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학자들의 사악함 (시편 10:1-11)
다윗은 이 구절들 속에서 다음 사실을 깨닫고 있다.
Ⅰ. 그는 하나님과 그의 은총을 매우 사모하고 있다. 왜냐하면 환난의 때에 그가 가장 절실하게 원망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우신 모습을 감추시는 것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1절). "어찌하여," 주의 이름에 행해진 모욕과 주의 백성들에게 가해진 재앙에 무관심한 자처럼, "멀리 서 계시니이까?" 하나님의 물러가심은 어느때나 그의 백성들에게 매우 걱정스러운 일이며 특히 환난의 때에는 더욱 걱정스러운 것이다. 외적인 구원이 멀어지고 우리로부터 감추어져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멀리 계시다고 생각하여 내적인위로 원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잘못이다. 그것은 우리가 외적인 면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불신앙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나서 하나님께서 우리로부터 멀리 계신다고 원망하는 것이다.
Ⅱ. 그는 죄악에 대해 커다란 분노를 하고 있다. 그 죄악은 시대를 위험하게 만드는(딤후 3:1) 것이다. 그는 불의를 목격하고 근심하고 있으며, 또한 놀라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나쁜 평판을 그의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가져가고 있다. 그것은 헛된 영광 즉, "이 세리"와도 같이(눅 18:11)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더욱이 그 자신의 개인적인 분노나 언짢음이나 감정을 토로하기 위한 것도 결코 아니었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하나님과 모든 선한자들이 모욕당하는 것을 가슴 아프게 여기고 그것이 시정되기를 진심으로 바랐기 때문이었다. 감정적이고 냉소적으로 악인들을 비난하는 것은 유익하기보다는 해롭다. 우리가 그들의 사악함을 말하고자 한다면 기도로서 그것을 하나님께 아뢰자. 왜냐하면 하나님께 서만이 그들을 더 낫게 만드실 수 있기 때문이다.
악인의 사악함에 대한 긴 묘사가 여기에서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군박하오니"(2절)라고 하는 이 첫 번째 구절 속에 요약되어 있다. 그들이 책망을 받게 되는 두 가지 사실은 교만과 핍박인데, 전자는 후자의 원인이 되고 있다. 교만한 자들은 그들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과 같은 마음을 갖고, 같은 종교를 갖고, 그들이 말하는 대로 말하게 하고, 그들의 지배에 굴복하고, 그들의 지시에 순종하도록 만들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을 무색하게 하거나 그들에게 굽히려 하지 않는 자들을 뿌리 깊은 증오를 품고 헐뜯으며 미워한다. 나라와 교회에서 횡포를 부리는 자들의 그 원인은 그들의 교만에서 찾을 수 있다. 이렇게 묘사하기 시작한 시편 기자는 곧 짧은 기도를 삽입적인 기도로 덧붙이고 있다. 그것은 그 내용을 해치지 않고 이롭게 하고 있다. 교만한 백성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저희로 자기가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2절). 그들의 꾀를 거꾸러지게 하시고 그것에 의해 그들이 패망하게 하소서." 그들은 책망하는 이 두 가지 항목이 여기에 설명되어 있다.
1. 그들은 교만하며, 매우 교만하다. 그리고 그들 자신에 대해 극단적으로 자만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곧 나타나시어 그들을 치시지 않는 것을 그가 의아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교만을 미워하시며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기 때문이다.(1) 죄인은 자기의 능력과 성공을 교만스럽게 자랑한다. 그는"그의 마음의 소욕을 자랑하며, "그가 원하는 것을 행할 수 있음을 자랑하고(마치 하나님께서 그를 제어하실 수 없는 것처럼), 그가 원하던 모든 것을 이루고 그 목표를 수행한 것을 자랑한다. 에브라임도 "나는 실로 부자라, 내가 재물을 얻었다"고 말했던 것이다(호 12:8). "주여 사악한 자들이 이처럼 하나님의 주권과 지옥을 사칭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주의 영광을 위한 일입니까?
(2) 그는 우리가 진리에 따라 판단하신다고 확신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교만하게 반박한다. 따라서 그는 "여호와께서 증오하시는 탐리하는 자들을 찬양한다." 하나님과 사람의 감정이 얼마나 다른가를 보라. 하나님은 탐리하는 속인들을, 즉 돈을 자기들의 하나님으로 만들고 그것을 우상화하는 자들을 증오하신다. 그는 그들을 그의 대적으로 간주하신다. 그리고 그들과 교제하지 않으실 것이다. "세상과의 친교는 하나님과는 원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교만한 포학자들은 그들을 축복하며 그들의 말을 칭찬한다(49:13). 그들은 하나님께서 어리석은 자라고 선포하신 자들을(눅 12:20) 지혜로운 자라고 칭찬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앞에서 큰 죄를 지은 자로 정죄하신 자들을 무죄한 자라고 합리화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 생애에서 자기의 분깃을 가진다는 점에서 그러한 자들을 행복한 자들로 존경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대로 그러한 면에서 그들을 진실로 비참한 자라고 선포하셨던 것이다. "네가 사는 날 동안 네게 좋은 것을 받으라."
(3) 그는 교만하게도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 그에게 의지하지 않으며 그에 대한 신앙을 버린다(4절).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즉 교만한 마음이 나타나는 얼굴로(잠 6:17).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이며," 그에 대한 생각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그의 사사예"아니 그들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즉 그의 모든 사상은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볼 수 있다.
[1] 불경건과 불신앙의 본질. 그것은 "하나님을 구하지 않고 우리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는"것이다. 거기에는 그를 찾는 일도 없으며(욥 35:10; 렘 2:6) 그를 향한 소망도 없고 그와의 교제도 없다. 단지 거기에는 그에게 의지하지 않고 그에게 잡히지 않으려는 은밀한 바람이 있을 뿐이다. 악한 백성들은 하나님을 구하려 하지 않는다(즉 그에게 요청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기도없이 살아가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없는 삶이다. 그들은 많은 생각, 많은 계획과 방법 등을 갖고 있으나 그 어느 것에도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으며 그의 뜻에 복종하지 않고 그의 영광을 목표로 삼지도 않는다.
[2] 이러한 불경건과 불신앙의 원인, 그것은 교만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고, 자기 자신의 손으로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를 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신앙적인 사람들이 소수이며 비천하고 경멸당한다고 해서, 그리고 신앙의 규제가 그들에게 수치가 될 것이기 때문에 신앙을 갖는 것은 그들 자신을 비하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4) 그는 하나님의 명령과 심판을 교만하게도 경시한다(5절). "저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나이다." 그는 사악한 길 속에서 매우 대담하고 단호하다. 그는 그의 길이 비록 그 자신에게 아무리 싫증나게 되고 다른 사람들을 괴롭힐지라도 그것을 고수할 것이다. 그는 그의 사악한 진로 속에서 고통을 겪으나, 그의 오만은 그를 괴퍅스럽고 고집스럽게도 그것을 지속하도록 만든다. 하나님의 심판(그가 명하시고 그 명령을 이행치 않을 때에 대한 그의 위협)은 "높아서 저의 안력에 미치지 못한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그의 의무를 깨닫지도 못한다. 그에게 그에 대한 하나님의 권세를 말한다면 그는 자신이 결코 하나님을 보지 못했으므로 하나님이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고 하여 부인할 것이다. 또한 "그는 하늘 높은 곳에"계시고 "우리는 우리 위에 있는 것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말로써 그것을 묵살시킬 것이다. 그에게 범죄를 계속하는 자들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말해 보라. 그래도 그는 그 속에 어떤 실체가 있음을 납득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높아서 저의 안력이 미치지"못하므로, 그는 그것을 단지 근거없는 것으로만 여긴다.
(5) 죄인은 교만하게 그의 모든 대적들을 경멸하며 그들을 지극히 업신 여긴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고난과 파멸을 주기 위해 예비해 두신 자들 앞에서 마치 그가 그것을 모두 좌절시킬 수 있고 그것으로 그에게 유익하게 만들 수 있는 것처럼 허풍을 친다. 그러나 적을 경멸하는 것이 졸렬한 일인 것과 같이 하나님의 진노의 도구를 경멸하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다.
(6) 그는 교만하게 도전하며 그 자신의 계속적인 형통을 확신한다(6절). "저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그리고 그 생각으로 즐거워하기를"나는 요동치 아니하고"내 재품은 수 년 동안 쌓여 있으며"대대로 환난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나이다." 즉 바벨론같이 "내가 영영히 주모가 되리라"하나이다(사 47:7; 계 18:7). 이처럼 파멸을 가장 멀리 여기는 자들은 거기에 가장 가까이 있는 자들이다.
2. 그들은 포학자, 잔인한 포학자들이다. 그들의 교만과 탐욕을 충족시키고 하나님과 믿음에 대적하기 위해 그들은 그들의 손이 미치는 것을 매우 압제한다. 이러한 포학자들에 관해 살펴보자.
(1) 그들은 매우 가혹하며 사약하다(7절). "그 입에는 자주가 충만하나이다." 그들에게 실제적인 재앙을 행할 수는 없을지라도 그는 양심을 품을 것이며, 그가 실행에 옮길 수는없을지라도 살기를 내뿜는 것이다.. 이처럼 충성된 하나님 예배자들은 종과 책과 촛불로서 파문당하고 저주받는다. 마음에 악의가 가득 차 있으면 일반적으로 그 입에도 저주가 가득 차 있다.
(2) 그들은 매우 거짓되고 믿을 수 없다. 그들이 계획한 재앙은 들키지 않도록 혀 밑에 감추어져 있다. 왜냐하면 "그 입에는 궤휼과 허탄함이 충만하기" 때문이다. 그는 마귀에게서 속이는 것을 배웠고 또한 파괴하는 것도 배웠다. 그 궤휼로 그의 증오가 감추어지는 것이다(잠 26:26). 그는 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떤 거짓말을 하든지, 어떠한 맹세를 어기든지, 어떠한 위장 술을 사용하든지 개의치 않는다.
(3) 그들은 그들의 계획을 수행함에 있어서 매우 교활하며 간교하다. 그들은 의도했던 바를 더욱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도움이 되는 방법과 수단을 갖고 있다. 교활한 사냥꾼인 에서처럼"저가 향촌 유벽한 곳에, 그 은밀한 곳에 앉으며, 그 눈은 재앙을 행하기 위해 엿본다."(8절). 그것은 그가 자기가 행한 것을 부끄러워하거나(그가 얼굴을 붉힌다면 아마도 그가 회개하리라는 약간의 기대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결코 그에게 책임을 추궁하시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11절). 그것은 그가 자기 계획이 발각되어 깨어질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것은 정직한 여행자들과 그르이 갖고 있는 것을 탈취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도둑들과 노상강도들을 특별히 언급하고 있는 것 같다.
(4) 그들은 매우 잔인하고 야안적이다. 그들의 악의는 결코 그들을 격노케 한 적이 없는 "무죄한 자," 그들에게 저항할 수도 없고, 또 그들을 이기는 것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외로운(가난한) 자"에 대한 것이다. 그러한 자들은 모두 정직과 영예를 완전히 빼앗긴다. 그들의 무죄함이나 궁핍함이 그 해로운 계획으로부터 그들을 안전케 해 주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능력을 가진 자는 무죄한 자를 보호해 주어야 하며 궁핍한 자를 도와 주어야 한다. 이처럼 그들의 보호자가 되어야 할 자들이 파괴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목표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가련한 자를 잡고, 그들을 자기 그물로 끌어들이는"것이다. 즉 그들을 자기수하에 끌어들여 그들을 알몸이 되게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죽이는" 것이다. 그들은 귀한 생명을 사냥한다. 그들이 핍박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가련한 백성들로서, 그들이 하나님 하여금 것이고 또 그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는 이유로 그들에 대해 무서운 증오를 품는다. 그러므로 포학자들은 그들을 죽이려고 엎드려 기다린다. 피에 굶주린 "사자가 엎드림같이 저가 엎드려 기다리고," 그 먹이로 만족하게 배를 불린다.
그를 다루고 있는 마귀는 포효하는 사자에 비교되어 있는데, 사자는 삼키기 위한 대상으로 동물을 찾으나 마귀는 사람을 찾는다.
(5) 그들은 비열하고 위선적이다(10절). 거리를 가늠하여 먹이를 잡으려하는 짐승처럼"저가 굽히고 엎드린다."이것은 비열한 마음을 가진 포학자들과 압제자들은 그들의 악한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천한 것일지라도 그것에 몸을 굽힐 것이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다윗을 탐색할 때의 사울의 수치스러운 행실이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또한 이것은 그들이 사악한 계획을 감추기 위해 온유하고 겸손한 척하며, 그들이 크게 해하려는 자들에게 친절한 척한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들은 겸손한 척하여 가련한 자들을 탐지하고 살핀 후 그 계획대로 그들을 쓰러뜨려 자기들의 희생물로 만든다.
(6) 그들은 매우 불경건하며 무신론적이다(11절). 그들이 무엇보다도 먼저 믿음을 버리고 그 가장 거룩하고 자명한 원리의 빛에 대적하여 반란을 일으키지 않고서는, 이처럼 인간에 대한 모든 공의와 선함의 법도를 깨뜨릴 수 없었을 것이다. "저희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다 하나이다." 그 자신의 양심이 그의 사악함을 책망하고 그 결과에 대해 그를 위협하며, 의로우신 하늘과 땅의 재판장께 그가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를 물었을 때, 그는 "여호와께서 이 땅을 버리셨다"(겔 8:12; 9:9)고 말하면서 그 답을 회피했다.
[1] 이것은 하나님의 전능과 섭리에 대한 불경스러운 비방이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이 아래 세상에서 사람들이 행하는 것을 볼 수 없거나 보시지 않은 것처럼 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2] 그의 성품의 거룩함과 정직함에 대한 불겨스러운 비방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인도에 어긋나고 비인간적인 악행들을 보셨을지라도 그것을 싫어하시지 않고 기꺼이 묵인해 주시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3] 그의 통치의 공의에 대한 불경스러운 비방이다. 그것은 마치 그가 악인의 사악함을 보시고 싫어하셨을지라도, 그가 할 수 없거나 감히 하려하지 않으시며 그렇게 하시기를 싫어한다는 이유로, 결코 그것을 고려하지 않으시고 그것에 대해 그들을 벌하시려고도 하지 않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만한 압제자들에 의해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자기들을 위해 나타나시리라는 소망을 가져야 한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은 곧 전능자 하나님을 학대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편을 노래하고 그것을 간구함에 있어서 우리는 압제자들의 사악함에 대한 거룩한 분노를 우리 마음에 품어야 하며, 압제당하고 있는 자들의 비참함에 대해 따뜻한 동정을 품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합당한때에 해를 당한 자를 구하시고 그 해를 기억하시리라는 확고한 마음과 함께 하나님의 영광과 영예를 경건히 추구해야 한다.
포학자들에 대한 기도 (시편 10:12-18)
다윗은 여기에서 압제자들의 비인간성과 불경건함에 대한 앞에서의 진술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다.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Ⅰ. 그가 간구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1.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나 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다(12절).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이 아랫 세상의 일 속에서 주의 임재와 섭리를 나타내소서. 여호와여! 주께서 얼굴을 감추셨다고 말하는 자들이 부끄러워하도록 일어나옵소서. 주의 능력을 나타내소서. 주의 주장을 옹호하기 위해 그것을 발휘하시고, 손을 드시어 이 압제자들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시옵소서. 주의 영원하신 팔을 보여 주옵소서."2.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위해 나타나 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다. "가난한자, 곤고한 자를, 즉 아주 가난하게 되고 심령이 가난한 자를 잊지마옵소서. 그들의 압제자들은 외람되게도 주께서 그들을 잊으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압제받는 자들도 실의에 차 그들과 같은 말을 하려 합니다. 주여 그들이 모두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음을 드러내소서."
3. 그가 그들의 포학자들을 대적하여 나타나실 것을 간구하고 있다(15절)
(1) 그가 그들로 하여금 어떠한 재앙도 끼치지 못하게 해 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다.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그의 능력을 빼앗으시어"사특한 자로 권세를 받아 백성들을 함해하지 못하게" 하옵소서(욥 34:30). 우리는 권세를 빼앗겼으나 그 생명은 보존되어 회개할 여유를 얻은 압제자들에 대해 읽을 수 있다.
(2) 그가 그들의 행한 재앙에 따라 그들을 다루어 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다. "악한 자의 악을 찾으소서. 그가 영원히 들키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그 모든 것을 밝혀내소서. 그가 영원히 처벌받음이 없이 지나가리라고 생각했던 그 모든 것을 감찰하소서. 악을 "없을 때까지" 끄집어 내소서. 즉 악을 행한 자들 중 그 누구도 심문받지 않고 남아 있지 않도록 하시고 그 악한 계획 중 그 어느 것도 격파되지 않은 채 남아 있지 않게 하소서. 그리고 그의 일파 중 그 누구도 파멸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Ⅱ. 이 청원에 대한 그 자신의 믿음을 격려하기 위해 그는 무엇을 탄원하고 있는가.
1. 그는 이 교만한 압제자들이 하나님 자신에게 가한 큰 모욕을 탄원하고 있다. "주여, 주께서 나타나실 것을 우리가 간청하는 것은 주님 자신의 송사 때문입니다. 대적들이 그것을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벌하시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운 주의 영광을 위한 일이 아닙니다(13절).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나이까?" 악인은 그를 멸시한다. 그는"주는 감찰치 아니하리라. 주는 우리가 행한 것을 결코 문책하시지 않으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보다 더 의로우신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은 없다. 시편 기자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놀라고 있다.(1) 악한 자의 악에 대해. "어찌하여 저들이 그처럼 불경건하게 그리고 그처럼 어리석게 말하리이까?" 선한 자들은 죄인들의 죄로 인해 거룩하신 하나님이, 그의 계명, 약속, 경고, 은총 그리고 심판 등이 경멸당하는 것을 생각하고 매우 괴로워한다. 즉 그 모든 것이 얼마나 멸시당하고 소홀히 취급당하는가를 생각하는 것은 그들에게 매우 괴로운 일이다. "어찌하여 악인이 이처럼 하나님을 멸시하나이까?" 그것을 그들이 그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행해지는 일이다.
(2)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인내와 관용. "어찌하여 그들이 이처럼 하나님을 멸시하도록 내버려 두시나이까? 어찌하여 주께서 즉시 해명하시고 그들을 보복하지 않으시나이까?" 그것은 그들의 죄악이 가득 채워졌을 때 그들을 평가하는 날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는 하나님께서 이 압제자들의 불경건함과 불의를 보실 것을 탄원하고 있다(14절0. "포학자들이 주께서 그것을 결코 보지 않으시리라는 터무니 없는 공상으로 자기 자신들을 격려하도록 두시나이까? 핍박당하는 자들로 하여금 주께서 그것을 보셨을 뿐만아니라 그것을 감찰하셨다는, 근거가 확실한 믿음으로 격려하도록 해 주십시오. 심지어 포학자의 손으로 그리하여 해지고 있는 모든 재앙과 그들의 마음 속에 감추어져 있는 모든 경멸과 악의까지도 보셨다는 것을 믿게 해 주십시오. 그것은 모두 주께 알려져 있으며 주님에 의해 감찰되고 있습니다. 아니, 주께서 그것을 보시고 감찰하셨을 뿐만 아니라 주의 의로우신 복수의 손으로써 그것을 그들의 가슴에 갚으실 것입니다."
3. 그는 압제당하고 있는 자들이 하나님께 의지하였음을 탄원하고 있다.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자이다. 그들 각자가, 그리고 그들 중에 내가 그러하옵나이다. 그들은 후원자이며 보호자이신 주께 의지하며, 그들의 재판장이신 주께 그들 스스로를 의탁합니다. 그 재판장의 결정과 뜻에 기꺼이 순응하려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주께 맡기나이다(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그들은 거역하려 하지 않고 주의 지혜와 뜻에 동의하고자 하나이다. 그들의 압제자들이 주를 불명예스럽게 하는 반면에 그들은 이처럼 주를 압제자들이 주를 불명예스럽게 하는 반면에 그들은 이처럼 주를 영예롭게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발적인 주의 종들로서 그들 스스로를 주의 보호 아래 맡겼나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보호해 주옵소서."
4. 그는 하나님께서 기꺼이 우리와 맺으셨던 관계를 탄원하고 있다.
(1) 위대하신 하나님으로서,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토록 왕이시나이다"(16절). 행악자를 규제하고 두렵게 하며, 선을 행하는 자를 보호하고 칭찬하기 위해 재판하는 것이 왕의 직책이다. 해를 당한 종이 최고의 주권을 가진 자에게가 아니고 누구에게 호소하겠는가? "나의 주, 나의 왕이여! 나를 도우소서. 나의 대적에게 나의 원수를 갚으소서.""주여, 주를 자신의 왕으로 여겨 경이와 조공을 바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주의 통치의 유익을 얻게 하시고, 주께서 그들의 피난처를 발견하게 하소서. 주는 이 세상의 왕들과는 달리 영원하신 왕이시므로, 시간이 끝났을 때 영원한 심판으로써 영원한 상과 벌을 내리실 수 있으며, 또 내리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외로운 자들은 그 심판에 그들 자신을 의탁합니다."
(2) 선한 하나님으로서 그는 고아들(14절). 즉 도울 자들은 없으나 해치는 자들은 많은 자들을 도우신다. 그는 "외로운 자와 고아를 위하여"왕들을 선정하셨다(82:3). 그러므로 그 자신은 더욱 그러하실 것이다. 그는 고아의 아버지시며(68:5) 도움받지 못하는 자의 협력자가 되심을 그의 영예로운 직함 중에 하나로 취하셨던 것이다.
5. 그는 하나님의 교회와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나타나실 준비를 하고 계셨던 것을 경험한 일을 탄원하고 있다(16절).
(1)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적들을 흩이지게 하고 근절시키셨었다. "열방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 남아 있는 가나안 사람들, 오랫동안 사람들의 눈에 가시가 되어왔고, 이스라엘 편이 곤봉이 되어왔던 저주받은 일곱 민족들이 이제 드디어 완전히 근절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면에서는 이교도들보다도 더욱 나빴던 압제적인 이스라엘 사람들의 팔을 꺾으시리라는 것을 우리가 소망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고 있습니다."
(2) 그는 그들의 기도를 들으셨고 응답하셨다(17절). "주는 여러 번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고, 고통스럽게 애원하는 자에게 구하는 것이 헛되도다 라는 말을 결코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어찌하여 우리가 우릴조상들에게서 들은 그 이적들, 은총들이 계속되고 반복되리라는 것을 바라지 않겠나이까?"
6. 그는 그들의 경험에 의지하여 하나님께 기대갖는 것을 탄원하고 있다. "주는 들으셨으니(6:9 에서와 같이) 귀를 기울여 들으소서. 주는 동일하시므로 주의 능력과 약솟. 그리고 주의 백성들에 대한 관계도 똑같습니다. 그리고 그들 속에 있는 역사와 은혜의 역사도 똑같습니다. 그러하오니 우리가 어찌하여 여지껏 기도를 들으셨던 하나님이 앞으로도 여전히 그러하실 것이며 항상 그러하시리라는 기대를 갖지 않겠나이까?" 그러나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주시하라.
(1)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방법으로 기도를 들으시는가? 그는 먼저 그의 백성들의 마음을 예비시키신 후 그들에게 화평의 대답을 주신다. 우리는 이러한 방법 이외에서는 그의 은혜로우신 대답을 기대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그가 우리를 위해 일하신다는 가장 훌륭한 전조인 것이다. 그는 거룩한 소망을 불당김으로써 우리의 가장 거룩한 믿음을 강화시킴으로써, 그리고 그 생각을 확고히 하고 감동을 일으킴으로써 기도를 위한 마음을 예비하신다. 그리고 나서 그는 너그럽게 그 기도를 받아 주신다. 그는 원하고 갈구하는 마음을 위해 자비를 예비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받기에 합당하고 그것을 잘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드신다. 그리고 나서 그 자비를 우리에게 주신다. 마음의 준비는 여호와께로부터 나며 우리는 그것을 위해 그에게 간구해야 한다(잠 16:1). 그리고 그것을 인도하시는 은총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
(2) 기도의 대답으로 그가 어떻게 행하실 것인가?(18절)
[1] 그는 핍박당한자들의 송사를 변호하실 것이며, 고아들과 압제당한 자들을 판단하실 것이며 그들을 위해 심판하실 것이다. 그들의 무죄함을 밝히실 것이며 그들의 즐거움을 회복시키실 것이고 그들이 당한 모든 손상을 보상해 주실 것이다.
[2] 그는 핍박자들의 횡포를 종식시키실 것이다. 심판의 날까지 그들은 그렇게 행할 것이나, 그 후에는 더 이상 그렇게 행하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서 그들의 악의의 기복도 멎을 것이다. 즉" 세상에 속한 자로 다시는 위협치 못하게" 하도록 하나님께서 적절한 조치를 취하실 것이다. 여기에서 이 시편 기자가 자신이 이 시편에서 묘사하고 있는 교만한 포학자들의 힘을 얼마나 가볍게 여기고 있으며, 이제 하나님의 주권을 깊이 생각해 보고서 그 포학자에 대해 얼마나 경멸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가를 보라.
첫째, 그는"세상에 속한 자"(단어 그대로) 흙에서 "나온"자, 흙에서 튀어 나온 자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그는 천하고 연약하그러므로 다시 흙이 되기를 서두른다. 그런즉 어찌하여 우리가 "즉은 사람을, 풀같이 될 인자"(사 51:12) 에 불과한 사람을 두려워하겠는가? 우리를 보호하시는 자는 하늘의 주님이시며 우리를 핍박하는 자는 땅의 인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슬 안에 두신다. 그리고 그의 진노를 받을 잔류자를 쉽게 제어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게 될 때, 사탄은 그의 도구에 의해 더 이상 비혹하지도(계 20:3), 압제하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이 구절들을 노래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믿음의 영예와 유익을 위해 진심으로 마음을 기울이는 자로서, 의로우면서도 해를 당하고 있는 믿음의 송사를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합당한 때에 열심히 그것을 변호해 주시리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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