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욥기 3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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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

자기 자신을 해명하는 욥(1)(욥기 31:1-8)

육신의 정욕 그리고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은 많은 사람들이 걸리는 두 개의 치명적인 바윗돌이다. 이러한 것들에 대해 욥은 그가 항상 경계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음을 주장하고 있다.

Ⅰ. 육신의 정욕을 대항했다. 그는 음행으로부터, 이웃 사람의 아내를 더럽히는 일로부터 떠나, 그 자신을 정결케 지켰을 뿐만 아니라(9절), 어떤 여인과도 음탕한 관계를 갖는 것을 금하였다. 그는 첩이나 정부를 두지 않았다. 비록 그의 아내가 매우 현명하거나 훌륭하거나 친절한 여인은 아니었을지라도, 극히 성실하게 부부의 침실을 지켰다. 처음부터 남자는 오직 한 아내만을 취하고 그녀만을 사랑하도록 되어 있었다. 욥은 견실하게 이 제도를 지켰고, 그것을 위배하려는 생각을 혐오했다. 왜냐하면 그의 위대함이 그로 하여금 그것을 하도록 유혹했을지라도 그의 선함이 그것을 막았기 때문이다.

욥은 이제 육신의 병과 고통 속에 처해 있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몸을 순결하게 지키고 그 그릇을 성별하여 영예롭게 간직하며, 부정한 욕정에서 떠나 순수하게 지키려고 주의를 기울였다는 사실을 우리의 양심이 우리를 위해 증거가 된다면, 이러한 고통 속에서 있더라도 그것은 우리에게 특별한 방법으로 위안을 준다. 이제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 보자.

1. 이 일 속에서 그가 지킨 결심은 무엇이었는가 살펴 보자(1절).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즉 "나는 죄되는 것을 경계했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즉,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그러한 방법을 사용하여 그런 곳으로 첫 발을 내딛는 것조차도 금했다." 그는 부정한 희롱이나 음란한 행위에서 매우 멀리 떨어져 있었다.

(1) 그는 부정한 광경도 용납하지 않으려 했다. "그는 그의 눈과 언약을 세워" 햇빛을 보는 즐거움과 보이는 피조물 속에서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기쁨은 용납하되, 부정한 상상력을 자극하거나, 더욱이 그의 마음 속에 어떤 불결한 욕망을 자극하는 물체에는 결코 눈을 두지 않을 것을 약속했던 것이다. 만일 그의 눈이 이것을 위반하면, 그는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그것에 대한 벌을 받아야 한다.

마음을 정결케 하려는 자들은 불결한 것의 출구이며 입구인 그들의 눈을 경계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을 통하는" 눈과(사 3:16), "음심이 가득한 눈"(벧후 2:14)에 대해 읽을 수 있다. 최초의 죄악은 눈에서 시작되었다(창 3:6). 우리가 관여해서는 안 되는 것은 또한 탐내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갈구해서는 안 되는 것은 보아서는 안 된다. 금지된 재물(잠 23:5)이나, 금지된 술(잠 23:3) 그리고 금지된 여자(마 5:28) 등이 이에 속한다.



(2) 그는 부정한 생각은 결코 용납하지 않으려 했다. 내가 "어찌 불결한 상상이나 욕망을 품고 처녀에게 주목하랴?" 수치감과 영예감이 그로 하여금 아름다운 처녀의 순결을 유혹하지 못하도록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와 그에 대한 두려움이 그로 하여금 그런 것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도록 제재했을 것이다. 몸은 물론 영이 순결하지 않은 자는 순결한 것이 아니다(고전 7:34). 제7계명에 대한 그리스도의 설명이 그것에 대한 옛사람들의 관념과 얼마나 일치하고 있으며, 모세의 자리에 앉은 바리새인들보다 욥이 얼마나 더 잘 그것을 이해하였는가를 보라.

2. 이 문제에 있어서 그를 주관한 동기는 무엇이었는가를 살펴 보자. 사람들의 비난도 물론 생각해야 하지만(잠 6:33), 그것은 사람들의 비난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두려워한 때문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1) 부정은 모든 유익을 박탈하고 우리에게서 그것에 대한 기대를 말살해 버리는 죄악이다(2절). "위에 계신 하나님의 내리시는 분깃이 무엇이겠느냐?" 이처럼 더러운 죄인이 깨끗하고 거룩한 하나님으로부터 어떻게 축복을 기대할 수 있으며, 그의 은총의 표징 얻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그들이 어떻게 높은 곳에서 전능자의 주시는 기업을 바랄 수 있겠는가? 하나님, 전능자가 계시는 곳 이외에는, 위로부터, 높은 곳으로부터 오는 것 이외에는 한 영혼을 위한 분깃이 없으며, 산업이나 참된 행복도 없다. 부정한 것에 탐닉하는 자들은 하나님과 교제하기에 극히 부적당한 자들이 되고 말기 때문에, 여기에서 은혜를 얻지 못하거나, 이후에 영광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불결한 영들과 결합하여 영원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다. 그때에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무슨 분깃을, 무슨 산업을 얻겠는가? 정결치 못한 것은 결코 새 예루살렘, 그 거룩한 성으로 들어갈 수 없다.

(2) 거룩한 형벌을 초래하는 것은 죄악이다(3절). 만일 합당한 때에 회개하지 않는다면 죄인은 분명히 멸망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불의자에게는 환난이, 조속하게 틀림없이 임하는 환난이, 아니겠느냐?" 이 "행악자에게는 재앙이 아니겠느냐?" 우매한 자들은 이 죄를 비웃고 그것을 희롱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작은 과오 즉 젊은이의 장난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헛된 말들로 그들 자신을 속인다. 따라서 그들이 그것들을 매우 경솔히 여기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 영원한 하나님의 참을 수 없는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한다"(엡 5:6). 섭리의 일반적인 길을 따라 때로 하나님께서 만나시는 죄인들이 있는데, 이들이 그러한 자들이다. 소돔의 환난은 이상한 심판이었다. "행악자에게(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이간함이 없겠느냐?"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하는 것이 죄의 사악함이며(엡 4:17, 18), 영원히 그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게 되는 것이 죄인들에게 내려질 심판이다(계 22:15).

(3) 그것은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감추어질 수가 없다. 방종한 생각이 그의 인지를 피할 만큼 그렇게 철저하지 못하며, 음탕한 시선이 그렇게 재빠르지도 못하다. 더욱이 어떤 불결한 행위도 그의 시야에 뜨이지 않을 만큼 은밀히 행해질 수도 없다. 만일 욥이 언제고 이 죄의 유혹을 받았다면, 그것을 피하기 위해 그 자신을 억제했을 것이며,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하고 말한 요셉처럼(창 39:9), 욥도 "그가 내 길을 감찰하지 아니하시느냐"(4절) 하는 이 합당한 생각을 품음으로써 그 유혹을 막으려고 온 힘을 기울였을 것이다. 욥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사실이었다.

[1] 하나님의 전지하심. 하나님의 눈이 "사람의 길 앞에" 있다는 것은 큰 진리이다(잠 5:20, 21). 여기에서 욥은 이것을 그 자신과 의의 행위에 적용시켜서 언급하고 있다. "그가 내 길을 감찰하지 아니하시느냐? 하나님이시여, 당신은 나를 살펴 아시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규율에 의해 걷고 있는지, 어떤 무리들과 함께 걷고 있는지, 어떤 목적을 향해 걷고 있는지를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그는 또한 우리가 어느 길을 걷고 있는지를 아신다.

[2] 그의 통찰. "그는 보실 뿐만 아니라 주목하신다. 그는 내 걸음을, 의무의 길에서 나의 그릇된 걸음과 죄의 길로 들어서는 나의 빗나간 걸음을 모두 다 세신다." 그는 일반적으로 우리의 길을 보실 뿐만 아니라, 이 길에서의 모든 행위, 모든 동작에서의 우리의 특별한 걸음을 인지하신다. 그는 모든 것을 기록하신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에게 책임을 추궁하시사 그 모든 일을 판단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살피는 것보다 더 정확하게 무리를 살피신다. 누가 항상 자기의 걸음을 세겠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세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중하게 걸음을 옮기도록 하자.

Ⅱ. 그는 견고히 서서 이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대항하여 경계하였으며, 재물을 모으기 위한 사악하고 부정직한 방법은 모두 피하려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는 모든 금지된 즐거움은 물론 모든 금지된 이득을 두려워했다. 다음을 살펴보자.

1. 그의 단언은 무엇이었는가? 대체로, 그는 모든 행위에 있어서 정직했고 또 의로웠었다. 그리고 그가 알기로는 다른 사람을 해한 일은 결코 없었다.

(1) 그는 결코 "그의 행위가 허탄하지" 않도록 했다(5절). 즉, 그는 결코 이득을 취하기 위해 감히 거짓말하려 하지 않았다. 그의 모든 처사에 있어서 희롱하거나 속이거나 여러 말을 늘어 놓는 것은 결코 그가 택하는 방법이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은 항상 속이며 걸어가고 있다. 그들은 실재보다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척하며 더욱 신뢰를 얻으려 하거나, 그 이하인 체하여 그들에게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도록 만든다. 그러나 욥은 이들과는 달랐다. 그의 재물은 비록 지금은 줄어가긴 했지만, 망령되이 얻은 것은 아니었다(잠 13:11).

(2) 그는 결코 "궤휼에 빠르지" 않았다. 속이는 자는 재빠르고 틀림없이 민첩하다. 그러나 욥의 재빠름과 민첩은 결코 그러한 길에 쓰여지지 않았다. 그는 결코 궤휼로서 부유하게 되려고 서두르지 않았다. 그리고 신중하지 못하여 부당한 일을 행하는 일이 없도록 언제나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지니고 있는 것은 위안을 주는 것으로서 사용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정직하게 얻어진 것이라 할지라도 잃게 될는지도 모른다.

(3) 그의 "걸음이 길에서," 공정한 처사와 의의 길에서 "떠난 적이 없었다." 그는 결코 그 길에서 이탈한 적이 없었다(7잠). 그는 계속 궤휼의 노정과 길을 걷지 않으려고 관심을 기울였을 뿐만 아니라, 정직의 길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도록 매우 주의했다. 모든 세미한 행위와 일에서까지 우리는 의로움의 규율에 우리 자신을 견고하게 묶어두어야 한다.

(4) 그의 마음은 "그의 눈을 따라가지" 않았다. 즉, 그는 남의 것을 보고 탐내지 않았으며, 그것이 그의 것이었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탐심은 "안목의 정욕"이라 일컬어지고 있다(요일 2:16). 아간은 저주받은 것을 보고서 취하였다. 눈을 따라가는 마음은 어리둥절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눈은 나타난 것 이외의 것은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마음은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늘에 두어야 한다. 즉 그것은 믿음의 지시와 올바른 이치를 따라야 한다. 만일 그것이 눈을 따른다면 그것은 잘못된 길로 인도되어 "하나님이 그를 심판할 것이다"(전 11:9).

(5) "그의 손에 더러운 것이 묻지 않았다." 즉 그는 부정직하게 어떤 것을 취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았으며, 그렇게 할 수 있었을 때라도 남의 것을 차지하지 않았다. 불의는 재산과 그 소유자에게 찍히는 하나의 오점이다. 그것은 그 둘의 아름다움을 더럽히므로 두려워해야 하는 얼룩이다.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다루는 자들은 아마도 그들 손에 더러운 것이 묻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와 복구로써 그것을 씻어버려야 하며, 그것이 그의 손에 묻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사야 33장 15절을 보라.

2. 그는 어떻게 그의 단언을 인준했는가? 그는 그 자신의 정직함에 대해 매우 확신하고 있었다.

(1) 그는 기꺼이 그의 재물을 조사받으려 했다(6절). "그러하였으면 내가 공평한 저울에 달리기를 원하노라." 즉 "내가 얻은 것을 조사해 보라. 그러면 그것은 매우 공평한 것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가 그 재물을 허탈하게 얻지 않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므로 "데겔"이란 말은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없었다"는 뜻으로 기록된 일이 있다(단 5:25-27). 정직한 자는 심문받는 것을 두려워하기는커녕 하나님께서 그의 결백함을 아시고 그것을 시인하실 것이며, 그 심문은 그에게 찬사와 영예를 가져오리라는 굳은 확신 가운데 오히려 그것을 원한다.

(2) 그는 만일 금지되거나 몰래 거래된 물건이 있으면, 정직하게 얻지 않은 어떤 물건이 있으면, 기꺼이 그 모든 소산을 몰수당하기를 서슴지 않았다(8절). "나의 심은 것을 타인이 먹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것은 이미 말한 바가 있는 포학자의 저주에 합당한 것이다(5:5). "그리고 나의 소산이, 내가 심은 모든 나무가, 뿌리까지 뽑히는 것이 마땅하거니와," 이것은 그 죄가 이러한 심판을 받기에 합당하며, 흔히 이렇게 처벌 받는다는 사실을 믿고 있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비록 그의 가산이 지금 몰락했다 하더라도(그리고 이러한 때에 그의 양심이 그의 마음에 그의 죄를 끌고 왔을지라도), 그는 그 자신이 무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얼마 안 남은 그의 재산을 모두 그 심문의 결과에 걸어 놓으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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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을 해명하는 욥(2)(욥기 31:9-15)

우리는 여기에서 욥의 결백함을 입증하는 두 가지 예를 더 볼 수 있다.

Ⅰ. 그는 음행의 죄를 매우 혐오하고 있었다. 그가 첩을 두지 않음으로써 그의 부부의 칭찬을 더럽히지 않은 것과 같이(더욱이 그는 처녀를 마음에 두지 않았다. 1절), 그는 이웃 부부들의 침상을 해하는 일은 어떠한 것도 하지 않도록 조심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 보자.

1. 그는 이 죄에서 매우 깨끗했다(9절).

(1) 그는 그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마음이 여인에게 유혹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아내의 아름다움이 그에게 어떤 부정한 욕망을 불지르지도 않았고, 음녀의 유혹에 의해 결코 그의 마음이 동요된 일도 없었다. 이러한 내용의 이야기가 잠언 7장 6절 이하에 묘사되어 있다. 사람의 모든 불결함이 그 어디에 근원을 두고 있는가 보라. 그것은 속이려는 마음에서 온다. 모든 죄악은 속임수이며, 불결한 죄는 그 중에서도 더욱 그러하다.

(2) 그는 결코 순결하지 못한 뜻을 품거나 상상하지 않았다. 그는 결코 "이웃의 문을 엿보아" 남편이 부재 중에, 그 선한 사람이 집에 없는 때에(잠 7:19), 그의 아내를 타락시킬 기회를 찾으려는 일이 없었다(24:15 참조).

2. 그는 이 죄를 매우 두려워했으며, 그것의 사악함을 깨닫고는 매우 치를 떨었다. 그것은 "중죄"였다(11절). 즉 사람이 범할 수 있는 가장 악한 죄로서, 하나님을 극히 노하게 하는 것이었고, 흥하는 영혼을 멸망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의 해로움에 관하여 그리고 그것에 마땅히 내려야 할 심판에 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시인하고 있다.

(1) 만일 그가 그런 중죄를 범했다면, 그의 가족들이 극심한 치욕을 당하여야 마땅할 것이다(10절). "내 처가 타인의 매를 돌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녀가 노예가 되거나(이러한 견해를 가진 자들도 있다), 매춘부가 되는 것이(또 이렇게 해석하는 자들도 있다) 당연하니라. 하나님은 흔히 다른 사람의 죄를 이용하여 한 사람의 죄를 아내의 음행으로써 남편의 음행을 벌하신다. 이것은 다윗의 경우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서(삼하 12:12), 음행한 아내의 배반을 하나님은 조금도 용서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녀가 아무리 불의하더라도 하나님은 의로우시다(호 4:13, 참조). "너희 며느리들이 간음을 행하는도다." 친척들에게 의롭지도 않으며 충실하지도 않은 자들은 그들의 친척들이 그들에게 부당하고 불성실하게 대하더라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2) 그 자신이 만인의 본보기가 되어도 마땅할 것이다. "이는 재판장에서 벌받을 악이라." 그렇다. 그 죄를 범한 자들은 욥처럼 그들 자신이 재판장이 된다. 음행은 엄격한 장관이 포착하여 처벌해야 하는 죄이다. 그것은 모세의 율법이 그것을 중대한 항목으로 만들기 전인 족장 시대에서까지도 처벌되었다.

(3) 그의 가산이 몰락되어도 마땅할 것이다. 아니, 그는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12절). "이는 불이라." 정욕은 영혼을 사르는 불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탐닉하는 자들은 불사름을 당한다고 일컬어진다. 그것을 거기에 있는 선한 모든 것(확신, 위안)을 불사르며, 양심을 퇴색하게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불을 당긴다. 만일 그리스도의 보혈로 그것을 끄지 않는다면, 그것은 제일 밑에 있는 지옥을 불사를 것이다. 그것은 영원히 "멸망하도록까지 사를" 것이다. 그것은 몸을 사른다(잠 5:11). 그것은 물질을 사른다. 즉, 그것은 "모든 소산을 뿌리까지 없앤다." 불타는 정욕은 불붙는 재앙을 가져온다. 아마도 그것은 소돔이 불탄 것을 암시하는 말일 것이며, 그 사건은 이처럼 사악하게 사는 후세의 사람들에게 경고가 되게 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Ⅱ. 그는 그의 종들에게 매우 너그러웠으며, 그들을 온유한 손으로 다스렸다. 그는 큰 집안을 거느리고 있었고 그것을 잘 관리했다. 이것으로써 그는 그의 욕구뿐만 아니라, 감정도 잘 다스릴 수 있는 그의 성실함을 증거했다. 이 두 가지 면에서 그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용사보다 낫다"(잠 16:32). 여기에서 다음을 관찰하라.

1. 그의 종들에 대한 욥의 겸손은 어떠한 것이었나 보자(13절). 그는 "남종이나" 또한 그의 "여종이 그로 더불어 쟁변할 때에 그의 사정을 멸시하지" 않았다. 만일 그들이 어떤 문제에 대해 그에게 항의하면 그는 기꺼이 그들의 이치에 귀를 기울였다. 만일 그들이 그를 불쾌하게 하거나 비난했다면 그는 그들이 그들 자신을 옹호하거나 변명하기 위해 그들 스스로 말해야 하는 것을 참을성 있게 들으려 했을 것이다. 더욱이 그의 가혹한 처사에 대해 그들이 불평했을 때 그는 그들을 호통치거나 잠자코 있으라고 명하지 않고, 그들에게 이야기를 하도록 허락했다. 그리하여 그들이 옳다고 인정되는 한에 있어서 그들의 불만을 시정해 주었다. 그는 그들이 그를 섬기고 기쁘게 해 줄 때뿐만 아니라, 그들이 그와 더불어 논쟁할 때조차도 그들에게 너그러웠다.

여기에서 그는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어야" 할 상전들의 훌륭한 본보기가 되고 있다. 더욱이 상전들은 종들에게 기대하는 것과 같은 일을 그들에게 행해야 하며(골 4:1; 엡 6:1), 그들을 가혹하게 다스리거나 교만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 욥의 많은 종들이 그를 섬기는 중에 죽임을 당했다(1:15-17). 그러나 그 나머지 종들은 비록 그가 그들을 멸시한 적이 결코 없었을지라도(19:15, 16) 그를 멸시했고, 그에게 불친절하고 불성실하게 대했다. 그러나 그는 그가 형통할 때 그들을 잘 대우했다는 사실로써 그의 위안을 삼고 있다. 우리의 친척들이 우리를 버리거나 상심케 할 때, 우리가 그들에게 우리의 도리를 잘 행했다면 우리 양심의 증거는 우리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될 것이다.

2. 그로 하여금 그의 종들을 이처럼 친절하게 대한 이유들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보자. 그는 하나님을 그의 재판관으로서 그리고 그들의 창조주로서 받아들였다.

(1) 그는 하나님을 그의 재판관으로 받아들였다. "만일 내가 나의 종들을 거만하고 가혹하게 대한다면, 하나님이 일어나실 때에는 내가 어떻게 하겠느냐?" 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그가 모셔야 할 책임이 있고 일어나시어 그를 찾아오실 상전을 하늘에 두고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멀리서 오는 환난 때에 우리가 어떻게 행할 것인가"를 관심을 가지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사 10:3). 그리고 만일 하나님께서 그 때에 우리에게 엄격하고 냉정하게 대하신 다면 우리는 파멸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사실을 참작하여, 우리와 관련을 맺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매우 온유하고 너그럽게 대해야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과격하게 우리가 잘못한 것을 지적하신다면, 우리를 쳐서 온갖 이들을 취하시고 우리에게서 지당한 요구를 주장하신다면-만일 그가 모든 범죄를 벌하시고 모든 벌금을 물리신다면-만일 그가 항상 책망하시고 영원히 분을 품으신다면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해 보라. 그리고 우리의 아랫사람들에게 가혹하게 대하지 않도록 하자. 손해를 입은 자의 부르짖음이 상달된 것이며, 해로운 일을 행한 죄는 처벌받을 것이다. 자비를 베풀지 않은 자는 자비를 얻지 못할 것이다. 그때에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2) 그는 하나님을 그와 그의 종들의 창조주로서 받아들였다(15절). 그가 그의 종들에게 가혹하게 하도록 유혹받았을 때, 그들의 권리를 거절하고 그들의 호소에 귀를 막도록 유혹받았을 때, 다음과 같은 생각이 매우 적절하게 그의 마음에 떠올랐다. "나를 태속에 만드신 자가 그도 만들지 아니하였느냐? 나는 그와 같은 피조물이다. 그리고 나도 그와 똑같은 존재로서 종속되어 있다. 그도 나와 똑같은 천성을 지니고 있으며, 같은 손으로 만들어진 제작품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두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사람들 사이에 외적인 상태, 즉 정신력이나 체력 또는 사는 장소에서 어떠한 차이점이 있든지 간에, 한 사람을 만드신 그가 또 다른 사람을 만드셨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사람들의 천성적인 연약함을 조롱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어떤 면에서 우리보다 열등한 자들을 짓밟아서도 안 되고, 모든 일에서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행하기를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행해야 하는 좋은 이유이다. 그것이 공의의 원리이다. "동등한 자를 동등하게 평가하고 대우하라." 사람들은 이와 같이 매우 동등하기 때문에 모두 똑같은 틀에서, 똑같은 능력에 의해, 똑같은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우리의 외적인 상황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들에게서 대우받기를 원하는대로 모든 면에서 그들에게 행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그들과 동등한 수준에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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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을 해명하는 욥(3)(욥기 31:16-23)

엘리바스는 욥이 가난한 자들에게 무자비했다고 하여, 욥을 특별히 책망했었다(22:6 이하). "너는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지 아니하고, 헐벗은 자의 의복을 벗기며, 과부를 공수로 돌아가게 하였구나." 어떤 사람은 그 속에 어떤 진실이 없는 한, 그것을 위한 어떤 근거가 없는 한, 그가 이처럼 매우 단호하고 명백하게 책망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욥의 주장에 의하면 그것이 완전히 그릇되고 터무니 없는 사실이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는 결코 이러한 일들을 범한 적이 없었다. 다음을 살펴 보자.

Ⅰ. 욥의 양심이 가난한 자에 대한 그 충실한 태도에 관해 증거해 주었다. 그는 이 문제에서 가장 심하게 힐책당하였기 때문에 이 항목을 매우 자세하게 해명하고 있다. 그는 엄숙하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장하였다.

1. 그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그들에게 선을 행하는 것을 결코 게을리 하지 않고, 그의 최선을 다 기울였다. 그는 항상 그들에게 인정을 쏟았고, 그들을 보살폈다. 그리고 돌봐 줄 사람이 없는 과부나 고아들에게도 특히 그러했다.

(1) 그는 항상 그들의 소원을 들어 주고, 그들의 기대를 채워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16절). 가난한 사람이 그의 친절을 구한다면 그는 그것을 충족시켜 줄 자세가 되어 있었다. 만일 어떤 과부가 그에게서 자선을 기대하는 슬프고 갈망하는 시선을 그가 깨닫기라도 한다면, 그녀가 직접 그것을 청하지 않더라도 그는 그것을 줄 정도로 동정심을 지니고 있었고, "결코 과부의 눈으로 실망케 하지 않았다."

(2) 그는 가난한 자들을 존중해 주었고, 그들의 면목을 세워 주었다. 왜냐하면 그는 고아들을 데려다가 그와 함께 그의 식탁에서 먹도록 했던 것이다. 그들은 그와 같은 음식을 대접받았고, 그와 친하게 지내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이 마치 그의 동료인 것처럼 그들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19절). 멸시당하는 것이 궁핍한 자를 매우 상심케 하는 그 한 가지 일인 것과 마찬가지로, 가난한 자를 존중하는 것은 결코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

(3) 그는 그들에게 매우 부드러웠고, 아버지로서의 관심을 기울였다(18절). 그는 고아들의 아비로서 그들을 돌보아 주었다. 그리고 그들을 그의 보살핌 아래 키우면서 부양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교육했다. 그는 그녀의 젊음을 인도해 줄 자를 잃은 과부들의 인도자였다. 그리하여 그는 그녀의 일들을 조언해 주었고, 그것들을 인지했으며, 관리해 주었다. 우리의 자선금이 필요치 않은 자들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조언이 필요할 경우가 생길는지도 모르며, 그때에 그것은 아마도 그들에게 참된 친절이 될 것이다. 욥은 그가 "젊었을 때부터, 모태에서 나온 후로" 이것을 행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그의 성품 속에 온화하고 동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일찍이 기억할 능력이 생긴 이후로 선을 행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는 언제나 불쌍한 과부나 고아들을 보살펴 왔었다. 그의 부모들은 일찍이 그에게 불쌍한 사람들을 동정하고 도와 주는 것을 가르쳤으며, 고아들과 함께 그를 키웠다.

(4) 그는 그들에게 필요한 음식을 마련해 주었다. 그들은 그가 먹는 것과 똑같은 식물을 먹었고(17절), 그가 먹은 뒤에 그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지 않았다. 그들은 그와 함께 그의 식탁에 있는 가장 훌륭한 요리를 먹었다. 풍족한 자들은 마치 그들이 돌볼 자가 그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그들의 식물을 혼자 먹어서는 안 된다. 뿐만 아니라, 그들 혼자 맛있는 음식을 먹어서도 안 된다. 그들은 다윗이 므비보셋을 부른 것같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것을 먹어야 한다.

(5) 그는 덮을 것이 없는 자들을 입히는데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먹이는 것보다 더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이었다(19절). 가난한 사람들은 먹을 음식이 없을 때와 같이 입을 것이 없을 때에도, 즉 밤에는 덮고 자며, 낮에는 먼 길을 입고 갈 의복이 없을 때에도 죽게 되는 수가 있다. 욥이 이러한 곤경에 처한 어떤 사람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급히 서둘러 그들을 도와 주었다.

불쌍한 사람들은 다 헤어져 곧 쓰레기 통에 내버리게 된 누더기 옷을 입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종들에게 훌륭하고 화려한 의복을 주는 잘못을 범하지 않고, 그는 일부러 "그의 양털"로 그들을 위한 훌륭하고 따뜻하며 질긴 옷을 만들어 주었다(20절). 그러므로 그들이 이 의복으로 그들의 몸을 두를 때마다, "그를 위하여 복을 빌었다." 즉 그들은 그의 자선을 칭찬했으며,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복을 빌었고, 그에게 복을 내리기를 하나님께 기도했다. 욥의 양은 하늘로부터의 불에 의해 타서 죽었다. 그러나 그가 정직하게 그 양들을 얻게 되었을 때, 그것들을 자선을 위해 사용했고, 가난한 자들에게 그 고기를 먹였고, 그 털로 옷을 해 입혔다는 사실은 그에게 위로가 되어 주었다.

2. 그는 불쌍한 사람을 해하는 일에 결코 가담한 적이 없었다. 아마도 그가 사랑을 받는 불쌍한 고아에게는 어느 곳에서나 친절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포학했으리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관대했고, 그 누구도 해하지 않았다. 그는 결코 "손을 들어 고아를 친" 일이 없었으며(21절), 그들을 위협하거나 놀라게 하지 않았고, 그들을 치려는 의도도 가지지 않았다. 결코 그는 그의 권력을 가지고 그의 길을 방해하는 자들을 짓밟거나, 그들을 몰아내기 위해 강권을 발휘하는 데에 쓰지 않았다. 비록 "그를 도와 주는 자가 성문에 있음을 볼지라도," 다시 말해서 그가 그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하고 난 후에도 무마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세력을 백성들과 재판장들에게서 얻고 있었을지라도,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릇된 일을 행하고서도 무사히 통과될 만한 권력을 가졌을지라도, 그리고 그렇게 될 수 있으리라고 예상할 수 있을지라도, 의롭게 행하며 자비를 사랑하고 이 두 가지를 견고히 지키는 자들은 여기에서의 욥처럼 그들의 행위를 매우 기쁘게 후에 회상해 볼 수 있다.

Ⅱ. 그는 저주로써 이 주장을 견고케 하고 있다(22절). "만일 내가 불쌍한 자들을 압제하였다면 내 어깨가 어깨 뼈에서 떨어지고 내 팔 뼈가 부러짐이 마땅하니라." 즉 "살이 썩어 뼈에서 떨어져 나가고, 뼈가 서로 어긋나 부러짐이 마땅하니라." 만일 그가 이 문제에서 완전히 결백하지 않았다면 이처럼 하나님의 보복에 도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선지자를 친 여로보암의 손이 쇠약하게 된 것같이 손을 들어 고아를 친 손을 꺾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일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Ⅲ. 욥은 모든 무자비하고 잔인한 것에서 떠나, 자제하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감히 가난한 자들을 능욕하려 하지 않았다. 비록 그를 도와 주는 자가 성문에 있었으므로 그들을 누를 수 있었지만, 그는 압제당하는 궁핍한 자들을 옹호하시고 포학자에게 대한 처벌을 결코 간과하지 않으실 하나님을 대적하여 자기의 이익을 취할 수가 없었다(23절). "이러한 죄를 범하도록 유혹 받을 때마다 나는 하나님의 재앙을 심히 두려워하고, 그 위엄을 인하여 그를 나의 대적으로 만들게 되는 일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느니라."

1. 그가 두려워한 것은 위에 계시는 하나님이신 그 하나님의 위엄이었다. 그는 그의 위엄에 대해, 하나님과 그 사이의 무한한 거리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큰 경외감을 지니도록 했으므로, 그는 그의 모든 발언에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빈민을 학대하는" 자들, 그리고 공의를 박멸하는 자들은 그들을 다스릴 수 있는, "높은 자보다 더 높은 자가 감찰하고, 그들보다 더 높은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은 자들이다(전 5:8). 그러나 욥은 이 사실을 깊이 생각했다.

2. 그가 또 두려워한 것은 만일 그가 불쌍한 자를 해하면 그를 분명히 치실 하나님, 바로 그 하나님의 진노였다. 만일 그가 이 죄를 범한다면 "하나님의 재앙이" 분명 그에게 임하시어, 그를 완전히 파멸케 하실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그에게 언제나 두려움을 주었고, 그로 하여금 그것을 피하도록 제재했다. 선한 사람들은, 심지어 가장 선한 사람들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재앙을 두려워함으로써, 그들 자신을 죄에 대해 자제할 필요가 있으며, 아무리 자제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러한 죄를 갚아 주신다는 이 사실은 모든 불의와 포학의 행위로부터 특별히 무리를 제재하도록 해줄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를 위로해 줄 때일지라도, 하나님의 재앙을 우리는 두려워해야 한다. 아담은 무죄하였을 때에도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였다.

 

31:17 없음.

 

31:18 없음.

 

31:19 없음.

 

31:20 없음.

 

31:21 없음.

 

31:22 없음.

 

31:23 없음.

 

31:24

우상 숭배에 대한 욥의 증오(욥기 31:24-32)

이 문단의 구절들에서는 욥이 항의했다고 볼 수 있는 4개 조항이 나오는데, 이들은 이 밖의 모든 구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욥이 어떠했으며, 무엇을 행하였는지를 확실히 알려 줄 뿐만 아니라 우리 또한 어떻해야 하고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도 가르쳐 주고 있다.

Ⅰ. 그가 주장하는 것은 자기가 결코 이 세상의 재물을 탐내어 마음을 쏟지 않았으며, 그것을 자기의 기업이라고 여기거나 행복이라 여기어 취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황금이 있었다. 그는 정금도 소유하였다. 그의 "부귀는 지극하였고," 그는 "많은 것을 얻었다." 우리의 재산은 우리가 어떻게 영향을 받느냐에 따라서 이로운 것이기도 하고, 해독을 끼치기도 한다. 만약 우리가 재물을 우리의 안식처로 삼거나, 우리의 지배자로 받든다면, 그것은 우리로 파멸케 하는 것이 될 것이요, 만약 재물을 우리의 종으로 삼아서 공의로운 일을 행하는 도구로 삼을 때는 우리에게 그 재물은 복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는 욥이 자기의 이 세상 재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다.

1. 그는 재물에 큰 신뢰를 두지 않았다. 그는 "황금으로 자기의 소망을 삼지" 않았다(24절). 황금을 신뢰하여 자기 소망으로 삼는 자는 대단히 우매한 자이며, 재산이 자기들을 행복하게 하는 데에 충분할 것으로 의지하고, 이 세상의 소유물을 아주 풍족하게 소유한다고 해서, 스스로 안전하며, 존귀한 양 여기며 그것으로부터 위안을 확실히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스스로를 대적하는 셈이 된다. 어떤 이들은 재물이 마치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확실한 표징인 듯이 그것으로 자기의 저 세상에 대한 소망으로 삼고, 저 세상에 대한 신뢰로 여기기도 한다. 또 그렇게 생각지 않을만치 분별이 뚜렷한 자들까지도 재물이 이 생에서 저희의 분깃이 될 줄로 기대하고 바라지만, 실상 재물 자체는 불확실한 것이며, 그런 물질에게서 만족을 느낀다는 것은 더 더욱 허망한 일이다. 많은 재산을 가지고도 그 재산을 신뢰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매우 어려운 것은 이런 점 때문이다(마 19:23; 막 10:24).

2. 그는 풍부한 재물에서 만족함을 얻지 않았다(25절). "내 재산이 풍부하다고 하여 내가 언제 기뻐하였으며, 내 손이 얻은 바가 많다고 하여 자랑하였더란 말인가!" 그는 자기의 재물이 자기의 빼어난 인격에 무슨 보탬이라도 되는 듯이 그 재산을 자랑하지도 않았고, 자기 힘과 그 손의 능력으로 그 재물을 얻었다고 생각지도 않았다(신 8:17). 그는 자기 영혼의 즐거움이었던 영적인 일들과 비교할 때, 이 세상 재물에서는 기쁨을 느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의 기쁨은 선물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그 선물을 통하여 그 선물을 주신 자에게까지 뻗치었다. 그가 비록 자기의 풍요 가운데 있었지만, 결코 "영혼아! 네 물건들 중에서 네 평안함을 취하라. 그리하여 먹고 마시고 즐거워할지어다"라는 말을 하지도 않았고, 자기의 부요함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욥은 자기의 이러한 부귀를 지나칠 정도로 희희낙낙해 하지 않았다. 그의 이러한 점은 그가 행동으로 보여 주었듯이, 수 만금의 재산을 상실하고도 참을성 있게 견디어 내는데 도움이 되었다. "마치 울지 않는 듯이 우는 방법은 곧 기뻐하지 않는 듯 기뻐하는 것이다." 쾌락의 도를 낮추면 낮출수록 실망에 따르는 고통도 더 적어진다.

Ⅱ. 욥이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야 하는 경배와 영광을 피조물에게는 비친 적이 결코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하지 않았다(26-28절). 우리는 욥의 친구들이 우상 숭배로 그를 질책했다는 단서는 잡을 수 없다. 당시는 해와 달을 숭배하리만큼 우매한 자들이 있었던 것 같이 보이는데, 그렇지 않았다면 욥이 그 말을 입에 담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상 숭배는 악인들이 좇던 구습 중의 하나였으며, 가장 고대의 우상 숭배는 해와 달의 숭배였다. 이 일월 숭배는 신명기 4장 19절에 나타나는대로 가장 큰 유혹이었다. 상기 성경 말씀에서는 모세가 백성들이 일월성신을 섬기게 될까 염려하여, 그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극히 가증스런 우상 숭배자들이 후에 그러했듯이 그때까지는 아직 일월에 대한 숭배가 은밀히 자행되면서도 공공연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 놓지는 못하는 형편이었다.

1. 욥은 이 죄악을 얼마나 멀리했던가! 그는 바알에게(바알은 태양을 상징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무릎을 꿇지도 않았으며 엎드려 절하지도 않았고, 태양을 경배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 눈이나 마음이나 입술로도 이 일월 숭배의 죄로부터 멀리하였다.

(1) 그는 화려하고 휘황찬란한 해와 달을 볼 때마다 그 광명과 유용이 가져 다 주는 모든 영광을 그것들의 창조자에게 돌리는 것 이상으로는 태양이나 달을 찬미하지 않았다. 그는 육체적 간음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영적인 간음에 대해서도 자기 눈과 계약을 맺었다. 그는 하늘의 광선을 쳐다볼 때마다 믿음으로 그 빛들을 투시하며, 그 빛 너머 광명의 아버지를 바라보리라는 것이 그의 언약이다.

(2) 그는 열심을 다하여 자기 마음을 지켰다. 그리하여 그 마음이 몰래 꾀임을 받아서 일월의 빛 가운데도 신령한 영광이 있으며, 그것들의 영향력 안에는 신적인 능력이 있기 때문에 해나 달에 대하여 신적 영광을 돌려야하겠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도록 하였다. 바로 여기에 우상 숭배를 하게 되는 원인이 있다. 그것은 마음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누구나가 다 "자기 스스로의 욕망에 이끌리어서 꾀임을 받을 때"는 다른 죄악과 같이 이 우상 숭배의 유혹을 당하게 된다.

(3) 그는 이 거짓 신들에 대해 찬사조차 던지지 않았고, 이 신이 아닌 일월에 대하여 눈꼽만치의 경탄하는 행동도 나타내지 않았다. "그의 입은 그의 손에 입맞추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이런 식의 입맞춤은 아마 우상을 섬기지 않는 자라고 여겨지는 자들까지도 보통 사용하는 행위였던 것 같다. 손에 키스하는 행위는 인사할 때에 우리들간의 예의 바른 존경심을 나타내는 구식 예법이며, 고대에는 해와 달을 향하여 신성한 존귀를 표하는데 사용되었던 것처럼 보인다. 해와 달을 숭배하던 당시 사람들은 "희생 제사를 드리던 사람들이 송아지에게 입맞추던 것"과 같이(호 13:2; 왕상 19:18) 해와 달에 직접 입맞춤을 하지 못하였으나, 자기들의 호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그들은 자기들 손에 입맞추었던 것인데, 그들은 하나님이 이 하계에서 우리를 위해 촛대를 들도록 우리의 종들로 삼은 해와 달을 자기 상전으로 경외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욥은 그들이 한 일을 결코 행하지 않았다.

2. 욥은 이 죄악을 얼마나 나쁘게 여겼던가!(28절)

(1) 그는 이 행위를 치안관에 대한 모독으로 간주하였다. 그 행위는 공중의 안녕에 방해가 되는 동시에 위정자와 각 지방에 해로운 폐습으로서, "재판장에게 벌받게 되는 죄였다." 우상 숭배는 인간의 마음을 타락시키며, 그 예절을 부패하게 하고, 사회의 큰 단결력인 종교로부터 진정한 의미를 제거해 버림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하여 하나님이 인간을 버리시게 된다는 뜻에서 인간의 포기를 초래하는 동시에, 민족에 대한 심판까지도 불러오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공의 안녕을 보존해야 하는 치안관들은 우상 숭배자들을 벌함으로써 우상 숭배를 억제하려고 결심한다.

(2) 그는 그 행위를 하늘의 하나님께 대한 훨씬 큰 모독으로 간주하였고, 그의 왕권과 위엄에 모반하는 대역죄에 해당한다고 생각하였다. "내가 그리하였다면, 위에 계신 하나님을 부인하였었을 것이니, 하나님으로서의 그의 존재와 위에 계신 하나님으로서의 그의 주권을 부인하였었을 것이다." 우상 숭배는 실제적인 무신론이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세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무신론자들)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우리는 위에 계신 하나님이나 그의 섭리나 그의 온전하심 중 어떤 것이라도 암암리에 부정하는 일은 어떤 것이라도 다 경계해야 한다.

Ⅲ. 그는 자기가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화를 입히려고 꾀한 적이 도무지 없었으며, 그의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해 받음을 바라거나 기뻐하지 않았다고 항의하고 있다. 비록 바리새인들은 "너는 네 이웃은 사랑하되 네 원수는 미워하라"(마 5:43)고 가르침으로써, 원수에 대한 율법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으나,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을 용서하는 일은 구약 성서에서 요구하던 의무였던 것으로 보인다.

1. 욥은 결코 복수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는 자기에게 가해진 피해에 대해 보복하지도 않았으며, 자기를 증오하는 자들을 파국으로 몰아넣지도 않았다.

(1) 그는 원수들에게 재해가 발생하였다고 해서 기뻐하지 아니하였다(29절). 자기를 가로막는 자들이나 자기에게 불친절하게 대하는 자들을 고의로 해롭게 하고자 하지는 않더라도 그들에게 해로운 일이 생기면 넌즈시 기뻐하고(소위) 소매를 가리고 숨어서 회심의 미소를 짓는 자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욥은 그런 종류의 인간이 아니었다. 욥은 비록 선량한 사람이었다고는 하나, 그를 미워하는 자들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흉한 일이 오히려 그를 미워한 자들에게 밀어 닥쳤고 욥은 그의 원수들이 멸망하는 것을 목도하였지만 그는 그것을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가 만약 그 일을 기뻐했다고 하면 잠언 24장 17, 18절에 나타난대로 공평하게 욥 자신에게도 파멸을 스스로 자초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는 자기 원수들에게 궂은 일이 생기도록 그 마음 속으로나마 빌어 본 일이 없었다(30절). 그는 "그 대적의 영혼에 대하여 저주를 빌지도" 않았고(모든 저주 가운데 가장 심한 저주가 영혼에 대한 저주이다), 그의 죽음을 바라지도 않았다. 욥은 만약 자기가 그런 일을 한다면 그것이 자기에게 대해 죄가 될 줄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의 혀로 범죄치 않도록 조심하였고(시 39:1), 그의 입으로 죄를 짓도록 내버려 두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자기의 극심한 원수에게라도 감히 어떤 해든지 전혀 빌려고 하지 않았다. 만일 타인들이 우리에게 악의를 품는다고 해도 그 때문에 우리가 그들에게 악의를 가진다면 우리는 의롭다고 여김을 얻지 못할 것이다.

2. 그는 복수를 하라는 심한 충동을 받았지만, 끝내 그 일로부터 깨끗이 손을 떼었다(31절). "그의 장막 사람들" 즉 그의 하인들이나 종들 따위의 그 주위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주인을 미워하는 욥의 원수들에 대해 너무나 화가 치밀어서, 만약 욥이 싸우도록 허락만 내린다면 그의 원수들을 잡아 먹기라도 했을 터였다. "아아! 우리가 그의 고기라도 먹고 싶구나! 우리의 주인은 만족하여 원수를 용서하나, 우리는 그렇게 만족할 수가 없다." 욥이 그 가족들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받고 있으며, 그 식솔들이 얼마나 충심으로 그의 명분을 신봉하고 있는지를 살펴 보라. 또 그들이 욥의 원수에게는 얼마나 깊은 증오감을 품고 있는지도 눈여겨 보라. 그러나 욥은 자기 감정을 아주 엄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그는 비록 자기의 분노를 돋우는 자들이 있었지만 결코 복수하고자 하지 아니하였다.

(1) 선량한 사람은 보통 자기에게 가해진 모욕을 마음에 새기지 않지만, 그의 친구들이 오히려 그를 위하여 그 일을 깊이 생각하는 법이다.

(2) 위인들의 주변에는 보복하라고 선동하는 자들이 있다. 다윗도 그러하였다(삼상 24:4; 26:8; 삼하 16:9). 그러나 만약 그들이 자기 주변 사람들의 원한에 찬 권고나 사주에도 불구하고 노여움을 억제한다면, 후일에 그 일이 저들 마음에 아무런 상처를 남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저희를 극구 칭찬하는 일로 바뀔 것이다.

Ⅳ. 그는 여태껏 나그네에게 불친절하거나 잘못 대접한 일이 없다고 항의하고 있다(32절). 만약 롯이 혼자라도 접대하지 않았더라면 소돔의 거리에 유숙할뻔 하였던 천사들처럼 "나그네가 거리에서 노숙하게 하지도 않았다." 아마도 욥은 바로 그 사례에서 손 대접하기를 잊지 않도록 배웠을 것이다(우리가 히브리서 13장 2절에서 교훈을 받듯이) 집안에 있는 자는 집에서 떠나 있는 자들을 생각해야 하며, 상대방의 처지를 자기 처지와 바꾸어 생각하고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할 응분의 대우를 제공해야 한다. 손님을 환대함은 기독인의 의무이다(벧전 4:9). 욥은 자기의 번영 중에서도 가사를 착하게 처리하는 사람임이 주목된다. "그는 길쭉으로 난 그의 문을 열어 두었다"(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그가 길을 향한 대문을 늘 열어둔 것은 그가 아브라함처럼(창 18:1), 통행하는 자를 보고 맞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31:25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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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이 자기의 순전을 주장함(욥기 31:33-40)

이 문단에서 욥이 무관하다고 항의하는 세 가지의 죄악이 더 나오고 아울러서 하나님의 변호석에 대한 전반적 호소와 자기의 변명을 들어 주십사 하는 청원이 나온다. 그런데 이것은 아마 자기 담화의 종결을 위해 의도된 모양이나(그러므로 이것은 맨 나중에 취급할 것이다), 이 앞의 죄와는 다른 특별한 범죄가 나타났으므로 그는 스스로 결백을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은 혐의에 대해서 스스로 결백함을 밝힌다.

Ⅰ. 은폐와 위선의 혐의에 대하여 밝힌다. 욥의 친구들이 욥을 힐난한 전반적 범죄는 욥이 신앙고백이란 가면을 쓰고 죄악의 소굴을 은밀히 유지해 왔으며, 실제로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선하지 못하면서도 그 죄를 감추는 기술을 지닌 덕분에 선한 사람인 것처럼 행세한다는 것이었다. 소발은 욥이 "자기의 불의를 그 혀 밑에 감추고 있다"고 은근히 힐책하였다(욥 20:21). 욥은 말한다. "나는 결코 그러지 않았다. 나는 타인같이(아담같이) 내 죄를 절대로 가리지 않았고(33절), 실없는 변명으로 죄를 가볍게 하려 하지도 않았으며 무화과나무 잎사귀를 내 치욕의 은폐물로 삼지 않았다. 또 나는 어떻게든 이별할래야 할 수 없는 귀여운 것이나, 애인처럼 혹은 들킬까봐서 두려워하는 장물처럼 내 불의를 내 품에 숨기지 아니하였다."

우리가 우리 죄를 가리우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것을 우리가 우리의 첫 조상으로부터 물려 받은 것이다. 우리는 아담이 자기 아내에게 미루어, 심지어는 은연 중 하나님 당신 스스로가 장본인 양 비난을 돌렸듯이, 스스로의 잘못을 고백하기 싫어하고, 우리들 자신을 가급적이면 최고로 이용하기를 좋아하며, 책임을 남에게 전가한다. 그러나 이와 같이 "자기 죄악을 가리우려는 자는 형통하지 못할 것이다"(잠 28:13). 욥은 이 항의에서 두 가지 일을 시사하고 있는데, 그것은 자기의 순전에 대한 명확한 증거이다.

1. 그는 진실과 모순되는 어떤 큰 죄악이나 불의도 범한 일이 없었으나, 자기의 진지함은 열심히 숨기려 하고 있었다. 그는 이 주장에서도 공정하게 처리하고 있으나, 그가 몇몇 죄악을 부인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는 어떤 죄악에라도 자기 스스로를 용납하였던 기억은 전혀 없었다.

2. 그는 어떤 죄악과 불의를 자기가 범하였든 간에("살면서 죄짓지 않는 자는 누구가 있겠는가?") 언제든지 자기 죄를 기꺼이 인정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고, 자기가 잘못 말하거나 그릇 행동한 것을 깨닫는 즉시 그가 할 수 있는데까지 기꺼이 자기의 말을 정정하고 하기 행위를 철회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과 사람에게 다 고백하며, 그 잘못을 빌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정직히 행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Ⅱ. 그는 비겁하다는 비난과 야비하게도 공포에 떨고 있다는 책망에 대해 결백을 증명한다. 그는 선한 것에 대한 그의 용기를 자기의 진실함에 대한 증거로 내세운다(34절). "내가 큰 무리를 두려워하여 언제 침묵을 지켰던가?" 천만에! 욥을 아는 자들은 누구나 욥이 선한 일에는 꿋꿋한 결단성을 소유한 인물이며, 담대히 나타나서 신앙과 정의를 수호하려고 용감히 외치며 행동하는 동시에 사람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않고 협박이나 공갈에 넘어가 자기 의무를 팽개치는 자가 아니며, 안색이 조금도 변치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1. 욥은 자기가 거주하는 지역에서 치안관으로서나 명망가로서의 의무를 얼마나 끔찍히 생각하였는가! 그는 정직한 일을 위해 외쳐야만 하는 요청이 자기에게 올 때는 언제나 잠잠하지 않았고, 감히 침묵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또 그는 선을 행하기 위해 밖으로 가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집 안에 틀어박혀 있거나, 있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죄를 질책하고 죄악을 쳐서 증거하도록 우리가 요청을 받으면서도 침묵하며, 비실비실 물러나서 하나님의 진리와 그 길을 옹호하지 않고, 피해를 입으며 억압을 당하는 자들을 위하여 정의를 행하지 않거나, 하여튼 일반 대중에게 봉사하는 일과 우리의 신앙을 영예롭게 하지 않으면 그것은 우리의 죄악이 된다.

2. 욥은 자기의 의무를 수행하는 도중에 부딪치는 여러 방해물과 좌절 따위를 얼마나 하찮게 여겼는가! 그는 군중의 소요 따위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고, 큰 무리라고 하여 겁내지도 않았으며, 강한 자의 협박도 무시하였다. "족속들의 멸시도 결코 그를 두렵게 하지 못하였다." 그 가해자의 수나 지위나 비웃음이나 모욕 때문에 피해자들에게 정의를 행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냉소당한다고 해서 동요되거나, 그러한 생각 때문에 편견을 가지는 일이 없었고, 자기보다 한 수 높은 유력자에 의해 의로운 일이 붕괴되도록 가만 놓아두지도 않았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크신 하나님이었지, 많은 무리가 무서웠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저주가 공포의 대상이었던 것이지, 결코 족속들의 멸시를 두려워했던 것이 아니었다.

Ⅲ. 억압과 난폭에 대한 혐의와 욥이 자기의 가난한 이웃을 학대하였다는 비난에 대해 결백을 증명한다.

1.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즉 그가 소유하던 재산을 욥이 정당하게 획득하여 올바르게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의 "토지"는 마치 사기와 착취에 의해 소유물을 얻는 자들에게 하듯(합 2:9-11) 부르짖어 "그를 조소할" 수 없었고, "밭이랑은 그 일에 대해 불평할 수도 없었다"(38절). 온갖 피조물은 인간의 죄 아래서 신음하고 있다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부당하게 취득되고 보유되는 것은 사람을 걸어 부르짖고, 그를 고소하며 정죄하여서, 자기의 피해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그가 치르도록 요구한다. 벌받지 않고 무사히 넘어가기는커녕 그 땅 자체와 그 밭이랑이 그를 쳐서 증거하며, 그를 고소하는 고소인이 될 것이다. 욥은 자기 재산에 대해 두 가지 사실을 확실히 말할 수 있었다.

(1) "그는 결코 값을 내지 않고 그 소산물을 먹지 아니하였다"(39절). 그는 아브라함이 자기가 산 땅에 대해 행하였듯이(창 23:16), 또 다윗이 행한 것처럼(삼하 24:24) 그가 구입한 것에는 그 대가를 지불하였다. 그가 고용한 일꾼들은 노임을 충분히 지불받았고, 만약 그가 세를 준 땅의 소산물을 사용할 때는 소작인들에게 대하여 그 대가를 반드시 지불하였으며, 또 직접 지불하지 않더라도 받을 소작료에서 공제해 주었다.

(2) 그는 결코 아합이 나봇의 포도밭을 탈취한 것같이, 땅 때문에 그 소유주를 죽이거나, 그 상속자를 죽여서 그 유산을 탈취하지 않았으며, 자기에게서 땅을 빌어 소작하는 자들을 굶어 죽게 하거나, 가혹한 거래 조건이나 혹독한 착취에 의해서 그를 죽인 적도 없었다. 그에게 딸린 어떤 소작인도 일꾼도, 종도 그에게 불평할 자는 없었다.

2. 욥이 얼마나 자기 주장이 옳다고 확신하고 있는가! 그는 전에도 가끔 그랬듯이 적절한 저주로 자기의 신념을 주장하고 있다(40절). "만일 내가 부당하게 내 재산을 얻었다면, 밀 대신에 찔레가 자라고, 가장 좋은 곡식류 대신 가장 나쁜 잡초가 자람이 마땅하다." 사람이 만약 부당하게 재산을 취득하면 그 부당한 재산으로부터 얻을 위안은 마찬가지로 부당하게 빼앗기는 것이며, 그로부터 얻으리라고 저희가 바랐던 기대 또한 무너져 실망을 준다. 저들은 저희 땅에 씨는 뿌리지만 열매가 될 실체는 뿌리지 않는 자들이다. 그 씨에 형체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뿌리는 씨는 밀이지만 올라오는 것은 엉겅퀴일 것이다. 정직하게 입수한 것이 아니면 아무 유익이 못된다.

욥은 자기 항의를 마무리하면서, 그 주장의 진실성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석을 향해서 호소한다(35-37절). "그가 내 말을 들으시고 전능자가 내게 대답해 주시면 좋겠구나!" 이것은 그가 자주 바라고 흔히 불평하였으나 이루지 못했던 일이다. 그러나 그가 자기 변호를 이처럼 세세하게 늘여 놓은 이상, 그는 자기 주장이 관찰될 때까지 하나님이 들으실 것을 기대하여 기록으로 남기고, 말하자면 서류로 정리해서 제출하는 셈이다.



(1) 그는 재판에 대한 소송을 제출하고 그 소송을 간곡히 조른다. "아아! 사람이 누구든지 내 변명을 들어 주었으면! 내 이유는 너무나 정당하고 나의 증거는 너무 명백하기 때문에 나는 그 어떤 공평한 사람에게라도 그것을 맡기고 싶다. 그러나 나의 바램은 전능자 자신이 그 일을 맡아 종결지어 주셨으면 하는 것이다." 올바른 심령은 자세한 검사를 한다고 해서 두려워하지 아니한다. 정직한 뜻을 품는 자는 자기 마음 속에 품은 의도를 모든 사람이 다 들여다 볼 수 있도록 그의 가슴에 창문이라도 달려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바란다. 그러나 의로운 심령은 특별히 모든 일이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결정될 것을 갈망하며 이것은 확실히 진리에 따르는 것이다. "오! 하나님이여! 나를 찾으시고 내 마음을 살펴 인정해 주소서!" 라는 것이 다윗의 거룩한 기도였고, "나를 판단하시는 자는 주님이시다" 라는 것이 복된 바울의 위로였다.

(2) 고소자가 호출되며 원고가 소환되고 그가 죄수를 쳐서 말해야 할 고소장을 가져오도록 명령하였다. 왜냐하면 그의 석방은 그것에 달렸기 때문이다. "아! 내 대적이 소송장을 기록하였더라면 좋으련만!"-즉 "나를 위선자라고 몰아 붙인 내 친구들이 그들의 비난 내용을 기록으로 작성해 두었다면 그것이 확실한 것으로 남아서 우리가 잘잘못을 쟁론할 수 있을 터인데." 욥은 자기를 중상하는 글이나 그를 고소하는 소송장이 있었다면 그것을 쾌히 읽었을 터였다. 만약 소송장이 있었다면 그는 그것을 자기 팔 아래 숨기지 아니하고, "그것을 자기 어깨 위에 메고서" 모든 사람이 다 보고 읽을 수 있도록 했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는 "그것을 자기의 면류관으로 쓰고서" 그것을 기뻐하며 그 고소장을 자기의 장식품처럼 여겼을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가령 그가 알지 못하던 죄악이 밝혀진다고 하더라도 그는 그 죄를 알게 된 것을 즐거워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죄를 회개하고 사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선량한 사람은 자기의 가장 추악한 것이라도 즐겨 알고자 하며, 자기에게 잘못을 충실하게 얘기해 주는 자들에게 감사를 돌린다.

[2] 만약 사실이 아닌 것으로 그를 힐난한 것이라면 그는 그 잘못된 주장을 바로잡아 반증할 수 있다는 것을 의심치 않았으며, 자기의 결백은 광선처럼 밝히 증명되고 그는 오히려 더욱 큰 명예를 가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3] 그러나 그는 자기 대적들이 만약 욥에 대한 혐의 사실을 기록으로 남긴다면 그들이 의당 그 문제를 세밀히 심사하게 되더라도 고소 내용은 사소하고 시사한 것 뿐이어서 그 소장을 보는 이들마다, "이것이 그들의 고소 내용 전부라면 이까짓 것을 가지고 그에게 그처럼 큰 분란을 피웠다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다" 라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3) 피고도 즉각 그 모습을 나타내고 자기를 고소한 자들이 바랄 수 있는 모든 공명정대한 태도를 보여 주려 하고 있다. 그는 "그의 걸음의 수효를 그들에게 고할 것이다"(37절). 그는 그들에게 자기 자신의 인생 이력을 터놓고 알릴 것이며, 그 모든 여러 시기와 장면들을 보여 줄 것이다. 그는 자기 이야기를 그들에게 진술해 줄 것인데, 그 이야기는 자기를 옳게 보게 하는 단면도 있겠지만, 자기에게 손해되는 점도 있을 것이며, 그는 그들이 자기 이야기를 이용해 보고 싶다면 악용하거나 선용하거나 간에 내버려둘 작정이었다. 그는 자기의 순전함을 너무나 확신하기에 재판받는 죄수로서보다는 면류관을 쓴 제왕같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갈" 셈이었다. 다시 말해서 자기를 고발하는 고소인의 말을 들으러 고소인 가까이 나아가는 동시에, 자기의 운명을 결정하는 심판자에게도 자기의 판결을 듣기 위해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의 양심의 증언은 곧 그의 즐거움이었다.

이것은 너를 지켜 주는 놋보루이니

네가 의식하고 있는 순결함을 여전히 보존해 주리라.

(Hic murus aheneus, nil conscire sibi)

욥같이 이 세상 것으로부터 자기 손을 흠없이 지킨 사람들은 자기 얼굴을 흠없이 하나님께 쳐들 수 있고, 그들이 인간들의 불공정한 비난 아래 있을 때에라도 그의 심판의 전망에 대해 즐거이 낙관할 수 있다.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느니라."

이렇게 하여 "욥의 말은 끝이 난다." 즉 그가 자기 친구들에게 대답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말하였다. 이 다음에는 그가 자기 책망과 정죄하는 의미에서 약간 말한 것이 나오지만(욥 40:4, 5; 42:2 이하) 여기서는 자기 방어와 변호를 해야 하는 마당에서 마땅히 말해야만 하는 것들로서 그치고 있다. 만약 이 말들로서도 불충분하다고 해도 욥은 그 이상 더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기가 이만큼 말하면 충분하다고 판단할 때를 알고 그 뒤는 재판장의 판정에 따를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욥의 표현 태도로 보아 그는 확신과 승리의 기분에 취하여 이 결론을 맺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욥은 이제 전투를 계속하면서도 그 전투에 승리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다. "누가 어떤 일이라도 하나님이 택하신 자의 책임으로 돌릴 것인가?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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