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인생의 헛됨 (시편 39:1-6)
다윗은 여기서 그의 고난시에 그의 마음의 움직임에 대해 회상하여 기록하고 있다. 우리도 그와 같이 기록해 두어 잘못 생각한 것은 수정하고 잘 생각한 일은 다음에 더 발전하도록 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Ⅰ. 그는 하나님과 맺은 자기의 언약을 기억하였으니, 그 언약은 그가 신중히 행하고 행동이나 말을 다 같이 아주 조심하겠다고 했던 것이었다. 언제라도 우리가 죄의 유혹을 받거나 죄 가운데로 빠질 위험에 봉착하는 때에는 우리의 엄숙한 맹세를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우리가 죄를 짓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범하려고 하는 개개의 죄를 멀리하겠다는 맹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맹세들을 상기시켜 주실 수가 있으며 또한 상기시켜 주실 것이다("네가 말하기를 나는 순복지 아니하리라 하도다", 렘 2:20).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그 맹세들을 상기하여야만 된다. 다윗도 여기에서 그렇게 행하였다.
1. 그는 자기가 전반적으로 그 행위에 있어서 극히 조심하고 신중하기로 결심했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1절). "내가 말하기를 내 행위를 조심하리라 하였도다.' 그것은 참 잘한 말이었고 그가 결코 취소하지 않을 말이다. 다음을 명심하자.(1) 우리의 길에 주의를 기울이는 일, 즉 타인들이 온갖 모험을 하면서 걸을 동안에도 신중히 걷는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유의해야 할 중대한 일이다.
(2) 우리는 우리의 길을 조심하리라는 확고한 결의를 하고 있어야 하며 또 자주 그 결심을 새로이 다짐해야 마땅하다. 단단히 단속해 두면 분실하는 법이 없는 것이다.
(3) 우리는 우리의 길을 조심하기로 결심하고 나서는 모든 경우에 있어서 스스로 그 결심을 깨우쳐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코 망각되어서는 아니 될 언약이며 우리가 언제든지 유의하고 있어야만 하는 약속인 까닭이다.
2. 그는 특히 입술에 죄에 대한 자기의 언약을 기억하고 있다. 그 약속은 그가 혀로써 범죄치 않으리라는 것과 그가 잘못 말하여 하나님께 득죄하거나 "의로운 자들을 죄짓게 하는"(73:15)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생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만큼 용이하지가 않다. 그러나 그는 설사 그의 마음속에서 악한 생각이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손을 자기 입에 대로 그 악한 생각이 더 이상 나오지 못하도록 억누를 작정이었다. 이것은 아무나 해내지 못할 엄청난 터득이어서 "말로 범죄치 않는 자는 완전한 사람"인 것이다. 또 이것은 아주 필수적인 일이기 때문에 경건하게 보이면서도 "그 입에 자갈을 먹이지 않는"자에게는 "그의 신앙 생활이 헛되다"고 공언할 수 있다. 다윗이 결심한 바는 다음과 같다.
(1) 그가 어떤 때라도 구설의 죄를 경계하겠다고 하는 것. "나는 내 입에 자갈이나 굴레를 먹이리라." 그는 흡사 다루기 힘든 말에게 자갈을 물려 그 말을 이끌고 지시하며 견제하고 억제하여, 바른길로 가게 하고 알맞은 보조를 유지하고 뛰게 하듯(약 3:3) 자기이 입에도 자갈을 먹이고자 하였다. 습관에 대한 경계는 머리에 대 자갈이다. 행동과 실천에 대해 방심하지 않는 것은 손에 자갈을 물리는 것이다. 그는 사나와서 화를 입히는 맹견에서 하듯 자기 입에 굴레를 씌울 참이었다. 특별하고도 확고부동한 결의를 말미암아 부패한 것은 억제되어 입술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으며, 그것은 마치 멍에를 씌운 것과 경우와 것이다.
(2) 그 위험한 추문이 도사리고 있을 때는 저들에게 대한 감시를 배가하리라는 것. 즉"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그가 악인과 함께 있을 때에는 그들을 강퍅하게 하거나 그들로 하여금 불경스러운 말을 지껄이게 할 만한 것을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고자 하였다. 만일 선한 사람들이 악한 자들과 어울리게 되는 경우에는 그들의 말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혹은, "악인이 내 앞에"즉 내 생각"속에 있을 때에 "말을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가 행악자 들의 교만과 권세, 형통과 번창하는 재산을 곰곰히 생각하고 있으므로 잘못된 말이 자꾸만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뒤에는 자기가 하는 말을 특별히 주의하려고 하였다.
죄에 대한 유혹이 강해지면 질수록 그것에 대항하는 결의도 더욱 더 공고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Ⅱ. 이들 언약에 순응한 그는 고심참담 끝에 자기 혀에 자갈을 먹일 수 있었다(2절). "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발하지 아니하도다." 그의 침묵은 칭찬할 만한 것이었다. 도발이 심하면 심할수록 그의 침묵은 더욱 더 칭찬할 만하였다.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 안에서 갖는 경계심과 결의는 비록 혓바닥이 다루기 힘드는 화근이라곤 하지만 그것에 자갈 먹이는 일에 있어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역할을 해 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선한 말도 밥하지 않은"것에 관하여 우리는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않으려는 것같이 그가 자기 앞에 악인이 있을 때 선한 담화를 자제한 것은 그의 지혜였던가? 나는 오히려 그것을 그의 나약함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아무말도 않는 게 좋았기 때문에 어떤 말도 하지 않는 극단으로 뛰어 들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은 극단과 극단 사이의 중용을 명령하고 있을 율법에서는 비난거리가 된다. 모든 부패한 의사 소통을 금하는 동일한 율법이 "선하고도 덕을 세우는 데에 소용이 되는 말"을 요청하고 있다(엡 4:29).
Ⅲ. 그가 말을 적게 하면 할수록 더욱 많이 생각하고 더욱 뜨겁게 되어 갔다. 병든 부위를 싸매는 것은 환부에다 종기를 더할 뿐이었다." 나의 근심이 더 심하였고,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졌도다."(3절). 그는 그의 혀에 자갈을 먹일 수는 있었으나 그의 감정은 억누를 수가 없었다. 비록 그가 연기는 진압하였으나 그것은 그의 뼈 속에 있는 불과 같아서, 그가 자기의 고난과 악인의 형통을 조용히 생각하는 동안에 불이 붙어 올랐던 것이다.
성급하고 불평이 많은 기질의 사람들은 너무 많이 숙고해서도 아니 되는 것이니, 이는 저희가 자기들의 재난에 대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하느라고 머리를 쓰는 동안에 저희 불만의 불은 연료의 공급을 받아 더 맹렬한 기세로 타오르는 까닭이다. 조바심은 우리 안에 나쁜 동기를 가지는 죄악이며, 골똘히 생각하는 것은 우리에게 나쁜 영향을 주는 것으로서 불타는 것에 못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가 규제할 수 없는 걱정의 화를 예방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제어하기 어려운 잡념들의 불평을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된다.
Ⅳ. 그가 결국 입을 열었을 때 그 말은 적절한 것이었다. "드디어 나는 나의 혀로 말하였도다."
혹자는 그가 말했다는 사실이 그의 선한 목적을 침해한 것이라고 이해하여 그가 말을 했다는 사실에서 그는 자기 혀로 범죄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래서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은 엘리야나(왕상 19:4) 욥처럼(욥 6:8, 9) "그가 죽기를 "열열히 소원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가 말했던 것을 그의 선한 목표에 대한 파괴라기보다는 너무 무리하게 적용했던 자기 과실을 개선한 것으로 해석한다. 그는 선한 말도 토설하지 않고 잠잠하였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와 같은 침묵을 지키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앞에 있는 악인들에게는 할 말이 아무 것도 없었는데 그것은 저들에게는 그가 자기 말을 어떻게 구사해야 할지 몰랐던 까닭이다. 그러나 오래 숙고 후에 그가 한 첫 말은 기도였고 우리 모두가 소중히 여기면 유익할 주제에 대한 신앙심 깊은 명상이었다.
1. 그는 인생의 단명과 불확실성, 그리고 사망의 근접성을 깨닫도록 해 주십사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4절).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소서." 그는"여호와여, 내가 얼마나 오래 살며 언제 죽을지 알게 하소서"라고 뜻하는 것은 아니다. 신앙 안에서는 우리가 그와 같은 기도를 드릴 수 없으니 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것을 알려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적은 아무데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지혜 안에서 그 지식을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은밀한 일 중에 감금해 두셨으며, 그것을 안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하등 유익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여호와여, 나의 종말을 알게 하소서"라는 말씀의 의미는 "여호와여, 내게 지혜와 은혜를 주사 그 사실을 깨닫게 하시며 내가 그것에 관하여 알고 있는 것을 활용하게 하소서!" 이다.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전 9:5)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이는 드물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에 의하여 우리의 부폐한 마음이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를 싫어하지 않도록 해 주시기를 기도드려야 한다. "여호와여, 나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실을 고찰하게 해 주소서."(1) "죽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내 종말이고 내 삶의 종말이며 인생이 가지는 모든 직업과 향락의 끝입니다. 죽음은 모든 인간들의 종결입니다."(전 7:2). 그것은 우리의 집행 유예와 예비 상태에 대한 마지막 종지부인 동시에 보상과 응보의 상태에로 들어가는 두려운 관문이다. 악인에게는 죽음이 모든 기쁨의 종말이 된다. 그러나 경건한 자에게 있어서는 모든 슬픔에 대한 종말이 된다. "여호와여, 나로 하여금 내 종말을 알게 해 주시고 죽음이란 것을 더 잘 알도록 해 주옵소서. 내가 사망과 더 친숙하도록 해 주시고 (욥 17:14). 변화의 위대성에 더 많은 감동을 받도록 해 주옵소서. 여호와여, 나로 하여금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엄숙한 일인지 살피게 해 주소서."
(2) "죽음이 얼마나 가까이에 있는가? 여호와여, 나로 하여금 내 날들의 한도를 생각하게 해 주시고, 내 연한은 주의 의향 안에 정해져 있고 (종말은 정해진 끝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내 날들은 정해져 있다." 욥 14:5) 그것은 매우 짧다는 것을 참작하도록 해 주소서. 내 날들은 곧 계수되어서 마감될 것입니다. "우리가 죽음이라는 것을 멀리 있는 요원지화로 보게 될 때 우리는 그 죽음에 대비해 꼭 해야 할 준비를 지체하게 되기 쉽다. 그러나 우리가 인생이 얼마나 짧은 것인지 고려해 본다면 우리는 우리 손이 찾아낸 일을 혼신의 힘을 다 기우려서 행하려 할 뿐만 아니라 가능한 한 실속하게 완료하려고 하게 될 것이다.
(3) "사망이 끊임없이 우리 속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살피게 하소서. 여호와여, 때가 얼마나 가냘픈 존재이며 생명의 줄기가 얼마나 빈약한지, 그리고 계속 등불을 불타도록 유지시켜 주는 기름같은 우리의 영혼도 얼마나 희미한 건지 우리로 하여금 살펴 알게 하소서." 우리는 일상적인 경험에 의하여, 이 땅 위의 장막집(육신)이 퇴락하며 쇠잔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여호와여, 우리로 이점을 살피게 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손으로 짓지 않은 저택을 확보하도록 해 주소서."
2. 그는 생의 짧음과 덧없음을 상고하고, 욥이 자주 그러했듯 인생의 중한 짐에서 건져 주실 것을 하나님께 탄원하며 자기 자신에게는 인생의 사업을 급히 행하도록 역설하고 있다.
(1) 인간의 지상 생활은 짧으며 연속성이 없다. 이 점은 바로 왜 우리가 세상살이에 얽매이지 말아야 하고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야 하므로 생의 종말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이다(5절).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셨나이다. 손가락의 폭인 그것은 확실한 칫수의 작은 단위이고, 늘 우리 주변에서 사용하며 우리 눈 앞에서 항상 보는 측정 단위이다. 우리는 우리 날들의 칫수를 샐 측량 막대나 측량간이나 줄자가 필요 없으며, 우리 날들의 수효를 계산하는 데에 쓰이는 산수의 기술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 날들의 계산에 필요한 척도를 우리의 손가락 끝에 가지고 있으며 또 그것에는 곱셈도 없기 때문에 그러한 것은 필요치 않다. 모두 합쳐 봐야 한 쪽 손의 넓이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의 시간은 짧다. 그리고 우리의 시간은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는데, 이는 "우리의 달 수도 주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윗은 그 시간이 짧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다. 그것은 "주의 앞에는 없는것과 같사옵니다." 그는 "우리의 때가 얼마나 단축한지 기억하고"있다(89:47). 혹자는 이것을 "그것은 주와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라고 해석한다. 모든 시간도 하나님의 영원에게는 보잘 것 없는 것이니, 하물며 우리의 시간이야말로 무엇하랴!
(2) 지상에서의 인간의 삶은 헛되고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러므로 그런 삶에 집착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며 더 나은 삶을 확신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다음은 현세에서는 "인간은 허사로 다"는 면에서 아벨과 같다. 그는 외견상 보이는 그가 아니며 스스로 기대하던 것을 소유하지도 못한다. 그와 그의 모든 위안물은 불확실의 연속선 위에 놓여 있다. 그리고 만약 이 현세의 삶 뒤에 또 다른 삶이 없다고 한다면 만사를 고려하더라도 그는 헛되이 만들어진 셈이다. 그는 헛되다. 그는 사멸하는 숙명을 가지고 있으며 가변적이다.
[1] 여기에서 이 진리가 얼마나 강한 어조로 표현되고 있는지 살펴 보라.
첫째, 사람마다 예외 없이 "허사뿐이니이다."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두가 이 점에서는 일치한다.
둘째, 인생은 "그의 든든히 선 때도" 허사이니, 즉 그가 젊고 강하며 건강이 넘치고 재산과 명예를 얻고 번영의 극치에 있을 때에 헛되다. 그가 아주 편안하고 즐거우며 극히 안전할 때에도 또 그의도 산이 든든히 서 있다고 생각하는 때에도 허사이다.
셋째, 그는 "허사'뿐이니 당신들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헛되다. "모든 사람은 아주 허사이다"(그렇게 해독될 수도 있다). 그에게 관한 모든 것은 불확실하다. 새로운 인간과 관련되는 것 이외에는 본질적이고도 영속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넷째, "진실로' 헛되다. 이것은 의심할 나위 없이 확실한 진리인데도, 흔한 실례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는 이런 진리를 무척이나 믿으려 들지 않아서 우리에게 엄숙히 맹세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다섯째, 주목을 요하는 기호로써 "셀라"가 추가되어 있다. "여기서 멈추고 잠간 쉬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은 허사라는 이 진리를 생각해 보고 적용해 볼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얻도록 하라." 우리들 자신은 진실로 그렇게 헛된 것이다.
[2]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인 인간의 헛됨을 증명하기 위해 다윗은 다음 세 가지 일을 언급하고 그 세 가지가 각각 허사임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6절).
첫째, 우리들의 희락과 명예의 헛됨. "진실로 각 사람은(그가 위풍당당히 걸을 때나 즐거움 가운데서 행할 때조차도) 그림자같이," 영상으로 헛된 모습으로 다닌다. 그가 이채를 띠우며 누각을 나타내더라도 그의 모습은 사라지게 마련이어서 그의 화려한 위의는 큰 환상에 불고한 것이 된다(행 25:23). 그것은 겉모양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무지개와 같은 허상에 불과하다. 그 무지개의 현란한 색깔은 그 토대가 구름이요 증기이기에 반드시 없어지고 말며 금방 사라져 버릴 수밖에 없다. 인생도 그러하며(약 4:14) 따라서 삶의 모든 환락도 그렇다.
둘째, 우리의 슬픔과 공포의 헛됨. "진실로 저희는 헛된 일에 분요하나이다." 우리의 동요는 종종 무근하며(우리는 아무런 정당한 이유도 없이 안절부절 못하게 되며 우리의 고뇌가 우리 자신의 공상과 상상의 산물인 때가 이따금씩 있다). 또 그런 분요는 언제나 무익하다. 우리는 헛되이도 스스로를 불안케 하는데, 이는 우리가 아무리 안달을 낸들 사정을 변경시키지 못하며 하나님의 의향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들에 대하여 아무리 조바심을 낸다고 하더라도 사태는 여전할 것이다.
셋째, 우리의 염려와 수고의 헛됨. 인간은 "재물을 쌓기" 위해 무한한 고심을 하지만, 재물은 뿌려지지 않으면 아무 쓸 데가 없는 밭이랑에 쌓인 퇴비 더미와 같다. 창고마다 쓰레기로 가득 채웠다고 하더라도 그는 "그것들을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한다." 또한 자기가 가버린 뒤에 그 재물들이 누구에게 전해질 것인지도 모른다. 재물들은 인간이 함께 가져 갈 수는 없는 것이다. 인생은"내가 누구를 위해 수고하는고?" 하고 반문하지 아니 하는데 그것은 그의 어리석음이다(전 4:8). 그러나 설령 그가 질문을 제기한다고 하더라도 그 계승자가 현자가 될지 우자가 될지, 친구일지 적일지 구별해 낼 수는 없을 것이다(전 2:19). "이것도 헛되도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탄원 (시편 39:7-13)
시편 기자는 인생의 단명과 불확실성을 관조하고 삶의 모든 위안물에 따르는 심령의 헛됨과 괴로움을 숙고하고 난 뒤에 본 문단에서는 그의 눈과 마음을 돌려 하늘로 향하고 있다. 피조물에게서 확고한 만족을 얻을 수가 없을 때에는 하나님에게서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서 만족이 발견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얻은 실망에 의하여 우리는 하나님께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다윗이 본문에서 표현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Ⅰ. 하나님께 대한 그의 의존(7절). 보이는 모든 것은 헛된 것이며 인간 자체도 그렇다.
1. 따라서 그는 세상사에서 얻는 행복을 단념하며 세상으로부터의 모든 기대도 포기한다. "누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감각과 시간에 속한 것들로부터는 아무 것도 소원할 것이 없으며 희망할 것도 없습니다."인생의 무상과 취약성에 대한 성찰은 이 세상의 일들에 대한 우리의 욕망을 사장시켜 주고 이 세상에서 오는 우리의 기대를 낮춰준다. "만약 세상이 이와 같은 것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의 몫을 소유하거나 구하는 일로부터 나를 구출해 내실 것이다." 우리는 항구적 건강과 번영을 기대할 수 없으며 어떤 관계 안에서도 위로를 고대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은 현재의 우리 존속만큼이나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내가 비록 지금까지는 어리석게도 세상으로부터 이런 저런 일을 즐겨 기대하던 적이 이따금 있었지만 이제 내 마음이 달라졌다."
2. 그는 하나님 안에서 행복과 만족을 붙잡는다.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피조물에 대한 신뢰가 실패로 끝이 날때도 우리에게는 찾아가서 의뢰할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은 우리의 위안이 되며, 우리는 그 사실로 자극받아 믿음으로써 그를 더욱 더 꼭 잡아야 마땅하다.Ⅱ. 하나님께 대한 그의 순종과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에 대한 그의 즐거운 묵종(9절). 만약 저 세상에서의 행복에 대한 우리 소망이 하나님께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모든 섭리에 당연히 만족할 수 있다. "나는 잠잠하고, 불평과 불안 때문에 입을 열지 아니하나이다." 그는 동요되었던 마음(2절)으로부터 이제 평정과 침착을 다시금 회복하였다. 그가 이제 어떤 위로를 박탈당한다고 하든지 간에 또 어떤 십자가를 지게 되든지 간에 그는 편안할 것이다. "주께서 이를 행하신 연고니이다. 그것은 우연히 발생하게 된 것이 아니라 주의 예정에 의거하여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볼 수 있다.
1. 우리와 관련되는 모든 일을 행하시고 모든 사건을 예정하시는 선하신 하나님. 우리는 모든 사건에 관하여 누가 그 도구가 되었든지"이것은 하나님의 손가락이며, 여호와의 일이시다"고 말할 수 있다.2. 바로 이런 이유로 이 일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선량한 인간 그는 벙어리같이 잠잠하고 반대할 의무 것도 발견하지 않고 의문을 제기하지 않으며 하등의 논란을 일으키지도 않는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것은 다 잘 행해지는 것이다.
Ⅲ. 하나님을 향한 그의 희망과 하나님께 고하는 그이 기도,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러면 그로 하여금 여기서의 다윗처럼 다음을 위해 기도하게 하라.
1. 자기 죄의 용서와 수치의 방지를 위하여(8절). "주의 징책을 나에게서 옮기소서"(10절)라고 기도하기 전에 그는 "나를 모든 죄과에서 건지소서(8절)"라고 기도한다. 즉 "내가 걸려든 죄악과 내가 받아 마땅한 징벌, 나를 노예로 만든 장본인인 부패의 권능으로부터 나를 건지소서."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실 때 그는 우리를 그러한 것으로부터 구해 주실 것이며, 우리를 그 모든 것들로부터 건져 내실 것이다.그는 "내가 우매한 자에게 욕을 보지 않게 하소서"라고 탄원하고 있다. 악한 자들은 우매한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조롱함으로써 자기들의 기지를 자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때에 기실 자기들의 어리석음을 가장 심하게 노출하게 된다. 다윗이 하나님께서 자기 죄를 용서해 주시며 그로 하여금 악인의 치욕거리가 되지 않게 해 주십사고 기도할 때에 그 기도는 양심의 평화를 위한 기도로 받아들일 수 있으며"("여호와여, 나를 우울증의 세력에게 내어주지 마소서. 우매한자들은 나의 침울함 때문에 나를 비웃을 것입니다"), 또 그가 악인에게서 지탄받을 일을 할 정도로 하나님께서 자기를 방임해 두지 마시기를 바라는 은혜를 위한 기도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것은 우리가 왜 죄에 대해 경계를 게을리 않고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 즉 우리 신앙 고백인의 명예가 우리의 순전성을 보전하는 것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까닭이다.
2. 그가 현재의 자기 짐에서 한시 바삐 편안하게 될 수 있도록 고통을 제거해 달라고 바라면서(10절), "주의 징책을 나에게서 옮기소서라고 기도했다."우리가 하나님의 징계하시는 손길 아래 있을 때 구원을 원하는 우리의 눈은 하나님 그분께로 직접 향해야 하는 것이지 다른 어떤 자에게 향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타격을 입히는 자만이 그 타격을 없앨 수가 있다. 우리는 우리 죄가 사함을 받을 때에(사 38:17). 그리고 여기에서와 같이 고통이 성별되어 제 할 일을 마칠 때에 우리의 고난이 옮기어지도록 믿음 안에서 만족감을 갖고 기도할 수가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손길 하에서 낮추어지는 것이다.
(1) 그는 자기 불행으로 말미암아 빠지게 된 극심한 곤경을 호소하는데 이것은 그를 하나님의 동정의 적당한 대상이 되게 하였다."주의 손이 치심으로 내가 쇠망하였나이다." 그의 병고는 그의 심령이 약해지고 기력이 피폐해지며 신체가 초췌케 될 정도로 악화 되었다. "당신의 손이 가하신 일격, 혹은 투쟁은 나로 하여금 사망의 문전에까지 이르게 하였습니다."
인간들 가운데에서 가장 강하고 담대하며 훌륭한 자라도 하나님의 진노의 힘 아래에서는 버티어낼 수 없으며, 그것에 대적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것은 그의 경우에 국한되었던 것은 아니었으니, 누구를 막론하고 그 스스로 전능자의 적수가 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11절).
언제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다투시고 우리를 책망하실 때에,
[1] 우리는 그의 공평한 논쟁을 탄핵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그 일에 있어서 하나님이 의로우시다고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가 인간을 징계하실 때는 언제든지 그의 교도는 불법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길과 행위는 우리 자신에게 환난을 불러들일 뿐이며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만들어 낸 매로 맞게 된다. 그것은 설사 "그의 손으로 묶고 얽은"것이(애 1:14)라 할지라도 우리의 범죄의 멍에가 되는 것이다.
[2]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우리와 다투실 때에는, 우리는 그의 논쟁의 효험을 저지시킬 수 없으며, 그는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완강하실 것이다. 우리가 그의 판결을 정지시킬 만한 것을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그 판결의 집행을 회피할 수 있는 길도 우리에겐 없다. 하나님의 견책은 "좀 먹음같이"인간의 "아름다움을 소멸하게 한다." 우리는 신체가 병고로 말미암아 극도로 약해지며 쇠잔해 버리는 일을 흔히 보며 피부로 느끼게 되는 일이 적지 않다. 용모도 변해 버린다. 붉으스레하던 뺨과 입술, 초롱초롱하던 눈, 생기 또는 표정, 그리고 미소짓던 얼굴은 어디로 갔는가? 지금 드러내 보이는 모습은 이와 같은 모든 것들과는 정반대이다. 아름다움이란 것도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 아름다움을 자랑하며 뽐내는 자들이나 아름다움에 빠져 그것을 사랑하는 자들은 그 아름다움이 갑작스럽고 복속하게 쇠잔하게 되는 날에는 얼마나 바보스런 자들이 될 것인가!
어떤 이는 종이 사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따지고 보면 인간도 손가락으로 대기만 해도 쉽게 부서지고 마는 하루살이와 같은 존재인 것이다(욥 4:19). 또 이 좀을 신의 견책을 표현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징책이 조용한 가운데에서 부지불식간에-좀이 의복을 갉아 먹듯-우리를 피폐케 하고 쇠잔케 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그가 이전에 했던 말, 즉 사람은 진실로 허사이며 약하고 무력한 존재이라는 말을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하나님께서 인생과 다투러 오실 때에는 그가 그런 존재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2) 그는 자기의 고난이 주는 유익한 영향을 역설하고 있다. 그는 그 불행을 보내신 목적이 성취될 것을 희망하였고 그리고는 그 괴로움이 하나님의 자비로 옮겨질 것을 바랐던 것이다. 만약에 그 고난이 제 할 일을 완료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설사 그것이 옮겨진다 하더라도 자비에 의해 제거되는 것은 아니다.
[1] 고난은 그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었고 그는 하나님께서 그 점에 주목해 주시기를 희망하였다. 주 하나님께서 애곡을 요구하셨을 때에 그는 그 요청에 응답하였고 그 처분에 순응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믿음 안에서 "여호와여,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할 수가 있었다(12절). 인간의 자손들에게 괴로움과 슬픔을 주시기를 즐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의 자녀에게는 더 더구나 괴로움과 슬픔을 주고 싶지 않으실 것이며 저희 눈물에 잠잠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위한 구원의 말씀을 발하시거나(그가 말씀하시면 그것은 그대로 이루어진다). 아니면 그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희락과 기쁨의 말을 듣게 하실 것이다.
[2] 고난은 그로 하여금 기도하게 만들었다. 고난은 기도를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보내진다. 만약 그것이 그러한 효과를 거두고 우리가 쓰라린 괴로움을 당할 때에 이전보다 더욱 많은 기도를 드리며 더욱 기도를 잘 하게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들어 주시고 우리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여 주실 것을 희망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그가 일으키는 기도와 그의 은혜의 영에 의해서 작성하는 기도는 결코 헛되이 돌아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3] 고난은 그를 세상으로부터 떼어내는 데에 도움이 되었으며 그곳으로부터 그의 애착심을 벗어버리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제 다윗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자신을 그의 모든 열조와 같이"객"과 "거류자"로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이 세상은 본향이 아니라 다른 세계, 즉더 좋은 세상으로 가기 위해 통과하는 여로에 불과하여서, 그는 하늘 나라에 갈 때까지는 자신이 집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으려 하였다. 그는 이 일을 가지고 하나님께 탄원하고 있다. "여호와여, 나를 인정해 주소서. 그리고 내게 부족한 것들과 중한 짐들도 인지해 주소서. 이는 내가 여기에서는 나그네인 연고로 낯선 관례에 부딪치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그네로서 등한히 취급되며 압박을 받습니다. 당신께로부터 오는 구원 이외에, 내가 속해 있는 저 다른 나라에서 오는 구원 이외에 내가 어디서 구원을 기대하겠습니까?"
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잠시만 더 집행을 유예해 주시도록 기도드리고 있다(13절). "나를 용서하사 내가 사망으로 말미암아 여기서 떠나기 전에, 이 세상에서 없어지기 전에 나를 펀안케 하시며 이 병으로부터 나를 들어 올리소서. 그리하여 내가 심신 양면으로 힘을 회복하게 하시고 더 평온하고도 안정된 심정 안에 들어 앉도록 하여서 저 다른 세계를 위해 더 훌륭히 준비할 수 있도록 해 주옵소서."
흑자는 이것이 욥의 경우처럼(욥 10:20, 21) 하나님께서 한시바삐 그에게 도움을 보내 주시어 그 구원이 너무 늦지 않도록 해 주시기를 희구하는 열망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이 구절을 하나님께서 그 은혜에 의하여 이 세상을 떠나기에 알맞도록 하실 때까지 자기를 여기에 존속시켜 주시며, 그의 생명이 끝나기 전에 그가 생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경건한 기도로 받아들이고 싶다. "내 영혼으로 하여금 살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 영혼이 당신을 찬송하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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