하게 됨을 슬퍼하는 거룩한 사랑(3절). "하나님의 전으로부터 떠나 있도록 이렇게 강요당하는 동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그의 신세는 슬픔에 찬 것이었으되 그는 그것에 순응하였고 그 결과를 받아들이고는 슬픔의 표시로 답하였다. 제왕이자 선지자였던 그였지만 하나님 전의 위로를 얻지 못하게 되었을 때에는 오열을 삼키는 선지자가 되었다. 그의 눈물이 그의 음식과 뒤섞였다. 아니 그의 눈물은 "주야로 그의 음식"이 되었다. 그는 그 자신의 눈물로 배를 불리며 눈물의 향연을 벌였으니 그것은 그럴 만한 정당한 사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유(類)의 슬픔으로 자기 마음이 그토록 감동된 것을 보았을 때 그것은 그에게 만족이 되었다. 그는 성소를 이별함에 있어 눈물을 한 두 방울 흘리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고, 성전에 작별을 고하는 마당에 있어 고별의 기도를 체읍하며 드리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자기 즐거움의 장소로부터의 부재를 이와 같이 계속 강요당하고 있는 한 그는 쳐다보지도 않고 주야로 울기만 하였다.
공중 예배 의식의 은혜를 박탈당한 자들은 항상 그 예배 의식을 그리워한다. 그러므로 그런 자들은 그 의식들이 자기들에게 다시 복구되어질 때까지 그들의 결핍을 늘 슬퍼해야만 한다. 다음의 두 가지 일이 그의 비탄을 심화시켰다.
1. 그의 원수들이 그를 놀려대는 데에 수단으로 삼은 비난, "사람들이 종인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지 있느뇨? 하도다."(1)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임재의 표상인 법궤로부터 떠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방 우상 신들에 의거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판단하여, 그가 자기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우리에게서 우리의 성서와 목사와 엄숙한 집회를 강탈하는 것이 곧 우리 하나님을 빼앗아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비록 하나님은 성경과 목회자들과 성회에 우리를 묶어 두시기는 하시지만 하나님 자신은 그것들에게 속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법궤가 어디에 있으며 그것을 어디서 발견할 것인지 모르는 때에도,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며 그를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를 알고 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그곳에는 하늘로 향해 열려 있는 길이 있는 것이다.
(2) 또한 하나님께서 그를 구출해 내시기 위해 즉시 나타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를 포기하신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그것도 또한 잘못 생각한 것이었다. 성도들이 그들의 다른 모든 친구들을 잃어버렸다고 해서 저들의 하나님을 상실했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에게 대한 이런 야비한 오명을 뒤집어 씌움으로써 그들은 엎친 데 덮치는 격으로 고통을 당하는 자에게 고통을 가하였고 게다가 그것은 저들이 노리는 바였다. 은혜로운 영혼에게는 하나님 안에서 갖는 그들의 희망과 신뢰를 뒤흔드는 일보다 더 비탄스러운 것은 없는 것이다.
2. 그의 이전 자유와 향유물 에대한 기억(4절). "아들아, 네 좋은 일들을 기억하라!" 고 함은 나쁜 일들을 더욱 악화시키는 일이며, 우리의 회상력과 기대감은 현재 우리가 처한 불평 불만에 더 한층은 슬픔을 가중시킨다. 다윗은 옛날을 기억하였고 그러자 "그의 마음이 상하였다." 그는 녹아 없어졌고 생각은 그의 가슴을 거의 부수어 버렸다. 그는 그의 내부에서 슬픔으로 그의 영혼을 쏟았으며 그러고 나서는 하나님 앞에서 기도로 그의 영혼을 쏟았다. 그러나 그의 심령을 이토록 아프게 녹여 버린 것은 무엇이었던가? 이제 막 그가 자기 집이나 궁정으로부터 추방된 그에게 고통을 주었던 것은 그 궁정에서 받던 즐거움이나 자기 자신의 집에서 누리던 향응에 대한 추억이 아니라, 그가 이전에 하나님의 전에 나갈 수 있었던 자유로운 접근과 그곳에서 신성한 제의에 참예하며 누리던 즐거움에 대한 기억이었다.
(1) 비록 그 당대에는 천막에 불과하였지만 그는 "하나님의 집으로 갔다." 더구나 만약 이 시편 42편이 다수의 사람들이 생각하듯 그가 사울에게 핍박당하던 때에 기록되었다고 한다면 법궤는 당시에 개인의 사가에 있었을 것이다(삼하 6:3). 그러나 그 장소의 지저분함이나 미천함이나 불편함도 신적 임재의 신성한 상징에 대한 그의 존중심을 감소시키지는 않았다. 다윗은 조정의 신하였고 제후였으며 존귀한 자였고 사업가였지만, 사울과 사울의 주요 신하들은 그것을 찾지 아니하던 그 시대에도(대상 13:3). 그는 하나님의 집에 참배하는 일과 공공의 예배 의식에 참가하는 일에 매우 열심이었다. 타인들은 무엇을 하든지 간에 다윗과 그의 집은 여호와를 섬기고자 하였다.
(2) 그는 "무리와 동행하였으며." 하나님께 시중드는 일로 궁중의 선두에 나서는 일이 자신의 위신에 손상을 끼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가 무리와 함께 동행했다는 것은 그에게 더욱 기쁨을 보태었던 것이니, 그러므로 이것은 그가 지금은 그 기쁨을 상실하게 됨을 크게 비통해한다는 것으로 이중적으로 언급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봉사는 다다익선이다. 하나님께 대한 봉사를 많이 하면 할수록 그것은 더욱 하늘 나라와 같아지며 성도와의 교제에 의한 우리 위로에 현저한 도움이 된다.
(3) 그는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갔으니, 그의 심중의 기쁨과 찬송뿐만 아니라 외적으로도 자기 기쁨을 선포하며 자기 하나님께 대한 높은 찬미를 발하였던 것이다.
공공 예배 의식에서 하나님을 섬길 때 우리는 그 일을 행함에 있어 즐거움과 감사함으로써 수행해야 하며, 그에게 접근할 수 있는 우리의 자유에 대해 우리 스스로는 위로를 취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만한 이유를 가진다.
(4) 그는 성일(聖日)을 지키러 갔으며, 이 거룩한 날을 헛되이 환락과 기분 전환을 위해 지킨 것이 아니라 경건하게 행하였다. 엄숙한 날은 엄숙한 집회 안에서 가장 안락하게 보내지는 것이다.
Ⅲ. 소망을 가진 거룩한 사랑(5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는고?" 그의 슬픔은 아주 충분한 이유가 있었으나, 슬픔도 그 온당한 한도를 초과해서는 아니 되었으며 그의 의기를 저상시킬 만큼 득세하여서도 안 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구제를 위하여 그 자신의 영혼과 의논한다. "자! 오라, 내 영혼아! 나는 고통 중에 있는 네게 할 말이 있다." 여기에서 다음 사실에 대해 생각해 보라.
1. 그 원인. "무거운 짐 아래에서 허리가 구부려지고 주저앉으려는 자처럼 너는 낙심해 있다(잠 12:25). 너는 혼란고 무질서 속에서 불안해 하고 있다. 너는 현재 왜 그런가?" 이 말은 심문하는 질문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즉"이 불안의 이유를 충분히 알아 보고 그것이 정당한 사유가 되는지 안 되는지 살펴 보아라." 우리의 불안은 대다수의 경우에 그 불안의 근거와 원인에 대한 정밀한 조사 앞에서는 눈 녹듯 사라지고 만다. "내가 어찌하여 낙담하는고?" 거기에는 이유가, 실질적인 이유가 있는가?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더 많은 사유가 있는데도 야단법석을 부리지 안 부리지 않는가? 또 우리에게는 용기를 얻을 만한 이유는 없는가?" 아니면 이 말은 충고하는 질문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자기 자신의 심령과 많이 교제하는 자들은 본문의 다윗과 같이 자신을 질책할 수 있는 기회를 자주 갖게 될 것이다. "왜 나는 우울하고 풀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와 같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가? 왜 나는 타인들을 낙심케 하며 내 자신에게 그렇게 큰 피해를 입히는가? 나는 이런 소요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할 수 있는가?"2. 그 치료.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신뢰함은 만연하는 영혼의 낙담과 불안에 대해 신묘한 치료 약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의기저상을 꾸짖을 때는 우리 스스로를 재촉하여 하나님께 희망을 두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영혼이 그 스스로를 포옹하고 있을 때는 침몰하고 만다. 만일 영혼이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굳게 붙잡는다면 우리 영혼은 머리를 수면 위에 내놓고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바라라."
(1) 그리하면 그는 우리로부터 영광을 얻게 될 것이다. "내가 오히려 그를 찬송하리로다. 나는 내 사정의 엄청난 변화를 경험하여 찬양의 재료가 모자라지 않을 것이며, 내 심령의 큰 변화를 경험하여 찬송의 마음이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성호를 칭송하기 위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은 인간의 최대 명예와 행복이므로 모든 선량한 사람의 최대 염원과 희망이다. 우리가 하늘 나라에서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제외한다면 천국 복락의 면류관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하리라는 것과 현세의 괴로움도 우리의 끝없는 할렐루야를 막거나 감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제외한다면 현재 비애를 당하고 있는 우리에게 무엇이 의지가 되겠는가?
(2) 또한 우리는 그에게서 위로를 얻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그의 은총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 것이다. 우리는 그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얻는 지지와 그의 은총 안에서 갖는 만족으로 인하여 그를 찬송할 것이다.
하나님의 얼굴의 광채를 소중히 여기고 선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자들은 최악의 시기에도 그 얼굴의 광채에서 적당하고도 적시의 충분한 도움을 발견할 것이며, 그것이 자기들에게 항상 찬송할 수 있는 소재를 공급해 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한 다윗의 신앙적인 기대는 그를 주저앉지 않도록 해 주었고, 더 나아가서 그의 허리가 휘이지 않도록 해 주었다. 그의 수금은 사울의 우울증을 완화시켜 주는 치료책이었으나 그의 소망은 그 자신에게 대한 효과적 치료법이었던 것이다.
불평과 위로 (시편 42:6-11)
여기서는 불평과 위로가 자연의 운행에서 낮과 밤이 바뀌듯, 전과 같이 교대로 나온다.
Ⅰ. 그는 자기 심령의 낙심을 한탄하나 하나님께 대한 생각으로 위로를 얻고 있다(6절).
1. 그의 환난 중에서. 그의 영혼은 낙망하였고 그는 하나님께 가서 그것을 여쭙고 있다.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속에서 낙망하나이다." 어떤 이유로 고통을 당하든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자유와 그 앞에서 발언할 자유를 가질 수 있다는 것과 우리가 낙심한 이유를 그에게 공개적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힘이 된다. 다윗은 그 자신의 비통함에 대해 자기 자신과 의견을 나누었으나 여태까지 고통의 제거를 얻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로 향하고 그의 앞에 고통을 공개하고 있다.우리 자신과 변론함으로써 괴로운 짐을 진 심령에 대해 위안을 얻을 수 없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기도와 우리의 사정을 그에게 맡김으로써 우리가 할 수 있는 바로 시도해야 된다. 우리는 이들 바람과 파도를 잔잔하게 할 수 없지만 누가 조용케 할 수 있는지는 아는 것이다.
2. 그의 헌신적 신앙 안에서 그의 영혼은 앙양되었다. 그는 그병이 매우 고통스러운 것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이 일을 신묘한 치료책으로서 의지하였다. "내 영혼이 빠지게 되었나이다. 그러므로 내 영혼의 침몰을 방지하기 위해 나는 당신을 기억하고 상고하겠사오며 당신을 의뢰하고 내 영혼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해 보겠나이다."우리의 불행에 대한 생각을 잊는 길은 자비의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다. 시편 기자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불안하였던 일"은(77:3) 이례적인 경우였다. 반면에 그는 종종 하나님을 기억하고 위로를 받았으므로 이제 그는 그 방편으로서 그 일에 의지하였다. 그는 당시에 가나안 땅의 가장 변경으로 쫓겨가서 자기를 박해하는 이들의 분노로부터 자신을 보호하였으니-때로는 "요단 땅"으로 쫓겼다가 그곳에서 발각되면 "헤르몬" 지경으로나 "미살"이라고 불리우는 "산" 혹은 작은 산으로 쫓겨갔던 것이다.
(1)그러나 그는 어디로 가든지 간에 그의 종교도 그와 함께 가지고 갔던 것이다. 이 모든 곳에서 그는 하나님을 기억하였고 자기 마음을 쳐들어 그에게로 향하였으며 그와의 은밀한 교제를 지속하였다. Undique ad coelos tantundem est viae-즉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거기에는 하늘을 향하여 열려 있는 길이 있다는 사실은 추방된 자나 방랑객이나 여행자들의 위로이며 낯선 땅에서 나그네 된 자들의 위안이 되었다.
(2) 그가 어디에 있었든지 간에 그는 하나님의 집 뜰에 대한 애착심을 가지고 있었다. 요단 땅에서나 산꼭대기로부터 그는 지성소가 있는 곳을 향해 멀리 바라다보곤 하였으며 동경의 시선을 던지면서 자기가 그곳에 있었으며 하고 소원하곤 하였다. 거리와 공간도 그의 마음이 그토록 쏠려 있으며 그처럼 지척 간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도록 하지는 못하였다.
Ⅱ. 그는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불쾌하심의 표상을 불평하고 있으나 때가 되면 그의 은총이 돌아오리란 희망으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다.
1. 그는 그의 곤난이 하나님의 노하심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알았고 그것이 그를 낙심케 하였다(7절).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마치 빨리 서둘러 쫓아 오라고 부르듯 한 고난이 다른 고난의 꼬리를 물고 찾아 옵니다. 그리고 당신의 소용돌이가 신호를 보내며 전쟁의 경보를 울리나이다."이것은 하나님의 분노를 염려하는 그 마음의 공포와 불안을 의미할 수 있다. 한 가지의 두려운 생각은 또 다른 무서운 생각은 불러냈으며,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듯이 한 두려운 생각은 또 다른 두려운 생각에 대한 길을 터 주었다. 그는 하늘의 창들이 열리고 큰 깊음의 샘들이 터졌던 옛 세상의 홍수처럼 슬픔의 홍수에 압도되며 잠기게 되었다.
혹은 이것이 바다를 건너가다 대폭풍을 만나 성난 파도에 요동하는 배를 암시할 수도 있다(107:25 이하). 어느 때 어떤 고난의 파도와 물결이 우리를 덮치더라도 우리는 그들을 하나님의 파도와 물결이라고 불러야만 하는 것이니, 이는 우리가 그의 강력한 손 아래서 겸손하면 우리가 비록 위협을 받더라도 결코 파멸당하지 않으리라는 소망을 갖도록 스스로 격려하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파도와 물결도 하나님의 조종 하에 있기 때문이다. "하늘 높이 계신 여호와께서는 이들 많은 물결의 소음보다 더 강하시다."
선량한 사람들은 설사 자기들이 여러 가지의 많은 시험으로 번민케 되더라도, 또 자기들 위에 시험이 빗발치듯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행하시는 바를 알고 계시며 그들도 멀지 않아 그것을 알게 될 것이다. 고래의 뱃속에 든 요나도 다윗의 이 말을 사용하였는데(욘 2:3, 그말은 원문으로서는 꼭 같다),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란 말씀은 문자 그대로 그에게 부합하였다. 이처럼 시편은 모든 사람의 경우에 통할 수 있도록 지어진 것이다.
2. 그는 자기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올 것을 기대하였다(8절).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리이다." 사정은 악화되어 있으나 항상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Non si male nuncet olim sic erit-즉 현재 사정은 비록 나쁜 처지에 있을지라도 그것은 늘 그렇지마는 않을 것이다. 폭풍후에는 고요함이 올 것이며 이에 대한 전망은 깊음이 깊음을 부를 때에도 그를 지탱시켜 주었다.여기에서 다음 사실에 대해 살펴보자.
(1)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즐겨 기대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리라"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은총을 자기가 찾는 모든 선의 원천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것은 생명이며, 생명보다 더 나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잠시 노여움으로 그의 얼굴을 가리우셨던"(사 54:7, 8) 자들을 인자함으로써 다시 모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은총을 주시는 것이 본문에서는 "베푸신다"라고 표현되는데, 이는 그의 은총이 무료임을 시사해 준다. 우리는 그것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자처할 수는 없으나 그 은혜는 주권에 의해 부여되며 그는 왕처럼 주시는 것이다.
이 말은 또한 그것의 효력을 암시해 준다. 그는 그의 인자하심을 말씀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듣게 하신다. 즉 말씀하신 즉 이루어진다. 그는 권세를 가진 자로서 "복을 베푸시며(44:4), "복을 명하신다"(133:3). 그는 자기의 인자하심을 명하심으로써 파도와 물결을 가라 앉도록 명하시어 저들로 하여금 자기에게 순종하게 하실 것이다. 그는 이 일을 낮시간에 행하실 것이니, 그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혼 속에서 언제든지 낮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밤에는" 즉 긴밤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2) 그가 스스로 하나님께 약속한 것은 무엇인가? 만약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인자함을 명하신다면 그는 최선의 애정과 신앙으로 이를 맞으며 환영할 것이다.
[1] 그는 하나님을 기뻐할 것이다.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으리이다." 우리는 낮에 우리가 받은 자비를 밤에 감사로 돌려드리지 않으면 다른 된다. 다른 사람들이 자고 있을때에도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어야 한다. "내가 밤중에 일어나 감사하리이다"(119:62).우리가 세상의 분주한 일로부터 물러나 조용하고도 고독한 가운데 있을 때는 하나님께 대한 생각으로 기뻐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혹은 고통의 밤에 그를 기뻐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명하시는 날이 새기 전에 나는 그것을 예기하고 찬미의 노래를 부르겠습니다." 비록 환난에서도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할" 수 있으며 소망 중에서 노래하고 희망 중에서 찬송할 수가 있다(롬 5:2, 3). "밤중에 노래하게 하시는 것"(욥 35:10)은 곧 하나님의 특권인 것이다.
[2] 그는 하나님을 항상 의지하면서 그를 구할 것이다.
"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자비에 대한 우리의 신앙적 기대는 그에 대한 우리 기도를 폐하는 게 아니라 촉진시켜 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하나님이시오, 우리의 모든 위로를 지으시고 주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우리가 그분께로가 아니라면 누구에게 기도로 간구해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그로부터 어떤 선한 것을 기대하지 않을 것인가? 하나님을 우리 생명의 하나님으로 간주함으로써 우리 기도에는 생명이 부여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요청하기 위해 일어선다는 것은 이미 우리 생명과 우리 영혼의 생명을 위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Ⅲ. 그는 자기 원수들의 무례함을 불평하지만 자기 친구이신 하나님에게서 자위를 얻는다(9-11절).
1. 그의 불평은 자기 원수들이 자기를 억압하며 비난했다는 것이고, 그것은 그에게 크나 큰 인상을 준 것이다.(1) 저들은 그가 날마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울며 다닐 정도로 그를 압제하였다(9절). 그는 비록 어떤 자도 당하지 않았던 학대를 받았지만, 점잖지 못하게 격정을 폭발하지는 않고 조용히 울어 자기 슬픔을 달랬으며 울면서 다녔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점을 가지고 그를 나무랄 수는 없다. 진정으로 자기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의 복리를 찾는 자에게 마치 그가 조국의 적이라도 되는 듯이 핍박을 하고 가혹하게 대우한다면 그가 비통을 느끼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여기서 하나님이 자기를 잊으셨으며 자기를 물리치신다고 결론을 내려서는 아니 되었으며, 자기를 유린한 자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자기가 유린의 고통을 당하도록 버려두시는 잘못을 저지르셨다는 듯이 그에게 간해서도 아니 되었다. "내가 어찌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어찌하여 주께서 나를 잊으셨나이까?" 우리는 하나님께 호소를 할 수는 있지만 이와 같이 그를 원망하도록 허용되어 있지는 않은 것이다.
(2) 그들은 그를 너무나 예리하게 비난하여서 그것은 "그의 뼈를 찌르는 칼"이 되었다.(10절). 그는 이전에도 그의 골수에까지 미치는 저희 비방이 무엇인지 언급하였었는데, 이것을 여기에서 다시 반복하고 있다. "그들이 나를 비방하여 늘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 하도다." 이러한 비난은 양면으로 그에게 매우 비통한 것이었다. 즉 그런 비방은 하나님께 치욕을 돌리는 동시에 하나님께 두는 그의 희망을 산산조각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라도 자기 소망을 유지해나갈 만한 충분한 저력을 소유하였기 때문에 그 비방은 유감스럽게도 저절로 실패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2. 그의 위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반석이시라는 것이다(9절). 즉 그위에 건축할 수 있는 반석이고 그 안에 피할 수 있는 반석이시다. 그 안에 영원히 지칠 줄 모르는 힘이 있는 만세 반석이 그의 반석이 되시며, 그것은 행하는 일이나 견디는 일에 있어서 그의 속 사람에 대한 힘이 되어 주실 것이었다. 그런 분에게 그는 신뢰로써 나아갔던 것이다. 자기 반석이신 하나님께 그는 말해야 할 바를 말 할 수 있었고 그것을 은혜로이 들어 주시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전에 말했던 것을(5절) 되풀이하며 그로써 결론을 맺고 있다(11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느냐?" 그의 비탄과 두려움은 요란하였고 성가스러웠다. 그것들은 몇 번이고 대답해 주었는데도 잠잠치 않았다. 그러나 드디어 여기에서 그의 믿음은 정복자로 등장하여 원수들을 강제로 전쟁터에서 퇴장시켜 버렸다. 그는 이 승리를 다음과 같은 일에 의해 얻고 있다.
(1) 그가 전에 말했던 것을 되풀이함으로써, 그는 전과 같이 자기의 사기 저하와 불안에 대해 자신을 질책하고, 여호와의 성호를 신뢰하여 자기 하나님께만 머물도록 스스로를 격려했다.
우리의 선한 생각을 몇 번이고 상기해 보는 일은 매우 유용하며, 설사 처음에는 우리가 그로써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두 번째에는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어쨌든 마음이 말씀과 함께 다니는 곳에서는 반복해서 하는 일이 헛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같은 일이라도 몇 번이고 우리 마음에 아로새길 필요가 있으니, 이것은 아무리 많이 강요한다고 해도 충분치 못할 것이다.
(2) 거기에 단 한 마디를 추가함으로써, 그는 그의 얼굴에 있는 구원을 위하여 "거기서" 하나님을 찬송하기를 바랐다. 그는 "현재 덮고 있는 구름으로부터 내 얼굴을 건져내심을 인하여 나는 여기서 그를 찬송하겠다. 만일 하나님이 내게 미소를 보내신다면 그것은 나로 하여금 즐거운 모습을 나타내보이도록 하실 것이며 즐거이 쳐다보고 즐겁게 앞을 내다보며 주위를 돌아보게 하실것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에 다음과 같이 그는 덧붙여 말하고 있다. 그리고 내 하나님은 나와 계약을 맺고, 그의 전 존재와 그가 소유하는 모든 것은 약속의 진정한 의도와 의미에 따라 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생각들은 그로 하여금 자기의 모든 비애와 공포심에 대해 개가를 올릴 수 있도록 하였다. 하나님이 천국에서 성도들과 함께하시며 저희 하나님이 되심은 "모든 눈물을 저희 눈에서 씻기시는"것이 될 것이다(계 21: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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