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고한 믿음 (시편 27:1-6)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살펴볼 수 있다.
Ⅰ. 다윗은 얼마나 생동하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안에서 개가를 부르고 있으며 그이 거룩한 이름을, 그리고 그가 얻은 유익을 영화롭게 하고 있는가?
1. "여호와는 나의 빛이시니이다." 다윗의 신하는 그를 "이스라엘의 등불" 이라 불렀다(삼하 21:17). 그는 사실상 타고 있는 그리고 빛나는 등불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가 달처럼 빌어온 빛에 의해 빛났음을 인정하고 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시니이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던지신 빛이 그들에게 반사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의 빛으로서 그들이 의혹 가운데 있을 때 길을 보여 주시고 그들이 슬픔에 잠겨 있을 때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즐겁게 해주신다. 그들은 지금 그의 빛 가운데서 그들의 길을 행하며, 그의 빛 가운데서 영원히 빛을 보리라는 소망을 갖는다.2. "그는 나의 구원이시니 나는 그 안에서 안전하며 그에 의해 구원될 것이다."
3. "그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 위험한 생명의 보호자로서 내가 죽음을 당하지 않게 해 주실 뿐만아니라 내 연약한 생명의 힘으로서 내가 낙심하거나 위축되고 시드는 것을 막아 주신다." 믿는 자의 빛이신 하나님은 그의 생명의 빛이시므로 그는 하나님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고 움직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우리 자신을 강건케 하도록 하자.
Ⅱ. 얼마나 담대한 용기를 가지고 그는 그의 대적들을 이기고 있는가? 믿음에서 나온 용기만큼 견인한 것은 없다. 하나님께서 그를 위하시면 누가 그를 대적할 수 있겠는가?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전능자께서 그의 호위자가 되신다면 그는 두려워할 까닭이 없게 된다. 만일 그가 그러하다는 것을 안다면 그는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빛이라면 그는 어두움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그의 구원이실 때 그는 어떤 무기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이미 패주당한 대적들 위에서 개가를 부르고 있다(2절). 그의 대적들은 "그의 살을 먹으려고" 그에게로 에 대하여 다. 그리고 그 이상의 성공을 거두리라고 확신하고 왔지만, 그들은 넘어지고 말았다. "그가 그들을 죽여 쓰러뜨린 것"이 아니라 "실족하여 넘어진 것" 이었다. 그들은 매우 당황하고 약화되었으므로 더 이상 그들의 계획을 추진시킬 수 없었다. 이처럼 한 마디 말로써 그리스도를 잡으려고 왔던 자들은 비틀거리며 땅에 엎으러졌다(요 18:6). 하나님 백성들을 대적하던 어떤 사람들의 멸망은 그 대적자들 모두가 완전히 정복되리라는 전조이다. 이들이 넘어졌으므로 따라서 그는 나머지 대적들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비록 그들이 무수하여 무리를 이루고 있을지라도 -그들이 대답하고 그들의 공격이 위협적일지라도-한 사람을 대항하여, 즉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칠지라도-그들이 나에 대항하여 전쟁을 벌일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로다. 천군의 주님이 우리를 보호하시면 어떤 군대들도 우리를 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신다는 확신 속에서 내가 안연하리로다." 그는 다음 두 가지 사실을 확신하고 있다.
1. 그는 안전할 것이다. "하나님이 나의 구원이시라면 혼난 날에 나를 비밀히 지키시고 나를 위험과 그 두려움이 벗어난 곳에 두시리라." 하나님은(렘 36:26 에서 처럼) 환난의 날에 그의 백성들에게 피난처를 마련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가 친히 그들의 은신처가 되실 것이다(32:7). 그의 섭리가 그들을 안전케 할 것이며, 적어도 그의 은혜가 그들을 편케 해 줄 것이다. 그의 이름은 곧 그들이 믿음으로써 달려가는 견고한 망대이다(삼상 18:10). "여호와께서 나를, 엔게디 요새(삼상 23:29)가 아닌 장막 은밀한 곳에 숨기시로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임재, 그의 능력 그의 약속 기도를 들으시려는 그의 준비 그의 백성의 마음속에 있는 성령의 증거-이러한 것들이 그의 장막 은밀한 곳이며, 이 속에서 성도들은 그들을 편히 거하게 하는 거룩한 보호와 마음이 평정을 발견한다. 이것은 그들을 흔들리지 않는 바위에 두며 그들은 거기서 그들의 소망에 대한 튼튼한 발판을 발견한다. 즉 그것은 그들을 "바위 위에 높이"두며 거기서는 폭풍우 부는 바다의 거센 파도도 그들을 건드리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보다 높은" 바위이다(61:2).2. 그는 승리할 것이다(6절). "이제 내 머리가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그들의 창이 그곳에 들리울 것이다. "다윗은 여기에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에 의해 승리 앞에서 개가를 부르고 있다. 그리고 월계수뿐만 아니라 면류관도 이미 자기 머리 위에 씌어진 것처럼 그 승리를 확신하고 있다.
Ⅲ. 얼마나 정중하고 진지한 모습으로 그는 거룩한 규례 속에서 하나님과 꾸준히 교제하기를 간구하고 있는가?(4절) 그가 하나님의 의무를 행하고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 질 수 있는 그의 고유의 영역 속에 있었을 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신뢰를 크게 격려했다. 우리가 그 어느 피조물보다도 하나님을 더욱 기뻐했다는 사실을 우리 마음이 증거할 수 있을 때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를 의지하도록 격려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것으로 여기시어 보호하시는 자들 가운데 우리가 속해 있다는 표시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을 이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즉 그는 그를 둘러싸고 있는 대적들로부터 안전하기 위해 여호와의 집에 거하기를 원했다. 그 자신이 위협적인 무리들에게 둘러싸여 있음을 발견했을 때 그는"나의 안전을 위해,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은 내가 그러한 무리들과 겨룰 수 있는 군대를 갖고자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하거나, "그러한 성읍이나, 그러한 성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나로 여호와의 집에 거하고자 하는 것이며, 그것으로 나는 만족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관찰하라.
1.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여호와의 집에 거하는 " 것이었다. 다윗은 여호와의 전 뜰에 묵었던 제사장들 가운데 속하기를 원했다. 하나님의 사역자를 매우 경시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역대의 가장 위대하고 가장 훌륭했던 왕들 가운데 한 사람 이었던 다윗은 기꺼이 그들과 함께 운명을 나누고자, 기거하고자 했다. 또한 오히려 그는 다른 충실한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매일매일 요구되는 의무에 따라 하나님의 성전 봉사를 합당하고 꾸준하게 해나가기를 원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당시에 참여하고 있던 전쟁이 끝나기를 원했다. 그것은 그 자신의 궁전에서 편히 살기 위해서가 아니었고 하나님의 전을 일정하게 섬길 수 있는 여유와 자유를 갖기 위한 것이었다. 다윗의 성실한 아들, 히스기야도 보좌 위에 오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기"위해 그의 건강이 회복되기를 원했다(사 38:2).하나님의 모든 자손은 하나님의 전에 거하기를 바란다. 그들이 거할 곳이 그 외에 또 어디 있겠는가? 단지 하룻밤을 위해 잠시 체류하는 나그네처럼 그곳에 거하거나, 영원히 그 집에 살지 않는 종처럼 잠시 동안만 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그들 생의 모든 날들을 그곳에 거한다. 거기에 아들(그리스도)도 영원히 거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찬미의 하나님이 우리의 영원한 축복이 되시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을 우리 생전 동안의 일로 삼아야만 한다.
2. 그는 얼마나 간절히 그것을 갈망하고 있는가? "이것이 바로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이며, 나는 그것을 구하리이다." 만일 그가 하나님께 한 가지만 부탁하기로 되어 있었다면 그는 틀림없이 이것을 청할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이것을 그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을 하나의 좋은 것으로서 청했다. 그는 여호와께 그이 선물로서 그리고 그의 은총의 표정으로서 그것을 청했다. 그리고 필요한 한 가지로서 그것에 그에 열망을 고정시켰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구했다. 그는 하나님 전에 거하기 위해 계속 기도했고 그렇게 할 자유와 기회를 얻기 위해 그의 일들을 계획했다. 진심으로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원하는 자들은 온갖 힘을 기울여 그것을 구할 것이다.3. 그는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그가 하나님의 집에 거하려는 것은 제물로 잔치를 베푸는 그곳의 풍성한 즐거움이라든가 그곳에서 불리워지는 음악과 좋은 노래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었다. 그가 하나님의 전을 섬기고자 하는 것은 다음 두 가지를 위한 것이었다.
(1) 하나님을 묵상하기 위해서, 그는 여호와의 아름다움, 거룩한 존재와 완전함에 대한 무한하고도 초월적인 온아함을 알고 있었다. 즉 그의 거룩함이 그의 아름다움이며(110:3) 그의 선하심이 그의 아름다움이다(슥 9:17). 그의 모든 속성의 조화가 그이 성품의 아름다움이다. 우리는 믿음과 거룩한 사랑의 눈으로 즐겁게 이 아름다움을 보여 그 속에서 사랑스럽고 경탄스러운 것을 더욱 더 살펴 보아야 한다. 생각을 고정시키고 열렬한 감정에서 나온 거룩한 불꽃을 갖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탁월성을 관조하여 우리에 대한 그의 특유한 은총의 표시를 즐거워해야 한다. 다윗이 여기에서 열망하고 있는 것과 이러한 면에서의 여호와의 아름다움이며, 그것은 그의 규례 속에서 보여질 것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규례를 통해서 그 자신은 나타내시기 때문이다.
(2) 그의 의무에 대해 가르침을 받는 만족을 위해서,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전에서" 그것을 "사모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여호와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이 두 가지 일을 위해 그는 한 가지, 즉 "그의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렇게 하는 자가 복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이야기하고 그로부터 듣는 가운데 항상 주를 찬송할 것이다(84:4).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기 위해 그의 발밑에 앉아 있었을 때 그리스도는 그것을 "필요한 것"이며 "좋은 편"이라고 하셨다.
4. 그는 그것으로 인한 어떤 유익을 그 자신에게 약속하고 있는가?(1) 그가 하나님의 전에 자리 잡기만 한다면 그는 그 곳에서 평안할 것이다. 여기서는 그가 은밀한 곳에 숨겨질 것이므로 환난이 그를 찾지 못할 것이다. 그가 높은 곳에 있을 것이므로 환난이 그에게 미치지 못할 것이다.(5절). 다윗의 후손 가운데 한 사람인 요아스는 여호와의 전에 육년 동안 숨겨져 있어서 칼로부터 보호받았을 뿐만 아니라 면류관을 보유할 수 있었다(왕하 11:3). 느헤미야는 또한 성전을 도망하기에 안전한 장소로 생각하였다(느 6:10). 그러나 믿는 자들의 안전은 성전의 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전의 하나님 안에 있으며, 그들의 위로는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 있는 것이다.
(2) 또한 그는 그곳에서 즐겁고 유쾌할 것이다. 거기에서 그는 기쁨의 제물을 바칠 것이다(6절).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업이 그 품삯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그는 노래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우리의 기쁨의 대상이 되는 것은 모두 찬미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거룩한 의식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섬길 때 우리는 매우 기뻐하고 찬미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를 찬송해야 하는 것은 곧 그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리 대적들 위에 높이 드실 때마다 우리는 찬미로 그를 높여야 한다. "항상 우리를 이기에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2:14).
소망과 기도 (시편 27:7-14)
다윗은 이 구절들 속에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표현하고 있다.
Ⅰ. 여러 가지 탄원 속에 나타난 하나님께 향한 그의 열망. 지금은 여호와의 집으로 올라갈 수 없을지라도 그는 어디에 있든지 간에 은혜의 보좌로 가는 길을 기도를 통해 발견할 수 있었다.
1. 그는 겸손히 청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은혜로운 청종을 얻으리라는 것을 확고하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여, 내가 마음으로 뿐만 아니라, 간곡히 원하는 자로서 소리로 부르짖을 때에 들으소서." 그는 또한 화평의 응답을 청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기대하고 있는 것은 그 자신의 공로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나오는 응답이다. 즉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7절). 우리가 기도하고 믿는다면 하나님은 은혜롭게 들어주시고 응답하실 것이다.2. 그는 하나님께서 이 의무를 행하도록 그에게 보내 주신 친절한 초청을 포착하고 있다(8절). 우리가 부름 받지도 않고서 왕들의 왕이신 자가 계신 곳으로 가는 것은 무례한 일이며, 그가 "우리에게 긍휼을 드시지" 않는 한 우리는 그곳에 확신을 갖고 가까이 갈 수 없다. 그러므로 다윗은 기도를 드리려 할 때 그의 생각을 하나님께서 은혜의 보좌로 그를 부르신 것에 두고, 관례대로 그에게 내밀어진 긍휼의 끝을 경건하게 만지고 있다.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또는 주에 "대해" 말하되"저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였나이다." 그는 그것에 대해 먼저 숙고한 다음 그것을 다시 자기 자신에게 가르치고 있다(그것은 가장 훌륭한 가르침이며 하나님이 한 번 말씀하시는 것을 두 번 듣는 것이 된다)즉 "주께서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시나이다"(그것을 이렇게 보충할 수도 있다). 주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을 묵상하고 난 뒤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라고 경건하게 결단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을 살펴보자.
(1) 신앙적인 경배의 참된 본질. 그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율 속에 있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 자신을 위해 그를 찾도록 만드실 것이고, 그의 은총을 우리의 주요 선으로 삼도록 하실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곧 성도들의 목적이며 소망이 된다.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그리고 그 외의 것은 아무 것도 따르지 아니하리이다." 주가 손을 펴 실때 모든 생물의 소원이 만족케 될 것이다(145:16). 그러나 살아 있는 영혼의 소원을 만족케 하는 것은 그의 얼굴에서나 오는 빛뿐이다.(4:6, 7)
(2) 이 의무에 대한 은혜로운 하나님의 친절하신 초청. "주께서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시나이다." 이것은 허락일 뿐만 아니라 계율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찾으라는 그의 명령은 발견하게 되리라는 약속을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매우 친절하시므로 "나를 헛되어 구하라"고 말하시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에게로 전향하고 그와 더불어 대화함으로써 그의 얼굴을 찾도록 권고하신다. 그는 그의 성령이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와 더불어 속삭이도록 하심으로써 우리가 그의 얼굴을 찾도록 하신다. 즉 그는 그의 말씀으로, 그를 섬기기 위한 정해진 기회로, 그리고 인자하며 동시에 쓰라린 특별한 섭리로써 우리를 부르신다. 우리가 어리석게도 허탄하고 거짓된 것에 아첨할 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그에게서 우리 자신의 긍휼을 찾도록 부르고 계신다.
(3) 이 초청에 대한 은혜로운 영혼의 기꺼운 응락. 그 부르심은 즉시 응답된다.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그 부르심은 일반적인 것이었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리이다"하고 적용시켜야 한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가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시킬 때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으며 우리는 그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 그 요청은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는 것이었고 그 응답은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라고 표현되어 있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렘 3:22)라는 응답이 있다. 하나님의 권능의 부르심을 기꺼이 반향하는 것이다.
3. 그의 요청은 매우 독특하다.
(1) 그는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고 있다. 그것은 그가 그것에서 도외시당하지 않기 위한 것이다(9절). "여호와여, 주의 계명에 순종하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그러하오니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나로 주의 은총이 소생되는 것을 느끼지 못하게 하지 마소서. 나를 사랑하시고 주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려 주소서.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그는 그가 하나님의 역정을 받을 만하였다는 사실을 시인하고 있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징계하시는 한이 있더라도 그를 그의 존전에서 버리지 말기를 간청하고 있다. 그에게서 버림당하는 것이 곧 지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2) 하나님께서 계속 그와 함께 사실 것을 구하고 있다. "주는 이전에도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그러하오니, 내가 주께로 가지 않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나를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마옵소서. 주의 능력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그렇게 되면 나는 힘이 없어질 것입니다. 주의 선하신 의지의 표적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그렇게 되면 나는 위로를 잃게 될 것입니다.
(3) 거룩한 길잡이의 혜택을 구하고 있다(11절). "여호와여 주의 길로 나를 가르치시고, 나로 하여금 내게 대한 주의 섭리의 의미를 깨닫게 하시고 분명히 알게 하소서. 그리고 의혹에 쌓여 있을 때는 언제나 나의 의무를 알게 하시어 내가 실수하지 않고 올바로 행할 수 있도록, 내가 주저함이 없이 확고하게 행할 수 있도록 해주시옵소서." 우리에게 우리 의무의 길을 가르치고 그것을 지키도록 해 주는 것은 수단이 아니라 솔직함(즉 매우 정직함)이다. 그는 "그의 원수로 인하여" 또는 (난외 대로) 그의 "관찰자"로 인하여"평탄한 길로"인도되기를 청하고 있다. 그의 대적들은 그를 칠 기회를 찾기 위해 그가 멈추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사울은 다윗을 주목했다(삼상 18:9). 이것은 그로 하여금 이렇게 기도하도록 촉구했다. "주여 나를 평탄한 길로 인도하소서. 그리하여 그들이 나를 책망할 만한 흠이나, 흠으로 보이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게 하소서."
(4) 거룩한 보호의 혜택을 구하고 있다(12절). "내 생명을 내 대적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여호와여, 그들이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게 하소서. 왜냐하면 그들은 내 생명을, 아닌 그보다 더한 것을 노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의 능력이 그들의 양심을 다스리지 않는 한 나는 그들을 방어할 힘이 없습니다. 위증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함이니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나의 명성이나 재산을 빼앗는 것 이상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악을 토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갈구하는 것은 피, 귀한 피 입니다."
여기에서 다윗은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왜냐하면 거짓 증인들이 일어나서 그를 쳤고 그들은 악을 토하는 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악인의 손에는 넘겨졌을지라도 그들의 뜻에는 맡겨지지 않았다. 그들은 그의 높이 들리우심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Ⅱ.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하나님께 의지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1. 모든 도움과 구조가 끊어졌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도와주시고 구조해 주시리라고 믿고 있다(10절). "내 부모는 나를 버렸을 때, 내가 이 세상에서 큰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 나의 가장 가깝고 귀한 친구들이 죽거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내가 곤경에 처한 때에 도울 능력이 없거나, 또는 내게 불친절하며 관심을 두지 않고 나를 도우려 하지 않을 때, 내가 부모없는 불쌍한 고아처럼 어찌할 수 없을 때, 그때에 불쌍하게 유리하는 양이 보호받아 죽음에서 구해지는 것처럼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그는 그를 의지하는 자들에게 모든 도움이 끊어졌을 때, 그것이 주로 그의 영예와 그들의 위로를 위한 것일 때 그들을 도와주신다. 그에게서 "아비 없는 자들도"그에게서 "자비를 얻으리라." 버림받은 고아들은 거룩한 섭리의 특별하신 보호 아래 있어 왔고, 그것은 사람들이 예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그들을 위로해 주고 친구가 되어 주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세상 부모들보다도, 그들이 될 수 있는 것보다도 더 든든하고 좋은 친구이시다.2. 합당한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볼 것이라고 믿고 있다(13절). 그는 "산 자의 땅에서 여호와의 은혜를 볼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면 그는 고통 속에서 "쓰러졌"을 것이다. 가장 훌륭한 성도들까지도 그들의 고통이 심하고 괴로울 때는 쓰러지기 쉬울 것이며, 그들의 영은 압도되고 몸과 마음은 지쳐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때에는 믿음이 특효 있는 활력제가 된다. 그것은 그들이 고통 가운데에서 낙심하지 않도록 하고 위로가 끊겨 실망하는 일이 없도록 해 준다. 그리고 계속 소망을 갖고 기도하고 기다리게 해 주며, 하나님께 대해 선한 생각을 유지하고 스스로 편안한 즐거움을 갖도록 해 준다.
그러면 다윗이 쓰러지지 않도록 해 준 것은 무엇에 대한 믿음이었는가? 그것은 지금은 멀리 있는 것같이 보이는 "여호와의 은혜를 볼것"이라는 것이었다. 믿음으로 여호와의 은혜 가운데 행하는 자들은 합당한 때에 그 은혜를 보는 가운데 행하게 될 것이다. 그는 이것을 산 자의 땅에서 보기를 원하고 있다.
(1) 즉 이 세상에서 보기를 원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그는 고통을 극복하게 될 것이며, 그 속에서 파멸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산 자의 땅을 보게 되리라는 것은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리라는 것 못지 않게 그의 위로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은혜로운 영혼에 대한 육체적 쾌락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2) 가나안의 땅, 그리고 생명의 지성소가 있었던 예루살렘에서 보기를 원하고 있다. 죄 가운데 죽어 있었던 이방 나라와 비교해 볼 때 이스라엘 땅은 "산 자의 땅"으로 불리운다는 것은 매우 합당할 것이다. 거기에서 하나님이 알려지셨으며, 다윗은 그 곳에서 그의 은혜를 보기를 바라고 있다(삼하 15:25, 26 참조).
(3) 또한 천국에서 보기를 원하고 있다. 이것은 진실로 산 자의 땅이라 불리울 수 있는 유일한 땅이다. 그곳에는 더 이상 죽음이 없기 때문이다. 이 땅은 죽은 자의 땅이다. 우리를 이 현재의 모든 재앙에서 질식하지 않도록 지켜 주는 데에는 영생에 대한 믿음의 소망, 그 영광에 대한 통찰, 그리고 그 즐거움에 대한 예상 이상의 것은 없다.
3. 그 동안에 그가 그의 고통을 참을 수 있을 정도로 강하게 되리라는 것을 믿고 있다(14절). 그가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말하든 아니면 그의 친구들에게 말하든지 간에 그것은 모두 마찬가지며 그것이 그를 격려해 주고 있다.-즉 그가 네 마음을 강하게 하실 것이며 그 영을 부축하실 것이다. 그러면 그 영은 연약함을 뒷받침해 줄 것이다.
(1) 그 힘으로 하나님과 너의 의무를 철저히 지키라. 믿음과 기도로, 그리고 그의 뜻을 따르려는 겸손한 마음으로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내가 말하노니,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네가 무엇을 하든, 하나님 섬기기를 게을리하지 말라.
(2) 그 힘으로 큰 환난과 곤경 가운데에서 네 영을 지키라. "담대하라." 하나님을 의지하여 네 마음을 견고케 하고 네 마음을 그에게 두라. 그리하여 이 어느 것도 너를 요동케 하지 못하게 하라. 하나님을 바라는 자들은 담대해질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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