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시편 03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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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1

하나님의 권능과 전능하심 (시편 33:1-11)

이 시편 기자는 여기에서 네 가지 사실을 표현하고 있다.

Ⅰ. 하나님께서 찬양 받으실 수 있게 되길 바라는 그의 간절한 소원. 그는 자신이 이 일을 아주 잘 해내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나 타인들도 역시 이 찬양하는 일에 참여하기를 소원하였다. 이 협주에서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더 좋은 것이다. 찬송하는 자가 많을수록 그것은 더욱 하늘 나라에 가깝게 된다.

1. 거룩한 기쁨은 찬양의 심장이고 혼이며, 여기에서 그것이 모든 선량한 사람들에게 강조되고 있다(1절).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이 앞의 32편에서 이 말씀으로 끝을 맺었던 것과 같이 이 시편에서는 다시 이 말씀으로 시작하였다. 그 이유는 우리의 모든 종교적 행사는 존재들 중 최선의 존재이신 또한 친구들 중 가장 좋은 친구이신 하나님 안에서 거룩한 만족과 승리감으로 시작하고 끝맺어야 하기 때문이다.

2. 감사의 찬미는 거룩한 기쁨의 호흡이자 언어이며, 여기에서 그것이 또한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다(2절).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그를 칭송하며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3. 종교적 노래들은 감사의 찬미에 대한 적절한 표현이며 그것이 여기에서 요구되고 있다(3절).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라. 그것은 네가 가진 가장 좋은 노래이며 빈번히 사용하여 진부하게 된 노래가 아니라 새로워서 여지없이 심금을 올릴 새 노래이며, 새로운 긍휼과 모든 경우를 위한 새 노래이고 매일 아침마다 새로운 연민을 위해서 부르는 새 노래이다." 악기가 성전가를 더 잘 부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 당시에 다윗의 명에 의하여 사용되었는데 이것 또한 여기에서 요구되고 있고(2절). "비파로 그를 찬송할지어다."

(1) 이 의무에 대한 훌륭한 규칙이 여기에 나오고 있다. "공교히 그리고 즐거운 소리로 그것을 연주할지어다. 즉 그 연주가 머리와 가슴, 이 양자의 가장 좋은 것을 함유하도록 하여라. 즉 그 연주를 지성적으로 명석한 두뇌로 연주되게 하는 동시에 사랑스럽고 따뜻한 마음으로 연주되도록 하여라."

(2) 또한 이 의무에 대한 타당한 이유가 제기되어 있다.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해야 할 아름다운 일인 까닭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아주 즐거운 일이 되며(찬양의 의복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덧입히시는 아름다움 위에 더 많은 것을 더해 준다)우리의 고백에 대한 훌륭한 장식이 된다. 하나님께 영예를 돌리는 일은 하나님께서 그토록 많은 명예를 부여해 준 '정직한 자들에게 어울리는 일이다." 정직한 자들은 아름다운 모양으로 하나님을 찬미한다. 이는 그것은 그들이 마음으로부터 찬미하는, 즉 저희의 영광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까닭이다. 그 반면에 위선자의 찬미는 "미련한 자의 입에서 나오는 비유"같아서 어색하고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잠 26:7).

Ⅱ.그가 하나님과 그의 무한하신 완전성에 대해 품었던 고귀한 생각(4,5절).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것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알려 주신다.

1. 그의 "말씀"안에서, 여기에서는 그것이 모든 신적 계시를 뜻하는 바 하나님의 잡다한 시대에 다양한 방법으로 인간의 자손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말한다. 그의 말씀은 모두 정직하며 잘못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의 계명은 공평의 규칙과 선악에 대한 영원의 이성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의 약속들은 모두 지혜롭고 선하며 침범할 수 없을 만큼 확실하다. 모두 그의 위협에는 불의가 없으며 그 위협조차도 우리의 유익을 위해 의도된 것으로, 우리로 하여금 악을 포기하게 만든다. 하나님의 말씀은 올바르기 때문에 그 말씀에서 이탈하는 것은 모두 그릇되며, 우리가 그것과 일치될 때 우리도 정당하게 되는 것이다.

2. 그의 "행사"에서 그가 하시는 일들은 모두가 "진실하게' 행하여지는데, 그 모두가 "진리의 글"이라고 칭해지는(단 10:21) 그의 계획에 의거하여 행하여진다. 하나님의 모든 작품 속에 나타난 사본은 영원하신 마음속에 품고 계신 계획, 즉 위대하신 원본과 정확히 부합하며 조금도 변모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행사 속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나타내신다.

(1) 그는 불요불굴의 정의의 신이시라는 것이다. "그는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신다." 그가 내리시는 판결에는 오직 정의가 있을 뿐이며 그 판결의 집행에는 다만 공의가 있을 뿐이다. 그는 자기의 어떤 피조물에게도 그릇 행하지 않았으며 잘못 행할 수도 없으시다. 그는 그릇되게 행하는 자들을 항상 기꺼이 고쳐 주시고자 하며, 그것을 즐거움으로 행하신다. 그는 의로운 자들에게서 기쁨을 얻으신다. 그는 스스로가 의로우신 여호와이시므로 이를 사랑하신다.

(2) 그는 무한 그리하여 관대한 신이시라는 것이다. "세상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즉 땅은 그의 인자하심에 대한 증거와 실례로 가득 차 있다. 땅이 위로부터 받는 자비로운 영향력과 그로 말미암아 땅이 산출해 낼 수 있는 열매, 또 인간과 짐승 모두를 위한 양식 및 세상의 모든 열방이 받는 공통적 축복은-즉 지구 상의 가장 암흑한 지역이나 혹서지와 혹한지, 가장 건조하고 황량한 사막 지대라고 해서 제외되지는 않는다-"세상에 그의 인자하심이 충만함"을 분명하게 나타내 준다. 이 땅이 하나님이 인자하심으로 충만해 있는데도 그에 대한 찬양은 매우 부족하며, 그의 혜택으로 살아가는 군중은 많아도 그의 영광이 되도록 사는 자는 매우 드물다는 사실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Ⅲ. 세계 창조에서 실증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에 대하여 그가 가졌던 확신,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며" 그러므로 그를 "천지의 창조자시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로서 찬양한다. 여기에서도 그와 같이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1. 하나님은 어떻게 이 세계를 만드셨으며 모든 만물을 존재하게 하셨는가?

(1) 얼마나 쉽게 행하셨는가! 삼라만상이 "여호와의 말씀"과 "그의 입 기운으로" 만들어졌다. 그리스도는 말씀이시오, 성령은 호흡이시므로 성부는 세상을 만드시고 그의 아들과 성령을 통하여 그 세계를 다스리시며 구속하신다. "그는 말씀하시고 명하셨으며"(9절) 그것으로 충분하였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인간에게는 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은 두 가지 일이나 하나님께는 그렇지 아니하다. 하나님의 말씀과 영에 의해 세계가 조성되었듯이 작은 세계인 인간도 그렇게 창조되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고 말씀하시고 그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 말씀과 성령에 의하여 저 새로운 세계인 교회가 세워졌으며, 저 새로운 창조, 즉 새로운 인간인 영혼에게 은혜가 역사하셨다.말씀으로 세상을 만드신 능력이라면 무엇인들 하실 수가 없겠는가!

(2) 얼마나 효과적으로 행해졌는가! "그러자 그것은 견고히 섰도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릴은 무엇이나 뜻을 이루신다. 즉 그가 행하시며 그것은 견고히 선다."무릇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전 3:14). 만물이 "하나님의 규례대로 오늘날까지 있음"은 견고히 서 있으라는 그의 명령에 의한 것이다(119:91).

2. 그가 만드신 것은 무엇인가? 그는 만물을 지으셨으나 여기서 주목하는 바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하늘들과 그 만상들"(6절). 즉 가시적인 하늘과 태양, 달, 별 및 그 천체들 또 가장 높은 하늘과 천사들과 천군들이다.

(2) 물들과 그 보고들(7절). 땅은 맨 처음 물에 덮여 있었는데 땅이 물론 물보다 더 무거웠기 때문에 침몰하여 가라앉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자연의 하나님은 태초부터 그가 자연의 통상적 규율과 그의 능력의 일상적 운용에 얽매이지 않으심을 나타내 보이시려고 "저가"말씀으로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같이 쌓으시어" 육지가 나타나도록 하셨다. 그러나 그것들을 무더기로 계속 쌓아 두지 않으시고 "깊은 물을 곳간에 두셨으니." 바다가 저희 침상을 만들고 그 안에서 창고 안에 들 듯 해변의 모래에 의하여 감금되는 평지에 두셨을 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의 눈으로부터 감추어지는 은밀한 지하의 동굴에 두셨다. 또한 그것을 깊은 샘들이 터질 그날을 위하여 흡사 창고 속에 든 것처럼 예비하여 두셨다. 그리고 그 바닷물들은 그 집의 위대하신 주인이 가장 잘 알고 있는 그 사용을 위하여 그곳에 여전히 저장되어 있는 것이다.

3. 이러한 창조는 어떻게 사용되어야 할 것인가?(8절) "온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그를 경외할지어다." 즉 모든 인간의 자손들로 하여금 그를 경배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게 하라(시 95:5, 6). 영구한 복음은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과 바다를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를 경배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계 14:6, 7).

우리는 모두 그를 경외하도록 하자. 즉 그의 진노와 불쾌하심을 두려워하고 그를 우리의 원수로 삼는 일이나 그를 대적하여 맞서지 않도록 하자. 이런 권세를 가진 그는 의심할 나위 없이 모든 권능을 그의 수중에 장악하였을 것이니 감히 그를 노하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천군들은 자기의 군대로 소유하시며 바다의 깊은 곳을 자기 탄약고로 삼으시고 계신 이오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며, 따라서 평화 상태를 희구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렘 5:22).

Ⅳ.하나님의 지고한 주권과 지배에 관해 그가 품었던 만족감(10,11절).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책략을 압제하시어 그것이 그들의 의사에 반대되고 자신의 계획에 유용하도록 만드신다. 와서 믿음의 눈으로 보좌 위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보라!

1. 자기 대적들의 도모를 좌절시키시는 하나님. "그는 열방의 도모를 폐하시며" 따라서 그와 그의 왕국을 대적하여 그들이 궁리해 내는 모든 것은 "허사"로 판명된다(2:1). 아히도벨의 모략은 어리석은 것으로 변하고 말았고 하만의 음모는 좌절되어 버리고 말았다. 비록 그 계획이 아무리 심오한 것이고 그것에 대한기대가 아무리 높다고 하더라도 만일 하나님께서"그것은 서지 못할 것이다. 그 일은 결코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신다면 그것은 모두 전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것이다.

2. 자기 자신의 법령을 성취시키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리라." 그의 계획은 본질상 변경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그가 한 가지 마음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가 그를 돌이킬 수가 있겠는가?" 그의 계획의 실시는 반대 받을 수는 있지만 그 집행은 어떤 창조된 권세에 의해서도 하등 방해를 받을 수 없다. 모든 시대의 변혁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자기의 방침을 바꾸지 않으셨으며 모든 사건 속에서, 심지어 우리를 극히 놀라게 하는 사건에서조차 그의 변함없는 의향은 성취된다. 그 어떤 것도 그의 뜻이 제 때에 실현되는 것을 막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시편을 노래하는 가운데 우리는 자신에 대한 큰 기쁨으로 하나님께 찬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통치하시며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도 무한하신 지혜로 세계를 다스리셨고 우리가 티끌 가운데에서 잠잠하게 될 때도 통치하실 것이라는 이 생각은 얼마나 우리를 항상 편안하게 해 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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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드리는 영광 (시편 33:12-22)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에 대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도록 가르침을 받고 있다.

Ⅰ. 인간의 모든 자손을 향한 그의 일반적인 섭리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비록 인간에게 오성과 자유 의지를 부여하시긴 했으나 인간의 통치는 그 자신에게 유보해 두셨고, 인간이 스스로를 규제하도록 자격을 얻게 되는 그 기능도 하나님 자신이 지배하시도록 하셨다.

1. 인간의 자손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목전에 있으며 그들의 심령까지도 그러하다. 그들 자신 말고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그들의 모든 영혼의 움직임과 운행까지도 하나님은 본인들보다 더 잘 알고 계신다(13,14절). 하나님의 영화스러운 거소는 비록 가장 높은 하늘에 있지만 그는 거기서 온 땅을 조망하고 계실 뿐만 아니라 지상의 모든 거주민을 세세히 감시하기도 한다. 하나님은 그들을 보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하감하시도다." 그는 저들을 정밀하게 살피셔서(여기에 사용된 낱말은 그렇게 번역되는 때도 있다), 너무도 정밀히 바라보셔서 가장 조그마한 생각도 그의 관찰에서는 벗어나지 못한다.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이 천상에 높이 거하시는 고로 여기 이 하계에서 되어지는 일은 그가 주목하시지도 못하며 주의하고자 하시지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나, 비록 그곳이 높은 처소이긴 할 망정 그는 그곳에서 우리 모두를 보고 계시며 모든 사람과 사물은 죄다 그 앞에서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것이다.

2. 그들이 수명뿐만 아니라 심령도 그의 수중에 있다. "저는 일반의 마음을 지으신다." 그는 처음에 그들을 만드시고 그 안에 각 사람의 심령을 형성하셨으며 그리하여 그들은 존재로 생기게 하신 것이다. 이리해서 그는 "영들의 아버지"란 칭함을 받는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이 인생들을 완전히 알고 계신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충분한 논증이 된다. 시계를 만든 기술자는 모든 톱니바퀴의 운동을 설명할 수가 있는 것이다. 다윗은 이 논증을 자신에게 적용하고 있다(139:1, 14). 그는 아직도 사람들의 심령을 조성하고 계시며 마치 강물과 같이 그 자신이 목적에 충당되도록 그 마음들을 자기가 원하는 길 쪽으로 돌이키신다. 인간의 오성을 어둡게도 하시고, 밝히기도 하시며 자기가 사용하고 싶은 대로 그들의 의지를 곧게 하시기도 하고 굽히게 하시기도 한다. 인간들의 심령을 조성하시는 분은 그것들을 비슷하게 만드신다. 그 마음들은 용모와 마찬가지여서 차이가 크게 나며, 너무나 다양하여 어떤 두 개의 얼굴도 정확하게 똑같은 모습이 아니듯이 어떤 두 마음도 정확히 동일한 기질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면에서는 유사한 점이 있어서 모든 얼굴과 모든 마음이 "물에 비취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 같이" (잠 27:19) 일치한다. "그는 그것들을 함께 조성하신다"(어떤 이들은 이렇게 해석한다). 시계의 바퀴들이 비록 상이한 모양과 크기와 운동을 가지면서도 모두 같이 조립되어 하나의 동일한 목적에 사용되듯이, 인간들의 심령과 기질이 상호간에 아무리 다양하고 상호 모순되는 것같이 보이더라도 그것은 모두가 압제되어 단 하나인 신의 목적을 받들게 된다.

3. 그들과 그들이 행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 쉽다. 왜냐하면 "그가 저희 모든 그리하여 사를 감찰하시기" 때문이다. 그는 저희 행위를 아실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달아 보시기까지 하시어, 그가 이 세상의 보수의 날에 심판하시어 각자의 행위를 따라 모든 사람에게 영원토록 갚고자 하신다.

4. 피조물의 모든 힘은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어서 하나님이 없이는 보잘 것 없으며 아무 소용이 없다(16,17절). 어떤 세력도 그를 대항하여 이길 수 있는 것은 없을 뿐만 아니라 그를 의지하지 않고 그로부터 유래된 힘에 의하지 않고서는 행동하지도 못한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영예를 더 해 주는 것이다.

(1) 임금의 강한 힘도 하나니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어떠한 임금도 자신의 제와의 특권이나 자기가 부여받은 권위로 신성불가침이 될 수는 없다. 그런 종류의 권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으로서, 하나님이 만드시는 대로일 뿐 그 이상은 아닌 까닭이다.왕이었으며 청년 시절부터 역전의 군인이었던 다윗도 하나님을 자기의 유일한 보호자요 구주라고 고백하였다.

(2) 군대의 힘도 하나님 없이는 아무 소용이 없다. "많은 군대"도 하나님이 그들의 안전을 보장해 주시지 않으신다면 그들의 명령대로 따르는 자들을 안전하게 보호하지 못한다. 큰 군대라고 해서 승리를 확신할 수도 없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원하실 때에는 한 사람이 일천 명을 쫓아 버리게 하실 수도 있기 때문이다.

(3) 거인의 힘도 하나님 없이는 무용지물이다. 골리앗 같은"용사"도 자기의 날이 떨어지게 되는 때에는 "힘이 커도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도다." 굳세고 날랜 몸이나 강하고 결단력 있는 마음도 하나님이 그에게 주고자 원하시는 성공이 없이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강한 자는 자기의 힘을 자만하지 말라."우리는 모두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안에서 자신들을 강하게 하여 그의 힘 안에서 앞으로 계속 나아가도록 하자.

(4) 말(馬)의 힘도 하나님 없이는 무익하다(17절). "구원함에 말은 헛 것이다." 그 당시 전쟁에서 말은 아주 높이 평가되는 존재였고 사람들이 너무 지나치게 의지하였던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왕들에게 "말을 많이 두지 말도록" 금하기까지 하셨다(신 17:16). 그것은 그들이 말들에게 신뢰를 두고자 하는 유혹을 받음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믿음이 끊어질까봐 염려하신 까닭이었다. 다윗은 수리아인들의 말들에게서 그 발의 힘줄을 끊었었으며(삼하 8:4). 여기에서는 전쟁에서 말이 안전을 도모하는 데에 아무 쓸모가 없다고 선언하며 이 세상의 모든 말에게서 힘줄을 잘라 버린다. 만일 군마가 제멋대로 날뛰고 잘 다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말은 자기 위에 탄 자를 위험에서 구출하기는커녕 오히려 서둘러서 위험속으로 몰아 넣는 셈이 된다. 만약 그 기수가 말 아래서 죽게 된다면 그 말은 그의 생명을 구하기는커녕 죽음의 덜미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총을 확신하는 것이 우리에게 이로우며 그러고 난 다음에라야 우리는 그의 능력이 우리를 위해 역사하시는 것을 확신할 수 있고 우리를 대적하는 것이 무엇이든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된다.

Ⅱ.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에 대해서도 그에게 영광을 드려야 한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고백 가운데에서 여호와를 지기 하나님으로 삼는자들이 복되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는 세계를 지배하시며 그들이 궁핍할 때마다 구해 주실 수단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신 것이다. 이에 반하여 이런 저런 잡신, 즉 바알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자들은 비참하였으니, 그런 신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무감각하고 무력하며, 그들의 말을 전혀 들을 수도 도울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백성은 복되도다"(12절). 이스라엘인은 참 하나님을 알았고 그와 계약을 맺은 복된 민족이며, 하나님을 자기들의 신으로 소유하고 그에 의해서 소유되는 다른 모든 민족들도 축복받게 된다. 그들이 어느 나라 출신이든 간에 그들 또한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이기 때문이다.

1. 그들이 여호와를 그들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고 마땅히 바쳐야 할 곳, 즉 결코 헛되지 아니할 곳에 충성과 찬사를 돌려드리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다.

2. 그들이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기업으로 택하신 백성이고 그가 기뻐하실 뿐만 아니라 영광을 받으시는 백성이며, 사람이 자기 상속인에게 하듯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돌보시며, 교화하시고 개선시키신다는 것은 그들의 행복이다(신 32:9). 이제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것을 관찰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영예를 돌리도록 하자.

(1)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주시(18,19절).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의 자손들을 관찰의 눈으로 모두 다 바라보시나, 그의 은총과 만족의 눈길은 그를 두려워하는 자들 위에만 머문다. 그는 아버지가 자식을 보듯이, 신랑이 그의 배우자를 보듯이 기쁨으로 그들을 바라보신다(사 62:5). 무기와 군대, 전차와 군마에 의존하는 자들은 그들의 기대가 무너지는 가운데 멸망할 터이나, 그 반면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의 보호 하에서 안전할 것이다. 그들과 사망 사이가 한 발자국의 거리에 불과한 것같이 보이는 때에라도 그가 저희의 영혼을 사망으로부터 구출하실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이와 같이 신체를 현세의 죽음으로부터 구해내지 않으시더라도 그 영혼은 영적인 영원한 사망으로부터 구해내실 것이다. 저들의 영혼은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이 세상이나 더 나은 세상에서 살게 하시어 그를 찬미하게 하실 것이다. 그들은 그의 아낌없는 혜택으로 그들의 모든필수품을 공급받을 것이다. 그는 "저희를 기근시에 살게 하시는도다." 타인들이 궁핍으로 죽는 때에도 저희는 살 것이며, 이 사실은 그것을 현저한 자비로 여기에 할 것이다. 눈에 보이는 수단이 실패하는 때에라도 하나님께서 다 그들에게 공급해 주기 위한 또 다른 길을 찾아내실 것이다. 그는 자기가 그들에게 풍부하게 주시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그들은 그러시기를 바라거나 기대할 이유조차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가 저희를 살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은 그말이 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파괴의 심판이 발효 중인 때에라도 우리는 그것을 큰 은총으로 받아들여야 마땅한데, 그 이유는 우리의 생명을 위해 먹을 것을 제공하신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으며 그것은 특별한 은혜를 베푸시는 일인 까닭이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자들은 그가 저희의 도움과 방패가 되신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20절). 그는 역경 중에 있는 그들을 도우실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 난제들을 넘기게 될 것이며 그 어려움을 통하여 하나님의 조력을 받게 될 것이다. 그들이 위태할 때에도 안전하게 하셔서 실제로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게 하실 것이다.

(2) 하나님의 백성들의 그에 대한 주시. 이것을 참작하여 우리도 마땅히 하나님을 주시하여야 한다.

[1] 우리는 하나님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의 움직임을 따라야 하며, 스스로 그것에 순응하고, 끈기 있게 그 결과를 기다려야 한다. 우리의 영혼도 그를 고대해야 한다(20). 우리는 말과 언어로써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존경심을 토로해야 할 뿐만 아니라, 내적으로 성실하고 진지해야 하며, 은밀하고도 잠잠하게 그를 따라야 한다.

[2] 우리는 비록 의지할 만한 명백한 약속을 가지고 있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며"그의 인자하심"과 선함을 "바라지"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과 그의 진노를 두려워하는 자들은 하나님과 그의 자비에 소망을 두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을 피할 수는 없는 것이며 그에게로 피하는 길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대한 성스런 경외심과 동시에 그의 자비에 대한 희망인 이 경건한 기질들을 함께 존재할 뿐만 아니라 서로 서로를 도와준다. 이것은 "그의 성호를 의지하는"일이며(21절). 그는 그 이름을 통해 우리가 그를 섬길 수 있도록 격려하기 위해 모든 일 안에서 스스로를 우리에게 알리셨던 것이다.

[3] 우리는 하나님을 즐거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21절). 하나님을 항상 즐거워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을 참되게 신뢰하지 않는 자들이며, 그들이 믿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이득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희망을 두는 자들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맛보는 영원한 희열의 풍만함을 희망하는 자들인 까닭이다.

[4] 우리는 우리가 희망하고 있는 그 자비를 하나님께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22절).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자비에 대한 우리의 기대는 그에게 대한 우리의 열성을 저지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촉진하며 격려해 주게 된다. 그가 약속하신 것은 우리가 찾을 수 있게 하실 것이며, 그러므로 본 시편은 다음과 같은 짤막하면서도 포괄적인 기도로 끝맺고 있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소서. 우리가 당신께로부터 자비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주께 바라는 대로 언제나 그 자비의 위로와 혜택을 받게 하소서. 즉 우리에게 주신 당신의 말씀 가운데에서 주가 하신 약속대로, 그리고 주의 성령과 은혜를 통하여 당신이 우리 안에서 작용하게 하시는 믿음대로 우리가 항상 그 위로와 혜택을 입게 하소서."

이 시편을 노래 부르는 데에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의뢰심을 내보이고, 그를 향한 우리의 열망을 나타낸다면, 여호와께 우리 마음의 아름다운 가락을 들려드리는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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