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에 대한 감사와 찬미 (시편 30:1-5)
경건한 유대인들이 새 집을 건축했을 때 하나님께 "낙성식"을 올린 것은(신 20:5) 매우 칭찬할 만한 행실이었으며, 비록 특별히 지시되지는 않았을지라도 그것은 허용되었고 용납되었다. 다윗도 그의 집을 건축되었을 때 그렇게 하고 나서 집을 소유했다(삼하 5:11). 왜냐하면 궁궐은 일반적인 집들 못지 않게 하나님의 보호가 필요하며 또한 그의 봉사를 행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거하는 집도 물론 제일 먼저 작은 성소로서 하나님께 봉헌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가족들, 그리고 우리의 모든 가사를 엄숙히 하나님의 인도와 돌보심에 맡겨야 한다. 그의 임재와 축복을 위해 기도해야 하며 우리 자신과 우리의 모든 것을 그의 영광에 바쳐야 한다. 또한 우리가 우리의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한 것과 우리와 우리 집이 가정 예배의 의무를 행하고 모든 면에서 복음에 순종함으로써 주님을 섬길 것을 결의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시편이 다윗이 근친 성교로써 그 집을 더럽혔던 압살롬에 의해 그 곳에서 축출당한 후 다시 그 집에서 낙성식을 행할 때 불리워졌던 것이며, 그것은 그 위험한 반란을 진압시킨 데에 대한 감사를 노래한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이 구절들 속에서,
Ⅰ.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역사해 주신 위대한 구원에 대해 감사 드리고 있다(1절).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이옵니다. 주의 이름을 높일 것이며, 높으시고 들리워지신 자로 주를 찬미할 것입니다. 인간들 가운데 있는 주의 나라의 세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할 것입니다. 나는 주를 격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빠져들어 가는 함정으로부터 나를 들어 올리셨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보좌까지 들어 올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가난한 자를 티끌에서 일으키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들어 올리시기 위해 그의 십리와 은혜로 행하신 위대한 일을 깊이 생각해 볼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매우 보잘 것 없을지라도 감사한 마음으로 온 힘을 기울여 그의 이름을 격찬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 세 가지 사실이 다윗의 구원을 빛 내 주고 있다.
1. 그의 대적들이 격파되었다. 만일 그가 이러한 아픔으로 인해 죽거나 이 환난 속에서 멸망했다면, 그들은 그들이 행했던 것처럼 (비록 야만스런 일이긴 하지만) 그를 이기기 위해 고생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41:11 참조).2. 그의 기도가 응답되었다(2절). "내가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우리가 고통 속에서 느끼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 상달되어야 하며 모든 부르짖음은 그를 향한 것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방법에 의해 우리의 슬픔은 고통스러운 영혼을 편하게 할 것이다. "내가 주께 부르짖으며, 내 부르짖음을 들어 주셨을 뿐만 아니라 나를 고치셨나이다. 병든 몸을 고치셨고, 불안하며 평정을 잃은 마음은 고치셨고, 나라의 잘못되고 혼돈된 일들을 고치셨습니다." 이 속에서 하나님은 영광을 나타내신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하나님임이니라"(출 15:26). 그리고 우리는 그에게 그 영광을 돌려야 한다.
3. 그의 생명이 구원되었다. 즉 그는 음부로 들어갈 정도로 극한 상황에 다다랐고 "무덤으로 내려 갈" 지경이었으나, 구조되어 살게 되었다(3절). 우리의 위험이 급박할수록 우리의 구원은 더욱 귀하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더욱 큰 위로가 되고, 또한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은 더욱 현저하게 증명한다. 사망에서 건져진 생명은 우리 생명의 하나님을 높이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
Ⅱ. 그는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사하신 특별한 은총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에 대한 그의 선하신 의지의 일반적 표징에 대해서 그와 함께 찬미하도록 권고하고 있다(4절).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라!" 하나님께서 자기 것으로 인정한 모든 사람들은 진실한 성도들이다. 이 세상에는 이러한 남은 자들이 있으며 그들에게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이 기대되어진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의 이름과 찬미를 위한 자들이 될 수 있도록 창조되고 성별케 되었으며 성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천국에 있는 성도들이 그를 찬송하는데 하물며 땅에 있는 자들이 어찌 그들과 협력하여 온힘을 기울여 그를 찬송하지 않겠는가?
1. 그들은 그가 흠없고 청결한 하나님이시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그들로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자. "그들로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하게 하라. 그의 거룩한 이름을 찬미케 하라. 거룩함은 대대로 그의 기념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거룩한 하나님이시다. 그의 거룩함은 그의 영광이다. 그것이 거룩한 천사들이 찬미할 때 매우 중시하는 그의 특성이다(사 6:3; 4:3).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자주 언급하고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성도들을 기쁘게 한다. 왜냐하면 그가 그들도 거룩하게, 더욱 거룩하게 해 주시리라는 것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악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완전하심보다 더 큰 두려움을 주는 것이 없으며, 경건한 자들에게는 그의 거룩하심보다 더욱 위로가 되는 것이 없다. 우리가 진심으로 그것을 기억하는 것을 즐거워하고 감사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어느 정도 그의 거룩함이 참여자라는 좋은 표시가 된다.2. 그들은 그가 은혜롭고 자비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체험했다. 그러므로 그들로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라.
(1) 우리의 그의 언짢으신 표정이 매우 짧은 동안으로 국한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비록 우리는 영원히 그의 찌푸리심을 받을 만하고, 그는 우리를 사르실 때까지 우리에게 화를 내실 만하며, 또 결코 화해하시지 않는 것이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노염도 잠간이다"(5절). 우리가 그를 불쾌하게 할 때 그는 노하신다. 그러나 그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쉽게 분노하시지 않는다. 따라서 그가 노하셨을 때 우리가 회개하고 겸손케 된다면 그의 노는 곧 풀리고 기꺼이 우리와 화복 하고자 하신다. 그가 그의 자녀들로부터 얼굴을 숨기시고 그의 은총의 표시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드시더라도, 그것은 "적은 분노"이며 "잠간"동안뿐이다. 반면에 그는 "영원한 자비로 그들을 모으실"것이다(사 54:7, 8).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 그리고 것이 지겨운 밤일지라도 밤의 암흑 후에는 아침의 광명이 확실히 돌아오는 것같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기쁨과 위로가 합당한 때에 곧 돌아올 것이다. 이처럼 은혜의 언약은 그 날의 언약처럼 확고한 것이다. 이 말씀은 때때로 문자 그대로 우리에게 실현되어 왔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했을지라도 슬픔은 곧 끝나고 한숨은 사라진다.
하나님의 노가 오랫동안 계속되는 한 성도들의 울음은 계속된다. 그러나 그것이 잠시에 불과하다면 그 고통도 잠시뿐일 것이며, 하나님의 안색이 회복될 때 환난은 순간적으로 쉽게 걷히고 빛이 선포될 것이다.
(2) 우리는 그이 미소가 매우 감미롭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즉 매우 훌륭하다. 고통 당하는 영혼에게 돌아오는 그의 은총은 죽음에서 벗어난 생명과도 같다. 그것보다 더 소망을 줄 수 있는 것은 없다. 우리의 행복은 하나님의 은총속에 달려 있다. 우리에게 무엇이 부족하든지 간에, 그 은총만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충분히 갖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영혼의 생명이고 영적인 생명이며, 영생의 전조이다.
기도의 찬미 (시편 30:6-12)
우리는 이 구절 속에서 다윗이 계속적으로 처해 있었던 세 가지 상황에 대해 알 수 있으며, 각각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로 향한 그의 마음은 어떻게 역사 되었는가. 즉 그가 무엇을 말하고 그리하여 했으며 그의 마음이 어떻게 감동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이 첫 번째 상태는 우리도 그렇게 되기 쉬운 것이며, 나머지 두 가지 상태는 우리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 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Ⅰ. 그는 오랫동안 형통함을 누렸으므로 점점 방심하게 되었고 그러한 상태가 지속되리라는 지나친 확신을 가졌었다(6,7절). "내가 형통할 때에 내 몸이 건강하고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대적들로 부터 내게 휴식을 주셨을 때에 말하기를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나는 내 몸이 병들거나 나의 정부가 교란되는 것에 대해서는 결코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그러한 위험성을 전혀 깨닫지 못했도다." 그는 그를 대적하던 자들에 대해 매우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고 그의 백성들의 매우 확고한 신뢰를 얻고 있었으며 매우 튼튼한 육신의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형통함이 산처럼 견고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이것을 그 자신의 지혜나 꿋꿋함의 덕택으로 돌리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심의 덕분으로 돌리고 있다.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도다"(7절). 그는 그것을(형통함을 지복으로 삼는 세속적인 사람들이 그러한 것처럼)그의 "천국"으로 간주하지 않고 단지 그의"산"으로 간주하고 있다. 산은 평지보다 약간 높은 땅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이러한 상태가 영원히 계속되리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가 초년 시절에 매우 많은 환난을 당했으므로 그 몫을 다 겪어 말년에는 아무런 환난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거나, 하나님께서 이처럼 그의 은총의 표징을 주셨으니 이제 결코 그에게 얼굴을 찌푸리지 않으실 것이라고 상상했던 것 같다.
1. 우리는 일들이 잘 되어 갈 때 그 상황이 항상 그러할 것이며 결코 변하지는 않으리라는 공상을 갖기 쉽다. "내일도 오늘 같으리라." 그것은 날씨가 일단 화창해지면 계속 청명하리라고 생각하는 것과도 같다. 그러나 날씨같이 변하기 쉬운 것도 없는 것이다.2. 우리의 기대가 잘못된 것임을 알았을 때 우리는 여기에서의 다윗처럼 우리의 어리석은 방심을 부끄러운 마음으로 반성해야 마땅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또 다른 경우에 좀더 지혜롭게 대처하고 우리의 형통함을 즐거워하지 않았던 것처럼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시기는 곧 사라지기 때문이다.
Ⅱ. 갑자기 그는 환난에 빠졌고, 그때에 하나님께 기도하여 위안과 구조를 간곡히 청하였다.
1. 그는 산은 흔들렸고 그도 그것과 함께 흔들렸다. 그가 점점 방심 상태에 들어갔을 때 그가 조금도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마음과 육신 재물로 근심하였나이다." 그의 상황의 모든 변화 속에서도 그는 계속 하나님을 주목했다. 그이 형통함을 하나님의 은총의 덕택으로 돌렸던 것과 같이, 그는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우시는 것이 곤경의 원인이 되는 사실을 곤경 속에서 관찰했다. 하나님께서 얼굴을 가리우신다면 비록 다른 재앙이 내리지 않을지라도 선한 사람은 곤경이 처하게 된다. 해가 지면 분명 밤이 오며, 달과 뭇 별들은 결코 낮을 이룰 수 없는 것이다.2. 그 살이 혼들렸을 때 그는 눈을 들어 그 산 너머를 바라보았다. 기도는 모든 상처를 위한 약이다. 따라서 그는 그것을 사용했다. "환난당하는 자가 있는가?" 괴로워하는 자가 있는가? 그렇다면 "그로 기도하게 하라." 하나님께서 그로부터 얼굴을 가리우셨을지라도 그는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지혜와 공의 가운데 우리로부터 돌아섰다 하실지라도 우리가 그로부터 돌아서는 것은 가장 큰 어리석음이며 상상 할 수 없을 만한 불의가 될 것이다. 오히려 어두움 속에서도 기도하는 것을 배우도록 하자(8절).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하나님의 물러가심은 그의 기도를 더욱 격렬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가 계속 중요시 여기도 있는 것 같이 보이는 내용을 읽을 수 있다.
(1) 그의 탄원(9절).
[1] 하나님은 그의 사망으로 얻는 것이 없으실 것이라는 사실.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것은 그가 죽음으로써 하나님이다. 그의 나라에 진실로 봉사할 수 있다면 기꺼이 죽겠으나(빌 2:17), 영예의 침상에서 죽는 것과는 달리 병상에서 죽어가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는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백성을 무료로 파시어 저희 값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려 하시나이까?(44:12)"라고 말하고 있다.
[2] 더구나 그의 영예를 고려해 볼 때 하나님은 그의 죽음에 의해 손실자가 되는 것처럼 보이실 것이라는 사실. "어찌 진토가 주를 찬송하리이까?' 하나님께로 돌아와 성별케 된 영은 그를 찬미할 것이며, 항상 찬미할 것이다. 그러나 흙으로 돌아가는 진토는 그를 찬미하거나 그의 진리를 선포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 전의 봉사가 티끌에 의해 행해질 수는 없다. 즉 그것은 그를 찬미할 수 없는 것이다. 음부는 침묵의 땅이기 때문에 그 곳에는 계획이나 일함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언약은 진토에게 이루어질 수 없다. 따라서 다윗은 "여호와여, 만일 내가 지금 죽는다면 내게 대한 약속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누가 그 진리를 선포하리이까?"라고 말하고 있다.
기도 속에 있는 가장 훌륭한 탄원은 하나님의 영예로 부터 발췌된 것들이다. 우리가 이러한 관점을 갖을 때 우리는 살아서 그를 찬미할 수 있도록 생명을 올바르게 구할 수 있는 것이다.
(2) 그의 간구(10절). 그를 용서하시는 긍휼과("나를 긍휼히 여기소서")곤궁한 때에 도우시는 은혜를("여호와여, 나의 돕는 자가 되소서")간구하고 있다. 이 두가지 일을 위해 우리는 또한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히 4:16).
Ⅲ. 하나님께서 합당한 때에 그를 환난에서 건지시고 그의 예전의 형통함을 회복시켜 주셨다. 그의 기도는 응답되었고, 그의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었다"(11절).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렀던 것은 잠시뿐이었고 다윗의 울음은 단지 하룻밤 동안이었다. 그가 거룩한 섭리에 겸손히 복종하여 입었던 베옷은 벗겨졌다. 그의 슬픔은 평정되었고, 두려움은 진압되었으며, 그의 위로는 되돌아 왔다. 또한 그는 기쁨으로 둘러싸였다. 기쁨이 그의 장식물이 되었고 힘이 되었으며, 끈이 사람의 허리에 매이듯, 그에게 꼭 달라붙어 있는 것 같았다. 다윗이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때에 번영의 절정에서 환난으로 떨어진 사실이 환난이 얼마나 우리 가까이에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에게 기뻐하지 않는 것처럼 기뻐하도록 가르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번명의 상태가 갑자기 회복된 것은 우리에게 울지 않는 것처럼 울도록 가르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얼마나 빨리 폭풍우가 잔잔해지고 엄청난 강풍이 부드러운 미풍으로 바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의 형편이 이처럼 행복하게 바뀌었을 때 그의 마음 상태는 어떠했는가? 그는 지금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 그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것들을 말하고 있다(12절).
1. 그의 원망은 찬미로 변하였다. 그는 그것을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가 될 수 있도록(삼하 23:1) 그의 "영광으로 하나님을 찬송케"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를 기쁨으로 끝까지 띠 띠우신 것으로 간주했다. 즉 그의 하나(우리의 혀는 우리의 영광이며 그것이 하나님을 찬미하는 일에 사용될 때는 더욱 그러하기 때문이다) 영혼(그것은 모든 짐승들보다 뛰어난 우리의 영광으로서, 주를 찬송하는 데 사용되어져야 하고, 그것으로써 우리는 시편에 곡을 넣어 그를 노래해야 하기 때문이다)이 그를 찬송해야 한다. 침묵을 지켜야 하는 무덤에 있지 않는 자들은 산 자의 땅에서 침묵을 지키지 말고 열렬하고 꾸준하며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찬미해야 한다.2. 이 찬미는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았다. "내가 주께 영영히 감사하리이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을 찬미하는 일을 끝까지 지키리라는 은혜로운 결의를 나타내고, 찬미할 새로운 소재가 결코 부족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가 이러한 것이 영원한 업이 될 곳으로 곧 가게 되리라는 은혜로운 소망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자는 복되도다. 저희는 항상 그를 찬송하리라." 이처럼 우리는 우리와 관련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섭리에, 즉 궁핍함과 풍부함, 긍휼과 심판에 대해 노래해야 하며 이 두 가지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해야 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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