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고통과 그 치유 (시편 13:1-6)
환난 가운데 있는 다윗은 여기에서 하나님 앞에 그의 영혼을 토로하고 있다. 그의 발언은 짧으나 그 방법은 매우 주목할만 하며, 지시와 격려에 있어서 유용하다.
Ⅰ. 그의 고통들은 원망을 자아내고 있다(1,2절). 곤고한 자는"그 근심을 여호와 앞에 토할"(102장 표제) 자유를 갖고 있다. 곤고한 자는 그 근심을 토로하는 것이, 특히 은혜의 보좌에 그것을 토로하는 것이 어느 정도 위로가 된다. 우리는 이 은혜의 보좌에서 자신의 백성들의 환난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며 그들의 연약함을 괴로워하시는 분을 틀림 없이 발견할 수 있다. 그분께 우리는 믿음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으며 그 곳에서 우리는 parvr`hsia 즉 "언론의 자유"를 가질 수 있다. 이제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다윗이 원망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1) 하나님의 불친절. 그는 그것을 하나님의 불친절이라고 해석했는데, 그것은 그의 잘못이었다. 그는 하나님이 그를 잊으셨고, 그에게 하신 약속과 그와 맺은 언약, 그리고 그에게 보여 주셨었던, 또 그가 진심으로 갈구했던 자비를 잊으셨다고 생각했었다. 또한 하나님으로부터의 위로와 도움이 필요하며 그것을 기대하는 자가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잊으셨다고 생각했었다. 시온은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고 말했고(사 49:14), 이스라엘은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다"고 말했다(사 40:27).
선한 사람은 그 누구도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선하심과 성실하심을 의심할 수 없다. 이것은 강한 두려움에 대한 투정부리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을 높이 평가하고 그것을 진심으로 갈망하는 마음에서 이러한 투정이 나왔을 때는, 비록 그것이 고상하지 못하고 책잡을 만한 것일지라도 그것은 간과되고 용서될 것이다. 왜냐하면 다시 생각함으로써 그것을 철회하고 회개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로부터 얼굴을 감추셨으므로 그는 예전에 얻고자 했던 하나님 안에 있는 그 내적 위로를 원했다. 그러한 그는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부르짖으신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하나님은 때로 그의 자손들로부터 그의 얼굴을 감추시며, 그의 안에 있는 자들의 유익이 모호하도록 버려 두신다. 이리하여 그들은 그 어떤 외적인 환난보다도 여기에 더 마음을 기울이게 된다.
(2) 그 자신의 불안정한 상태.
[1] 그는 그의 머리 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근심으로 고문당했다. "내가 나의 영혼에 상의(경영) 하나이다. 나는 내가 신뢰할 수 있고 또 의논할 수 있는 친구도 없이 당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나 자신을 돕기 위해 무엇을 할까 하고 궁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그 어느 계획도 효과가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따라서 나의 기지는 다했고 나는 끊임 없는 번민 속에 있습니다." 걱정스런 근심은 선한 백성들이 흔히 필요 이상으로 그들 스스로에게 지우고 있는 무거운 짐이 된다.
[2] 그는 그의 가슴을 채우고 있는 슬픔에 압도당하고 있다. "내가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나이다." 그는 항상 슬픈 상태에 있었고, 조용하고 고적한 밤에만이 아니라 대화와 일로 인해 가벼운 근심이 전환되고 사라지는 낮에도 그 슬픔은 그의 심령을 좀 먹어 들어갔다. 게다가 매일 거기에 새로운 근심이 더 들어왔던 것이다. "구름은 비를 몰고 온다." 빵은 때로 성도들의 주식이 된다. 우리 주님도 슬픔을 지닌 분이었다.
(3) 그의 슬픔을 가중시킨 그의 대적들의 무례함. 그의 큰 적인 사울과 그 밑에 있었던 다른 대적들은 그를 위압했고, 환난당하는 그에 대해 개가를 불렀고, 그의 번민을 즐거워했다. 그리고 그를 완전히 이기게 되리라고 그들 스스로에게 장담했다. 그는 이것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불명예스럽게 비난하는 것으로 여기고 원망하고 있었다.
2. 그는 이것을 어떻게 하나님께 간언하고 있는가? 그는 "이러한 상태가 어느 때까지니이까?" 그리고 "그것이 영영히 이러하겠읍니까?"라고 묻고 있다.
오랜 환난은 우리의 인내를 시험하며, 흔히 우리를 지치게 한다. 환난이 오랫동안 지속될 때,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것이 언제까지나 지속되리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렇게 되면 낙담은 절망으로 변하고 오랫동안 기쁨을 느끼지 못했던 자들은 결국 소망을 잃기 시작한다.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실 것인지를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것이 영영히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며 결국 내게 긍휼을 베푸시리라는 것을 확신시켜 주십시오. 그러면 나는 이 현재의 환난을 더 참을 수 있을 것입니다."
Ⅱ. 그의 원망들은 그를 기도하게 한다(3,4절). 우리는 하나님께 올리기에 합당하며 우리를 무릎 끓어 기도드리도록 만드는 원망 이외에는 어떤 원망도 결코 허용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다음을 살펴보자.
1. 그의 청원은 어떠한 것들인가? "나의 사정을 생각하시고 내 호소에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즉(1) "내 믿음을 강하게 하소서." 왜냐하면 믿음은 영혼의 눈으로 사물의 의미 이상의 것을 보며 그것을 꿰뚫어 보기 때문이다. "여호와여, 내가 현재 당하는 환난 저편을 볼 수 있게 하시고, 그 행복한 결말을 예지할 수 있게 하소서."
(2) "나의 길을 안내하소서. "내가 나의 주위를 살펴보아 나를 노리고 있는 함정을 피할 수 있게 하소서."
(3) "주의 구원의 기쁨으로 내 영혼을 소생시키소서." 침체된 영을 소생시키는 것은 "눈을 밝게 하는" 것이라고 일컬어진다(삼상 14:27; 스 9:8). "여호와여, 내 눈을 어둡게 하는 암울한 구름을 흐트려 주옵소서. 그리고 내 얼굴을 밝게 하여 주소서."
2. 그의 탄원은 어떠한 것들인가?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와 그에게서 얻는 이로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그리고 긴급한 위로와 구조가 요청되었던 그 커다란 위험을 강조하고 있다. 만일 그의 눈이 빨리 밝혀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1) 그는 멸망할 수밖에 없다고 결론내리고 있다.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나이다. 나는 이 모든 무거운 근심과 슬픔 아래서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부족한 것보다 더 영혼을 죽게 하는 것은 없으며, 그 은총이 주어질 때 영혼은 소생되는 것이다.
(2) 그렇게 되면 그의 대적들은 개가를 부를 것이다."나의 대적들이 이르기를 내가 저를 그렇게 하였다 할까 두려우며, 사울이나 사탄이 나의 멸망을 흐뭇하게 여길까 두렵사옵니다. "이 말은 그의 대적의 교만을 충족시켰을 것이며, 그이 대적은 "내가 저를 이기었다. 내가 그 날을 획득했고 저와 저의 하나님은 매우 비참하게 되었다."라고 말할 것이다. 또한 이것은 그의 대적들의 악의를 충족시켰을 것이다. 즉 그들은 "내가 요동될 때에 기뻐할" 것이다. 하늘과 땅에서 거룩한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짓밟히도록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일까?
Ⅲ. 그의 기도는 곧 찬미로 변하고 있다(5,6절). 그러나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이다. "여기 몇 줄 사이에서 얼마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는가! 이 시편의 첫 부분에서 우리는 그가 위축되어 떠는 것을 보았고 또 우울과 절망 속으로 빠지려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이 끝 부분에서 그는 하나님을 기뻐하면서 높이 찬양하고 있다. 믿음의 능력, 기도의 능력을 보라. 그리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를 보라. 만일 우리가 우리의 근심과 걱정을 은혜의 보좌로 갖고 가서 거기에 맡긴다면 우리는 한나처럼 돌아갈 수 있을 것이며 우리의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을 것이다"(삼상 1:18). 여기에서 그의 위로의 방법을 살펴보자.
1. 하나님의 긍휼은 그의 믿음을 부축하고 있다. "나의 사정은 매우 악화되어 있으며 나는 거의 그것을 비참하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비로소 주님의 무한히 선하심을 생각하나이다. 이제 내가 의지할 곳을 발견하였으므로 비록 내가 아무 공도 없사오나 위로를 받나이다. 이전의 환난 속에서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으며, 그것은 결코 나를 버리지 아니 하였습니다.그의 인자하심은 합당한 때에 나를 구원해 주었고, 그것에 대한 나의 확신은 그동안 나를 부축해 주었습니다. 이 깊은 환난 속에서도, 즉 하나님께서 나로부터 얼굴을 감추셨고, 외적인 투쟁과 내적인 두려움을 지녔을 때에도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아오니 그것은 푹풍 가운데 있는 닻과도 같았습니다. 그 인자하심의 도움으로 인해 비록 내가 시달렸다. 하더라도 전복되지는 않았습니다. " 그리고 여전히 "나는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나이다(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나는 그것이 마침내 내게 유익하게 행해질 것이라는 확신과 함께 나 자신을 그것에 의뢰합니다.""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이 얻은 (147-11) 기쁨을 아는 그는 하나님께 탄원하고 있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그의 믿음은 그의 마음을 "구원의 기쁨"으로 채웠다. 왜냐하면 기쁨과 평강은 "믿음 안에서"생기기 때문이다(롬 15:13). "믿고 기뻐하라'(벧전 1:8).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의지하는 그는 구원을 완전히 확신하고 있다. 그리고 날마다 슬퍼하던 그의 마음은 이제 "주의 구원을 기뻐하게" 될 것이다. 비록 울음이 오래 지속되더라도 기쁨은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3.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그의 기쁨은 그의 입을 찬미의 노래로 채웠을 것이다(6절).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이다. 주께서 이전에 행하신 것을 기억하여 노래하리이다. 비록 내가 가졌던 평강을 결코 되찾을 수 없다 하더라도 나는 하나님께서 이전에 그것을 내게 주셨던 것을 송축하며 죽겠습니다. 주는 이전에 나를 관대하게 대하셨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지금 나를 어떻게 대하시더라도 나는 주께 그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나는 모든 것이 좋게 끝날 것이라는 것을, 영원히 좋게 끝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면서 주께서 결국 나를 위해 행하시리라는 소망을 갖고 노래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과거의 일로써 말하고 있다("이는 나를 후대하셨다"). 왜냐하면 마음으로써 그는 구원의 전조를 얻었고 그것이 이미 행해진 것과 같은 확신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 시편을 노래하고 그것을 간구함에 있어서, 만일 우리가 다윗과 같은 원망을 할 것이 없다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며, 그의 숨으심을 두려워하고 탄원해야 한다. 또한 마음이 괴로운 자들을 동정해야 하며 지극히 거룩한 믿음과 기쁨으로 우리 스스로를 격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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