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시편 02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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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

거룩한 목자 (시편 23:1-6)

다윗은 이 시편에서 세 가지의 매우 위안을 주는 전제로부터 세 가지의 매우 즐거운 결론을 이끌어 내고 있으며, 우리도 역시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소망에 의해 구원을 얻으며 그 소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소망은 굳건한 토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주 하나님 안에서 격려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와 우리와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그리고 그 관계에 따라 우리가 체험한 그의 선하심 속에서 위로를 얻도록 지시 받고 있다.

Ⅰ.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목자이시므로 그에게 유익한 어느 것도 부족함이 없으리라고 추론하고 있다(1절). 여기에서 다음을 살펴보라.

1. 하나님은 믿는 자들을 크게 돌보신다. 그는 그들의 목자이시며, 그들은 그를 그렇게 부를 수 있다. 다윗 자신이 목자였던 때가 있었다. 그는 젖양을 지키는 중에서 택함을 받았었다(78:70, 71). 그러므로 선한 목자가 그의 양떼들에게 갖는 자상한 관심과 돌보심을 경험으로써 알고 있었다. 그는 그들이 얼마나 목자가 필요한가 그리고 노련하고 성실한 목자가 그들에게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가를 회고했다. 그 목자는 한때 한 마리의 양을 구하기 위해 그의 생명을 내건 적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에 의해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돌보심을 예증하고 있다. 우리 구세주께서 "나는 양들의 선한 목자라"(요 10:11) 하고 말씀하신 것은 이것을 언급하는 것 같다. 이스라엘의 목자이신(80:1), 보편적으로 온 교회의 목자이신 그는 믿는 자들 개개인의 목사이시다. 그는 가장 보잘것 없는 자라도 경히 여기지 않으신다(사 40:11). 그는 그들을 품에 안으시고, 양떼를 지키는 목자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욱 주의 깊고 꾸준하게 돌보시고 보호하시며 공급해 주신다. 만일 하나님께서 목자와 같으시다면 우리는 양들처럼 순종하고 온순해야 한다. 양털깎는 사람 앞에서처럼 조용해야 하며, 또 도살자 앞에서처럼 유순하고 잘 복종해야 한다. 우리는 목자의 음성을 알고 그를 따라야 한다.

2.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 커다란 신뢰를 갖고 있다. "만일 주님이 나의 목자, 나를 먹이시는 자라면 나는 내게 정말 필요하고 유익한 것은 그 어느 것도 부족함이 없으리라고 단정할 수 있다." 만일 다윗이 이 시편을 그가 면류관을 얻기 전에 지었다면, 비록 그것이 그에게 예정되어 있었을지라도 그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부족함을 두려워할 만한 이유를 많이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한때 그는 나발에게 청을 하러 그의 사람을 보냈었고 또 어느 때는 그 자신이 직접 아히멜렉에게 다시 요청을 했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목자라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그는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다.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를 자기들을 먹이시는 자로 삼는 자들은 굶어죽을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 표현에는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라"라는 뜻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은 뜻도 내포되어 있다. "나는 필요한 것은 무엇이나 공급받을 것이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면 나는 그것이 내게 합당치 않거나 유익하지 않다고 또는 합당한 때에 그것을 갖게 되리라고 단정할 수 있다."

Ⅱ. 하나님께서 그에 대한 선한 목자로서의 직책을 이행하신 것으로부터 그는 그가 당하게 될 큰 위험이나 어려움에 대해 어떤 두려움도 느낄 필요가 없음을 추론하고 있다(2-4절). 그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어 돌보아 주시는 이로움을 체험하고 있으므로, 그가 그 유익을 매우 필요로 할 때 그것을 또한 얻으리라고 기대하고 있다. 다음을 살펴보자.

1. 살아 있는 성도들이 얻는 위로, 하나님은 그의 목자이시며 하나님은 모든 의도와 목적을 충족히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다. 다윗은 하나님이 그러하심을 발견했으며 우리도 그래야 한다. 하나님의 초장에 있는 양들과 같은 성도들의 행복을 보라.

(1) 그들은 좋은 곳에 안치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도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손으로부터 이 생애의 도움과 위로를 받고, 우리 아버지 되시는 그로부터 매일의 양식을 얻는다. 그 충만함이 악인에게는 메마른 초장에 지나지 않는다. 악인은 오직 관능적인 즐거움만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즐거움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고 비록 세상에 속한 것은 거의 갖고 있지 않을지라도 믿음으로써 그것을 즐기는 자들에게는 푸른 초장이 된다(37:16; 잠 15:16, 17). 하나님의 명령은 곧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고 있는 푸른 초장이다.

하나님은 그의 성도들로 눕게 하신다. 즉 그들의 운명이 어떠하든지 간에 그들 아음에 평안함과 만족함을 주신다. 그들의 영혼은 그의 안에서 편히 거하며 모든 초장을 푸르게 만든다. 우리는 명령의 푸른 초장으로 축복받고 있는가 그곳을 지나가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기지 말고 그 위에 눕고 거기에 거하도록 하자. 이것은 영원한 나의 안식이다. 영혼이 살찌는 것은 꾸준한 은혜에 의한 것이다.



(2) 그들은 잘 안내받고, 인도된다. 이스라엘의 목자는 요셉을 양과 같이 인도하신다. 그리고 모든 믿는 자들은 그와 같이 인도아래 있다. "그가 나를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먹고 사는 자들은 그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 그는 그들을 그의 섭리로써, 그의 말씀, 그의 성령으로써 인도하신다. 그의 뜻대로 가장 선하게 그들의 일을 처리하시며, 그의 명령대로 그들의 감정과 행동을 주관하시고, 그들의 눈과 길과 마음을 그의 사랑 안에 두도록 지시하신다. 그가 그들을 인도하시는 쉴 만한 물가는 유쾌한 전망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목마르고 피곤할 때 풍성한 청량제와 활력제를 준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음식과 휴식뿐만 아니라 원기회복과 즐거움도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위로, 성령의 기쁨은 곧 이 쉴만한 물가이며, 성도들은 살아 있는 물의 근원에서 흘러나오고 우리 하나님의 성을 기쁘게 만드는 시냇물가로 인도된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부패하고 더러운 물이 고여 있는 물가나 사나운 바다, 급히 흐르는 강으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잔잔하게 졸졸 흐르는 물가로 인도하신다. 잔잔하게 흐르는 물은 하나님을 향해 조용히 흐르는 그들이 심령과 가장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베풀어진 거룩한 인도하심은 이것에 대한 은유를 벗겨 주고 있다(3절). 즉 그가 나를 "의의길로," 의무의 길로"인도하시도다." 그 속에서 나를 그의 말씀으로 가르치시며 양심과 섭리로 지시하시는도다. 이 길은 모든 성도들이 인도받고 지키기를 원하며, 결코 거기서 빗나가지 않기를 원하는 길이다. 이렇게 의의 길을 행하는 자만이 위로의 잔잔한 물가로 인도받는다. 의무의 길은 진실로 즐거운 길이다. 화평한 것은 의의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길로 그리고 이 길에서 인도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행할 수 없는 것이다.

(3) 어떤 것이 그들을 괴롭힐 때 그들은 충분히 도움을 받는다. 그가'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도다".

[1] "내가 방황할 때 나를 소생시키신다. "양처럼 쉽게 한눈을 파는 짐승은 없을 정도로 양들은 길을 잃어버리기 쉽고 또 길을 찾아 되돌아 오기가 어렵다. 가장 훌륭한 성도들도 "잃은 양같이 유리하는" 자기들의 성향을 깨닫는다(119:176). 그들은 길을 잃고 샛길로 접어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들의 잘못을 보여 주시고 회개케 하시고 다시 그들의 의무로 돌아 오게 하심으로써 영혼을 소생시키신다. 만약 그가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면 그들은 끝없이 유리하여 파멸했을 것이다. 한 가지 죄를 범했을 때 다윗의 마음이 그를 징계했고, 또 다른 죄를 범했을 때는 나단이 보내어져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그에게 말해줌으로써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소생시키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죄에 빠지게 하실지라도 그들로 하여금 계속 그 속에 누워있게 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2] "그는 내가 병들 때 나를 회복시키시고, 내가 기진할 때 활력 있게 해 주시며 내가 거의 죽게 되었을 때 영혼을 소생시키신다." 그는 우리를 치료하시는 우리 주 하나님이시다(출 15:26). 우리가 믿지 않았다면 여러 번 활기를 잃었을 것이며, 우리를 기절하지 않게 하시는 것은 선한 목자이시다.

2. 죽어가는 성도들의 용기를 보라(4절). 지금까지 여섯 번, 일곱 번 환난을 겪을 때에 "나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체험했으므로 나는 결코, 마지막 극한 상황에서도 그를 불신하지 않으리라. 여지껏 나를 위해 모든 일을 행하신 것은 나의 어떤 업적이나 공로 때문이 아니고, 단지 그의 이름을 위해 그의 말씀을 준행하고 그의 약속을 이행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 자신의 특성과 그의 백성과의 관계에 대한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이름은 계속 나의 강한 성이 될 것이며, 나를 일생 동안 인도하시고 먹이시는 그가 끝까지 나를 떠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확신케 해 주실 것이다. 여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절박한 위험이 가정되어 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즉 죽음의 위험 속에 놓일지라도, 골짜기처럼 깊고 그림자처럼 어두우며 죽음 그 자체처럼 두려운 위험 가운데 처할지라도," 또는 오히려"내가 죽음에 사로 잡히고 나 자신 안에 죽음의 판결을 닫으며 모든 면에서 이 세상에서 죽어가는 자로 여길 수밖에 없을지라도, 나는 평안하리라." 병든 자들과 연로한 자들은 자신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있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여기에 정말 끔찍스럽게 여겨지는 한 마디 말이 있다. 그것은 "사망"이라는 말로서. 우리가 항상 생각해야 하는 문제다. "이 전쟁에서 벗어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사망에 대한 가정 속에서도 두려움을 약화시키는 네 가지 단어가 있다. 즉 우리 앞에 있는 것은 정말로 사망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에 불과하다.

[1] 사망의 "음침함"(그림자)이다. 그 속에는 본질적인 해는 없다. 뱀의 그림자가 독을 뿜을 수 없으며 칼의 그림자가 죽일 수는 없는 일이다.

[2] 정말 깊고, 어둡고 더러운, 음침한 "골짜기"이다. 그러나 골짜기는 비옥하므로 죽음 자체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비옥한 위로가 된다.

[3] 이 골짜기를 "다니는"것에, 한가하고 즐겁게 걷는 것에 불과하다. 악인들은 이 세상에서 쫓겨나며 그들의 영혼은 요구 당한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 세상을 떠날 때처럼 즐겁게 저 세상으로 간다.

[4] 골짜기로 통과해(trough) 다니는 것이다. 그들은 이 골짜기에서 잃어버리지 않고 저편에 있는 향기의 산에 안전하게 다다를 것이다.

(2) 이 위험은 훌륭한 근거에 의해 경하게 될 것이고, 또 극복될 것이다. 사망은 두려움의 왕이나 그리스도의 양들에게는 그렇지 못하다. 그들은 도살당할 양이 그러한 것처럼 사망에 대해 떨지 않는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이 어느 것도 나를 요동케 하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자녀는 마음의 거룩한 안심과 평정을 갖고서 죽음의 사자를 맞이하고 그 소환에 응할 수 있을 것이다. 젖먹는 아이는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할 수 있다. 그리고 은혜로 말미암아 이 세상을 떠나는 어린 아이는 "사망아네 쏘는 것이 어디 있는가"라고 바울처럼 죽음에 거룩한 도전을 하면서 뱀의 굴에 손을 넣을 수 있다. 이러한 확신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1]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악이 없기 때문이다. 사망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에게 실질적인 권력을 휘두를 수 없다. 그것은 몸을 죽이나 영혼을 건드리지는 못한다. 이처럼 해로운 것을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왜 두려워해야 하겠는가?

[2] 성도들은 죽어가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은혜로운 임재를 얻기 때문이다. 그때에 그는 그들의 우편에 계신다. 그런데 왜 그들이 요동하겠는가? 선한 목자께서 그의 양들을 먹이를 노리는 짐승들이나 으르렁거리는 이리들에 의해 공격당할 위험이 있는 이 골짜기에서 지휘하고 호송하신다. 그는 그들을 호위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위로를 매우 필요로 할 때 그들을 안위하실 것이다.

그의 임재는 그들을 안위해 줄 것이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그의 칼과 성령이 "그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그들을 안위하실 것이다. 이것은 목자의 지팡이나 양들을 세기 위해 그 아래로 통과하게 했던 막대기(레 27:32), 양들을 흩어지게 하거나 못살게 구는 개들을 쫓아내기 위해 목자가 썼던 장대를 언급하고 있다. 성도들이 거의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지하시고("그는 자기에게 속한 자들을 아신다"), 그 원수를 꾸짖으시며, 그들을 그의 막대기로 안내하시고 그의 지팡이로 떠받치시리라는 것은 그들을 안위해 준다. "복음은 주의 권능의 홀"이라 불리우고 있으며(110:2), 그 속에는 성도들이 죽게 될 때 그들을 위로 하기에 충분한 것들이 있다. 그들 "아래"에는 "영원하신 팔"이 계신 것이다.

Ⅲ. 하나님이 그에게 하사하신 좋은 선물에서 그는 그의 인자하심이 견고하고 영원하다는 사실을 추론해 내고 있다(5,6절).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살펴볼 수 있다.

1.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롭게 베풀어 주신 것을 매우 높이 찬양하고 있다(5절). "주께서 내게 상을 베푸시나이다. 주께서 나를 위해 생명과 경건함를 모두 지킬 수 있는 것들을, 현세와 내세에서 육신과 영혼 모두에 필요 불가결한 것들을 모두 마련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의 모든 백성들에게 관대한 은인이시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그의 선하심을 크게 표명하도록 만든다. 다윗은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1) 하나님은 좋은 음식을 갖고 계셨다. 베풀어진 상과 가득 채워진 잔, 그의 굶주림을 채울 고기, 갈증을 채울 음료를 갖고 계셨다.

(2) 하나님은 그를 위해 그것을 배려 깊게 쾌히 마련해 주셨다. 그의 상이 펼쳐진 후에 어떤 음식이 그 위에 놓여진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앞에 베풀어져 있었다.

(3) 그는 절약하거나 궁핍한 상태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풍족히 갖고 있었다. "나 자신과 내 친구들에게도 충분할 정도로 내 잔이 넘치나이다."

(4) 그는 필수품뿐만 아니라 장식과 즐거움을 위한 것도 갖고 있었다. "주께서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나이다." 사무엘이 그를 안으로 기름 부었고, 그것은 더 큰 은총에 대한 확실한 담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를 풍족하도록 축복하셨다는 일례이거나 또는 특별한 친구들의 머리에 감람유를 붓는(눅 7:46) 독특한 환대를 언급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그가 아직도 그 자신을 양으로서, 주인의 음식을 먹고 그의 잔으로 마시며 그의 품에 눕는 그러한 "가난한 자의 작은 암양"(삼하 12:3)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고귀하게 뿐만 아니라 이처럼 자상하게 돌보심을 받는다. 그들의 풍족한 양식이 그들의 몸과 영혼을 위해, 현재와 미래의 생명을 위해 마련된다. 만일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의 자연적인 생명을 위해 이처럼 풍성한 것들을 베풀지 않을 때, 그것이 우리에게 영적인 축복으로 보상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우리 자신의 잘못 때문이다.

2. 그는 하나님의 은총이 계속될 것을 매우 확신하고 있다(6절). 그는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했었다(1절). 그러나 이제 그는 더욱 긍정적으로, 더욱 알기 쉽게 이야기하고 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로다." 시련 당함에 따라 그의 소망이 자라나고 그의 믿음이 강해지고 있다. 다음을 주목하라.

(1) 그가 그 자신에게 약속하고 있는 것은, 선하심과 인자하심, 근원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인자하심의 모든 시냇물, 용서하시는 긍휼, 보호하시는 긍휼, 부축해 주시는 긍휼, 마련해 주시는 긍휼이다.

(2) 그것이 전달되는 방법, 그것은 광야를 통과하는 이스라엘의 출정군을 따르던 바위의 물처럼 나를 "따를"것이다. 그것은 어떠한 곳이나 상황에도 따라올 것이며 항상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3) 그것의 지속. 그것은 "나의 평생에," 마지막 날까지도 나를 따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를 끝까지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4) 그것의 불변함. "나의 평생에," 새날이 오듯이 어김없이 온다. 그것은 매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내려진 만나와도 같이 "아침마다 새로울"것이다(애 3:22, 23).

(5) 그것의 확고함. "정녕" 그렇게 될 것이다. 그것은 진리의 하나님이 하신 약속처럼 확실하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누구를 믿어 왔는지 알고 있는 것이다.

(6) 미래의 상태에는 축복의 온전함이 있으리라는 전망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마지막 구절을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이 세상에서 평생토록 나를 따랐으므로, 내 생명이 끝날 때에도 나는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기 위해 더 나은 세상으로, 거할 곳이 많은 위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집으로 갈 것이다. 내가 지금 가진 것으로 충만히 기뻐할 것이며, 내가 바라는 것으로 더욱 충만히 즐거워할 것이다". 이 모든 것, 그리고 또한 천국을 즐거워하리라! 그때 우리는 선한 주인을 섬기게 된다.

3. 그는 하나님과 그의 의무에 집념하기로 매우 단호하게 결심하고 있다. 우리는 마지막 절을 다윗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으로 볼 수 있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내가 살아 있는 한) 거하리로다. 그리고 내가 존재 하고 있는 한 그를 찬미하리로다." 우리는 영원히 그를 섬기기 위해 문기둥에 귀를 대고 구멍을 뚫은 종처럼 그의 집에 거해야 한다. 만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이 찬란한 대낮을 위해 점점 더 빛나는 아침 햇살 같다면 우리는 그에 대해 곧 사라질 아침 구름이나 아침 이슬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집에 있는 충족함으로 만족을 얻으려는 자들은 그 의무를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

 

23:2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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