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의 겸손한 복종(욥기 40:1-5)
Ⅰ. 하나님께서 욥의 교만을 꺾기 위하여 그에게 내리신 질문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어려운 질문을 무수히 퍼부으셨는데, 이는 자연사에 대한 욥 자신의 무지를 통하여, 그가 섭리의 방법이나 계획을 판결하기에는 얼마나 자격이 없는 자인가 하는 것을 보이시기 위함이었다. 그런 후에 하나님은 한 가지 요구를 더 하심으로써 쐐기를 박으시는데, 이 요구는 전체적인 적용을 자명적으로 전제한다. 하나님도 엘리후가 했듯이 욥으로 하여금 자기의 할 말을 얘기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기 위하여 잠시 중단하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욥은 너무나 당황하여서 침묵을 지킨 채 그냥 있었고 따라서 하나님은 욥으로 하여금 대답하도록 요구하신다(1, 2절). 이 말씀은 전과 같이 "폭풍 속에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고들 하는데 그 때문에 어떤 이는 하나님께서 조용하고 미세한 목소리로 말씀하셨으나(왕상 19:12, 13), 엘리야처럼 욥에게는 폭풍이 한 것보다 더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내 교훈은 비와 같이 내릴 것이며" 그리고 나면 그것이 기이한 일을 행하리라. 욥이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을 망정 하나님은 그에게 대답하신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의 생각을 아시사, 그들의 침묵에 대하여 정당한 대답을 돌려 주실 수 있으시기 때문이다.
1. 하나님은 그에게 확신시키는 질문을 던지신다. "전능자와 다투는 자가 그를 가르치겠느냐? 그가 하나님의 지혜에게 지시를 하겠다고 나서며 하나님의 뜻에게 명령하겠다고 주장할 것인가? 하나님이 모든 편벽된 불평객들에게 교훈을 받으며 그를 기쁘게 하시기 위하여 자기가 취하셨던 수단을 변경하시겠느냐?" 이것은 경멸하는 질문이다. "누가 하나님께 지식을 가르치겠느냐?"(욥 21:22) 이것이 암시해 주는 것은 하나님과 언쟁하는 자들이란 실상 하나님께 그가 하신 일을 개선하도록 방법을 가르쳐 주고자 진력하는 것이란 사실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와 같은 타인들과 어떤 일이 잘못 시행되었다고 해서 다툰다면 우리가 그들에게 그 잘못된 일을 개선시키는 방법을 알려 주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어느 인간이든 그가 자기의 조물주께 가르치겠다고 한다면 그것이 용납될 것인가? 하나님과 다투는 자는 그의 원수로 간주되어 마땅하다. 그런데도 그가 하나님께 명령할 정도로 그 다툼에서 우세하였다고 자처하겠는가? 우리는 무지몽매하고 근시안적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만사가 적나라하게 개방되어 있다. 우리는 의존하는 피조물이지만 그는 주권을 가지신 창조주이시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를 교훈하겠다고 나설 것인가? 어떤 이는 이렇게 해독한다. "어떤 지혜든지 전능자와 다툴 지혜가 있느냐?" 대답은 쉽다. "없다"이다. 그런 짓은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짓이다. 그에게 반대하면 우리가 파멸될 게 뻔하고, 그에게 복종하면 우리의 이득이 되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자, 그런 자와 다투는게 지혜이냐?2. 그는 그 물음에 대한 신속한 대답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을 비난하는 자는 자기 양심을 따라 이 질문에 대답하도록 하라. 그래서 이처럼 대답하라. 전능자와 다투거나 그를 교훈할 생각은 내게 없다"라고.
그로 하여금 할 수만 있다면, 내가 한 모든 질문에 대답하도록 하여라. 그로 하여금 자기의 주제넘음과 오만불손함에 대한 답변을 하게 하며, 당황스럽게도 그것을 하나님의 법정에서 답변하게 하여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나 행동은 무엇이든지 비난하는 자들은 그들 스스로에 대해선 높이 생각하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하찮게 생각하는 자들이다.
Ⅱ. 욥의 겸손한 복종이 있다. 이제야 욥은 제 정신으로 돌아와서 경건한 슬픔 속으로 녹아 들기 시작한다. 그의 친구들이 그를 설득하고자 하였을 때도 그는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호와의 음성은 강력하시다. "진리의 영이 나아 올 때에는 그도 확신을 얻게 되리라." 욥의 친구들은 그를 악인이라고 정죄하였다. 엘리후조차 그에게 신랄하였다(욥 34:7, 8, 37).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토록 가혹한 말씀은 하지 않으셨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 친구들로부터 경험하는 것보다 하나님께로부터 더 나은 대우를 기대함직 하며, 우리의 행위에 대한 더 솔직한 해석을 하나님께로부터 기대할 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선량한 사람은 이점에 압도당하여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붙잡힌 포로로 바친다.
1. 그는 자기 자신이 범죄자라고 자백하며, 그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4절). "보소서! 나는 미천하오니이다. 천하고 말할 가치도 없으실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 보기에도 악하고 가증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는 이제 그가 범죄하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므로 스스로 "악하다"고 일컫는다. 죄악은 우리를 가치 없게 만들며, 참회하는 자들은 스스로를 낮추고 꾸짖으며 수치스럽게 여기고 당황하기까지 한다. "나는 내 아버지께 불효한 행동을 하였습니다. 나는 나의 은혜자에게 배은망덕하게 행하였으며, 내 자신에게는 분별없이 행하였나이다. 그러므로 나는 악합니다." 욥은 지금까지 자기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며, 뽐냈던 것만큼 자기 스스로를 욕하고 있다. 회개는 자신들에 대한 사람의 견해를 바뀌게 만든다. 욥은 이제까지 하나님과의 회담을 요구하는 데 있어 너무나 무엄하였다. 그는 하나님과의 담판에서 자기의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존재임을 전적으로 인정하며, 하나님의 주의를 끌 만한 어떤 것도 만들어 낼 수 없는 존재이고, 하나님의 땅 위에 꼼지락거리며 늘 기어다니는 지극히 더러운 벌레임을 시인하였다.욥은 자기 친구들과 담화하는 동안에는 그들에게 대답하였는데, 이는 자지가 그들보다 못지 아니하게 선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말씀하시자 그는 할 말이 하나도 없었다.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과 비교하면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며, 그가 자신이 무에 지나지 않으며, 오히려 무보다 못하고 허영과 악 그 자체인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당신께 무엇을 대답하리이까?"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대답을 요구하셨다(2절).
여기에서 욥은 자기 침묵의 이유를 제시한다. 그것은 욥이 화가 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잘못했음을 각성하였기 때문에 잠잠한 것이다. 자기 자신의 죄 많음과 비천함을 진정으로 깨닫는 자들은 감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합리화시키지 않으며, 자기가 한때나마 그런 생각을 품었던 것을 부끄러이 여기고 자기의 수치의 표로 손으로 입을 가린다.
2. 욥은 전에 저지른 죄를 더 이상 범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왜냐하면 엘리후가 자기에게 이 말을 하나님께 드리기에 알맞은 것이라고 말해 주었던 까닭이다. 우리가 잘못 말한 때는 그 말에 대해 참회를 하며 다시 그 잘못을 되풀이하거나 고집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스스로에게 침묵을 명한다(4절). "내가 내 손으로 입을 가리겠습니다. 나는 내 마음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모든 과격한 생각을 억제하기 위해 재갈을 물리듯이 내 입을 지키겠으며, 그런 정욕적인 생각이 절제되지 못한 말로 튀어 나오지 못하도록, 내 입을 지키겠습니다." 잘못 생각하는 일은 나쁘다. 그러나 잘못 말하는 것은 더 한층 나쁜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악한 생각의 허용이며, 그것은 악한 생각에게 imprimatur-즉 재가를 내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선동적인 명예 훼손의 글을 출판하는 셈이다.그러므로 "만일 네가 악한 생각을 가지거든 네 손으로 네 입을 막으며" 그것이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도록 하라(잠 30:32). 그러면 그것이 네가 네 생각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데 대한 증거가 될 것이다. 욥은 자기의 악한 생각이 누설되도록 내버려 두었다. "내가 한 번만 그릇되어 말한 게 아니라 두 번씩이나 잘못된 말을 한 셈입니다." 즉 "나는 한 번의 이야기와 또 다른 이야기에서 여러 번 잘못 말하였습니다."
"말을 나는 잘못하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내가 말한 것을 고집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을 다시는 반복하지도 않겠나이다."
"나는 더 이상 계속하지 않겠나이다."
여기서 진정한 참회자들은 어떠한지 살펴 보자.
(1)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행함 중에서 계속하였던 잘못과 그릇된 원칙을 교정하는 일이다. 우리가 오래도록 지녔던 생각이나, 자주 지녔던 생각이라도, 또 우리가 한 번 뿐 아니라 두 번씩이나 호기롭게 주장하였던 것이라도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는 즉시 우리는 그것을 취소해야 하며, 더 이상 그것을 고수하지 아니하고, 그런 생각을 그토록 오래 품은 우리 자신을 부끄러이 여겨야 한다.
(2) 그것을 모든 곁길에서 돌이키고, 그 길에 한 발자국도 더 이상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내가 더 하지도 않겠습니다(말은 그렇다). 내가 다시는 내 정욕에 그처럼 심하게 빠지지 아니하며, 내 스스로 말했듯 그런 언론의 자유를 가지지도 아니하겠고, 내가 이전과 같이 말하지도 않으며, 이전과 같이 행하지도 아니하겠나이다." 회개가 여기에 이를 때까지는 아직도 참회가 부족하다.
하나님과 논쟁하는 자들도 최후에는 잠잠하게 될 것이다. 욥은 하나님과의 회담을 요구하는 일에 아주 대담하고도 적극적이었으며 그가 자기의 사건을 얼마나 명확하게 진술하리라는 것과 그가 자기의 의로움이 인정되리라는 것을 얼마나 단단히 믿고 있는지를 과감하게 말하였었다.
"그가 왕자처럼 하나님께 가까이 가리라"(31:37). 그가 "그의 보좌에까지도 나아 가리라"(23:3). 그러나 곧 그는 그 일에 진력이 나서 자기의 청원을 포기하며 답변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여호와여! 지혜와 정의는 모두 당신 편에 있으니, 내가 당신께 질문을 던짐으로써 어리석게 행하였고 악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나님의 공의와 권능(욥기 40:6-13)
욥은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바에 대하여 크게 겸손하게 되었으나,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못하였다. 그가 낮추어는 졌으되 충분히 낮아지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여기에서도 전과 같은 방법으로, 또 같은 취지로 계속하여 욥을 타이르신다(6절).
1. 하나님께로부터 들은 말씀을 온당히 받아들이며 또 그로써 이익을 얻는 자들은 하나님에게서 더욱 더 많은 말씀을 듣게 될 것이다.2. 죄악을 진정으로 깨닫고 그것에 대해 참된 회개를 하는 자들은 더욱 더 철저히 깨달으며, 더욱 더 깊이 뉘우칠 필요성이 있다. 뉘우침의 확신 아래 있는 자들은 자기 죄들을 자기들의 눈 앞에 정돈해 놓고, 그 죄목들로 인하여 상한 심령을 가지는데, 그런 자들은 욥의 이 경우에서 자기들이 너무 일찍 위로를 잡으려고 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위로하심이 오는 때는 그 위로가 영원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깊은 굴종에 의해서 그 위로에 대비하여야 할 것과, 우리 상처를 피상적으로 조사할 것이 아니라 밑바닥까지 속속들이 찾아내며, 뉘우침에서 벗어나려고 정도 이상으로 서두르지 말 것이 요청된다. 우리의 심령이 녹기 시작하며 우리 마음이 우리 안에서 부드러워지기 시작하거든, 우리 심령을 철저하고도 효과적으로 해방시키는 데 도움이 될 그런 생각들만 추구하고 숙고하도록 하라.
하나님은 전처럼(욥 38:3) 한 가지 촉구로 시작하신다(7절).
"너는 대장부답게 허리를 묶어라. 만약 네게 자부할 수 있는 용기와 신념이 있다면 지금 내게 그것들을 보이라. 그러나 너는 네 자신이 내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며, 자인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교만한 마음이 종내에는 이르게 될 막다른 골목이다. 이는 심령의 회개나 그 파멸에 의하여 인도된다. 이와 같이 모든 산들과 언덕들은 조만간에 낮아질 것이 틀림 없다.
Ⅰ. 우리는 하나님과 공의를 다투지 못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여호와는 우리를 다루시는 일에 있어서 의로우시며 거룩하시고,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행사에 있어서 불의하며 거룩하지 못하다는 사실도 아울러 인식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에게는 스스로 탓해야 할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닐 정도로 많이 있으나 그에게는 탓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8절). "네가 나의 심판을 취소시키겠는가?" 너는 내가 말하고 행하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겠느냐? 너는 내가 내린 판결을 오류투성이며 부당한 것이라고 번복시킬 수 있는 재심영장을 제시하겠는가?" 욥이 한 많은 불평 중에는 이런 경향이 너무 많이 내포되 있다.
그는 말하기를 "내가 악을 인하여 부르짖으나 내 말을 들어 주시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언사는 결코 용납될 수가 없다. 하나님의 심판은 취소될 리도 없고, 취소되어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그의 판결은 진리에 따라 내려진 것이기에, 그것을 의심하여 이의를 제기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심히 무례함과 큰 불의가 된다.
"너는 네가 의롭다고 하기 위하여 나를 정죄하려느냐? 나의 명예가 네 명성의 지원을 위해 손상을 받아야 하느냐? 네가 당연한 혹평으로부터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길이 달리는 없다고 해서 내가 너를 부당하게 대우하였다는 비난을 받아야만 하느냐?"
우리의 의무는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도록 우리 스스로를 견책하는 일이다. 다윗왕은 "그렇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 목전에서 행하였던 악을 기꺼이 인정하였다.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에 주가 의로우시다고 인정받으시며 주가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는 사실의 인정을 위해서였다(시 51:4; 느 9:33; 단 9:7).
자신의 결백을 밝히려고 하나님을 비방하는 자들은 교만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모두 무지한 자들이다. 만약 그들이 회개함으로써 자기 잘못을 제때에 교정하지 않는다면 영원한 심판에 의해서 그들의 변명이 면박을 당하며, 죄수된 자기를 당황하게 할 날이 이를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선포할 것이며, 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 유죄 판결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Ⅱ. 우리는 우리가 권능을 놓고서 하나님과 경쟁할 수가 없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다툰다는 것은 크나큰 불경죄인 동시에, 이만저만하게 건방진 것이 아니다. 아울러 그것은 또한 이성과 정의에 상반되는 것인 동시에, 우리의 이익과도 상충되는 것이다(9절). "네가 하나님처럼 팔이 있느냐? 네 팔이 길이와 힘에 있어 그의 팔을 당하겠느냐? 네가 그와 같은 목소리로 뇌성을 울리겠느냐?(37:1, 2) 그렇지 않으면 지금 당장 폭풍 속에서 소리를 내겠느냐?
욥은 자신이 하나님과 다툴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그럴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함을 욥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제시하신다.
1. 그는 결코 하나님과 승부를 낼 때까지 싸울 수가 없으며, 자기의 주장을 무력의 행사로 관철시키지 못한다. 인간들 사이에서는 때때로 논쟁이 전쟁에 의하여 결정이 되어 왔으며, 승리자는 정의가 자기 편에 있는 것으로 판정받는다. 그러나 만약 논쟁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쟁점으로 등장하는 경우에 있어서는, 사람이 패배하여 항복하리라는 것은 틀림 없다. 왜냐하면 그가 전능자를 꺾기 위해 사용하는 온갖 무기도, 사르는 불 앞에서 찔레와 가시에 불과한 까닭이다(사 27:4)."땅 위의 벌레같이 불쌍하고 연약한 네가 온갖 만물을 떠받치고 있는 하나님의 팔과 비교가 되는 팔을 가지고 있단 말이냐?" 피조물 즉 천사의 능력까지도 하나님께로부터 연유되며, 그로부터 제한을 받고 그에게 의존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본래적이며 독립된 것이고 무제한적이다. 그는 우리가 없이도 무슨 일이든 하실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같은 팔이 없다.
2. 그는 결코 하나님을 말로써 끝까지 승부하지도 못하며, 떠들거나 호언장담을 함으로써 자기 주장을 관철하지도 못한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때때로 호언장담이나 떠드는 것이 목적의 성취에 큰 도움이 된다. "너는 하나님과 같이 목소리로써 우레 소리를 울리듯 할 수 있느냐? 그러지 못한다. 그의 목소리는 곧 네 목소리를 안 들리게 할 것이며, 네 속삭이는 소리를 압도하고 눌러 버릴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이 하시듯 그토록 확신있게, 그처럼 강력하게 말하지도 못하며, 하나님만치 위풍이 당당하고도 정복력을 가진 말을 할 수도 없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것은 그대로 성취된다." 창조력을 가진 그의 목소리는 우레 소리라고 일컬어지며(시 104:7), 그가 자기 대적을 두렵게 하며 낭패케 하는 그의 목소리도 또한 그렇게 일컬어진다(삼상 2:10)."그가 하늘에서 그들에게 뇌우를 발하리라." 왕의 진노는 때로 사자의 포효소리와 흡사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뇌성벽력을 흉내 낸다고 장담할 수는 도저히 없다.
Ⅲ. 우리는 아름다움과 엄위하심을 놓고서 하나님과 경쟁할 수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10절).
"만일 네가 하나님과 비교해 보고자하며, 더 사랑스러운 모양을 나타내어 보이려면, 너의 가장 훌륭한 의복을 입어라. 네 스스로 위엄과 존귀로 꾸며라. 네가 가진 온갖 군복의 화려함과 네 모든 근사한 제왕의 복장으로 나타내 보아라. 너를 돋보이게 할 것이라면 무엇이든 최대한 이용해 보아라. 네 스스로 영광과 화미를 입어 보아라. 네 원수들을 위압시키며, 네 친구들을 매혹시킬 수 있는 영광과 화려함의 옷을 입어 보아라.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위험과 아름다움에 비하면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이 그의 강한 힘으로 나아 가실 때에는 태양과 다투는 개똥벌레의 빛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악마와 어둠의 모든 권세들에게 공포가 되며 그들을 전율하게 할 정도의 위엄과 영광으로써 자신을 옷 입히신다. 또 그는 천사와 빛 가운데에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감탄이 되며, 그들을 기쁘게 할 수 있을 정도의 영광과 아름다움으로써 자신을 옷 입히신다.
다윗은 자기의 모든 날 동안 하나님의 전에 거함으로써,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특성과 비교해 볼 때 왕들이 스스로 두렵게 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위엄과 존귀가 무엇이며, 연인들이 스스로 사랑스럽게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모든 영화와 화미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만약 욥이 하나님과의 경쟁에 있어서 자신을 위대하게 보이도록 하며, 그럴듯한 차림새를 함으로써, 승부에 이기는 줄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의 오산이다.
"하나님께서 빛을 발하실 때에는 해가 부끄러워하며 달이 당황하게 될 것이다."
Ⅳ. 우리는 교만한 자에게 대한 지배권을 놓고서도 하나님과 경쟁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11-14절).
여기에서는 그 주장이 이런 짧은 결론으로 압축되어 있다. 만약 욥이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만큼 자랑하는 독재자들과 압제자들을 쉽사리, 또 효과적으로 낮추며 천하게 만들 수가 있다면, 그가 하나님과 경쟁할 수 있다는 구실이 다소 있다고 인정될 것이다.
1. 여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공의를 행하도록 요구하시는데, 그것은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낮추라는 것이다. 욥이 만약 하나님의 적수라고 자부한다면, 특히 그가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심판자로 자처한다면, 그는 이 일을 행할 수 있어야 한다.(1) 하나님은 이 일을 행할 수 있고 그것을 스스로 행하시리라는 것이 본문에 암시되고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그가 그것을 욥에게 힐문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것에 의해, 즉 그가 교만한 자를 저지하며 그들 위에 심판자로 군림하고 그들을 파멸시키실 수 있다는 사실로써 자기 스스로가 하나님임을 증명하신다.
[1] 교만한 자들은 악인들이며 교만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큰 죄악의 기저를 이룬다.
[2] 교만한 자들은 틀림없이 비천하게 되며 낮추임을 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교만은 멸망에 선행하기 때문"이다. 저들이 만약 굽어지지 않는다면 꺾어지고 말 것이다. 만일 그들이 진정한 회개에 의하여 스스로 겸손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낮추시사 그들로 하여금 영원히 쩔쩔매게 하실 것이다. 악인들은 "자기 처소에서 밟히리라." 즉 비록 그들이 자기 자신의 장소를 가진 줄 알고 으시대며, 그 처소에 뿌리를 박은 줄로 자부하지만, 그들이 발견되는 곳이 어디든지 그들은 거기서 밟힘을 당할 것이며, 자기 처소가 부여해 주는 모든 재산과 권세와 이익이 자기들의 안전에 대한 보장이 되지 못할 것이다.
[3] 교만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뿌리시는 진노로 말미암아 그 교만이 꺾어지며, 그의 진노는 교만한 자들을 파멸시키며, 끌어내릴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그 큰 날에 행하실 뿐만 아니라, 이생에서도 가끔씩 보여 주듯 그 진노를 널리 뿌리시면, 가장 꿋꿋한 마음이라도 그를 견디어 내지 못한다.
"그의 진노의 위력을 수가 알랴?"
[4]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폭군들을 힘들이지 않고 낮출 수 있으시며, 또한 천하게 만드신다. 그가 "오만한 자들을 보기만 하여도 그들은 낮추어지며," 교만한 자들은 수치와 공포에 사로 잡히게 되고, 단 한 번의 은혜스런 시선으로써 통회하는 자의 심령을 소생시킬 수 있듯이, 마찬가지로 단 한 번의 노하신 눈길로써 그들을 멸망시키실 수 있다.
[5] 그는 마지막에 그 일을 효과적으로 행하실 능력이 있으시며, 또 최후에는 효과적으로 행하실 것이다(13절). 곧 그들을 진토로 돌리실 뿐 아니라, 아울러 "그들을 진토 속에 묻으실" 것이다. 그들은 돌아간 진토에서 일어나기를 바라며, 마치 모세가 살해하여 "모래 속에 감추었던" 교만한 애굽인과 같아질 것이다(출 2:12). 즉 그들은 사망에 이르게 될 뿐만 아니라, 돌아올 길 없는 음부 즉 무덤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풍채를 자랑스러이 여겼으나, 그들은 망각 속에 매장돼 버릴 것이며, 진토 속에 감추어져, 시야에서 사라진 자나 마음에서 잊혀진 자와 다름없이 기억되지도 아니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악을 행하는 데 연합하고, 동맹을 맺어 결합돼 있었으나, 이제는 한 꾸러미로 묶여 있다. 그들은 "함께" 묻힌다.
"진토 속에서는" 그들이 휴식을 같이 하는 것이 아니라, 수치를 같이 한다(17:16). 아니, 그들은 행악자로서 취급당하거나 죽은 자로 대우받는다[악인들이 정죄당할 때에는 하만의 경우와 같이(에 7:8) 사람들이 저희의 얼굴을 싸서 가리운다. 그는 그들의 얼굴을 은밀히 동여맨다]. 무덤 속의 나사로는 그 얼굴이 둘러 가며 동여 매어져 있었다.
이와 같이 종국에 가서는 스스로 하나님께 거역하는 자고한 죄인들에 대하여 하나님은 온전한 승리를 얻으실 것이다. 이로써 그는 스스로가 하나님이심을 증명하신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들을 이와 같이 가증히 여기시는가? 그렇다면 그는 거룩하시다. 그는 교만한 자들을 이처럼 징계하시는가? 그렇다면 그는 이 세상을 공정하게 심판하시는 재판관이시다.
그는 이처럼 그들을 비천하게 만드실 수 있으신가? 그렇다면 그는 전능하신 주 여호와이시다. 하나님께서 교만한 바로왕을 낮추사 그를 홍해의 모래 속에 묻으셨을 때, 이드로는 그때 "여호와"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모든 신들보다 크시다"는 것을 추리해 내었다. 왜냐하면 그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교만한 대적들을 교만하게 취급하셨다"는 이 점에서 "그는 그들보다 우월하셨고" 그는 그들에게 너무나 힘이 드는 분이었던 까닭이다(출 18:11; 계 19:2 참조).
(2) 여기서는 욥에게 그 일을 행하도록 제의하신다. 욥은 하나님과 그의 섭리를 격렬하게 힐난하며, 마치 자기가 하나님으로 하여금 정신을 차리도록 각성시킬 수 있는 줄로 생각하는 듯이 하늘로 향하여 자기의 맹렬한 노를 발하였다. "자! 네 손을 교만한 자들에게 대어보라. 그리하면 너는 그들이 너의 맹렬한 화를 얼마나 대수롭잖게 여기는지 곧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내가 네 성냄을 중히 여기며, 네가 성낸다고 마음이 움직여지겠는가?"
욥은 폭군이나 압제자들이 형통하며 권세 부리는 것을 불평하였었고,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용납하신 데 대하여 악정을 펴신 것이라고 비난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욥은 자기가 그것을 바로 잡지 못하면서도 흠 잡기만 해서는 옳지 못하였다. 만약 하나님께서, 또 하나님만이 능히 교만한 자들을 천하게 만들거나 끌어 내리기에 족한 권세를 가지고 있다면 의심할 나위도 없이 그는 언제 어떻게 그 일을 행해야 할지를 알기에 족한 지혜가 있으신 분이므로, 그에게 이 세상을 어떻게 다스려야 한다고 명령하거나 가르친다는 것은 우리의 소관 밖의 일이다.
만약 우리에게 하나님과 꼭 같은 팔이 없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수중으로부터 그의 일을 빼앗아 낼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2. 만약 욥이 이와 같은 굉장한 일들을 수행해 낼 수 있다면, 욥에게는 공의롭게 행하실 것이라고 약속을 하신다(14절). "그리하면 네 오른손이(비록 결국에는 나와 다투기에 너무 약하기는 하나) 너를 능히 구할 수 있다고, 내가 네게 인정해 줄 것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의 구원자가 되리라는 것은(그 자신의 손이 자기에게 충분하게 또 독립되게 되리라는 것은) 인간 고유의 자만이며 야심이다. 그러나 인간이 그런 존재라고 주장하는 일은 주제넘은 짓이다. 우리 자신의 손은 우리 스스로를 하나님의 은혜에 추천하여 맡기는 일도 할 수가 없고, 그런 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지도 못한다. 그런터에 우리를 하나님의 공의로부터 구해낼 수는 더욱 더 없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권세로써 원수들을 낮출 수 없다면,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우리 스스로를 구한다고 자처할 수는 도저히 없다. 만약 우리가 그런 일을 행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스스로 인정하실 터이다. 그는 이제까지 어떤 사람이든 속여서 그 인간의 정당한 칭찬을 편취하신 적도 없으시며, 영예를 받을 만한 자에게 그 존귀를 인정하지 않은 적은 없고, 또 앞으로도 그러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일들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손이 스스로를 구원해 내지 못한다는 것을 그에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고, 따라서 우리는 자신들을 그의 손에 의탁하지 않을 수 없다.
하마에 대한 설명(욥기 40:14-24)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의 능력에 대한 증명과 욥의 주장에 대한 반대 논증을 더 한층 부연하시고자, 거대하고도 힘센 두 종류의 동물을 묘사하심으로써 자기 이야기를 종결시키신다.
이 두 동물은 부피나 힘에 있어서 인간을 훨씬 능가하는데 하나는 "하마"라고 일컬어지며, 다른 하나는 즉 "악어"라고 일컬어진다. 여기에서는 전자만이 묘사되고 있다. "이제 하마를 보라. 그리고 그를 지었으며, 그의 모든 힘을 준 그와 너를 다툴 수 있는지 생각하여 보라. 또 그것에게 복종하며 그것과 화평하게 지내는 것이 네 지혜가 아닌가 생각하여 보아라." "하마"는 일반적으로 야수를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어떤 특정 종류를 의미하는 것이 틀림 없다. 어떤 이는 그것을 "황소"에 대한 묘사로 이해하기도 하며, 또 다른 이들은 그것을 애굽에서는 잘 알려진 양서동물로 이해하기도 하는 소위 "하마"라고 본다. 이는 나일강의 어류 중에 서식하나 먹이를 먹기 위해서는 지상에 올라오는 동물이다. 그러나 나는 고대의 가장 일반적으로 수납되던 견해에서 벗어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고백한다. 즉 그 견해는 여기에서 묘사하는 동물이 코끼리라는 것인데, 코끼리는 아주 강하고 당당한 생물로서 다른 어떤 짐승보다 그 키가 크며 놀라운 슬기를 지니고 동물 왕국에서는 그 명성이 너무나 자자하여 우리가 네 발 짐승의 자연사에서 보았듯이(38, 39장) 그 많은 네 발 짐승 중에서 이 코끼리만 유독 빠져야 하리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Ⅰ. 하마에 대해 하신 묘사.
1. 그 몸은 대단히 강대하고 튼튼한 골격을 가지고 있다."그의 힘은 그 허리에 있다"(16절).
"그의 뼈대"는 다른 동물과 비교하면 "쇠막대기 같다"(18절). 그의 등뼈는 너무나 강해서 비록 그것의 꼬리가 크지는 않을망정 그는 꼬리를 칠 때에 굉장한 힘으로 하여 마치 백향목이 움직이는 것 같다(17절). 어떤 이는 그것을 코끼리의 코라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그 까닭은 이 말이 신체의 말단 부위 아무 것이라도 다 의미하는 말이며, 또 코끼리의 코에는 실로 큰 힘이 있기 때문이다. 코끼리의 등과 허리는 너무나 강하며, 또 그 넓적다리의 힘줄도 너무나 억세어서 코끼리는 아주 큰 나무탑도 운반하며, 아주 많은 수의 전사들을 태우고 가기도 한다. 어떤 동물이든 신체적 힘 때문에 코끼리에게 다가가지 못하는데, 이것은 이들 묘사에서 주장하는 요점이다.
2. 그것은 땅에서 생산되는 것을 먹고 살며 딴 동물을 먹이로 삼지 않는다. 그것은 "소같이 풀을 먹으며(15절) 산들은 그것에게 식물을 내는데"(20절), 들의 모든 짐승은 사자에게서 도망하듯 그에게서 도망치지 않으며, 그 앞에서 떨지도 않는다. 오히려 짐승들은 그 주변에서 놀기까지 한다. 이는 그들이 그 하마에게는 아무 위험성이 없음을 아는 까닭이다.(1) 이것은 그렇게 정하신 일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선하심을 우리로 하여금 감사히 인정할 수 있게 해 주는데, 그처럼 큰 덩치를 가지고 있어서 아주 많은 식물을 필요로 하는 그 동물이 고기를 상식하지 않도록 만드신 때문이다(만약 육식 동물이면 다수의 동물이 그것을 살리기 위하여 죽어가야 할 것이다). 하마가 들의 풀에 만족하도록 정해 놓으셨다. 그리하여 만약 그렇지 않다면 초래될 생명의 대살륙을 방지하셨다.
(2) 이것은 인간의 원래적 산물로 지정해 주신대로(창 1:27), 고기를 먹지 않고, 채소와 실과를 먹고 살도록 권하신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말고 소처럼 코끼리의 힘조차도 고기없이 지탱이 되는데 사람의 힘이라고 해서 왜 유지가 안 된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우리가 비록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자유를 구가한다고는 하지만 "고기를 탐식하여 훤화스럽게 야단하는 자들 중에 끼이지 말자"(잠 23:20).
(3) 이것은 우리에게 조용하고 평화스런 생활을 권장시켜 준다. 사자와 같이 자기 주변 사람들을 죄다 두렵게 하는 것보다 코끼리처럼 자기 주위의 이웃 사람들을 편안하고 즐겁게 하기를 보다 더 원하지 않는 자가 누구이겠는가?
3. 그는 그늘진 나무 아래에 거하는데(21절), 그 나무들은 "그들 그늘로 그를 덮는다"(22절).
그곳에서 그는 자유로이 마음껏 공기를 들어 마시지만, 그 반면에 사자는 먹이를 사냥해서 사는데, 휴식할 때가 되면 은밀하고 어두운 굴로 물러나지 않을 수가 없으며, 사자는 그 안에서 은밀하게 숨어서 거처한다(38:40). 타인들에게 두려움이 되는 자들도 때때로 자기 자신에게 공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기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 주는 자들은 스스로도 안락할 것이다. 갈대와 소택지와 시냇가의 버드나무는 방어하는 성곽으로선 아주 연약하고 가냘픈 요새에 불과하나, 어느 누구도 해할 뜻이 없으므로 해 받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에게는 자신을 막으며 안전하게 해 주기에 족하다.
4. 그가 아주 굉장한 폭음가이며 탐욕스럽게 마신다고는 하나 포도주나 독주를 그렇게 마시는 것이 아니라(술을 폭음하는 것은 인간에게만 특유한 것으로 인간은 술취함에 의하여 자신을 짐승처럼 만들어 버린다), 많은 물을 그토록 많이 마신다.(1) 그의 체구는 거대하기 때문에 그에 따른 공급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23절). 그는 너무나 많이 마시기 때문에 누구나가 생각하기를 만약 그것에게 시간만 주고 재촉하지 않는다면 강이라도 다 마셔 없애 버린다고 할 것이다.
혹은 그가 마실 때에는 두려운 중에 마시는 동물들 같이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의 힘과 안전을 자신하고 있으므로 마실 때에도 필요한 속도 이상으로 서둘지 아니한다.
(2) 그의 눈은 제가 취할 수 있는 것 보다 더욱 많이 기대하고 있다. 그가 오래도록 물없이 지내서 갈할 때는 "자기가 요단 강이라도 그 입에 다 마실 수 있을 줄로 믿으며, 그것을 그의 눈으로 삼키기"까지 한다(24절). 탐욕스런 사람이 그가 탐내는 이 세상의 재물에 자기 시선을 날려 보내듯, 이 큰 동물도 자기 눈으로 강조차 잡아 채거나 끌어 올린다.
(3) 그의 코에는 이 두 가지를 해내기에 충분한 힘이 있다. 그가 탐욕스레 물을 마시러 가면 덫이나 그물을 꿰뚫어 버리는데, 이것들은 아마 물 속의 고기를 잡기 위해 쳐 놓은 것이리라.
그는 자기 길을 방해하는 어려움쯤은 개의치도 않는다. 그의 힘은 그토록 강대하며 그의 식욕은 그처럼 왕성하다.
Ⅱ. 이러한 표현의 용도.
우리는 우리 앞에 제시된 이 지나치게 큰 동물, 곧 산더미 같은 이 짐승에 대해 관찰하였는데, 이것은 우리 호기심을 만족시키며 우리를 즐겁게 해 줄 구경거리로써 뿐만 아니라, 크신 하나님 앞에 우리 스스로 겸손해야 할 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는 논증으로서도 제시되었다.
1. 하나님이 이 거대한 동물 즉 그토록 두렵고, 놀랍도록 생긴 이 동물을 지으셨다. 그 동물은 그의 손이 지으신 작품이요, 그의 지혜가 안출해 낸 고안품이고, 그의 능력이 만들어 낸 산물이다. 그것은 "내가 만든 것"이다(15절). 이 짐승이 가진 힘이나 다른 어떤 짐승의 힘도 모두 하나님에게서 유래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든 권능을 본래적으로 또 무한하게 스스로 안에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그와 같은 팔은 우리가 다툴 수 없다. 이 짐승은 동물의 종류 중 "으뜸"이라 불리우며, "하나님의 길들 중 으뜸"이라 칭함을 받고(19절),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에 대한 걸출한 예증이 된다.역사가들이 코끼리에 대해 기술한 설명을 잘 들여다 보면, 인간보다 열등한 어떤 생물도 그보다 더 낫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창조의 하부 영역에서 그가 하나님의 창조물들 중 으뜸이라 하는 것이 아주 적합하다.
2. 하나님은 다른 네 발 달린 짐승들의 창조와 같은 날에 사람과 함께 코끼리도 지으셨다(창 1:25, 26). 이에 반하여 어류와 조류는 이보다 하루 전에 창조되었다. 하나님은 사람으로 하여금 코끼리와 같이 같은 땅 위에서 살고 움직이게 하셨다. 그러므로 인간과 짐승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동료로서 공동으로 보호를 받는다고 일컬어지고 있다(시 36:6)."하마는 내가 너와 함께 지었다. 내가 그 짐승을 너와 마찬가지로 지었는데 그 짐승은 나와 싸우려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너는 왜 나와 다투려 하는가? 내가 하마를 너와 마찬가지로 지었는데도 내가 너를 창조했다는 이유만으로 너는 특별하신 은총을 요구해야 하는가?(10:9) 나는 너를 그 짐승과 마찬가지로 창조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그 짐승과 동등하게 너를 기뻐하며, 용이하게 너를 관리할 수 있으며, 네가 택하든 거부하든 나는 그 일을 행하겠다. 나는 그를 너와 함께 지었다. 이는 네가 눈을 크게 떠 그 짐승을 바라보고 그것으로부터 교훈을 받게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과 지고하신 주권에 대한 증명과 본보기를 찾기 위해 멀리 갈 필요가 없다. 그것들은 우리 가까이에 있으며, 우리와 같이 있고 우리가 어디에 있든 우리 목전에 전개되고 있다.
3. "그것을 지으신 자는 그의 칼이 그것에게 가까이 다가 가도록 하실 수 있다"(19절). 즉 그를 지으신 손이 그의 큰 체구와 힘에도 불구하고 코끼리의 지으신 것을 다시 마음대로 취소하실 수 있으시며, 그를 벌레나 파리만큼 쉽게 죽이시되, 아무 어려움이 없이 또 남획한다거나 잘못하신다는 오명을 쓰지 않으시고도 그를 마음대로 죽이실 수 있다. 모든 피조물에게 그 존재를 부여하신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주신 존재 자체를 빼앗아 가실 수 있다.그 자신의 것에 대해서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그가 행하시지 못한다는 말인가? 그는 그 일을 행하실 "수가 있다." 말씀으로써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멸하실 능력도 가지고 계시며, 태초에 무로부터 창조되리라고 쉽게 말씀하셨듯이 그 피조물을 무로 돌아가라고 쉽게 말씀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마 여기에 나오는 이 하마를 통해(뒤에 나오는 악어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조금 앞서 욥에게 행하라고 요구하셨던 일격하와 굴욕을 주도록 요구하신 폭군과 압제자들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것 같다.
폭군과 압제자들은 자신들이 마치 강철같은 골격의 코끼리처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금성철벽처럼 잘 방어할 수 있을 줄로 스스로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그것에 대한 모든 수단을 알고 계시며, 그는 정의의 검 즉 분노의 칼이 그것에게 다가 가도록 하시사 그것의 가장 연약하고 민감한 부분을 치게 만드신다. 엔진을 조립하신 자는 그 모든 부속품을 함께 짜맞추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엔진을 분해할 줄도 아신다.
그러므로 자기를 조성하신 이와 싸우는 자는 화 있을진저! 인간을 지으신 분은 그 인간을 비참하게 만들 능력도 가지고 계시며, 만약 그 인간이 하나님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면 그를 행복하게 만들지도 않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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