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욥기 3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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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1

엘리후의 연설(15)(욥기 36:1-4)

한 번 더 엘리후는 청중의 인내를 구하며, 특별히 욥이 참고 들어줄 것을 부탁한다. 이는 자기가 해야 할 말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그 말들을 속에 오래 담아 놓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이렇게 읽는다) "내 주변에 잠깐 더 서 있으라"(2절). "잠시만 더 여러분의 주의를 기울여 주십시오. 그리하면 나는 이번 한번만 말하겠고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간명하게 또 아주 효과 있게 말하겠습니다." 이런 결과를 얻기 위해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1. 그는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으며, 고귀한 동시에 아주 효과가 많은 주제를 가지고 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오히려 할 말이 있음이라." 그는 하나님을 위한 변호사로서 말했던 것이고, 따라서 그가 법정이 경청해 줄 것을 기대함은 정당하다. 어떤 자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말하는 것처럼 가장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위해 말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진지하게 나서서 하나님의 명예와 진리를 위하여 또 그의 길과 그의 백성을 위하여 말하는 사람들은 어떤 다른 사람의 가르침이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며("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로 같은 시각에 그들이 무엇을 말해야 할지를 그들에게 주실 것이다"), 저희의 명분과 상급을 잃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주제가 다하여 막히지나 않을까 겁낼 필요도 없다. 이제껏 그토록 많은 것을 말했던 자라 하더라도 하나님을 위하여 얘기할 것은 아직 얼마든지 더 찾을 수가 있다.

2. 그가 제시하는 바의 일은 범상한 것이 아니며, 세속적 관찰의 상도에서 벗어난 것이다. "내가 먼데서 지식을 취할 것이다"(3절). 즉 "우리가 의지하는 것은 우리의 제일 원리하며, 우리가 어떤 목적을 충당하기 위하여 사용할 수 있는 최고 개념에 우리는 의존한다." 하나님께 대한 이런 지식을 찾기 위해 멀리 가서 그 지식을 캐고 또 그것을 얻기 위해 여행에 나서는 일은 가치가 있는 일이다. 그것은 우리의 노고에 대한 보상을 해 줄 것이며, 아무리 멀리서 취해 온다 하더라도 그것은 아직 비싼 대가를 치렀다고 할 수 없다.

3. 그의 의도가 정직하였다. 그가 하고자 도모한 모든 것은 자기의 조물주께 의로움을 돌리는 것이었고, 하나님은 그의 모든 행사에 있어서 의로우시다는 이 진리를 주장하고 분명히 하는 일이었다. 하나님께 대하여 말하고 그를 대변하는 일에 있어서 그가 우리의 조물주이심을 기억하는 일은 좋은 것이며, 그를 그렇게 부르는 일은 유익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를 기꺼이 조물주라고 부르며, 그의 나라의 이익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봉사를 아끼지 아니하는 것은 선한 일이다. 그가 만약 우리의 조물주이시라면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그로부터 온 것이고, 우리는 우리의 모든 소유를 들어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며, 우리는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

4. 그의 경영하는 바는 아주 공정하고 공평하였다(4절). "내 말이 거짓이 아닙니다. 내 말들은 대상 그 자체에 불일치하는 것도 아니며, 내 자신의 생각이나 이해에 어긋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변호하는 것은 진리이며, 더욱이 나는 진리를 위하여 가능한 모든 성실함과 명료함으로 옹호하고 있습니다." 그는 간명하고도 확고부동한 논증을 구사하리라는 것이며, 소위 학자들이 하듯 미묘하고도 모호한 용법을 쓰지는 않으리란 것이다. "지식에 있어 온전하고 똑바른 자가 이제 당신과 따지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그의 말을 공정하게 잘 들을 뿐만 아니라, 그가 말하는 바를 선의로 잘 해석하여 그 의미를 잘 파악하십시오." 이 세상에서 얻은 우리 지식의 온전함이란 곧 진리를 탐구하는 일이나, 그 진리를 우리에게 적용함에 있어서나,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것을 타인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는 일에 성실하고 정직해야 할 것을 말한다.

 

36:2 없음.

 

36:3 없음.

 

36:4 없음.

 

36:5

엘리후의 연설(16)(욥기 36:5-14)

하나님을 대변하여 말하려고 하고 자기 조물주께 특별히 의로움을 돌리려 하는 엘리후가 이 문단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신의 섭리의 조처란 모두 신의 의지가 하고자 하는 영원한 계획에 의거하여 베푸시는 것이며, 영원하신 공평의 법칙에 따라 행해진 것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치리자로 행동하시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Ⅰ. 하나님은 그의 수하인들 중 가장 비천한 자에게 주목하는 일을 가치없다고 생각지도 않으시며, 곤궁한 자나 미미한 자들이라 하여 자기 은총에서 멀리 떼어놓지 않으신다. 만일 강력한 힘이 있는 인간이라면 저명하거나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는 자에게는 거만하게도 경멸의 눈길을 주기 쉬우나, "하나님은 전능하시나," 무한한 능력이 있으시면서도, "아무도 멸시치 아니하신다"(5절).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낮추사 가장 비천한 자의 일까지도 심리하시고, 그들에게 공평을 베푸시며 인자하심을 나타내 보이신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즉각 모습을 나타내시지 않으신다고 하여, 자기 자신과 자기의 일이 등한히 여김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엘리후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멸시치 않으십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점은 우리가 왜 누구든지 존경해야 하는가 하는데 대한 이유가 된다. "그는 힘과 지혜에 있어 능력이 크시나" 정직히 꾀하는 자들이면, 힘과 지혜가 보잘 것 없는 자들이라 하여도 무시하지는 않으신다. 하나님이 이런 이유 때문에 아무라도 멸시하지는 않으시는데, 그것은 그의 지혜와 힘이 버금할 것이 없도록 무한하심으로서이다. 그러므로 그가 자기 은혜를 겸손히 베푸신다고 해서 그에게 감소되는 것은 없다. 현명하고도 선량한 사람이라면 어떤 사람에게도 냉소와 경멸로 대하지 않을 것이다.

Ⅱ. 하나님은 아무리 위대한 자들이라도 악한 사람들이면 편들지 않으신다(6절).

"그는 악인을 살려 두지 않으신다." 악인들의 생명이 연장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특별히 베푼 보살핌 아래서 그런 것 아니라, 단지 섭리의 일반적 보호하에서 그런 것일 따름이다. 욥은 "악인이 살고, 수를 누리고 세력이 강하다"고 말했다(욥 21:7). 그러나 엘리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천만에, 하나님이 악인들을 장수하도록 허용하는 일은 흔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들의 생명을 그들이 기대한 만치는 오래도록 보존하지도 않으시며, 참으로 우리의 생명이라고 할 만한 그 위로와 만족으로써 저들을 살게 하지도 않으십니다. 더욱이 그들을 보존해 두시는 것은 진로하심의 날을 위한 예비에 불과합니다"(롬 2:5).

Ⅲ. 하나님은 조금이라도 피해입은 자들에게 언제든지 기꺼이 신원해 주실 준비가 돼있으시며, 그들의 이익을 위해 즉시 옹호해 주신다(6절). "그는 고난받는 자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그들의 박해자들에 대한 그들의 불평을 복수해 주시사, 그들의 박해자가 강탈해 간 모든 것을 되려 보상해 주도록 강제권을 발동하신다. 사람들이 피해 입은 불쌍한 자들을 정당하게 회복시켜 주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이 신원해 주실 것이다.

Ⅳ. 하나님은 자기의 선량한 백성들을 보호하는 데 특별하신 배려를 해 주신다(7절). 그는 그들을 내려다 보실 뿐 아니라,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도 않으신다. "그는 그 눈을 의인에게서 돌이키지 아니하신다." 그들이 때로 소홀히 취급당하는 것 같고, 망각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하나님의 계획이나 뜻이 간과해 버리는 것 같으나, 그들의 하늘 아버지의 자상하신 시선은 결코 그들을 떠나지 않고 계신다. 만약 우리의 눈이 의무 가운데서 늘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 한, 하나님의 시선도 자비하심 가운데에서 우리 위에 머물러 계신다. 우리가 가장 낮은 데 처하여 있을 때에라도 그의 눈은 우리를 빠뜨리지 않고 바라 보신다.

1. 때때로 하나님은 선량한 백성을 신뢰와 명예로운 자리에 앉게 하신다(7절). 그들은 "왕과 함께 위에 앉히신다." 그래서 모든 단들이 의인의 단에게 절하게 된다(창 37:7). 의로운 사람이 존귀와 권세의 자리에 올라가게 되면 그것은 그들 의인들에게 대한 자비에서 그렇게 된다. 왜냐하면 의로운 인사들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의인들로 하여금 고관으로 등용되는 데 뒤따르는 유혹에 이기게끔 무장을 시켜 주시는 동시에, 그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주어진 선행의 기회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그들이 다스리게 된 자들에게도 자비심이 된다. "의로운 자가 통치를 맡으면 온 성읍이 즐거워한다." 의로운 자가 출세하면 확고부동하게 선다. 존귀한 중에서 선한 양심을 지키는 자들은 그 선 자리가 확실한 기초 위에 있기 때문에, 높은 자리나 고관대작이 타인에게는 미끌어지기 쉬운 자리라 하지만 의인들에게는 높은 처소가 그다지 미끄러운 땅이 아니다.

그러나 선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권세있는 대인으로 되는 것을 보기는 드물기 때문에, 이 구절은 의인들이 존귀한 자리에 오르게 되는 때 곧 그들의 구속자께서 후일에 땅에 서실 때 받을 존귀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이는 그 때라야만 그들이 영원히 높임을 받으며, 무궁토록 확고한 자리에 앉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에는 태양처럼 그들이 빛을 발하며, 우리 하나님께 왕과 제사장으로 세움을 입을 것이다.

2. 하나님이 그들을 언제든지 고통 속으로 밀어 넣으시더라도 그것은 그것의 영혼을 유익하게 하기 위함이다(8-10절). 일부의 선량한 사람들은 존귀와 권세의 자리에 등용되지만 또 다른 선인들은 고통을 받는다.

(1) 고통의 예상(8절). "혹시 그들이 누설에 매이거나." 요셉같이 감옥에 갇히거나, 다른 어떤 "환난의 줄에 얽히거나," 고통의 질병에 유폐되며 빈궁의 족쇄에 속박 받는다면, 또 저들 자신의 의견 가운데 갇힌다면 그들의 모든 투쟁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런 환난 속에 오래도록 붙잡혀 있게 된다. 욥의 경우가 바로 이러하였다. 그는(어떤 사람이 읽듯이) "번뇌의 줄"에 붙잡혀서 옴짝달싹하지 못하였다.

(2)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이같은 궁지로 몰아 넣으실 때 가지시는 계획을 살펴보자. 이것은 그들의 영혼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이점을 잘 생각해 보면 우리는 고난과 화해하게 되고 그 고난을 좋게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통을 주실 때 의도하시는 세 가지 일들은 다음과 같다.

[1] 지나간 죄과를 우리로 하여금 발견케 해 주며, 우리가 새삼스레 기억해 내도록 해 준다는 점이다. 그런 환난을 통하여 하나님은 그들이 전에는 보지 못했던 그들 자신 속의 잘못을 나타내 보이신다. 그는 죄악의 사실을 그들에게 보여 주신다. "그는 그들의 소행을 보여 주신다." 죄악은 우리 자신의 소행이다. 만일 우리 속에 어떤 선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행위이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죄악으로 말미암아 빚어낸 행위가 어떤 것인지 살펴 보는 데 우리는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은 죄악의 과오를 드러내셔서 그것들이 하나님의 법을 범한 것임을 그들에게 보이시고, 그것으로써 죄악의 죄스러움 즉 "그들이 도를 지나쳤으며," 측량할 수 없이 죄 많음을 가르쳐 주신다. 진정으로 참회하는 자들은 자기 스스로에게 부담을 지우고, 자기의 죄를 가볍게 보지 않으며, 자신의 죄를 더 악하게 보고 자기가 죄 중에서 지나치게 행했음을 고백한다. 고난은 때때로 죄에 대한 해답이다. 고난은 양심을 일깨우는데 소용이 되고, 사람들로 심사숙고하게 만든다.

[2] 우리의 심령이 현재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도록 마음이 내키게 하신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들의 귀를 열어 교훈을 듣게 하신다"(10절). 하나님은 자기가 단련시키는 자를 "교훈 하시며"(시 94:12), 고통은 사람들이 즐겨 배우게 만들며, 마치 밀랍을 녹이는 것같이 사람의 심령을 부드럽게 만든다. 이는 도장이 쉽사리 찍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일은 저절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고통과 함께, 고통으로 인하여 역사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귀를 열어 듣게 하며, 심장을 열게 하는 분은 그이시니, 그는 다윗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다.

[3] 미래를 위하여 우리가 불법을 행치 못하게 제지하며, 우리를 불의로부터 떼어 놓으신다. 환난이 보탬을 받는 것은 이런 심부름을 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불의로부터 돌아 오라"는 명령이며, 죄악과는 더 이상 관계를 맺지 말라는 명령이고, 불법을 싫어하여 그것으로부터 돌이키라는 명령인 동시에 다시는 이 이상 더 죄악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결의를 가지고 죄악으로부터 돌이키라는 명령이다(호 14:8).

3. 만일 환난이 자기 할 활약을 다하고, 특파된 소임을 성취할 때에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내리신 고통의 시간에 따라서 그들에게 다시금 위로를 내리실 것이다(11절). "그들이 청종하고 그를 섬긴다면"-즉 그들이 하나님의 계획에 응하여 그의 이런 처사에 있어서 그의 취지를 받는다면, 또 고통이 물러가고도 그들이 환난의 아픔 중에 있을 때와 다름없는 심정으로 계속 행하며 곤고할 때에 행한 맹세를 수행해 나간다면, 또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들 특히 하나님의 예배와 경배에 관련된 명령들에 순종하여 살아가고, 모든 사례에 있어서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양심껏 지킨다고 할 것 같으면 그들은 다시금 "형통히 날을 보내며," 그리고 "즐거이 해를 지내게 될 것이다." 경건은 번영과 열락에 이르는 유일하고도 확실한 길이다. 이것은 확실한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믿으려하는 이들은 적다.

(1)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긴다고 한다면, 우리에게는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 유익을 위하는 것인 한, 외부적인 번영의 약속과 현재 이생의 소망 및 그 위로가 우리에게 있다. 누가 그 이상 더 이 세상에서 복락 누리기를 소원할 것인가?

(2)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신실하다면, 우리에게는 내적 쾌락의 소유와 하나님과 교제하는 중에 얻는 위로와 선한 양심, 또 그 위에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는 자들이 가지는 큰 평강이 있다. 만일 우리가 주 여호와 안에서, 영생의 소망 중에서 항상 기뻐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것은 우리 잘못이다. 우리는 무슨 더 좋은 즐거움 속에서 우리의 해를 지낼 수가 있단 말인가?

4. 만일 환난이 그 소임을 다하지 않을 때에는 용광로가 일곱 배나 더 뜨거워져서, 마침내 그들이 다 타서 재가 되리라는 것을 그들은 예상해야 한다(12절). "만일 그들이 청종치 아니하면," 만약 그들이 그들의 환란에 의해서도 개선되지 않고 교정되지 않으며 개혁되지 않는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칼에 멸망당할 것이다. 하나님의 채찍에 치료되지 않는 자는 그가 칼로 죽이실 것이다. 그리고 청순하게 연마하는 불길이 목적을 성취하지 못하면 소각시켜 버리는 불이 뜻을 이루리라. 왜냐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때에는 그가 압도해 버리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하스 왕이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에, 그는 멸망하도록 결정되었다"(대하 28:22; 렘 6:29, 30). 하나님이 환란을 통해 그들을 교훈하고자 하시건만 그들이 훈계를 받으려 하지 아니하며, 그들에게 내리시는 암시를 받아 들이려 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지식없이 죽을 것이다." 그들이 알기 전에 그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이전의 경고를 새삼스레 깨닫기도 전에 죽을 것이다. 혹은 그들은 축복으로 받았던 지식의 수단에도 불구하고 "지식이 없으므로 죽을 것이다." 지식이 없이 죽는 자들은 은혜를 얻지 못하고 죽는 것이어서 영원히 망하게 된다.

Ⅴ. 하나님은 사곡한 위선자들 즉 자기 왕국의 은밀한 원수들에게(엘리후가 묘사한 대로:12절) 파멸을 내리신다. 그들은 비록 엘리후가 먼저 이야기한 의인들 중 하나로 계산되기는 하지만,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며, 불순종과 흑암의 자녀가 되어 진노와 멸망의 자식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들은 "그 마음이 사곡한 자"들이어서 "분노를 쌓아 올리는 자"들이다(13절). 위선의 본질을 알아보자. 위선은 마음 가운데에 놓여 있다. 이 마음은 겉으로 보기에 하나님과 종교를 위하는 것같이 보이더라도 세상과 육체를 향하는 마음이다. 겉치레나 말로서는 성자이면서 마음 속에는 외식이 가득한 자들이 많다. 그 원천이 썩어있는 이상 그곳에는 악한 보물만 있다. 위선의 해로움을 살펴보라. 사곡한 자들은 "분노를 쌓아 올린다." 그들은 하나님을 화나게 하는 그런 짓을 매일매일 행하고 있으나, 그 모든 것은 저 큰 날에 모두 합쳐서 셈을 치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진노의 날에 임할 진노를 쌓는도다"(롬 2:5).

그들의 죄악은 "하나님께 쌓이고 그 창고에 봉해져 있다"(신 32:34, 약 5:3). 수증기가 위로 증발하여 소나기가 되어 내리듯 죄악도 회개하지 않으면 올라가서 진노가 되어 내려 온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도 자기들이 재산을 쌓으며 부귀공명을 축적하는 것 같으나, 정작 창고를 열어 보는 날에는 그들이 진노하심을 쌓아 놓았다는 사실이 판명될 것이다.

1. 진노를 쌓아 올리는 것은 그들이 무엇을 했기 때문인가? 그처럼 노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속박하는 때에도 그들은 부르짖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이 환난 중에 있을 때, 고통의 줄로 속박을 당하는 때 그들의 마음은 강퍅하며 고집이 세며 겸손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지도 않으려 하며 그에게 의뢰하지 않는 까닭에 그렇다. 그들은 목석같이 미련하고 지각이 없어서 여호와의 시련을 경멸한다.

2. 그 진노하심의 결과는 어떤가?

"그들은 젊어서 죽으며 그 생명이 남창과 함께 있다"(14절). 이것은 외식하는 자의 분깃이며, 그리스도께서는 위선자들에 대해 많은 화가 있으리라고 선언하셨다. 만약 그들이 계속 회개치 않으면 다음과 같은 죽음을 당할 것이다.



(1) 그들은 급작스런 죽음을 당하여, "젊어서 죽는다." 청년기에 있어서 죽음은 급작스런 기습이다. 사특한 자의 죽음(다시 말해서 그 결과)은 항상 그렇다. 젊어서 죽는 자들은 살고 싶어할 때에 죽듯이, 위선자들도 죽어서 천국에 가고 싶어하지만 지옥에 가게 된다. "사악한 자가 죽으면 그의 기대는 사라져 버린다."

(2) 그들은 두 번째 죽음을 당할 것이다. "그들의 생명은" 사후에(그것은 여기에서 그런 것으로 나타나지만) "불결한 자들 중에 있으며"(어떤 사람이 읽듯이), 사통하는 자들과 함께 망하고, 그들의 그럴듯해 보이는 직업에도 불구하고, 죄인들 중 가장 악한 자들과 가장 흉칙한 자들 중에 있다. 그들의 생명은 남색하는 자들과 함께 망한다(끝부분은 그렇다). 그들은 불결하고 비열한 자들이어서 "다른 색을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다"(유 7). 악인의 영혼도 사후에 살기는 살되, 그들은 불결한 자들, 곧 불결한 영들 중에서 악마와 그 추종자들 중에서 거하며, 새 예루살렘으로부터 영원히 격리된다. "어떤 더러운 것도 이 새 예루살렘 안에는 들어가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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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후의 연설(17)(욥기 36:15-23)

이 문단에서 엘리후는 욥에게 더욱 가까이 접근한다.

Ⅰ. 만약 욥이 자기 환난 중에 아주 겸손하였더라면, 하나님께서 이 일에 앞서 그에게 어떻게 해 주셨으리라는 것을 엘리후는 말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곤고한 자를 그 고통 가운데서 즉시 구원하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계신 분임을 모두들 알고 있습니다(15절). 그는 항상 그러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곧 상한 마음과 통회하는 심령을 가진 자를 하나님께서는 친절하게 대하시고, 그들이 곤고한 중에 있을 때에는 기꺼이 도우십니다. 그는 그들의 귀를 열어 주시고, 그들이 비록 학대를 받고 있더라도 희열과 즐거움을 들을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그가 지금까지는 아직 그들을 구원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는 그들에게 좋은 말과 위로의 말을 해 주심은 그들의 믿음과 인내를 담대케 하고 그들의 공포감을 침묵시키며 그들의 비통함을 상쇄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당신이 그의 섭리에 복종하면서 스스로 잘 처신하였던들 하나님은 당신에게도 그와 같이 행하셨을 것입니다(16절). 그가 당신에게 구원을 베푸사 당신을 위로하셨을 것이고, 우리는 이런 불평을 조금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였더라면 당신의 자유와 풍부가 당신에게 회복도어 유리하였을 것입니다."

1. "당신은 더 크게 되었을 것이고, 당신의 질병과 치욕에 이처럼 갇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당신을 좁지 않고 넓은 곳으로 옮겼을 것이며, 당신을 벌써 이처럼 꼼짝 못하는 속박에서 벗어나 당신의 모든 헤아림과 수단을 털어버렸을 것입니다."

2. "당신은 부하게 되어서 이처럼 궁핍한 처지에 놓여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상이 그득하도록 펼쳤을 것이며, 음식으로 편리하게 펴놓을 뿐만 아니라, 가장 고운 밀가루와(신 32:14 참조) 고기 중 가장 살찐 것으로 진설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환난 중에 만약 우리가 더 착하다면 만사가 우리에게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해 보게 될 때는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잠잠해 질 수밖에 없다. 만일 우리가 고난의 결과에서 해답을 얻을 때에는 그 고통이 물러갈 것이고, 우리가 즉각 받아들일 준비를 갖출 때는 구원도 올 것이다. 만일 우리 스스로가 잘 처신하였더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잘 해 주셨을 것이다(시 81:13, 14; 사 48:18).

Ⅱ. 엘리후는 욥이 스스로를 함정에 빠뜨렸다고 책망하며, 욥이 욥 자신의 고통의 화근이요 원인이라고 주장한다(17절). "이제는 악인의 받을 벌이 네게 가득하였다." 즉 "당신의 진면목은 무엇이든 간에 당신은 이 일에 있어서 악인과 같이 행동하였으니 악인과 같이 말하며 행동하였고, 악인들을 만족시키며 그들의 명분에 영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심판과 공의가 당신을 악인으로 취급합니다. 이것은 당신이 그들 악인들과 동행하며, 마치 당신이 그들과 이해를 같이하는 양 행동하여 그들을 방조하고 교사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악인의 변호를 위해 주장하였습니다. 사람의 주장이 그러하면 하나님의 심판도 그에게 그렇게 임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패트릭 감독은 해석한다. 잘못된 편에 선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대역죄의 종범도 주범으로 취급된다.

Ⅲ. 엘리후는 욥이 자기의 완고한 고집을 하지 말도록 욥에게 주의를 주고 있다. 이런 취지로 그는 몇 가지 유익한 경고를 하고 있다.

1. 욥이 하나님의 복수를 가볍게 여기거나, 그 자신이 마치 그런 위험을 당하지 않을 것처럼 안전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18절). "분격함을 인하여(즉 하나님은 의로운 통치자시기 때문에 자기의 통치에 대해 던지는 모든 모욕을 원통하게 여기시고 분개하십니다. 그는 인간이 모든 불경건과 불의를 다스리려고 하늘에서부터 자기의 분노를 나타내 보이셨기 때문에, 또 당신이 하나님의 불쾌하심 아래 있는 것을 두려워할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당신은 하나님의 일격으로 그가 당신을 갑자기 데려 가시지나 않을까 근신하고, 당신은 지혜롭게 하나님과 급히 화해하여, 그의 진노하심을 당신에게서 돌이키도록 하십시오." 욥도 자기 친구들에게 이런 취지의 경고를 한 일이 있다(19:29).

"너희는 칼을 두려워할지니라. 이는 분노가 칼의 형벌을 부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다투는 자들은 너무나도 대담하게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서로 연합해서 맹세하게 하고, 그의 진노하심을 들어 서로 위협하기가 십상이다. 그러나 착한 양심을 지닌 자들은 교만한 자들의 무기력한 위협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 엘리후의 말은 욥에게 대한 우호적인 경고였고 필요한 주의이기도 하였다. 선한 사람조차도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면서 자기 의무를 굳게 지킬 필요가 있다. "당신은 지혜롭고 선량한 사람이긴 하지만 그가 당신을 데려 가시지 않으시도록 근신하시라. 왜냐하면 가장 지혜로운 최선의 인간도 그 자신 속에 하나님의 치심을 받을 만한 것을 충분히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노하심이 자기를 향하여 불타오를지라도 그가 하나님의 치심을 피해 나갈 길이 있다고 욥이 즐겨 바라지도 말라는 것이다.

(1) 돈으로 피해 나갈 수도 없으며, 은이나 금 따위의 그런 썩어질 것으로 사하심을 살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정죄하기 시작하면 아무리 큰 대속물이라도 당신을 구할 수가 없습니다. 그의 공의는 뇌물을 주어 삶을 수도 없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어떤 사자들도 뇌물로 유혹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재산을 보고 중히 여기시며, 당신의 부요함으로 인하여 형벌을 감해 주실 것입니까? 천만에, 황금으로도 그렇게는 하지 못합니다(19절). 당신이 여태껏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당신을 편안하게 해 주지도 못할 것이며, 하나님의 진노의 징계로부터 당신을 안전하게 보호해 주지도 못할 것이니, 그 진노의 날에는 재물도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잠 10:4; 49:7, 8 참조).

(2) 구조에 의하여 도피할 수도 없다. "모든 강한 군대를 휘하에 거느리고 아무리 많은 신복들을 소집하여 하나님의 복수의 손길로부터 당신을 빼앗아 내도록 하기 위해 당신 앞에 나타나게 한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이 헛된 일이니 하나님은 끄덕도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의 손에서 구해낼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3) 도망침으로써 피할 수도 없다(20절). "밤을 사모하지 마시라. 밤은 흔히 패배한 군대의 퇴각에는 유리하여 도주를 엄폐시켜 주지만, 당신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을 피할 수 있을 줄로 생각지 마시오. 왜냐하면 흑암도 그에게서 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시 139:11, 12; 욥 34:22 참조). "밤에는 사람들이 자기의 처소로 물러나서 자기 침상 위에 올라가기 때문에 하나님도 자기 처소로 올라가셔서 당신을 보지 못하시는고로 들키지 않고서 도망치기에 수월한 줄로 생각 마시오.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졸지도 않으시고 자지도 아니하십니다. 그의 눈은 인간의 자손들을 감찰하십니다. 어느 장소를 물론하고 어느 때든지 항상 그의 눈은 인간을 향해 뜨고 계십니다. 반석이나 산도 우리를 그의 시선으로부터 피하게 하는 피난처가 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구절을 사망의 밤에 대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 밤은 사람들이 "자기 곳에서 제함을 받는" 밤을 의미하며, 욥도 삯군이 저녁을 바라듯 그 밤을 진심으로 갈구하였다(욥 7:2).

그러나 엘리후는 "당신은 그 밤을 사모하지 마시라. 당신은 사망의 밤이 어떠한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 죽음을 하나님의 진노로부터의 피난처로 삼고자 희망하여, 죽음을 열심히 소원하는 자들은 아마 잘못 생각한 것일 게다. 진노는 그 밤 속으로까지 들어와 그들을 찾아낸다.

3. 욥이 하나님과 그의 섭리에 대한 부당한 언쟁을 중단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는 자기의 고난에 승복해야 하는 때인데도 여태껏 언쟁을 고집해 왔었다(21절). "주의하시라. 네 자신의 심령을 잘 살피고 불의를 돌아보지 말며, 그것에게 돌아가지 마시라(혹자가 읽듯이). 만일 당신이 그렇게 행한다면 그것은 당신의 생명을 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결코 죄에 대한 후한 생각을 감히 품지 말고 죄에 탐닉하지 말며 빠지지 말자.

엘리후는 욥이 이런 훈계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그가 "고난보다 오히려 불의를 택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 승복함으로써 고난의 굴욕을 겸손히 참거나 징벌을 감수하기보다는 하나님과 다투는 일에서 자신의 긍지와 기분을 만끽하려는 태도를 취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서 생각해보면 고난보다 불의를 택하는 자들은 아주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는 사실을 관찰할 수 있다. 죄 많은 쾌락으로 그들의 근심 걱정을 달래며, 불의한 추구에 의해서 재물을 늘이고 죄 많은 계획으로 그들의 고통을 도피시키며, 그들의 양심을 거스려 가면서까지 죄스러운 영합으로써 의를 위한 수고로움을 회피하는 이들은 후회하고야 말 선택을 하는 셈이다. 왜냐하면 최대의 고난 속에서 보다는 최소의 죄악 중에서 더욱 많은 악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악이며 오직 악일 뿐이다.

4. 욥은 감히 하나님께 지시하지 말며 그에게 자기의 수단을 가르치지도 말라는 것이다(22, 23절). "하나님은 그 권능으로 큰 일을 행하신다." 즉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자를 세우실 수도 또 끌어내릴 수도 있으며, 또 그렇게 행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당신도 나도 그와 다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찬미하면 할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을 더 겸손히 낮추고 더 비천하게 만드는 셈이다.

(1) 하나님은 절대적 주권자이시다. "그는 그 권능으로 큰 일을 행하신다." 다른 이에게서 연유된 힘으로 큰 일을 행하시지 않는다. 그는 자기가 기뻐하는 이들을 높이시며 자기가 백성에게 부여한 힘과 권세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고 내쫓김을 받은 자들을 높이신다. 그러므로 "누가 그에게 그의 길을 정하여 주었단" 말인가? 누가 하나님의 길에서 그 위에 주재한다는 말인가? 하나님이 자신의 임무를 부여받고 또 책임을 져야하는 더 우세한 자가 존재한다는 말인가? 아니다. 그 자신은 지고의 존재로 독립하는 분이시다. 누가 그로 하여금 자기 길을 생각나도록 한다는 말인가?(어떤 이는 그렇게 해석한다) 영원무궁한 마음이 기억하게 해 주는 자를 필요로 한다는 것인가? 아니다. 우리의 길과 하나님의 길도 항상 그의 앞에 있다. 그는 아무에게서도 명령이나 교훈을 받지 아니하셨으며(사 40:13, 14), 그는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으신다. 그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그들의 길을 정해 주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에게 그 길을 지정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이 세상의 통치는 그에게 맡겨야 한다. 그는 그 일에 적합하시다.

(2) 그는 비교할 수 없는 선생이시다.

"누가 그같이 교훈을 베풀겠는가?" 그 스스로가 빛과 진리와 지식과 교훈의 근원이신 분을 우리가 가르치려고 한다는 것은 얼마나 우스꽝스런 일인가! "사람에게 지식으로 교훈 하시는 자가," 그것도 어느 누구라도 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시는 분이 "알지 못하시겠는가?"(시 94:9, 10) 우리가 촛불을 가지고 태양을 밝힐 수 있는가?

엘리후가 지배자로서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에, 그는 하나님을 선생으로 찬양하였다. 왜냐하면 통치자는 교훈을 베풀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시다. 그는 같은 인간의 줄로서 동이신다. 다른 일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일에 있어서도 그를 따를 자가 없다. 하나님에게 하나님 자신의 행동을 지시하는 일에 있어서 당신 자신만치 적격인 분은 아무도 없다. 그는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고 계시며, 가장 잘 행하는 방법을 알고 계셔서 어떤 정보나 어떤 충고도 필요치 않으시다. 솔로몬왕 조차도 자신을 충고하는 추밀 고문관을 두었으나 왕 중 왕이신 하나님은 아무도 두지 않으신다. 또 하나님만치 우리의 행동을 지시해 주시기에 적격인 분은 없다. 하나님이 하시는 만치 그렇게 권위로써 훈육하며 확신에 넘치는 증거를 가지고서, 겸손과 긍휼로써 가르치시는 분은 아무도 없고, 그만치 권세와 효과로써 훈계하시는 이도 없다. 그는 성서로써 가르침을 베푸시는데 성서는 최상의 책이다. 그는 또 자기 아들로써 훈계하시는데 그는 가장 선한 선생님이시다.



(3) 그는 그의 모든 처사에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공정하시다. 누가 "당신께서는 불의를 행하셨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무도 그렇게 말할 자는 없다. 감히 그렇게 말하는 자가 누구이랴?(불의를 행하는 자가 많다. 그런데 그들에게 그 일을 말하는 자들은 자기의 생명을 걸고서 그렇게 고하는 법이다) 그러나 누가 그것을 말할 수 있는가? 누가 그런 말을 낼 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는가? 그 일을 말할 수 있으며 그것을 증명할 자가 누구인가? "왕 중의 왕이 그릇되게 행할 수 없다"는 말은 무제한하게, 의심할 나위 없는 참된 격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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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후의 연설(18)(욥기 36:24-33)

엘리후는 여기에서 욥에게 하나님이 크고 높으신 분이라는 생각을 주입시키려고 힘쓰며 또 욥을 설득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흔쾌히 수락하도록 만들려고 노력한다.

Ⅰ. 그는 하나님의 사업을 개괄적으로 혁혁하고 현저한 것으로써 묘사하고 있다(24절). 하나님의 전체 사업이 그러하다. 하나님은 시원찮은 일은 하나도 행하지 않으신다. 이점은 우리가 어째서 우리 주변에 세부적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섭리에 대하여 잠자코 있어야 하는지 그 이유가 된다. 하나님의 가시적인 업적들 즉 자연계의 삼라만상과 대체로 세상과 관계된 모든 것들은 우리가 감탄하고 칭찬할 만하다. 그것들 가운데서 우리는 창조자의 지혜와 권능과 인자하심을 관찰할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관리와 우리의 일상사에 대한 신의의 계획을 비난할 것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행사를 생각해 보도록" 요청 받고 있다(전 7:13).

1. 그것은 우리의 눈 앞에 명백하며, 이보다 더 분명한 것은 없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바"이며 외눈만을 가진 자라도 그 일을 볼 수 있으며, 그것을 멀리서도 누구든지 볼 수 있다. 우리가 보고자 하는 어느 길이든 바라보라. 우리는 하나님이 지혜와 권세가 지어내신 산물을 보게 된다. 우리는 그 일이 행해지고 또 행하는 것을 보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며 하나님의 손가락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여호와께서 하시는 행동이시다. 모든 사람이 멀리 떨어져서도 하늘과 그 모든 광채를 바라보고 전능자의 작품임을 알 수 있고 땅과 그 모든 소산물을 보아서 전능자의 솜씨임을 알 수 있다. 하물며 우리가 바로 곁에서 가까이서 그들을 바라 볼 때에는 어떻겠는가? 자연의 가장 미세한 작품을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아라. 그것들이 진기하게 나타나지 않는가? 창조주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의하여 "분명히 보여 이해가 된다"(롬 1:20). 어느 사람이든, 신적 계시의 은혜를 입지 못한 자들조차도 이 점은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들 자연의 항존적 전도자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는 언어도 없고 말도 없기" 때문이다(시 19:3).

2. 그것이 우리 눈에 경이롭게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의 작품의 우미하고 훌륭함은 그 모든 부분 부분의 조화된 짜임새와 아울러 우리가 잊지 않고 찬양하며 침이 마르도록 칭찬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이 흠잡을 데 없을 정도로 그 작품을 정당하고 선하다고 인정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지혜롭고 영화스러운 것으로 높이 칭찬해야 하며, 어떤 피조물이라도 그렇게 안출해 내거나 생산해 낼 수 없다는 것을 시인해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작품을 볼 수 있으며 그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식별해 낼 능력이 있으므로(짐승은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인간은 그들을 인하여 찬양과 영광을 하나님께 드려야 마땅하다.

Ⅱ. 그는 그것들을 지으신 하나님을 무한하시고 탐색할 수 없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26절). 존재와 능력과 완전의 흐름은 우리를 그 원천으로 인도해 준다. "하나님은 위대하시며" 무한히 크시다. 능력에 있어서 위대하시다. 그는 전능하시고 독립하시기 때문이다. 부요에 있어서 크시다. 그는 자족하시며 모든 걸 자족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 스스로에 있어 크시며, 그의 모든 일에 있어서 크시다. 그는 위대하시기 때문에 크게 찬양을 받으셔야 한다. 그는 크시므로 "우리는 그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그가 존재하신다는 것을 알 수는 있어도 그가 어떤 분인지 알지 못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그의 참 모습이 아니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은 바로 그의 참 모습이다. 우리는 부분적으로는 알고 있으나 완전히는 알지 못한다. 이 점이 왜 우리가 하나님의 처사를 나무라서는 안 되는지, 또 왜 그가 하시는 행동을 비난해서는 안 되는지의 이유로서 여기에 나타나고 있다. 이는 그 일이 우리가 이해하고 있지 못한 일을 악평하는 일이기도 하며 우리가 듣기도 전에 대답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 기간을 알고 있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 기간은 영겁이기 때문이다. "그의 년 수"는 절대로 "계산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영원무궁하신 까닭이다. 그의 년 수는 없다. 그는 시작도 없고 계속도, 기간도 없는 "존재"이시며, 그는 이전에도 존재하셨고 앞으로도 늘 존재하실 것이며, 항상 동일하게 계셔서 위대하신 "나는 존재하고 있다"는 분이시다. 이것은 우리가 어째서 그에게 명령해서는 안 되는지, 왜 그와 다투어서는 안 되는지에 대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그러하듯이, 그의 운용도 전혀 우리의 손이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Ⅲ. 그는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주권과 몇몇 본보기를 제시하고, 보통의 섭리가 베푸신 것들 중에 나타난 실례를 드는데, 이 장에서는 구름과 거기서부터 내리는 비로 시작한다. 우리는 이 품위 있는 이야기의 어법이나 철리를 검토함에 있어서 조금도 비판적일 필요가 없다. 그 일반적 범위는 하나님이 무한히 크신 분이라는 것과, 그가 만유의 주 여호와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제일 원인이시자, 지고한 지휘자시고, 그가 "천지간의 모든 권세를 가진 분"이심을 나타내는 데 있다(그러므로 우리는 모는 겸손한 존경심을 가지고 그를 경배해야 하며, 그를 좋게 말해야 하고, 그에게 존귀를 드려야 마땅하다). 더욱이 엘리후가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또한 우리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의 방법이나 법칙을 하나님께 지시한다거나, 천체에 대한 일반적 섭리의 운용이 그토록 다양하며 그토록 신비스럽고 불가사의하건만 그들에 대한 설명을 하나님께로부터 우리가 기대하는 일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짓인가 하는 것이다. 엘리후는 하나님의 장엄하심과 지엄한 통치권을 들어 욥에게 감동감화를 주고자 그에게 구름을 쳐다보라고 지시한다(35:5). 이 구절에서 엘리후가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우리가 구름 속에서 무엇을 관찰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며, 우리는 그 구름들을 바라봄으로 말미암아 그것들을 만드신 창조주의 영화로우신 성취물을 고찰하기에 이른다. 구름을 곰곰이 생각해 보자.

1. 구름은 하계에 대한 샘이며, 습기의 근원과 보고로서, 습기가 순환하기 위해 드나드는 큰 방축이다. 구름은 아주 필요한 공급품이다. 만약 그것이 침체하면 혈액의 침체가 인체에 해를 끼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하계에 큰 해를 끼친다. 이 보통의 일에서도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관찰해 봄직하다.

(1) 위에 있는 구름은 아래에 있는 땅 위에 물기를 떨어뜨려 내린다. 하늘이 놋이 되면 땅은 철이 된다. 그러므로 이처럼 풍부의 약속이 흘러 내린다. "나는 하늘의 소리를 들을 것이며, 그들은 땅의 소리를 들을 것이다." 이것은 모든 좋은 선물이 위로부터 즉 빛의 아버지이시며 비의 아버지이신 분으로부터 내려오는 것임을 우리에게 시사해 주고, 우리가 그 분께 기도 드리며 그를 쳐다보아야 할 것을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다.

(2) 그것들은 "사람 위에 쏟아져 내린다"고 여기서 묘사되어 있다(28절). 하나님은 "사람 없는 광야에 비가 내리도록 만드는 게" 사실이긴 하지만(38:26; 시 104:11) 여기서는 관심이 특별히 사람에게 주어지는데, 이것은 모든 하등동물이 죄다 인간에게 소용이 되도록 창조되어 있고, 실질적인 찬사는 인간에게서 되돌려 받으시기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의 비"를 인간 중에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위에 다같이 내리게 하신다"(마 5:45).

(3) 구름은 빗물을 "작은 방울"로 내리고 "하늘의 창들이 열린 때"와 같이(창 7:11), 물기둥으로 쏟아져 내리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한 때 자기가 폭우로써 물에 잠기게 했던 그 땅을 비로 적시되, 그 일을 다른 모습으로 처리하시는데,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얼마나 그의 마음대로 좌우될 수 있는 존재이며, 그가 얼마나 자비하신 분인가 하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곧 그가 인자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비가 내리시되 빗방울로 오게 하시는 일에서 나타난다. 그 혜택은 인공 분수에 의해 하는 것과 같이 더 멀리 더 골고루 뿌릴 수 있는데 있다.

(4) 빗방울이 때로는 아주 소량으로 내리고 또 다른 때는 폭우로 쏟아지지만, 이런 강우의 차이는 그렇게 내리도록 명령하는 하나님의 섭리에 귀착된다.

(5) 비록 비가 방울로 내린다고는 하지만, 사람 위에 "풍부하게" 쏟아진다(28절). 그러므로 그것은 "물이 가득한 하나님의 강"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시 65:9).

(6) 구름은 그들이 이끌어 올린 "증기에 따라 쏟아져 내린다"(27절). 그와 같이 하늘은 땅에게 공평하지만 땅은 그 만들어 내는 보답에 있어서 그렇지 못하다.

(7) 구름의 산물은 때때로 땅에게 큰 공포가 되나, 다른 때에는 큰 은혜가 된다(31절). 하나님이 원하실 때 "그는 구름을 이용하여" 자기가 노여워하시는 "백성을 심판하신다." 땅 위의 소산물을 뿌리 채 뽑고 홍수를 야기시키는 폭풍우나, 호우와 과다한 강우도 구름에서 생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보통 그는 구름으로부터 양식을 풍부히 주신다. 구름은 "양떼로 입힌 초장과, 곡식으로 덮힌 골짜기"에 기름을 떨어뜨린다(시 65:11-13).

(8) 비가 다가 올 것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여 보자. 다른 일들 중에서 "그 소리는 비에 대해 표시해 준다." 우리는 "풍부한 비의 소리"에 대하여 읽었고(왕상 18:4), 또(끝부분에서와 같이) 비가 오기 전에 "그 울리는 시끄러운 빗소리"를 읽었는데, 그 때는 그 빗소리가 반가운 전조였다. 소리와 같이 하늘의 기상도 그것에 대해 나타내 준다(눅 12:56).

가축들도 또한 진지한 본능에 의해 가까이 다가오는 기상 변화를 알아 차리고 피할 곳을 찾아나서는데, 이를 생각하면 악을 미리 내어다 보지도 않으려 하고 또 스스로 숨지도 않는 인간은 수치를 느껴 마땅하다.

2. 구름은 상계의 그림자이다(29절). "누가 구름이 폐임을 깨달을 수 있는가?" 구름은 휘장과 덮개와 같이 지상에 펼쳐져 있다. 비록 우리가 매일 그같은 현상을 보면서도 구름이 어떻게 그렇게 되며, 어떻게 펼쳐지고 현 상태와 같이 어울릴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런 우리로서, "빛을 가리우는" 구름의 펼침이 어떻게 그리되는지 설명하지 못하면서도(32절), 성격과 경우가 그토록 다양한 인간의 자손들에 대하여 내린 하나님의 공평한 처리가 어떤 이유와 방법에서 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있다고 자처할 것인가?

(1) 구름은 "사이에" 끼이는 것이다(32; 26:9). 그리고 우리는 구름이 우리와 태양 사이에 끼이므로 인해서 때로는 혜택을 입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구름은 태양의 극열한 뜨거움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는 우산의 일을 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태양의 폭염이 우리를 사정없이 내려 쬘 것이다. "추수기의 더위에 내리는 운무"는 아주 대단히 상쾌한 것으로 묘사된다(사 18:4).

(2) 때로는 우리가 구름으로 인하여 눈살을 찌푸리게 되는 일도 있음을 깨닫게 된다. 구름은 정오에도 땅을 어둡게 만들며, 태양광선을 가린다. 죄악은 구름에 비유되기도 하는데(사 44:22), 그것은 죄가 우리와 하나님의 은혜 사이에 끼어서 하나님 얼굴에서 비취는 빛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름이 태양을 일시적으로는 어둡게 하고 폭우를 쏟아 내리지만(Post nubila Phoebus-즉 비온 뒤에 태양이 빛난다), 그가 구름을 지치게 한 뒤에 "그는 그의 빛을 그 위에 펼치신다"(30절).

"비온 뒤에는 밝은 비췸이 있다"(삼하 23:4). 양광은 앞으로 발사 되어서 "바다의 맨 밑바닥까지도 덮을" 지경에 이르르고, 거기서 수증기의 새로운 공급을 토하여 내어, 구름에 대한 보충을 하게 해 준다(30절). 우리는 이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잊지 않고 찬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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