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후의 연설(8)(욥기 34:1-9)
Ⅰ. 엘리후는 자기 스스로를 낮추어서 청중에서 말하며, 웅변자와 같이 저들의 호의와 호감어린 주의를 획득하려고 노력한다.
1. 그는 저들을 "지혜 있는 자들"이라고 칭하며 "지식 있는 자들"이라고 부른다(2절). 분별력을 가진 자들과 교분을 맺는다는 것은 유쾌한 일이다."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가 이르는 말을 판단하라"(고전 10:15). 엘리후는 그들과 의견을 달리 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를 지혜롭다, 지식 있는 자들이라 칭하고 있다. 편벽뇐 논쟁자들은 자기와 의견이 같지 아니한 자들이면 무조건 모두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몰아 붙이기 일쑤다. 비록 우리의 감정이 그들과 일치하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인정할 만큼 지혜로운 자들에게는 사의를 표하는 것이 공의의 일부를 행하는 것이다.
2. 그는 그들의 판단에 호소하며, 따라서 저희의 심판을 달게 받는다(3절). 지각 있는 자의 "귀가 말을 분별하며," 그 말이 진실된 것인지, 아니면 허위인지, 옳은 건지 그릇된 것인지, 그 시비곡직을 분별한다. 그러므로 말하는 자는 지식 있는 자의 시험에 합격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우리가 우리 귀에 들리는 모든 말을 그대로 믿지 아니하고 검증해야 하듯이, 우리가 하는 말이 검증받는 것을 조금도 거리낌 없이 용납해야 한다.
3. 그는 이 문제를 정밀히 검토하고 토론하는 일에 있어서 그들과 제휴할 것을 주장하였다(4절). 그는 유독 자기만이 옳은 것처럼 독단적으로 행치 아니하고, 정당하고 선한 일이나 부당하고 악한 일을 혼자 말하려 하지 않으며, 그것을 찾아 내는 일에 있어 그들과 공동으로 하기를 기꺼이 여기고 상의하기를 원하고 있다. "우리는 모든 적개심과 반목질시와, 편견을 버리고 우리가 한 때 매달려 고집하던 매몰찬 태도와, 반박하며 젠체하던 거동을 모두 합심하여 지양합시다. 그리하여 옳은 판단을 우리가 택합시다. 정당한 원칙을 택하여 이제 계속하며 말할 것에 적용하도록 하고, 그리함으로써 진리를 발견하는 데 올바른 방법을 취하도록 합시다. 무엇이 선하며 무엇이 선하지 않은가에 대한 우리의 근거나 이유를 상호전달하고 의견을 교환함으로써 우리끼리 보도록 합시다."우리가 그것을 밝혀 내고 탐색하는 일에 상호 협력하기를 동의한다면, 옳은 것이 무엇인지 식별할 수 있을 것 같다.
Ⅱ. 그는 욥이 한 몇몇 과격한 언사를 열심히 책하고 있다.
욥은 하나님의 처사를 곰곰이 생각해 보고, 어째서 자기가 법정에 출두해서는 안 되는지, 또 그 일로 해서 견책을 받아야 하는지 미심쩍어하는 소청을 제기하였다.
1. 그는 자기가 기억해 낼 수 있는대로 가능한 욥의 말들을 간신히 인용하고 있다.(1) 욥은 자기 자신의 무죄함을 고집하였다. 그가 이르기를 "나는 의롭다"고 하였다(5절). 또 그는 자기 죄를 시인하도록 촉구당하자 완강히 자기 항변을 주장하였다. "나는 무죄이다. 내가 정직하나 거짓말쟁이가 되어야 합니까?"(6절) 욥은 이런 취지로 이야기하였다. "내가 나의 의를 굳게 붙잡고 놓지 아니하리라"(27:6).
(2) 욥은 하나님이 자기를 불공정하게 취급하셨다고 흠을 잡았다. 즉 하나님이 자기에게 고통을 내리사 자기를 학대하셨으며, 자기를 의롭게 여기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 의로운 판단을 제하셨다"라고 욥은 말하였다(27:2).
(3) 욥은 구원을 절망적으로 포기하였고 하나님이 자기를 도울 수도 없으며 돕고자 하지도 않으신다고 결론을 내렸다.
"내 상처가 낫지 못하게 되었으며 죽을지 모를 정도로 되었으되 나는 허물이 없도다. 내 손에는 어떤 불의도 없도다…"(욥 16:16, 17).
(4) 욥은 하나님께 봉사하여도 실제로 얻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그 어느 사람도 자기 종교로 인하여 종국에 가서는 더 나아질 것도 없다고 말하였다(9절). 그는 자기가 "하나님을 기뻐하는 일이 사람에게 무익하다"고 생각하는 듯한 의심스런 말을 하였다. 종교에는 현재적 즐거움도 있다고 인정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하며 그와 교제하고 그와 하나가 되어 협력하며 마치 에녹이 그러했듯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 이외에 종교에 있다면 무엇이 있겠는가?
이것은 종교에 관한 진정한 개념이며 아울러 즐거운 것에 이르는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헛된 것"인양(말 3:14), 그 이득을 부정하고 있다. 이 점을 엘리후는 욥의 견해로 추리하며, 욥이 한 발언 가운데에서 풍자하여 말한 것이다(욥 9:22). "그는 순전한 자나 악한 자를 다 멸망시킨다." 물론 이 말 가운데에는 진리가 일면 내포돼 있기도 하나(왜냐하면 만물이 결국은 마찬가지로 되기 때문에), 그 말이 잘못 표현되었고, 따라서 이런 비난을 야기 시키기에 족하였다. 그런 까닭에 욥은 그 말을 듣고도 잠잠히 앉아 있었고, 자기 자신의 변호를 시도하지 않았다. 카릴(Caryl)씨는 그 점을 잘 관찰하여 선량한 사람들도 때로는 자기들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보다 더 심하게 말하는 수가 있으며, 착한 사람이 어떤 비난받을 만한 짓을 저질렀을 때에는 자기 변명을 하기는커녕 그가 받아야 마땅한 것 이상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였다.
2. 그는 그 일에 대하여 욥을 아주 통열하게 책망한다. 대체로 "어느 사람이 욥과 같으랴?"(7절) "당신들은 욥과 같은 사람을 안 적이 있습니까? 여지껏 그처럼 호언장담하는 사람의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는 욥을 다음과 같은 자로 묘사한다.(1) 경멸하는 자들의 자리에 앉은 자. "그는 훼방하기를 물 마시듯 합니다." 즉 "그는 하나님과 자기 친우들을 모두 비난할 만큼 굉장히 분방한 자유를 누리며, 그렇게 하는 데서 기쁨을 얻고, 자기 세상에 있어서도 매우 구애를 받지 아니합니다." 혹은 "그는 타인들이 자기 형제에게 퍼부어 대는 경멸과 멸시를 듣기를 아주 좋아하며, 그런 자들을 즐거워하여,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기조차 합니다." 혹은 몇몇 사람이 해석하는 대로 "그의 이 어리석은 발언으로 인하여 그는 자신을 괄시받을 표적으로 삼고, 자신을 비난의 무방비 상태로 내어놓으며, 타인들로 하여금 자기를 비웃게 할 틈을 내 보이고 있습니다. 그 반면에 그의 종교는 그의 잘못으로 인하여 수난을 당하며, 그 명예는 그의 탓으로 훼손당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우매한 자에게 욕먹을" 말이나 행동을 우리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지 마실 것을 기도드릴 필요가 있다(시 39:8).
(2) 불경건한 자들의 진로로 나아가며, 죄인의 길에 서 있는 자 "그는 악한 일을 행하는 자와 사귀며, 악인과 함께 다닌다"(8절). 이것은 그가 담소하면서 그들과 사귄 게 아니라, 그의 생각으로 악인들에게 호의를 가지며, 그들을 묵인하고 그 손을 강하게 한 것을 말한다(이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9절에 나오듯). 하나님을 기뻐하나 사람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면 왜 그는 악을 행하는 자들과 더불어 가축에게 하듯 자기의 욕망의 목에 고삐를 채우지 아니하였던가? "내가 내 손을 씻었으나 아무 소용이 없도다"라고 말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궤휼을 행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시 73:13, 14), 자기 대적들을 배불리 충족시키며 그들이 말하는 대로 얘기하는 자이다.
엘리후의 연설(9)(욥기 34:10-15)
엘리후가 한 이야기의 목표는 욥을 자기 고통과 화해시키며, 자기 병에 만족하게 하여, 비록 병고 중에서라도 그 심령을 진정시키기 위해서였다. 이를 위하여 그는 앞 장에서 나타내 보이기를, 하나님은 비록 그에게 고통을 내리시지만 그를 해치려는 뜻을 가지신 게 아니라, 그의 영적 은혜를 위해 그 고통을 작정하신 것이라고 하였다. 이 장에서 엘리후가 제시해 보이는 것은 하나님께서 욥을 괴롭히시고 학대한 일은 없으며, 그가 당해 마땅한 벌보다 더 지나친 형벌이 그에게 내려진 게 아니란 것이다. 이 문단에서는 그의 이야기를 그 일행 모두에게 향하여 하고 있다. "총명한 자들이여! 내 말을 들으시오(10절). 내가 말하는 것에 동의함으로써 당신들이 지식 있는 자들임을 표하시오." 그가 말하는 것은 곧,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자기 피조물에게 결코 악을 행치 아니하였으며, 어떤 해도 끼치지 아니하실 것이고, 그의 길은 공평하되 우리 길은 불공평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장되는 진리는 하나님의 모든 처사가 정당하며, 공평하다는 것에 관해서이다. 이 구절에서 관찰할 것은 다음과 같다.
Ⅰ. 이 진리가 얼마나 명백히 단정되고 있는지 주목해 보라. 소극적으로도 단언하고 적극적으로도 잘라 말하고 있다.
1. 그는 아무에게도 악을 행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사악한 일을 행하실 수가 없으시며 전능자는 또한 불의를 행치 않으신다"(10절). 그런 행악은 그의 본성의 온전하심과 모순이 되는 것이며, 그의 의지의 순수성과도 또한 조화되지 아니한다(12절). "하나님은 악하게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공의로운 판단을 굽히지 아니하시느니라." 그는 악행을 할 수도 없으며 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어떤 사람도 가혹하게 다루지 아니하신다. 그는 죄악의 폐해를 보시는 곳 이외에선 징벌의 해를 주지 아니하시고, 또 죄악의 폐해가 눈에 띄는 곳이라 하더라도 터무니없이 부당한 정도의 징벌을 내리시지는 않으신다. 그렇게 부당한 징벌을 가하신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 자체가 불의를 자행하는 일이 되고, 악행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만약 하나님이 소청을 받으시거나 최종적 판결을 내리신다고 할 때에는 그 호소받은 사건이나 판결을 내리실 일의 시비곡직을 유의하시는 것이지, 사람의 체면을 봐서 차별을 두시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정실에 흘러 사람을 차별하신다고 할 것 같으면 판결을 굽게 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사람에게라도 결코 부당히 행치 아니하시며, 어떤 자에게도 그가 의로움을 부정하지 아니하신다. "하늘들이 그의 의로움을 곧 선포할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신 고로 무한히 온전하시며, 거룩하셔서, 죽지도 거짓말하지도 못하시고, 자기 스스로를 억제하지도 못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악행하지도, 사람들의 악행을 묵인하지도 못하신다. 그는 전능자이실지라도 이 세상 강자들이 흔히 하듯 불의를 옹호하기 위해 자기 권세를 사용하시는 일을 결코 행치 않으신다. 그는 shaddai-즉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그는 "악에게 시험을 받아" 불의를 행하실 리가 없다(약 1:13).
2. 그는 모든 자에게 공의를 행사하신다(11절). "그는 사람의 일을 따라 보응하신다." 선행은 보상을 받을 터이요, 악행은 그에 따라 벌을 받거나, 보응을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조만간에 이 세상에서나 올 세상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의 행한 길에 따라 보응받게 됨을 깨닫게 하실 것이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실에 따라 보응받게 하는 것은 공의를 집행하는 철칙이다. "의로운 자에게 고하라! 그들은 무사하리라." "악인에게는 화로다. 그들은 해를 입을 것이니라." 참을성 있게 계속하는 봉사가 지금 당장은 보상받지 못하고, 고칠 줄 모르고 계속 범하는 죄가 당장은 응징받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그 공력에 따라서 자기가 지체한 데 대한 이자까지 붙여서 완전히 보응할 날이 이를 것이다.Ⅱ. 그것을 얼마나 격앙한 어조로 주장하는지 주목해 보라.
1. 그 일의 진실성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주장하고 있다. "진실로" 그렇다(12절). 그것은 부인하거나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진실이다. 하나님이 사악하게 행치 않으시리라는 것은 우리가 당연지사로 받아들이고, 누구나가 다 일치하게 인정하는 사실이다.2. 이에 반하여 바로 그런 생각과 정반대의 것을 혐오한다(10절).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실 의향은 그에게 추호도 없으시며," 우리도 그건 상상조차 할 마음이 없어야 하고, 그런 기미를 보이거나 하나님을 험집는 것같은 말을 하거나 하는 일은 일체 없어야 한다.
Ⅲ. 두 가지 논증에 의해 그 사실이 명백하게 증명되고 있다.
1. 그의 독립되고 절대적인 주권과 지배(13절). "누가 땅을 그에게 맡겼으며," 누가 그를 이 지상 인간의 만사를 처리하도록 위임하였느냐? 더욱이 누가 온 인간 세상을 정하였느냐?그는 인간의 열국들을 통치하는 유일하신 분이시며, 그 일을 스스로 행하시고, 누군가에게서 위탁받은 것도 아니며, 다른 누구에게 맡기신 것도 아니다.
(1) 분명한 것은 정사가 그의 것이며, 하늘 위나 땅에서나 모든 무리들에게 그는 자기 뜻에 따라서 행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불공평하다는 비난을 받을 수가 없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까?"(창 18:25) 만일 "그에게" 어떠한 "불의라도 있거나," 있을 수 있다고 하면, 어떻게 그가 세상을 다스리거나 심판하겠느냐?(롬 3:5, 6) 그런 무제한의 권세를 가지신 분은 자기 안에 흠없는 순정함을 정녕코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또한 왜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처사를 잠자코 따라가야 마땅한가 하는데 대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
온 세계를 정하신 자가 우리와 우리의 관심사를 정하지 않겠는가?
(2) 확실한 것은 그가 자기 권세를 다른 누구에게서 빌어오지 않았으며, 그의 권세가 누구에게서 위탁받은 분배품이 아니라, 원래적인 것이고, 그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만약 그가 완전하게 공정하지 못하다면 온 세계와 세상만사는 곧 극도의 혼란에 놓이게 될 것이다.
이 지구상에서 최고의 권력자들이라도 자기 위에는 하나님이 계시며, 그들은 그에게 책임적인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함부로 불의를 자행할 수는 도저히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위에 아무도 없으므로 어떤 통제받을 필요가 있는 일을 하나님이 행하신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그의 본성의 온전하심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그가 절대적 주권자라면 우리는 그에게 복종하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호소할 더 높은 권세자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덕행이나 선행은 필수적으로 행해야 할 일이다.
2. 항거할 수 없는 그의 권세(14절). "만약 그가 사람과 다투시기로 인간에 대한 자기 마음을 작정하신다면," 더욱이(어떤 사람들이 읽는 대로) 만약 그가 인간을 멸하시기로 "자기 마음을 정하신다면," 또 만일 그가 인간을 멸하시기로 "자기 마음을 정하신다면," 또 만일 그가 인간을 다루심에 있어서 summu etestas-즉 오직 주권에 의거하여서 하시거나, 혹은 summum Jus-즉 엄격한 공의에 의하여 하실 것 같으면,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의 영과 기운은 곧 사라질 것이며, "모든 혈기있는 자는 일체 다 멸망할 것이다"(15절). 많은 사람들의 정직함도 따지고 보면 순전히 저들의 무력함에서 연유한다. 그들은 악이 행해지더라도 더 이상 그것을 지탱할 수 없기 때문에 악을 행치 않거나, 악을 행할 능력이 그들 안에 없기 때문에 악을 행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인간이라 하더라도 쉽사리 또 갑자기 그를 분쇄하실 능력이 있으시지만 임의대로 어떤 사람을 자기의 권세를 가지고 멸망시키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의 본성의 무한한 온전하심이며, 또 그것은 불변의 사실이다. 여기서 다음 사실을 살펴 보자.(1)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실 수 있는가? 그는 우리를 금방 티끌로 돌아가게 하실 수가 있다. 이렇게 하시는 데는 그의 전능하신 능력에서 보면 적극적 행동조차 필요하지 않으신 것이다. 그가 우리 생존의 근거가 되는 그의 섭리를 한꺼번에 회수하시기만 하면, 만일 그가 맨 처음에는 자기 수중에서 나왔고 아직도 그의 장중에 쥐어 있는 바로 "그 신과 기운을 자기에게 거두어 들으신다면," 우리는 공기가 빠진 동물 장난감처럼 즉시 소멸하고 말 것이다.
(2) 그는 우리에게 악을 행함이 없이도 어떻게 우리를 처리할 수가 있으신가?
그는 자기가 주신 존재 자체를 회수하실 수가 있으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존재에 관한 한 자의대로 행할 수는 없는 차용인에 불과하며, 또한 우리는 그것을 몰수당하는 수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존재가 계속되는 동안 다른 어떤 위안물이 제거당하든 간에 못살겠다고 아우성을 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엘리후의 연설(10)(욥기 34:16-30)
엘리후는 이 문단에서 욥에게, 보다 더 직접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욥의 친구들에게는 엘리후가 "총명한 자들"이라 규정하고 말을 걸었었는데(10절), 이제 욥에게 이야기하면서도 "네가 총명이 있거든"이란 "전제"를 걸고 있다. "네가 총명이 있거든" 이것을 들으며 내 말을 주목하라(16절)라고 한다.
Ⅰ. 이 말을 들으라. 즉 다음과 같은 말을 들으라. 하나님은 자기가 행동하신 어떤 일로도 사람에게 불평이나 시비를 당치 않으신다. 욥이 불만을 품고 행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처사를 캐묻고 정죄한다는 것은 무엄하고 외람된 짓이다.
1. 그것은 정의에 대한 공공연한 협잡꾼에게 권세를 쥐게 하는 것과 다름없이 얼토당토 않은 짓이다. "공의를 미워하는 자시면 어떻게 처리하시겠느냐?"(17절)의로우신 여호와께서는 의로움을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욥이 비록 온전하고 의로운 자라 하더라도 하나님과 비교한다면 욥조차 공의를 증오하는 자라 말할 수 있다. 그런데도 그가 처리하겠는가? 그런 그가 하나님을 지도하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바로 잡겠다고 나설 수 있겠는가? 우리와 같은 불의한 피조물들이 의로우신 하나님께 권세를 부릴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방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인가?
우리는 우리 본성의 부패함과 우리의 내면에 있는 모순성을 영원하신 공평의 통치(법칙)에 비추어 볼 때, 우리가 하나님에게 명령을 내린다는 일이 얼마나 무례하고 경건치 못한 일인가를 깨닫지 않을 수 없다.
2. 아주 의롭고 무죄한 인사를 법정에 세우고 그를 불리하게 정죄한다는 일은 가령 그가 아주 공정하였다는 사실이 재판에서 명백하게 드러났다고 하더라도 이만저만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니다. "너는 그 모든 길에 있어 의로우신 자를 정죄하겠느냐? 또 그럴 수밖에 없느냐?"3. 그같은 짓은 권세 가진 군주에게 "너는 악하다"고 말하며 재판석의 판사들에게 "너희는 경건치 못하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당치도 아니하고 더 어울리지 않은 일이다(18절).
만약 그같은 말을 한다면 제왕의 위엄이나 판사직에 대한 참지 못할 모독으로 간주될 것이다. 어떤 왕이나 귀인도 그런 말에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통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하여 우리는 반증이 명백히 드러나지 않는 한 이미 내려진 판결은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이 어떻든 간에 면전에서 "당신은 악하오"라고 왕에게 말한다는 것은 적합치 못하다. 나단 선지는 다윗왕에게 비유를 사용하여 견책하였다. 대제사장이나 선지자가 어떻게 했든간에 일반 신민들이 권세 가진 자들에게 그렇게 대담하게 말한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물며 하나님께 그런 불손한 말을 한다는 것, 즉 인간의 체면을 돌아보지 아니하시기 때문에 부정한 일을 행하시도록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는 분에게 불공평하다는 누명을 돌린다는 것은 얼마나 더 어처구니 없는 일인가?
"그는 부자를 가난한 자보다 더 생각하시지는 않으신다." 그러므로 그가 다스린다는 것은 합당하며, 우리가 그에게 비난을 퍼붓는 것은 합당치 못하다(19절).
빈부를 막론하고 하나님께는 평등한 존재다. 위대한 자라고 해서 자기 부귀나 위대함 때문에 더 행복해 지거나 은총을 받는 게 아니다. 빈궁한 자라고 해서 자기의 가난 때문에 더 불행해진다거나 정당한 주장이 무시당하는 일은 결코 없다.
욥은 그가 가난하게 된 이상 자기가 부자일 때만 하나님께 은총을 얻으며 그의 보살피심을 받아야만 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다 그의 손으로 지으심을 받은 바가 되기 때문이다."
저희의 신체도 그러했다. 가난한 자도 부자와 마찬가지로 동일하신 손으로 지음을 입었고 동일한 바탕의 틀로 창조되었다. 그들 형편도 그러했다. 가난한 자도 부자가 돈이 많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가난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빈궁한 자들이 자기의 분깃, 즉 운명 때문에 더 불행하게 되는 것은 아니며, 그 가난함은 그들의 잘못도 아니다.
Ⅱ. 이 말을 들으라. 즉 하나님은 자기가 하시는 모든 일에 있어서 감사를 받으며 복종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엘리후가 여기서 욥에게 깨우쳐 주는 여러 가지의 다양한 의견들은 욥의 마음 속에 하나님께 대한 크고 높은 존경심이 일어나게 하기 위한 것이며,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설득시키고 나아가서는 하나님과 더 이상 논쟁하지 않도록 하고자 함이었다.
1.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자기가 사람들을 정죄하시고자 하신다면 인간 중 가장 강한 자라 하더라도 처치하실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20절). 하나님이 하시고자 할 때에는 아무리 수가 많더라도 민족의 일단인 "백성들도 떨며 없어지고" 혼란을 일으켜 무질서 속으로 빠져들게 하신다. 인간들 중에서 아무리 존귀하고 강력한 힘을 자랑하는 "세력있는 자" 즉 왕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입을 열기만 하시면 그의 왕좌에서 "폐위될 것이며," 산 자의 영역에서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들은 죽어 버리고 말 것이다. 사망의 권세도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고 계신 그가 행하실 수 없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이런 파멸의 돌연함에 주목하라. "순식간에 저들은 죽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교만한 원수를 끌어 내리는 일이란 시간을 요하는 일이 아니다. 그가 하시고자 하실 때에는 순식간에 행해지는 일이다. 그가 저들에게 예고하실 필요도 없고 한 시간의 여유를 두고 경고를 하시기로 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라."
이 일이 일어나는 시기에 주목하라. "저들은 한밤중에 고통을 당할 것이다." 곧 저희가 안전하고 근심이 없이 지내는 시간이라고 할 때, 저희가 자신들을 구할 수 없을 때에 이런 일이 임한다. 마치 첫 소생들을 잃었던 애굽인의 경우와 같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순식간에 행하시는 일이시다. "손을 댐이 없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눈에 띄지 않는 심판에 의하여 그들은 제함을 받는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시키지 않고 또 어떤 인간의 도움 없이도 가장 강대한 폭군이라도 비천하게 꺾으실 수 있으시다.
자기 목적을 달성하심에 있어서 그가 어떤 손을 쓰시든 간에 그가 필요로 하시는 것은 없으며, 그 일을 하심에 있어서 사람의 손을 쓰시지 않고도 해 내실 수가 있다.
그가 이와 같이 압도하여 이길 수 있는 것은 일개 강력한 개인에 국한하는 게 아니다. 수 많은 무리에도 해당된다(24절). "그는 세력있는 자들을 조사할 것 없이" 궤멸시키실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연합세력이라도 전능하신 이에게 거스려 설 수는 없는 까닭이다. 하나님이 폭정을 망하게 하신다 할 때에도 그는 무정부를 도모하시는 건 아니다. 가령 학정을 자행한 자들이 망했다고 하더라고 그 결과 인민들에게 지배자가 없게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권세있는 자들을 꺾으실 때에는 더 선정을 베풀 "딴 사람들을 그 대신 세우시는" 까닭이며, 만약 그들 역시 잘 통치하지 않는다면 그들 또한 밤중에나 어떤 밤에 "엎으실 터인즉 그들 역시 멸망할 것"이기 때문이다(25절). 벨사살 왕의 경우가 이를 증거한다. 만일 그가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실 의향이 있으실 때에는 그들을 당장 진멸하시지는 않으시고, "그는 그들을 악한 자로 여겨 치신다"(26절). 그들에게는 비천하게 하고 굴욕을 주는 모종의 심판이 내려진다. 이들 악한 지배자들은 딴 악인들과 마찬가지로 치심을 입는다. 곧 그들의 신체나 재산이나 혹은 그들의 가족이 확실하게 또 아프게 두드려 맞는다. 이것은 그들의 이웃에 대한 경고가 된다. 이 치심은 in terrorem-즉 타인들에게 대한 경종으로 내리시는 것이며, 그러므로 "타인들의 목전에서" 치신다. 이로써 그들 또한 하나님의 정의 앞에서 보고 두려워하며 떨게 하려고 하시는 것이다. 이처럼 왕들조차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면 우리와 같은 사람들은 말해 무엇이랴!
2. 하나님은 전지하시기 때문에 극히 은밀한 일이라도 알아 내실 수 있다.최강자라도 그의 팔을 당할 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장 교묘한 자라할지라도 그의 눈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자들이 우리 생각에 요량되는 정도보다 다소 더 벌받거나 덜 징계당하는 경우가 있다고 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불평하기 보다는 그것이 하나님 혼자만 아시는 어떤 은밀한 이유 때문에 그렇다고 판단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일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세상만사가 그 앞에는 드러나 있는 까닭이다(21절). "그의 눈은 인간의 길을 주목하신다." 만사가 그의 시야 속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눈이 그들 위에 머물러 있어서 하나님은 사실상 그들을 감찰하시고 또 그들을 조사하고 계시기까지 하신다. 우리가 어디를 가고자 하더라도 우리는 그의 주목하에 있다. 선악간을 불문하고 우리의 모든 행동은 사찰을 받으며, 기록되어져서, 그 책들이 펼쳐져서 심판을 받게 되는 날까지 보관되어 있다.
(2) 이러한 것도 하나님께로부터 감추이거나 은폐될 수가 없다(22절). "불의를 행하는 자들"에게는 의로우신 하나님의 찾아내시는 시선과 복수의 손길로부터 "자기들을 숨길 만한 은밀하고, 두텁고, 고적하며 빛과는 멀리 떨어진" 그런 "흑암이나 어두운 그늘이 없다."
[1]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동산의 나무들 사이에 숨었던 아담과 같이 할 수만 있다면 세상의 눈으로부터는 수치로 인해 자신을 감추고자 하며(그들은 아마 세상의 눈은 속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눈으로부터는 공포로 인해 스스로를 감추려고 한다.
권력을 가진 자들과 두령들이 자신을 숨기기 위하여 바위와 산을 찾는 날이 올 것이다.
[2] 그들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느니 보다 차라리 사망의 그늘에 숨는 일이라도 그것을 기뻐하고, 무덤 속에 숨어 거기서 영원히 누워 있기를 더 좋아할 것이다.
(3)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우리를 추적하실 때에는 그의 공의로부터 도망치려고 생각하거나 행방을 감추려고 도모하는 일이 헛된 짓이다. 불의를 행하는 자들이 사람에게서 자신을 숨길 방편과 책략을 발견해 낼 수는 있어도, 하나님께로부터 피해 날 재간은 없다. "그는 그들의 행위를 아신다"(25절). 곧 그들이 무엇을 행하며 무엇을 계획하는지 알고 계신다.
3. 하나님은 의로우시나 자기의 모든 처사에 있어서 공평의 법칙에 따라 행하신다. 비록 그가 권세자들을 엎으시고 그들을 산산조각으로 파하실 때에라도 "그는 사람에게 받아야 마땅한 정도 이상으로 손대지는 아니하신다"(23절-역주 영어 성경과 우리말 성경 사이에 차이가 있다). 무죄한 자를 벌하지 않으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범죄한 자라고 해서 그들의 불의에 대해 마땅히 보응을 받아야 할 것 이상을 그들에게 강요하시지는 않으신다. 죄와 벌의 비율에 있어서는 무한하신 지혜자가 심판관이 되실 것이다. 그는 어떤 사람이라도 하나님이 자기를 혹독하게 대우하셨다고 불평할 만한 명분을 인간에게 주지 아니하실 것이요, 어떤 사람도 "하나님과 함께 재판에 들어가게"는 아니하실 것이며, 하나님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도록 하지도 않으실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더라도 판결시에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분명히 하셔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욥은 하나님께 대한 자기의 불평 때문에 책망을 많이 받았으며, 여기서도 그의 소송을 취하하도록 종용을 받고 있다. 왜냐하면 그가 패소하거나 소송이 기각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인간에게 있어서 전능자와의 재판에 들어 갈 의도를 한다는 것은 도대체가 어불성설이다"고 어떤 이들은 전체 구절을 읽고 있다.
욥은 가끔 하나님 존전에서 자기 이유를 변호하기를 원하였다. 엘리후는 의문을 제기한다.
"무슨 목적으로? 당신에게 대해 이미 내려진 판결은 확정될 것입니다. 그 안에서 어떤 오류도 발견할 수 없으며 그것에 적용된 것에는 어떤 예외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결국 그것은 현재 그대로 남을 것이 틀림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가 정당하며 또 그러함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권세있는 자들을 멸하시거나 "그들을 악한 자로 여기어 치실 때에라도 당연한 보응 이상으로 그들을 벌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는 그들의 사악함이 무엇이었는지를 나타내 보이신다(27, 28절). 누구라도 그 악함과 징벌을 비교해 보고 나서 그들이 당연히 받을 벌을 당하였는지 아닌지 판단해 보라고 하신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공정하게 심판하실 이들 불공평 한 재판관들은 결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아니하였고 사람을 돌아 보지도 아니하였다"(눅 18:2).
(1)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자였다. "그들은 그에게서 돌이켜 떠났으며," 그에 대한 경외심을 끊어 버렸고 바로 그에 대한 생각들을 버렸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의 모든 길을 무관히 여겼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의 교훈에 주의하지도 않았으며, 그의 뜻에 유의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이 없는 세상인 양 살았던 까닭이다. 이것은 악인의 사악함이 근본이며, 그들이 하나님을 떠난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중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들이 하나님을 존중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존중하고자 아니 하려 하기 때문인 것이다.
사소하게 얕잡아 보는 것은 경건치 못함에서 연유하며, 따라서 모든 부도덕함에서 발생된다.
(2) 그들은 온 인류에 대한 폭군이었다(28절).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께 부르려고 하지 아니하고,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상달되게 하였는데," 이제 그 부르짖음이 그들을 고소하였다. 그들은 빈한한 자들에게 해를 주며 그들에게 억압적이었고, 학대하며 착취하였고, 그들을 더 한층 가난하게 하며, 고통을 당하는 자에게 고통을 더 하여 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절규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불평을 호소하였고 그는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고 그들의 이익을 변호하시게 되었다. 가난한 자들이 쳐서 하는 기도와 눈물을 받는 자는 그 입장이 곤란하게 된다. 왜냐하면 압제받는 자의 부르짖음은 조만간에 억압하는 자들의 머리 위에 복수를 내리게 할 것이기 때문이며, 아무도 이 일이 "정도에 지나친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출 22:23).
4.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일에 있어서 억제할 수 없는 주권을 행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공동체든 특정 개인이든 간에 그에 상관되는 것은 무엇이든 이끄시고 지배하시므로, 그가 의도하시는 일은 결코 꺾이지 아니 할뿐더러, 그가 행하시는 일은 무엇이나 결코 변경될 수가 없다(29절).
(1) 온 세상의 빈축도 하나님이 자기 미소를 평온하게 해 주시는 자들을 혼란시키지 못한다. "그가 평강을 주실 때에 누가 감히 말썽을 일으키겠느냐?"(29절)
하나님이 평강을 주신다고 말하신 자와 그를 위해 평안을 만들어 낸 자들에게 소란을 피운다는 것은 지옥과 땅의 모든 권세에 대한 도전이다. 만일 하나님이 한 민족에게 외적 평화를 부여하신다면 그는 자기가 주는 바의 것을 보장하실 수가 있으시며 그 민족을 교란시키고자 하는 원수도 폐하실 수가 있다.
만일 하나님이 한 사람에게 내적 평강을 주신다고 하면 의로움의 결과인 이 평온과 영원한 확신에 대해 사단의 고소나 현재적 고통이나, 죽음 자체의 사로잡음조차도 곤란을 끼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평강 중에 거하는 영혼들"을 무엇이 불안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빌 4:7 참조)
(2) 하나님이 찡그리심으로 혼란을 주고자 하신 자들은 온 세상의 미소로서도 편안하게 해 줄 수가 없다. 만약 하나님이 불쾌히 여기셔서 "자기 얼굴을 가리우시고" 자기 은총의 위로를 주시지 않는다면 "누가 그를 바라 볼 수 있으랴?" 누가 하나님의 진노하심 중에 견디어 내면서 성내신 하나님을 바라다 볼 수 있으며, 그것을 돌이키게 하겠는가? 누가 숨으시기로 결심하신 때에 그의 얼굴을 나타내게 만들 수 있으며, 그의 주위에 둘러있는 구름과 흑암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자가 누구이냐? 그렇지 않으면 누가 불안한 죄인에게 영원한 구원을 베풀면서 그 죄인을 바라다 볼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대적이 되신 자에게 친구로 서 있을 자가 누구이랴!
아무도 하나님 없이는 외적인 상태의 고통을 구제할 수가 없다. "여호와께서 너를 돕지 않으시면 내가 무엇으로 너를 도울 수 있을 것인가?"(왕하 6:27) 아무도 하나님과 그의 두려움에서 마음의 괴로움을 구하지 못한다. 만약 그가 죄지은 양심에 그의 진노하심의 감각으로 표시를 해 두신다면 피조물이 바치는 온갖 위안물도 아무 효과가 없다. "초산에 식초를 타듯 무거운 심정에는 노래도 별 무소용이다."
하나님의 활동에 대한 불가항력은 공동체와의 거래나 특정 개인의 처리에 있어서나 불문하고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가 행하시는 것은 결코 제어할 수가 없다. 공공의 입장에서 "한 민족에게 행해진 것이든" 개인의 사사로운 일에 있어서 "한 사람에게만 행해진 것이든" 절대로 인간이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강대한 나라를 다스리는 바로 그 섭리가 가장 미약한 개인의 관심사도 주관하고 계신다. 저 민족의 힘도 그의 권세에 저항하지 못하고, 일개 개인의 조그마한 것도 그의 인식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가 행하시는 것은 결국 성취되고 또 승리를 얻을 것이다.
5. 하나님은 지혜로우시사, 공공의 복리에 관심하신다. 그러므로 "사특한 자가 권세를 잡아 통치하는 일이 없도록" 수배하시니, "이는 백성들로 함정에 빠져 해를 입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이다"(30절).(1) 사특한 자들의 자만을 보라.
그들은 권세를 잡아 다스리기를 도모한다. 인간들의 칭찬이나 이상 권세가 그들의 노리는 목적인데 이것이 그들의 상급이다.
(2) 독재자들의 책략을 보라.
그들은 스스로 출세하고자 꾀할 때에 때로는 종교를 자기들의 야심을 가장하고 은폐하는 데 사용하여 사특하게 제위에 오른다.
(3) 사특한 자들이 권세를 잡을 때에 백성들이 처하게 되는 위험을 보라.
백성들은 죄의 올무에 빠지거나 고통의 덫에 걸리거나 혹은 이 둘에 다 방해받기가 쉽다. 위선자들의 수중에 들어간 권력은 흔히 민중의 자유와 권리를 파괴하는데, 그들은 강압적으로 빼앗기보다는 감언이설로 더 쉽사리 속아 빼앗긴다. 이처럼 경건한 모습으로 위장한 권세 때문에 참 경건한 권세에 많은 위해가 가해졌다.
(4) 이런 위험을 방지하지 위하여 하나님의 섭리가 백성에 대해 취하는 보살핌은 곧 "사특한 자가 권세를 잡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사특한 자가 전혀 권세를 잡지 못하거나 잡는다고 해도 오래도록 통치하지 못하도록 하신다. 만약 하나님이 민중에 대해 자비심을 준비해 두고 계신다면 그는 위선적인 통치자들의 발호를 막거나 혹은 그런 사특한 지배자의 종말을 재촉하시거나 하실 것이다.
엘리후의 연설(11)(욥기 34:31-37)
Ⅰ. 엘리후는 이 문단에서 욥이 자기의 고통 중에서 어떤 말을 해야 하는가를 가르치고 있다(31, 32절). 욥의 불평하는 격렬한 언사를 책망하고 난 뒤였으므로, 엘리후는 이제 더 좋은 말들을 욥의 입에 담도록 가르친다. 우리가 잘못된 것에 대해 견책할 때에는 선한 것도 지시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우리의 꾸짖음으로 하여금 "훈계의 책망"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잠 6:23). 그는 이런 말들을 사용하라고 욥에게 강요하지는 않고, "말하기에 알맞는 것"으로 그에게 권장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엘리후는 고난을 당하는 중에 있는 욥으로 하여금 자기의 비행과 품위없는 표현을 회개시키고자 하였다. 욥의 다른 친구들은 욥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악인이라고 자인시키려고 하였으며, 그들은 지나친 행동 때문에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엘리후는 욥으로 하여금 이 논쟁의 처리에 있어서 욥이 "자기의 입술로 지각없이 말하였다"는 것을 인정하도록 하기만 하면 되었다. 우리는 책망을 할 때 이 사실을 기억하고, 일을 현 상태보다 더 악화시키지 않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범죄의 확대가 기소를 앞지를 수 있기 때문이다. 엘리후는 요점을 맞추어 바로 행했고 그에 따라 성공하고 있다. 그가 욥에게 지시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자기 죄악에 대해 하나님 앞에 스스로를 낮추며 그 죄악에 대한 징벌을 감수할 것을 가르친다. "나는 징계를 받았사오니, 내가 당하는 고통은 바로 나를 엄습하는 것이며, 따라서 나는 그것을 감수하고 그 징계 가운데서 하나님을 의롭다고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의 선하심을 시인합니다."많은 자들이 징계를 받지만, 그 징계를 견디어 내지 않고 잘 참지도 않으며, 그래서 실제로는 징벌을 전혀 인내로 감수하지 않는다. 참회하는 자들이 만약 진지하다면,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을 잘 받아들이며, 낫도록 의도하는 외과적 수술과 같은 징계를 견디어 낼 것이다.
2. 하나님이 자기의 죄악들을 욥 자신에게 드러내 주십사고 기도할 것을 가르친다(32절). "내가 깨닫지 못하는 것을 내게 가르치소서. 여호와여, 돌아보건데, 나는 내게서 많은 잘못을 발견하였사오며, 나로 말미암아 지절러진 많은 잘못을 발견합니다마는, 내가 알지 못하는 더 많은 잘못과 더 큰 가증스런 일들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무지 와 실수와 나 자신에게만 집착하는 것으로 인하여 나는 이러한 잘못들을 보지 못합니다. 여호와여! 나로 그런 잘못들을 볼 수 있게 해 주시오며, 나의 양심이 깨어서 자기 본분을 충실히 다 해 낼 수 있도 록해 주시옵소서." 선량한 자는 자기 자신에 대한 가장 좋지 못한 점을 알려고 하는데 인색하지 않으며, 특별히 역경 중에서는 하나님이 무슨 이유로 자기와 다투시며, 자기를 교정하시기 위해 무슨 의도를 가지고 계신지 지적받기를 갈망한다.3. 개량의 약속을 드릴 것을 가르친다(31절) "내가 더 이상 범죄치 않겠나이다." "만약 내가 불의를 행하였다면(내가 잘못 행한 것을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나는 더 이상 그리하지 않겠습니다. 당신께서 내가 잘못을 저지른 것이라고 하면 내가 나타내 보이시는 것이 무엇이든 나는 당신의 은혜로 말미암아 장래에는 그것을 고치겠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범죄하였다고 고백하는 것을 의미하며, 진정한 후회와 그 범죄에 대한 경건한 슬픔과 우리에게 고통을 내리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하여 겸손히 동의하는 것을 암시한다. 이 징벌은 우리와 우리 죄 사이를 분리시키는 것이다.
참회하는 자들은 이렇게 하여 자기의 회개를 성취시킨다. 왜냐하면 우리 죄에 대한 유감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여서 우리는 가서 더 이상 죄를 짓지 말아야 하며, 여기에서처럼 다시는 어리석은 짓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심으로 우리를 붙들어 매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확고한 목적 안에서 말해야 하며 엄숙한 약속과 맹세 가운데에서 하나님께 말씀을 드려야 마땅한 것들이다.
Ⅱ. 엘리후는 욥이 고통 중에 있으면서 자기의 고난에 대한 불만과 불안함을 가지고 있음을 보고 그것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33절). 우리는 우리에게 관계되는 일이면 무엇이나 우리가 원하는 그대로 되기를 즐겨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엘리후가 제시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그렇게 되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불합리하고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네 뜻대로 되어야 하겠느냐? 아니다. 그럴 이유는 무엇이냐?" 엘리후는 하나님의 뜻과 지혜와 그리고 그 안에서의 만족에 지당함을 표하면서 말하고 있다. 만사가 하나님의 의사에 따라 되어야 함은 지극히 당연하다.또한 그는 스스로 뻐기며 자기 자신의 살을 베어 먹는 자들의 자부심을 경멸하여 얘기한다. "그것이 네 의사에 따라야 하겠느냐?" 우리는 우리가 항상 즐기고 싶어하는 좋은 것만 누려야만 할 이유가 있는가? 만약 그렇게 하면 우리는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게 될 것이며, 어리석게도 우리 자신을 함정에 떨어뜨리게 될 것이다. 우리 자신이 고통받을 의사가 없다고 해서 결코 고통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죄인들이 가책을 느끼지 않는 게 가당한 일이면, 학자들이 학문적 훈련을 받지 않아야 온당하다는 것인가?
설사 우리가 고통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맞을 매를 우리가 택할 수 있어야 옳다는 것인가? 아니다, 만사는 하나님의 의사에 따라서 되어져야 마땅하며, 우리 뜻대로 되어서는 안 된다. 그는 창조자이시며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무한히 지혜로우시며, 그 총명이 한량없으시다. 우리는 어리석은 자들이며, 근시안적이다. 그는 한 가지 마음을 가지고 계시나 우리는 마음이 수만 갈래 가운데서 우왕좌왕한다.
2. 그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허사이며 아무 이득이 없으리라는 것이다. "그는 당신이 거부하든 택하든지 간에 그 일을 갚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길을 취하실 것이며, 자기 뜻을 이루실 것이며, 당신이 싫어하든지 좋아하든지 간에 자기 자신의 공의의 판결에 의거하여 보상하실 것입니다. 그는 절대로 당신의 승낙을 구하지도 않으실 것이며, 당신의 조언을 바라지도 않으실 것이고, 자기가 좋으실 대로 행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평안히 가지고 만부득히 행해야 할 것은 결단코 그대로 행하는 것이 당신의 지혜입니다. 현재 주어진 것은 최선을 다해 활용하시오. 왜냐하면 그 일을 달리 만드는 것은 당신의 권능 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당신이 취사선택하기를 요구한다면 다시 말해서 당신이 하나님께 지시하고 그가 하시는 행위를 기피하고자 한다면, 그렇게 해 보시오.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그가 하시는 모든 일에 대해 잠자코 순종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아는 것을 말하시오. 당신은 반대할 것인지 복종할 것인지 당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말하시오. 문제는 명백하게 당신 앞에 놓여 있습니다. 바로 보고 정곡을 찌르시오. 당신은 하나님의 수중에 있지 내 수중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Ⅲ. 엘리후는 욥이 한 말 속에 많은 죄악과 어리석음이 있는지 없는지의 유무를 모든 지식 있는 중립적인 인사들에게 호소하며 묻고 있다.
1. 그는 이 문제가 철저하게 심사 받기를 원하였고, 결말이 나게 되기를 원하였다(36절). "내가 바라는 것은 욥이 끝까지 시험을 받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만일 누구라도 욥이 한 말의 정당성을 주장해 보겠다고 나설 자가 있으면 한 번 해보십시오. 만약 없거든 우리 모두가 욥의 말이 도무지 의롭지 못함을 증거하는데 하나같이 나섭시다." 욥이 당하는 고통은 그의 시험이라고 이해하는 분들이 많다. "그의 고통이 계속되어 그가 완전히 낮아지며 그의 교만한 정신이 꺾일 때까지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가 자기의 오류를 깨닫게 되고, 무엄하게도 하나님과 그의 섭리에 대해 뇌까린 그의 말들을 취소하게 되기까지 그의 고난이 계속되게 해 주소서. 결과가 얻어질 때까지 그의 시험이 계속되게 하소서."2. 엘리후는 하나님과 인간에게 모두 하소연하는 동시에 이 일에 대해 양쪽의 심판을 다 원하고 있다.
(1) 어떤 이들은 36절을 하나님께 대한 호소로 읽는다. "오! 나의 아버지여! 욥으로 하여금 시험을 받게 하소서." 그 말에 대한 성서의 난외주도 같은 식으로 "내 원과 내 아버지"를 의미하고 있다. 그래서 엘리후가 "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여! 욥이 항복할 때까지 시험을 받게 하소서!"라는 의미로 이 말을 했을 때는 자기 눈을 들어 쳐다 보면서 이 말을 하였을 거라고 상상하는 이들도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고통이나 타인들의 고통을 위하여 기도할 때에도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주목하면서 기도해야 한다. 이는 그 고통들이 아버지로서의 교정이며, 우리들 자신에 대한 교육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히 12:7).
(2) 엘리후는 곁에서 방관하고 있는 이들에게 질문을 호소하고 있다(34절). "총명한 자들이여! 내가 한 말보다 욥의 말을 더 호의를 가지고 좋게 해석할 수 있는지 내게 말하시오. 또 욥이 그릇되게 말하지 않았는지의 여부와 peccavi-즉 내가 잘못 행하였나이다 라고 부르짖어서는 안 되는 것인지 내게 말하시오."
엘리후가 욥이 한 말 중에서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욥은 자기 자신조차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지 못하면서 어리석게 말하였다(35절). 엘리후는 욥이 지식도 없고 지혜가 없는 자라고 말 할 수는 없으나, 이 문제에 있어서는 "욥이 무식하게 말하였으며" 그의 마음은 어떠했든지 간에 "그의 말이 사려없는 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욥이 자기 아내에게 한 말이 이제는 욥 자신에게 되돌아 오고 있다(그가 어리석은 자들 중 하나가 얘기하듯 말하는구나). 그래서 같은 이유로 우리가 하나님의 손으로 되어진 일이니 "좋은 일과 아울러 악한 일이라고 해서 받아들이지 아니하겠느냐?"(2:10) 때로는 우리가 타인에게 내린 견책을 우리 스스로 필요로 하는 수도 있고 또 용납할 가치가 있다. 하나님의 지혜를 비난하는 자들은 실로 자기 자신의 지혜를 꾸짖는 셈이 된다.
[2] 욥은 하나님을 마땅히 존중해야 했으나, 온당한 경의를 표하지 않고 악하게 대꾸하였었다. 만일 욥이 한 말이 끝까지 시험을 받는다면, 즉 만약 누가 욥의 말을 극도로 과장하여 가장 악의로 받아들인다면, 다음과 같은 결과로 나타나 버리고 말 것이다.
첫째, 욥은 하나님의 원수들의 편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의 대답이 악인들을 위하고" 있다. 곧 그가 한 말들은 악인의 손을 더 강하게 하며, 악인의 마음을 더 완악하게 하는 것 같다. 욥은 악인이 번영하고 있는 문제를 필요 이상으로 너무 세세히 끌고 갔었다. 악한 자들은 바알처럼 자기들이 하고 싶거든 스스로 번영하고 변호하게 하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악인들을 위해 대답해 주며, 그들을 역성들어 한 마디라도 할 필요는 추호도 없다.
둘째, 욥은 하나님의 친구들을 모욕했으며, 그들에게 고함을 질렀다는 것이다. "그가 우리 중에서 자기 손뼉을 치는구나." 그리고 만약 그가 철저히 시험을 받아 완전히 낮추어지지 않는다면, 마치 자기가 승리하여 우리 모두를 잠잠하게 만들었다는 듯이 더 한층 건방지고 의기양양하게 될 것이다. 나쁘게 말하는 건 아주 좋지 못하다. 그러나 마치 실수와 과격 때문에 승리한 양 손뼉을 치며 우리가 한 일을 의기양양해 하는 건 더 한층 나쁘다.
셋째, 욥은 스스로 하나님을 거역하며 말하고, 자기가 한 말을 고집하며, "자기 죄 위에 패역을 더 하였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말미암아 말하며, 오직 그를 위해 말해야 마땅한 터에, 비록 한 마디 말이라고 할지언정 하나님을 거역해서 말한다면 그것은 아주 큰 죄악이다. 하물며 우리가 마치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막고 더 오래 말하려는 듯이 그를 거역하는 말들을 더 많이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닌가? 앞에 말을 취소하기는커녕 반복해 말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죄를 범한 자들이 회개하도록 부름을 받고서도 이처럼 계속 완악하게 버틴다면 저희 죄악 위에 패역함을 추가하는 것이며, 그것을 극도로 죄악되게 만드는 셈이 된다.
Errare Possum, Hareticus esse nolo.-즉 나는 실수에 빠져 들 수는 있을지언정, 이단에 뛰어들지는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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