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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1

엘리후의 연설(12)(욥기 35:1-8)

Ⅰ. 엘리후가 욥을 책망하여 들려 준 심한 언사(2, 3절). 그는 욥의 말들이 악함을 증명하고자 욥 자신에게 직접 호소하며, 욥 자신의 맑은 생각을 향해 깊이 반성할 것을 간청하고 있다. "너는 이것이 옳다고 생각하느냐?" 이 말은 엘리후 자신이 지금 내리고 있는 책망이 정당하다고 확신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그는 그 판단을 욥 자신에게 맡길 수 있었다. 진리와 공평을 자기편에 소유하고 있는 자들은 조만간에 만인의 양심을 자기편에 오도록 끌게 될 것이다. 이것은 또한 욥에 대한 엘리후의 호의를 암시하기도 하는 것이다. 욥이 그 말보다 그 생각에 있어서는 더 착하여서 비록 말은 잘못하였을지언정, 자기의 실언을 깨달은 이상 그 잘못된 말을 고집하지는 않으리라고 욥을 선의로 해석하는 견해를 암시하는 것이다.

우리가 옳지 않은 말을 성급히 내었다고 할 때,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그것이 그릇된 말임을 깨달아 알게 되었노라고 자인하게 된다. 엘리후는 두 가지 일로 욥을 꾸짖는다.

1.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 스스로를 더 의롭다 하였음에 대한 책망으로서, 이것은 처음으로 그를 성나게 했던 일이었다(32:2). "당신은 사실상 '내 의로움이 하나님의 의로움보다 더하다'고 말하였습니다. 즉 '나는 하나님이 여태껏 내게 행해 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하나님께 바쳤노라. 그래서 손익을 회계해 보면 그가 내게 채무자가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욥은 마치 자기의 봉사에 대한 지불이 실제보다 더 박하게 보상되었고, 자기 죄악은 실제로 받아야 마땅한 징벌보다 더 심하게 벌 받은 것처럼 생각하였는데, 이것은 누구든 품어서는 안 될 아주 부당하고도 악한 생각이었으며, 특히 이런 말을 입 밖에 낸다는 것은 더욱 더 그러하였다. 욥이 자기의 순전함을 그토록 강조하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푼 처사의 혹독함에 대하여 계속 주장하였을 때는 그가 실제로는 "내 의로움이 하나님의 의보다 더하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착하고 우리의 고통이 아무리 극심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의롭지 못하다고 책망을 받아야 하는 것이지, 하나님께 그런 불의를 돌릴 수는 없다.

2. 욥이 이런 고난을 당한다고 해서 종교가 주는 특전과 유리한 점을 부인한 데 대해서. "내가 내 죄에서 깨끗하다고 한들 내게 무슨 유익함이 있으리오?"(3절) 이 말은 욥기 9장 30, 31절에서 끌어 온 말이다. "내가 내 손을 아무리 정하게 한들 나의 가까이 나아가는 곳은 어디입니까? 당신께서 나를 도랑에 처넣으셨나이다." 또 10장 15절에는 "내가 악하다고 할진대 나에게 화가 있을 것이 오며, 내가 의로울지라도 매일반이니이다"라고 하였다. 시편 기자는 시편 73편 13절에서 자기의 고통과 악인의 융성함을 비교해 보고는 시험을 받아 "내가 내 심령을 정하게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라고 말하고 있다. 만일 욥도 그렇게 말하였다고 할 것 같으면 사실상 "내 의가 하나님의 의보다 더 하다"(2절)고 말한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그가 자기 종교로부터 아무 것도 얻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욥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보다 욥에게 더 많이 신세를 진 셈이 된다. 그러나 비록 이것이 다소 사실인 듯 보이긴 하나 욥 자신이 형통하는 악인들의 악한 말들을 인용하고 나서(우리가 그에게 기도한들 무슨 이익을 얻으랴? 12:15), 그 말들을 즉각 부인하는 것을 볼 때 이 말들을 욥이 한 것으로 책임을 지우는 것은 합당치 못하다. "악인의 계획은 나와 판이하니라"(21:16). 사람들이 명백히 잘라 부인한 말을 가지고 자기들 견해의 결론으로 미루어서 책잡는다는 것은 공명정대한 논박 방법이 아니다.

Ⅱ. 엘리후가 이 말에 대해 답변해 준 좋은 대답(4절). "내가 너와 및 너와 함께 한 동무들에게 대답하고자 하노라." 네가 한 말은 시인하며 그들 중에서 너를 의롭다고 기꺼이 인정하고자 하는 모든 자들이나, 네가 말하듯이 꼭 그렇게 말하는 모든 다른 사람들이 곧 네 동무들이다. 내게는 그들을 모두 잠잠하게 만들 수 있는 말이 있도다.

이 일을 위하여 그는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시다"는 그의 옛 금언을 사용하고 있다(33:12). 이 말을 적절하게 잘 사용한다면 많은 선한 목적에 소용이 되는 진리이며, 특별히 이 말은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도 채무자가 아님을 증명하는 말이다. 인간들 중 가장 큰 자라도 가장 천한 자에게 빚을 진 자가 될 수 없으나, 신과 인간 사이의 불균형은 너무나 한량없이 차이가 나므로, 위대하신 하나님은 절대로 인간에게서 이익을 얻을 수가 없다. 따라서 위대하신 하나님은 인간에게 어떤 의무도 져야할 리가 없다. 하나님이 자기 의사에 의해서 또 자기 약속으로 인하여 의무를 가진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 자신에게만 돌릴 일이다.

그것은 어떤 인간도 결코 응할 수 없는 도전장이다. "누가 먼저 하나님께 드려서 갚으심을 다시 얻을는지" 시험해 보게 해라(롬 11:35).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께서는 종교로 인한 이득을 보지 못하는 때에 우리는 우리 종교로 말미암아(욥이 그런 것같이 보이는데) 이익보기를 꼭 받을 빚 독촉하듯 요구해야 마땅하단 말인가?

1. 엘리후는 하나님이 사람보다 뛰어나게 높다는 사실을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 것은 누구나가 다 일치하여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엘리후는 높은 궁창과 구름 따위의 시각적 증명을 통하여 우리와 욥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노력한다(5절). 그것들은 우리보다 훨씬 높이 떠 있으나 하나님은 그들보다도 더 높은 데 계신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 죄악이나 예배가 미치기에 너무 높은 데 좌정하고 계신 게 아닌가!

"하늘을 쳐다보며 구름을 바라보아라."

하나님은 인간이 바로 서 있도록 창조하셨다. 그래서 Caelumque tueri jussit-즉 사람들로 하여금 하늘을 쳐다보게 명하셨다. 우상 숭배자들은 위를 쳐다보고 하늘의 천군들과 해나 달 따위의 일월 성신에 경배 드렸으나, 우리는 하늘을 우러러보기는 하되 만군의 여호와께만 경배를 드려야 한다. 일월성신이 우리 위에 높이 떠 있으나, 하나님은 그들보다 무한히 높이 계신다. "그의 영광은 하늘 위에 계시며"(시 8:1), 그에 대한 지식은 하늘보다 높다(욥 11:8).

2. 그러나 엘리후는 추단하기를 하나님은 우리의 행하는 일에 의하여 이리저리 영향을 받는 분은 아니시라는 것이다.

(1) 인간은 우리 인간의 소행에 따라 더 개선되기도 하고, 더 손상되기도 하는 존재라고 그는 인정하고 있다(8절).

"네 악은 아마 너와 같은 인간을 해할 수" 있으며, 사람의 외적 관심사에 있어서 고통을 야기시킬 수 있다.

악인은 자기 이웃을 다치게 하거나 강탈하거나 중상하기도 하며 또 그를 죄중으로 끌고 들어가, 그의 영혼에 손해를 입히게 할 수 있다. 너의 의로움과 네 정의, 네 자비, 너의 지혜나 경건은 아마 "인간에게 유익"을 줄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의 선함은 "땅에 있는 성도들에게까지 뻗친다"(시 16:3). 우리와 같은 인간에게는 해를 끼칠 능력도 인자를 베풀 능력도 우리는 갖추고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에 있어서 만유의 주시요 심판관이신 여호와께서는 스스로 관계하실 터이니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상 주실 것이요, 제 동포나 같은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자들은 벌하실 것이다.



(2) 그러나 지구상의 어떤 인간이나 가장 위대한 인간이 행하는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참으로 손해를 입으신다든지, 이득을 보신다는 것에는 그가 전적인 부정을 표하고 있다.

[1] 극악무도한 죄인의 죄도 그에게는 아무런 피해를 줄 수 없다(6절). "당신이 고의로 범죄한들, 하나님께 가해할 계획을 품고서 고압적으로 범죄한다고 한들, 아니 당신의 죄악이 관영하며, 악행이 아무리 자주 행해진들, 당신이 하나님께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 말은 육욕을 가진 심령에 대한 도전장이며 가장 담대한 죄인에게라도 마음대로 해 볼테면 해보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가장 악한 원수도 하나님께는 실질적 손해를 입힐 권세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하나님의 크심과 영광을 웅변으로 말해 주는 것이다. 죄악이란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는 죄인이 그런 계획을 하며 하나님도 그렇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영예에 대한 훼손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것은 "하나님께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가 없다."

죄인의 악한 뜻도 무능한 악의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은 그의 존재나 온전하심을 파괴할 수도 없고, 그의 권세와 주권의 보좌에서 그를 끌어 내리지도 못하며, 그의 재산이나 소유를 줄이지도 못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평강이나 안식을 어지럽힐 수도 없으며, 그의 의도나 계획을 패배시키지도 못하고, 그의 본질직인 영광을 훼손시킬 수도 없다. 그러므로 "내가 내 죄에서 정하게 되는 것이 어떤 유익함을 주랴?"라고 한 욥의 말에는 잘못이 있다.

하나님은 욥의 개심으로 말미암아 아무 이득을 보시지 않는 분이시다. 그렇다고 할 때 만약 욥이 득을 보지 않는다면 누가 이익을 얻는단 말인가?



[2] 가장 훌륭한 성도의 섬김도 그에게는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7절). "네가 의롭다고 한들 그에게 네가 무엇을 드리겠느냐?" 그는 우리의 봉사도 필요 없으시다.

만일 하나님께서 어떤 일이 완성되기를 바라신다면, 그에게도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어떤 것보다 더 훌륭한 수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는 종교도 하나님이 경축해 마지않는 것에까지는 전혀 도달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입으신 것은 얼토당토 않은 일이며, 도리어 우리가 그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 그는 우리를 의롭게 만들어 주시며 우리의 의를 용납해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어떤 것도 요구할 수가 없고, 가령 우리가 우리의 기대하는 바를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등 불평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받았음을 감사해야 할 이유만 있다.

 

35:2 없음.

 

35:3 없음.

 

35:4 없음.

 

35:5 없음.

 

35:6 없음.

 

35:7 없음.

 

35:8 없음.

 

35:9

엘리후의 연설(13)(욥기 35:9-13)

엘리후는 욥이 했던 다른 말에 대한 대답을 여기서 하고 있다. 그는 욥의 이 말들이 하나님의 공의와 인자하심에 대한 많은 것을 반영하는 말이라고 생각하였으므로 한 마디의 언급도 없이 지나쳐서는 아니 되겠다고 여겼던 것이다.

Ⅰ. 욥이 불평을 품었던 것들은 어떤 일들인가? 그것은 이러하였다. 곧 하나님은 압제당하는 자들이 압제자들에 대하여 부르짖는 바를 돌아 보지 않으셨다는 것이다(9절). "많은 억압으로 인하여, 오만불손한 독재자들이 가난한 자에게 내리는 많은 신고와, 폭군들이 저들에게 주는 야만적인 대우가 학대받는 자들로 하여금 부르짖게 하나, 그 울부짖음이 전혀 헛되도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들을 시정하시는 것 같지가 않구나. 그들은 소리쳐 부르짖으며 자기들 위에 무겁게 누르고 있는 세력있는 자의 팔로 인하여 울부짖기를 계속하고 있도다." 이 말은 24장 12절에 나오는 욥의 말을 가리키는 것 같다. "성 중에서부터 많은 사람들이 신음하여 상한 자의 혼이 압제자들에 대하여 부르짖되, 하나님께서는 저들에게 어리석음을 놓지 않으시며" 그 일로 인하여 그들과 셈하지 않으시도다. 이것은 욥이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고, 하나님의 공의와 그의 처리하심을 두고 생각하더라도 조화시킬 수 없는 것이었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계시는가? 계신다면 그가 그토록 천천히 들으시며 그같이 둔하게 보실 수가 있겠는가?"

Ⅱ. 엘리후는 난점을 어떻게 해결하는가? 학대받는 자의 외침이 들리지 않는다면 그 잘못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기꺼이 듣고 도우실 준비를 갖추고 계시다. 그러나 잘못은 저들 자신에게 있다. "그들이 구하여도 얻지 못함은 그들이 잘못 구하기 때문이다"(약 4:3).

"그들이 세력있는 자의 팔로 인하여 부르짖거나," 그것을 불평하는 부르짖음이요, 통곡의 부르짖음이며, 회개하고 기도하는 부르짖음이 아니다. 또 본성과 욕정의 부르짖음이지, 은혜의 부르짖음이 아니기 때문이다(호 7:14 참조). "그들이 침상에서 슬피 울면서도, 성심으로 내게 부르짖지 아니 하였도다." 그런 우리가 어떻게 응답받고 구원받기를 기대하겠느냐?

1. 그들은 그들의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을 찾지도 아니하며, 하나님을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10절). "그러나 나의 창조주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가?" 하고 말하는 이가 하나도 없구나.

고통은 우리가 하나님을 일찍 찾도록 지시하기 위하여 보내지는 것이며, 또 그렇게 하도록 재촉하기 위해서 내려지는 것이다(시 78:34). 그러나 중한 억압하에서 신음하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관계치 아니하며, 그들의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만약 하나님을 상관하며 그 손길을 깨닫는다면 그들의 고통을 더 인내성 있게 견딜 수 있으며, 그 고난으로 인하여 더 큰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고통을 당하고 억압을 받는 다수의 무리 중에서 자기의 환난으로 말미암아 얻을 수 있는 유익함을 제대로 취하는 자들은 거의 없다. 그들은 자기 고통으로 인하여 마지 못해서라도 하나님께 돌아가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아주 드물다. 인류 중에서, 빈궁하고 비참한 지역 인구에게서 경건한 종교를 찾기가 힘든다는 사실은 통탄할 만한 일이다. 누구나가 자기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법이다. "그러나 아무도 나를 조성하신 이, 곧 하나님께서는 어디에 계시냐?고 말하는 이가 없다." 즉 누구도 자기 죄를 회개하고 자기를 치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아무도 하나님의 낯과 은총을 찾지 아니하고, 외부적인 그들의 환난을 상쇄시켜 줄 그의 위로를 하나님에게서 구하려 하지 아니한다.

그들은 그들의 비참한 상황 속에 완전히 사로 잡혀 있으면서도, 마치 그것이 하나님을 찾지 않고 세상살이를 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변명이라도 되는 듯이 처신하는데, 오히려 그들은 그 고난으로 인하여 더욱 더 굳게 하나님께로 밀착하여야 마땅하다.



(1) 하나님은 우리를 조성하신 분이시요, 우리 존재를 지으신 이로서, 우리는 그런 개념에서 볼 때 하나님을 존중하고 기억해야 한다(전 12:1). "나를 지으신 이들은 하나님"이란 복수적 표현은 어떤 사람이 생각하는 대로 예시가 아니라면, 신성의 통일에 있어서의 삼위일체의 암시이다.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창 1:26-28).

(2) 그러므로 하나님을 찾아 묻는 일은 곧 우리의 의무이다. 그 분은 어디 계시는가? 우리가 우리의 충성을 바치고 그분께 대한 우리의 의존성과 그에게 대한 우리의 의무를 고백해 드릴 그는 어디에 계시는가? 우리가 생존과 보호를 요청할 수 있는 분, 율법을 전수 받을 수 있으며, 그 은총 안에서 우리의 행복을 구할 수 있는 그 분, 우리가 또 그의 권능에서부터 우리의 존재를 부여받은 바 그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3) 인간의 자손으로서 그를 찾아 묻는 이들이 그토록 드물다는 사실은 통탄할 일이다. "환란은 어디에 있느냐? 부귀는 어디에 있느냐? 유리한 매매물품은 어디에 있는가?"고 모두들 묻고 있지만, "나를 지으신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라고 묻는 자는 아무도 없다.

2. 그들은 그들의 고통 중에, 그들의 환난 하에서 누리는 하나님의 자비를 주목하지 않으며, 그 고통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도 없고 따라서 하나님이 자기들을 고통으로부터 구출해 주시리라는 기대감을 가질 수도 없다.

(1) 그는 우리의 내적 위로와 우리의 외적 고통 하에서의 기쁨을 준비하여 제공해 주신다. 우리는 그 점을 이용해야 하며, 그가 우리의 고난을 없이해 주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는 밤중에 노래하게 하신다." 즉 우리의 형편이 대단히 암담하고 아무리 슬프고 우울한 지경에 처해 있을 때에라도, 하나님 안에는 또 그의 충분한 약속과 섭리 안에는 우리를 지탱시켜 줄 만한 것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기쁨과 위안으로 가득 채워 주는 동시에, 매사에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감사를 드리게 하고, 곤고한 때에라도 즐거워 하게 할 것이 있다.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통만을 곰곰이 생각하기만 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비장해 두신 그의 위로를 소홀히 여기면, 하나님으로서는 우리의 기도를 마다하시는 것이 지당하시다.

(2) 그는 우리의 이성과 이해력의 사용을 우리에게 남겨 주신다(11절). "우리를 교육하시기를 땅의 짐승에게 하심보다 더하게 하시는 이가 누구시냐?" 즉 누가 짐승들이 받은 것보다 더 고귀한 능력과 기능을 우리에게 부여하셨으며, 더 훌륭한 쾌락과 직업을 영구히 소유할 능력이 있도록 하셨는가?

[1] 이제 여기에서 나타내는 바는 비록 고통의 가장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중에라도 우리에게 감사할 만한 일들을 내려 주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빼앗긴 것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에게는 죽지 않는 영혼, 즉 온 세상보다 더 가치가 있는 보석들인 우리 영혼이 빼앗기기 않고 계속 남아 있다. 몸을 죽이는 자들이라 하더라도 "영혼"은 해할 수가 없다. 만약 우리의 고통이 영혼의 기능을 행사하지 못하게 방해할 만큼 기승을 부리지 못하고, 우리가 이성의 활용과 우리 양심의 평화를 누릴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의 재난이 어떤 압박을 준다 하더라도 우리는 감사할 만한 큰 이유가 있다.

[2] 왜 우리가 고통 중에라도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을 찾아야 하며 그에게 구해야 하는가 하는 이유를 이것은 나타낸다. 이것은 이상의 가장 훌륭한 점이다. 곧 그것은 우리에게 종교의 능력이 되며, 우리가 "금수보다 더 많은 가르침을 받는다"는 사실에서 특히 그러하다. 짐승이나 새는 먹이나 약을 찾아내는 일과, 피난처를 구하는 일에 있어서 놀랄 만한 본능과 지혜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내 조성자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하며 물을 수 있는 짐승이나 새는 하나도 없다. 논리학과 철학, 정치학 따위와 비슷한 것들이 야성의 피조물들 사이에서 관찰돼 오고 있으나, 신성이나 종교에 대한 것은 결코 발견되지 않았다. 이런 것들은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억압을 받는 자들이 "강대한 자의 팔 때문에" 부르짖기만 하고 하나님을 쳐다보며 구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상처를 입을 때만 호소하는 짐승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 그들은 인간이 짐승보다 월등히 진보할 수 있었던 수단인 교훈과 지혜를 망각한 셈이다. 하나님은 야성의 조수가 그 기능의 가장 선한대로 그에게 부르짖기 때문에 그것들을 구제해 주신다(욥 38:41; 시 104:21). 그러나 하나님을 자기의 창조주로 찾을 능력이 있으면서도, 야수와 별반 다르지 않게 부르짖기만 하는 인간들은 구원을 기대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3. 그들은 그들의 고통 중에도 그 교만을 꺾이지 아니하였다. 그들이 받은 고통은 그들을 고행시켜 정화되도록 하고 그들에게서 교만을 감추기 위하여 내리신 것이다(12절). "그들이 거기서 부르짖으나"-그들은 거기에 누워 그들의 압제자들로 인해 소리지르며 그들의 주위에 있는 모든 자의 귀를 그들의 불평으로 가득 채우고, 하나님과 그의 섭리를 상고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으나,-"응낙하는 자가 없도다."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구원을 베풀지 아니하며, 사람들도 그들을 눈여겨 보지 아니한다. 왜 그런가? 그것은 "악인의 교만 때문"이다. 그들은 사곡한 인간들이다. 그들은 "그 마음 속에 있는 불의를 존중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할 것이다(시 66:18; 사 1:15). "하나님은 그런 죄인의 소리는 듣지 아니하신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사악함을 인하여 스스로를 고난 속으로 몰아 넣었다. 그들은 악마의 수중에 떨어진 불쌍한 노리개이다. 그런데 누가 그들에게 연민의 정을 품겠는가? 그러나 비단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교만하여서 하나님께 구하지 아니하며(시 10:4), 가령 그에게 부르짖는다고 한들 하나님은 응낙하지 않으신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것은 "겸손한 자의 소원" 뿐이며, 그는 자기가 먼저 그 은혜로 예비해 두셨다가 구원에 합당하도록 만들어 두신 그의 섭리에 의해서 저들을 구원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일 겸손하도록 요구하는 고통을 당하는 중에도 심령이 겸비하지 아니하며 자만심이 꺾이지 않는다면,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이제 경우는 빤하다. 만약 우리가 현재 당하고 있는 억압이나 고통이 물러나게 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부르짖으나, 그것이 제해지지 아니한다면 그것은 여호와의 손이 짧아서도 아니요 그의 귀가 들리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고통이 아직 제 할 일을 다 마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무리 겸손하다고 해도 충분히 자기를 비하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하여 겸손하는 일을 스스로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4. 그들은 진지하지도 않고 정직하지도 않으며, 하나님께 대한 탄원에 있어서도 마음 속에서부터 우러나와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는 듣지도 아니하시며 응답하지도 아니하신다(13절). "하나님은 헛된 것을 듣지 아니하신다." 즉 위선적인 기도는 헛된 기도여서 거짓된 입술에서 나온다. 하나님이 그런 기도에 귀 기울이실 줄로 생각한다는 것은 망상이다. 하나님은 심령을 감찰하시고 "내면의 진리"를 요구하신다.

 

35:10 없음.

 

35:11 없음.

 

35:12 없음.

 

35:13 없음.

 

35:14

엘리후의 연설(14)(욥기 35:14-16)

Ⅰ. 엘리후가 욥에게 힐책하는 다른 버릇없는 욥의 말이 여기에 나온다(14절). "너는 네가 하나님을 뵈올 수 없다고 말하는구나."

1. "당신은 당신이 그의 엄격한 처사가 뜻하는 바를 이해치 못하겠다고 불평하며, 그의 처사가 목적하고 의도하는 바를 분간하지 못하겠다고 불평합니다"(욥 23:8, 9).

2. "당신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돌이킴을 보지 못하리라고 포기하며, 황금시절을 다시 보기 어려우리라고 절망하여, 만사 휴의라고 쉽사리 단념해 버립니다." 마치 "나는 여호와를 뵈옵지 못하리라"고 한 히스기야와 같다(사 38:11). 우리가 번영할 때는 우리 산이 결코 낮아지지 않으리라고 기꺼이 생각해 보는 것과 같이, 우리가 역경에 처해 있을 때에도 우리는 우리의 골짜기가 결코 메꾸워지지 않으리라고 굳이 생각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 모두가 다 "내일도 오늘과 다름없이 마찬가지임에 틀림없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이는 일기가 맑거나 궂거나 간에 항상 같으리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름없는 불합리한 생각이며, 만조가 항상 밀물로서만 흐를 것이라거나, 혹은 간조가 언제나 썰물로서 빠져 나가려니 하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터무니 없는 생각이다.

Ⅱ. 욥이 말한 이 절망적인 말에 대하여 엘리후가 내리는 대답은 이와 같다.

1. 그가 하나님을 향해 쳐다보는 동안에는 욥이 이처럼 자포자기하여 말할 까닭이 없다는 것이다. "판단은 그 앞에 있다." 즉 하나님은 자기가 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 알고 계시며, 모든 일을 무한하신 지혜와 공의로 행하실 것입니다. 그는 섭리의 전 계획과 모형을 자기 앞에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모르지만 그는 자기가 행할 일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행하시는 일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 앞에는 심판의 날이 있습니다. 즉 표면적으로 혼란한 일인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들이 바르게 나타나고, 그 일들의 어두웠던 내막이 밝히 설명될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때에는 이들 알 수 없던 사건들의 완전한 의미와, 이들 음울한 사건들의 최종적 결말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는 그의 얼굴을 기쁨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를 신뢰하시오. 그를 의지하고 그를 기다리며, 최후에는 결과가 유익하게 될 것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무한히 지혜로우시며 의로우시고 신실하신 분이시며, 더욱이 그가 심판의 하나님이심을 우리가 살펴 볼 때(사 30:18), 그로부터 오는 구원을 단념할 만한 아무런 이유를 찾을 수 없으며, 오히려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소망을 둘 만한 온갖 이유를 발견할 수가 있다 .구원은 적당한 때에 가장 적절한 시기에 올 것이다.

2. 만일 욥이 아직 자기 고통의 종결을 보지 못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그가 이와 같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그 하나님을 기다리지 않은 데 있다는 것이다(15절). "그것이 그렇지 않으므로, 당신이 그와 같이 하나님께 신뢰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당초에는 사랑으로부터 나온 고통에, 이제는 불쾌하심까지 혼합되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노여움 가운데에서 당신을 찾으셨고, 당신이 마음 속에서 그를 신뢰하기를 구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그토록 완악한 의구심을 품은 데 대해 불쾌하게 여기셨습니다." 만일 우리의 고난에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섞여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우리 자신의 탓으로 돌려야 한다. 우리가 고통 중에 있으면서도 올바로 처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언쟁하며 초조해 하고 참을성이 없으며 신의 섭리에 대해 불신감을 가지고 있다. 욥의 경우가 바로 이러했다.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며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잠 19:3).

그러나 엘리후는 욥이 그처럼 지독한 궁지에 몰려 있으면서도, 아직까지 구원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해야만 마땅한데도 이 점을 알고 있지 못하고, 뼈저리게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엘리후는 "욥이 헛되이 자기 입을 열었다"고 결론짓는다(16절). 즉 그는 그의 불평을 호소하며, 그것들에 대한 교정을 부르짖고, 자신의 의로움을 정당화하여 그 자신의 결백을 밝히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헛된 일이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아니하며, 기다리지 아니하고, 자기의 고통 가운데에서 하나님께 올바른 존경심을 품지 아니하는 까닭이다. 그가 "말은 많이 하였으며" 아주 많이 지껄였으되, 전부가 "지식이 없는 말"이었으며 모두가 전혀 헛된 말이었다. 이는 그가 하나님 안에서 스스로를 담대히 하지 않으며, 그 앞에서 스스로를 낮추지 않은 까닭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호소를 하거나 우리 자신의 무죄를 고집한다고 하더라도, 만일 고통을 보내신 목적에 대하여 해답을 얻으려고 궁리해 보지 않는다면 헛된 일이며, 또 만일 우리가 구원해 주시길 바라서 기도를 드린다고 하더라도 만약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은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그 어떤 것도 얻을 것을 기대"하지 말라(약 1:7). 혹은 이 16절 말씀은 욥이 한 모든 말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욥의 이야기 중 몇몇 구절은 불합리한 점을 나타내었기 때문에 같은 식으로 그의 무지와 실언을 열매맺는 다른 많은 구절이 있다고 엘리후는 내린 것이다.

엘리후는 욥의 친구들과 같이 욥을 위선자라고 비난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심령이 격하였을 때 "자기 입술로 무분별하게 말한" 모세의 죄가 욥에게도 있다고 질책하였다. 어느 때라도 우리가 그런 행동을 하는 때에는(말에 범죄치 않는 자가 누가 있느냐?) 그 잘못에 대하여 꾸중하는 것이 바로 고마운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욥이 행한 것처럼 그것을 참을성 있게 받아들이고, 정중하게 받아들여서, 우리가 실언하였던 말을 되풀이할 것이 아니라, 그 말들을 취소해야 한다.

 

35:15 없음.

 

35:16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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