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시편 03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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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

복받은 자 (시편 32:1-6)

이 시편 "마스길"이라는 표제를 가지고 있는데 흑자가 이것이 이 시편에 붙여져 노래하도록 한 곡조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뜻하는 또 딴 중요한 바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가 상용하는 성서의 난외주에는 "교훈을 주는 다윗의 시"라고 되어 있는데, 진정한 행복의 성질과 그 행복이 존재하게 되는, 그리고 그에 이르는 길-즉 우리가 행복하기 위하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교훈보다 우리에게 더 필요로 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이 귀절들이 우리에게 교훈하는 몇 가지 사실들이 있다. 우리의 행복은 하나님의 은총에 있는 것이지 이 세상의 재산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즉 영적인 축복에 있는 것이며 이 세상의 좋은 물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일반적으로 여기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말씀이다. 다윗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이 꾀를 좇지 아니한다"(1:1)고 하거나, "행위가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다"(시 119:1)라고 말할 때, 그것은 "이것이 바로 복된자의 특성이다. 그리고 이런 특성을 지니지 못하는 자는 행복할 것을 기대할 수가 없다."라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는 대로 "허물의 사함을 얻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할 때의 의미는 "이것이 그자의 복됨의 기반이며, 그의 행복의 모든 여러 가지 성분이 솟아 나오는 근본적인 특권이다." 라는 뜻이다. 우리가 본문에서 세부적으로 받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Ⅰ. 죄의 사함에 대한 성질에 관하여. 이것은 우리 모두가 필요로 하는 것이며 이것 없이는 파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죄의 사함에 대해 열심히 구하여 알고 싶어한다.

1. 그것은 범죄의 용서이다. "죄악은 율법을 범하는 것이다." 우리가 회개하면 그 범법은 용서함을 받는다. 즉 율법의 선고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부여된 형법에의 의무가 무효화되고 취소된다는 것이다. 그것(죄)은 "들리워지는 답변"(혹자는 그렇게 해독한다), 이는 우리가 죄의 사함에 의해서 무거운 짐으로부터 편안히 벗어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 무거운 짐은 우리의 허리를 꼬부라지게 만드는 등 위의 짐과 같으며, 또 우리를 아프게 하는 위장에 대한 짐이나 우리를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심령에 대한 짐과 같다. 죄의 사함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이들에게(마 11:28) 안식과 위로를 주는 것이다.

2. 그것은 벌거벗은 우리의 수치가 나타나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것을 가리우는 것과 같이(계 3:18) 죄를 가리는 것이다. 우리의 첫조상에게서 나타난 죄의 처음 징후의 하나는 그들 자신의 벌거벗음을 부끄러워한 것이었다. 죄는 우리를 하나님 보시기에 밉게 만들며 그와의 교제에 전혀 적합치 않게 만들뿐더러, 양심이 소생할 때는 우리 자신에게도 역시 미운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죄가 사함을 얻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옷 입혀 주셨듯이(죄의 사함의 표상임) 그리스도의 의로우신 의복으로 가리워져서, 그때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이상 성내시지 않으시고 우려와 온전히 화해하시게 된다. 그러나 그 죄악들은 우리에게서 가리워진 것도 아니고("내 죄는 여전히 내 앞에 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부터 엄폐되는 것도 아니나, 그의 징벌하시는 공의로부터 가리워지는 것이다. 그가 죄를 용서하신다고 하실 때, 그는 "죄를 더 이상 기억치 않으시고 자기 등 뒤로 그것을 내 던지시어서" 그것을 "찾아도 발견할 수가 없게 되며," 죄인은 이와 같이 하나님께 화해됨으로써 비로소 그 자신과 화해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3. 그것은 불법을 전가하는 것이 아니고 그 죄를 죄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도 아니며, 율법의 엄중함에 따라 그 불의에 대하여 그를 고소하는 것도 아니며 그가 당연히 받아야 마땅한 대로 그를 취급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은 우리에게 돌려지고 우리는 "그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로움으로" 되어서 우리의 불의는 우리에게 전가되지 아니 하니,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불의를 그에게 지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그를 죄인으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불의를 전가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행위이시다. 그것은 그가 심판자이시기 때문이다. "의롭다고 여기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Ⅱ. 죄를 용서받는 자들의 성격에 관하여 "마음에 간사가 없다." 그는 "죄악이 없다'고 말하지 않고(살면서 죄짓지 않는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간사"가 없다고 말한다. 사함을 얻은 죄인은 그의 회개의 고백과 신앙 고백에서, 또한 화평과 용서를 구하는 그의 기도에서 하나님께 숨기지 않는 자이다. 그는 이 모든 일에 있어 성실하며, 학식이 많은 해석가가 주해하듯 그가 말하는 대로 또다시 범죄 할 목적을 가진 채 회개하거나 또 다시 회개하겠다는 의사를 가지고 죄를 범하지는 않을 것을 의미한다. 정직한 의향을 가진 자가 말하는 것은 사실 그대로이며, 그들은 참 이스라엘인으로서 그들에게는 간사가 없는 것이다.

Ⅲ. 의롭다고 인정받은 신분의 행복에 관하여. "허물의 사함을 얻은 자들은 복이 있다."그 복은 온갖 종류의 축복으로서 그를 완전하게 복 받도록 하기에 충분하다. 저주를 초래하고 축복으로서 그를 완전하게 복 받도록 하기에 충분하다. 저주를 초래하고 축복을 방해하던 것은 없어졌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 복을 쏟아내리실 것이며, 그 축복들을 다 받아들일 여지가 없을 때까지 주실 것이다. 죄의 용서는 다른 모든 것의 이유와 근거가 되는 언약의 약속 조항이다. "내가 저희의 불의를 궁휼히 여길 것이니라"(히 8:12).

Ⅳ. 자신을 낮추지 않는 죄인의 불행한 상태에 관하여, 그는 자신의 죄악은 보되 그것에 대해 참회의 고백을 하는 데에는 아직 이르지 아니한 죄인이다. 이 점을 다윗은 자기 자신의 슬픈 체험으로부터 매우 애절하게 묘사하고 있다(3,4절).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내 뼈가 쇠하였도다." 자기의 뉘우침을 제재하는 자들은 토설치 않는 자라고 말할 수 있으니, 그들은 죄악의 폐해와 그로 인한 그들의 위험을 보지 않을 수 없을 때에도 그것에 대해 생각지 않음으로써, 가인이 한 성읍의 건설에 전념하였듯이 그들의 마음을 딴 일에 전환함으로 스스로를 편안하게 하려는 자들이다. 즉 "하나님이 그들을 잡아메시는 때에도 부르짖지 아니하는 자들"이다. 또한 그들은 신실하고도 열성적인 기도로써 응당 저희 양심의 짐을 참회의 고백으로 덜지도 않으며 화평을 구하지도 아니 하고, 하나님께서 저희 영혼의 안식을 구하기 위해 정해 주신 방법을 취하기보다는 오히려 저희 자신의 악의 가운데에서 한탄하며 지내기를 택하는 자들이다. 그러한 자들은 억제된 뉘우침이 그들의 뼈 속에서 불덩어리 같은 통증이 되며, 죄악의 상처가 터치지 않은 채 곪아서 참을 수 없을 만치 고통스럽게 악화될 것을 예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양심이 마비되는 경우에는 더 한층 위독한 증세가 된다. 그러나 만일 양심이 깜짝 놀라서 깨어나는 경우에는 그 소리가 들리게 될 것이다. 영혼위에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는 신의 분노의 손길이 느껴질 것이며, 그러한 심령의 고뇌는 신체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다윗도 그렇게 될 정도로 체험을 하여서 젊었을 때에 그의 뼈는 노쇠하여졌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침묵조차도 그가 마치 어떤 지독한 고통과 신체의 질병안에 있는 것같이 그로 하여금 "종일 신음하게" 만들었으니, 그의 모든 불안의 실제 원인은 그의 흉중에서 느껴지는 뉘우침과 타락간의 투쟁이었던 것이다. "자기 죄악을 가리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리다." 회개에는 필히 약간의 내적인 고통이 수반되지만 회개치 않을 때에는 더 나쁜 것이 따르게 되는 것이다.

Ⅴ. 양심의 평화에 이르는 진정하고도 유일한 길에 관하여,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 죄가 사함을 받기 위하여는 우리 죄를 고백하고,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받기 위해서는 그 죄들을 밝히 선포하라는 가르침을 받고 있다. 다윗은 이 과정을 취했다. "내가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더 이상 내 죄악을 숨기지 않았나이다"(5절). 자기 죄악이 사해짐으로써 위로를 받고자 원하는 이들은 그 죄악들을 뉘우쳐 고백함으로써 스스로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우리는 죄악의 사실을 자백해야 하며 그것을 세세히 아뢰지 않으면 안 된다("내가 이러 이러한 일을 행하였나이다") 내가 죄악의 과오를 고백하고 그것을 가중시키며, 그 죄악에 대해서 우리 자신에게 중한 짐을 지워야 한다("내가 아주 사악하게 행하였나이다") 또한 그 죄로 인해 우리가 당하는 징벌이 공의로움을 고백하고("우리에게 내리시는 그 모든 일에 있어 여호와는 공정하시다")우리는 더 악한 죄의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된다-즉"나는 더 이상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을 가지가 없나이다." 우리는 수치감과 성스러운 부끄러움을 가지고 죄를 고백하여야 하며, 두려움과 성스러운 떨림으로 죄를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된다.

Ⅵ. 진정으로 자기 죄를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즉각 죄를 사해 주신다는 것에 관하여 "내가 이르기를 자복하리라 하니(내가 내 죄를 자진하여 솔직히 자백하리라고 진지하게 결심하고 더 이상 주저하지 않은 채 결정하기에 이르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고 내 양심 안에 용서의 위로를 주셨나이다. 그리하여 나를 곧 내 영혼의 안식을 찾았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하심을 얻기 위해 회개하는 때보다도 우리가 그냥 회개하는 때에 더욱 기꺼이 죄를 용서해 주신다. 다윗이 본문에서와 같이 자기 죄를 고백하게 되기까지에는 무척 많은 고심이 따랐었다. 다윗은 고통의 고문을 당하고서야 그 죄를 고백하게 되었으며(3,4절) 마지막 궁지에 몰리기까지는 오래도록 버티면서 항복하지 않으려 하였다. 그러나 그가 굴복하기로 하자 얼마나 신속히 얼마나 쉽사리 그것에 대한 좋은 대가를 받았는가 살펴보라. "내가 자복하리라고 단지 말하기만 하였는데도 주께서 사하셨나이다." 이와 같이 탕자의 아버지는 돌아오는 자기 아들을 보고 "아직 그가 멀리" 있는 데도 달려가 자기의 용서를 보증하는 입맞춤으로 그를 맞이하였다. 불쌍한 회개자에게는 이와 같은 사실이 얼마나 큰 격려가 되는 것인가! 또 "만약 우리가 우리 죄를 자복한다면." "신실하시고 공의로우실" 뿐만 아니라 은혜롭고 자비로우신 "우리 죄를 사해 주기는" 하나님을 찾으리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확신을 주는 것인가!

Ⅶ.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악들을 즉시 사해 주신 사실에서 그가 겪은 경험을 우리도 선용할 것에 관하여(6절).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께 기도할지라."

1. 모든 경건한 사람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이다. 회심한 즉시의 바울을 보라. "보라. 그는 기도하는 중이다."(행 9:11) 우리는 기도없이 살아가는 사람을 발견하기가 더 쉬운 것이다.

2. 죄의 사함을 얻는 자들의 행복과 용서하심을 쉽게 획득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우리에게 내리시는 교훈은 우리를 격려하여 기도하도록 하는데, 특히 "하나님이여, 우리 죄인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기도하게 한다. 이로 인하여 마음을 잘 돌이키는 모든 자들은 하나님께 진지하게 기도하며,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3. 기도로 속히 나아가고자 하는 자들은 여호와를 "만날 기회를 타서"찾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섭리에 의하여 그들을 불러 자기를 찾게 하시고 그의 성령에 의해서 자기를 찾도록 그들을 고무하실 때에 그들은 "속히 가서 여호와를 찾아야" 하며(슥 8:21), 사망이 그들을 멸절시켜 버림으로써 그를 찾기에는 너무 늦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시간을 지체지 말아야 한다(사 55:6).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이다"(고후 6:2).

4. 진지하고 풍부하게 기도드리는 자들은 그들이 고난 중에 처할 때에 그 혜택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아주 위협적인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들에게 미치지 못할 것이며, 그들을 놀라게 하거나 어떤 불안감을 조성하지도 못할 것이다. 하물며 그들을 뒤엎어 버리는 일은 더 더구나 없을 것이다. 의롭고 회개하며 기도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하나님께 구하는 그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자들"은 매우 잘 수호받고 훌륭히 전진하도록 되어 있어 어떤 물결도, 아니, 어떤 큰 물이나 홍수라도 저들에게 미치지 못하며 그들을 상하지 못할 것이다. "악한 자"의 유혹이 "저들을 만지지도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요일 5:18). 이 악한 세상의 환난도 그들을 해치 못한다. 이 두 종류의 불화살은 다 그들에게 미치지도 못한 채 떨어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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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과 성도들에 대한 훈계 (시편 32:7-11)

다윗은 여기에서 자기가 이전에 사하심의 자비로 인하여 위안을 얻었었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Ⅰ. 그는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며, 그에 대한 자기의 신뢰와 기대를 고백하고 있다(7절). 뉘우치는 죄인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감미로움을 맛본 그는 그 은혜가 기도드리는 성도에게 계속되리라는 것을 의심할 수 없었으며, 그 은혜 안에서 안전과 기쁨을 발견하여야 했다.

1. 안전. "주는 나의 은신처이옵니다. 내가 신앙에 의해서 당신께 의지할 때 내가 이 세상에서 편안하며 어떤 실제의 해도 나 자신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할 만한 모든 이유를 보게 됩니다. 주께서 환난에서, 그 환난의 독아와 타격으로부터 충분히 나를 보호하시리이다. 주께서는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처하였던 그런 환난에서부터도 나를 보호하시리이다"(3절).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셨을 때 만약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만 맡겨 두신다면 우리는 곧 전과 마찬가지로 다시 빚지게 될 것이며 꼭 같은 소용돌이 속으로 다시 빠져 들어가 버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유받음으로써 위안을 얻었을 때, 우리는 어리석은 행위로 다시 돌아가지 않고 죄악의 기만성을 통해 우리 마음이 또 다시 강퍅해지지 않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도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죄악으로부터 지키심으로써 그들을 환난으로부터 지켜 주신다.

2. 기쁨. "주께서 나를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시리이다. 내가 어느 쪽 길을 바라보든지 간에 나는 기뻐하고 하나님을 찬양할 만한 기회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내 친구들도 또한 큰 회중에서 나를 에워싸고 나와 함께 찬양의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즉 그들은 저희 구원의 노래를 내 노래와 연합할 것입니다. 경건한 모든 자가 나와 함께 기도드리는 것과 같이 그들은 또한 나와 함께 감사드릴 것입니다."

Ⅱ. 그는 이제 인간의 자손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 자신이 회심하고 난 그는 "그의 형제를 굳게 하기 위하여"(눅 22:32)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행하고 있다. 교훈을 원하는 네가 누구이든지 간에 "나는 너를 훈계하겠으며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리로다"(8절). 이와 같이 그는 그의 다른 회개의 시에서도(시 51:12, 13 절) 하나님께서 구원의 기쁨을 그에게 회복시켜 주시자 범죄자들에게 그의 길을 가르치고 회심한 자들을 위안하는 일과 아울러 죄인들을 하나님께로 회심시키는 일에 자기 할 바를 다 하겠노라고 결의를 굳히고 있다. 솔로몬이 회개하게 되었을 때 그는 주저없이 전도자가 되었던 것이다(전 1:1). 하나님의 은혜를 스스로 경험을 한 자들이라야 타인들에게 그것을 가장 잘 가르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훈계를 직접 받은 자들은 "하나님이 저희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타인들에게 선포해야"하며(시 66:16) 그들에게 그렇게 가르쳐야 한다. "내가 너를 주목하여(내눈으로) 훈계하리로다." 이 말을 하나님의 안내와 지시로 간주하는 사람도 있다. 그는 자기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가르치시며 그의 눈으로 인도하신다. 그의 섭리가 암시하고 변동하는 가운데에서 그의 뜻을 은밀히 시사해 주시며 이로써 자기 백성이 그것을 이해하고 그것으로부터 지시를 받을 수 있게 해 주시는데, 이는 마치 주인이 눈을 한 번 끔벅이기만 하여도 종이 그 의사를 알 수 있게 하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바라보셨을 때 그는 자기 눈으로 그를 인도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오히려 다윗의 교훈을 듣는 자들, 특히 그의 자녀들과 그의 가족들에게 대한 다윗의 약속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내가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교훈을 너에게 주겠으며 그리고 나서 네가 그것을 받아들이는지의 여부를 주시하겠다." 말씀으로 훈계를 받는 자들은 그들을 가르치는 자들의 끊임없는 감찰 하에 있어야 한다. 영적인 안내자들은 감독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죄의 사함을 받는 이들의 복됨에 관한 앞서 나온 교훈을 이렇게 적용함에 있어 우리는 죄인들에게 줄 말씀과 정당하게 나누어 각자에게 저희의 몫을 주고 있다.

1. 여기에는 죄인들에게 대한 경고의 말씀이 있으며 또 그에 대한 충분한 이유가 제시되고 있다.

(1) 그 경고는 규칙을 좇지 않거나 제어할 수 없을 마치 방종하지 말라는 것이다.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처럼 되지 말지어다"(9절). 시편 기자는 자기가 회개한 죄악들에 대해서 자신을 꾸짖고자 했을 때에는 그 스스로를 "하나님 앞에 한 짐승"으로 비유하였고("내가 이같이 우매무지 하오니다"시 73:22) 따라서 타인들에게 그와 같이 되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다. 우리가 오성을 소유하고 있으며 이성의 제어를 받을 수 있고 우리 자신을 설득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영예이며 행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기능을 활용하여 이성적으로 행동하도록 하자.

말과 노새는 "그것들이 가까이 접근하여" 우리를 해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자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혹은(어떤 이들이 해석하는 대로) 그것들이 우리에게 가까이 와서 우리에게 봉사하도록 하기 위하여, 즉' 우리에게 순종케 하기 위해"(약 3:3) 그것들을 단속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것들과 같이 되지 말자. 한시라도 육욕과 정욕에 급급하여 올바른 이성의 명령과 우리의 진정한 이익에 배치되는 일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 만약 죄인들이 이와 같이 올바른 것들에 의해 규제받고 결정된다면 그들은 곧 성자들이 될 것이고 저희 죄악의 길에 더 이상한 발자국도 들여놓지 않게 될 것이다. 은혜가 새롭게 되는 곳에는 은혜를 억제하는 자갈과 굴레가 필요치 않는 것이다.



(2) 이러한 경고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여러분에게 버리도록 설득하는 그 죄악의 길이란 종래에는 슬픔으로 끝나게 되고 마는 것이기 때문이다(10절).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리니," 이것은 그들의 허탄한 육체적 환락을 망치고 파멸시킬 뿐만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그에 대한 대가를 호되게 치르도록 만들 것이다. 죄는 회개되지 않을 경우 슬픔, 즉 영원한 슬픔이 될 것이다. 그것은 "내가 네 슬픔을 크게 더 하리라"는 판결의 일부였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런 슬픔들, 즉 그 많은 비애를 피하기 위하여 스스로 지혜롭고 너희 악에서 돌이키라."

2. 여기에는 성도들에게 대한 위로의 말씀이 있으며 그에 대한 이유도 역시 제시되고 있다.

(1) 그들은 여호와를 신뢰하고 가까이 모시기만 원한다. "인하심이 그들을" 사면 팔방으로 "두르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10절).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지지 않을 것이니 이는 인자하심이 그들을 붙잡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며, 어떤 실제의 해도 그들을 덮치지 못할 것이니, 이는 인자가 그것을 막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러므로 그들은 "즐거이 외칠" 정도로 "여호와를 기뻐하며" 그의 안에서"즐거워할지어다"라고 권고받는다(11절). 그들은 자제할 수 없을 만치 이 성스런 기쁨으로 황홀해질 것이며, 그들은 이로써 타인들에게도 감동을 줄 것이니, 이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즐겁고 안락한 생활이란 곧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이라는 사실을 저들 또한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이야말로 심령이 의로운 자, 그들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와 자격을 부여받은 현세적인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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