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욥기 38:1-3)
1. 누가 말씀하시는가 살펴 보자. 말씀의 주체자는 즉 여호와이시다. 그는 피조된 천사가 아니시며, 영원하신 말씀 자체이시고 이 영원하신 말씀은 복되신 삼위 중 제2위 이시다. 왜냐하면 세상이 만들어진 것은 그로 말미암아서 된 것이며, 그는 다름아닌 성자이시기 때문이다. 후에 시내산에서 말씀을 내린 바로 그분이 여기에서도 말씀하고 계신다. 시내산의 말씀에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내시겠다는 말로 시작하셨으나, 여기에서는 천지 창조의 말씀으로 시작하시는데, 이 양자로부터 우리의 그분에 대한 복종의 필요성이 추리되어진다.엘리후는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되 인간은 그것을 알아 듣지 못한다"고 말하였다(33:14). 그러나 그들은 지금하시는 이 말을 알아 듣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의 말씀"이 있다(벧후 1:19).
2. 그가 말씀하신 시기를 살펴 보자. 그가 언제 말씀하셨는가? 그것은 "그 때이다." 그들이 그들의 할 말을 죄다 하고도, 오직 그들의 요점을 얻지 못하였을 때, 그 때는 하나님이 개입하실 때이다. 이는 그의 판단은 진리에 의거하시기 때문이다. 누가 옳은지 알 수 없을 때, 그리고 우리 스스로가 옳은지 그른지 의심스럽다고 생각될 때에는 "하나님이 판결의 골짜기에서 즉각 결정해 주시리라(욜 3:14)"는 이 말씀이 우리를 흡족하게 해 주신다. 욥은 자기의 세 친구를 침묵시키기는 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주로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대해서는 그들을 납득시킬 수가 없었다. 엘리후는 욥을 잠잠하게 만들었지만 욥이 이 논쟁을 그릇되게 처리한 사실을 자인하게는 유도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나오셔서 이 두 가지 일을 다 행하신다.먼저 그는 욥에게 그의 지각없는 말을 뉘우치도록 납득시키고, 그로 하여금 peccavi-즉 내가 잘못하였습니다라고 부르짖게 만드신다. 그를 겸손하게 만드신 후에 그는 욥의 세 친구들에게 그들이 욥에게 그릇되이 행하였다는 것을 납득시키심으로써 욥에게 명예를 입히신다. 하나님은 조만간에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도 이 두 가지 일을 행하실 터이다. 그는 자기 백성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보여 주실 터이다. 이는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과오를 부끄러이 여기게 하려 하심이며,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기 백성의 의로움을 보여 주사, 그들의 의로움을 빛과 같이 드러내실 터이다. 이는 그들로 하여금 자기 백성에 대하여 퍼부은 부당한 비난을 수치스럽게 여기도록 하려 하심이다.
3. 그가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살펴 보자.-그가 말씀하실 때의 모습을 보자. 그는 "폭풍 속에서" 말씀하셨다. 회오리 바람 가운데로부터, 구르며 감싸는 구름 속에서 말씀하셨다(이것을 엘리후가 눈여겨 보았다. 37:1, 2, 9). 폭풍은 에스겔의 환상의 서두로 시작되며(겔 1:4), 엘리야에게도 나타난다(왕상 19:11). 하나님은 "그의 길을 회오리 바람 가운데"에 가지신다고 하며(나 1:3), 폭풍조차도 그의 말씀을 성취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폭풍을 자기 말씀의 전달 수단으로 삼으셨다.이것은 하나님의 목소리가 얼마나 굉장한 것이며, 그 소리는 사라지지도 아니하고, 비록 폭풍의 시끄러움 속에서도 완전히 들린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욥을 깜짝 놀라게 해서 그의 주의를 환기 시키려고 도모하신다. 때때로 하나님은 폭풍 속에서처럼 무서운 징계 속에서 자기 백성에게 응답하시는 때도 있으나, 항상 공의로우심 가운데에서 대답하신다.
4. 그가 말씀하시는 대상을 살펴 보자. 그는 "욥에게 대답하셨다." 그의 말씀은 욥을 향해 발해졌는데, 이는 그가 욥의 부당한 중상 모략을 욥에게서 깨끗이 제거하시기 전에 욥으로 하여금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깨닫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죄에 대하여 효과적으로 깨닫게 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으며, 그가 높이고자 하는 자들은 그만치 낮아져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하는 자들은 욥과 같이 나중에는 그로부터 확실히 들을 것이다.5. 그가 하신 말씀에 대해 살펴 보자. 우리는 엘리후나 말씀을 들은 자들 중 하나가 폭풍 중에서 나온 말씀을 "한 마디 한 마디 축어적으로" 받아 적었다고 추측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천둥이 그들의 목소리를 발하였을 때, 사도 요한은 받아 적을 준비가 돼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계 10:4). 혹 그때에 그것이 기록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 욥기의 저자는 성령의 감동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사실대로 정확하게 여기에 기록돼 있다고 확신한다. "성령이 내가 너희에게 말한 것을 네 기억 속에 소생시켜 주시리라"(고 그리스도는 말씀하신다). 서문은 매우 탐구적이다.
(1) 하나님은 욥에게 그의 말 속에 나타난 무지와 억지를 가지고 책망을 내리신다(2절). "이렇게 말하는 이 자는 누구냐? 그것이 욥이냐? 무엇이! 사람이라고? 약하고 어리석으며 천한 피조물인 그가 나에게 나의 행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 지시하겠다고 나서며, 내가 행한 일에 대해 나와 시비를 가리겠다고? 그게 욥인가? 무엇이! 내 종 욥이, 온전하고 의로운 그가? 그가 그토록 자기 자신을 망각하고 그답지 않게 행동할 수 있나? 이같이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그가 어디 있느냐? 감히 하고자 하거든 그의 얼굴을 들게 하고 자기가 한 말을 고집하게 해 보아라."
우리의 미련한 것으로 하나님의 지혜로운 이치를 어둡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크나큰 모욕인 동시에 큰 도발이다. 하나님의 의향에 대해서는 우리가 아무 지식을 가지지 못하고 있음을 자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의 계획은 우리가 잴 수 없는 깊음이어서 우리가 그 깊이를 증명해 보겠다고 나선다면 우리는 우리의 영역 밖으로 천리 만리 벗어나는 셈이며, 우리의 목표를 이탈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치 하나님의 이치를 이해하고 있기라도 하는 양, 아주 세세하게, 또 무척 대담하게 그들에 관해 지껄이는 수가 너무나 많다. 그러나 슬프게도 우리는 그들을 설명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들을 어둡게 할 따름이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법령의 질서에 대해 논하고자 할 때에나, 신의 섭리나 은총이 운용하려는 의도나 이유나 방법에 관해 논하려고 할 때에도, 스스로 혼동이 되며 당황케 될 뿐만 아니라, 말하는 자나 듣는 자가 다 같이 그렇게 되어 버린다. 그러나 겸손한 신앙과 성실한 순종은 우리로 하여금 여러 학파의 모든 철학이나, 소위 과학의 어떤 탐구보다도 더 깊이 더 잘 여호와의 비밀을 엿보게 해 줄 것이다.
하나님이 하신 이 첫째 말씀은 욥이 그의 참회 가운데 자기를 침묵시키며 겸손하게 낮춘 말씀으로서 굳이 집착하는 것을 보아 더 주목할 만하다(욥 42:3). 욥은 이 말을 반복하였으며, 이 말은 욥의 몸 깊이 박힌 화살처럼, 찰싹 달라 붙어 떨어지지 아니한 채 메아리쳤다. "나는 이치를 어둡게 한 바보입니다." 이 말은 마치 하나님께서 엘리후를 지목하신 것처럼 그에게 돌리려고 한 말인듯한 기미가 약간 보인다. 이는 그가 마지막으로 얘기하였고, 회오리 바람이 처음 일어났을 때는 그가 말하고 있던 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욥은 그 말을 자기에게 적용시켰는데, 우리는 충실한 책망을 받으면 그렇게 해야 어울리며 대개의 사람들이 하듯 그 책망들을 타인에게 미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2) 그는 욥에게 하나님의 계획을 탐색하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의 지식이 있다는 증명을 해보라고 요구하신다(3절).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어라. 회견을 위해 준비하여라. 내가 네게 요구할 것이며, 네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질테니 너는 할 수 있거든 내가 네 질문을 네게 대답하기 전에 내게 대답하라." 하나님께 책임을 추궁하려고 동분서주하는 자들은 문답을 받는 일과 그들 스스로 변명하는 일을 각오하여야 하는데, 이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무지와 오만불손함을 깨닫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욥 자신이 말한 사실을 상기시켜 주신다(욥 13:22). "주께서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
"이제 네가 한 약속을 지키라."
세계의 창(욥기 38:4-11)
하나님이 욥을 겸비케 하시기 위해 욥에게 나타내 보이신 것은 땅과 바다에 대한 그의 무지이다. 그토록 가까이 있고 부피가 큰 것들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의 기원에 대하여 설명할 수가 없었다. 하물며 위에 있는 하늘이나 아래에 있는 음부에 대하여는 말할 것도 없다. 그것들은 너무나 먼 거리에 있으며 아주 미세한 물질의 여러 요소로 되어 있고 적어도 하나님의 계획으로 조성돼 있기 때문이다.
Ⅰ. 땅의 기초 공사에 대하여. "만약 그가 자부하듯 하나님의 뜻을 살필 수 있는 강력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로 하여금 자기가 밟고 다니는 땅 곧 인간의 자손이 딛고 서 있는 땅에 대해 설명하게 해 보아라."
1. 그로 하여금 이 하계가 조성되었을 때 그가 어디에 있었는지, 그 놀라운 작업에 내가 충고를 하거나, 도와 주었는지 대답하게 하여라(4절).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에 있었느냐? 너의 자부심은 높다. 그러나 너는 이 일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느냐? 세계가 조성되었을 때 너는 참석하고 있었느냐?"(1) 하나님의 크심과 그 영광을 보라. "나는 땅의 기초를 놓았다." 이것은 그가 유일하게 살아계시는 참 하나님이심과 권능의 하나님이심을 증명해 주며(사 40:21; 렘 10:11, 12), 이 사실은 우리가 언제나 그를 신뢰할 수 있도록 격려해 준다(사 51:13, 16).
(2) 인간의 비천함과 보잘 것 없음을 보라. "그 때에 네가 어디에 있었는가? 동방의 자손 중에서 그처럼 두각을 나타내고 신탁자임을 자처하며, 신의 이치에 통달한 재판관이라는 네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는 어디에 있었느냐?" 우리는 천지 창조에 손도 대보지 못했다. 만약 그랬다면 우리가 세계의 지배권을 가질 수가 있었으리라. 우리는 창조의 목격자도 되지 못하였다. 만약 그랬다면 그것을 통찰할 수 있는 힘도 얻었으리라. 우리는 그때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처음 사람도 거기에 없었다. 하물며 우리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 일이 행해질 때 그리스도께서 참석하신 것은 그의 영광이다(잠 8:22 이하; 요 1:1, 2). 그러나 "우리는 어제 생겨나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가지고 험 잡지 말자. 또 그에게 이래라 저래라 지시하지도 말자. 그가 세계를 창조하시면서 우리와 상의하지도 않으셨지만 세계는 잘 만들어져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무엇 때문에 우리는 그가 세계의 통치 방법을 우리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기대하는가?
2. 그로 하여금 이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묘사해 보게 하며 이 튼튼하고 장중한 건축물이 어떤 모양으로 형성되며 세워졌는지 그 양태를 자세히 설명하도록 해 보아라. "만약 네가 스스로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정도의 많은 총명이 네게 있거든, 그 공사의 진척 상황을 말해 보라." 타인들보다 우수한 지혜를 가지고 있는 줄로 자부하는 자들은 그것을 증명해야 마땅하다. 네 신앙을 네 행사를 통해 나에게 보이고 네 지식을 네 말로써 내게 나타내라. 자! 욥으로 하여금 그가 할 수만 있거든 대답하게 해 보아라.(1) 세계가 어떻게 그토록 우아한 틀을 갖추었으며 그 모든 부분 부분이 정밀하면서도 놀라울 정도의 균형과 비례를 유지하는가?(5절) 일어나서 "누가 그 도량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준승을 그 위에 펼쳤는지 말하라."
네가 그 모형을 조형하고 그 다음에 그것을 따라 자로 치수를 그린 건축가냐? 지구의 광대한 용적은 흡사 자와 줄로 만든 것처럼 규칙적으로 주조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이런 모습으로 조성되었는지 묘사할 자가 누구냐? 누가 그 둘레와 직경과 지구 위에 그어진 모든 선을 정할 수 있겠느냐? 지구가 정지해 있는지 회전하고 있는지 여부는 오늘날까지 논쟁꺼리지만 우리가 어떻게 지구는 맨처음 이런 이런 치수로 창조되었다고 결정할 수 있는가?
(2) 그 지구가 어떻게 그토록 견고히 고정되었느냐? 비록 그것이 아무 것도 없는 위에 매달려 있으나 그것은 확실하게 서있어서 옮겨질 수도 없다. 그러나 "그 기초가 무엇 위에 굳게 붙들어 매어져 있어서" 그 자체의 중량으로도 꺼져 내려가지 않을 수 있는지, 누가 말할 수 있겠느냐? 혹은 그 부분 부분이 따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누가 그 주춧돌을 놓았는가?"(6절)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은 영원하다(전 3:14).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험 잡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또한 그것에 대해 염려할 필요도 없다. 땅은 오래 있을 것이며, 창조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그의 섭리가 하시는 일인 종말까지 맞아들이도록 계속 있을 것이다. 그 어느 치수도 결코 깨뜨려지지 아니할 것이다. 구속의 사업도 땅의 견고함보다 못지 아니하게 튼튼하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 기초와 주춧돌이 되시기 때문이다. 교회는 땅과 같이 굳게 서 있다.
3. 그로 하여금 그 엄숙한 제전에서 합창되었던 찬미가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부르게 하여라(7절). "그 때에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였다." 복된 천사들 즉 새벽 별들은(빛되신 아버지의 첫 번째 소생인) 어두운 흑암 밖으로 나와서 형태도 없이 공허한 땅, 곧 이 하계의 근원 위에 밝게 비취라고 하나님께서 명하신 빛보다 바로 앞에 가면서 동이 틀 무렵에 샛별만치 밝게 빛났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땅의 기초가 놓이는 것을 보았을 때 "기뻐 소리질렀다." 이는 비록 그 땅이 자기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손들을 위해 만들어 진 것이다 하더라도 또 그로 인해 그들의 일거리와 그들의 봉사할 것이 더 많아진다 하더라도, 그들은 영원하신 지혜와 영원하신 말씀 곧 그들이 경배하도록 되어 있는 분이(히 1:6) "땅의 거주할 수 있는 부분을 기뻐하시리"라는 것을 알았고, 아울러 그의 많은 "기쁨이 인간의 아들들에게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잠 8:31). 천사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일컬어지는데 이것은 그들이 그의 형상을 무척 많이 닮았고, 위에 있는 그의 전에 그와 함께 있으며, 아들이 아버지를 섬기듯이 하나님을 봉사하기 때문이다.
(1) 이 세상 창조자로서의 하나님의 영광은 이성을 가지고 있는 그의 모든 피조물에 의하여 기쁨과 환희로써 칭송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등 피조물로부터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모아들이는 수집가로서의 자격을 부여받았으며, 또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등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솜씨를 예시해 주는 객체로서만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수 있을 따름이다.
(2) 천사가 할 일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우리가 거룩하고 겸손하며 감사에 가득 찬 동시에 기쁨에 넘치는 찬양을 풍부히 하면 할수록 우리는 천사들이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을 더욱 더 행하는 것이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미하는데 그토록 변변치 못하고 결함이 많은 반면에 천사들은 더 훌륭한 모습으로 그 일을 해 내고 있음을 생각하면 위로가 된다.
(3)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일치하여 하나님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들은 일제히 합창하였으며, 그들의 화음에는 불협화음이 섞여 있지 않았다. 가장 감미로운 협주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4) 그들은 모두가 다 찬미를 하였다. 후에 타락하여 그 처음 신분을 내동댕이치게 되는 천사들까지도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하나님을 찬양하던 자들도 죄의 속이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참람되이 모독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영원무궁토록 찬양받으실 것이다.
Ⅱ. 바다를 지정된 장소에 제한시켜 두심에 관하여(8절 이하). 이것은 창조 제3일의 작업에 관계되는데, 그 때에 하나님이 말씀하셨다(창 1:9).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라 하시며 그대로 되니라."
1. 땅과 물이 서로 섞여 있던 큰 깊음 혹은 혼돈 가운데서 물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넘쳐 흘렸는데," 이는 "아이가 애기 잘 낳는 애기집에서 나오는 것과 같았다"(8절). 깊음을 덮고 산 위에 서 있던 물들이 그때 황급히 물러났다. "하나님의 꾸짖으심에 그들은 도망을 갔다"(시 104:6, 7).2. 이 새로 태어난 아기는 옷이 입혀졌고 강보에 쌓였다(9절). "구름으로 그 의복"을 삼으며 그것은 구름으로 덮이고 "짙은 흑암은"(즉 해안들은 서로가 무한히 멀리 떨어져 있고 그 상거가 아득해서 한 해안에서 다른 해안까지는 아주 캄캄하다) "아기를 위한 강보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난 바다를 얼마나 용이하게 관리하시는지 살펴 보자. 그 조수의 흉용함과 그 큰 물결의 억센 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유모가 아기를 강보에 싸서 얼르듯이 바다를 다루신다. 그가 "반석과 산들"로 그 강보를 삼으셨다고 하지 아니하고, 구름과 흑암으로 강보를 삼으셨다고 하는데 이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즉 그런 목적에 사용하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다.
3. 이 아기에게는 요람도 또한 준비가 되어 있다. "내가 바다를 위하여 계한을 정하였다"(10절). 땅에서는 골짜기가 바다를 영접하기에 충분할 만큼 넓게 침강해 들어갔고, 바다는 거기서 잠잘 수 있도록 뉘어 졌다. 가령 때로는 바람이 물결을 요동시키더라도 그것은(패트릭 주교가 관찰하듯) 아기가 더 빨리 잠들도록 요람을 흔들어 주는 것에 불과하다. 바다에게 대하여 그러하듯 우리 누구에게도 정해진 장소가 있다. 왜냐하면 시한을 먼저 정해 놓도록 결정하신 그가 우리 거주의 경계 또한 결정해 놓으셨기 때문이다.4. 이 하계에서의 모든 불안정과 위험의 근원이 되는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이 아기가 제멋대로 되어 위험스럽게 되자, 바다에게는 감옥이 준비되었다. "빗장과 문들이 베풀어졌다"(10절). 이 말에 덧붙여 바다의 교만을 견제할 셈으로 "네가 여기까지 오고 더는 넘어가지 못하리라"고 말하고 있다. 바다는 하나님의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그것을 만드셨고 또 그것을 억제하시기 때문이다. 그는 바다에게 이르신다. "네 교만한 물결이 여기 그칠지니라"(11절). 이것은 바다에 대한 하나님의 권능의 행위라고 생각할 수 있다. 비록 그 몸은 굉장히 크고 그 움직임은 때때로 지극히 사나울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장악하여 견제하신다.
그 파도가 높이 올라가고 그 조수가 뒤집혀 구르되,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한도 이상은 경거망동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것은 왜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여야 하며(렘 5:22), 왜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스스로 담대해야 하는가의 이유로서 언급된다. 왜냐하면 바다의 시끄러움을 멈추게 하시고 그 물결의 흉용함조차 제지하시는 그가 원하실 때에는 백성의 소요도 진정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시 65:7).
또한 이것은 인간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행위로 간주되는 동시에 그 패역한 인종들을 향한 그의 오래 참으심의 본보기로 보여진다. 비록 그는 바다의 물결로써 다시금 지면을 쉽사리 덮어 버리실 수 있으셨으나(그리고 내가 생각하기로는 하루에 두 번씩 넘쳐 들어오는 밀물은 우리를 위협하며 만약 하나님께서 허락을 내리시고자 하신다면 바다가 무엇을 할 수 있으며 할 것인지 우리에게 나타내 준다), 그런데도 그는 그들을 억제하시는데, 이것은 그가 어느 누구라도 멸망하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지금 있는 세상을 불사르기 위해 간수하시기" 때문이다(벧후 3:7).
하나님의 활동(욥기 38:12-24)
여호와께서는 계속해서 욥에게 쩔쩔매게 하는 많은 질문을 퍼부으시는데, 이것은 욥으로 하여금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하고, 하나님께서 지시하고자 한 자신의 어리석은 짓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도록 하시기 위해서이다.
만약 우리도 이와 같은 물음으로 스스로를 시험해 보기만 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들과 비교할 때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곧 인정하게 될 것이다. 욥은 여섯 가지 일에 관해 설명하도록 요구당한다.
Ⅰ. 아침의 근원. 즉 위로 높은 데서 오는 새벽에 대하여(12-15절). 우리가 존재의 확실성을 인정하는 것 중에서 빛보다 더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가시적 존재는 없다. 마찬가지로 그 존재를 묘사하는 데 있어서 빛보다도 더 까다로운 것은 없으며, 그것이 무엇인지 결정하는 데 있어서도 빛보다 더 의심스러운 것은 없다. 우리는 아침을 환영하며 새벽을 반긴다.
1.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나던 날부터 명한 것이 아니며, 현재 상태의 아침은 우리가 태어나기 오래 전에 있었던 것이기에 그것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고, 우리만을 위해 제작되지도 않았지만, 우리는 우리 보다 앞서 간 많은 세대들이 그러했듯이 우리가 새벽을 보는 대로 그것을 맞는다. 새벽은 우리가 우리의 처소를 알기 보다 먼저 자기 처소를 알았다. 우리는 단지 어제 생겨 났기 때문이다.2. 아침 빛을 처음으로 명하고 그 일어남과 그 빛남과 그 시간을 지정한 자는 우리도 아니며 그 어느 사람도 아니다. 밤과 낮의 항구적이고도 규칙적인 계승은 우리의 고안물이 아니다.
밤과 낮이 나타내 주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며 또한 그의 솜씨있는 작품이라는 것을 나타내지, 우리의 일을 드러내는 게 아니다(시 19:1, 2).
3. 이 진로를 바꾸는 것은 전혀 우리의 능력 밖이다. "너는 네가 나던 날부터 아침을 명하였느냐? 네가 어느 때든지 아침 빛을 그 정한 시각보다 일찍 들어 올린 적이 있느냐? 네가 아침이 기다려질 때 네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아침 빛을 앞당기며, 네 편리를 위해 새벽에게 명령하여 자기 처소 이외의 곳에 오도록 한 적이 있으냐? 결코 없다. 천부당 만부당하다. 그런데 왜 너는 하나님의 계획에 지령을 내리겠다고 나서며, 섭리의 방법을 네게 유리하도록 변경시키기를 기대하느냐?"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맺으신 언약 중 어느 부분이라도 특히 이 말 즉 "내가 사람의 매로 그들을 단련시키겠다"고 하신 말씀의 약속을 파기하느니 보다는 차라리 낮과 밤의 계약을 파약하는 게 낫겠다.
4. 새벽을 명하여 땅에 찾아오게 정하시고 아침 빛이 공중을 통하여 확산되도록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공중이 그 빛을 제 때에 받아들이는 것은 마치 진흙이 도장을 맞는 것과 흡사하여(14절), 그 표시가 즉각 나타나게 한다. 그래서 그것은 마치 밀랍 위에 도장을 찍어 남는 표상처럼 갑자기 도처에 환하도록 빛을 비춘다. "그래서 그들은 옷처럼 나타난다." 혹은 그들은 흡사 화려한 의복으로 옷 입힌 것 같다. 땅은 매일 아침 면모를 일신하며 우리가 하듯 몸차림을 하고 빛을 의복으로서 입고서 나타난다.5. 이것은 악인에게 공포가 된다. 아침의 햇살보다 인류에게 더 유쾌한 것은 없다. 그것은 보기에 즐거울뿐더러 인생과 인생의 사업에 유용하며, 그 아침 햇살의 은총은 예외없이 미친다. 왜냐하면 "그것은 땅 끝까지 비취기" 때문이다(13절). 그래서 우리는 땅에 내리는 그 이득을 인하여 빛을 찬미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이 관찰하시는 것은 그것이 악을 행하는 자들에겐 얼마나 달갑지 않은 것이란 사실과 따라서 그들이 빛을 싫어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빛을 자기의 긍휼과 자비의 사자로 삼으실 뿐만 아니라, 공의의 사자로도 삼으신다. "그 빛은 악인을 땅에서 구축하도록" 고안되어 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하여 "빛은 땅 끝에 비취는 데," 이는 우리가 먼지와 좀 벌레를 떨어 버리기 위해 의복의 가장 자리를 붙잡는 것과 같다.
욥은 아침 광명이 죄인에게는 얼마나 공포가 되는가 하는 것을 관찰하였다(24:13 이하). 이는 광명이 그들의 행실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기에서 그 관찰을 도와 주면서 세상이 그 친절하심 때문에 자기에게 은혜를 입었는지 입지 않았는지 욥에게 물으신다. 이 세상의 크신 심판자께서는 범인을 탐색하는 그의 사자로서 아침 광명의 햇살을 보내신다. 이는 저들로 그 악의가 좌절당하여 수치당하게 할 뿐만 아니라, 온당한 벌을 받도록 하시고자(15절) 함이다. 그래서 그들의 빛을 그들에게 주지 않으시사,(즉 저들로 하여금 위로와 신뢰와 자유와 생명을 상실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사람을 대항하여 지켜든 그들의 "높은 팔이" 꺾이도록 하시며, 화를 끼치는 그들의 능력을 빼앗아 버리시도록 하고자 하셨다.
나는 여기에서 아침 광명에 대해 말하는 것이 하나의 은유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빛을 표현하도록 의도하고 있는지, 또 그 표상을 나타내려고 목적하는지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이것은 확실히 두 가지의 찬미가를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그 하나는 복음의 샛별이 돋는 바로 그 때에 사가랴가 그의 "베네딕투스"(Benedictus) 송축가에서 복음에 바친 찬미이다[눅 1:78,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를 찾아 오셨으니 이는 어두움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빛을 주기 위함이며 그들의 마음은 "진흙이 도장에게 하듯" 그 빛을 향해 돌아선다(고후 4:6)]. 또 다른 하나의 동정녀 마리아에 의한 "마그니피카트"(Magnificat) 송가인데(눅 1:51) 이 찬미는 하나님이 그의 복음 안에서 "자기의 팔로 힘을 보이시고 교만한자들을 흩으셨으며 권세 있는 자들을 끌어 내리셨음"이 이 빛에 의해 말미암았음을 나타내 준다. 이 빛에 의해 그는 악인들을 떨어뜨리려고 의도하시며, 악 그 자체를 지상에서 떨어내사 그 악의 높은 팔을 꺾어 버리시려고 계획하고 계신다.
Ⅱ. 바다의 근원에 대하여(16절). "네가 바다 근원에 들어 갔었느냐? 혹은 네가 깊음을 찾아서 걸어 다녔느냐? 네가 바다의 밑바닥에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모래 속에 묻혀 있는 보물들을 아느냐? 너는 바다 물결의 일어남과 그 근본이 무엇인지 설명하겠는가? 바다는 수증기를 끊임없이 토해내고 있다. 너는 끊임없이 공급되는 새 물결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아느냐? 강물은 쉬지 않고 바다로 흘러 들어 간다. 너는 그들이 어떻게 지상에 넘치지 않도록 끊임없이 방출되는지 아느냐? 너는 물결이 순환하는 해저의 은밀한 통로를 잘 아느냐?" 세계의 지배에 있어서 하나님의 길은 "바다에"도 있고 "큰 물에"도 있다고 일컬어지는데(시 77:19), 이 말씀은 바다가 우리에게서 감추어져 있으며, 우리가 파고 들 수가 없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Ⅲ. 사망의 문에 대하여. "사망의 문이 네게 나타났었느냐?"(17절) 죽음은 큰 비밀이다.
1. 우리는 우리와 딴 사람들이 언제, 어떻게 무슨 방법에 의하여 죽음에 처하게 될지 미리 알지 못한다. 무슨 도로를 통하여 우리가 돌아 오지 못할 길을 가야만 하는지 알지 못하며, 무슨 질병과 무슨 재난이 모든 생물에게 지정된 집으로 들어 가게 하는 문이 될지 모른다. "인간은 자기의 시간을 알지 못한다."2. 우리는 죽음이 무엇인지, 육체와 영혼간의 매듭이 어떻게 풀리는지 묘사할 수가 없으며, 또 "사람의 혼이" 어떻게 "위로 올라가는 지도" 알지 못하고(전 3:21), 노리스(Norris) 선생이 표현하는 대로 무엇이 될는지, 어떻게 사는지 알지도 못한다(또 그는 말한다). 영혼은 얼마나 두려운 호기심을 가지고 영원의 광막한 바다로 진수하며, 겪어 보지 못한 실연에 몸을 맡기는가! 우리는 죽음 저편에 있는 하늘 문이 우리에게 열릴 것을 확실히 믿자. 그리하면 비록 그것이 우리가 단 한 번 가야할 길일지라도 우리는 사망의 문들이 입을 벌리고 있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3. 우리는 개개의 영혼과 전혀 통신을 하지도 못하고 그들의 상태를 조금도 알 수 없다. 그것은 미지의, 발견되지 않는 지역이며, 그들은 그런 곳으로 옮겨져 버린 것이다. 우리는 그들로부터 소식을 듣지도 못하고, 그들에게 소식을 전하지도 못한다. 우리는 감각의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영적 세계에 관해 말한다는 것은 마치 맹인이 색깔에 대해 논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그리로 옮겨 가게 되면 우리가 얼마나 그릇 이해하고 있었는지 알고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Ⅳ. 땅의 넓이에 대하여(18절). "네가 그것을 알았느냐?" 이 땅의 넓이에 대한 지식은 그에게 아주 평탄한 것 같이 보이며, 그의 지식권 안에 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할 수만 있다면 명백히 말해 보라는 요구를 받고 있다. 우리는 지구 위에 우리의 거주지를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은 그 지구를 인간의 자손에게 주셨다. 그러나 여태껏 누가 그것을 측량해 본 적이 있으며, 몇 에이커가 되는지 설명할 자가 있었느냐? 그것은 우주에 비하면 점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런데 그것이 작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그 치수를 밝히는 데에 정확할 수가 없다.
욥은 세계 일주의 항해를 한 적도 없었으며, 그보다 앞서 산 자도 마찬가지였었다. 지구의 넓이를 알고 있는 자는 거의 없었고, 광대한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된 것은 수년 전의 일이었으며, 그 미주 대륙은 인간의 생각 밖에 감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온전하심은 지구보다 더 길이가 길며, 바다보다 넓이가 더 넓다. 그러므로 지구의 넓이를 깨달아 알지 못하던 우리로서 하나님의 이치의 깊이 속으로 잠수해 보겠다는 것은 억지이다.
Ⅴ. 광명과 암흑의 처소와 길에 대하여. 새벽에 대해서는 그가 이전에 말한 적이 있는데(12절), 그는 다시 그것에 대해 말하려고 돌아온다(19절). "광명의 처소는 어느 길로 가느냐? 또 다시(24절), 광명이 어느 길로 말미암아 뻗치는가?" 그는 다음과 같은 일들을 묘사하도록 요구받는다.
1. 광명과 암흑이 태초에 어떻게 조성되었느냐? 하나님이 태초에 맨 먼저 깊음이 표면 위에 흑암을 펼치시사 그 뒤에는 "빛이 있으라!"는 그 위력 있는 말씀으로 빛에게 명하시사, 흑암 중에서 나와 비취게 하셨을 때, 욥은 그 명령과 그 운영을 직접 본 목격자였는가? 빛과 어두움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그를 권세 있는 왕들이 단 하나의 세계에서 번갈아 가며 통치하며 어디에 자기의 조정을 분명히 베푸는지 그가 말할 수 있느냐? 비록 우리가 아침의 빛남이나 저녁의 그림자를 그토록 동경한다고는 하지만, 우리는 어디로 가야 그들을 데려올 수 있는지 알지 못하며, "그 집으로 가는 길"도 알 수 없다(20절). 그 때는 우리가 태어나지도 않았고, 우리가 난 날 수도 많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가시적으로 창조된 첫 피조물의 탄생을 묘사할 수가 없다(21절). 그것 가지고서 우리가 영원 전부터 계셨던 하나님의 의향에 말참견을 하려고 하거나, 그 집에 이르는 길을 찾아 내겠다고 나서거나, 그것들의 변경을 탄원해 보겠다고 나설 것인가? 하나님은 자기가 광명을 형성하시고 흑암을 창조하시는 일에서 영광을 얻으신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그들을 보는대로 받아들여야 되며, 그들이 오는 때는 그것들을 용납해야 하며, 그 어느 것과도 다투지 않아야 하고, 그 두 가지를 다 최선으로 이용해야 한다고 하면, 우리는 마찬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이 지으신 평안과 환난을 다 용납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사 45:7).2. 그들이 어떻게 그들의 순번을 상호불변하게 계속 교대해 나가는지? "아침 되는 것과 저녁 되는 것을 즐거워하도록 만드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시 65:8). 왜냐하면 새벽 빛이 나오며 동시에 밤의 어두움이 사라지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진행되는 것이지 우리의 명령에 의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이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24절). "광명이 어느 길로 말미암아 뻗치느냐?" 아침에는 빛이 흡사 동풍의 날개를 타고 나르듯 지평선 너머 공중의 산지 사방으로 순식간에 자신을 쏘아 대며, 너무나 신속하게, 너무도 강렬히 움직이면서 밤의 어두움을 흩어지게 하는데, 이것은 마치 동풍이 구름을 몰아내는 것과 같다. 우리는 새벽 날개에 관해서는 시편 139편 9절에서 읽는데, 빛은 새벽 날개를 타고 "바다의 끝까지 가며 지상에 부는 동풍과 같이 흩어진다."
광명이 돌아옴으로 말미암아 아침이 매일 우리에게 나아오며 어둠이 돌아옴으로 인하여 매일 밤이 우리를 지나쳐 가게 된다는 것은 놀라운 변화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침과 저녁을 기대하며, 따라서 그들은 우리에게 경악을 주거나 불안을 주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외면적인 형편의 변화를 같은 방법으로, 즉 아침과 저녁을 기다리듯, 생각한다면 우리는 가장 밝은 정오라고 해서 계속 낮이기를 기대해서도 아니 되겠고, 칠흙같이 어두운 야밤 중이라 해서 아침이 오리라는 것을 절망해서도 아니 될 것이다. 하나님은 한 가지 일을 세우셔서 다른 한 가지에 대립시키심으로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신다. 낮과 밤은 그 표본이다. 그래서 우리도 그래야만 한다(전 7:14).
Ⅵ. "눈과 우박의 창고에 관하여"(22, 23절). "네가 눈 곳간에 들어 갔었으며, 우박 창고를 보았으냐?" 구름 속에서 눈과 우박이 생산되고 있으며, 거기서 그들이 너무나 풍부히 오기 때문에 사람들은 눈이나 우박이 창고에 저축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반하여 실제로는 그들의 생산이 extempore-즉 갑자기 또 pro re nat-즉 필요에 따라 이루어진다. 눈이나 우박이 하나님께서 자기 대적이 자기 백성의 원수들인 자들과 대항하며, 자기 백성을 위해 싸우실 때에 자기 섭리의 목적에 소용이 되도록 안성맞춤으로 적시에 오는 때가 종종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들이 "전쟁의 격투의 날" 곧 환난 때를 대비하여 화약이나 무기와 탄약과 양식처럼 창고에 저장된 줄로 생각한다.
그 환난의 때 곧 전쟁의 날에는 하나님께서 온 세상 일반과 싸우시거나(하늘과 전쟁을 시작했던 사악한 세상을 물로 망하게 하기 위하여 하늘의 창들을 열고 이 곳간에서 물을 꺼내 왔던 대홍수 때와 같이), 혹은 가나안 사람들에게 대항하여 싸우시는 데 쓰려고 하나님이 큰 우박을 이 곳간에서 꺼내 왔던 때와 같이, 몇몇 특정 개인들이나 단체와 하나님은 투쟁하실 것이다(수 10:11). 이와 같이 싸움과 전쟁을 위해 준비하고 계시는 하나님과 투쟁을 벌이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며, 우리가 그와 화해하고 우리가 그의 사랑 안에서 우리 자신을 유지하면 그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이로운지를 살펴 보라. 하나님은 그가 원하시기만 한다면 뇌성 벽력이나 천사의 검으로 하는 것보다 못지 아니하게, 눈과 우박으로 효과적인 싸움을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선하신 통치(욥기 38:25-41)
지금까지 하나님이 욥에게 제기하신 질문은 욥으로 하여금 자기의 무지와 근시안을 깨닫게 하기에 온당한 것들이었다. 이제는 전과 마찬가지로 욥의 무능과 약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나아 오신다. 욥이 알고 있는 것은 단지 무에 가깝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계획을 비난해서는 아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가 행할 수 있는 것도 거의 아무 것도 없으므로 그는 섭리의 처사를 반대해서는 아니되었다.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참작하게 하고, 욥이 하나님께서 하신 그와 같은 일들을 해 낼 수 있는지 스스로 시험해 보도록 하며, 그가 스스로 하나님의 적수라고 생각하는지의 여부를 시험해 보도록 하여라.
Ⅰ. 하나님은 뇌성과 벽력 그리고 비와 서리를 마음대로 구사하지만, 욥은 그러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욥이 스스로를 하나님과 감히 비교하거나 그와 쟁패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날씨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을 아는 것보다 더 불확실한 것은 없다. 하물며 그 일기를 지정하는 일은 더 더구나 우리의 힘이 닿지 않는 일이다. 날씨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되는 것이지, 우리가 좋아 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즐겁게 하는 것이 무엇이나 다 우리를 기분 좋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1. 하나님은 얼마나 위대하신지 살펴 보자.(1) 하나님은 물에 대하여 지고의 주권을 가지고 계시며, 물이 범람하여 하나님의 억제로부터 벗어나는 듯 보일 때조차 그는 그들의 수로를 명하신다(25절).
그는 "물길을 나누셨으며" 소나기가 억수로 퍼부을 때조차 수로나 홈통을 따라 물을 보내듯 확실하게 그 비가 내릴 장소를 지정해 주신다. 이와 같이 군왕들의 마음도 "하나님의 수중에" 들어 있다고 한다. 하나님의 강이라고 할 수 있는 비와 같이 하나님은 통치자들의 마음도 자기가 원하고자 하시는 방향으로 돌리신다. 한 방울 한 방울이 다 지시받은 대로 내린다. 하나님은 "노아의 홍수가 다시는 땅을 덮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하셨다." 하나님은 자기가 약속하신 것을 이룰 능력이 있으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가 비를 물길 속에서 보내시는 까닭이다.
(2) 그는 번개와 천둥에 대해서도 지배권을 가지고 계신다. 그것들은 제멋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길로 간다. 번개와 천둥이 여기에 언급된 것은 그가 "비를 위해 번개를 예비하시기" 때문이다(시 135:7).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번개나 천둥을 무서워하지 않아야 한다. 이는 저들이 눈 먼 총탄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해치지 않으려고 하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갈 길을 명령하시기 때문이다.
(3) 비가 내릴 진로를 지정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은 "사람이 없는" 사막, 즉 광야라 해서 업신여기지 않으신다(26, 27절).
[1] 그곳 광야에는 생산을 돌보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 없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산업보다 더 먼 곳까지 미친다. 만약 인간이 열등동물이나 식물에 대해 가지고 있는 친절심보다 하나님이 하등 동물에게 베푸시는 자비심이 더 크지 못하다면, 인간보다 하등의 피조물은 죄다 결단이 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술이나 수고 없이도 땅을 비옥하게 만들 수 있으시다(창 2:5, 6). "땅을 경작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던 때에는 안개가 올라 가서 물을 뿌렸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없이는 땅으로 하여금 열매 맺게 하지 못한다. 소출을 많이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2] 광야에서 양식을 받는 자도 없고, 생산되는 열매를 은혜로이 취하는 자도 없다. 비록 하나님께서는 아주 독특한 은총으로써 사람을 찾아 주시고 중히 여기시는 분이시지만, 인간보다 못한 피조물을 간과하시지 않으시고 "여리디 여린 식물의 싹이 돋아나게 하시어서 사람에게 도움이 되게 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육체에게 식물이 되게 해 주신다." 들나귀까지라도 그들의 기갈을 면케 할 것이다(시 104:11).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먹이기에 충분한 것이 있으시기에 사람이 부리지도 아니하고 먹이지도 아니하는 그 피조물까지도 놀랍게 먹이신다.
(4) 어떤 의미에서 그는 "비의 아버지"이시다(28절). 비에게는 다른 아비가 없다. 하나님은 자기의 권능으로 비를 생산하신다. 그는 그것을 다스리시고 그것에게 명령하시며, 그가 기뻐하시는대로 그것을 사용하신다. 그는 자연의 하나님으로서 작은 이슬 방울까지도 땅 위에 내리시며, 은혜의 하나님으로서 그는 우리 위에 의로움의 비를 내리신다. 그는 이스라엘에게 친히 이슬처럼 되어 주신다(호 14:5, 6; 미 5:7 참조)
(5) 얼음과 서리는 물을 응결시키고 땅을 딱딱한 껍질로 싸는데, 이들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만들어진다(29절). 그것들은 아주 지천으로 흔한 사물인데, 이것은 그들의 신기함이나 생소함을 감소시킨다. 그것들이 순식간에 얼마나 큰 변화를 일으키며, 물이 어떻게, 돌이나 묘비석으로 덮듯이(물을 덮는 얼음은 너무나 두껍고 굳세다), 그 모습을 감추고 어떻게 깊음의 수면이 결빙되는지를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얼음이 누구의 태에서 나왔느냐? 창조된 능력이 어떻게 그토록 기이한 일을 만들어 낼 수 있었느냐?"고 반문해 볼 수 있다.
그것은 피조물의 능력에서 나온 게 아니라, 창조자 자신에게서 나온 작품이다. 서리와 눈은 하나님에게로부터 유래하였다. 따라서 그것들은 우리의 생각이나 명상을 그에게로 인도해 주는데, 이것은 그가 그와 같은 큰 일, 즉 발견해 내지 못하는 큰 일을 행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동절기의 기후라도 이렇게 잘 활용하도록 배운다면, 겨울 날씨의 불편함을 더욱 쉽게 참을 수가 있을 것이다.
2. 인간은 얼마나 연약한가! 그가 이와 같은 일들을 행할 수 있느냐? 욥이 할 수 있었느냐? 없었다(34, 35절).(1) 그는 그 자신이나 그의 친구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빗방울 하나에게라도 명령을 내릴 수 없다. "너는 네 목소리를 구름에, 즉 하늘의 물병인 구름에게 올려 풍부한 물이 네게 덮이게 하며, 네 밭이 건조하고 가물어 탈 때에 그 밭에 물을 줄 수 있겠느냐?" 만약 우리가 비를 바라서 기도하려고 우리의 목소리를 하나님께 올리면 우리는 비를 얻을 수 있다(슥 10:1). 그러나 만약 우리가 강우를 요구하기 위하여 우리의 목소리를 구름에 올린다면, 구름은 자기들이 우리의 지시대로 순순히 따르는 존재가 아니라고 즉각 대답할 것이며, 우리는 비를 얻지 못한 채 지날 것이다(렘 14:22). 하늘은 만약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려 하신다면 땅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호 2:21). 우리는 얼마나 불쌍하고 궁핍하며 의지하는 피조물인가 생각해 보아라. 우리는 비가 없인 살수가 없으며, 우리가 원할 때에라고 해서 비가 우리에게 오는 것도 아니다.
(2) 욥은 그가 자기의 대적들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는데 사용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해서 번갯불을 단 한 번이라도 동원 명령을 내릴 수는 없다(35절). "너는 번개를 보내어 그들이 네 심부름을 하러 가게 할 수 있으며, 네가 원하는 일을 실행하게 할 수가 있느냐? 그들이 네 부름을 듣고 와서 네게 말하기를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할 것인가?" 그러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의 사자들은 우리의 분노의 사자가 안 될 것이다. "사람의 분노가 하나님의 의로움을 움직이게 하지 못하는 터에" 어찌 그것들이 사람의 분노의 도구로 될 것인가(눅 9:55 참조).
Ⅱ. 하나님은 하늘의 별들을 자기의 지배하에 그리고 관할 하에 두고 계시나, 우리는 그 별들을 우리의 지휘하에 두지 못한다. 우리의 명상은 점점 더 높이 올라가서 구름 위로 더 멀리 상회하고 영광스러운 빛에까지 이른다. 하나님이 특별하게 언급하시는 것은 보다 낮은 궤도를 운행하는 유성 즉 혹성들이 아니라 더 높은 곳에 있는 항성들이다. 일반적으로 상상하기로는 그들이 그토록 무한히 먼 거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지구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곧 인간의 마음이나 섭리의 사건에 대해서가 아니라(인간의 운명은 저들 별에 의해 결정되는게 아니므로), 자연의 일상적인 운행에 대해서란 것이다. 그들은 징조와 사시, 일자와 연한을 위해 두셨다(창 1:14). 비록 항성들이 하늘에 자기 자리를 가지고 있는 물질에 불과한 데도 불구하고, 이 지상에 대한 그런 지배력을 가지고 있다면(33절), 그것들을 지으시고 우리도 지으신 분 곧 영원하신 뜻이신 그는 어떠하겠는가! 이제는 우리가 얼마나 약한지 살펴 보자.
1. 우리는 별들의 세력을 변경할 수가 없으며(31절), 봄의 즐거움을 만들어 내는데 수단이 되고 있는 별들의 영향력을 바꿀 수도 없다. "네가 묘성의 감미로운 세력들을 잡아 맬 수 있느냐?" 이 묘성은 일곱 개의 별로서, 아주 작은 범위 안에 들어 있으면서도(더 작은 것은 없을 정도로), 지구에 아주 온화한 영향력을 비추는 성좌이다. 우리는 겨울의 강직을 소개하여 주는 별들의 영향력을 변개시킬 수도 없다. "네가 삼성 즉 오리온의 띠를 헐겁게 풀겠느냐?" 이 오리온은 장려한 성좌로서 아주 걸출한 두각을 나타내고 있으며(더 걸출한 게 없다), 거칠고도 불쾌한 영향력을 준다. 이것을 우리는 조절할 수도 배격할 수도 없다. 여름과 겨울은 제각기 다 그 진로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가 원하시는 대로 그 길들을 변하게 하실 수 있으시다. 따라서 봄이라도 춥게 만드실 수도 있으시다. 즉 묘성의 상냥한 세력을 잡아 매실 수 있으시고, 겨울이라도 따뜻하게 만드실 수가 있으시다. 곧 삼성의 띠를 풀게 하실 수가 있으시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별들의 운동을 명하는 것은 우리의 권능에 있지 아니하며, 우리는 그들의 인도를 위임받지도 않았다.2. 하나님은 "별들을 그들의 이름대로 부르시는 분"이시다(시 147:4). 그는 그들이 속한 각 계절마다, 저들을 불러 내시고, 그들의 뜨는 시각과 지는 시간을 지정해 주신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다. 우리는 "남방 열두 궁성을 이끌어 낼" 수도 없으며 "북두성을 인도해 낼" 수도 없다(32절). 하나님은 별들을 전투에 데리고 나오실 수 있으며(별들이 시세라에게 대항하여 싸웠을 때 하나님이 행하셨듯이), 그들이 자기의 명령을 내린 공격에 참가하도록 인도해 내실 수가 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3. 우리는 별들의 통치에 관여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그 통치는 별들이 받고 있는 통치와 별들이 위임받은 통치를 동시에 다 의미하는데 이것은 그들이 지배하기도 하고 지배받기도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통치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알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하늘의 법도를 알지 못한다"(33절). 우리는 그들을 변경시킬 능력도 전혀 없으며, 그에 대한 설명을 할 수도 없다. 그들은 우리에게 숨겨진 비밀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과 그것들의 하유를 안다고 주장할 것인가? 가령 별들의 지구에 대한 지배를 놓고서 우리 더러 그것을 정하라고 맡기신다 하더라도, 우리는 곧 어쩔 줄 모르게 되고 말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세계의 지배를 이러저러하게 하라고 하나님께 가르칠 것인가?
Ⅲ. 하나님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지으신 자요, 주신 자며, 또 그것들의 아버지요 근원이시다(36절). 인간의 혼은 하늘의 별들 자체보다 더 고귀하고 훌륭한 존재이며, 더욱 밝게 빛이 난다. 인간에게 부여된 이성의 능력과 기능은 인간의 놀라운 사고 행위와 함께 자신을 복된 천사들과 어떤 연합을 이루게 한다. 그런데 이 빛은 빛의 아버지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면 어디서 오겠는가? 그 외에 "누가 인간의 내부에 지혜를 넣어 주셨으며, 마음 속에 총명을 넣어 주었느냐?"
1. 합리적 즉 이성적 영혼 그 자체와 그것의 기능은 자연의 하나님으로서의 그에게서 유래한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안에서 인간의 영을 형성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혼을 만들지도 않았고, 영혼이 어떻게 행동하며 그들이 육체에 어떻게 연합돼 있는지 묘사할 수도 없다. 영혼을 만드신 그 분만이 영혼을 아시며 그들을 어떻게 다루실지 그 방법을 알고 계신다. 그는 인간의 마음들을 어떤 것 안에 담아서 똑 같이 만드시나, 다른 것 안에 담으시면 같지 않게 만들어 내신다.2. 알맹이가 있고 증진하는 참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그는 은혜의 하나님으로서, 모든 선하고 온전하신 은사의 아버지로서, 참 지혜를 주신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의 모든 지혜를 받으면서도 우리가 하나님보다 지혜롭다고 자부할 것인가? 아니, 우리는 우리에게 총명을 주신 분이 정한 한계 이상으로, 우리 영역을 초월하여, 지혜롭다고 주장할 것인가?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것은 우리가 부여받았던 이성과 지혜로써 하나님을 섬기며 우리의 의무를 이행하는 일이었지, 우리가 우리의 지혜를 가지고 별들과 번개의 감독자로 자처하게 하실 의사는 전혀 없으셨다.
Ⅳ. 하나님은 구름을 자기 관할 하에, 자기 치리하심 안에 두셨으나,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37절). 누구라도 자기의 모든 지혜로써 "구름의 수효를 세어" 보겠다고 기도할 자가 있느냐? 혹은(이렇게 해독할 수도 있다) 어느 누가 "구름의 본성을 밝히 말하며 묘사할 수 있는냐?" 비록 구름이 우리의 대기권 안에 있어서 우리에게 그토록 근접해 있다고는 하나, 너무나도 먼 거리에 있는 별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 보다 더 많이 우리가 아는 것도 별로 없다. 그리고 구름이 비를 풍족하게 쏟아서 "티끌이" 딴딴한 진흙으로 "응고되게 하며, 흙덩이가 서로 꽉 들어 붙게" 할 때에 "하늘의 병을 멈추게 할 자가 누구이랴?"(38절) 그들을 제지하여 항시 비 오지는 않도록 할 자가 누구이겠는가? 그가 땅에 비를 충분히 내리시되, 과다하게는 내리지 않으시고, 땅을 부드럽게 할 정도로 하시며, 물에 잠기게 하지는 않으시사, 경작에 알맞도록, 파종에 적당할 만큼 내리시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은 인정받고 감사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하나님이 없이는 우리가 비 한방울 내리게 좌우할 수 없듯이, 청명한 날도 우리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그에 대한 우리의 의존은 이토록 필수불가결하며, 그렇게도 항구적이다.
Ⅴ. 하나님은 하등 동물을 위하여 식물을 제공해 주시는데 그들이 배불리 먹는 것은 그의 섭리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지 우리의 어떤 염려나 수고로 되는 것이 아니다. 다음 장은 전체가 다 동물에 대한 하나님의 능력과 인자하심의 본보기로 메워져 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은 38장의 마지막 세 절을 39장에 붙이기도 하는데, 이 세 구절은 다음과 같은 동물에게 준 식량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1. 사자를 위하여(39, 40절). "너는 구름이나 별들이 네게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주장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너보다 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는 지상에서 네가 가장 최고의 존재로 군림하고 있는 줄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따져 보자. 너는 사자를 위하여 먹이를 사냥하겠느냐? 너는 네가 한 때 소유하였던 가축을 가지고 스스로 자랑하느냐? 즉 너는 네 구유에서 먹이던 소와 나귀와 약대의 소유주로서 그 가축의 소유를 뽐내고 있다. 그러나 네가 사자와 젊은 사자들이 먹이를 기다리며 그 굴에 웅크리고 있을 때에 그 사자들의 부양을 맡겠다고 나서겠느냐? 아니할 것이다, 너는 그럴 필요가 없다. 그들은 네가 없더라도 그들 자신을 위해 변통해 나갈 것이다. 또 너는 그 일을 해낼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충족시켜 줄 것이 네게는 없기 때문이다. 또 너는 그 일을 감히 하지도 못한다. 네가 그들에게 먹이를 주러 다가가면 그것들은 네게 갑자기 달려들어 움켜 잡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일을 해낸다."하나님의 섭리가 만물을 충족시키는 것을 살펴라. 하나님의 섭리는 모든 생물의 식욕을 충족시켜 줄 수단을 가지고 계신다. 가장 게걸스럽게 먹어 대는 동물의 욕구까지도 만족시킬 수 있는 자본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의 섭리가 베푸시는 무한한 은혜를 보라. 생명을 주신 이상 그곳이 어디에서든지 생명을 유지하도록 생계도 주신다. 인간에게 사역할 수 없는 짐승에게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위험한 동물에게까지 그렇게 해 주신다. 또 하나님의 섭리가 행사하시는 절대 주권을 살펴 보라! 섭리는 어떤 동물이 다른 동물의 부양을 위해 피살되는 것까지도 허용하신다. 해를 끼치지 않는 양들이 "젊은 사자의 식욕을" 채워 주기 위해 갈기갈기 찢김을 당한다. 그래서 사자들의 잔인함을 벌하기 위하여 사자는 때때로 먹이가 없이 굶주림의 고통을 당하게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은 유익한 물건으로 핍절케 되는 일이 없다.
2. 어린 까마귀를 위하여(41절). 육식하는 맹수와 마찬가지로 맹금류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먹이를 얻는다. 하나님 외에 "누가 까마귀를 위하여 그의 먹이를 예비하느냐?" 사람은 먹이를 주지 않는다. 인간은 자기에게 유용하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는 동물만 보살펴 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손이 지은 모든 작품들을 다 보살펴 주신다. 가장 비천하고 가장 작은 것까지라도 귀중히 여기신다. 까마귀의 "어린 새끼들"은 특별히 궁핍하여 도움을 필요로 하므로 하나님이 그들에게 먹이를 주신다(시 147:9). 하나님께서 조류를 먹여 주시는 것, 특별히 새들을 먹이시는 것을 볼 때(마 6:26) 그것은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하나님을 신뢰하는 우리에게 격려가 된다.(1) 흔히 어린 까마귀가 고통스러워하게 하는 것들을 살펴 보라. "그들은 고기가 없어 방황한다." 어미 까마귀들은 새끼 까마귀들을 소홀히 하며, 다른 새들이 제 새끼에게 하듯 제 새끼들을 먹이지 않는다고들 한다. 딴 동물을 약탈하여 육식하는 동물은 보통 제 새끼에게는 잔인하며 자연 법칙에 어긋나게 대하는 것이 사실이다.
(2) 그런 궁지에서 까마귀 새끼들은 어떻게 행해야 하나 살펴 보라. 그것들은 "울부짖는다." 왜냐하면 까마귀는 시끄럽고 요란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는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그 울부짖음은 자연의 울음이기 때문에, 그것은 자연의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은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까마귀 새끼의 부르짖음에 대해서도 이렇게 은혜로운 해석을 내리시는 것을 보면,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기도할 때에 큰 힘을 얻게 된다.
(3)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행사하시는 일들을 보라. 이런 저런 모양으로 하나님은 그들에게 먹이를 공급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그것들은 성장하게 되고 성숙하게 된다. 까마귀 새끼조차 이렇게 돌보시는 분이라면 자기 백성이나 그들의 것들을 결단코 궁핍하게 하시지는 않으실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많은 동정 중 단 한가지 예에 불과하며, 우리의 하나님께서 날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밖에도, 얼마나 많은 선을 행하시는지 능히 짐작하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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