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욥기 4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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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1

욥의 겸손한 고백(욥기 42:1-6)

자기 스스로를 의롭다고 합리화시키던 욥의 말은 31장 40절에서 끝이 났다. 그 후로는 욥이 그런 취지로 더 이상 말한 것이 없다. 자기 자신을 심판하고 정죄하는 욥의 말은 40장 4, 5절에서 시작되었는데, 여기서 그는 같은 취지로 말을 계속하고 있다. 비록 그의 인내심은 그 온전한 공업을 쌓지 못했으나 자기의 성급함에 대한 욥의 참회는 그 온전한 것을 이루었다.

여기에서 그는 자기의 우행과 무모한 언사에 대하여 철저한 겸손을 나타내며, 또 그는 그 죄를 용서받는다. 선량한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행하도록 하려면 다소 어려움이 있겠지만, 그들도 필경은 자기들의 과오를 깨닫고 그 잘못을 고백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피조물 속에 나타난 자기 자신의 크심과 권능을 모두 욥에게 말씀하신 즉 "욥은 그제서야 여호와께 대답하였다(1절)." 곧 반박이라는 형태로서가 아니라(그는 대답지 아니하겠다고 약속했었다. 40:5), 순종의 모습으로 대답하였다. 우리도 이와 같이 모두가 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야 한다.

Ⅰ. 그는 하나님의 권세와 지식과 통치가 무제한적이란 진리에 동의를 표하여 하나님이 폭풍 가운데에서 말씀하신 말씀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증명하고자 하였다(2절). 썩어빠진 정열과 부정한 행위는 어떤 부패한 원리로부터 발생하거나, 아니면 진리의 원리에 대한 불신과 태만에서 기인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회개는 "진리의 인식"에서 출발한다(딤후 2:25).

욥은 여기에서 하나님의 위대성과 영광 및 온전하심에 대해 확신을 얻은 자기 판단을 고백하고 있는데, 이로부터 당연히 귀결되는 것은 하나님께 불경스레 발언함으로 나타내 보인 욥 자신의 철없는 행위에 관하여 그의 양심이 내리는 유죄 판결이다.

1. 그는 하나님께서 무슨 일이든 행하실 수 있다고 고백한다. 하마와 악어를 만드신 분이며, 또 그들을 자기 마음대로 요리하실 수 있는 분에게 어려워서 할 수 없는 일이 어찌 있을 수 있는가? 그는 이 사실을 이전에도 알고 있었고, 그 문제에 대해 아주 잘 표현해 왔었지만, 이제는 마음을 쏟아 그 일을 깨닫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권세가 자기에게 속한다는 사실을 한 번 말씀"하셨는데도 그는 그것을 두 번 들었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과 다툰다는 것은 생각해 낼 수 있는 것 중 가장 미친 짓거리이며, 엉터리없는 행동이다.

"주께서는 무소 불능하십니다. 그러므로 당신께서는 이 비천한 상태로부터 나를 끌어 올리실 수 있으십니다. 나는 어리석게도 나의 이 비참한 상태가 개선된다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자포자기해 버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당신께서 이 일을 행하실 수 있는 줄 믿습니다."

2. 그는 "어떤 생각도 하나님께로부터 차단되어 보류되는 것은 없다"고 고백한다.

(1) 하나님께서 인식하시기에 장애를 느낄 만한 우리의 생각은 하나라도 있을 수 없다. 우리의 마음 속에는 한시라도 신경질적이고 불만족스러우며 불신하는 생각이 들어오지만 하나님은 그 생각을 지켜보고 계신 목격자이시다. 하나님과 투쟁한다는 것은 헛된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의향과 계획을 그로부터 은폐시킬 수가 없으며, 만일 그가 우리의 생각이나 계획을 미리 알아 내버리신다면 그는 그것들을 좌절시킬 수가 있으시기 때문이다.

(2) 하나님께서 시행하시기에 방해를 받을 만한 자기 생각은 하나라도 있을 수 없다. "여호와께서는 자기가 즐겨 원하시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이행하였다."

욥은 23장 13절에서 "그는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그것을 행하신다"고 불평하여, 이 사실을 정열적으로 말하였던 것이나, 이제는 "하나님의 경영이 시행될 것이라"고 기꺼이, 또 만족감을 가지고 말하고 있다. 만일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에게 예기치 않은 결과를 가져다 주기 위한 선한 생각"이시라면 일견 중도에 어떤 난관이 놓여 있는 것 같든지 간에 그는 자기의 은혜스런 목적의 성취를 보류하실 리가 없다.

Ⅱ. 욥은 하나님이 그 이야기의 서두에서 규탄하셨던 사실에 대하여 스스로 죄가 있는 자라고 자인한다(3절). "여호와여, 당신께서 하신 말씀의 첫 마디가 이것이었습니다. '지식이 없는 말로써 이치를 어둡게 하는 이가 누구냐?' 딴 말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그 말 한 마디가 저를 깨닫게 하였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제가 그토록 무지 몽매한 인간이었음을 자백합니다. 그 말씀은 저의 폐부에까지 닿았고 내 죄를 목전에 나열시켜 주었습니다. 그것은 부인하기에는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었고 변명하기에는 너무나 죄질이 극악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지식이 없는 무지한 이치를 은폐시켰던 것입니다. 저는 무식하게도 저를 괴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향과 의도를 바로 보지 못하고 하나님과 논쟁하고자 하며, 제 자신의 정당성만 너무 과도하게 고집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였나이다. 즉 나는 내 스스로가 하나님의 섭리가 시행되는 이치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하는 문외한이면서, 섭리의 지배를 판단하였습니다."

1. 그는 스스로가 하나님의 의도에 대하여 무지하다고 고백한다. 우리 모두가 다 마찬가지로 무지한 자들이다. 하나님의 판단은 아주 깊은 심연이어서 우리는 그 깊이를 잴 수가 없다. 하물며 그 깊은 심연의 근원을 우리가 찾아 낼 수 있으랴!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동하시는 것은 보지만 그가 왜 그것을 행하시는지, 무엇을 목표로 기도하시는지, 그 일을 어떤 결과로 이끌어 가실지 알지 못한다. 이 일들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놀랍고 기이한 일들이어서, 우리가 발견해 내기에는 우리 시야를 벗어난 일이며, 우리가 변경시키기에는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일이고, 우리가 판결하기에는 우리 재판권이 미치지 않는 관할권 밖의 일이다. 그 일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다. 그 일들에 대해서 의견을 내린다는 것은 전혀 우리 자격 밖의 일이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왈가왈부하며 언쟁하는지의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까닭에서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가 성취될 때까지는 캄캄한 중에 있는 것일망정 만족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그는 자기가 이해하지도 못하는 일에 대해 의견을 토론해 보려고 기도해 본 것과, 자기가 판단할 수도 없던 일을 감히 나무랄려고 한 일에 있어서 스스로가 무사려 하고 주제넘은 것이었다고 고백한다. "그가 문제를 듣기도 전에 그 대답을 하는 자, 그에게는 그것이 어리석은 짓이며 수치가 된다." 우리가 어떤 소송 사실에 대해 판정을 내릴 자격이 없는, 즉 해당 판사가 아니라면 그 송사를 결정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그 사건과 어울러 우리 자신도 그르치게 된다.

Ⅲ. 그는 대답은 하지 않을 것이나, 9장 15절에서 말했던 대로 "그의 심판자에게 탄원을 하고자 한다." "들으소서! 나는 당신께 간구하나이다. 내가 말은 하겠사오나(4절), 원고나 피고로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13:22), 겸손한 하나의 청원인으로서 말하겠사오며, 가르치고 훈령을 내리려는 자로서가 아니라, 가르침을 받고자 열망하며 훈령을 기꺼이 받고자 하는 자로서 말하겠나이다.

여호와여! 심히 어려운 질문을 저에게 더 이상 퍼붓지 마소서. 나는 당신께서 제기하신 수 천 가지 질문 중 한 가지도 당신께 답변할 능력이 없는 까닭에서입니다. 오히려 당신께로부터 훈계를 청할 수 있도록 제게 허락해 주십시오. 그것을 제게 거절치 마시고 저의 우행과 자만심을 책망하지 마소서"(약 1:5).

이제 욥은 엘리후가 자기에게 훈계하였던 기도를 드리게 된다. "당신은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내게 가르쳐 주십시오."

Ⅳ. 욥은 스스로 참회자의 자세로 돌아가서 올바른 원리 원칙에 의거하여 행동한다. 진정한 회개에는 죄의 확신이 있어야만 할 뿐 아니라, 그 죄악에 대한 깊은 뉘우침과 경건한 비탄 즉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있어야 한다(고후 7:9).

자기 죄에 대한 욥의 비애도 그러하였다.

1. 욥은 자기의 회개 중에 하나님께 눈을 돌리고 하나님을 존중하게 되었으며, 그 태도를 자기 참회의 근본 원리로서 견지해 나갔다(5절). "나는 주께 대하여 귀로 들어 왔사온데, 나의 어릴 때 내 스승들로부터 청문한 적이 부지기수로 많사오며, 최근 얼마 전에도 내 벗들로부터 많이 들었습니다. 나는 당신의 크심과 권세와 지고하신 주권에 대하여 약간 알고 있기는 하였습니다만, 그런데도 내가 들은 것만으로써 내가 마땅히 당신께 승복해야 할만큼 당신께 스스로 굴복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일들에 관해 품었던 나의 견해는 내가 말하는 데만 도움이 되었을 뿐, 내 사고 자체에는 충분한 영향을 입지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방금 당신께서는 직접적인 계시로써 당신의 영화스러운 위엄 가운데에서 저에게 스스로를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이제는 내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이제는 제가 그전에 관념으로서만 알고 있었던 그 진리들의 권능을 피부로 느낄 수 있게 되었사오며, 그러므로 이제 저는 참회하옵고 지금까지 우매하게 말한 바를 취소하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과 목회자들의 훈계로써 좋은 교육을 받으며 하나님의 일들을 알게 됨은 크나큰 자비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는 것이고" 또한 그 믿음은 우리가 주의 깊게 그리고 "귀의 들음"으로써 경청할 때 가장 오기 쉬운 법이다.

(2) 우리의 오성이 은혜의 영에 의한 조명을 받을 때에는 하나님의 일들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우리가 이전에 알고 있던 지식보다 훨씬 능가하는데, 이는 시각적 설명에 의한 지식이 전문이나 일반 세평에 의한 논증보다 월등한 것과 같다. 인간의 가르침에 의하여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아들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고(갈 1:16), 따라서 "우리를 동일한 형상으로 변화시키신다"(고후 3:18).

(3)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자기의 말씀의 견책과 섭리의 책망을 통하여 자기 스스로를 그의 백성에게 아주 환히 나타내시기를 즐겨하신다. "내가 지금까지 고통을 받아 온 후에야, 내가 이제껏 내 과실에 대하여 훈계의 말씀을 들어 온 뒤에야 겨우 나는 내 눈으로 당신을 뵈옵나이다."

"매와 책망은 지혜를 주십니다. 주께서 시련하시어서 가르치는 자는 복있는 사람입니다."

2. 욥은 자기의 참회 중에 스스로를 향해 눈을 돌리고 자신에 대해서는 가혹하리만치 엄중히 생각하였으며, 그의 죄악에 대하여 비탄을 표명하였습니다(6절).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를 혐오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1) 우리의 관심사는 우리가 깨달은 죄악에 대하여 깊이 겸손해야 할 것과, 아울러서 그 죄악들로 인하여 스스로에 대한 미온적이고도 피상적 불쾌감 정도에 안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회개할 만한 크나큰 범죄 행위를 저지르지 않은 선량인들까지라도 자만과 혈기와 심술 및 그들의 모든 성급하고도 무분별한 언사가 작용하고 표출되는데 대하여 영혼상으로나마 크게 고통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에 대하여도 마음의 찔림을 받으며 비통함을 느껴야 한다. 원수가 충분히 낮추어 질 때까지는 평화가 불안전할 것이다.

(2) 경건한 후회는 외적인 표현을 통하여 참회가 잘되게 해준다. 욥은 티끌과 재 가운데서 통회하였다. 내적인 변화가 수반되지 않은 이런 행위는 다만 하나님을 조롱할 뿐이다.

그러나 영혼의 진지한 참회로부터 이런 행위가 우러나오는 경우에는 죄인들도 이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스스로에게는 치욕을 돌리고 또 타인들로 하여금 회개에 이르게 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 전에는 욥의 고난이 그를 재에 덮이게 만들었으나(2:8 그는 "재 가운데 앉았다"), 이제는 그의 죄악이 그를 재 속으로 보냈다. 진정한 참회인들은 그들이 과거에 어떤 외적 고통 때문에 비탄하였든지 간에 그보다 못지 않게 그들의 죄악에 대해서도 심심한 비애를 느끼며, 마치 외아들이나 맏자식을 잃은 만큼 비통중에 지낸다. 그 이유는 그들이 고통 중에서 보다 자기의 죄 중에서 더 많은 악을 발견하게 되는 까닭에서이다.



(3) 자기 혐오는 언제나 참회의 진정한 반려자이다. 그들은 그들이 범한 악을 인하여 스스로 싫어하게 될 것이다(겔 6:9).

우리는 우리가 범죄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영혼에게 입힌 과실과 손상에 대해서 스스로 성내지 않으면 안 될 뿐만 아니라, 죄악을 인하여 우리 스스로를 순전하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미운 존재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를 증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은 차마 불의를 바라 보실 수가 없으신 분이시다.

만약 죄악이 진실로 우리가 가증히 여기는 것이라면,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죄는 특별히 우리가 싫어하는 바가 될 것이다. 죄가 우리에게 가까이 접근하면 할수록 그것은 더 징그러운 존재가 될 것이다.



(4)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과 위험을 대면하면 할수록 우리는 죄의 비열함과 밉살스러움을 더 보게 되며, 죄악 때문에 우리 자신의 악함과 가증스러움 또한 더욱 더 알 수 있게 되고, 그로 인해 우리는 더욱 더 우리 스스로를 격하시키며 증오하게 될 것이다.

"이제 내 눈은 내가 노엽게 한 분이 어떤 하나님이신지 뵈옵고, 임의의 죄악으로써 내가 그 얼굴에 침을 뱉었던 그 존엄의 휘황찬란함을 바라보며, 내가 일축하였던 그 자비심의 부드러움을 바라봅니다. 이제 나는 내가 그 분노를 자초했던 그 분이 얼마나 공의로우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이신지를 봅니다. 그러므로 나는 내 스스로를 증오하나이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사 6:5)." 하나님은 욥에게 "교만한 자들을 발견해 내어 그들을 비하시키라"고 촉구하셨다(40:11, 12). "제가 그 일을 해 낸다고는 흉내조차 낼 수 없습니다. 다만 저는 제 자신의 교만한 마음을 꺾어 겸손하게 하며, 비천하게 하고, 낮추는 데는 충분합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일은 하나님께 맡겨 버리고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의 심령을 잘 지배하는 일만은 그의 은혜의 힘 안에서 우리의 본령으로 삼도록 하자.

 

42:2 없음.

 

42:3 없음.

 

42:4 없음.

 

42:5 없음.

 

42:6 없음.

 

42:7

욥에 대한 하나님의 변호(욥기 42:7-9)

욥은 그의 이야기에서 그 자신에게 대한 친구들의 혹평과 가혹한 처우를 무척이나 불평하였고, 자기와 그들 사이의 재판장으로서의 하나님께 호소하였다. 그러나 호소를 상주하는 즉시 판결이 나오기 어려우리라고 생각했던 터였다. 하나님이 폭풍 중에서 욥을 심문하실 때 사람들은 욥만이 나빴으며, 이 사건의 결말은 틀림 없이 욥에게 불리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 놀랍게도 우리가 여기서 발견하게 되는 결과는 전혀 반대이다. 최종 언도는 욥에게 호의적으로 내려졌다. 그러므로 판결의 시간이 되기 전에는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의로운 자들은 일시적으로 그들의 의로움이 크고도 비상한 고통으로 말미암아 암운에 덮이며 빛을 잃을 수도 있다. 또 인간의 혹평에 의해서나 자기 자신의 취약성과 우매한 정열 때문에, 혹은 말씀과 양심의 예리한 비판에 의하거나 하나님의 두려움을 인식하고서 자기 자신의 기고만장한 기백을 깊이 낮춤으로써, 자기의 의로움이 구름에 덮이며, 광채를 상실하게 되는 수도 있다. 그렇지만 적당한 때가 되면 이런 암운이 모두 걷히어 지나가 버리고 하나님께서는 "저희의 의로움을 빛같이 나타내며 저희의 공의로운 판단을 정오의 빛같이 드러낼 것이다"(시 37:6). 하나님은 욥의 의로움을 여기에서 밝혀 주셨는데, 이것은 욥이 정직한 자답게 공의를 굳게 붙잡고 놓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대하게 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욥과 그 벗들간의 논쟁에 대하여 욥이 세 친구들을 쳐서 내리신 판결. 여기서 엘리후는 정죄당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가 논쟁의 처리 과정에서 자신을 나머지 무리와 구별지었으며, 한 패거리로 같이 행동한 것이 아니라, 중재자로서 처신했기 때문이다. 중재 행위는 사람에게서 칭찬을 받든 못 받는지 간에 하나님에게서는 칭찬을 얻을 것이다. 여기에서 내려진 심판에서는 욥이 칭송을 받고 그의 세 친구들은 굴욕을 당한다.

우리는 양측의 담화를 면밀히 검토해 보는 중에도 식별할 수가 없었고, 따라서 누가 정당한지를 감히 결정하지 못하였다. 우리가 생각하기로는 그들이 각기 그럴싸한 진실을 다소 가지고 있었던 것 같으나, 가르마를 타듯 명쾌하게 저들의 주장을 판정할 수가 없었다. 어느모로 보더라도 우리는 잘못 판결을 내릴 경우에 대한 우려 때문에 결정적 선고를 내렸을 리가 만무하다.

그러나 심판이 여호와의 전유물이라는 사실은 다행한 일이며, 우리는 그의 판단이 진리에 의거한다는 것을 확신한다. 우리는 그것에 의뢰할 것이며 그것에 따라 지켜나갈 것이다.

1. 욥은 크게 기림을 받고 명예스럽게 된다. 그는 일개 거지가 세 방백을 대항하듯 일대 삼이었지만, 하나님을 자기 편에 두고 있었던 까닭에 수 천 명이 자기를 대적한다고 하더라도 결과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1)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신 것은 언제인가?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욥에게 말씀하신 후이다"(7절). 즉, 하나님이 욥으로 하여금 각성하도록 하시고, 그를 낮추심과 아울러 그로 하여금 자기가 잘못 말하였던 사실에 대하여 회개하도록 하신 다음에야 하나님은 욥이 올바르게 말한 부분을 인정해 주시며, 그를 위로하시고 그에게 존귀를 돌리셨다. 그 때까지는 허락치 않으신다.

우리는 우리가 자신들을 심판하고 정죄할 때까지는 하나님의 인가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지 못한 셈이다. 그러나 준비를 갖추는 때에는 그가 이처럼 욥을 위해 변호를 주장한다. 이는 "찢으신 그가 우리를 치료를 하실 것이며 치신 자가 우리를 싸매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보혜사께서 우리를 깨우쳐 주실 것이다(요 16:8).

어떤 방법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접을 기대할 수 있는지 살펴 보라. 우리는 하나님의 책망 하에서 먼저 낮추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책망의 말들을 통하여 재난을 불러 일으키신 뒤에야 돌아오셔서 그의 무한하신 자비를 따라 긍휼을 베푸셨던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원히 싸움만 계속치 않으실 것이며, 약간 논쟁하시다가 그의 동풍의 날에는 모진 바람을 멎게 하실 것이다. 욥이 스스로 겸비하는 이상 하나님도 욥을 높이신 것이다. 진정으로 참회하는 자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은총을 받을 것이며, 기왕에 그릇되이 말하고 행동했던 과실도 그 이상 더는 언급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혐오하는 지경에 이를 때에는 하나님께서도 무척이나 우리를 기뻐하신다.



(2)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욥을 향해 나타나셨는가? 욥의 모든 범죄가 사함을 받았다는 사실은 당연지사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우리가 여기에서 발견하듯 욥이 존귀하게 됐다면 틀림 없이 그는 의롭게 여김을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욥은 이따금씩 하나님께서 결국에는 자기 누명을 벗겨 주시리라는 것을 크게 확신하는 것을 암시하기도 했었는데, 그의 소망은 부끄러움을 당치 않았다.

[1] 하나님은 재삼재사 그를 자기의 종 욥이라고 부르시는 데, 7, 8절 두 절에서 네 번이나 그렇게 호칭하시며, 그의 고난 이전서부터 그랬듯이(1:8) 하나님은 그를 그렇게 부르시는 중에서 즐거움을 누리시는 것같이 보인다.

"너는 내 종 욥을 생각해 보았느냐? 그가 비록 곤궁하고 경멸하는 터이지만, 그래도 그는 내 종이며, 그가 형통할 때보다 못지 아니하게 지금도 내게 친근한 자이다. 그가 비록 결점들을 가지고 있지만, 또 다른 사람들처럼 혈기의 지배를 쉽사리 받는 사람으로 보이지만, 또한 그가 나와 논쟁하며 내 심판을 취소하고자 진력하고 무지한 말로써 이치를 어둡게 하였으나, 그래도 그는 자기의 과오를 깨닫고 그것을 철회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여전해 내 종 욥이다."

만약 우리가 욥이 그러했듯이 하나님께 대한 종복으로서의 순전성과 충실성을 계속 견지한다면, 비록 한 때에는 주종 관계의 명예와 위로를 박탈당하지만 종래에는 욥과 같이 우리도 원상으로 회복될 것이다. 악마는 욥이 위선자임을 증명하고자 기도하였고, 욥의 세 친구들은 그를 악인으로 정죄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용납하는 자들을 인정해 주실 것이며, 그들이 지옥이나 땅의 악의로 인하여 망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일 "잘 하였도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라고 말씀하신다면, 그와 달리 말하는 자는 별반 문제가 되지 않는다.



[2] 하나님은 욥이 그의 반대자들의 행위보다 뛰어나게 "자기에 대하여 정당한 것을 말하였다"고 인정하신다. 욥은 하나님의 섭리에 관하여 자기 논적들보다 훨씬 더 훌륭하고 진실에 가까운 설명을 했던 것이다. 저들은 번영이 참다운 교회의 표적인 양 간주하며 고난을 하나님의 진노의 확실한 증좌로 삼음으로써 하나님을 오판하여 욕되이 하였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의 애증이란 인간의 내면에 있는 것에 의해 판단되어야 하는 것이지, 인간의 면전에 놓여 있는 것에 의해 판단되어서는 안 된다고(전 9:1) 주장함으로써 하나님을 공정하게 평하였다. 다음을 살펴 보자.

첫째, 이 세상보다 저 세상의 상급과 형벌을 더 유의하고 저 세상의 상벌을 전망하면서 현세의 경영상 난점들을 해결해 나가는 자들은 하나님과 그의 섭리를 가장 공정하게 인식하는 사람들이다. 욥은 사물의 판단에 있어서 자기 친구들이 행한 것과는 달리 미래의 심판과 미래 상태를 오히려 참조하였고, 따라서 그는 하나님께 대하여 자기 친구들보다 더 정당한 것을 말하였다.

둘째, 욥이 비록 몇 가지 말을 잘못 얘기하였고, 심지어 하나님께 대해 실언조차 하였으며, 하나님께 너무나 당돌하게 대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이 정당한 것을 말한 사실로 인해 칭찬을 받는다. 우리는 진실하고 선량한 것을 배척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설사 그 안에 인간적 취약성과 약점의 혼합물이 나타나 있다고는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온당한 칭찬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셋째, 욥은 정당하였고 그의 친구들은 부당이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욥은 고통 중에 있었으며, 그의 벗들은 편안한 중에 있었다. 이것은 우리가 외모와 돈 지갑만 봐가지고서는 인간이나 그의 정취를 판단해 낼 수가 없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인간의 심령을 통찰하시는 그 분만이 그 일을 일호의 착각도 없이 해 내실 수 있다.



[3] 하나님께서 욥에게 대해 확언하시는 것은 욥의 친구들이 자행한 모든 학대에도 불구하고 욥은 너무도 선량한 사람이며, 그렇게도 겸손하고 인자하며, 너그러이 용서하는 심령을 가졌기 때문에, 그는 자기 친구들을 위해 쾌히 기도 드리며, 그들을 위하여 하늘에서의 자기 영향력을 사용하는데 주저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이다.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해 기도해 주리라. 나는 그가 그럴 줄 알고 있다. 나는 그를 용서해 주었고, 그는 사함의 위로를 받고 있다. 그러므로 그도 너희를 용서해 줄 것이다."

[4] 하나님은 욥을 이 집회의 제사장으로 임명하시고 그와 친구들을 위한 그의 중재를 열납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너희 희생 제물을 내 종 욥에게 가지고 가라.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악으로부터 정하게 씻기신 자들은 하나님이 또한 자기 왕이나 제사장으로 삼으신다.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들은 자기들 자신을 위한 청원인으로서의 은총을 입게 될 뿐만 아니라, 타인들을 위한 중재자로서도 역시 기쁘게 열납을 받을 것이다. 욥이 이전에 자기 자녀를 위해 번제를 드렸듯이(1:5), 그가 자기 친구들을 위해 제사를 드리도록 지명을 받은 일 가운데에서 하나님이 욥에게 부여하신 것은 크나큰 영광이었다.

그리고 욥이 이와 같이 제사장직에로 복귀하게 된 것은 그가 이전의 융성으로 회복될 것에 대한 조짐이었으며, 참으로 원상 회복을 향하여 내딛는 거보였다. 이처럼 그는 그리스도의 예표가 되었다. 우리와 우리의 영적 희생 제사는 그리스도 한 분만을 통하여 "하나님께 열납되기" 때문이다(벧전 2:5).

"내 종 욥에게, 내 종 예수에게(한 때에는 그로부터 하나님이 그 얼굴을 숨기셨으나), 가서 너희 번제물들을 그의 손에 쥐어 주고 그를 너희의 변호자로 이용하여라. 왜냐하면 내가 그를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게서 너희가 기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너희가 너희의 우행에 따라서 취급되리라는 것이다."

욥이 자기 영혼을 부상시키고 비탄에 잠기도록 했던 자들을 위해 기도 드리며 번제를 드린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박해한 이들을 위해 기도하시며 그들을 위해 죽으시기까지 하시고 "죄인을 위해 중보하시면서" 사신다.

2. 욥의 친구들은 큰 굴욕을 당하고 수치를 무릅쓴 채 나아온다. 그들은 선량한 자들이었고,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욥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자기들의 과오 중에 버려 두고자 하시지 않으셨다. 욥은 폭풍 속에서의 말씀을 통하여 낮추셨으므로, 저들을 낮추시는 데에는 딴 방도를 택하셨던 것이다. 욥은 하나님께 가장 친근한 자였던고로 맨 먼저 꾸짖음을 받았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이제야 그 차례가 돌아 온 것이다. 하나님께 욥에게 하문(下問)하시는 것을 저들이 들었을 때에 저들은 아마도 자기들이 정당하였으며, 욥은 아주 과오투성이 속에 있다는 그릇된 생각으로 의기양양하게 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곧 저들을 책망하셨고 그들로 하여금 반대의 사실을 알게 해 주셨다. 거개의 토론과 논쟁에 있어서는 어느 쪽이든 다소 잘못된 점이 있기 마련인데, 그 잘못은 그 주장의 장단점과 논쟁의 운영에 다 있거나, 아니면 이 두 가지 중 어느 하나에 있다. 그래서 쌍방에서 그 점을 지적해 주고 그들로 하여금 자기 잘못을 깨닫도록 해 주는 것은 온당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점을 엘리바스에게 토로하시는데 그는 상급자로서 뿐만 아니라, 욥에게 행한 집중 공격의 장본인으로서 이 일을 행하신다.

(1)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명백히 말씀하시는 점은 그들이 "하나님께 대해 말한 것"이 욥의 말처럼 온당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그릇된 가설 위에서 욥을 비난했으며, 정죄하였고, 하나님께서 실제로는 욥의 친구로 그를 단지 시험하고 있었을 뿐인데도, 그는 하나님이 원수로서 욥과 투쟁하는 분으로 묘사하였던 것이다. 이 점이 온당치 못하였다. 하나님의 친자녀에 대한 부성애로서의 징계를 사법상의 형벌로 표현하고,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자들에 대한 설명시에 그들을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단절시켜 버리는 자들은 하나님께 대해 잘못 말하는 자들이다.

타인들의 영적 상태와 영원한 지위에 대해 무자비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위험한 짓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행하는 중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 들이는 자들을 혹 정죄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며, 만약 그런 짓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소자를 화나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은 그들이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행한 모든 잘못을 자기 자신이 학대받은 것으로 여기신다.



(2)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그들에게 대해 성이 나셨다는 사실을 저들에게 확실히 말씀하신다. "나의 노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불살라지고 있다." 하나님은 제 형제들과 동포들을 능멸하며 비난하는 자들이나, 그들을 짓밟고 의기양양해 하는 자들과 그들의 재난이나 허약함을 가지고 가혹한 판단을 내리는 자들에게 매우 성내신다. 비록 선량하고 현명한 자들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그릇되게 말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아주 성을 내시고 그들로 하여금 자기의 성내심을 알게 하여 주셨다.

(3) 하나님은 그들이 잘못 말한 사실에 대하여 속죄하기 위한 희생 제물을 그들에게서 필요로 하신다. 그들은 각기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수양 일곱"을 각각 가지고 와서 "번제"를 위해 바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왜냐하면 모세의 율법 앞에서는 모든 제물이, 심지어는 속죄 제물조차도 전부 소각당한 것 같다. 그러므로 번제라고 불리웠던 것이다. 저들은 자기들이 놀라울 정도로 말을 잘하였으며, 더욱이 하나님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명분을 위하여 변호한 사실로 인해 자기들에게 신세를 지고 계시며, 따라서 그 행위에 대한 좋은 상급을 내릴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들은 말은 정반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쾌히 여기시며, 그들에게 희생제물을 요구하신다는 것과 자기들의 우행에 따라서 자기들을 다루시리라는 경고였다. 하나님은 흔히 우리가 긍지를 가지는 우리 안의 것에 대해 분노를 발하시며, 우리가 잘했다고 생각하는 행동 중에서 많은 잘못된 점을 간파해 내신다.

(4) 하나님이 그들에게 내리신 명령은 그들이 욥에게로 가서 자기들을 위해 희생제를 드리며 기도해 달라고 청하라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용납되지 못할 터였다. 하나님께서 이로 말미암아 의도하시는 바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그들의 교기를 꺾고 그들을 낮추시기 위함이다. 그들은 자기들만이 하늘의 총아들이었고, 욥은 하늘에 아무런 이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가진 것보다 더 큰 하늘 권세를 욥이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용납을 받는 데 있어서 욥이 그들보다 더 정정당당한 입장 위에 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이해시키신다. 하나님의 백성을 혹평하고 경멸하는 자들이 되려 그들의 호의를 얻으려 알랑거리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다(롬 3:9). 어리석은 처녀들은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기름을 구걸하게 될 것이다.

[2] 그들이 하나님과 화해하는 조건으로서 욥과 사화할 것을 그들에게 의무화시키기 위함이었다. "만일 네 형제에게 너를 원망할 일이 있거든(욥에게 그 친구들을 원망할 일이 많았듯이) 먼저 네 형제와 화해를 하고 난 뒤에 와서 네 예물을 드려라."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죄사유하심을 얻고자 바라기 전에, 일의 성질이 요구하는데 따라 저지른 잘못에 대한 보상부터 먼저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종 욥의 주장을 얼마나 철저하게 지지하셨으며, 그를 위한 일에 얼마나 투철하게 관여하셨는지 살펴보라! 하나님은 욥에게 득죄한 자들이 먼저 욥의 용서를 구하고 욥이 그들과 사화하게 될 때까지는 결코 그들과 화해를 하지 않으실 것이다. 욥과 그의 친구들은 많은 문제에 있어서 그들의 견해를 달리하였으며, 상호간의 주고 받은 비난은 너무나 신랄하였으나, 이제는 화해하게 되었다. 그것을 위해서 저들은 그 문제를 다시는 더 거론하지 않아야 하였으며, 그 논쟁을 새로운 각도에서 문제 삼으려고 해서는 아니 되었다(그렇게 되면 그 논쟁은 끝없이 계속될 것이었다). 제사와 기도에는 일치 합심하여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화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이 감상의 일치를 보지 못하였을 때 그들은 애정과 헌신의 합치를 이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소한 문제에 대한 판단이 상이한 자들이라 하더라도 위대한 희생 제물이신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이며 동일한 은혜의 보좌 안에서 만날 수 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해야 하며 서로 참아야만 한다. 한번 더 관찰해 보자. 하나님께서 욥의 친구들에게 화를 내셨을 때 그는 그들로 하여금 자기와 화해하도록 기회를 허락하셨다. 우리와 하나님의 언쟁은 언제나 우리 편에서 비롯되지만 화해는 하나님 편에서 시작이 된다.

Ⅱ. 여기에 내려진 심판에 대한 욥의 친구들의 묵종(9절). 그들은 선량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여호와의 의사가 무엇인지 파악하자마자 그가 명하신 대로 행하였고, 더욱이 그들이 한 때 정죄했었던 자에게 이처럼 비위를 맞춘다는 것은 혈육을 가진 이상 성미에 맞지 아니할 텐데도 불구하고, 신속하게 행하였으며 반박하지도 않았다.

하나님께 화해되고자 원하는 자들은 처방받은 그대로의 화해 수단과 방법을 주의 깊게 사용해야만 한다. 하나님과의 화평은 그 자신의 방식과 요구 조건대로 따르는 경우에만 획득이 가능하며, 그의 방식과 조건도 특권을 평가할 줄 아는 자들에게는 조금도 가혹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아무리 굴욕적이라도 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조건이든 기꺼이 받아들 일 것이다.

욥의 친구들은 욥을 기소하는 일에 모두 같이 동참하였는데 지금은 욥으로부터의 용서를 구하는 일에도 같이 참여하고 있다. 공동으로 범죄한 이들은 공동으로 회개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나님께 호소하는 자들은 욥이나 그의 친구들이 그러했듯 하나님께서 내리는 판정이 자기들의 마음에 달가운 것이든 달갑잖은 것이든 간에 하나님의 포상을 감수하기로 작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명을 양심적으로 준봉하는 자들은 그의 은총에 대하여 의심할 필요가 없다.

"여호와께서는 또한 욥을 기쁘게 받으셨고" 욥의 기도를 응락하시사 그의 친구들도 열납하셨다. 하나님이 "그들" 기쁘게 받으셨다고 이르지 아니하시고(비록 그런 의미가 내포돼 있기는 하나), 그가 그들을 인하여 "욥"을 열납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는 "우리도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기쁘게 받아들여지도록 만드셨다."(엡 1:6; 마 3:17).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에 대해 주신 증언과 자기의 친구들로 하여금 자기에게 승복하도록 의무화시킨 사실을 가지고 자기 친구들을 모욕하지는 않았다. 하나님께서 자기와 화해해 주시는 은혜를 내려 주셨으므로 욥도 자기 친구들과 기꺼이 화해를 하였고, 그러자 하나님도 그를 기꺼이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것은 주 여호와께 열납되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모든 기도와 예배에서 목표로 삼아야만 하는 점이며, 우리 야망의 절정은 곧 우리가 인간의 칭찬을 얻는 것보다,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데 놓여져야만 할 것이다.

 

42:8 없음.

 

42:9 없음.

 

42:10

다시 받은 욥의 부름(욥기 42:10-17)

사도 야고보는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 여호와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으니" 곧 주께서 욥의 고난을 종국에 가서는 어떻게 마무리하셨는지 볼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약 5:11).

우리는 욥기의 서두에서 고통 중에 보여 준 욥의 인내를 한 귀감으로 대하게 되었으나, 여기 이 책의 말미에서는 그 귀감을 본받게 하기 위한 격려로서 그의 고난을 따라 오는 복된 결과와 고통 뒤에 회복된 번영의 모습이 우리에게 나타나고 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참고 견디어 내는 자들의 행복을 셈하는데 우리 신념을 굳혀 주는 사례이다.

또한 욥이 자기 고난 후에 보답 받은 비상한 번영은 아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늘 나라의 영화와 복락에 대한 예표와 표상이 되도록 의도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세상의 현재적 고통이 우리에게 작용하고 있지만 저 하늘 나라에서는 마침내 영화와 복락이 나타날 것이다.

욥이 당시 동방의 모든 사람들 중 큰 자였으면서도 그의 나중 융성은 처음보다 배나 더하였듯이, 우리의 하늘 나라 복락도 우리가 현재 누리는 모든 즐거움과 만족하게 해 주는 모든 것들의 배 이상 될 것이다. 시험을 당할 때 유혹을 올바로 견디어 내는 자들은, 욥처럼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다(약 1:12). 욥은 시험을 받고서 우리가 본문의 설명에서 접하는 대로 모든 재물과 존귀와 위로를 받았다.

Ⅰ.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대한 자비의 길로 돌이키셨다. 그에게 대한 하나님의 생각은 "선한 생각이었지 악한 생각이 아니었다." 곧(장래에 소망을 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예기된 결말을 주는" 생각이었다(렘 29:11).

욥의 고통은 사탄의 악의에서 비롯되었으나, 하나님께서 이를 억제하셨고, 그의 회복은 하나님의 자비에서 비롯되었으나 사탄은 이를 반대할 능력이 없었다. 욥에게 가장 쓰라린 병고가 되었고 그가 최대의 강조를 하여 마지않던 모든 그의 불평이 참으로 슬픈 어조를 띄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분명히 자기를 반대하시는 것 같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명백히 자기를 지지하시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나님이 이전에는 "경성하여 그를 뽑으며 전복시키셨던 것같이"(적어도 그가 보기에는) 이제는 "경성하여 자기를 세우시며 심으셨던 것이다"(렘 31:28). 이것은 그의 사태를 즉각 새로운 국면으로 일신시켜서, 전에는 암담하고 두렵던 모든 것들이 이제는 유쾌하고 소망을 주는 것으로 보였다.

1. 하나님께서는 "그의 속박을 돌이키셨다." 즉 그는 욥의 불평의 호소를 바로 잡아 주시고, 그의 불평의 모든 원인을 제거하셨다. 그는 사탄이 그때에 상당히 오랫동안 묶어 두었던 속박으로부터 그를 풀어 주셨고, 자기가 욥을 넘겨 주었던 그 잔인한 독수에서 그를 구출해 내셨다. 우리가 여기서 상상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신체적 고통과 질병이 너무나 급작스레 치유되고, 너무나 완전히 회복되어 그 치료는 가히 기적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의 육체는 어린 아이의 것보다 더 싱싱하게 되었고, 그는 그의 청년 시절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더욱이 그는 자기 마음 속에 아주 큰 변화가 일어남을 느끼게 되었다. 그의 마음은 평온하고 편안하였다. 소요가 모두 지나가고 불안을 주던 생각들은 남김없이 사라졌으며, 그의 공포심은 잠잠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안위하심은 그의 공포가 그 마음의 부담이 됐던 만큼 그에 못지 않게 이제는 자기 영혼의 큰 즐거움이 되었다.

이와 같이 형세는 일변되어 그의 고통은 그들이 물밀 듯 밀려 들어올 때 만치 급속히 퇴조하기 시작하였다. 그 퇴조의 시각은 바로 "그가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 드리고 있었을 때," 곧 그가 그들을 위해 바친 희생 제사를 드리면서 기도 드리던 때였다. 자비는 비록 욥이 자기편에 정당성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그가 자기 친구들과 논쟁하고 있을 때에는 돌아오지 않고 있었고, 그가 그들을 위해서 기도 드리고 있을 때에야 돌아왔던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격렬한 논쟁보다는 우리의 열렬한 헌신으로써 더 좋은 예배와 기쁨으로 삼으시기 때문이다. 욥이 "인간들에게 그들의 허물을 용서해 주는" 이 본보기로서의 그의 참회를 완료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의 속박을 돌이켜 주심으로써 자기 사면을 완료하셨다.

만약 우리가 정당한 방법으로 우리 친구들을 위한 기도를 드린다면 우리는 참으로 우리의 본분을 행하고 있는 셈이다. 왜냐하면 그 기도 속에는 믿음이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랑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를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면서, 타인들과 더불어 또 타인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다. 우리는 타인들을 위한 자비를 구하는 일에서 스스로도 자비를 찾을 수가 있다.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도 그가 "언제나 중보의 삶을 사는 데"서 그의 높임과 주권을 받으신다. 어떤 이는 욥의 곤경의 돌이키심은 하나님께서 놀라웁게도 스바 사람들과 갈데아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이 내키도록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전에 빼앗아 갔던 가축들을 욥에게 변상하게 되었던 까닭이라고 이해하기도 하는데, 욥은 이것으로써 세상 살이를 다시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아마 사실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들 약탈자들은 "그의 부를 삼켜버렸었으나," 그들은 "다시 그것들을 억지로 토해 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20:15). 그러나 나는 이것을 오히려 이제 일어나는 형세의 역전에 대한 더 일반적인 것이라고 이해하고 싶다.

2. 하나님은 그의 소유를 갑절이 되게 하셨다. "또한 여호와께서는 욥의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셨더라."

하나님께서 최초에 이런저런 방법으로 욥에게 넌지시 알리신 것은 아마도 이러했을 것이다. 즉 점차적으로 욥을 융성하도록 하시다가 적당한 시기가 되면 그를 형통의 절정에 이르도록 해 주시사 욥의 소망을 격려시키고 또 그의 산업을 촉진시키고자 그가 여태 소유한 것보다 두 배에 이르는 것을 소유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더욱이 이 놀라운 증가는 하나님의 은총의 특별한 표상인 것같이 보여진다. 하나님의 이런 행위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의도하시는 것으로 간주된다.



(1) 그의 손실을 상쇄시키기 위하여.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였고,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유리하도록 그 변상을 해 주셨으며, 이자에 이자를 더하는 복리 이자보다 더 많은 것을 허락해 주셨다. 하나님은 누구라도 자기 때문에 손실을 입지 않도록 배려하고 조처하실 것이다.



(2) 그의 인내와 하나님께 대한 그의 신뢰를 보상하기 위하여(부패의 작용에도 불구하도) 그는 인내와 신앙을 내던지지 않았으며, 계속 굳게 고수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큰 상을 보상으로" 얻는 것이다(히 10:35). 욥의 친구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욥을 혹독히 비난하였다. "만일 네가 청결하고 정직하다면 이제 그가 정녕 너를 돌아 보실 것이다"(8: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를 위해 깨어나지 않고 있으므로 너는 정직하지 않다."

"비록 너희의 변론이 결정적으로 단호하지는 못했으나 내가 그것을 가지고서도 내 종 욥의 온전함을 증명하겠노라. 그의 나중 결말은 크게 흥할 것이며, 너희가 그런 결과를 보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의 흥륭으로 말미암아서 욥이 모든 소유물의 손실을 입은 것은 자기 손의 불의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제는 욥도 하나님께서 빼앗아 가신 것에 대해 송축할 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그가 행하셨듯이, 1:22). 그것은 그에게 아주 선한 보답으로서 되돌아 왔기 때문이다.

Ⅱ. 그의 오랜 지인들과 이웃들과 친척들은 그에게 아주 친절하였다(11절). 저들은 그때까지 욥에게로부터 소원해진 채 지나고 있었는데, 이점은 욥이 자기가 당하는 고통에 대해 터뜨린 불평의 원인 중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바였다. 그는 그들의 불친절을 통렬히 호소하였던 것이다(19:13 이하). 그러나 이제 저들은 그를 방문하여 온갖 가능한 애정과 존경의 표현을 쏟아 놓았다.

1. 그들은 욥에게 경의를 표하였다. 이전처럼 그에게 와서 그와 함께 식사를 하였으며, 그것도 은밀히 그들의 식물을 지참하였기 때문에(그렇게 상상할 수 있다) 욥은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그들에게 잔치를 베푼다는 평판을 얻었다.

2. 그들은 욥에게 동정을 베풀었고, 형제로서 어울릴 정도로 욥에게 따뜻한 배려를 나타내 주었다. 그들은 욥이 고통을 당하던 당시의 모든 재난에 대해 담소할 때는 욥을 동정하는 나머지 슬퍼 하였고, 그들이 하나님께서 욥에게 은혜로이 돌이키심을 깨닫게 되었을 때는 그를 위로하였다. 그들은 욥의 고뇌를 인하여 통곡하였고, 그의 기쁨 속에서 환희를 느꼈다. 그들은 욥의 세 친구들 마냥 그렇게 초라한 위로자가 아님을 증명하였다. 그들은 처음으로 욥을 시중하는데 적극적이었고, 참여하기를 좋아하였다. 이들은 욥의 친구들과 같이 그렇게 위인들이거나 학식 있고 달변인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욥을 위로하는 데 더 나은 재주를 보여 주었고, 더 친절하였음을 증명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확신의 깨달음을 하시는 일에 이 세상의 어리석고 약한 것들을 택하시기도 하시는데 위로하는 일을 위해서도 마찬가지로 그런 것들을 선택하신다.

3. 그들은 욥의 손실에 대한 복구와 그의 재기를 위하여 그들 사이에서 각출금을 거두었다. 그들은 "따뜻하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고 말하리 만치 충분하다고는 생각지 않았으나(약 2:16), 그에게 쓸모가 있을 정도의 물건들을 주었다. "각자가 모두 욥에게 금 한 조각씩을 주었고"(아마 어떤 이들은 자기들 능력에 따라 좀 더 많이 내기도 하고 좀 더 적게 내기도 하였을 것이다), "각자가 모두 금 귀고리 하나씩"(동방의 자손들에게는 무척 많이 사용되던 장신구)을 "주었는데," 이것은 욥에게 있어서 돈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이것은 그들이 잘 모시어 두고 아낄 수 있던 여분의 물건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풍부가 우리 형제의 궁핍에 대한 공급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우리의 규례이다. 그러나 욥의 친척들은 왜 마지막에 와서야 욥에게 자기들의 친절을 겨우 발휘하였는가?

(1) 하나님께서 저들의 마음 속에 그렇게 행하고자 하는 자비심을 넣어 주셨기 때문이다. 모든 생물은 하나님이 그 마음을 명하시는 대로 우리에게 대한다. 욥은 자기에게 대한 그들의 경원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사의를 표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하나님은 저들을 다시 그에게 돌이켜 주심으로써 그에게 상을 주셨다.

(2) 아마도 그들 중 일부는 욥이 위선자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욥을 떠나갔을 터이지만, 이제는 욥의 순전함이 명백하게 된 이상 그에게로 돌아와서 그와의 교제를 다시 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우호적일 때에는 그들 모두가 또한 그에게 기꺼이 호의를 베풀고자 하였다(시 119:74, 79). 그들 중 타인들은 아마 욥이 빈궁하게 되고 만신창이의 가련한 모습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에게서 물러났을 것이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욥을 회복시키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즐겨 그와의 교분을 새로이 했을 것이다. 겨울에 날아가 버리는 제비족 친구들은 비록 그들의 우정이 일푼의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는 하나 봄에는 돌아오게 마련이다.

(3) 아마도 하나님께서 엘리바스와 그의 다른 두 친구에게 그들의 욥에게 대한 불친절을 들어 책망을 내리신 것이 욥의 나머지 친구들에게 일깨움이 되어 자기의 의무와 본분으로 돌이키게 한 것이리라. 우리는 이와 같이 타인들에게 대한 견책도 우리에게 대한 훈계와 충고로 받아들여야 한다.

4. 욥은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를 드렸다." 그러자 그들은 그의 자비심에 압도를 당하여 그의 주변에 운집하였으며, 모두가 욥의 기도의 득을 갈망하였다. 우리가 친구들과 친척들을 위해 기도를 많이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들에게서 더 많은 위로를 기대할 수가 있다.

Ⅲ. 욥의 재산은 그의 친구들이 준 보잘 것 없는 것 위에 하나님의 축복이 내림으로 말미암아서 진기하게도 불어 나갔다. 그는 그들 호의를 감사하게 받아들였으며, 기부에 의하여 자기 재산의 복구를 허용하는 것이 자기답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지도 않았다. 그런 한편 자기 친구들로 하여금 자기를 위한 모금에 나서도록 촉구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기가 그런 일과는 무관함을 밝히고 있다(6:22). "내가 언제 너희 물질을 내게 예물로 가져 오라고 하며, 너희 재물을 예물로 내게 공급하라고 하더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그들이 가져온 것을 감사히 받았으며,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이전의 불친절에 대하여 힐난하지도 않았고, 왜 그들이 이런 친절을 좀 더 일찍이 나타내지 않았느냐고 추궁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들의 자선을 요구할 만치 탐욕적이거나 성가신 자가 아니었으며, 그들이 제공해 줄 때 거절할 만큼 교만하거나 심술궂지도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기분이 좋으셔서 저들의 돈과 귀걸이 보다 더 좋은 것으로 욥에게 공급하셨다. 그것은 욥에게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었다(12절). 여호와께서는 자기가 욥에게 괴로움을 내렸던 날들을 따라서 그를 위로하셨고, "그의 처음보다도 그의 말년을 더욱 축복하셨다."

1. "여호와의 축복은 부하게 해 주신다."

우리에게 재물을 획득하게 하는 능력을 주시고 정직히 노력하는 가운데 성공을 얻게 해 주시는 분도 그이시다. 그러므로 번성하기를 바라는 자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겨냥하여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되며, 결코 그 축복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되고, 그의 축복을 벗어나 뜨거운 폭염 속으로 들어가려 해서는 더더구나 불가한 것이다. 이미 번영을 누리는 자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희생하여 자기 자신의 올가미에 걸리는 우를 범해서는 아니되며, 하나님의 축복을 위하여 하나님께 대한 자기 의무를 감사히 여기고 인식해야만 된다.

2. 그 축복은 아주 부유하게 만들어 주며, 때때로 선량한 자들을 그렇게 만들어 준다. 벌어서 부하게 되는 자들은 자기들이 저축에 의하여 쉽사리 거부가 될 수 있을 줄로 생각한다. 그러나 가진 것이 거의 없는 자들도 재산을 크게 만들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듯이,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자들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의지하여야 만이 자기 재산을 더욱 많이 불리며, 배로 만들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많은 것을 뿌릴지라도 거두어 들이는 것은 적으리라"(학 1:6).

3. 선인의 마지막 날들은 흔히 그의 시절 중 가장 황금시절로 판명이 되며, 그의 최후 행적은 가장 훌륭한 일로, 그의 말년의 위로는 그의 위로 중 최선의 위로로 드러나게 된다. 왜냐하면 선량한 자의 길은 새벽 빛의 길과 같아서 완전한 낮에 이르면 이를수록 더욱 더 빛이 나는 까닭이다. 악인에 대해서는 "그의 마지막 형편이 그 처음 상태보다 더 악화되었다"(눅 11:26)고 기록되 있으나, 선인에 대해선 그의 결말이 평강이라고 일컬어지며, 마지막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 모습은 더 선명해진다. 하나님은 외면적 번영도 존중하시사 때때로 선인의 일생 중 말년을 그의 전반 생애보다 더 안락하게 해 주기를 기뻐하시기도 하며, 고난받는 자기 백성들이 살아서 더 좋은 세월을 보기는 틀린 노릇이라고 생각하는 때에 그들의 예상을 기이하게 앞질러 버리시기를 좋아하신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비록 역경의 심연 속에서라도 자포자기 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우리는 어떤 좋은 세월이 우리의 말년을 위해 예약돼 있는지 알 수가 없다.

non, si male nunc, et olim sic erit-즉 비록 그 세월이 지금과는 판이하다고 할지언정 그런대로 우리에게는 좋은 것이다.

욥은 자기의 수난 중에 지나간 달들에게서와 같이, 이전에 그가 부유하였던 것과 같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여 소원하였고, 그런 바램을 전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으로 절망하였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흔히 우리 자신의 두려움보다, 아니 우리 자신의 소원보다 더 좋게 우리를 대해 주신다. 욥의 소유물은 그에게 갑절로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가축 수, 즉 그의 양과 약대, 황소, 암나귀의 수효는 이전의 수보다 여기에서 배가 되어 있다(1:3). 이것은 극히 작은 것 같은 일들에게까지 작용하는 섭리의 범위에 대하여 주목할 만한 실례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가축의 정확한 수효에 대한 섭리의 본보기일 뿐만 아니라, 또한 섭리의 조화를 보여 주기도 한다. 우리는 한 가지 사건을 참작하여 다른 사건까지도 알 수가 있다. "모든 하나님의 일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 알려져 있다." 욥의 다른 소유물들도 그의 가축과 토지와 금전이나 종들 따위에 비례하여 증가하였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렇다면 전에만 해도 그는 동방의 모든 자들 중에서 가장 큰 자였었는데, 이제는 그가 어떻게 되는가?

Ⅳ. 그의 가족도 재건되었다. 그는 그 자녀들에게서도 큰 위로를 받았다(13-15절). 1장에 기록된 그의 고난 중 가장 마지막 것인 동시에 가장 가슴 아프게 하였던 것은 일시에 그의 모든 자녀가 죽어버린 사실이었다. 그의 친구들은 그 일을 가지고 욥을 책망하였었는데(8:4), 하나님께서는 시간의 경과에 따라 그와 같은 파멸조차도 동일한 아내에 의해서거나 아니면 그 여자가 죽고 난 뒤 다른 여자에 의해서 복구시켜 주셨다.

1. 그 자녀의 수는 "일곱 아들과 세 딸"로써 전과 동일하였다. 어떤 이들은 왜 그의 자녀들은 그의 가축들처럼 갑절로 불어자지 못하였는가 하는 이유를 이와 같이 제시하는데, 곧 그 이유는 이미 죽은 그의 자녀들은 망실한 게 아니라, 더 좋은 세계에 미리 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전과 동일한 수의 자녀만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배로 늘어난 것으로 계수되는 것이다. 이는 그가 "마하나임" (mahanaim) 즉 두 무리의 자녀 곧 한 무리는 하늘에, 다른 한 무리는 땅 위에 있어서 두 몫의 자녀를(내가 부르는 말이기는 하나) 소유하여 이 두 자녀로써 그는 자녀 부자가 되기 때문이다.

2. 욥의 딸들의 이름이 본문에 등재되어 있는데(14절), 이것은 그녀들의 이름을 표시함으로써 욥의 형편의 놀랄 만한 변화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크나큰 인자하심에 대하여 그 기억을 영속화시킬 의도가 내포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맏딸을 "여미마(Jemima)" 즉 "그낮"이라고 이름하였다[아마 다이아나(Diana)도 그녀의 이름을 거기서 따왔을 것이다]. 이는 고통의 캄캄한 밤이 지나 형통의 빛이 비취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 딸은 "긋시아"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아주 향기가 좋은 향료를 의미한다. 이는(패트릭 주교가 말하듯) 하나님께서 그 냄새가 대단히 역겨운 욥의 종양들을 치료해 주셨기 때문에 그렇게 명명하였을 것이다.

셋째는 "게렌합북"인데(즉 "풍요로이 회복되었다." 아니면 물감을 칠한 뿔), 이는(패트릭 주교는 말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얼굴을 더럽히던 눈물을 닦아 주셨기 때이다. 이 딸들에 관하여 우리가 받는 말씀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께서 그들을 경국의 아름다움으로 치장해 주셨다. "욥의 딸들만치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15절). 우리는 구약 가운데서 사라라든가 레베카라든가 그 이외에도 많은 여자들이 그 미색으로 칭송되는 것을 종종 발견하게 되는데, 신약에서는 그 아름다움을 조금이라도 주목할 만한 여인들은 눈에 띄지 않으며, 동정녀 마리아 자신까지도 미인이라고 주목받지는 않는다. 이는 거룩함의 아름다움은 복음의 조명에 의하여 더 한층 밝은 빛이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저들의 아버지는(하나님께서 욥으로 하여금 그렇게 행하도록 하셨기 때문에) 그들에게 큰 재산을 주었다. "그는 그들의 오라비들과 같이 그들에게도 유산을 주었다." 욥은 그들에게 대개의 사람들이 하듯 조그만 몫을 주어 쫓아 버리지는 않았다. 그들은 어떤 비상한 개인적 장기를 가지고 있었음직하며, 욥은 자기가 그들에게 보여준 비상한 총애 속에서 이점을 유의하였던 것 같다 아마 그들은 지혜나 경건에 있어서 자기들의 오라비들을 능가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욥은 그들로 하여금 자기 가족 가운데 계속 남아서 자기 가정의 축복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을 그들의 오라비들과 함께 공동 상속인으로 삼았을 것이다.

Ⅴ. 그의 수명은 길었다.

그의 재난이 시작되었을 때 그의 나이가 몇 살인지는 아무 데도 언급되 있지 않으나, 여기서 그가 140세까지 살았다고 일컬어지는데 어떤 이들은 이로써 욥이 고난당하고 있었을 때의 나이는 70세였으며, 따라서 그의 나이도 그의 다른 재산들처럼 곱절로 늘어났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1. 그는 이 생의 위안을 무척 많이 받을 때까지 살았다. 왜냐하면 그는 그 자손을 사 대까지 보았기 때문이다(16절). 비록 그의 자녀가 그에게 배로 붇지는 않았을 지언정, 그 자손들은 그 자녀들의 자녀로써(그들은 노인들의 면류관이다) 갑절의 자녀보다 그 수가 더 많았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피살된 아들 대신 다른 씨를 정해 주셨듯이(창 4:25), 욥에게도 유리하게 이자까지 부쳐 정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욥이 자기의 모든 자녀를 매장했을 때 그러했던 것처럼, 자녀가 없다고 기록되 있는 자들의 손실을 복구시킬 방도와 그들의 비탄을 상쇄시켜 줄 방법을 소유하고 계신다.

2. 그는 그가 만족할 만큼 오래 살았다. 이는 그가 기한이 차서 죽었으며 이 세상에서의 삶에 만족하였고, 이 세상에 기꺼이 하직을 고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곤고의 날에서와 같이 그렇게 투털대면서 이 세상을 떠나간 것이 아니라, 아주 경건하게 하직하였다. 그래서 그는 엘리바스가 그에게 소망을 가지라고 격려했던 그대로 "추수철에 곡식을 까부는 것같이 무덤으로 내려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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