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하고 간곡한 기도 (시편 17:1-7)
이 시편은 기도이다. 우는 때와 기뻐하는 때가 있듯이 찬미할 때와 기도할 때가 있다. 다윗은 그 당시에 핍박당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산에 있는 자고()처럼 그를 추적했던 사울에 의한 것이었을 것이다. 외적으로는 싸움이 있었고 내적으로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리고 이 두가지는 그로 하여금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 간청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이 구절들 속에서 호소하는 방법과("여호와여 정직함을 들으소서." 내 의로운 주장을 주의 법정 앞에 아뢰어 판단받게 하소서), 탄원하는 방법("나의 부르짖음에 주의하소서" 1절. 그리고 다시"귀를 기울여 내말을 들으소서." 6절) 두 가지로 하나님께 그 자신을 아뢰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집요한 간청으로써 압력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도에 대한 그의 은혜로운 응답을 진지하게 열망하는 것을 이처럼 표현하도록 허용하셨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하나님께서 청종해 주시기를 탄원하고 있다.
1. 그는 신실했으며 그의 기도에 있어서 하나님께 거짓된 것을 말씀드리지 않았다. "그것은 거짓 되지 않은 입술에서 나온 것이옵니다." 그가 의미한 것은 그 말의 내용과 같았으며, 그의 감정은 입에서 나온 표현과 일치했다. 거짓된 기도는 효과가 없다. 그러나 마음으로 기도를 드렸다면 하나님은 은총으로써 그것을 맞아 주실 것이다.2. 그는 다른 때에도 기도를 드리곤 했으며, 그로 하여금 제일 먼저 그의 의무를 행하도록 만든 것은 환난이나 위험이 아니었다. "내가 이전에도 불렀사오니(6절), 여호와여, 이제도 내 기도를 들으소서." 우리가 환난을 당했을 때 기도의 바퀴가 계속 글러가고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에는 우리가 더욱 담대히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상인들이 그들의 오래된 고객들에게 기꺼이 혜택을 주려하는 것과 같다.
3.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주목하시리라는 것을 믿음으로 기대하였다.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하나님이시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지하는 것은 그를 향해 우리의 열망을 강력히 주장할 수 있는 좋은 구실이 된다.
Ⅰ. 그의 호소는 무엇인가? 그리고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그가 호소한 것을 인지하고 판단해 주는 곳은 어떠한 법정인가? 그것은 하늘에 있는 법정이다. "여호와여 정직함을 들으소서. 사울은 너무 격해 있고, 너무 편견에 차 있어서 그것을 들을 수 없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판단을 주 앞에 내소서"(2절). 사람들은 나를 행악자로 몰아 죽이려 합니다. 여호와여, 나는 그들을 떠나 주께 호소합니다." 이것을 그는 사울의 면전에서 간언했었고(삼상 24:12,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여기에서도 사적으로 예배드리면서 그것을 거듭 말하고 있다.(1) 하나님의 통치와 심판의 공정성과 범위는 해를 당한 무죄한 자에게 매우 큰 도움이 된다. 의롭지 못한 자들에 의해 비방당하고 모욕당하고 누명을 입을 때, 우리가 나아가 호소할 수 있는 의로우신 하나님을 갖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위안이 된다. 하나님은 우리편이 되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억눌린 자의 후원자이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마음과 일을 참된 빛에 밝히 드러내고 모든 거짓된 가면을 벗김으로써, 그리고 모든 불의한 자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파멸과 각 사람이 그 행위대로 받게 될 상벌을 결정함으로써, 사실에 따라 심판하신다.
(2) 성실은 엄밀한 심문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더욱이 은혜의 언약의 방침에 따른 하나님 자신의 심문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주의 눈은 공평함을 살피소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사곡한 자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는 반면에 정직한 자에게는 기쁨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부당하게 정죄당하고 어떤 면에서든 해를 당한 자들에게 특히 위로가 된다.
2. 그의 호소가 좋은 결과를 가져오리라고 기대할 수 있는 증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시험하신 일이었다.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셨나이다"(3절). 하나님의 판결은 옳다. 하나님은 항상 그의 지식에 의해 행하시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가장 정확한 검증과 엄격한 조사에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더욱 분명하며 절대로 오류가 없는 지식인 것이다.
(1) 그는 하나님이 그를 시험하셨다는 것을 알았다.
[1] 그는 시험은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대리자인 그의 양심에 의한 것이었다. "한 인간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다." 이 등불로 하나님은 그를 감찰하셨고, 그가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던 밤에" 그를 "권고하셨다." 그는 그 감찰에 복종했다. 그리고 잘못된 것을 발견하기 위해 그의 행동은 신중하게 반성했다. 그러나 그의 대적들이 그를 책망한 것과 같은 잘못은 그 어느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2] 또한 섭리에 의한 시험이었다. 하나님은 그에게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두 번씩이나 주심으로써 그를 시험하셨다. 하나님은 사울의 악의, 그의 친구들의 배신, 그리고 그가 겪은 많은 도전으로써 그를 시험하셨다. 그러므로 만일 그가 그의 대적들이 말한 것과 같은 자였다면 그것이 드러났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험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위배되는 것은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았고, 그들이 그를 정죄했던 그 모든 것들을 증거할 만한 것이 조금도 발견되지 않았었다.
(2) 하나님은 그의 마음을 시험하셨고 그것에 대한 결백함을 입증하실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결백함을 더욱 증명하기 위해, 그의 양심이 증언하고 있는 두 가지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1] 그는 혀로 죄를 짓지 않기로 확고히 결심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 결심하고 완전히 결정하며 입으로 범죄치 아니하리이다." 그는 "그렇게 안 되기를 바라나이다." 또는 "나는 그렇게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나는 완전히 결심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리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그 입에 자갈을 먹였다.(39:1). 입으로 범죄치 않기 위해 끊임없이 결심하고 경계하는 것은 우리의 결백함에 대한 좋은 증거가 될 것이다.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다"(약 3:2). 그는 "내입이 결코 범죄치 않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왜냐하면 우리는 여러 가지로 실수하기 때문이다), "내가 범죄치 않을 것을 결심하나이다." 라고 말했다. 마음을 살피시는 자는 그 결심이 진실된 것인지 아닌지를 아신다.
[2] 그는 사악한 말은 물론 사악한 행동을 피하려고 주의 했다(4절). "사람의 일반적인 행사로 논하면, 즉 인간의 행동과 일들에 있어서, 나는 주의 말씀의 지시를 따라 스스로 삼가서 강포한자의 길에 행치 아니하였나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특히, 그가 사울을 죽일 능력을 지녔을 때에도 그를 죽이지 않았을 뿐만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고 아비새에게 "죽이지 말라"고 했던(삼상 26:9) 일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더 일반적인 면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즉 그는 스스로 삼가서 모든 악한 행사를 피했고, 그의 직책의 의무에 따라,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피하게 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첫째, 죄의 길은 피괴자의 길이다. 영혼을 죄의 길로 꾀어내어 파멸시키는 파괴자, "아바돈"(Abaddon)과 아폴리온(Apollyon)이라는 이름을 지닌 마귀의 길이다.
둘째, 우리 모두는 그 파괴자의 길에 들어서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멸망으로 인도되는 길을 걷는다면, 멸망과 비참함이 결국 우리의 몫이 될 때 우리는 스스로를 탓하지 않으면 안 된다.
셋째, 우리는 우리의 지침이며 표준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 지시와 훈계를 준수함으로써, 파괴자의 길을 떠나야 한다.(119:9).
넷째, 우리가 조심스럽게 길을 피한다면 우리는 환난 가운데 있을 때, 회고함으로써 큰 위로를 얻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를 지키면 악한 자가"유혹으로써 "우리를 만지지도 못하므로"(요일 5:18). 우리는 그 악한 자가 우리를 두렵게 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바랄 수 있을 것이다.
Ⅱ. 그의 탄원은 무엇인가? 그것은 간단히 말해서, 그를 향한 하나님의 선한 뜻에 대한 증거와 그것을 받을 만한 자격으로서 하나님께서 그의 안에 역사하신다는 것을 체험하려는 것이었다. 이것이 곧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오는 은혜이며 평강이다.
1. 그는 자기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되기를 간구하고 있다(5절).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켰나이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은혜로 인하여 파괴자의 길을 떠나 내 스스로를 지켰나이다. 그와 같은 은혜로써 내가 주의 길을 지키게 하소서. 내가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제재하실 뿐만 아니라 항상 선한 일을 풍성히 하도록 재촉하소서.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켜서 내가 그 길에서 돌아서거나 벗어나가지 않게 하소서.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켜서 내가 죄에 머뭇거리거나 빠지지 않게 하시고 내 의무를 소홀히 하거나 무시하지 않게 하소서. 여호와여, 여지껏 나를 지키신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지켜 주소서."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길을 가고 있는 자들은 그들의 걸음이 그 길을 굳게 지키도록 지도할 필요가 있으며 또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가 기쁘게 우리를 붙들어 주실 때만 있을 수 있으며, 그가 기쁘게 우리를 인도하고 부축하시며 이끄실 때에라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다윗은 여태까지 그의 의무의 길을 지켜왔었지만 그것이 미래의 그의 안전함까지 보장해 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여호와여, 계속 나를 지키소서." 하고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의 길을 계속 나아가고 지키려는 자들은 믿음과 간구를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길이 미끄럽다는 것과 자기 자신이 연약하고 사실상 그리 확고하지도 못하며 또 훌륭히 갖추어져 있지도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기가 머뭇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기도하고 있다. "여호와여, 나를 지키시어 내 발이 미끄러지지 않게 하소서. 또한 주님과 주의 섭리와 약속에 대해 정직하지 못하거나 불신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는 말이나 행동을 결코 하지 못하게 하소서."2. 그는 그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의 표징을 간구하고 있다.(7절). 여기에서 다음을 살펴보자.
(1) 어떻게 그는 하나님을 그의 백성의 보호자이며 구세주로서 바라보고 있으며, 그를 그렇게 부르고 있는가?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기도 속에서 격려를 얻고 있다. "주께 피하는 자를 그 일어나 치는 자에게서 오른손으로(어떤 대리인이 필요없이 오직 주 자신의 능력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특성이다. 그는 그들을 극친한 친구로 만들기를 기뻐하신다. 왜냐하면 그는 의로운 자들과 교제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그를 그들의 신탁자와 삼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에게 그들 자신을 맡겼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들은 많은 대적들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무리들을 능히 처리하실 수 있는 한 친구를 갖고 있으며, 그가 그들을 위하시기만 한다면 누가 그들을 치든지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다. 그는 그들의 구세주가 되는 것을 영예로 여기신다. 그의 전능하신 능력은 그들을 위해 마련되어 있으며, 그들은 모두 그가 그들을 구원하실 준비가 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난외주에는 "일어나 주의 오른 손을 치는 자들에게서, 주께 피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주여"라고 적혀 있다. 성도들의 대적이 되는 자들은 하나님과 그의 오른 손을 반역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틀림 없이 하나님이 합당한 때에 그들을 대적하러 나타나실 것이다.
(2)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기대하고 열망하는 것은 무엇인가? "주의 기이한 인자를 나타내소서." 이 말은 다음 두 가지를 의미한다.
[1] 그 뛰어난 은총. "나를 위해 주의 인자하심을 예비하여 놓으소서. 내게서 일반적인 긍휼을 끊지 마시고, 주께서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행하시는 것같이 내게도 은혜를 베푸소서."
[2] 놀라운 은총. "주의 인자하심을 감탄스러운 것으로 만드소서. 여호와여, 나와 다른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주의 은총을 내게 나타내소서. "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놀라울 정도로 풍부하고 충만하다. 여러 가지 사례 속에서 특별히 기이함이 나타나고 있다(118:23). 그리고 그리스도가 "성도들에게 영광을 받으시고 믿는 모든 자들에게 찬양을 받으시기" 위해 오실 때에는, 성도들의 구원 가운데 그것이 분명 놀라움게 나타날 것이다.
보호와 긍휼을 간구함 (시편 17:8-15)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살펴볼 수 있다.
Ⅰ. 다윗은 무엇을 간구하고 있는가? 그의 생명을 노리는 대적들에게 둘러 싸였을 때 그는 하나님께, 그리고 그가 기름부음을 받은 그 면류관에게, 자기를 치려는 모든 자들의 시도에서 안전하게 보존해 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다. 이 기도는 그리스도가 온갖 고난과 굴욕스러운 역경 속에서도 보존되시어 높이 들리우시는 영광스럽고 기쁜 상태에 이르시리라는 사실을 예언하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하늘 나라에까지 보호해 주실 것을" 신뢰하면서 그들의 영혼을 하나님께 의탁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귀감이 되는 것이다.
1. 다윗은 그 자신이 보호받기를 간구하고 있다(8절). "나를 안전하게 지키시고 나를 단단히 감추소서. 그리하여 내가 발각되지 않고 공격당하지 않게 하소서. 나의 영혼을 구하소서. 사망으로부터 나의 죽어야 하는 생명을 구하실 뿐만 아니라, 죄로부터 나의 불멸의 영혼을 구하소서. "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자기 스스로를 둔 자들은 믿음 가운데서 그 혜택을 간청할 수 있을 것이다.(1)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지켜 주실 것을 기도하고 있다.
[1] 사람이 자기 눈동자를 지키듯 매우 관심을 기울여 지켜 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다. 우리의 본성은 눈동자를 놀랍게 보호하고 있으며 우리에게 잘 보관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눈동자"처럼 지킨다면(잠 7:2) 우리는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그렇게 지켜 주실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그의 백성을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슥 2:8).
[2]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는 것같이 매우 따뜻하게 지켜 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다(그리스도께서는 이 비유를 마태복음 23장 37절에서 사용하고 있다).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 나를 안전하고 따뜻하게 해 주소서." 또는 이것을 오히려 하나님의 보좌를 덮고 있는 천사들의 날개를 언급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특별히 부여된 그 영광스러운 은혜의 보호 아래 내가 있게 하소서." 다윗이 여기에서 간구하고 있는 것은 다윗의 자손, 우리 주 예수에게 이루어졌다. 그에 관해서, 하나님께서"그를 그의 손 그늘에서 숨기시며, 그로 마광한 살을 만드사 그 전통에 감추셨다"(사 49:2)고 적혀 있다.
(2) 다윗은 계속 기도하고 있다. "여호와여, 나를 사악한 자들과 세상 사람들로부터 지키소서."
[1] "그들에 의해 파멸되거나 쓰러지게 하지 마소서. 그들의 꾀를 좆지 않게 하시고, 그리고 그들의 길에 서거나 그들의 요리를 먹지 않게 하소서."
[2] "그들에 의해 파멸되거나 쓰러지게 하지 마소서. 그들이 나를 칠 뜻을 품지 않게 하소서. 그들이 나를 이기도록 하지 마소서."
2. 그를 죄나 환난 속으로 이끌려는 그의 대적들의 모든 계획을 격파시키실 것을 간구하고 있다(13절). "여호와여, 일어나 나의 편이 되소서. 그리하여 나의 대적을 실망시키시고 그 실망으로 인해 그 자신이 보는 데서 그를 쓰러뜨리소서." 사울이 다윗을 핍박했을 때, 특히 사울이 그를 자신의 희생물로 만들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었던 때에도 그는 얼마나 번번히 실패했는가! 그리고 그리스도를 죽게 만들어 그들의 목표를 이루었다고 생각했던 그리스도의 대적들은 그의 부활에 얼마나 실망했는가!
Ⅱ. 이 탄원에 대한 그 자신의 믿음과 성공에 대한 소망을 격려하기 위해 무엇을 호소하고 있는가?
1. 그의 대적들의 악의와 사악함을 진술하고 있다. "그들은 호의를 얻기엔 합당치 않은 자들이며, 만일 내가 하나님의 특별하신 돌보심에 의해 그들로부터 구원되지 않는다면 그들은 나를 멸망시킬 것입니다. 여호와여 나를 압제하고 나를 황폐케 하며 몰락시키는 자들이 얼마나 사악한 자들인가를 보옵소서."(1) "그들은 매우 심술궂으며 악의에 차 있습니다. 그들은 나의 피를, 내 마음의 피를 갈망하는 극한 원수들, 즉(단어 그대로) 영혼의 원수들입니다." 다윗의 대적들은 그를 죄로 몰고, 하나님으로부터 떼어내기 위해 온갖 힘을 다 기울였다. 그들은 그에게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라"고 말했으므로(삼상 26:19) 그가 그들을 대적하여 기도하였던 것이다. 우리의 영혼의 대적들은 우리의 최악의 대적이며, 또 그렇게 간주해야만 한다.
(2) "그들은 매우 방심 상태 있으며 감각적이고 무례하며 거만합니다. "저희가 자기 기름에 잠겼나이다(10절). 그들은 그들 자신의 영예와 능력과 풍족함으로 그들 스스로를 두르고 에워싸나이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을 무시하며 그의 심판에 도전합니다(73:7; 욥 15:27). 그들은 즐거움에 탐닉하며 내일도 오늘과 같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입으로 교만하게 말하면서 그들 자신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짓밟고 모욕합니다(계 13:5, 6 참조). 여호와여 이러한 자들은 굴욕당하고 천히 여겨지며 그들 스스로를 알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이 교만한 자들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것이 주의 영광이 되지 않겠습니까?"
(3) "그들은 쉬거나 지침이 없이 나를 치려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나를 에워싸나이다(9절). 그들은 지금 어느 정도 그들의 목표를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포위했고, 우리의 걸어가는 길을 에워쌌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디로 가든지 우리를 추적하며, 사냥개가 산토끼를 쫓듯 우리를 바싹 쫓아옵니다. 매우 많은 사람들이 빨리 움직여 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다 빼앗으려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곳을 보는 척하며, 마치 그들이 묵상에 잠기거나 혼자 생각에 골몰해 있거나 다른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처럼 땅을 굽어보고 있습니다." 또는(다른 사람들의 견해대로)"그들은 나를 해치기 위해 주의 깊게 일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굽어보면서 그들의 뜻을 이룰 어떤 기회도 결코 놓치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4) "그들의 두목(그것은 시울이었다)은, 특별한 의미에서, 살아가기 위해 게걸스럽게 먹이를 잡으려는 사자와 같이 특히 잔인하고 야비하며, 교활하고 돌발적입니다."(12절). 선한 자들에게는 선을 행하는 것이 그들의 양식이 되는 것 이상으로, 악한 자들에게는 재앙을 끼치는 것이 그들의 양식이 된다. 그는 "은밀한 곳에 엎드린 젊은 사자"같이 그의 잔인한 계획을 위장한다. 이것은 사울에게 적절히 적용된다. 사울은 다윗을 찾으러 사자들이 먹이를 잡기 위해 숨곤 했던 "들염소바위"(삼상 24:2)와 "십 황무지"(삼상 26:2)로 갔었기 때문이다.
2.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제하고 제재하실 능력을 갖고 계심을 진술하고 있다.
(1) "여호와여, 그들은 주의 칼입니다. 그러하오니 어떤 아버지가 자기 칼에 자기 자식들이 해를 입도록 내버려 두겠습니까?" 우리가 사람들로부터 해를 입은 때 참을성 있게 견뎌야 하는 이유는 그들은 고통을 주는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고통은 본래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며 그의 뜻에 우리는 복종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칼이라는 사실은 그들은 그가 원하시는 대로 조종할 수 있고 그가 없이는 움직일 수 없으며, 그가 그의 사업을 다 행하셨을 때에는 칼집에 들어가게 될 하나님의 칼이라는 사실을 뜻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의 진노가 그의 찬미로 돌아올 것이며, 그가 그 남은 자들을 속박하시리라는 소망을 갖도록 격려되는 것이다.
(2) "그들은 주의 손이므로 그것으로 주께서 주의 백성들을 징계하시며 주의 노하심을 느끼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환난이 나오기 때문에 그는 그 손에서 구원도 또한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Una eademque vulnus opemque tulit-즉 같은 손으로 상처내시고 고치신다." 하나님의 손에서 도망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오직 모든 것은 그 손에 의해 움직일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사람의 힘을 두려워하고 있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고 또 거기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매우 위안이 될 것이다(사 10:6, 7, 15 참조).
3. 그들의 외적인 형통함을 진술하고 있다(14절). "주여 그들을 대적하여 나타나시옵소서."
(1) "그들은 완전히 세상에 마음을 쏟고 있고, 주님이나 주의 은총에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영에 의해 행하는 세상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세상의 재물과 즐거움을 사랑하고 그것을 열심히 추구하며(그것을 그들의 사업으로 삼으며), 그 즐거움 속에서 안식을 찾고 - 그것을 그들의 복으로 삼으면서 세상의 추세에 따라 걸어갑니다. 그들은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나이다. 즉 그들은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을 가장 좋은 것으로서, 그리고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으로서 간주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그것을 택하며 그들의 지복을 그 속에 안치하고, 그것을 그들의 주된 선으로써 지향합니다. 그들은 그것에 만족하여 휴식을 취하며 그들의 영혼은 그 속에서 편함을 얻습니다. 그리고 더 먼 곳을 바라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생애를 위한 준비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그들의 위로이며 (눅 6:24), 그들의 좋은 것이고 (눅 16:25), 그들의 상(賞)이며(마 6:5), 그들이 한 때 나리온의 약속(마 20:13)입니다. 자, 여호와여, 이러한 성품을 지닌 자들이 이 세상의 모든 재물보다도 주의 은총을 좋아하고 주님을 자기 소득으로 취함으로써 주를 영예롭게 하는 자들을(16:5) 대적하도록 지지하시고 장려하시겠습니다.?"
(2) 그들은 이 세상에서 풍족을 누린다.
[1] "그들의 욕구는 증가되며 그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그들은 주의(감추어진) 재물로 배를 채우나이다." 이 세상 물건들은 재물이라 불리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렇게 간주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영혼에게는 그리고 영원한 복에 비하면 그것은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창조물의 여러 부분에 감추어져 있으며 섭리의 탁월한 시여 속에 가리워져 있다. 땅과 그 땅의 충만함은, 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생각하고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잊을지라도,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곳에 감추어진 재물은 하나님의 것이다. 날마다 즐겁게 지내는 자들은 "주의(감추어진) 재물은 하나님의 것이다. 날마다 즐겁게 지내는 자들은 "주의(감추어진) 재물로 배를 채우나", 그것은 단지 "배를 채우는 것"에 불과할 것이며(고전 6:13), 그들의 영혼을 채우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은 영혼을 위한 양식이 아니며 그들을 만족시킬 수도 없기 때문이다(사 55:2). 그것은 껍질이며 재이며 바람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배를 위할 뿐 그들의 영혼엔 관심이 없기 때문에 재물을 좋아한다.
[2] 그들은 무수한 가족들을 거느리고 있으며, 많은 재물을 그들에게 남겨 준다. 즉 그들은 "자녀로 충만하다. " 그러나 그 자녀들이 아무리 많아도 그 목초지를 가득 차지 않는다. 그들은 자녀들을 위해 충분한 것을 갖고 있으며 "그들의 남은 산업을 그들의 어린 아이에게," 그 손자에게 "유전"한다. 이것이 그들의 천국이며, 그들의 축복이며, 그들의 전부다. 다윗은 "여호와여, 나를 구하소서. 내가 나의 소득을 그들과 함께 하도록 하지 마소서. 나를 치려는 그들의 계획으로부터 나를 구하소서. 그들은 매우 많은 재물과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주께서 내 편이 되지 않는 한 나는 그들과 겨룰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4. 그는 그의 소득과 행복이신 하나님께 자신이 의지하고 있음을 진술하고 있다. "그들은 이 생애에서 자신의 소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자가 아니며 이 세상의 것을 거의 갖고 있지 않습니다. Nec habeo, nec careo, nec curo- 즉 나는 그것을 갖고 있지 않으며 필요치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내가 내 행복을 두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소망과 기쁨뿐입니다. 그것이 내가 바라는 것이고 그 소망으로 나 자신을 위로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의해 이 세상에서 그들의 소득을 취하는 자들로부터 나 자신을 구별합니다."
(1) 만족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의무이며 위안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선한 마음과 선한 생명을 지녔던 그리스도의 의로써 옷입은) 의로움 속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아야 하며 그를 항상 우리 앞에 모셔야 한다. 그리고 주의 아름다움을 묵상함으로써 날마다 즐거워해야 한다. 또한 우리가 매일 아침 일어났을 때 우리는 그의 말씀 속에서 우리 앞에 제시된 그의 형상을 기뻐해야 하며, 그의 새로운 은혜로써 우리에게 도장 찍여진 그의 형상을 기뻐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총에 관한 우리의 체험과 그에 대한 우리의 확증에서 우리는 관능적인 즐거움으로 배를 채우는 자들이 갖는 것보다 더 큰 만족감을 느껴야 한다.
(2) 그것은 또한 저 세상에 있는 우리의 보상과 행복으로 간주될 수 있다. 다윗은 앞의 시편에서도 이러한 것에 대한 전망으로 끝맺었는데 이 시편에서도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한 행복은 의로움을 얻고 성별케 된 의로운 자들만을 위해서 예비되고 계획되어 있다. 그들이 깨어났을 때, 영혼이 사망에서, 육신의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리고 육신이 부활하여 무덤 속의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들은 그 행복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 행복은 다음 세 가지 속에 있다.
[1] 하나님과 그의 영광을 직접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나는 주의 얼굴을 보리니." 그것은 이 세상에서처럼 희미한 거울을 통해 보는 것과는 다르다. 하나님에 또한 대한 지식은 거기서 온전케 될 것이며, 증강된 지력이 그것을 채울 것이다.
[2] 그와 같은 형상을 갖게 된다. 우리의 거룩함이 거기서 온전케 될 것이다. 이것은 전자의 결과로 생기는 것이다. 즉 "그가 나타나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라."(요일 3:2).
[3] 이 모든 것으로부터 나오는 완전하고도 충만한 만족을 갖게 된다. "나는 만족하리이다." 그것에 크게 만족하리이다. 하나님 안에서, 그리고 그의 얼굴과 형상, 우리를 향한 그의 선한 뜻과 우리 속에 있는 그의 선한 역사 안에서만 영혼의 만족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만족까지도 우리가 천국에 가지 전까지는 온전케 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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