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욥기 3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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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1

동물에 대한 인간의 무지(욥기 39:1-12)

하나님은 욥이, 광야에서 야생으로 뛰어 다니며 자유로이 사는 길들지 않은 짐승들에 대해 아는 바가 얼마나 적은지와 그리고 그들이 신의 섭리의 보살핌 아래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 보여 주신다.

Ⅰ. "산 염소와 암사슴."

이들에 대해 주목하시는 것은 그들이 새끼를 낳는 것과 새끼를 양육하는 일에 대해서이다. 각 개개인이 먹이를 공급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물의 모든 종류도 다 하나님의 섭리의 보살피심에 의하여 보존되고 있다. 우리가 아는 한 어느 종류도 오늘날까지 멸종된 것은 없다.

1. 그 새끼의 생산에 대하여 살펴 보자.

(1) 인간은 그것들이 언제 새끼를 낳는지 그 시기를 전혀 알지 못한다(1, 2절). 암사슴과 산 염소의 수태시기조차 알지 못하는 우리가 섭리의 태 중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어떤 날에 태어날 것인지 말할 수 있다고 자부할 것인가?

(2) 그것들이 비록 온갖 힘을 다하며 슬피 제 새끼를 낳으며 인간에게서 아무런 도움을 받지 아니하되 그것들은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로 말미암아 무사히 새끼를 안산하고 나면 그 괴로움이 추방되며 잊혀진다(3절). 어떤 이는 하나님께서 천둥 소리로 암사슴의 해산을 도우신다는 사실이 시편 29장 9절에 암시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구로 중인 여인의 위로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새끼를 낳는 암사슴조차도 도우신다는 사실을 관찰하도록 하라. 그런 그가 자기와 언약 맺은 자녀인 그들을 구원해 주시지 않으실리 없으며, 해산 중인 그들을 살펴 주시지 않겠는가?

2. 그 새끼의 성장에 대하여(4절). "그들은 강하여진다." 비록 그것들이 괴로운 중에 태어났을지라도 그 어미가 잠시 젖을 먹여 기른 후에는 그것들이 옥수수 밭에서 자기 힘으로 이럭저럭 지내다가 그 어미에게는 더 이상 부담을 지우지 않게 된다. 이것은 인간의 장성한 자녀에게 귀감이 되는 것이다. 언제나 부모에게 매달려서 부모로 하여금 애걸복걸 사정하게 하지 말고 스스로 용기를 내어 스스로의 생계를 개척하고 부모님께 보답하도록 하라고 가르쳐 준다.

Ⅱ. 우리가 성서에서 자주 읽는 동물인 "들나귀"는 길들일 수 없는 동물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인간은 제어하기에 너무나 힘이 드는 들나귀 새끼로 태어난다고들 한다. 섭리가 들나귀에게 할당하신 두 가지 일에 대해 살펴 보자.

1. 속박을 받지 않는 자유가 있다(5절). 하나님 말고는 "누가 들나귀를 자유롭게 놓아 보냈느냐?" 그는 들나귀에게 자유로운 기질을 주셨고, 따라서 그것에 대한 하사품도 주셨다. 길든 나귀는 노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들나귀는 자기를 속박하는 것이 없다. 노역으로부터의 자유와 마음대로 배회할 수 있는 자유는 들나귀의 특전에 불과하다. 인간의 자손 중 누구라도 그와 같은 자유를 탐내며, 그런 자유를 귀하게 여기고 뽐낸다면 그것은 가련한 일이다. 수고하고 무슨 일엔가 유익한 것이 할 일 없이 서성이며 아무 소용 없는 것보다 더 낫다. 그러나 가령 인간 사이에서도 하나님의 섭리가 어떤 자는 자유롭게 놔두고 편안히 마음대로 살게끔 허용하시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노예와 같은 신분을 가지고 태어나는 자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일에 놀라서는 안 된다. 그것은 야수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2. 둘러 쌓이지 않은 주거가 있다(6절). "내가 거친 들로 그의 집을 삼았다." 그 황야에서 그는 그의 길을 발섭하기에 족한 여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자기 마음껏 바람을 들여 마실 수가 있었다. 들나귀는 마치 바람을 먹고 살기라도 하는 양 코를 벌렁이며 바람을 마신다고 하는데(렘 2:24), 이는 "그의 거처가 짠 땅, 곧 불모지"이기 때문이다.

길든 나귀는 힘든 노역에 종사함으로써 사람에게 쓸모가 있기 때문에 그에게는 피난처도 되며 먹으러 가는 곳도 되는 주인의 구유가 있다. 따라서 그는 비옥한 땅에 살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들나귀는 자기의 자유를 가지기는 할지라도 그 삶을 불모의 땅에 구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하지 않는 자! 그는 먹게 하지 말라! 수고하는 자는 자기 손의 수고를 먹게 할 것이며, 또 필요로 하는 자에게 줄 것도 있을 것이다. 목자였던 야곱은 사냥꾼 야곱이 굶주림으로 곧 죽으려 하던 때에 맛있는 팥죽을 남겨 가지고 있었다. 들나귀의 자유 분방함과 그 생활에 대하여는 7, 8절에 더 묘사가 되어 있다.



(1) 그에게는 소유주가 없으며, 그는 예속돼 있지도 아니하다. "그는 성읍이 지껄이는 것을 업신여긴다." 혹은 "그는 성읍의 군중을 비웃는다." 만약 사람들이 들나귀를 잡고자 애쓰며 생포하기 위하여 그를 다수의 사람으로 포위하더라도 그는 곧 그들을 벗어나며 "어거하는 자의 부르짖음"도 그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는 도회지의 소요와 시끄러움 속에서 생활하는 자들을 비웃으며(패트릭 주교는 그렇게 해석한다), 황야에 사는 자기가 더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만사는 생각 나름이다.

(2) 주인이 없으므로 그에게는 먹여 주는 이도 없으며, 그에게 주는 양식도 없고, 그는 자기 스스로 이럭저럭 먹고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산은 그의 초장이며" 그것은 벌거벗은 초장이다. 그는 "여기저기에 푸른 것을 찾아 다니다가" 발견되는 대로 뜯어 먹는다. 이에 반하여 일하는 나귀는 푸른 것을 찾으러 다니지 않아도 그에게는 풍부하게 있다. 이 들나귀나 다른 짐승의 길들이지 않는 습성으로부터 우리가 이끌어 낼 수 있는 결론은 들나귀의 망아지조차 복종시키지 못하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지배하려고 한다면 얼마나 온당치 못한 일이겠는가 하는 것이다.

Ⅲ. 들소-"일각수"는 힘이 강대한 동물이며(민 23:22), 위풍이 당당하고 뽐내는 짐승이다(시 92:10).

들소가 사역할 수는 있지만 말을 잘 들으려 하지 않는데, 하나님은 본문에서 욥이 들소를 강제로 일을 시킬 수 있느냐고 힐문하신다. 욥은 무슨 일이든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네가 만물을 네 지배하에 둘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였으니, 들소를 가지고 먼저 시작해 봐라. 들소에게 네 기술을 시험해 봐라. 네 황소와 나귀가 없어졌으니 들소란 놈을 그것들 대신에 너를 섬기려 하는지 시험해 보고(9절), 그놈이 네가 네 가축에게 만들어 주던 식량에 만족할는지 어떨는지 알아 보는 그가 네 외양간에 머물겠느냐? 천만에!"

1. "너는 그를 길들일 수도 없고 그의 줄로 그를 맬 수도 없으며, 그로 써레를 끌게 할 수도 없다"(10절).

사람을 섬기고 싶어하는 동물이 있는데, 그것들은 사람을 섬기는 일에서 즐거움을 누리는 것처럼 보이며, 자기 주인을 향한 사랑을 간직하고 있는 것같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을 결코 섬기지 아니하려고 하는 그런 것들도 있는데, 이와 같은 것은 죄의 결과이다. 사람은 자기 조물주께 대한 복종으로부터 반역하였다. 그러므로 공평하게 그는 자기보다 열등한 동물이 자기에게 대한 예속으로부터 반역해 나가는 벌을 받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대한 하나님의 호의의 일, 예로서는 아직 인간에게 봉사하는 동물들이 몇몇 있다는 사실이다. 비록 야생 황소가(어떤 이는 이 말은 들소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를 섬기지 않으려 하며, 그의 줄에 복종하여 이랑 안에 들어 서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를 섬기고자 하는 길든 황소가 있으며, ferae naturae-즉 야성을 가지지 않은 다른 동물도 있다. 사람은 그를 재산으로 소유할 수 있으며, 그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고 그것에 대한 권리가 있다.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당신께서는 그를 이와 같이 생각하시나이까?"

2. "너는 감히 그를 의뢰하지 못한다. 그의 힘이 세다고 한들 너는 네 수고하는 일을 네가 네 나귀나 소에게 하듯 들소에게 맡기지 못할 것이다. 네 나귀나 소는 어린 아이라도 몰거나 이끌며 모든 수고를 맡길 수 있지만 말이다. 너는 네 타작 일에 야생들소가 오도록 하는 것도 의지하지 못할 텐데, 하물며 네 곡식을 집으로 실어 오며 네 타작마당에 곡식 모으기를 의탁하는 일이야 말해 무엇하겠느냐!"(11, 12절) 그래서 그가 곡식 노역을 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는 길든 황소만큼 배불리 먹지 못하며, 곡식을 떠는 타작마당에서 그 입에 재갈을 먹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쟁기를 끌지 아니할 것이다. 이는 그를 만드신 자가 결코 그에게 그 일을 작정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고하는 일에 대한 취향은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에 못지 않은 하나님의 은사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봉사에 적합한 힘을 주시는 곳에 아울러 하고자 하는 마음도 주신다면 그것은 자비이다. 그것은 우리가 얻고자 기도해야만 할 것이며, 우리 스스로의 마음을 설득해야 할 것은 바로 그것이다. 짐승들은 이 일을 행할 수가 없다. 그러나 금수와 마찬가지로 사람 또한 그러하다. 수고를 하고자 하는 마음이나 선을 행할 마음이 없는 자들은 야생 동물로 간주되어 마땅하며, 황야에 버려짐을 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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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조에 관한 설명(욥기 39:13-18)

타조는 굉장히 놀라운 새이며 아주 큰 새이지만 결코 날지 못한다. 어떤 이는 타조를 "날개달린 낙타"라고 불렀던 적이 있다. 하나님은 본문에서 타조의 설명을 하신다.

Ⅰ. 타조는 공작과 공통되는 점을 가지고 있다. 즉 아름다운 깃털을 가지고 있다(13절). "네가 공작새에게 자랑할 만한 날개를 주었느냐?"고 해독하는 이도 있다. 아름다운 깃털은 자만에 찬 새를 만든다. 공작새는 교만의 상징이다. 공작이 점잔빼며 활보하다가 그의 아름다운 깃털을 펼쳐 보일 때는 솔로몬의 그 모든 영광으로도 그만치 아름답게 채려입지 못한다. 타조도 역시 훌륭한 깃털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새이다. 지혜는 아름다움이나 화려함과 항상 동행하지만은 않는다. 다른 새들은 공작이나 타조의 번지르르한 색깔을 부러워하거나, 자기들에게는 아름다운 깃털이 없다고 해서 불평하는 법도 없다. 그렇다면 우리라고 해서 다른 사람이 우리가 입을 수 있는 것보다 더 잘 입은 것을 보았을 때 투덜거려야 되겠는가? 하나님은 그 선물을 다양하게 주시는데, 겉으로 보기에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라고 해서 늘 가장 고귀한 것만은 아니다. 공작의 꼬리나 독수리의 눈이나 그 솟아 올라가는 날개보다도 차라리 꾀꼬리의 소리를 가지고 싶어하지 않을 자가 누구이며, 땅 위로 날지도 못하는 자연스런 애정도 없는 타조의 아름다운 깃털과 우미한 날개보다 차라리 황새의 자연스런 성질을 원치 않을 자가 누구겠느냐?

Ⅱ. 타조에게만 특유한 것이 있다.

1. 제 새끼에 대해 무성의하다. 이것은 타조에게만 특유한 것이라 해도 좋은데, 이것은 나쁜 특성이다.

(1) 타조가 제 알을 어떻게 노출시켜 두는지 관찰해 보자. 타조는 참새나 제비가 하듯 어떤 은밀한 장소로 물러가지도 아니하고, 둥지를 짓지도 아니하며, 그 자리서 알을 낳고 그 새끼를 깐다. 대개의 새들은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신기하게도 자연적 본능에 유도되어 제 새끼의 보존을 위해 준비하게 된다. 그러나 타조는 본성에 있어서 괴상한 조류이다. 그것은 땅 위 아무 데나 알을 낳아 놓고 그 알을 부화시키는데 신경을 쓰지 않는다. 모래와 햇볕이 그들을 부화시켜 준다면 그로 족한 것이다. 모래와 태양이 타조를 대신해 준다. 왜냐하면 그 타조가 제 알들을 따뜻하게 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14절). 그뿐 아니라 그것은 제 알들을 보호해 줄 생각도 없다. 여행자의 "발이 그 알들을 부수어 버릴지도 모르며 들짐승이 알들을 깨뜨려 버릴지도 모른다"(15절).

그렇다면 어린 새끼 타조가 어떻게 생겨나며 그 종이 멸종되지 않음은 어째서인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특별하신 섭리에 의하여 버림받은 까마귀 새끼에게 먹여 주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햇볕과 모래의 열로써(어떤 이가 생각하듯) 내버려 둔 타조알을 부화시키거나 아니면 타조가 "흔히" 자기 알을 이와 같이 버려둘 지언정 "늘" 버려 두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타조가 제 알을 그와 같이 노출시켜 두는 이유를 관찰해 보자.

[1] 자연스런 애정의 결핍으로 인하여 그렇다(16절).

"타조는 제 새끼에게 무정하다." 어떤 것에게 무정하다는 것은 야수와 같은 짐승에게 있어서조차 사랑이 없음을 뜻하는 것인데, 하물며 인간성을 자랑하는 이성적인 동물에 있어서는 말해 무엇하랴! 특별히 스스로 어찌할 줄도 모르기 때문에 동정을 받을 만한 어린 것들에게 또 화를 내지 않으므로 혹독한 취급을 받지 않을 만한 어린 것들에게 무정하다는 것은 이성을 가진 인간이 취할 수 없는 짓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제일 흉악한 점은 타조가 그 새끼들이 자기 자신의 분신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제 새끼가 아닌 것처럼 제 자신의 새끼에게 무정한 점이다. 제 알을 놓을 때의 수고는 아무 소용없이 되어 버렸고, 수고가 모두 사라져 버렸다. 이는 그 타조가 당연히 가져야만 할 새끼에 대한 그 두려움과 부드러운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수고를 잃어 버릴까봐 조금도 두려워 하지 않는 자는 자기 수고를 상실하기가 쉽다.



[2]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이다(17절). "하나님께서 그것에서 지혜를 빼앗아 버리셨다."

이것은 다른 동물이 자기 새끼의 양육과 보존을 하기 위해 가진 기술은 하나님의 선물이심을 시사해 주며, 더욱이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하나님이 그것을 부정해 버리는데, 이는 우리로 하여금 개미의 지혜와 아울러 타조의 어리석음에 의해서 지혜롭기를 배우도록 하려고 하심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타조가 제 알을 보살피지 아니하는 그 무성함에 못지 아니하게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영혼에 대해 관심이 없다. 그들은 자신의 영혼에 대한 양식을 준비하지도 않으며, 자기 영혼이 안전하도록 적당한 둥우리를 짓지도 아니하고, 자기 영혼을 사탄과 그의 유혹에 내어 던져 버린다. 이것은 그들이 지혜를 박탈당하였다고 하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둘째, 많은 부모들은 자기 자녀에 대하여 그토록 무성의하다. 일부 부모들은 자기 자녀의 신체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이지 아니하여, 그들의 집을 준비해 두지 아니하며, 자기 자신의 애정을 공급하지 아니하여 불신앙인보다 더 악하고 타조처럼 착하지 못하다. 그러나 자기 자녀의 영혼에 대해 이와 같이 무성의한 자들은 더욱 더 많은데, 그들은 그들의 교육을 돌아 보지 않으며, 자기 자녀들을 가르치지 아니한 채, 무장시키지도 않은 채, 세상에 내어 보낸다. 이것은 세상이 욕망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부패해 있으며 그 욕망은 자기 자녀를 확실히 파멸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처사이다.

이와 같이 그들이 자녀를 양육하는 데 들인 수고가 도로에 그치고 만다. 그들의 자녀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들의 조국을 위해서 더 나았을 것이다.

셋째, 많은 목회자들이 또한 너무도 한심하게 그들의 백성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아니한다. 그들은 자기 백성과 함께 상주하여야 마땅한데도 불구하고, 자기 백성들을 땅에 버려 두며, 사람들이 자고 있는 틈에 가라지를 심느라고 사탄이 매우 분주하게 돌아 다닌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감독 감시해야 마땅한 자들을 소홀히 하여 그들의 백성에게 대해 실제로 무정한 것이 사실이다.

2. 타조가 자신에 대해서는 매우 염려한다.

타조는 제가 낳은 알은 위험에 처하게 내버려 두나, 자기 자신이 위험에 휩싸이게 되면 어떤 생물도 타조보다도 더 위험의 길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것은 없을 정도로 안간힘을 다하여 탈출하려고 한다(18절). 위기를 맞으면 타조는 그 날개를 높이 쳐들며(날개의 강한 힘은 날개의 아름다움보다 타조에게 더 도움이 되는데), 그 날개의 도움으로 얼마나 빨리 달려 가는지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마상의 기수조차 그것을 따라가 잡을 수가 없을 정도이다. "타조가 말과 그 탄 자를 경히 여기느니라."

인지상정이란 법칙 하에서 가장 못한 자들은 흔히 자기 보존의 법칙을 향해서는 가장 큰 자가 되려고 싸운다. 기수는 타조같은 그런 동물이 자기를 앞지르는 것을 보고 자기 말의 질풍같은 신속을 자랑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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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에 대한 설명(욥기 39:19-25)

하나님은 자기의 권능을 힘이 강하여 사람을 깔보는 동물 가운데서도 나타내셨다. 본문에서는 그 어떤 동물보다 힘이 떨어지지 아니하면서도 아주 길이 들어 사람에게 봉사하는 동물 속에서 자기의 능력을 과시하신다. 그것은 말이며 특히 "전쟁의 날을 위해 예비된 말"이다. 말은 평상시의 일에 봉사하는 것보다 그 이상 가는 때에 더 유용하다. 욥의 나라에는 고귀하고 관대한 성질을 가진 말의 품종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 말들이 욥의 소유물 가운데에 언급돼 있지는 않을망정, 욥은 그런 말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음직하다. 그의 소유물이었던 가축은 농사짓는 일에 사용되는 것으로서, 신분이나 위엄 따위의 외관을 나타내는 데 쓰이는 것보다, 혹은 전쟁에 쓰이는 것들보다 더 귀중히 여겨졌었고, 유독 말들은 바로 그런 외관이나 전쟁을 위해 예비되 있었으며, 우리가 흔히 부려먹듯 그런 천한 일에 당시에는 종사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위풍이 당당한 짐승인 큰 말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관찰된다.

1. 말은 아주 힘이 세며 기개가 장하다(19절).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가 사람을 위해 자기 힘을 사용하지만 그는 자기 힘을 사람에게서 받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바로 그 힘을 주셨다. 그는 자연의 모든 능력의 원천이시다. 그런데도 그 자신은 "말의 힘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시 147:10), "말은 안전함에 대해 헛된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셨다(시 33:17). 달리거나 끌거나 운반하는 일에 있어서 보통 사람을 섬기는 동물 중 말보다 더 힘이 센 것은 없으며, 그것은 메뚜기처럼 겁이 많지도 아니하고, 대담하여 위험에 직면하여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 사람이 말과 같은 충복을 두게 된 것은 자비로운 일이다. 말은 비록 강하지만 어린 아이의 관리에도 순종하며, 그 주인에게 거역하지 아니한다. 그러나 말의 힘센 것을 신뢰하지 말라(호 14:3; 시 20:7; 사 31:1, 3).

2. 그의 목과 콧구멍이 위대하게 보인다. 그의 목은 "뇌성으로 옷 입혀져 있다." 즉 숱이 많이 흘러내리는 갈기털로 덮어져 있다. 그것은 그를 강맹하게 하며 그에게 장신구가 된다. 그가 코를 볼 때에 그의 머리를 쳐들게 하며, 주위에 거품을 뿌리게 하는 "그 콧구멍의 장관은 두려웁다"(20절). 아마 그 당시에 욥의 나라에는 오늘날 우리에게 있는 말보다도 더 위풍당당한 품종의 말이 있었는지 모른다.

3. 그는 전투에서 아주 흉용하고 맹렬하여 자기 생명의 초급한 위험 중에 돌진하면서도 꺾이지 않는 용기를 가지고 나아간다.

(1) 그가 얼마나 여유작작한가 살펴 보자(21절). "그가 골짜기에서 발로 긁으며," 자기가 딛고 서 있는 땅이 어디인지 상관하지 아니한다. 그는 자기 힘을 자부하는 데 말은 사람을 섬기는 일에 그 힘을 사용하고 그의 명령 하에 힘을 쓰기 때문에 사람을 경멸하여 그 힘을 사용하고 그로부터 반역하면서 힘을 쓰는 들나귀보다 자랑할 이유가 더욱 더 많다(8절).

(2) 그가 얼마나 기꺼이 나아가는지 살펴 보자. 그는 활기에 차서 "군기를 든 자들을 맞으러 나아가되" 자기의 선한 명분에 의하거나 명예의 기대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나팔 소리와 대장의 우레" 같은 호령과 병사들의 "아우성" 소리로 말미암아 나아간다. 이런 소리들은 그의 타고난 용기의 도화선에 불 붙이는 포효소리로서 그로 하여금 "하아! 하아!" 부르짖는 듯이 아주 열성적으로 도약하여 나아가게 한다(25절). 짐승들은 자기에게 의도된 일에 대해 얼마나 놀랍도록 적응하며, 또 하고 싶어하는가?

(3) 말은 얼마나 겁이 없으며 죽음을 초개같이 여기고 가장 위협적인 위험조차 가벼이 생각하는지 보라(22절).

"그가 두려움을 비웃고" 그것을 조롱거리로 삼는다. 그를 칼로 후려치며 전동을 덜그렁 거리고 창을 휘둘러 그를 물리고자 하더라도, 그는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돌진하여 자기 등 위에 탄 기수에게 용기를 북돋우기까지 한다.



(4) 그가 얼마나 맹렬한지 보라.

그는 앞발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도약하며 의기양양하게 나아가고 적을 향해 어찌나 맹렬히 달려가는지, 그가 심지어 "맹렬과 분노로써 땅을 삼키기조차 하였다"고 생각할 정도이다(24절). 말의 높은 용기는 인간의 기개보다 더 한층 칭찬받을 만하다. 인간의 용맹과 분노는 병들었기 때문이다. 전마에 대한 이런 묘사는 주제넘은 죄인에 대하여 나타낸 성격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렘 8:6). "말이 전장으로 돌진해 나가듯이 모든 사람은 자기 길로 향하는도다."

사람의 심령이 그 안에서 완전히 악을 행하기로 정해져서 절제 없는 욕망과 정욕으로 말미암아 사악한 길로 계속 행할 때에는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죄의 치명적 결과를 두려워하게 할 도리는 도무지 없다. 그 자신의 양심으로 하여금 율법의 저주 곧 죄의 삯이 되는 사망과 전능자가 전장에서 주시는 모든 공포를 자기 앞에 제시하도록 해 주는 수밖에 없다. 그는 이 두려움을 비웃으며 놀래지 아니하고 스랍들의 화염검으로부터 등을 돌려 대지도 아니한다.

목회자들이여! 그대의 목소리를 나팔처럼 높여, "죄인은 그것이 나팔 소리인 줄 믿지 아니하며, 하나님과 그 사자들이 자기에게 간절하신 줄로 믿지 않는구나" 하고 자기를 치시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선포하여라. 그러나 종국에 가서 어떻게 될지 예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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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와 독수리에 대한 설명(욥기 39:26-30)

공중의 새는 지상의 짐승과 함께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와 권능에 대한 증거품이다. 하나님은 본문에서 두 가지의 위엄 있는 조류를 특별히 언급하신다.

1. "매"에 대해 언급하신다.

이것은 굉장한 힘과 슬기를 지닌 장대한 새로서 맹금류이다(26절). 본문에서 주목하는 것은 신속하고 강한 그의 비상에 대해서이며 특히 "남쪽을 향해" 날아가는 그의 진로에 대해서이다. 매는 겨울에 북쪽에 있는 추운 지방에서 벗어나 남쪽으로 태양을 따라 가는데, 묵은 깃을 벗고 새 털을 입는 털갈이시에는 특히 그러하다. 이것은 매의 슬기이며, 매에게 이 지혜를 주신 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오늘날까지 내려온 인간의 유희나 오락으로서 먹이를 좇아 나르는 매의 비상한 재주를 이용하는 풍습은 아마 그 당시에 사용되지 않았을 것이다. 길이든 매가, 즉 사람의 마음대로 날고 사람의 노리개가 되도록 가르침을 받은 매가 언제든지라도 하나님의 불명예가 되기까지 그릇 쓰여진다는 것은 유감천만이다. 왜냐하면 매에게 유쾌하고도 유용한 비상술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2. "독수리"는 조류의 왕으로서 역시 맹금류에 속한다. 그 독수리에게 먹이를 허락하신다는 사실은, 아니 그에게 그런 먹이를 잡아 먹을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 주셨다는 것은 인간들 가운데에서 압제자가 번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받아들이도록 하는데 도움이 된다. 본문에서 독수리에 대하여 주목하는 것은 이러하다.

(1) 독수리가 날아 오르는 높이.

어떤 새도 독수리만치 높이 솟아 오르지 못하며, 그만치 강한 날개를 가진 것도 없고, 그것만치 햇볕에 잘 견디어 내는 새는 없다. "독수리가 네 명령대로 날아 오르느냐?(27절) 그것이 네게로부터 얻은 힘에 의지하느냐? 네가 독수리의 날음을 명령하느냐? 아니다. 독수리가 솟아 올라 네 시야에서 사라지고, 더욱이 네 부름 소리가 안 들리는 곳까지 날아 오르는 것은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자연적 능력과 본능으로 말미암아서이다."



(2) 그 보금자리의 강도.

독수리의 집은 성이며 요새이다. 그것은 집을 "높은 데, 바위 위에 즉 바위의 뾰족한 데" 지으며(28절), 그래서 자기와 자기 새끼를 위험권 밖으로 벗어나게 한다. 든든한 줄로 안심하는 죄인들은 높은 곳, "바위의 갈라진 틈"에 있는 보금자리 속의 독수리와 같이 자기의 죄 가운데서 스스로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너를 거기서 끌어 내리리라"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렘 49:16).

악인들이 땅의 분노 위로 더욱 높이 올라가 앉을수록 그들은 자신들이 하늘의 복수를 향해 더욱 더 가까이 나가는 줄로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



(3) 독수리의 거시성(29절). "그의 눈은 멀리 바라보고 있다." 그 눈이 멀리 바라보기는 하나 위를 향하지 않고 아래를 향하는데 이는 움킬 먹이를 찾기 위함이다.

이 점에 있어서 독수리는 위선자의 상징이다. 종교적 직업에서조차 위선자는 외견상 하늘로 향해 올라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눈과 마음은 땅 위의 먹이 곧 세속적인 이익을 향해 머문다. 과부의 집이나 그밖의 것 등을 경건이란 미명하에 집어 삼키고 싶어한다.



(4) 독수리가 자기와 자기 새끼를 부양하는 방법. 독수리는 살아 있는 동물을 먹이로 삼는데, 그것은 산 놈을 움켜 잡아 갈기갈기 찢어서 자기 새끼들에게 가져다 주고 "피를 빨도록" 가르쳐 준다. 그것들이 하는 행동은 본능에 의한 것이어서,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성과 양심이 있는 인간에게는 피를 목마른 듯 갈망한다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을 터이나,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런 비참한 예가 있었다. 독수리는 또한 사람의 시체도 먹이로 삼는다. "살륙당한 자가 있는 곳에는 그것도 거기 있느니라." 이들 맹금류는(말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25절) "멀리서도 전쟁 냄새를 맡는다." 그러므로 교회의 대적들에게 행해질 큰 살육의 때에는 새들이 "왕들과 장군들의 고기를 먹도록 크신 하나님의 만찬에 초대받는다"(계 19:17, 18).

우리의 구주께서도 독수리의 이런 본능을 언급하신다(마 24:28). "주검이 있는 곳에는 어디든지 독수리가 모인다." 어느 생물이든지 자기의 고유한 먹이가 있는 곳을 향하여 나아갈 것이다. 왜냐하면 동물에게 그 먹이를 제공해 주시는 분께서 그들 안에 그런 식성도 심어 놓으셨기 때문이다. 인간보다 열등한 동물이 가진 본능과 슬기에 관하여는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데, 이들 본문에 나온 예와 그외 많은 유사한 실례를 보면 우리 자신의 약함과 무지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으며, 모든 존재와 권능과 지혜 및 완전함의 구원으로서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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