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욥기 3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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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1

엘리후의 연설(19)(욥기 37:1-5)

천둥과 번개는 보통 함께 일어 나는데 하나는 귀에, 또 하나는 눈에 감각을 준다. 그것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광과 존엄, 권능과 두려움에 대한 지각할 수 있는 증좌이다. 하나님은 이들을 이용하여 자기의 크심을 증거하지 아니한 채 스스로 방임하시지는 않으시는데, 이것은 그가 하늘로부터 내리는 비와 열매를 많이 내는 계절을 통하여 자기의 인자하심을 가장 우둔하고도 지각없는 자들에게까지 증거하지 않은 채 자신을 방임하지는 않으시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비록 거기에는 과학자들이 그 까닭을 설명하려고 노력하고 자연의 원인과 그 결과가 있다고는 하나, 주로 창조주께서 잠자고 있는 인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며 각성시켜서 그들 인간 위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려는 창조주의 의도가 있는 것같이 보여진다.

눈과 귀는 두 개의 배우는 감각기관이다. 그러므로 비록 그런 경우가 있음직 하기는 하나 실제로 태어나면서부터 장님에다가 귀머거리인 사람은 잘 발견되지 않는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신의 교훈은 귀를 통해 마음으로 전달되며, 눈을 통해서는 그의 작품인 자연에 의거하여 하나님의 교훈이 전달된다. 그러나 저 일상적인 장면이나 음향은 인간에게 적절한 감화를 주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번개불로써 그 인간들의 눈을 놀라게 하기 좋아하시며, 천둥으로써 인간의 귀를 놀라게 하시기를 즐거워하신다. 엘리후가 말하던 그 때에 천둥이 치고 번개가 빛났다고 하는 추측은 매우 그럴 듯하다. 왜냐하면 그가 그 현상을 현재로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께서 바야흐로 곧 말씀하려던 때였으므로(38:1), 그후 시내산 위에서도 그랬듯이 이들 천둥과 번개는 주의와 경외심을 끌기에 적당한 서언이었던 까닭이다.

1. 천둥과 번개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의 영광에 엘리후가 얼마나 영향을 받았으며, 그가 그것들을 가지고 욥을 감동 감화시키기를 얼마나 열망하였는가를 살펴 보자(1, 2절). "나로서는 내 마음이 그로 인하여 떨립니다. 내가 비록 자주 천둥소리를 듣고 번개를 흔히 보아왔을 망정 아직도 여전히 그것들은 내게 두려우며, 나의 온 마디가 떨도록 만들어서, 내 마음은 마치 자기 처소에서 떠날 듯이 고동을 칩니다"고 엘리후는 말한다. 천둥과 번개는 악인들에게 두려운 바가 되었다. 칼리굴라(Caligula) 황제는 천둥과 번개를 무서워하여 한 구석에 달려가 숨거나 침상 아래로 뛰어들기도 하였다. 우리는 아주 심하게 놀라는 자들을 "우레에 놀란 자"라고 말한다. 심지어 선량한 사람들조차 뇌성벽력은 무섭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그들을 더욱 무섭게 만드는 것은 낙뢰에 의한 상해이며, 많은 자들이 벼락으로 죽어갔던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도 벼락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 죄 많은 세상에게 대하여 무엇을 하실 수가 있었으며, 마지막 날에는 예비해 두신 불에 의해 그가 어떻게 "행하시리란" 것을 알려 주는 본보기이다. 우리의 심령도 엘리후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여 뇌성 벽력에 떨어야 한다(시 119:120). "하나님의 음성 곧 다 소리를 주의 깊게 들으라." 아마도 아직까지는 뇌성이 멀리서 울려서 잘 듣지 않으면 들리지 않았던 것 같다. 혹은 벽력 자체는 들릴 터이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포착하여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던 일이 무엇이든 간에 그 소리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아주 주의 깊게 마음을 열중하여 들을 필요는 있다 .뇌성은 "여호와의 소리"로 일컬어지는 데(시 29:3), 이것은 하나님이 그것을 가지고 인간의 자손에게 말씀하사,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또 그것은 세상을 처음으로 지으신 그 전능하신 말씀을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는 까닭이다. 그 말씀은 벽력이라고 일컬어진다. "당신의 뇌우 소리에 그들은 빨리 갔도다." 곧 하수들이 하나님께서 "한 곳으로 모이라"고 말씀하시자 서둘러 갔다(시 104:7). 하나님의 크심에 스스로 감화받은 자들은 다른 사람도 감화시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2. 그가 그들을 어떻게 묘사하는지 살펴 보자.

(1) 저희의 원래 모습. 제 이차적인 근거가 아니라 제 일차적인 근거를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뇌우를 지도하시며, 번개도 그의 것이다(3절). 그들의 생성과 운동은 우연히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향에서 생기며, 우리에게는 우발적이고 제어하지 못하는 것같이 보이지만 하나님의 섭리가 지시하고 지배하는 대로 따르는 것이다.

(2) 저희의 활동 영역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뇌성이 울리면 "온 하늘 아래" 펼쳐져서 원근에서 들린다. 그와 같이 번개도 또한 "땅 끝까지" 발사되어 나간다. 그들은 하늘 아래 한편에서 나와 가지고 저쪽 다른 편까지 비췬다(눅 17:24). 동일한 번개와 천둥이 비록 모든 장소를 포괄하여 미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일순간에 아주 먼 곳까지 이르고, 또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이들 경보가 이제나 저제나 찾아 가지 않을 장소는 없다.

(3) 저희의 순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번개가 먼저 그 길을 가고, "그 후에 음성을 발한다"(4절). 물기 있는 구름 속에서 만들어진 불빛과 음성은 실제로는 동시적이다. 그러나 빛의 운동은 소리의 속도보다 훨씬 빠르기 때문에 우리는 천둥소리를 듣기 전에 번개를 보게 된다. 이는 마치 우리가 대포 소리를 듣기 전에 멀리서 쏘는 대포의 불빛을 보는 것과 같다. 천둥은 여기서 "하나님의 위엄의 소리"라고 칭하는데, 이것은 그가 뇌성 벽력에 의하여 자기의 초월적인 권능과 위대하심을 선포하시기 때문이다. "주께서 그 소리를 발하시니 웅장한 소리로다"(시 68:33).

(4) 그 맹열함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는 번개 빛을 금치 아니하신다." 곧 그는 그것들을 막거나 억제할 필요가 없으시다. 이는 그것들이 겉잡을 수 없게 되어 버려서 규제하지 못할 정도로 그의 능력이 모자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들로 하여금 제 진로를 취해 가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즉 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가라" 하면 그들은 가고, "오라" 하면 그들은 온다. "이것을 하라"고 명하시면 그들은 그것을 행한다. "그는 보통 천둥 후에 따라 오는 비와 소나기를 멈추게 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이것에 대해서는 36:27, 29 에서 언급하였다). "그는 그의 음성이 들릴 때"에 땅 위에 소나기를 쏟으실 것이다. 뇌우는 쓸어 가는 비이며 그는 그들을 위해 "번개를 만드신다"(시 135:7).

(5) 그는 이 모든 일로부터 추리를 한다(5절). 하나님은 자기 목소리로 이처럼 기이하게 벽력을 울리시느냐? 그렇다면 우리는 그의 다른 일들도 위대하시며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크시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이 한 가지 사례를 보고서도 우리는 모든 것을 입증할 수 있다. 곧 그가 펴시는 섭리에는 우리의 반대나 대항이 도무지 문제가 안 될 만치 너무나 강성하시고 너무 크신 데가 있으며, 우리가 나무라거나 언쟁하기에는 너무나 높고 깊은 데가 있다는 것이다.

 

37:2 없음.

 

37:3 없음.

 

37:4 없음.

 

37:5 없음.

 

37:6

엘리후의 연설(20)(욥기 37:6-13)

비가 오든 오지 않든, 덥든지 춥든지 간에 기상의 변화와 극단적인 천기는 우리의 많은 일상 화제나 관찰의 대상이 된다. 그렇지만 이런 일들에 대해 생각하거나 말하면서도 엘리후와 같이 천기의 감독자이신 하나님, 곧 일기를 통하여 자기의 권능을 보여 주시고 자기 섭리의 목적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경외의 념을 품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우리는 천둥이나 번개 뿐만 아니라, 더욱 통상적으로 바뀌는 천기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깨달아야 한다. 이 이상 날씨는 그다지 무섭지도 아니하며, 그렇게 큰 소리를 내지도 않는다.

Ⅰ. 눈과 비 가운데서 깨달아야 한다(6절). 천둥과 번개는 보통 여름에 생기지만, 그는 여기서 겨울철 날씨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그는 눈을 명하여 땅에 내리라고 하신다." 그는 눈이 어디에 내릴 것이며, 거기에 얼마나 오랫동안 쌓여 있을지를 위임하고 명령하며 지정하신다.

그가 말씀하신 즉 그것은 그대로 시행된다. "빛이 있으라"고 하신 세계의 창조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일반 섭리가 하시는 일에 있어서도 "눈을 명하여 땅 위에 내리라"고 하신다. 말과 행동은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비록 각기 다른 별개의 두 사항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명령과 시행이 다른 두 가지 일이 아니다. 그가 말씀을 하시면 그가 원하는 대로 "작은 비"는 내리고 "큰 비"는 쏟아진다.

70인역 성서(LXX)는 "겨울 비"라고 번역하는데, 이것은 그들 지방에서는 겨울이 지나가면 비도 그치고 내리지 않는 까닭이다(아 2:11). 히브리어에 있어서 작은 비와 큰 비의 차이는 이렇다. 즉 전자는 "비"의 소나기라 불리우며, 후자는 "비들"의 소나기 곧 한꺼번에 내리는 많은 소나기로 칭한다. 그러나 모두가 다 "그의 힘의" 소나기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집 꼭대기까지 짓이기다가 그 앞의 모든 것을 쓸어가버리는 호우에서도 찾아 볼 수 있으나 그에 못지 않게 땅 속까지 스며드는 세우에서도 관찰되어진다.

밭에서 일하는 농부와 여로에 오른 길손은 다 같이 그들에게 반가운 비든 달갑지 않은 비든 어떤 비 속에서라도 하나님의 섭리를 인식할 수 있다. 일기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일은 죄악이며 어리석은 짓이다. 하나님이 눈과 비를 내리시는데 우리가 그것들이 오지 못하게 막을 수 있는가? 혹은 우리가 눈비에 대한 성을 낼 것인가? 우리 자신이나 우리 소유에 대한 하나님의 어떤 다른 처분이라도 우리가 왈가왈부한다는 것은 엉터리 없는 짓이다. 지독한 겨울 날씨가 가져오는 결과는 사람이나 짐승이 어쩔 수 없이 들어 앉게 만들며, 밖에 나가는 일이 불편하고 안전하지 못하게 만든다.

1. 사람들은 밭에서 하는 그들의 노동을 그만 두고 집으로 돌아와 집안에 틀어 박힌다(7절). "그가 각 사람의 손을 봉하신다." 서리와 눈 속에서 날씨가 지독하면 농부나 상인이나 여행자도 그들의 생업과 사업에 종사할 수가 없다. 쟁기는 방치되고, 선적하는 일도 중단되며, 아무 일도 할 수가 없고, 아무 것도 벌 수가 없다. 그래서 자기들의 일 손을 뗄 수밖에 없게 된 사람들은 "그의 일을 알 수 있게 되며," 그것을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그들은 그 일로 인하여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되며, 그들의 손들을 봉하는 일기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참작함으로써, 그의 다른 놀라우시고 크신 일들을 칭송하게끔 인도된다.

우리가 어떤 이유에서든 우리의 세상사에 종사하지 못하게 되고 손을 떼게 될 때는 어리석게도 한가한 놀음이나 유흥으로 소일하지 말고, 경건과 헌신하는 일에(우리 스스로 하나님이 하신 일을 잘 알도록 힘쓴다든지 그 하나님의 일들을 찬양하는데) 시간을 바쳐야 된다.

우리의 손이 봉해질 때 우리의 마음은 이처럼 열려야 하며, 어느 때든지 우리가 세상에서 할 일이 적어질수록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영혼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 우리가 집에 유폐되다 시피 틀어 박혀 있을 때는 그로 인하여 우리는 성서를 무릎 꿇고 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짐승 역시 그들의 숨는 곳으로 들어가서 그 굴에 머문다"(8절). 이것은 야수를 의미하는데 들짐승들은 야생으로 지내기 때문에 자기 힘으로 숨을 곳을 찾아야 하며, 그들은 본능으로 피난처를 찾아간다. 한편, 길든 짐승은 사람에게 유용하므로 우리도 지어 주고 사람의 보살핌에 의해 보호를 받는다(출 9:20). 나귀에게는 굴이 없으나 주인의 말구유가 있다. 나귀는 그리로 가면 안전하고 따뜻할 뿐만 아니라 배불리 먹을 수도 있다. 자연은 모든 피조물에게 폭풍우로부터 피할 수 있도록 가르쳐 준다. 그런데 사람에게만 홀로 방주를 제공해 주지 않을 것인가?

Ⅱ. 다른 방 위에서 불어 와서 다른 효과를 내는 바람을 통해 깨달아야 한다(9절). "은밀한 처소에서 회오리 바람이 나온다."(이렇게 해독할 수도 있다) 이 선풍은 빙빙 돌기 때문에 어느 지점에서 그것이 불어온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바람은 용어 그대로의 의미대로 "밀실" 즉 "은밀한 방"에서 나온다. 나는 이 "남방"이란 말은 그다지 잘 해석할 마음이 내키지 않는데, 이는 엘리후가 17절에서 남방에서 나오는 바람은 회오리 바람이기는커녕 따뜻하고 고요하게 부는 바람이라고 말하는 때문이다. 그러나 이 때에는 엘리후가 아마 회오리바람 구름이 남방에서 나와서 점점 자기들에게 접근해 오는 것은 보았던 모양이며, 그 속에서 여호와가 잠시 후 말씀하시기 때문이다(욥 38:1). 혹은 만약 소나기를 몰고 오는 광풍이 남방에서 나온다면 한냉하고 건조한 질풍은 북방에서 이르러 수증기를 흩어지게 하며, 그 공기를 맑게 할 것이다.

Ⅲ. 서리 속에서 까달아야 한다(10절. 역주, 우리 성경과 영어 성경의 번역이 다르다). 서리의 원인을 살펴 보라. "그것은 하나님의 호흡에 의해 생긴다." 즉 그의 권능의 말씀과 그의 의지와 명령에 의해 생긴다. 혹은 다른 자들이 이해하듯 우레가 하나님의 목소리이듯 하나님의 호흡인 바람에 의해 생긴다. 그것은 북방에서 나오는 바람 곧 찬, 얼게 하는 바람으로 인하여 생겨난다. 그 결과를 보자. "물의 넓이가 좁아진다." 즉 퍼져서 자유로이 마음대로 흐르던 하수가 결정체의 착꼬에 묶여서 응결되고, 마비되고 구속되 버린다. 이것은 진귀하다면 진귀하고 기적과 다를 바 없는 하나님의 능력의 본보기이다.

Ⅳ. 구름 속에서 깨달아야 한다. 구름은 엘리후가 이미 언급하였지만 물이 포함되는 모든 대기 현상이 잉태되는 모체이다(36:28). 그가 말하는 구름은 세 가지 종류의 구름이다.

1. 강우를 회태하고 있는 빽빽하고 시커멓고 짙은 구름이 있다. 그는 습기를 가진 이 구름들을 "피곤하게 하신다"(11절). 즉 구름은 스스로 소모하며, 그들이 용해되고 분해되어 버리는 비로 인하여 고갈되 버린다. 다 쓰고 없어져서 더 이상 쏟을 것이 없을 때까지 물을 뿌린다. 인간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피조물들을, 심지어 우리 위에 있는 것들까지도 얼마나 고통스럽게 하는지 살펴 보라. 구름은 그들이 다 할 때까지 땅에 물을 준다. 저 구름들은 우리의 이익을 위하여 스스로를 소모시키고 소비되어 버리는데, 이것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고 정죄한다. 왜냐하면 선을 행하는 일이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각기 자기 입장에서 행하는 극히 조그마한 선을 생각해 볼 때, 구름은 우리를 수치스럽게 만들고 정죄하기 때문이다. "물을 주는 자는 그 자신도 또한 물을 공급받을 것이다."

2. 밝고 옅으면서 물 없는 구름이 있다. "그는 이 구름을 흩어 버린다." 그들은 저절로 흩어져 버린다. 그러나 비로 응결되어 내리지 않으며, 그들이 어떻게 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하늘이 붉게 물든 저녁에는 밝은 구름이 흩어진다. 그 밝은 구름은 날이 본격적으로 맑겠다는 것을 증명한다(마 16:2).

3. 날아 다니는 구름이 있다. 이 구름은 빽빽한 구름처럼 줄기찬 비로 용해되지도 않고, 바람의 날개에 실려 이곳에서 저곳으로 떠다니며 가는 곳마다 소나기를 내린다. 이 구름은 그의 뜻을 따라 "두루 돌아 다닌다"고 일컬어진다(12절). 일반 민중은 비를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것이 천체라고 말들 하는데 이것을 그릇된 미신만치 나쁜 생각이다. 비는 하나님의 의향에 의해 인도되며 규제되고, 하나님의 뜻은 가장 우연한 일처럼 보이거나 가장 미세한 것 같은 사물에 이르기까지 확대 적용된다. "그들은 그가 명하는 것은 무엇이든 행한다." 폭풍이나 그 폭풍에서 밀려 다니는 구름도 그의 말씀을 성취시킨다. 이런 수단으로 그는 "한 도시에 비를 내리게도 하고 다른 도시에는 비가 내리지 않도록 하신다"(암 4:7, 8). 이와 같이 그의 뜻은 "지구 위의 세계상에서" 이루어진다. 즉 인간의 자녀 중에서 그의 뜻이 행해지고, 하나님은 이 모든 일 가운데에서 그들을 주목하시며, 그들에 대해 일컬어지는 바로는 그가 "그들을 온 땅의 지면에 거하도록 하셨다"는 것이다(행 17:26). 도덕적 행위를 할 능력이 없는 하등 피조물은 상급과 징벌을 받을 능력도 없다. 그러나 인간의 자녀에게는 하나님께서 비가 내리도록 하시는데, 이것은 그의 토지를 징계하시기 위함이거나, 그것에서 긍휼을 베푸시기 위함에서 이다(13절).

(1) 비는 때때로 심판으로 변한다. 그것은 죄 많은 땅에 대한 채찍이다. 비가 한 때에는 전세계의 멸망을 위해 사용되었듯이, 이제는 일부 지역의 교정과 징벌을 위해 동원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이 비를 구사하여 파종과 수확을 방해하며, 하수를 범람시키기도 하고 결실을 손상시키신다. 어떤 사람은 우리 나라가 강우의 부족보다 많은 강우에 의한 피해를 더 많이 입어 왔다고 말하기도 한다.

(2) 다른 때에는 비가 축복이다. 이 비는 "그의 토지를 위한 것"이다. 곧 이 토지가 비옥하도록 해 준다. 더욱이 그는 그 토지를 기름지게 하고, 더욱 결실을 많이 내도록 하기 위하여 꼭 필요한 것을 "긍휼히" 제공해 주신다. 꼭 같은 사물이 주어지는 분량에 따라 큰 심판될 수 있고 큰 긍흉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얼마나 필수적으로 의존하고 있는지 살펴 보라. 하나님이 없다면 우리는 소나기도 밝은 빛도 가질 수 없다.

 

37:7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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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후의 연설(21)(욥기 37:14-20)

엘리후는 욥에게 친근히 얘기하면서, 자기가 지금까지 말한 것을 욥이 스스로 자문해 보도록 열망하고 있다. 그는 욥이 이 이야기를 경청해 줄 것과 잠시 동안만 가만히 생각해 볼 것을 간청한다(14절).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기묘하신 일을 궁구하라." 우리가 듣는 일도 만약 우리가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다면 우리에게 유익되지 아니하기가 쉬우며, 만일 우리가 가만히 서서 그 일을 침착하게 생각해 보지 않는다면 곰곰이 생각하기조차 어렵다.

하나님의 일은 기묘하기에 우리의 고찰을 필요로 하며, 우리가 궁리해 볼 가치가 있다. 그 일들에 대한 온당한 성찰은 우리를 그의 모든 섭리와 환해시키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엘리후는 욥의 겸손한 자기 비하를 위해 다음의 사실을 욥에게 제시한다.

Ⅰ. 욥은 자연의 원인에 대한 통찰을 하지 못했고, 그 근원도 헤아려 보지 못하였으며, 그 결과도 예견하지도 못하였다(15-17절). "너는 이것을 아느냐? 너는 지혜가 온전하신 자의 기묘한 일을 아느냐?"

여기서 우리가 얻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지식의 완전성, 그가 지혜에 있어서 온전하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스런 완전성 중의 하나이다. 그는 전지하시다. 그의 지식은 직관적이시다. 그는 눈으로 "보시며" 풍문으로 알지는 않으신다. 그의 지혜는 소상하며 전체적이다. 그는 사물을 사실대로 알고 계시며, 외관으로 알고 계시는 게 아니다. 철저하게 속속들이 아시고, 부분적으로 조금 알고 계신 것이 아니다. 그의 지식에는 먼 것은 하나도 없고, 모두가 가까운 것 뿐이다. 미래적인 것은 없으며, 전부가 현재적이다. 숨기워진 것은 없고 전부가 개방적인 지식이다.

우리는 그의 모든 기묘한 일들 가운데에서 이 점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되며, 그것들이 자기가 하는 행위를 알고 있는 분의 작품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의미를 알지 못하는 그 기묘한 일들 안에 있는 우리를 만족시키기에 충분하다.

2. 우리 지식의 불완전함. 가장 위대한 철학자라도 자연의 능력과 일에 대해 어두운 점이 많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역설적인 존재이며, 우리에 대한,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이 불가사의한 신비이다. 신체들의 중력과 물질의 부분들의 응집은 확실한 현상이나, 설명할 수가 없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무지를 깨달을 수 있게 만들어진 것은 우리에게 유익하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의 무지를 고백하였는데, 이것을 고백하지 않는 무리들은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는 셈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로부터 우리가 하나님의 정책에 대하여 얼마나 무능한 재판관인가 하는 사실을 추리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하물며 하나님의 공학에 대해서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 얼마나 극소수이겠는가!

(1) 우리는 하나님께서 구름에 대하여 내리신 명령이 무엇인지 또 무슨 명령을 내리실지 알지 못한다(15절). 우리는 만사가 결정에 의해서 또 계획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확신한다. 그러나 무엇이 결정되었으며, 무엇이 계획되었고, 언제 그 계획이 작성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하나님은 종종 "자기 구름의 빛"이 무지개 속에서(이렇게 해독하는 자도 있다), 번개 속에서, "번쩍번쩍 빛나게 하신다." 그러나 그가 언제 그렇게 하실 지 우리가 미리 볼 수 있느냐? 예언할 수 있느냐? 만약 우리가 일기의 변화를 통속적 관찰로 수 시간 전에 미리 알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청우계로 기상 관측을 시작하는 때이기는 하지만, 이런 것들이 기상 변화를 통하여 하나님의 목적하시는 의도를 도대체 얼마나 나타내 줄 것인가!



(2)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은 구름이 어떻게 공중에서 균형을 잡는가 하는 것, 즉 "평평하게 뜨는가" 하는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기묘한 일들 중 하나이다.

그들은 너무도 균형을 잘 취하고 잘 펼쳐져 있어서, 결코 우리에게서 태양의 은혜를 빼앗아가지도 아니하며(흐린 낮조차도 낮은 낮이다), 평형을 유지하여 그들은 갑자기 떨어지는 법도 없고, 돌연 물 기둥이나 큰 비로 쏟아져 내리지도 않는다.

무지개는 구름이 이 세상을 물로 멸망시키지 못하도록 그들을 균형잡고자 하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암시이다. 그들은 평평하게 떠있어서 저희 비를 지면에 무사공평하게 분배하고, 따라서 이제나 저제나 모든 곳은 제 몫을 받는다.



(3) 겨울이 지나가면 어떻게 아늑한 변화가 생기는지 우리는 모른다(17절).

[1] 춥다가 어떻게 기후가 따뜻해지는가? 우리는 우리 의복이 어떻게 따뜻해지는지 알고 있다. 즉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가 따뜻해지는 이유와 같이 우리가 옷을 입으면 어떻게 따뜻해 지는지 알고 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없다면 우리가 옷을 입더라도 따뜻하지가 않다(학 1:6). 그러나 하나님이 일기를 명하신 즉 극한의 날씨에는 우리를 따뜻하게 보호해 주는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옷도 우리에게 따뜻하게 된다.



[2] 폭풍우에 어떻게 평온이 오는지? 봄이 오면 "그가 남풍으로 땅을 고요하게 하신다." 그가 살을 에이고 거세게 불어 제치는 북풍을 가지고 있듯이, 그것을 녹여 주고 평온하게 해 주는 남풍도 가지고 계신다. 성령은 이 양자에 다 비유가 되는데 이는 그가 확신시키기도 하시며, 위로해 주기도 하시는 까닭이다(아 4:16).

Ⅱ. 욥은 태초의 천지 창조에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18절). "너는 그와 함께 하여 궁창을 펴내었느냐?" "당신은 그가 없이도 하늘을 펼쳐내었다고 자부할 수가 없습니다. 또 그와 연합하여 그것을 펼쳤다고 주장할 수도 또한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고안해 내는 일에 있어서나 활동하는 데 있어서나 어느 누구의 조력을 조금도 필요로 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날까지 존재하여 우리가 보는 하늘 즉 가시적 궁창의 무한한 공간을 창조하신 것은(창 1:6-8) 신적 권능의 영화로우신 본보기이다. 우리가 생각해 볼 점은 다음과 같다.

1. 비록 궁창이 유동적이라고는 하나 그런데도 그것은 견고하다. 그것은 "강하며" 그 이름을 그것의 안정성에서부터 가져온다. 그것은 여전히 과거의 하늘 그대로이며, 조금도 쇠하지 않으며, 차용계약 기간이 만료되어 소멸될 때까지 하늘의 법칙은 변경되지도 않을 것이다.

2. 비록 궁창이 광대하다고는 하나 그것은 밝고 청명하여 아주 진귀하게도 정묘하다. 그것을 "주조한 겨울"과 같이 매끄럽고 광택이 나며 극미한 흠이나 갈라진 틈도 없다. 거울에서처럼 하늘에서도 우리는 "신의 영광을 바라 볼 수 있으며 그 손으로 하신 일"의 지혜를 볼 수 있다(시 19:1).

우리가 위로 하늘을 쳐다볼 때 기억해야 할 것은 그것이 거울이나 면경이로되, 우리 자신의 얼굴을 비춰 주는 것이 아니라, 천성 세계의 순정과 위엄과 밝음 및 그곳의 영화스러운 주민들을 희미하게 보여 주는 거울이라는 사실이다.

Ⅲ. 그도 그들도 다 실체의 공적에 준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말 할 수는 없다(19, 20절).

1. 그는 욥이 만일 그 임무를 맡을 엄두라도 낸다면 자기들의 감독자가 되라고 요구하며 나선다. 그는 이 말을 풍자적으로 하고 있다. "당신이 만일 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그에게 무엇을 말할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오(19절). 당신은 하나님과 논쟁을 해 볼 생각이 있고, 우리가 당신을 위하여 하나님과 다투어 주도록 원하였오. 그렇다면 당신은 우리가 이야기할 바를 가르쳐 주시오. 당신은 우리보다 이 심연을 더 깊이 들여다 볼 수 있습니까? 만일 당신이 할 수만 있다면 당신이 발견한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며 우리에게 교훈을 공급해 주시오."

2. 그는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일에 있어서나 하나님에 관하여 말하는 일에 있어서나 다 자기의 부족을 자인하고 있다. "우리는 암흑의 연고로 우리말을 진술할 수 없다." 가장 최선의 인간이라도 신적 본성의 영화로운 완전성이나 신적 통치의 경영에 대하여는 어두운 점이 많다. 은혜를 인하여 하나님께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자들도 알려져야 하는 것과 알려질 것에 비교하면 아는 게 거의 없으며, 아니 전혀 없으며, 온전한 것이 와서 수건을 벗겨질 때에 비교하면 더욱 그러하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말한다고 할 때에도 우리가 하는 말은 당황 중에 한 뒤죽박죽이 다 된 말이며, 아주 불확실한 말이고, 우리는 이윽고 어찌할 바를 몰라하다가 좌초하고야 만다. 이는 재료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말의 부족 때문이다.

우리가 실언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항상 경외심과 두려움으로 말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De Deo etiam Vera dicere periculosum est-즉 하나님께 대하여 진실된 것을 주장하는 동안에도 우리는 위험한 부담을 안고 있다.) 우리는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가지고 말을 끝맺지 아니하면 안 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아무리 잘 얘기한다고 하더라도 더 잘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엘리후 자신도 자기딴에는 하나님의 이익을 위하여 잘 말하였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보수를 바라거나 하나님이 그 일로 인해서 자기에게 빚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거나, 그가 하나님께 조언을 드리기에 적합한 자격을 가진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다.



(1) 그는 자기가 말해 왔던 것들이 부끄럽기조차 하였다. 그가 부끄러이 여긴 것은 자기 진술의 근거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근거를 처리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였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어찌 그에게 고할 수 있으랴?" 혹은 "내가 말하는 것이 그에게 전해질 것인가?"(20절) "내 말이 그의 주목을 받을 가치가 있는 말로, 기특한 봉사의 일로서 그에게 보고될 것인가? 단연코 안 된다. 결코 입에 올리지도 말라." 그의 실제의 진상이 자기가 진술을 떠맡음으로 말미암아 아름다운 얼굴이 형편없는 화가로 인해 망쳐지듯 손상을 입지나 않았는지 전전긍긍해 한다. 또 그는 자기의 연출이 감사하다는 치사를 받기는커녕 도리어 사죄를 구해야 할 것이라고 걱정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하였을 때에도, 우리는 자신이 무익한 종이었음과 자랑할 것이 조금도 없다고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그는 더 이상 말하기를 꺼려하고 있다. "만일 사람이 말하면," 만약 그가 하나님의 변호를 맡겠다고 나선다면, 하물며 그가 하나님을 고소하겠다고 제안한다면 "정녕코 그는 삼키울 것이다." 만약 그가 터무니없는 말을 한다면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곧 그를 불사를 것이다. 만약 아주 잘 얘기한다고 해도 그는 곧 신비지경 속에서 자신을 잃어 버리고 말며, 하나님의 광채에 의하여 압도되고 말 것이다. 그는 경악으로 인하여 눈이 보이지 않으며 귀가 들리지 않을 것이다.

 

37:15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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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17 없음.

 

37:18 없음.

 

37:19 없음.

 

37:20 없음.

 

37:21

엘리후의 연설(22)(욥기 37:21-24)

엘리후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거룩한 경외감을 품고서 그것에 대한 몇몇 짤막하고도 위대한 말로써 자기의 이야기를 끝맺는다. 그 자신이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에 그는 성스런 경외심을 가지고 남에게도 인상깊이 하나님의 영광을 심어 주기를 원하였다. 그는 간결하게 서둘러서 말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이제 곧 그 일을 자기 수중에 직접 장악하시려고 한다는 사실을 그가 감지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1. "짙은 흑암 중에 거하시며, 그것으로 자기 장막을 삼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이(대하 6:1; 시 18:11) "구름과 캄캄함"에 둘러쌓이신 채(시 97:2, 9) 흡사 심판을 위해 자기 보좌를 준비하러 오시는 것과 같이 그 두려운 병거를 타시고 그들을 향해 나아 오시는 것을 엘리후는 관찰한다. 그는 그 가슴에 회오리 바람을 품고 남방으로부터 나오는 구름을 보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너무나 짙고 검어진 채 그들의 머리 위로 몰려 와서 그들 중 아무도 조금 전까지도 "구름 중에 있던 밝은 빛을 볼 수"가 없었다. 태양 빛도 이제는 어두워졌다. 이것은 그에게 흑암을 상기시켜 주었고, 이로 인하여 그는 말할 수가 없었으며(19절), 이 캄캄함은 그로 하여금 계속 말하는 게 두렵도록 만들었다(20절). 이와 같이 제자들도 "구름 속에 들어 갔을 때 두려워하였다"(눅 9:34).

그러나 그는 북쪽을 바라 보았다. 그리고 그 쪽은 그것이 밝게 보였기에 그는 그 구름들이 대홍수를 일으키려고 모이는 것은 아니라는 희망을 가진다. 그들은 덮여 있기는 하나 빽둘러 쌓여있지는 않았다. 그는 "바람이 지나가서 그들을 깨끗이 쓸어 줄 것"으로 기대하는데, 그 바람이 하나님의 은총이 다시 돌아옴을 상징하여, 노아의 홍수의 물결로부터 땅이 들어나도록 지면 위로 불었던 바람과 같은 그런 바람이었다(창 7:1). 그리고 나면 "맑은 날씨가 북방에서 나올 것이며" 만사가 괜찮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항상 찡그리지는 아니하실 것이며 영원히 다투지는 아니하실 것이다.

2. 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려고 하기 때문에 서둘러 결론을 맺는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모든 것의 총결산으로서 소수의 말들로 많은 것을 전달하고자 하는데, 만약 잘만 고려한다면 자기가 지금껏 박아 오던 쐐기를 완전히 때려 넣어 확정을 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바에 대한 길을 닦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관찰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1) "하나님께는 두려운 위엄이 있다." 그는 영광의 하나님이시며, 자기의 모든 시종들에게 경외하는 생각을 줄 수밖에 없고 자기의 모든 대적들 위에 두려운 생각을 넣을 수밖에 없는 그런 초월적이고도 온전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는 두려운 찬양이 있다"(이렇게 해독하는 이도 있다). 왜냐하면 그는 찬송하기에도 두려운 분이시기 때문이다(출 15:11).

(2) 우리가 "전능자에 대하여 언급"할 때에는 "우리가 그를 발견해 낼 수 없다"는 것을 먼저 자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의 유한한 오성은 그의 무한하신 온전성을 포착하지 못한다(23절). 우리가 계란껍질 속에 바다를 담아 넣을 수 있느냐? 우리는 그가 자기의 섭리 가운데에서 취하시는 발자국을 추적할 수 없다. 그의 길은 바다 가운데 있다.

(3) "그는 권능이 지극히 빼어나신다." 하늘에서나 땅에서 그가 하고 싶은 일이면 무엇이든 그가 행하실 수가 있다는 것은 그의 권능이 빼어남이다. 그의 능력의 우주적인 범위와 그것의 항거할 수 없는 힘은 그 권능이 지극히 크심이다. 어떤 피조물도 그와 같이 그토록 강한 팔, 긴 팔을 가지지 못했다.

(4) 그는 지혜나 공의에 있어서도 못지 아니하게 빼어나신다. 즉 "심판과 풍부한 공의에 있어서" 지극히 크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의 권능이 지극히 크다고는 도무지 할 수 없다. 무슨 일이든 다 행하실 수 있는 그가 무슨 일이든 다 가장 선하게 행하시리라는 것은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는 그가 무한히 지혜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또 그가 어떤 일에 있어서도 그릇 행하지 않을 것도 확신할 수가 있다. 이는 그가 무한히 공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가 죄인에게 심판을 행하실 때에는 그 행사에는 무한한 공의가 있어서 그는 죄인들이 마땅히 받을 벌 이상은 절대로 내리시지 않는다.



(5) "그는 벌을 내리시고자 원하지 않으신다. 그는 벌을 내리지 않으실 것이다." 즉 그는 즐거워하는 가운데 벌을 내리지는 않으신다. 인간의 자녀에게 괴로움을 주는 일이 하나님께 즐거움이 되지 못하는 터에, 자기 자신의 자녀에게 벌을 내리는 일은 말해 무엇하랴! 그는 당연한 이유가 있을 때와 꼭 해야 할 필요가 있는 때를 제외하고는 절대로 벌 주지 아니하신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괴로움의 과중한 짐을 지우지 않으시고, 우리의 골격을 참작해 주신다.

이 구절을 이렇게 해독하는 이들도 있다. "전능자는 우리가 찾아 낼 수 없으신 분이며, 그의 권능이 크시나 심판으로 괴롭히지 않으시고, 그에게는 풍부한 공의가 있다." 그는 우리의 그릇된 행동이 무엇인지를 주목하는 일에 혈안이 된 분은 아니시다.



(6) 그는 자기들의 생각에 지혜롭다 하는 자들의 비난은 귀하게 여기지 않으신다. "그는 그들을 돌아보지 아니하신다"(24절). 그는 그들에게 친절히 보살펴 주고자 하시는 그의 뜻을 변경시키지 않을 것이며, 그에게 지시하려고 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원하는대로 그가 행하시도록 강요하는 일에 성공하지 못하고, 그를 이기지도 못할 것이다. 그는 겸손한 자의 기도는 돌아보시나 간교한 자의 책략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신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인간보다 지혜롭다(고전 1:25).

(7) 이 모든 사실로부터 하나님은 위대하시므로 그는 크게 경외해야 할 분이라는 것을 추론해 내기는 어렵지 않다. 아니, 그는 은혜로우셔서 괴로움을 베풀지 않고자 하시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경외함이 마땅하다." "사유하심이 주께 있으심은 주를 경외하도록 하기 위함이다"(시 130:4).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만인의 의무요 이득이다. 조만간에 사람들은 그를 경외하게 될 것이다. 여호와와 그의 선하심을 경외하려고 하지 않는 자들은 그의 물병에서 진노하심의 물이 쏟아질 때는 영원히 벌벌 떨게 될 것이다.

 

37:22 없음.

 

37:23 없음.

 

37:24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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