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시편 01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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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창조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시편 19:1-6)

시편 기자는 이 구절들 속에서, 우리로 하여금 온 세상에서 매일 볼 수 있는 것들로부터 육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의 것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도록 인도하고 있다. 하나님의 존재는 의심할 바 없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으며, 그의 영광은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늘 속에서, 그것의 구조와 아름다움, 천체의 질서와 작용 속에서 탁월하게 빛나고 있다. 거룩한 전능에 대한 이 예를 하늘을 보고서도 "하나님이 없다"라고 말하며, 결과를 보고서도 "원인이 없다"고 말하는 무신론자의 어리석음을 보여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상 숭배자들의 어리석음과 그들의 상상력의 헛됨을 보여 주고 있다. 우상 숭배자들을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할지라도 하나님, 즉 빛의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을 뿐인 바로 그날의 빛에다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이제 여기에서 다음을 살펴보자.

Ⅰ. 피조물들이 우리에게 알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들은 여러 면에서 우리에게 유익하고 도움이 된다. 그러나 거기에서 하나님이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냄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1절). 그것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손으로 지어진 것임을 스스로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영원부터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변천과 운동에는 틀림 없이 시작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들은 스스로를 만들 수 없으며 그렇게 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것들은 원자의 우연적인 충돌에 의해 만들어질 수는 없었다. 그것은 불합리한 일로서 그 이론을 따지기 보다는 차라리 웃음거리로 삼기로 합당하다. 그러므로 영원한 마음, 무한히 지혜롭고, 유력하며 선한 마음 이외의 것은 될 수 없는 창조주가 있어야 한다. 이처럼 그것들이 하나님이 지으신,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것들임이(8:3) 나타나 있다. 따라서 그것들은 그의 영광을 선포한다.

그가 창조하신 것의 탁월함으로서 우리는 위대하신 조물주의 무한하신 완전함을 쉽게 추론할 수 있다. 또한 하늘의 찬란함에서 우리는 창조주가 빛이라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 우주의 광대함은 그의 광대하심을 말해 주고 있으며, 그 높음을 그의 초월성과 주권을, 이 땅에 대한 그것의 영향력은 그의 지배와 섭리, 그리고 우주적인 은혜를 말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은 그의 전능하신 능력을 선포하고 있다. 그것들은 그의 능력에 의해 처음에 만들어졌고, 그때에 정해진 법령에 의해 오늘날까지 지속되어 오는 것이다.

Ⅱ. 이러한 사실을 알리는 것들은 어떤 것인가?

1. 하늘과 창공. 이것은 대개의 광대한 공간이며 운성과 고정된 별들의 영역이다. 사람은 몸의 구조상 짐승들보다 유리한 점을 갖고 있다. 즉 짐승들은 아래를 내려다 보도록 만들어져있고, 따라서 그들의 영혼도 밑으로 사라져야 한다. 그러나 사람은 위를 볼 수 있도록 직립적으로 만들어져 있다. 왜냐하면 위로 향한 그의 영혼은 곧 위로 가야만 하며 그이 사상은 소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2. 꾸준히 그리고 일정하게 계속되는 낮과 밤(2절)."낮은 낮에게, 밤은 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빛과 어두움을 가르셨고, "땅에 있을 동안에는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 8:22)는 노아와 맺은 하나님의 언약대로 변동없이 정해진 질서를 태초부터 오늘날까지 지켜오셨다. 그런데 그것의 확고 부동함을 말하기 위해 이 섭리의 언약이 은혜의 언약과 비교되고 있다(렘 33:20; 31:35). 낮과 밤이 그처럼 정확한 방법으로 교체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큰 일례이다. 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자연의 왕국에서 뿐만 아니라 섭리의 왕국에서도, "그가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시는" 것과(사 45:7) 한가지를 다른 한 가지와 상반되도록 배치하신 것을 살펴보도록 이끌고 있다. 그것은 또한 인간에 대한 그의 선하심의 일례이다. 왜냐하면 그는 "아침되는 것과 저녁되는 것을 즐거워 하게 하시기" 때문이다(65:8). 그는 꾸준한 운행에 의해 그 스스로를 영광스럽게 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흡족하게 하신다. 즉 아침의 햇빛이 그날의 일을 돕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녁의 황혼은 밤의 안식을 돕는다. 매일 낮과 매일 밤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말하며 자기의 증거를 끝냈을 때 그것을 다음 낮과 밤에게 물려주어 그것 또한 하나님의 선을 말하게 한다.

3. 해의 빛과 영향력은 특별히 뛰어나게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 해는 그 자체가 모든 천체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며 이 아래 세상에 가장 유익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이 없다면 세상은 모두 동굴이 되고 사막이 될 것이다. 다윗이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고 그 찬란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선포되는 것을 보았을 때 이 시편을 지었으리라는 것은 터무니 없는 추측은 아니다. 해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것을 살펴볼 수 있다.

(1) 해에게 지정된 장소, 하나님께서 하늘에 "해를 위하여 장막을 베푸셨도다." 천체는 "천군"이라 불리우고 있으므로 해가 야영하는 병정들처럼, "장막에 거한다"고 일컬어지는 것은 합당하다. 해는 그 앞에 장막을 지니고 있다고 일컬어지고 있는데 그것은 해가 끊임없이 운행되고 있으며 또한 결코 고정적으로 거주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가 갖고 있는 큰 저택은 마지막 때에, 즉 하늘이 두루마리처럼 말아올려지고 해가 혹암으로 변할 때에 장막처럼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다.

(2) 해에게 지정된 진로. 그 영광스런 피조물은 가만히 있도록 만들어지지 않고(적어도 우리 눈에 보이는 것처럼)"하늘이 끝에서"그 반대편으로(낮 동안의 주기를 완성하기 위해), 그리고 다시 똑같은 지점으로 "운행하도록"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이처럼 불변성과 일정함에 의해 우리는 해가 언제 어디서 오는지를 언제든지 분명히 예고할 수 있다.

(3) 그 해가 나타날 때의 찬란함. 해는 "그의 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다." 즉 최대한으로 공을 들여 훌륭하게 차리고 꾸민 신랑과 같이 그 자신이 유쾌하게 보이며 그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즐겁게 만든다. 왜냐하면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는 크게 기뻐"하기 때문이다(요 3:29).

(4) 해의 여정의 즐거움. 해가 걸어야 하는 길을 광대한 회로이며 잠시도 쉴 수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의 법에 복종하고 사람에게 봉사하기 위해 그렇게 행할 뿐만 아니라 매우 즐겁게, 그리고 "그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같이 "행한다. 이처럼 만족한 마음으로 의로우신 태양, 즉 그리스도는 그에게 주어진 일을 마치셨다.

(5) 이 세상에 대한 그의 전반적인 영향력. "그 온기에서 피하여 숨은 자 없도다." 땅 속에 파묻힌 금속에게도 태양은 그 영향력을 미친다.

Ⅲ. 누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있는가? 그것은 세상 모든 곳에 선포되고 있다(3,4절). "언어가 없고(나라가 없다. 왜냐하면 나라는 "방언대로" 나뉘어졌기 때문이다. 창 10:31, 22)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줄이(즉 주야 평분선으로 추정된다)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자연의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을 선포하면서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4절).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자기나 또는 다른 사람들이 이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노해서는 안 되는 이유로 이것을 듣고 있다. 즉 하나님은 이미 그가 지으신 것으로써 이방 사람들에게 그 자신을 알리셨고, 그들에게 증인이 결여되도록 만들지는 않으셨기 때문이다(롬 10:18). 그러므로 그들이 우상 숭배자가 된다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롬 1:20, 21). 그리고 복음을 가리침으로써 그들을 우상 숭배에서 돌아 오게 하려했던 자들은 비난당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그들의 배신을 막기 위해 이러한 방법을 쓰셨고 그것이 무효하게 되었을 때, 그 사도들은 그들을 돌아오게 하기 위해 곧잘 다른 방법을 사용했다. "즉 "언어가 없을지라도(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들리는 소리가 있도다." 만백성들은 이 자연의 불멸하는 설교자가 그들에게 그 자신의 언어와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구절을 노래함에 있어서 우리는 하늘의 빛들에 의해 우리가 얻은 모든 위안과 유익에 대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그 하늘의 빛 위에 계신 의로우신 태양을 항상 주시해야 한다.

 

19:2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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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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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탁월함 (시편 19:7-14)

하나님의 영광(즉 사람에 대한 그의 선하심)은 창조의 역사 속에 많이 나타나 있으나, 거룩한 계시 속에, 그리고 그 계시에 의해 더욱 많이 나타나 있다. 거룩한 성경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와 그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알려 주는 길잡이로서, 밤이나 낮보다, 우리가 숨쉬고 있는 공기나 햇빛보다 우리에게 훨씬 더 유용하며 유익하다. 만일 사람이 자기의 결백함을 지니고 있었다면, 하나님이 지으신 것에 의해 하나님을 아는 일은 더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타락한 상태에 있는 그를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또다른 방법이 취해져야 한다. 즉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Ⅰ. 시편 기자는 여섯 개의 문장 속에(7-9절) 하나님의 말씀의 탁월한 특성과 유용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 각 문장에서 "여호와"라는 이름이 반복되어 있는데 그것은 필요없는 반복이 아니다. 왜냐하면 율법이 지닌 그 권위와 탁월함은 율법을 만드신 자로부터 부여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명칭이 여섯 가지쯤 나온다. 거룩한 계시를 총괄적으로 생각해 볼 때 교훈, 약속, 특히 복음 등으로 간주된다. 여기에 그것에 대한 흘륭한 특성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그 율법의 거룩한 근원을 입증해 주고 있다. 또한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율법에 기울이도록 권하고 있으며 어떤 다른 법들보다도 그것을 더욱 찬란하게 하고 있다. 또한 여기에는 그 율법이 인간의 마음에 미치는 여러 가지 좋은 영향이 제시되어 있다. 이것은 그 율법이 어떤 의도를 지니고 있는가,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가, 그것과 함께 행해지고 그것에 의해 역사되어지는 거룩한 은혜의 효능이 얼마나 놀라운가를 보여 주고 있다.

1.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다." 율법은 모든 타락에서 완전히 떠났고, 모든 선으로 완전히 채워져 있으며, 그것이 의도되는 목적에 완전히 합당하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케 할 것이다(딤후 3:17). 그것에는 아무 것도 더하거나 뺄 수 없다. 그것은 "영혼을 소성케"하는 데에, 즉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 우리 하나님께로, 우리의 의무로 돌아오게 하는 데에 유용하다. 왜냐하면 율법은 하나님을 떠난 우리의 죄악과 비참함과 아울러 우리가 그에게로 돌아가야 하는 절대적인 필요를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2. "여호와의 증거는(우리에게 제시된 그에 대한 증거)확실하다." 우리가 그것을 신용할 수 있고 의지할 수 있으며, 그것이 우리를 속이지 않으리라는 사실은 명백하고도 침범할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하다. 그것은 신용할 수 있고 의지할 수 있으며, 그것이 우리를 속이지 않으리라는 사실은 명백하고도 침범할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하다. 그것은 거룩한 진리에 대한 확실한 발견물이며 우리 의무의 길을 확실하게 가리켜 주는 것이다. 율법은 살아 있는 위안과 영원한 소망의 확고한 토대이다. 그것은 우리를 지혜롭게 하는 데에 즉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는 데에 유익하다(딤후 3:15). 그것은 우리에게 거룩한 것을 통찰할 수 있는 힘과 앞으로 올 일에 대한 예견력을 줄 것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가장 선한 일에 몰두하도록 할 것이며 우리의 참된 유익을 안전케 해 줄 것이다. 그것은 "우둔한 자들"(현재의 세상을 위해 보잘 것 없는 계획을 하는 자)까지도 그들의 영혼과 영원을 지혜롭게 만들 것이다. 우둔하나 겸손한 자들, 즉 그들 자신의 어리석음를 깨달아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지혜롭게 될 것이다(25:9).

3. "여호와의 교훈은(그의 권위로써 제정되고 어느 곳에서나 구속력이 있는)정직"하다. 선악의 영원한 규범의 원리에, 즉 사람의 올바른 이치와 하나님의 올바른 뜻에 정확히 일치한다. 범사에 관한 하나님의 모든 법도는 마땅히 바르며(119:128) 의롭다. 그리고 우리가 그 법도를 받아들이고 그것에 복종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바르게 인도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직하기 때문에 "마음을 기쁘게"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손안에서 볼 수 있는 율법은 우리에게 기뻐할 이유를 주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가슴에 새겨졌을 때 그것은 우리의 바른 마음을 회복시켜 줌으로써 영원히 기뻐할 토대를 마련해 놓는다.

4.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다." 그것은 어두움 없이 선명하다. 그것은 찌꺼기나 더러운 것이 없이 깨끗하다. 그것은 그 자체는 모든 불순물로부터 정제되었으며, 그것을 받아들여 가슴에 품는 자들을 정화시킨다. 이것이 성령이 "눈을 밝게"하기 위해 사용하는 일반적인 방법이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가 우리 죄악과 비참함을 보고 깨닫도록 해 주며 우리에게 의무의 길을 지시한다.

5.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말씀 가운데 규정되어 있는, 그리고 마음에 자리잡고 있으며 생활 속에 실행되어지는 참된 믿음과 경건은) 정결하다." 그것은 그 자체가 정결하며 우리를 깨끗하게 하고(요 15:3), 우리의 행실을 깨끗하게 할 것이다(119:9). 그리고 그것은 "영원까지 이른다." 그것은 영원한 은혜이며 결코 철회될 수 없는 것이다. 의식적인 율법은 사라진 지 오래나 하나님의 경외에 관한 율법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세월도 도덕적인 선과 악의 본질을 변경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6. "여호와의 규제는(무한하신 지혜로 이루어진 그의 모든 교훈은) 확실하다." 그것은 가장 신성하고 명백한 진리를 근거로 하고 있다. 그것은 "다 의로우며," 모두 자연적인 공의에 일치하고 있다. 그 속에는 불의한 것이 하나도 없으며, 모두 한 가지다.

Ⅱ.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큰 가치와 그가 얻었던 큰 유익, 그리고 그것에 대해 품었던 소망을 표현하고 있다(10, 11절).

1. 그가 하나님의 계명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고 있는가를 보라. 모든 선한 백성들의 특성은 그들의 믿음과 하나님의 말씀을 무엇보다도 좋아하는 것이다.

(1) 세상의 모든 재물보다 그것을 더 좋아한다. 말씀은 "금," 정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 될 것이다." 금은 땅에서 나온 세속적인 것이나 은혜는 거룩한 형상인 것이다. 또한 금은 오직 육신과 일순간의 염려를 위한 것이나, 은혜는 영혼과 영원에 대한 관심을 위한 것이다.

(2) 관능적인 모든 즐거움과 기쁨보다 말씀을 더 좋아한다. 믿음으로 받아들인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에게 달며"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다." 감각적인 즐거움은 짐승들이 누리는 기쁨이므로 인간의 위대한 영혼을 타락시킨다. 믿음의 즐거움은 천사들의 기쁨이며, 그것은 영혼을 고귀하게 한다. 관능적인 즐거움은 기만적인 것으로서 쉽게 물리게 하나 결코 만족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즐거움은 본질적이고 만족감을 주며, 거기에는 과도의 위험이 없다.

2. 그가 하나님 말씀의 교훈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를 보라. "주의 종이 이로 경계를 받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들에게 주는 경고의 말씀이다. 그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의무와 우리가 피해야 할 위험, 그리고 우리가 대피해야 할 홍수를 우리에게 경고한다(겔 3:17; 33:17). 그것은 악인에게 사악한 길을 계속 가지 않도록 경고하며, 의인에게는 선한 길을 떠나지 않도록 경고한다. 진정한 하나님의 종인 모든 사람들은 이 경고를 받아들인다.

3. 하나님의 교훈을 준행함으로써 어떤 유익을 그 자신에게 약속하였는가 보라.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자기의 의무를 자각하는 자들은 그것으로 인해 아무 것도 잃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말할 수 없는 이득을 얻는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 후 뿐만 아니라 지키는 가운데에도 즉각적인 복종 속에 있는 복종의 큰 상을 받는다.

믿음은 건강과 영예이다. 그것은 평강과 기쁨이다. 그것은 우리 위안을 달콤하게 만들 것이며 우리의 고난을 가볍게 만들 것이다. 즉 생을 진실로 값어치 있게 하고 죽음 자체를 진실로 사모하게 만들 것이다.

Ⅲ. 그는 하나님 말씀의 탁월함에 대한 이 경건한 묵상으로부터 몇 가지 훌륭한 추론을 이끌어 내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 안에 있는 경건한 마음을 고조시켜서 유용하게 한다.

1. 그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있다. 즉 율법으로 죄를 깨닫는다. "계명이 이처럼 거룩하고 의롭고 선합니까? 그렇다면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어느 누가 할 수 있을 지는 몰라도 나는 할 수 하여금 없습니다.' 거룩한 율법의 올바름으로부터 그는 자신의 죄를 "허물"이라 부르는 것을 배우고 있다. 계명이 진실되고 의롭다면 그 계명을 범하는 것을 과오에서 기인하는 허물이다. 모든 악한 행실은 어떤 타락한 원리에서 야기된다. 그것은 우리가 준해서 행해야 할 그 규정에서 우리가 걸어가야 할 궤도에서 탈선하는 것이다. 또한 거룩한 율법의 범위와 엄격함과 영적인 특성에서, 그는 그의 죄가 너무 많아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고 매우 지나치게 사악하므로 그가 그 극악함과 악의를 측량할 수 없다는 것을 배우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태만과 편견으로 인해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많은 죄를 범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범한 많은 죄를 잊어버린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낱낱이 자백할 때는 항상 그 자백 끝에 etcaetera-즉 그 밖에 등등이라는 말을 덧붙여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많은 일들 속에서 우리는 죄를 범한다. 우리가 얼마나 자주 죄를 범하는 지를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미 파멸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는 여기에서 죄에 대항하여 기도하고 있다. 율법에 의해 우리에게 드러난 모든 죄는 우리를 은혜의 보좌로 이끌어 여기서의 다윗처럼 기도하게 한다.

(1) 즉 용서를 위한 긍휼을 간구하게 만들 것이다. 그 자신이 범죄한 모든 조목을 열거할 수 없음을 발견한 그는 "여호와여,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하고 부르짖고 있다. 하나님이 모르시는 것은 없다. 세상에는 비밀로 할 수 있을지라도 친히 감찰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숨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가장 선한 자들까지도 그들 스스로 많은 은밀한 잘못은 범하지 않았는가를 의심하고 또 그들을 그 범죄에서 벗어나게 하여 그것으로 문책당하지 않도록 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우리의 결점과 부주의로 인한 죄나 은밀한 죄들도, 하나님께서 그것에 따라 우리를 평가하신다면 우리의 멸망의 원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은밀한 과오도 우리를 더럽게 하여 우리를 하나님과 교제하기에 합당치 않게 만든다. 그러나 그것이 용서받을 때 우리는 죄에서 깨끗하게 된다(요일 1:7).

(2) 곤고할 때는 도와 주실 은혜를 간구하게 만들 것이다. 그의 결점으로 인한 죄가 사함 받도록 간구한 후에 그는 고범죄, 즉 고의적 죄를 짓지 않게 되기를 간구하고 있다(13절). 자기의 죄를 진심으로 회개하고 그것을 용서받은 자들은, 그들의 기도에 의해 나타나듯이 죄에 빠지지 않도록 또한 다시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여기에 나온 다윗의 기도도 그러한 기도이다. 여기서 다음을 살펴보자.

[1] 그의 기원. "나로 하여금 고집스럽고 고의적 죄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우리는 우리의 약함으로 인한 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간구해야 하며, 특히 고범죄에서 떠나도록 간구해야 한다. 그것은 매우 하나님을 거슬리고 양심을 상하게 하여, 우리의 위안을 시들게 하고 우리의 소망이 흔들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 것도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내가 그러한 죄의 손 아귀에 있게 하지 마시고, 그 노예가 되지 말게 하소서."

[2] 그의 탄원.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 즉 정직함을 나타내고 내 정직함의 증거와 위안을 보존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그는 고범죄를 이렇게 일컫고 있다. 왜냐하면 어떤 제물로도 그것을 속죄할 수 없기 때문이다(민 15:28-30). 여기에서 다음 사실에 주목하자.

첫째, 고범죄는 매우 가증스럽고 위험하다. 율법과 그 규제를 경멸하고 도전하면서 평소의 신념과 자기 양심의 실질적인 경고를 무시하고 죄를 짓는 자들은, 즉 거만하게 죄를 짓는 자들은 무례하게 죄를 범하는 것이며, 그것은 큰 범죄이다.

둘째, 훌륭한 자들일지라도 그들 자신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지금까지 죄에서 벗어나 있었다 할지라도 주제넘은 죄를 범하게 될까 두려워해야 한다.

셋째, 우리는 매우 많은 위험을 당하고 있으므로, 우리가 고범죄를 저지르도록 압력을 받을 때 그 유혹을 막는 섭리나 그것을 이기게 하는 그의 은혜에 의해 우리가 거기에서 떠나도록 하나님께 간구해야 할 필요성이 크다.

3. 다윗은 그의 경건한 생각과 애정을 용납하여 주시기를 겸손히 간구하고 있다(14절). 앞에 제시된 것과 이것과의 관계를 주시하라. 그는 하나님께 죄로부터 그를 지켜 주실 것을 간구한 다음에 하나님께서 그의 일을 열납해 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의 죄를 옹호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의 봉사를 열납하시리라는 것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66:18).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그의 봉사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그의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었고 하나님께 바친 그의 거룩한 사모함이었다. 마음의 경건한 묵상은 위축되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들의 교화를 위해 우리 입의 말로 표현되어야 한다. 그리고 기도와 찬미를 드리는 우리 입의 말들은 형식적인 것이 아니고 마음의 묵상에서 넘쳐나온 것이라야 한다(45:1).

(2) 이 봉사에 대한 그의 관심사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그 봉사가 하나님께 열납되는 것이었다. 만일 우리의 봉사가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는가? 은혜로운 영혼은 그것이 하나님께 열납될 때 그것이 목표한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 하나님께 열납되는 것이 곧 영혼에 대한 축복인 것이다.

(3) 그는 이러한 것을 기대하도록 격려받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반석이시며 그의 구속자이셨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믿음의 의무에 있어서 우리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구한다면, 우리가 의무를 이행하는 것을 하나님께 열납해 주실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그의 힘에 의해 우리는 그와 함께 능력을 갖기 때문이다.

이것을 노래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의 탁월함을 매우 사모하고 그것에 전념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죄로 인한 재앙에 대해, 그 속에 있는 그리고 그것에 의한 위험에 대해 매우 경계해야 하며, 그것에 대항할 힘을 하늘로부터 가져와야 한다.

 

19:8 없음.

 

19:9 없음.

 

19:10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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