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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1

엘리후의 연설(3)(욥기 33:1-7)

엘리후는 여기서 욥을 설득하기 위해 몇 가지 주장을 하는데, 이것은 욥이 참고 들어줄 것을 부탁하는 말일 뿐만 아니라, 자기가 욥을 위해 호의를 보이려 꾀하고 있음을 믿고서 자기 주장을 친절히 받아들이며 자기가 하려는 가르침을 기꺼이 열납해 줄 것을 설득하는 말이기도 하다. 욥이 심사숙고해 줄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엘리후는 욥의 세 친구처럼 욥을 정죄하는데 가담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욥이 알기를 원했다. 그는 앞 장에서 그들의 처사를 혐오한다고 공언하였고 그들의 가설을 부정하였으며, 그들이 욥을 고정시키겠다고 택한 방법을 전면 폐기 처분하였다. "그런즉, 욥이여, 내 말을 들으시오(1절). 그들은 모두가 같은 노래를 불렀고 모두가 같은 가락으로 소리쳤으나, 나는 색다른 방법으로 말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모든 말에 귀를 기울이시오. 그 중의 일부만을 듣지 마시오." 그 까닭은 우리가 만약 어떤 한 이야기를 전부다 듣지 아니하고는 그 이야기를 판단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2. 그는 이 일을 엄숙한 본연의 의무로 삼고자 하였다. 즉 그는 지나가는 말로 단 한 마디로 잘라 말하거나 자기의 기지를 나타내는 임기응변식의 짧은 답을 주려하지 않았다. 오랜 침묵 뒤에 그는 신중히 그리고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그의 입을 열었다"(2절). 충분히 심사숙고를 하자마자 그는 벌써 입을 떼기 시작하였고, 만약 욥이 주의를 집중해서 들어줌으로써 자기를 격려해 준다면, 계속 말할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3. 그는 자기가 생각한 대로 말하려고 단단히 마음먹고 있었으며 달리 말하지는 않을 작정이었다(3절). "내 말이 내 마음의 정직함을 나타내는 것이며, 내 신념과 소감의 진정한 소산입니다." 욥의 세 친구가 그들의 이야기 가운데서는 자기들의 가설을 옹호하기 위하여 욥을 악한 자로 묘사하였지만, 그들의 양심의 밑바닥에서는 욥이 그토록 악한 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의심해 볼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런 일은 온당한 행위가 아니었다. 우리의 마음 속으로는 좋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면서도 어떤 이득을 위해 우리의 혀로 그들을 동시에 비난한다는 것은 야비한 짓이다. 엘리후는 정직한 자여서 그런 짓을 경멸하고 있다.

4. 그가 말하는 것은 평이한 말이기 때문에 이해하기에 애매모호하거나 어렵지가 않았다. "내 입술이 아는 바를 진실히 말하리라." 욥은 즉각 그의 말뜻을 이해할 것이며, 그가 의도하는 바를 알아 들을 것이다. 하나님에 관한 일을 강론하는 자들은 그 개념이나 표현에 있어서는 모든 모호한 점이나 혼란을 조심스레 피해야 하며, 가능한 한 분명하고 간결하게 말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만 그들이 말하고 있는 바를 그들 스스로가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낼 것이며, 또 그들이 정직하게 말하며, 그리고 그들이 말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교화를 의도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낼 것이기 때문이다.

5. 그는 자기의 이야기 중에서 하나님이 주신 이성과 총명을 최대한 활용하고자 하였다. 즉 그는 "하나님의 신과 전능자의 기운으로부터 받은 합리적 혼, 즉 생명력을 최대로 이용하고자 하였다(4절). 그는 자기가 그의 연장자들과 맞먹을 만한 자격이 없음을 자인하기는 하지만, 그들이 자기의 연소함을 멸시하지는 않기를 원한다. 그 이유는 그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지으신 바요, 똑 같은 손으로 만들어졌으며, 같은 고귀한 권력과 기능을 부여받았고, 똑 같은 큰 목적을 위하여 계획된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욥에게 선을 베푸시기 위한 도구로 자기를 사용치 못하시라는 법이 어찌 있겠는가?

이 점을 감안할 때 우리 역시 우리의 능력에 따라 우리의 위치에 선을 행하도록 스스로를 편달하여야 마땅하다(아마 엘리후도 그 점을 이용하였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선한 목적에 우리의 생명을 사용하도록 연구해야 하며, 하나님을 영화스럽게 해 드리는 일과 그의 뜻을 따라 우리 세대에게 쓸모있는 봉사를 하는 데 우리의 생명을 바칠 수 있도록 연구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창조된 목적에 부합된 존재가 되기 위함이다. 따라서 우리가 헛되이 만들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6. 그는 욥이 자기가 하는 말에 반박하며 이의를 제기해도 그 말을 기꺼이 들을 참이었다(5절). "그대가 만일 할 수 있거든 내게 대답하시오, 만약 당신에게 그럴 만한 기력과 정신이 남아 있으며, 심신의 병과 논쟁으로도 아직 기운이 쇠진되지 않았다면, 당신의 말을 진술해 보시오. 그리하면 당신의 말을 참작하겠습니다." 이성에 맞는 이야기를 하는 자들은 또한 도리에 맞는 이야기를 들을 줄 안다.

7. 욥은 하나님을 대리할 수 있는 사람이 그의 앞에 나타나기를 자주 원했다. 욥은 그에게 자유롭게 간언하며, 중재자로서의 그에게 자기의 모든 문제를 말해 줄 수 있기를 원했다. 엘리후는 자기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6절). "나는 당신이 원했던 그대로 하나님의 대리자입니다"(역주, 영어 성경과 우리나라 성경 사이에는 번역상의 차이가 있다). 욥은 그런 사람을 간절히 원했다(16:21).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변백하는 사람이 있었으면!" 그리고(23:3)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 발견할 곳을 알꼬!" 그는 다만 "주의 위엄이 그를 두렵게 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기만을 원했다(13:21). 엘리후는 이렇게 말했다. "자! 이제 한 번 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나를 쳐다보시오! 나는 하나님을 위하여 그대와 쟁변에 나서겠고, 당신이 어느 점에서 하나님을 모욕하였으며, 하나님이 당신의 어떤 점을 반대하시는지 그대에게 나타내 보이겠소. 그대가 하나님께 하고자 하는 호소와 불평이 무엇인지 그것을 내게 말하시오."

8. 엘리후는 자기가 능히 욥의 상대가 된다고 보았다. "나도 또한 진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습니다. 나도 또한 맨 첫 번째 인간과(창 2:7) 마찬가지요, 나도 당신과 일반입니다." 욥은 이 점을 가지고 왜 하나님이 자기를 가혹하게 학대해서는 안 되는지의 이유로서 하나님께 몰아 세웠다(욥 10:9).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나이다." 엘리후는 이렇게 말했다. "나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진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소." 어떤 이는 "나는 당신과 꼭 같은 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소"라고 읽는다. 우리가 흙으로 지음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유익하다. 그리고 우리에게 하나님을 대신하는 사람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흙에서 나왔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에도 우리 자신들과 같은 사람을 통하여 말씀하신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다행한 일이다. 이스라엘의 큰 환난 날에도 그들의 소원에 따라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신 5:24). 하나님은 보물을 우리와 같은 질그릇에 담으셨다(고후 4:7).

9. 엘리후는 욥이 자기의 공격에 대해 놀랄 까닭이 없다고 생각하였다(7절). "내 위엄으로는 그대를 두렵게 하지 못합니다."

(1) 당신의 친구들이 자기들의 변론으로 당신에게 겁주었던 일이 내게는 없습니다. 나는 그들이 행한 것 같이 당신을 꾸짖지도 아니하겠고, 그들이 몰아 세웠던 것같이 당신을 쳐서 힐난하지 않을 것입니다."

(2) "또 하나님께서 직접 당신에게 따지기 위해 나타나셔서 행하시는 일과 같은 것도 내게는 없습니다. 나는 당신 같은 입장에 서 있고, 나도 당신과 같은 모습으로 생겼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하나님의 영광 속에서 당연히 느낄 그런 공포를 나는 당신에게 줄 수가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사물을 정당하게 깨닫게 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이치에 따라 해야 하는 것이지 겁을 주는 것으로 해서는 안 되며, 공정한 논리에 의하여서 하고, 완력에 의해서는 아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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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후의 연설(4)(욥기 33:8-13)

Ⅰ. 엘리후는 특히 욥에게서 나온 몇 가지의 무례한 표현을 책망하고 있다. 그것들은 욥이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고 깨달은 것들이다. 그는 자기 책망의 근거를 다른 이의 말에 두지 아니하고, 그 스스로 직접 자기의 귀로 들은 것들이다(8절). "당신은 그것을 내가 듣는 데서 말하였고, 또 이 자리에 있는 사람 모두가 듣는데서 말하였습니다." 그는 그 말을 간접적으로 듣지는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그는 욥의 말이 그처럼 잘못된 것이 아니었기를 바랐을 것이다. 또 그는 그 말을 욥과의 은밀한 대화 중에서 들은 것도 아니었다. 만일 그랬다고 한다면 그 일을 가지고 이렇게 공공연하게 되풀이해서 얘기할 만큼 엘리후는 교양 없는 자란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욥은 그 말을 공개적으로 터놓고 말했다. "뭇사람이 보는 앞에 죄짓는 자들은 뭇사람들의 면전에서 견책을 당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예를 손상하는 말을 어떤 말이든지 듣게 되면 의당 그 말을 공개적으로 반증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듣는 가운데에서 그릇 발언되는 것에 대해서는 이를 책망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너희는 고발하는 자와 대결할 내 증인이라"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까닭이다.

1. 욥은 자기 자신을 결백한 자라고 주장하였다(9절). "네가 이르기를 나는 깨끗하여 죄가 없다고 하였다." 욥은 이 말을 totidem verbis-즉 그렇게 많은 말로 얘기하지는 않았다. 아니, 그는 자신이 죄를 지은 자이며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지 못한 자라고 인정하였었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당신께서는 내가 악한 자가 아니며, 내가 의로움을 굳게 붙잡고 있음을 아시나이다" 등등. 엘리후는 이런 말들을 그의 책망의 근거로 삼고 있다.

욥이 온전하며 의로운 자였고 그 친구들이 주장한 것 같은 그런 자가 아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욥은 자신이 그런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를 괴롭히시고 확대하시는 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여서는 안 된다. 그런데 욥이 단지 커다란 죄악에 대해 의로우며 결백하다고 말한데 대해 엘리후는 그가 모든 죄에 대해 깨끗하며 결백하다고 주장한다고 말하며 욥을 책망한 것으로 아무래도 잘못된 책망으로 보인다. 과격하고도 경솔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오해받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자기들의 탓으로 돌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은 보다 더 조심해야 마땅하였던 것이다.

2. 욥은 흡사 하나님께서 시비를 걸 기회를 노리는 사람 모양으로 그의 잘못을 찾는데 혈안이 되셨고, 그를 헐뜯는데 열심이었다고 하여, 하나님에 대해 그는 혹독한 분이라고 표현하였다(9, 10절). "하나님이 나를 칠 틈을 찾으시느니라." 이는 그런 때를 일부러 찾아내시는 것을 말한다. 욥은 이런 뜻으로 말한 바가 있다(14:16, 17). "주께서 나의 죄를 살피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나님은 나를 주의 대적으로 여기시나이다"라고 분명히 말했다(13:24; 19:11). "그는 내 발을 착고에 채우시나이다. 그리하여 나는 하나님께 항변할 수 없듯이 나는 또한 그로부터 도망칠 수도 없다"라고도 말했다(13:27). 또 그는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길을 살피신다"고 말했다(13:27).

Ⅱ. 엘리후는 욥이 이같이 말함으로 잘못 발언했다는 것과 욥이 그 때문에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낮추고, 참회하는 마음으로 그 말을 취소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고 노력한다(12절). "보라! 이 말에 네가 의롭지 못하다." "이 점에서는 네가 옳지 못하다"라고 어떤 이는 읽는다. 엘리후가 욥에 대해 보여 준 책망과 욥의 다른 점은 전혀 인정하지 않으려 하였지만, 엘리후는 단지 "이 말에 있어서, 이렇게 말하는 데 있어서는 네가 의롭지 아니하다"고만 말하고 있다.

1. "당신은 하나님과 공정히 거래하고 있지 아니합니다." 의롭다는 건 모든 자에게 마땅히 그들이 받아야 할 것을 제공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만일 우리를 향하여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모든 섭리에 있어서 그가 공평하시고 인자하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즉 그가 그 모든 길에서 의로우시며 어쨌든 그는 선하시다고 인정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가 당연히 받아야 할 권리를 하나님께 우리가 바치지 않는 셈이 되며, 또한 우리는 그에게 의롭지 못한 자가 된다.

2. "당신은 의로운 자의 언어로 말하지 아니합니다. 나는 당신이 그런 자임을 부인하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이 점에 있어서 당신이 의로운 자임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많은 의로운 자들이 어떤 특수한 사례에 있어서는 그들답지 않은 말과 행동을 한다. 그러나 한편 비록 선량한 사람이라도 그가 실수하거나 잘못을 범하는 경우에는 우리가 그에게 잊지 말고 어디에 잘못이 있었는지 고해 주어야 하며, 과오와 혈기 속에 있는 자에게 아첨을 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친절한 사람이 못 된다. 마찬가지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단 한 가지의 사례를 보고 그 사람의 성격을 판단지어서는 안 되며, 또 다만 몇 마디의 실언을 가지고 그 사람을 판단해서도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공정한 사람이 못된다. "우리 모두가 잘못하는 일이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책망할 때 공정하게 해야 한다.

엘리후는 욥으로 하여금 자기의 실언을 깨닫게 하기 위해 그에게 두 가지 점을 생각해 보도록 제안하고 있다.



(1) 하나님은 우리보다 무한히 높으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와 쟁변한다고 하는 건 미친 짓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만약 하나님이 그의 크신 권세를 가지고 우리에게 반박하신다면 우리는 그 앞에서 설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내가 당신에게 대답하리라"고 엘리후는 한 마디로 말하고 있는데, 이 말에는 그것과 함께 "하나님은 사람보다 더 크시다"란 증거가 따르고 있다. 의심할 나위 없이 하나님은 무한히 위대하시다. 하나님과 사람간에는 비교할 수 있는 척도가 도무지 없다. 욥 자신도 하나님의 크심에 대해서나 그의 항거할 수 없는 권세와, 넘겨다 볼 수 없는 주권과 그의 무서운 엄위하심 및 측량할 수 없는 무한성에 대하여 아주 많이 얘기했고 또 꽤 잘 말하였다.

엘리후는 말한다. "자! 당신 스스로가 하나님이 위대하심에 대해 말한 것을 생각해 보시오. 그리고 그것을 당신 자신에게 적용시켜 보시오. 그가 만약 인간보다도 더 크시다면 그는 당신보다 더 크실 것이요, 당신은 하나님께 대한 이 불손하고도 흉한 생각을 회개하고 당신의 어리석은 짓에 낯을 붉히며, 당신 자신의 억측을 생각하고 떨기에 충분한 이유를 발견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보다 더 크시다"는 이 간명하고도 의심할 나위 없는 단 한 가지 진리에는 잘만 활용한다고 보면 그의 섭리에 대한 우리의 모든 불평불만과 우리를 다루시는 그의 처사에 대한 우리의 모든 이의와 불복을 영원히 침묵시키고 그런 것들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도록 하기에 충분한 것이 있다.

그는 우리보다도 더 지혜로우시며 강하시다. 그러기에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하나님과 우리가 쟁변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뿐 아니라 그는 또 우리보다 더 거룩하시고 의로우시며 선하시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성품이 가지고 계시는 초월적인 영광이요, 뛰어나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은 인간보다 위대하시며 그러므로 그를 흠잡는다는 것은 터무니 없는 짓이며, 이치에 벗어난 짓이다. 그는 정녕 정당하시다.



(2) 하나님은 우리에게 설명해 주어야만 할 의무가 있으신 분이 아니시다(13절). 그런데 "어찌하여 그대는 하나님과 쟁변합니까?" 하나님께 불평하는 자들은 그와 쟁변하며, 그를 반박하고, 비난하며, 그를 상대로 고소를 제기하는 자들이다. 그러면 그들은 어째서 그럴까? 무슨 이유로? 어떤 목적으로? 그들은 그렇게 할까?

우리들 약하고 우매하며 죄 많은 피조물들이 무한하신 지혜와 권능과 자비를 가지신 하나님과 쟁변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은 짓이다. 토기장이와 다투려는 진흙에게 화있을 진저! "왜냐하면 그는 자기 일에 대하여 어떤 것도 진술치 않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행위에 대한 이유를 우리에게 밝혀야 할 의무를 지니지 않으신 분이시며, 그가 행하시기로 계획하신 것을 우리에게 고할 의무도 없으시고(어떤 방법으로, 어느 시기에, 무슨 도구를 통하여), 왜 그가 그 같이 처리하시는지 이유를 우리에게 알릴 의무도 없으시다. 그는 자기 자신의 일 처리를 꼭 합리화하지 않으셔도 되고 우리 인간의 요구나 탐구심을 반드시 충족시켜야 하는 것도 아니시다. 그의 심판은 틀림없이 그 심판 자체를 옳은 것으로 합리화시켜 준다. 만일 우리가 그것에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잘못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인간의 재판정에 세워 놓고 사실 심리를 행하며, 그가 행하시는 행위에 대하여 그 이유를 밝히라고 도전하고, 그에게 "당신은 무엇을 행하는 겁니까? 왜 당신은 그렇게 행하십니까?"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당돌한 불경이 된다.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읽기도 한다. "그는 자기의 모든 일에 대하여 다 진술해 주시지는 않으신다." 그는 우리가 알기에 적합한 만큼만은 우리에게 계시해 주시지만(14절), 그래도 여전히 은밀한 일들은 있으며, 그 비사들은 우리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고, 또 우리가 들여다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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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13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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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후의 연설(5)(욥기 33:14-18)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취하신 처사의 의미에 관하여 자기를 완전히 캄캄한 가운데 두셨다고 하여 불평하고는, 하나님이 자기를 그의 원수로 취급하신다고 결론을 내렸다.

엘리후는 말하고 있다. "아닙니다. 그는 당신에게 말씀하시건만, 당신이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잘못은 당신에게 있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당신이 악의로 해석하게 되는 그런 처사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당신에게 진정한 유익이 되도록 계획하고 계십니다."

1. 하나님은 우리의 복리를 위하여 매우 힘쓰시는 친구이시다. "그는 우리에게 한 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느니라"(14절).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거리나 반목에도 불구하시고 그는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즐겨하시는데, 그것이 곧 그의 은총의 표시이다. 그가 우리 자신의 관심사에 관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기꺼워 하신다는 것은 그의 은혜로운 의도에 대한 증거이다. 또 무엇이 우리의 의무이며 어떤 것이 우리에게 이해득실이 되는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를 바라시고, 그가 우리에게서 요구하시는 일이 무엇이며 우리는 그에게서 어떤 것을 기대할 수 있는지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 주기를 달갑게 여기시고, 우리의 잘못에 대하여 가르쳐 주시기를 원하시며, 우리의 위험을 경고해 주시기를 좋아하시고 우리에게 길을 나타내 보이시고자, 우리를 그 길 안에서 인도하시기를 바라심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계획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일을 그는 한 번뿐 아니라 두 번까지도 그리고 계속해서 행하신다.

한 번 경고를 발해도 무시되면, 또 다른 경고를 내리신다. 이는 어느 누구라도 멸망당하는 것을 원치 아니하시기 때문이다.

"교훈에 교훈을 더 해야 하고 말씀을 더 해야 한다." 이것은 죄인들이 용서받지 않은 채 남겨 두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

2.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복리에 대하여 매우 못된 원수가 된다. "사람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즉 인간은 그것을 주의하지 않거나 상관하지 않고, 분간해 내거나 이해하지 않으며,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임을 알지 못하고 계시된 사실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그에게 어리석은 짓 같이 여겨지기 때문에, 자기 귀를 막고, 자기 자신의 빛을 가로막아 스스로에게 그림자가 지게 하며, 자기에게 거슬리는 하나님의 권고는 거부하기 때문이다. 현명한 사람은 결코 그러지 않으며, 지혜 그 자체의 말을 거역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양심을 통하거나 그의 섭리 또는 목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말씀하신다. 엘리후가 대체로 여기서 욥에게 나타내 보이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욥에게 자기 의사를 말씀하고 계시는 동시에 그에게 자기의 자비를 행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이었다. 그때 비록 욥에게는 하나님이 자기를 암흑 중에 가두시고, 자기를 이방 사람같이 취급하시며, 그를 고통 중에 빠드리시고, 그를 한 원수처럼 대우하시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을지언정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당시엔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어떤 기록된 계시도 없던 때였기에(비록 요즈음에는 기록된 계시가 주요 방법이 되있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방법들 중에서 그 계시의 기록이 여기에선 언급되고 있지 않다.

이 문단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그들의 양심을 통하여 어떻게 가르치시며 훈계하시는지를 엘리후가 보여 준다.

Ⅰ. 이런 훈계를 위한 적당한 때와 기회(15절). "사람이 침상에서 졸며 깊이 잠들 때에나 꿈에," 즉 그 때는 사람이 번잡한 세속과 세상사와 속세의 이야기에서 벗어난 때이다.

그들이 잠자리 속에서 고독하고 적막할 때, 그때는 스스로의 마음 속으로 침잠하며, 자신의 마음과 교제하기에 좋은 때이다(시 4:4). 그런 때야말로 하나님이 인간과 친히 말씀하시기 위하여 택하시는 시간이다.

1. 하나님이 천사들을 보내실 때, 특히 자기의 심부름을 위하여 특별한 사자들을 보내실 때는, 보통 그런 때를 택하셔서 자기의 메시지를 전달하신다. 그때는 인간에게 엄습해 오는 깊은 수면으로 인하여 육체적 감각은 모두 폐쇄되고, 마음은 하나님이 하늘의 광명으로 직접 전달해 주시는 바를 즉각 받아들이기에 더욱 자유스러워지는 때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환상과 꿈을 통하여 자기의 마음을 선지자들에게 알리셨고(민 12:6), 그와 같이 아비멜렉과(창 20:3), 라반과(창 31:24), 요셉(마 1:20)에게 예고하였으며, 역시 바로왕과 느브가네살 임금에게 나중 일어날 일을 알게 하신 것도 이런 방법이시었다.

2.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자기의 대리자 곧 양심을 일깨워서 그 직분을 다 수행하도록 하고자 하실 때는 깊은 잠이 인간에게 임하는 때의 기회를 포착하시거나(비록 꿈이 대개는 공상으로부터 오든지 아니면 어떤 것은 양심에서 나오는 수도 있지마는), 혹은 조는 때를 이용하기도 하신다. 그 때는 사람이 완전히 수면에 빠진 것도 아니요 깨어 있는 것도 아닌 중간 상태에서, 오늘 하루의 지난 일을 밤에 생각하고 다음에 다가 올 날의 일을 아침에 계획하는 때이다. 그 시간은 그의 심령이 이미 잘못 행한 것에 대해 자신을 꾸짖고, 이제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를 스스로에게 다짐하기에 적당한 때이다(사 30:21, 참조).

Ⅱ. 그 교훈을 내려 주실 때의 권능과 힘(16절). 하나님께서 인간 자신의 양심에 확신을 주고 명령을 하심으로써 인간의 유익을 도모하실 때에는 다음과 같이 하신다.

1. 그들에게 교훈받을 허락을 내리시사 그들로 하여금 교훈에 주의를 기울이게끔 만드신다. "그는 이 때에 인간의 귀를 여신다." 인간의 귀는 술사의 소리에도 막혀 있었다(시 58:5). 그가 루디아의 마음을 여셨듯이 인간의 마음도 열어 주시고 또 귀도 열어 주신다. 하나님은 귀를 막고 있는 것을 제거해 주시며, 그리하여 확신이 제 길을 찾거나 억지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신다. 아니, 그는 영혼 속에 역사하시사, 양심의 지배에 승복하게 하시며, 양심의 규칙에 순응하게 하신다.

그것은 하나님이 귀를 열어 주신 결과이다(사 50:5). "하나님이 내 귀를 여시매 내가 거역하지 않았도다."

2. 하나님은 그의 훈계가 인간의 마음 속에 있을 거처를 만들어 주시고 그것들이 거할 수 있도록 해 주신다. "하나님은 인치듯 교훈하시는데" 그것은 그들을 위해 계획된 교훈이며 그들에게 부합되는 교훈이다.

하나님은 저희 영혼으로 하여금 이 교훈이 주는 깊고도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인상을 받을 수 있도록 흡사 봉인의 밀랍같이 만드신다. 인간의 심령이 마치 주형을 뜰 때 주물이 틀에 담기듯 하나님의 교훈 속에 던져지면 모든 일은 잘 진행된다.

Ⅲ. 보내어진 훈계의 목적도 의도.

1. 사람을 죄악으로부터 특히 자만의 죄에서 멀리하시기 위하여 훈계하신다(17절). "이는 그가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의 꾀를 버리도록 하고자 함이다."

즉 사람이 자기의 사악한 목적으로부터 물러나도록 하며, 자기 마음의 성질이나 자기 인생의 진로와 그 취향이나 기질을 변하게 하든지, 아니면 그가 빠질 위험이 다분한 죄를 예방하게 하고자 하심이다. 또 그는 인간이 자기의 일에서 물러나도록 하고 인간의 일 즉 세상과 육신을 위해 하는 일을 중단하게 하는 동시에 그가 하나님의 일에 착수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많은 사람들이 죄 많은 출세 가도에서 자기 양심의 온당한 억제에 의하여, 곧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이 가증한 일을 행하지 말아라"고 제지하는 양심의 소리 때문에 멈추어서는 일이 많다. 특히 하나님은 이런 방법으로 "사람에게 교만을 막으신다." 즉 인간이 자랑할 만한 일들을 그에게서 감추시며 그가 겸손해야만 하는 이유를 그의 앞에 제시함으로써 교만이 그 안에 머물지 못하도록 인간의 마음을 제어하신다(어떤 이들은 이를 이렇게 읽기도 한다). "그는 인간에게서 교만을 제거해 버리려 하심이라."

즉 이것은 하나님이 그토록 많은 죄악의 원인이 되는 고통의 화근을 발본색원 해 버리심을 뜻한다. 하나님께서 자비를 위하여 비축해 두신 모든 자들은 겸손해지고 교만을 멀리할 것이다. 교만은 사람들이 자기 목적을 수행하는데 열심을 가지게 하는 동시에 그 일에만 달라붙도록 만든다. 그들은 그들의 방법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의 자만심을 굴종시킴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꾀에서 물러나게 하신다.

2. 인간들을 파멸로부터 구해 내시기 위하여 훈계하신다(18절). 죄인들이 악한 꾀를 좇고 자기들의 자만에 탐익하고 있는 동안, 그들의 영혼은 함정과 칼을 향해 달려가며, 이 세상에서의 멸망과 앞으로 닥쳐올 세상에서의 멸망을 향해 걸음을 빨리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양심의 훈계를 통하여 그들이 범죄하지 않도록 막으실 때에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는 그들이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 그들의 영혼이 무저갱으로 "떨어지지 않게 제지하시며," 하나님의 복수의 "칼날"에 멸망할 그들을 멸망으로부터 건지신다. 그리하여 불의가 그들의 파멸이 되지 않는다. 죄에서 사람을 돌이키게 하는 것은 그들을 지옥으로부터 건지는 것이며, "한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는 것이다"(약 5:20). 깨어 움직이는 양심의 제재 아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자비한 일인지를 참작하라. 우리의 친구가 당한 상처는 신실하며 그가 묶인 속박은 인자하다. 왜냐하면 그것들로 말미암아 우리 영혼이 영원한 멸망에 빠지지 않기 때문이다.

 

33:15 없음.

 

33:16 없음.

 

33:17 없음.

 

33:18 없음.

 

33:19

엘리후의 연설(6)(욥기 33:19-28)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멸망의 길로 가지 못하도록 그들 자신의 양심을 통하여 한 번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들은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죄악의 길로 행할 때에 그들의 마음에서 솟아 나는 죄에 대한 억제심이 곧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라고 깨닫지 못하고, 그것을 자기들의 마음이 우울한 탓으로 돌리거나, 그들의 교양이 깊은 때문인 것으로 여긴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은 두 번씩이나 말씀하고 계신다. 그는 두 번째로 말씀하신다. 그리고는 죄인들을 각성시키고 개심시킬 딴 방법을 시험해 보신다. 섭리에 의하여 그것은 괴로움을 주는 것 일 수도 있고, 자비로운 방법일 수도 있으며(이런 일에서도 그는 두 번씩이나 말씀하고 계신다), 그런 것과 병행하여 훌륭한 목회자들의 때맞은 교훈에 의해서도 행하신다.

욥은 자기 질병에 대하여 많은 불평을 하였고, 자기 병들을 보건데 하나님은 자기에게 노여워하고 계신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을 내렸다. 그의 친구들 역시 그런 판단을 하였다. 그러나 엘리후는 그들이 모두 잘못 이해했다고 설명한다. 그가 내세운 이유는 하나님이 육체적 고통을 주시기는 하나, 그것을 사랑으로 주시는 것이어서, 결국에 가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영혼을 유익하게 하시려는 은혜로운 계획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다. 엘리후의 연설 중에서 이 부분은 병세의 쾌차를 위해서 투병 중인 자에게는 매우 되움이 되는 말이다. 하나님은 병 중에, 병을 통해 인간에게 말씀하신다.

Ⅰ. 여기에서는 극도에 달한 환자가 묘사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질병에서 어떤 임무를 띄워서 보내실 때에는 질병이 어떤 작용을 일으키는지 유의해 보라(19절 이하). "이 일을 행하라고 하면 그것은 그대로 행하느니라."

1. 병자는 전신에 고통스럽지 않은 곳이 없다(19절). "그는 병상의 고통으로 징계를 받는다." 그것은 그를 병상에 유폐시켜 버릴 만큼 고통을 주는 것이며, 또 그 고통은 너무나 심해서 그는 편안함을 얻을 수 없고, 평안히 자신을 쉬게 해 주던 침대 위에서조차 안락을 얻을 수 없다. 솜털로 된 부드러운 침대가 고통과 병으로 인하여 가시로 된 침대로 변하게 될 것이며, 그 침상 위에서 편안히 잠들던 그가 이제는 날이 샐 때까지 그 침상 위에서 이리저리 딩굴게 되었다.

그가 아프다고 호소하며 신음하는 것은 살이 아리는 고통이 아니라 뼈를 깎는 듯한 아픔 때문이다. 그 고통은 내부에 뿌리박은 고통이다. 사지 중 한 팔, 한 다리의 뼈만 아픈 게 아니라 사지 백체의 "무수한 뼈들이" 마디마디 그렇게 시달림을 당한다. 비록 외부의 상처는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육체 안의 원인 때문에 이와 같이 아플 수 있다는 것을 볼 때, 우리가 가진 육체가 얼마나 연약한 것이며, 얼마나 지긋지긋한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또한 죄가 저지르는 결과가 어떤 것이며 그것이 끼치는 화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관찰하라. 고통은 죄의 열매이다. 그렇지만 육체의 고통도 때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영혼에게 유익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2. 그는 질병의 일반적 증세대로 자기의 식욕을 아주 상실하였다(20절). "그의 마음"은 가장 필수적인 음식인 "식물을 싫어하며," 이전에는 그가 아주 즐기고 아주 굉장한 기쁨으로 입맛을 다시던 "별미를 싫어하게" 되었다. 이것은 왜 우리가 "진수성찬을 탐하지 말아야 하는"데 대한 좋은 이유가 되는데, "이는 그것들이 간사하게 베푼 음식물"이기 때문이다(잠 23:3). 지금 당장은 그 맛있는 음식을 우리가 좋아하지만, 얼마 아니 되어서 곧 그것에 물리게 된다. 유복할 때 호화롭게 사는 자들도 병으로 인하여 고량진미를 냄새조차 맡기 싫어하게 되는 날에는, 그 징벌 가운데서 자기 죄를 비탄과 치욕으로 깨닫게 된다. 우리는 분수에 맞지 않는 식도락을 즐기지 말자. 왜냐하면 그 음식을 보기조차 싫어하게 될 때가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시 107:18).

3. 그는 껍질과 뼈만 앙상하여 완전히 해골처럼 되었다(21절). 병으로, 아마도 며칠간의 병고난으로, 비대하고 으젓하던 "그의 육체가" 감히 볼 수 없을 정도로 "파리해졌다." 그의 살이 놀랍게도 야위고 빠졌다. 그리고 그의 살 속에 깊숙이 묻혀 있던 "뼈들이 이제는 드러나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의 갈비뼈를 셀 수 있게 되었으며, 그의 모든 뼈들을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병이, 생명의 떡으로 영양을 공급받은 영혼을 야위게 할 수는 없으나, 신체의 변화는 곧 일으키게 할 수 있다.

전에는 그처럼 아름답던 풍모에

마음대로 행하며, 위풍당당하던 사람이

야윈 빰에 유령처럼 패인 눈이 되도록

(심하게 변하매) 친구들이 놀라는구나!

전에는 도톰한 살 속에 숨겨졌던 뼈들이

살갗 위로 불매불툭 튀어 나왔구나!

R. 블랙모어 경

4. 그는 죽은 자라고 하여 포기되었고, 그의 생명은 살 가망이 없다고 생각되었다(22절). "그의 혼은 구덩이에 가까워지느니라." 즉 임종의 모든 징후가 그 위에 나타나며, 그의 주변에 있는 것과 그 자신의 것을 살펴 보건대 그는 죽어가는 사람이란 뜻이다. 죽음의 괴로움이, 여기서는 멸하는 자라고 일컫는데, 이제 막 그를 엄습하려 하고 있다. 사망의 줄이 그를 두르고 있다(시 116:3). 아마 이런 말들은 모두가 죽음이 멀리 있을 때는 자기에게 절실하지 못한 일로 경시하던 자들이 그것들을 눈 앞에서 응시하게 되자 파멸시키는 자로서의 죽음을 느끼게 되는, 바로 그런 두려운 불안을 암시할 것이다. 이전에는 사생관이 어떠했든지 간에, 정작 결정적 시기에 다다르면 죽는다는 것이 심각한 일이라는 데 모두가 일치하게 된다.

Ⅱ. 그를 교훈시키기 위해 준비하신 것이 묘사되고 있다. 즉 그가 당한 고난을 성스러이 사용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준비물을 마련하셨는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그런 방법으로 말씀하심으로써 인간이 듣고 이해하며, 그의 말씀을 헛되이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23절). 인간의 병 중에 그를 시중하며 깨닫게 하고 충고하며 위로해 줄 "사자가 있다면" 또 하나님이 뜻을 풀이하고 그 의미를 해설해 줄 "해석자"가 있다면, 또 그 채찍의 소리와 그 해석을 알아 듣고 해석해 줄 "지혜로운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복된 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재난을 통하여 말씀하실 때에는 우리가 흔히 그 고난의 언어를 잘 알아 듣지 못하므로 해석하는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만약 그런 통역자가 있다면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병 중에 있는 자에게는 명의와 마찬가지로 훌륭한 목사님의 조언과 도움이 필요하고, 환자는 그것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특히 그 목사가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고 드높이는 데에 뛰어난 기술을 소유한 분인 경우에는 더욱 더 그래야만 된다. 그가 만약 그럴 경우에는 "일 천인 중 한 사람"에 해당하며, 그에 따라 귀중히 여김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한 때에 그의 일을 "인간에게 정당히 행할 것을 보이는 것이다." 그의 정당함이란 하나님의 정당함을 의미할 수도 있다. 즉 하나님은 미쁘심 가운데에서 인간에게 고통을 주시기 때문에 조금도 인간에게 악을 행하시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고생을 통하여 사람이 바람직한 향상을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는 그렇게 하여 깨닫게 해 주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말은 인간이 정당히 행할 것이나 정직을 의미할 수도 있다.

1. 그 정직은 이렇다.

만약 그 병자가 참으로 경건한 사람일 것 같으면, 해석자는 욥의 친구들이 행한대로 행동하지 않을 것이며, 욥이 고난을 받는다고 해서 그를 외식하는 위선자로 증명하는 일이 자기 본분이듯이 행하지 않을 것이며, 그 반대로 그가 고생을 당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의로움을 드러내어 그가 위로를 받게 하며, 결과야 어찌 되든지 간에 편안히 해 줄 것이다.

2. 그 정직은 곧 개혁이며, 생명과 화평을 지향하는 것이어야만 된다. 의로움의 길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하고도 확실한 길임을 사람이 알게 되고 그 길을 택하여 그 길을 따라 행하게 되면 일은 다 이루어진 것이다.

Ⅲ. 그가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은혜 가운데 받아 들이신다(24절). 진정한 회개와 정직은 복음을 온전하게 이루는 것인데, 그것이 의무인 동시에 자기 이득도 된다는 깨달음을 병자가 정말로 얻었다고 하나님께서 판단하시게 되면, 은혜를 주시려고 대기하시다가 참다운 회개가 보이기 시작하는 즉시 자비를 보이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사," 그를 자기 은총과 생각 속으로 영원히 끌어들이신다.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만나시는 대로 자기도 그에게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서 만나 주신다.

1. 하나님은 그를 구원하기 위해 은혜로우신 명령을 내리실 것이다. 그가 이르시기를 "그를 건져서(즉 그를 구출하여)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죄의 삯인 사망에 이르지 않게 하라"고 하실 것이다. 병고가 그 역할을 다 해내고 나면 그 질병들이 물러 갈 것이다.

우리가 의무의 길로 행하여 하나님께 돌아 갈 때에는 하나님께서도 자비의 길로 우리에게 돌아오실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에 순종하리 만큼 그의 사자들을 영접하고 그의 해석자들을 올바로 이해하는 자들은 구원을 받아 구덩이에 이르지 않게 될 것이다.

2. 하나님은 이 목적을 위하여 은혜로운 이유로 말씀하실 것이다. "나는 대속물" 또는 보상물을 "얻었다"고 하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대속물이시기 때문에 엘리후는 그를 대속물이라고 칭하고 있으나, 욥은 그를 자기의 구속자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값을 내는 분이기도 하고 동시에 그 치르어지는 값도 되시며, 제사장인 동시에 희생 제물도 되시기 때문이다.

영혼의 값은 너무나 엄청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뿌리는 보혈 이외에는 어떤 것으로도 구속할 수가 없으며, 죄로 말미암아 받은 상처는 너무나 심한 것이어서 하나님의 독생자의 피로밖에는 대속할 것이 없다. "그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대속물로 내어 주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찾아내신 대속물이요, 무한한 지혜자의 고안품이다. 우리로서는 그 대속물을 찾아낼 수도 없었고, 천사들도 그것을 결코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신비에 쌓인 하나님 지혜이며, 감추인 지혜이다. 그것은 비밀을 들여다 보고 싶어하는 제왕들과 권세자들이 세세무궁토록 기이히 여기고 경이롭게 여길 만큼 아주 기묘한 창안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발견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여기시는지 본문에서 관찰해 보자. "내가 대속물을 찾았노라. 그것을 얻었노라(e[urhka( e[umrhka). 나는 바로 내가, 그 일을 해낸 자이다."

Ⅳ. 병자의 회복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원인을 제거하라. 그리하면 그 결과도 그치리라. 아픈 사람이 뉘우치게 되면 어떤 축복된 변화가 뒤따르는지 살펴 보자.

1. 그 몸이 건강을 되찾는다(25절). 이것은 꼭 병자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결과만은 아니고, 때때로 그렇다는 것뿐이다. 병세의 회복이 죄의 사하심에서 온 것일 때 병에서 놓여 남은 참으로 긍휼하심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자기 등뒤로 던지시사," 우리의 육체를 "썩음의 구덩이에서 건지심은" 우리의 영혼에 대한 사랑이 있으시기 때문이다(사 38:17). 이것이 복된 회복이다.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마 9:2, 6).

이와 같이 본문에서도 그를 대속물이라고 한 점은 관심을 끈다. 그리고 나면 "그의 살이 어린 아이보다 연하여져서," 그가 앓았던 병이 흔적도 남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는 소년 때를 회복할 것이다." 그는 소년 시절에 가졌던 아름다움과 강건하던 힘을 회복할 것이다.

자연스런 본성을 억압하던 질병이 물러갈 때는 너무나도 신기하게 자연 그 자체가 저절로 낫게 한다. 그런 현상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과 인자하심은 감사하여 마땅하다. 병고가 일으키는 이와 같은 자비로운 섭리로써 하나님은 한 번 아니 두 번씩이나 인간의 아들 딸에게 말씀하시사(저희가 깨닫기만 한다면), 저들로 하여금 저희가 하나님께 의존해야 할 것과, 그가 저희를 인자하심으로 측은히 여기신다는 사실을 알게 하신다.

2. 그의 영혼이 평안을 되찾는다(26절).

(1) 병자는 참회하는 자가 됨으로써, 탄원하는 사람이 되고 기도하기를 배우게 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총을 위하여 하나님을 찾는 자가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것이며," 용서를 위하여, 건강을 위하여 기도를 드릴 것이다. "고통을 당하는 자나, 아픈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를 드릴지니라."

그가 자기의 병고가 나음을 보게 된다고 하여 더 이상 기도드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지 말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고통의 성별을 위해서 못지 않게 자비의 성별을 위하여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2) 그의 기도는 열납된다.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이요," 그를 아주 기쁘게 여기실 것이다. 그의 진노가 그에게서 돌이켜질 것이며, 하나님의 얼굴이 그의 혼에서 빛을 비취실 것이다. 그리고는 또 다음과 같은 일이 뒤따르게 된다.

(3) 그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위로를 얻을 것이다. 그는 이제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 이전에는 하나님이 자기에게서 그 낯을 숨기셨던 것이다. 이제 그는 그 얼굴을 기쁨으로 바라 볼 것이다. 무슨 광경을 본들 이보다 더 활기를 소생시켜 줄 것인가(창 33:10, 참조). "내가 마치 하나님의 얼굴을 본 듯하도다……"

모든 진실된 참회자들은 어떤 번영이나 어떤 쾌락에서 얻을 수 있는 기쁨보다도 즉 어떤 일에서 보다도 하나님의 은총이 돌아옴에서 더 큰 기쁨을 얻는다(시 4:6, 7).



(4) 그는 마음의 복된 평정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줄 깨닫는 데서 연유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사람에게 그의 의로움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그는 속죄, 곧 그 위로를 얻을 것이다(롬 5:11). 의로움을 그에게 돌리실 것이며, 그 위에다 평강과 희락과 기쁨을 말씀하실 것이다. 비록 그가 고통의 때에는 그것들을 들을 수가 없었으나 이제는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하나님도 그를 의로운 자로 취급하실 것이며, 그에게는 만사가 순조로와질 것이다.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의를 얻으리라"(시 24:5).

하나님은 그에게, 가서 그 이상 더 죄짓지 말라는 은혜를 주실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그가 회복된 후 그의 생활이 새로운 혁신을 하게 됨을 의미할 것이다. 그가 이전에는 업신여겼던 하나님께 기도드릴 것이므로, 하나님도 이전에 자기가 학대하였던 인간에게 그의 의를 회복시켜 주실 것이며, 보상하여 주시고 장래에는 정당하게 대하실 것이다.

Ⅴ. 하나님께서 그 자손된 인생을 취급함에 있어 의거하실 일반 법칙이 이 사례에서 추론될 수 있다(27, 28절).

병자들이 유순히 복종함으로 인하여 완쾌되듯이, 자기 죄를 회개하는 다른 모든 사람들도 하나님께 자비를 입을 것이다.

1. 여기에서 죄악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죄를 짓지 말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 보자.

우리가 죄의 본성과 그 폐해를 알고 있는가? 그것은 올바른 것의 반대이다. 그것은 아주 부당하고도 비이성적인 것이다. 그것은 창조주께 대한 피조물의 반역이며, 영에 대한 육의 찬탈과 지배이고 선악간에 대한 영원한 법칙과 영원한 이성을 반박하는 것이다. 그것은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는 것이다"(행 13:10). 그러므로 죄의 길은 "굽은 길"이라 일컬어지고 있다(시 125:5).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그것은 우리에게 유익을 주지 않는다." 암흑의 일들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일들이다. 죄악의 모든 이득을 전부 합쳐 그 손익을 저울질 해 본다면, 죄로 인한 모든 이익이 그 손해를 상쇄시키기에는 너무 부족하다. 진정으로 참회하는 모든 사람은 이 점을 쾌히 인정한다. 그것은 억울한 대가가 아닐 수 없다. "이제는 너희가 부끄러워하는 그 일들에서,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롬 6:21)

2. 회개란 무엇이며 우리가 참회해야만 할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 보자.

우리는 자신들이 진정으로 회개한 자들임을 시인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우리 죄를 고백해야만 한다(요일 1:9). 우리는 범죄 사실을 "내가 범죄하였나이다"하고 고백해야 하며, 혐의 사실을 부인하거나, 우리 자신의 의로움을 옹호해서는 아니 된다. 우리는 죄의 잘못을 고백해야 하며, 불의와 죄의 부정직도("나는 옳은 것을 굽게 하였나이다") 고백해야 한다. 우리는 죄악의 어리석음을 고백해야 한다.-"내가 너무나 어리석었고 무지하였음은 죄가 내게 무익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 이상 더 죄악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우리가 이와 같은 참회의 고백을 왜 해야 마땅한지 그 충분한 이유가 없겠는가?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대하고 계신다. 인간들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이 다음에 행할 일이 무엇인지, 즉 그들이 계속하여 죄를 저지를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반성하여 돌이킬 것인지를 살피기 위해서 "인간들을 바라보신다." 그는 "나의 행한 것이 무엇인고?" 하고 말하는 자가 있을까 하여 귀를 기울여 듣고 계신다(렘 8:6). 그는 동정의 눈길로 죄인들을 바라보시며, 그들에게서 이 말을 듣고 싶어하신다. 왜냐하면 그는 저들의 파멸을 기꺼워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저들을 응시하다가 저들 안에서 이와 같은 회개가 역사하여 일어남을 알게 되는 즉시로 마치 돌아오는 탕자를 맞으러 뛰어나가는 아버지같이 저들을 격려하시고 기꺼이 영접하신다(시 32:5, 6).

(2) 회개의 고백은 우리에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이익을 줄 것이다. 약속은 전반적인 것이다.

[1] 그가 누구든지 간에 스스로를 이와 같이 낮춘다면 그는 정죄를 당하지 않고, 닥쳐올 진노로부터 구함을 받을 것이다. "그는 그의 영혼을 건져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할 것이니 그것은 곧 지옥의 구덩이다." 그는 불의로 말미암아 파멸을 당하지 아니할 것이다.

[2] 그가 누구이든 이와 같이 스스로 겸비하는 자는 영원한 생명과 기쁨으로 복받을 것이다. "그의 생명은 빛을 볼 것이다." 즉 온갖 선을 보며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향유하는 기쁨을 누릴 것이다. 이와 같이 지극한 축복을 얻을 수 있다면 가령 선지자가 아무리 큰 일을 행하라고 명했다 한들 우리가 그것을 행치 아니할 것인가? 하물며 그가 우리에게 이르신 것이 오직 "씻고 깨끗함을 얻으라." "죄를 고백하고 사함을 받으라." "회개하라. 그리하여 구원을 얻으라"라는 말씀들인데 우리가 그것을 행치 아니할 것인가?

 

33:20 없음.

 

33:21 없음.

 

33:22 없음.

 

33:23 없음.

 

33:24 없음.

 

33:25 없음.

 

33:26 없음.

 

33:27 없음.

 

33:28 없음.

 

33:29

엘리후의 연설(7)(욥기 33:29-33)

우리는 이 문단에서 엘리후의 연설 중 첫 부분의 결론을 대하게 된다.

1. 그는 이제껏 자기가 말한 모든 것을 간략히 요약하여, 인간의 자손을 향한 하나님의 이 모든 뜻을 베푸심에 있어서 하나님의 원대하시고 은폐로운 계획은 저들을 영원한 참상에서 구원하시는 일임과 아울러서 저들을 영원한 복락으로 인도해 들이시는 일임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29, 30절).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들을 사람에게 행하시고 계신다."

그는 저들과 거래하실 때 양심에 의해서나, 섭리로, 또 목사나 자비로운 행위나 고통을 주는 일에 의하여 관계하신다. 그는 저들을 아프게 하시다가 또 낫게도 하신다. 이 모든 일은 다 그의 작업이시다. 그는 "이것과 저것을 병행하게 하신다."(전 7:14).

그러나 그의 손길은 그 정부를 총괄하신다. 우리를 위해 만사를 행하시는 자는 하나님이시다. 모든 섭리는 사람에게 작용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로 여겨져야 하며, 인간과 투쟁하시는 그의 노력이라고 간주되어야 한다.

그는 인간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서 다양한 방법을 구사하신다. 만약 한 고통으로 되지 않으면 다른 불행을 가지고 시험해 보실 것이다. 만약 어느 것으로도 성과가 없을 때에는 자비를 써 보실 것이다. 그리고 그는 사자를 보내시어 이 양자를 다 해석시키실 것이다. 그가 이와 같은 일들을 두 번 세 번 행하시는 때가 비일비재하시다. 14절을 참고하면 본문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은 한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신다."

만약 한 번으로 효과가 없다면 그는 두 번 아니라 세 번이라도 역사하신다. 그는 자기가 시행해 보셨던 방법을 바꾸어 보셨다가("우리는 피리를 불어보기도 하였고, 애곡도 해 보았노라"), 또 꼭 같은 그 방법으로 다시 돌아가서 반복하여 동일한 적용을 해 보신다.

왜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처럼 고심을 하시는가? 그것은 "인간의 영혼을 구덩이에서 끌어 들이키기 위한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관심하는 것보다 더 우리에게 대하여 신경을 써 주시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비참해 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파멸시키고자 하건만, 그는 우리로 하여금 구출되게 하시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멸망시킬 방법에서 우리를 구하여 방법을 은혜 중에 고안해 내신다.

꿈이나 환상과 같은 전에 말한 방법은 "혼이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18절). 즉 죄를 예방하여 우리가 그것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질병과 말씀에 의한 이 방법은 죄에 빠진 자들을 회복시키며, 그 혼을 끌어 돌이키기 위한 것이다. 이는 저들로 그 속에 누워서 멸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참회로 말미암아 구덩이에서 끌어올려진 모든 자에 대해서는 "생명의 빛으로 비취시도록 하신다." 다시 말해서 저들이 현재의 위로와 영원한 복락을 누릴 수 있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죄와 암흑 세계인 음부에서 구해 내시는 자들은 그가 천국에 인도해 들이시고 빛 가운데에 있는 성도들의 기업에 참여시키실 것이다. 이 점이야말로 그가 자기의 모든 교훈과 그 모든 섭리에서 노리는 주안점이다. "여호와여! 인간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이처럼 그에게 찾아 오시나이까!"

이 방법은 우리로 하여금 그의 계획에 순응하게 하고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그의 역사에 참여하게 하며, 그에게 반대하지 않도록 우리를 사역하신다.

이 방법은 영원히 멸망당할 자들이 변명할려고 해도 유구무언일 수밖에 없게 할 것이며,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온갖 수단이 백방으로 동원되었지만 치료받기를 원치 않은 저희의 변명이 서지 않게 할 것이다.

2. 엘리후는 자기가 이제껏 제시했던 것에 대하여 욥이 받아들일 것을 요청하고, "그것을 잘 주목하라"고 욥에게 부탁한다(31절). 우리의 이익을 위해 의도된 모든 것은 우리의 주의를 요구하며, 우리가 주목할 것을 환기시키고 있다.

(1) 만약 욥이 들은 말에 대해 깊은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 말에 대해 할 수 있는 그 어떤 이의나 반대도 욥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하였다(32절). "만일 당신이 당신 자신을 위해서나, 당신 자신의 변호를 위해서 할 말이 있다면 내게 대답하시오. 나는 젊고 당신은 늙었다고 할지라도 말로써 당신을 욱박지르지 아니할 것입니다. 내가 당신을 의롭게 하려 하노니 말하시오. 나는 당신을 정죄하려 한 당신의 다른 친구들과 같이 아니합니다."

엘리후는 이길 목적만을 위해 입씨름을 한 욥의 세 친구들과는 달리 오직 진리만을 목적 삼아 쟁론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나무랄 사람들을 의로운 자로 인정하려 하며, 그들이 비난의 대상이 된 자기 잘못을 스스로 일소하는 걸 보고 싶어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모든 가능한 기회와 격려를 제공해 주어야 한다.



(2) 만일 욥이 엘리후의 말한 것을 듣고도 이의를 제기할 것이 없다면, 자기가 얘기할 것이 더 많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욥이 끈질기게 귀를 기울여 줄 것을 요망하고 있다(33절). "잠잠하라. 내가 지혜로 너를 가르치리라."

지혜를 나타내 보이고자 하는 자들과 지혜를 배우고자 하는 자들은 양쪽이 다 귀를 기울이고 침묵을 지켜야 하며, 듣는 데에는 민첩하고 말하는 데에는 느려야 한다.

욥은 지혜롭고 선하였다. 지혜롭고 선한 자들이라도 더 지혜롭고 더 선한 자들이 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지혜와 은혜를 이용하여 그들은 더 발전하는 일에 스스로를 종사시켜야만 한다.

 

33:30 없음.

 

33:31 없음.

 

33:32 없음.

 

33:33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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