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난에서 구하시는 하나님의 은총 (시편 40:1-5)
이 대목에서 우리가 대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Ⅰ. 시편 기자가 빠져 있던 극심한 궁지와 환난. 그는 기막힌 웅덩이와 수렁으로 빠져 들어갔으며(2절). 그 혼자 힘으로 헤어나올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속으로 점점 더 빠져 들어가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그는 본문에서 그의 신체적 질병이나 자기 원수들의 모욕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그에게 가장 큰 고통이 바로 모종의 내적 불안과 심령의 당혹감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물러가신다고 하는 생각으로부터 유래된 낙담과 영원한 형편에 대한 점증하는 의구심과 불안감은 참으로 무시무시한 웅덩이와 진창투성이의 수렁이 아닐 수 없으며, 하나님이 애지중지하시는 많은 자녀들에게도 항상 그러해 왔다.
Ⅱ. 하나님께 대한 그의 겸손한 기다림과 그렇게 깊은 곳에서도 그로부터 구원이 오리라고 기대하는 믿음, "내가 여호와를 참을성 있게 기다렸으니, 기다리고 기다렸도다"(1절). 그는 다른 자가 아닌, 바로 하나님의 구해 주심을 기대하였다. 찢으셨던 바로 그 손이 치료해 주어야 하며, 치신 바로 그 손이 싸매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니(호 6:1), 만일 그러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코 고쳐질 수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그가 기대한 것은 구원이었고, 그는 시간이 되면 구조가 도래하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은채 기대감으로 부풀어 있었다. 하나님께는 자기를 신뢰하는 모든 백성들 중 가장 약한 자라도 도와 주실 만한 넉넉한 은혜가 있다. 그러나 다윗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으니, 이는 그 구원이 일찍 도래하지는 않았음을 시사해 준다. 그러나 그는 구원이 오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았을 뿐 아니라 그 구원이 도래할 때까지 믿음과 희망과 기도를 계속하리라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하나님께 기대하는 자들은 확신을 가지고 기다릴 수 있으나 동시에 인내로써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께 아주 적절히 적용될 수 있다. 그의 고뇌는 겟세마네 동산이나 십자가상에서나 다 같이 계속되었는데 그것은 기가 막힐 웅덩이였고 수렁이었다. 그 당시에 그의 영혼은 고통을 당하였고 비상한 근심에 차 있었다. 그 당시에 그의 영혼은 고통을 당하였고 비상한 근심에 차 있었다. 그러나 그때 그리스도는 기도하였다. "아버지여, 당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소서. 아버지여, 나를 구하소서." 그리하여 그는 그의 아버지께 대한 자기의 관계를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하면서 계속 유지하였고 그와 같이 끈기 있게 하나님을 기다리셨던 것이다.
Ⅲ. 곤경에서 보이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그의 유쾌한 경험, 그는 이것을 하나님의 영예와 그 자신과 타인들의 격려를 위해 기룩하고 있다.
1.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다. "그는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하나님을 끈기 있게 기다리는 자들은 설사 그 기다림이 오래 지속될지 몰라도 그것이 헛되이 되지 않는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다"(히 5:7). 뿐만 아니라 그는 아버지께서 자기를 항상 들으신 다는 것을 확신하고 계셨다.2. 하나님께서 다윗의 불안을 침묵시키셨고 영혼의 동요를 잔잔케 하셨으며, 그에게 안정된 양심의 평화를 주셨다(2절). "그는 나를 낙담과 절망의 기가 막힐 웅덩이에서 끌어 올리셨고, 구름을 흩으셨으며 그의 은총의 확신으로써 내 영혼 위를 밝게 비추셨다. 그뿐만 아니라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종교적 우울증에 접하여 지내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그것을 해소하게 된 자들은 이 구절을 그들 자신에게 아주 감동적으로 적용할 수가 있다. 그들은 무서운 구덩이에서 끌어 올리워진 것이다.
(1) 자비는 저들의 발을 반석 위에 놓게 함으로써 이루어 졌고, 그들은 그 반석 위에서 저희 보행이 견고하다는 것을 발견하여 이전에 저희가 지옥의 두려움으로 인해서 천국을 원했던 것보다 더 간절히 원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불쌍한 영혼이 굳게 설 수 있는 반석이시며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놓인 그의 중재 위에다 어떤 공고한 희망이나 만족이라도 건축할 수 있다.
(2) 자비는 저희의 걸음을 확립하는 데에서도 계속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변치 않는 희망을 주신 곳에서는 꾸준하면서 규칙을 어기지 않는 행위가 있어야 할 것을 기대하신다. 그리고 만약 그것이 자비의 복된 열매라면 우리는 넘치는 감사로써 그의 은혜의 풍부함과 능력을 고백함이 옳을 것이다.
3. 하나님께서는 믿음 안에서, 평화와 아울러 기쁨으로 그를 채우셨다. "내 입에 새 노래를 두셨도다. 그는 나에게 기뻐할 만한 원인을 주셨으며 환희에 넘치는 마음을 주셨다." 말하자면 다윗은 신세계로 데려가졌으며, 그것은 다윗의 입을 새 노래로 가득 채우게 했고,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으로 충만하게 하였던 것이다. 우리의 모든 노래는 하나님을 찬미하며 그의 영광을 기릴 수 있도록 불리워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전에는 받아보지 않았던 특별히 새로운 자비는 새 노래를 요구한다.
이것은 낙원으로 영접되시고 무덤으로부터 부활하시며 그 앞에 주어진 희락과 영광에로 올리우신 우리 주 예수님께 적용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는 기가 막힐 웅덩이에서 건지심을 받고 반석 위에 세워지셨으며 그의 입에 새 노래가 담기워졌던 것이다.
Ⅳ.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선하심을 나타내셨던 이 사례에 대하여 우리가 취해야 할 유익한 활용.
1. 다윗의 체험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다수의 성도들에게 격려가 될 것이며 그 목적을 위해 그는 여기에 자기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그들은 여호와와 그의 공의를 두려워할 것이니 이는 그의 공의가 다윗과 다윗의 자손을 기가막힐 웅덩이로 던지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푸른 나무에게도 이 같은 일이 행해졌은즉 마른 나무는 어떻게 되겠는가?"라고 말할 것이다. 그들은 다윗과 다윗의 자손의 입을 기쁨과 찬미의 새 노래로 채우신 일을 보고는 여호와와 그외 선하심을 경외할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경외심은 그에 대한 우리의 희망과 일치할 뿐만 아니라 우리 희망의 기초가 된다. 저희는 최대의 난경 중에서 그를 두려워하여 피할 것이 아니라 경외하면서도 그에게 의지해야 할 것이다. 곤경 중의 다윗이 한 것같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우리에게 크나 큰 격려가 된다. 그리스도가 상처를 입고 우리 죄를 위해 슬픔을 당하심으로써 여호와가 기쁨을 얻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빛을 그에게 청구하셨던 것이며, 하나님이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사 자기 우편에 앉도록 하셨을 때에는 그리스도가 지불하신 것을 열납하시고 그 지불에 만족하셨던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경배하고 "그를 의지하는 일"에 있어서 그보다 더 큰 격려가 어디 있겠는가? (롬 4:25; 5:1, 2) 시편 기자는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복되다고 선포함으로써 자기가 행하였듯이 타인들도 하나님을 저희 희망으로 삼도록 권유하고 있다(4절). "여호와를, 오직 그만을 의지하고(그는 크시며 선하시다고 생각하며 전적으로 그에게 헌신하는 것), 교만한 자를 돌아보지 않으며, 자기 스스로를 의지하는 자들 같이 하지 않고 타인들에게도 자기 자신만 신뢰하도록 하라고 교만하게 부추기는 자들에게 의존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왜냐하면 자기를 신뢰하는 자나 교만한 자를 의지하는 자는 양자가 다 하나님을 떠나 곁길로 나가는 모든 자들처럼 거짓에 치우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특히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 신앙에 적용될 수 있다. 복있는 자는 그리스도와 그의 의로움만을 신뢰하고, 그의 의로우심과 경쟁하여 저들 자신의 의를 세워 두면서도 저희 의로움의 명령에게는 지배를 받지 않으려는 교만한 바리새인들은 존경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는"(롬 10:3) 불신적 유대인들처럼 거짓에 치우치지도 않는다. 이와 같은 유혹을 모면해 나가는 자들은 복이 있다.2.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다른 많은 은총을 감사하는 마음으로써 관찰하도록 인도해 주신 이 자비에 대하여 그가 가지는 기쁨(5절). 하나님께서 우리 입에 새 노래를 두시는 때에라도 우리는 이전의 노래들을 망각해서는 안 되고 그 노래들을 되풀이 해서 불러야 한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나와 다른 자들을 위해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나이다. 이 일은 그 많은 일들 중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 섭리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매일 입은 혜택은 많다.
(1) 그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일인바 그의 아낌 없는 마음이 주시는 은사일 뿐만 아니라 그의 능력의 작용이기도 하다. 그는 우리를 위해 역사하시며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고, 이와 같이 감사하고 또 찬미할 일로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신다.
(2) 그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기사(奇事)요, 경탄할 만한 계획이며, 우리에게 그런 일을 베푸심을 우리에 대한 그의 경탄할 겸양이다. 영원 그 자체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기적을 찬미하는 데에는 부족할 것이다.
(3) 하나님의 모든 기적들은 우리에 대한 그의 사고의 산물이다. 그는'그의 마음의 원대로"만사를 행하시며(엡 1:11). "그가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그의 은혜의 목적에 의거하여 행하신다(엡 3:11). 그 일들은 무한하신 지혜가 기획한 일이고 영원하신 사랑이 도모하시는 계획이며(고전 2:7; 렘 31:3), 악한 생각이 아닌, 선한 생각이었었다(렘 29:11). 그러한 그의 은사와 소명은 후회가 없을 것이니, 이는 그것들이 갑작스런 결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심사숙고의 결과인 까닭이다.
(4) 그런 일들은 무수하다. 그것들은 체계화할 수도 없으며 차례대로 "베풀 수도 없다." 하나님의 모든 역사에는 순서가 있다. 그러나 한꺼번에 우리 시야로 드러나는 일들이 너무나 많아서 우리는 어디서 시작하는지 알지 솜하며 그 다음 것이 어느 것인지도 알수 없다. 그 일들의 순서와 그것에 대한 자연의 창조물과 의존물, 그리고 황금 사슬의 연결이 어떻게 접합되어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으며, 그 휘장이 찢어져서 하나님의 신비가 종언을 고할 때까지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일들은 셀 수도 없으니 그들 중 큰 항목조차도 셈할 수 없을 정도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경이로움을 최대한으로 묘사한다고 했을 경우에도 etcaetra-즉 기타 등등이란 말로 끝맺지 않으면 안 되며, 밑바닥을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을 찬양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 (시편 40:6-10)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행하신 놀라운 일들에 경악을 금치 못한 시편 기자는 여기에서는 기이하게도 여타 모든 기적을 능가하며 모든 것의 기초와 원천이 되는 놀라운 일의 예언을 수행하게 된다. 그것은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말미암은 우리의 구속사건에 대한 예언이었다. 하나님이 바로 그 일에 관해서 우리를 향해 생각하셨으니, 그 생각들은 가장 진기하고 가장 풍부하며 가장 은혜로운 생각이었다. 따라서 가장 찬미를 받을 만한 생각이었다. 이 문단은 사도에 의해 인용되어(히 10:5 이하) 그리스도와 우리를 위하신 그의 사업에 적용되었다. 구약의 제도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구약의 신심(信心)에 있어서도 구약의 성도들이 알고 있었던 것 이상으로 그리스도께 관한 것이 많이 들어 있다. 구세주께서 자기 사업을 자원하여 떠맡으신 것 을사도가 우리에게 제시할 때, 그는 그것을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 하나님의 은밀하신 뜻에 관한 책에서 그 설명을 끄집어 낸 게 아니라 계시된 일들로부터 끌어냈다.
Ⅰ. 하나님과의 화해와 그 안에서의 행복을 위한 속죄에 있어서 율법적 희생 제사는 아주 불충분한 것이다.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주께서는 구속주가 이러한 것들을 바치도록 원하지 않으셨다. 구세주께서는 바칠 것을 가지고 계셔야만 하였으나 그가 가진 예물은 이런 것들이 아니었다(히 8:3). 그는 아론 지파의 하나이어서는 아니 되었다(히 7:14). 혹은 메시야의 날에는 번제와 속죄제가 더 이상 요구되지 않을 것이며 모든 의식적 제도들은 폐지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다는 다니다. 이들 제사에 관한 율법이 한창 실시되던 때조차도 하나님께서는 제사 그 자체를 위해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시거나 열납하신 것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제사와 제물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킴으로써 죄의 비행을 없애버릴 수는 없었다. 한 마리 양의 목숨은 인간의 생명보다 훨씬 못한 것으로서(마 12:12) 동등하다고 자처할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그것이 하나님의 통치와 법의 명예를 보전하며, 인간의 죄로 인해 그 명예에 입혀진 손상을 수선하는 방편으로 자처할 수는 더구나 없었다. 그것들은 양심을 무마시킴으로써 죄악의 공포를 제거할 수도 없었으며, 본성을 성화시킴으로써 죄악의 능력을 탈취해 가지도 못하였다. 그것은 불가능하였다(히 9:9; 10:1-4). 그들 안에 가치 있는 것이 있었다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저희의 관계에서 유래하는 것뿐이었으니 그 제물은 그에게 대한 예표였었고 음영이었다. 참으로 그 제물은 장차 올 선한 것들의 그림자였으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진 신앙과 순종에 대한 시험이었고, 율법에 대한 저희의 복종과 복음 안에서 갖는 저들의 신앙에 대한 시험이었다. 그러나 그 허상에 대한 실체가 와야만 하는 것이니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하나님께는 그 영광을 가져오며 인간에게는 그 은혜를 가져 오시는데 이런 일을 그들 희생 제물이 해낸다는 것은 도대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Ⅱ. 우리 주 예수에게 중보자의 사업과 직능을 임명하셨다. "주께서 나의 귀를 여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를 이 기획에 배정하셨고(사 50:5, 6), 그로 하여금 그 일을 끝까지 해내지 않으면 안되게 하셨다. "주께서 나의 귀를 뚫어서 영영 종살이하게 만들던 당시의 법과 관습을 암시해 주는 것으로 생각된다(출 21:6 참조). 우리 주예수께서는 자기의 사업을 너무나 사랑하여 그것으로부터 무단히 물러나고자 아니 하셨고 영원히 이 사업을 해내시겠다고 약속하셨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그는 우리를"최대한도로, "끝까지 구원하실 수가 있으시니"이는 그가 자기를 붙잡아 주시는 아버지를 끝까지 섬기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사 42:1).
Ⅲ. 이 사업에 대해 그는 자발적으로 동의하였다.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있나이다 하였습니다. 제사와 예물이 오히려 그 일을 망쳐 놓은 것 이상으로는 아무 효험을 보지 못하는 그 때에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흑암의 권세와 일전을 겨루고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나라의 권세를 떨치고자 내가 왔나이다." 이것은 세 가지 일을 시사해 주고 있다.
1. 그는 그 자신이 원하던 업무보다도 먼저, 하등 수행할 의무도 없었던 이 봉사에 자기 자신을 거리낌 없이 바쳤다. 이 일이 그에게 제안되자마자 그는 더 할 수 없으리만치 흔쾌하게 동의하였고 그 계획을 놀라우리만치 환영하였다. 만일 그가 이 일에 완전히 자발적이지 않았다면 그는 우리 구원의 보증인이 될 수 없었을 것이며 희생 제물도 될 수 없었을 것이다(히 10:2). 왜냐하면 우리가 성별당하는 것은 바로 이 의지 animus offerentis-즉 제공자의 마음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2. 그는 이일에 대해 스스로 굳게 의무감을 지녔다. "나는 오리라. 나는 때가 차면 올 것을 약속한다." 그러므로 사도는 "그가 이 약속에 실제적인 주의를 기울이신 것은 그가 이 세상에 들어오신 때였고 이로 말미암아 그는 자기 마음을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도록 하셨느니라"고 말하고 았다. 이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함을 나타내 보여야 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그 일을 완전히 수행해내기 전에라도 그 기획을 떠맡는 영광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값은 치러지지 않았으나 그런다치더라도 이 지불될 것은 확실하였으니, 그는 세상의 기초가 정해진 때부터 이미 살해 된 양이었던 것이다.
3. 그는 자신이 약속된 자임을 속히 인정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내가 오리라"고 하였다. 그는 이 말을 구약 성도들에게 줄곧 말하였는데 그들은 그 때문에 o]erco,menos,-즉 와야만 할 분으로 이해하였다. 이 말씀은 구약 성도들이 자기들의 신앙과 소망을 건축하였던 기초였으며 저들이 그 성취를 대망하고 동경하였던 것이었다.
Ⅳ. 그가 자기의 기도(企圖)를 추구하기 위해 오게 된 이유, 그가 온 것은 "그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기" 때문이었다.
1. 하나님의 법령과 의향에 관한 은밀한 두루마리 안에, 그의 귀가 열렸다는 것과 "내가 왔나이다."고 그가 말하였다는 것도 거기 적혀 있었다. 거기에는 구속의 계약이 기록되었으며 성부와 성자간의 평화로운 협의도 기록되었다. 또 그는 자기가 행한 모든 일 중에서 특히 그가 자기 아버지로부터 받은 명령에 유의하였다.2. 구약에만 특유한 전매 특허증에,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은 그에 대해 증언하였다. 구약 성서의 모든 두루마리에는 그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일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그 모든 것들이 성취될 수 있도록 유의하셨던 것이다.(요 19:28).
Ⅴ. 그가 자기 사업의 착수에서 갖는 즐거움, 그는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그 일에 내맡겼기 때문에 약해지지 않았고 낙심하지도 않았으며, 자신에 대해 최대한 만족해하면서 계속 행하였다(8,9절).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거워하나이다." 자기에게 지정된 일을 계속하여 행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께는 먹고 마실 그의 양식이 되었다(요 4:34). 그리고 그 이유가 여기에 주어지고 있다.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나님의 법이 그의 마음에 기록되어 그것을 지배한다. 그리고 그 법이 거기에서는 능동적인 지휘 원리가 된다. 그것은 중보자의 사업과 직분, 즉 그가 무엇을 행하며 어떤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에 관한 법을 의미한다. 이 법은 그에게 소중하였으며 그의 사업 전반에 걸쳐 그에게 영향을 주었다.
하나님의 법이 우리 마음에 기록될 때는 우리의 의무도 즐거움이 될 것이다.
Ⅵ. 인간의 자손들에게 "대 회중에서" 복음을 공표함(9,10절). 제사장으로서 우리에게 구속을 베풀어주신 동일한 분이 예언자로서 맨 처음엔 그 자신의 선포에 의하여, 그 다음엔 그의 사도들을 통하여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신다. "큰 구원이 주로 말미암아 말씀되기 시작하였다"(히 2:3). 모든 민족에게 선포된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복음이었다.
여기에서 다음 사실에 주목하라.
1. 선포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의로움"이니(9절), 곧 하나님의 의로우심이며(10절).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영원한 의로움이다.(단 9:24; 롬 1:16, 17 참조), 그것은 약속에 대한 하나님의 "성실성"과 오랫동안 기다렸던 "구원"이다. 또한 그것은 자기 말씀대로 따르는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와 자비이다. 우리는 우리의 구속 사업에서 하나님의 속성들이 얼마나 밝게 빛나는지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들 하나하나에 대하여 찬사를 던지지 않으면 안된다.2. 그것이 선포되는 대상은 누구인가? "대 회중에서"(9,10절에서 다시 반복됨)이다.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실 때 한꺼번에 수 천명씩 되는 다수 대중에게 설교하셨다. 복음은 유대인에게와 이방인에게 이 양자의 큰회중을 향해 선포되었다. 엄숙한 종교적 집회는 신성한 관례이며, 그 집회 중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영화와 인간들의 교훈을 위해 그리스도의 앞에서 찬미되어야 한다.
3. 그것이 어떻게 선포되는가? 그것은 자유로이, 그리고 공개적으로 행해진다."내가 내 입술을 닫지 않았나이다. 나는 그것을 숨기지 아니하고 은익치 아니하였나이다." 이 말에는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를 기도하는 자는 누구나가 그것을 숨기고 비밀로 은폐시키고자 하는 충동을 느끼리라는 것이 암시되고 있으니, 이는 복음이 큰 논난과 함께 격심한 반대의 면전에서 설파되어야 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자신과 그리스도께서 그 일을 위해 부르신 자들은 그 얼굴을 "부싯돌같이"하여(사 50:7) 그 사업을 수행해 나아갔다. 그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됨으로써 우리 눈은 환희의 빛을 보게 되었고 우리 귀는 기쁜 소리를 듣게 되었으며, 만약 그러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영영 그것을 모르는 채 멸망을 당하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재자이신 그리스도 (시편 40:11-17)
시편기자는 지금까지 구속 사업에 대해 상고해 왔고 메시야라는 인물로 그것에 관한 언급을 해 왔지만 이제는 더 나아가 우리와 하나니 간에 그의 중재의 교리를 발전시키고 있다. 따라서 그는 자기 자신의 입장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스께서 자기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고 그의 사업을 완성 하셨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 전도의 명을 주셨으므로 우리는 용기를 얻어 자비와 은총을 위해서 담대히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Ⅰ. 이것은 우리를 격려하여 하나님의 긍휼을 위해 기도할 수 있게 하며 우리 자신을 그 자비의 보호 하에 투신할 수 있도록 해 준다(11절). "여호와여, 당신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그를 잡아두시지도 않으셨나이다. 주의 긍휼을 그치지마소서. 당신은 우리에게 주시려고 그 자비를 저축해 두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신께서는 당신이 아들과 더불어 모든 것을 아끼지 아니 하시고 주실게 아닙니까?(롬 8:32)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 가장 선한 성도들이라고 끊임없는 위험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계속하여 보호 받지 않을 때에는 그들 자신이 파멸당하는 것을 보게 될 뿐이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인자와 진리는 우리가 하늘 나라에 이르도록 보존되기 위하여 의존해야 하는 것들이다(시 61:7).
Ⅱ. 이것은 죄악에 관하여 우리에게 용기를 얻도록 해 주는데, 그리스도께서는 제사와 예물이 해 주지 못하는 일, 즉 죄인 비행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하여 그 일을 행하셨던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을 살펴보자.
1. 그가 죄악에게서 보았던 소름끼치는 광경(12절). 그가 은총으로 인해 구속주를 발견하게 된 것을 감지덕지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는 자기의 불의를 악으로 보았으며, 그것도 악한 것들 중에서 가장 악한 것으로 보았다. 그는 그 불의가 "자기를 둘러싸고"있음을 보았다. 자기 생애에 대한 모든 검토와 매 단계 단계에 대한 회고에서 그는 잘못된 점을 발견하였다. 자기 죄의 위협적인 결과들이 그를 포위하고 있었다. 사면팔방 어느 쪽을 둘러 보아도 그에게는 여러 가지 해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그것이 자기 죄의 당연한 대가라고 자각하고 있었다. 그는 집달리가 가난한 채무자에게 하듯 그 재앙들이 자기를 붙잡으며 체포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또한 그것들이 무수하며" 그의 머릿털보다 더 많은 것"을 보았다. 확신을 얻는 양심과 깨우쳐진 양심은 약한 죄라도 무수하면 위험하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는데 그런 죄는 비록 머리카락처럼 작게 보이기는 하나 수가 많기 때문에 매우 위험하다. "누가 자기 과실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을 헤아릴 수 있으시지만 우리는 그것을 셈할 수가 없다(마 10:30). 이와 같이 그는 우리 죄를 회계하고 계시지만 우리는 회계하지 못한다. 죄의 모습은 그를 너무나 강박하여 그는 자기 머리를 쳐들 수가 없었다. "나는 우러러볼 수도 없나이다." 그러하니 그의 마음을 쳐들어 유지하는 일은 더욱 불가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 마음이 사라졌습니다."우리가 만약 구주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보지 못하는 가운데에 본색을 드러낸 죄를 목도하게 되면 우리는 혼비백산하게 될 것이다.
2. 죄의식하에서 그가 하나님께 품었던 신중한 의지심(13절). 자기 죄로 말미암아 멸망의 벼랑, 즉 영원한 파멸의 낭떠러지 위에 세워진 자신을 보게 된 그는 얼마나 거룩한 정열로 부르짖고 있는 가! "여호와여!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하소서!(13절) 나를 장차 닥칠 진노하심에서 구하여 주시며 그 진노에 대한 우려 때문에 내가 당하고 있는 현재의 공포로부터 나를 구원하소서. 신속한 구원이 없다면 나는 파멸하고 죽게 됩니다. 나는 멸망하게 됩니다. 영원불사하는 영혼의 지복이 관계된 이런 성질의 문제에 있어서 지연이라는 것은 위태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Ⅲ. 이것은 우리를 격려하여 영적 원수들에게 대한 우리의 승리를 희망하게 해 준다. 그들은 우리의 영혼을 멸하려고 찾아 다니는 자들이며(14절), 삼킬 자를 찾아 끊임없이 돌아 다니는 우는 사자와 같은 자들이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승리하셨다면 우리는 그를 통하여 정복자 이상으로 될 것이다. 이것에 대한 믿음 안에서 우리는 겸손하고도 담대하게 "저들로 수치와 낭패를 당케 하시며 다물러가 욕을 당케 하소서"하고 기도할 수 있다(14절). "저들로 황폐케(놀라게)하소서"(15절). 죄인의 전향과 성도의 영화는 이 양자를 저지하기 위해 온갖 권세와 간계로써 최선을 다하는 사탄에게는 코나 큰 실망이 된다. 이제 우리는 우리 아직 예수께서 자기가 택하신 모든 자들의 구원을 완수하시겠다고 단언하셨으므로 이 두 가지 길에서 저 큰 대적이 낭패케 되도록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가 저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 빠질 때 사탄은 자기의 노린바를 이루었다고 생각하면서 "하!하!"라고 소리친다. 그러나 그는 타다 남은 그을린 나무가 불에서 끄집어 내어지는 것을 보게 될 때에는 격분할 것이며"그의 수치로 인하여 황폐케(놀라게)"될 것이다.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형제를 참소하는 자는 추방을 당하리라.'
Ⅳ. 이것은 하나님을 찾고 그의 구원을 사랑하는 모든 자로 하여금 그를 기뻐하며 찬양하도록 격려한다(16절).
여기서 다음 사실을 눈여겨 보라.
1. 선량한 사람들의 특성. 자연 종교의 법에 순종하여 그들은 하나님을 찾고 그의 은총을 갈망하여, 모든 위급한 경우에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하나님을 찾듯이 그들도 그에게 조력을 청한다. 또한 계시 종교의 법에 따라 그들은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데 그것은 선지자들이 묻고 열심히 찾았던 큰 구원이었다. 구속주께서 "보라! 내가 왔느니라"고 말하셨을 때 그는 이것을 성취를 하셨던 것이다. 구원받을 자는 모두 구원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 구원은 지옥으로부터의 구원일 뿐만 아니라 죄로부터의 구원이기도 하다.2. 이 예언적인 기도로 인해 선량한 자들이 획득할 행복을 보라. 하나님을 찾는 이들은"그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기뻐할 것"이며 또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를 가질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발견될 것이며 저희에게 후한 상급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구원을 사랑하는 이들은 그 구원의 기쁨으로 충만할 것이며 "여호와는 광대하시다고 항상 말할"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땅 위에서 하늘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계속 하나님을 찬미하는 자는 복될 것이다.
Ⅴ. 이것은 고통과 환난 중에 있는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에게서 스스로 평안을 누릴 수 있도록 격려해 준다(17절). 다윗 자신도 이러한 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아마 임금이었고 보좌에 앉았었을 테지만 마음의 곤비 때문에 그는 스스로 가난하고 궁핍한 자로 자처하였고, 결핍과 고통 중에 있으며 구세주가 없는 길 잃은 자요, 파멸한 자로 여겼다) 주께서는 중보자 안에서, 또 그를 통하여 나를 생각하시며 우리는 열납되나이다." 인간들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잊으며 별로 생각지 않으나,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들은(그는 5절에서도 언급하였다) 저들의 후원과 위로가 된다. 그들은 하나님이 저희 환난시의 도움이시오, 때가 되면 저희를 환난에서 건져 주시고 오해 지체치 않으시리라고 확신할 수 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것은 정해진 때를 위한 것"이므로 우리는 "그것이 지체되더라도 기다릴 수" 있으며 그것은 반드시 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를 것이다. 그것은 지체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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