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의 비천한 상황(욥기 30:1-14)
매우 높은 명예와 명성을 얻던 욥이 이처럼 전락한 이 수치에 대해 그는 매우 광범위하게 그리고 슬프게 여기에서 원망하고 있다. 그것은 지극히 비통스러운 일이었고, 욥과 같이 순수한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는 그의 환난을 크게 가중시키는 것으로서 다음 두 가지를 주장하고 있다.
Ⅰ. 사람들의 비열한 태도가 그를 모욕했다. 그가 형통하던 날에 방백들과 귀족들은 그에게 존경을 표했고 복종했던 것이 그의 영예를 더하게 해 주었는데, 그가 이제 역경에 처하자 모든 면에서 그보다 못할 뿐 아니라 모든 인간들 가운데 가장 천하고 경멸스런 자들이 그를 짓밟고, 하인들이 발길질하는 일은 그의 수치를 더해 주었다. 여기에서 욥을 모욕한 자들에 대한 묘사보다도 그 모든 면에서 더 야비한 인간의 묘사는 없다.
1. 그들은 그보다 어린 자들로서(1절) 그의 연령과 엄숙함에 대해 존경을 품고 그에게 대해야 할 "젊은이"였다(2절). 어린 아이들까지도 선지자 엘리사에게 "대머리여 올라가라"라고 말한 벧엘의 어린 아이들처럼 그를 조롱했다. 부모들이 남을 조롱하는 것을 본 자녀들은 그것을 빨리 배운다.2. 그들은 천한 가문의 태생이었다. 그들의 부친들은 매우 비루한 자들이었으므로, 욥은 그들에게 양떼를 지키고, 양떼를 지키는 개와 함께 양치기의 시중을 드는 일과 같은 그의 집의 가장 천한 일을 맡기기도 꺼려할 정도였다(1절). 그들은 너무 비루해서 그의 종들 속에 끼기에도 적합하지 않았고, 너무 어리석어서 고용되기에 합당치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매우 거짓되었으므로 가장 천한 직책을 맡기기에도 합당치 않았다. 욥은 여기에서 그가 행한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그가 행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즉 그는 사람의 자녀들을 그의 양떼를 지키는 개와 같이 취급할 성품을 지닌 자는 아니었다. 그는 인간의 존엄성이 그러한 취급을 받기에는 훨씬 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3. 그들과 그 가족들은 이 땅의 무익한 짐이었고, 아무 소용이 없는 자들이었다. 욥은 아무리 신중하고 끈기 있게 노력해도 그들을 유익한 자들로 만들 수가 없었다(2절). 그들은 일하기에 합당치 않았고, 매우 게을렀으며, 그들의 일을 매우 귀찮게 여겼다. "그 손의 힘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랴?" 노인들은 갖가지 사소한 문제에 있어서도 충고를 받지 않도록 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들 속에는 정말 오랜 세월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기력이 쇠하여" 그들은 또다시 어린 아이가 된다.
4. 그들은 극도로 가난했다(3절). 그들은 곧 굶어 죽을 지경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일하려 하지 않았고, 또 구걸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던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섭리로 인해 궁핍하게 되었다면, 그들의 이웃들은 그들에게 알맞는 자선품들을 구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나태함으로 인해 곤경에 처하게 된 것이므로, 그 누구도 그들을 구하려고 나서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은신처와 생계를 위해 거친 들로 도망하지 않을 수 없었고, 사실상 비참하게 추방당해야 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떨기나무 가운데서 짠나물도 꺾어" 기쁘게 먹었다. 식량이 부족한 것이 오히려 그들에게 마땅했던 것이다(4절).
어떠한 굶주림이 사람들에게 올 것인가를 보라. 이 세상 사람들의 반은 그 나머지 반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모른다. 그러나 풍족하게 가진 자들은 매우 거친 음식을 먹고 살아가며, 그것도 모자라서 쩔쩔매는 자들에 대해 때때로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인정해야 하며, 게으른 자들이 누더기 옷을 입고 게으른 영혼이 굶주림에 시달리더라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지 말아야 한다. 이 빈약한 세상은 마귀의 궁핍함으로 가득 차 있다.
5. 그들은 매우 악평 높은 사악한 자들이었으므로,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의 근심거리가 될 뿐만 아니라, 성가신 존재로서 그 지방의 유명한 건달, 찌꺼기 인간들이었다. "그들은 사람 가운데서 쫓겨났다"(5절). 그들은 이처럼 속이고 도적질하며, 숨어다니고 재앙을 끼치는 자들이었으므로, 장관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란 그들을 그 지방에서 제거하는 것이었고, 무리는 도적을 외침같이 그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이러한 자들은 이 땅에서 제하여 버리라. 이 땅은 그들이 살기에 합당치 않다." 그들은 게으르고 일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도적이라는 비난을 받았고, 그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이 식량을 벌어들이지 않는 자들은 사실상 다른 사람이 입에서 그 식량을 훔치는 것이기 때이다. 게으른 동료는 사회에 폐를 끼치는 자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들을 여기에서처럼 거친 들로 보다는 강화원으로 보내는 것이 더 낫다. 왜냐하면 거친 들로 쫓아보내는 것은 실상 그들을 벌하는 것이기는 해도 결코 그들을 개심하도록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그들은 "흙구덩이에서" 거해야 했고, "떨기나무 가운데서 나귀처럼 부르짖었다"(6, 7절). 그들을 대적하여 백성들이 외치고 그들 자신의 양심이 부르짖는 자들의 운명이 어떠한가 보라. 그들은 계속 두려움과 당황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다. "그들은"(브루톤, Broughton의 견해대로) "나무 가운데서 신음하며, 가시나무 사이에서 고통을 당한다." 즉 그들의 은신처가 되어 주고 보호해 줄 것을 기대했던 그곳에서 찔리우고 긁힘을 당한다. 악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비참한 지경에 이르는가를 보라. 그러나 이것은 저 세상에 예비되어 있는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6. 그들은 모두 비천한 자들이었다(8절). 그들은 다른 사람의 존중을 받을 만한 면모를 전혀 갖추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하류에 속하는 자들이었다. 즉 명성을 가지고 있지 않는 부류들, 그 누구도 그들에 대해 좋은 평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좋은 기대를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흙보다 더 비천한 자로서, "고토에서 쫓겨난 자"였다. 이러한 사람들처럼 인간의 성품이 매우 비천하게 되고, 매우 타락할 수 있으리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사람이라는 사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릴 때, 우리는 또한 우리가 이러한 자들이 아니라는 데 대해 감사할 이유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들까지도 욥을 모욕하였다.(1) 그들은 욥에게 보복했다. 그가 형통하고 권세를 지니고 있었을 때, 훌륭한 장관으로서 법도를 올바로 집행하여 부랑자들과 깡패들 그리고 몸이 건장한 거지들을 처벌하였는데, 이 비천한 사람들은 이제 그 사실을 기억하여 그에게 보복을 가했다.
(2) 그들은 욥에 대해 승리를 거두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가 이제 그들과 같은 자가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사 14:10, 11). 비굴한 자들, 비열한 마음을 가진 자들은 비참하게 된 자를 모욕한다(시 35:15).
Ⅱ.욥에게 가해진 모욕은 매우 컸다. 그들이 얼마나 그를 모욕했는지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1. 그들은 그에 대한 민요를 만들었으며, 그것으로써 그들 자신과 그 동료들을 즐겁게 했다(9절). "내가 그들의 노래가 되며, 그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정직한 이웃 사람들의 재앙을 조롱거리로 삼는 자들과, 그들의 번뇌를 가지고 스스로 희희낙낙할 수 있는 자들은 매우 야비한 기질을 지닌 자들이다.사람의 자녀들을 그의 양떼를 지키는 개와 같이 취급할 성품을 지닌 자는 아니었다. 그는 인간의 존엄성이 그렇게 행하기에는 더욱 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2. 그들은 마치 흉칙한 광경이라도 보는 듯이 그를 피했으며, 그가 마치 못난 괴물이거나 전염병에 걸린 사람인 것처럼 그를 증오하며 달아났다(10절).3. 그들은 그에 대해 큰 경멸감과 분노를 표했다. 그들은 그의 얼굴에 침을 뱉거나 그렇게 할 마음이 있었다. 그들은 그의 발꿈치를 걸어 넘어뜨리고(12절), 그를 발로 찼다. 그것은 그들이 그를 미워하는 분노 때문이었거나, 아니면 친구들과 축구를 할 때 흔히 하듯이 그를 그렇게 조롱함으로써 즐거워하기 위한 때문이었다. 가장 훌륭한 성도들은 때로 심술궂고 경멸에 찬 그리고 사악한 세상으로부터 가장 심한 해를 입지만,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 주님도 이처럼 욕을 당하셨기 때문이다.
4. 그들은 그에 대해 매우 악의를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조롱할 뿐 아니라, 그를 희생시키려고 했다. 즉 그를 모욕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고안해 낼 수 있는 온갖 심각한 재앙을 그에게 끼치려고 했던 것이다. "그들이 내 길을 헐고 내 재앙을 재촉하는구나." 또는(어떤 사람들의 견해대로) "그들이 화를 당한 원인을 내게 뒤집어 씌우는구나." 즉 "그들은 그들이 쫓겨난 일에 대해 나를 비난하고 있다." 범죄자들이 그들에게 벌을 내린 재판관이나 법을 미워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1) 그러나 이러한 구실 아래 그들은 그릇되게 그를 정죄했고, 그가 이전에 한 말들을 거짓으로 전했는데, 이러한 것을 여기에서 "그의 길을 헐었다"고 표현되어 있다. 그가 그들에게 의를 행했다는 이유로 그들은 그를 폭군 그리고 포학자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욥의 친구들이 그를 무자비한 자라고 책망했던 것은(22:6 이하) 아마도 이 비열한 자들의 부당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항의에 근거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매우 빈약하고 생각이 부족함을 나타내는 일례이다. 이러한 사람이 혐의를 입는다면 누가 무죄자가 될 수 있겠는가?
(2) 그들은 그의 재앙을 보고 개가를 올렸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재앙을 더욱 재촉했다. 그리하여 그의 비참함을 더하게 하기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함으로써, 그를 더욱 번민케 만들었다. 어떤 사람, 특히 선한 사람들이 재앙을 재촉하는 것은 죄악이다. 이 일에 있어서 그들을 "돕는 자가 없었다." 아무도 그들로 그것을 시작하게 하거나 그것을 지지하지 않았으며, 그들을 후원해 주거나 옹호해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끼리 합하여 그 일을 행하였다. 그들은 다른 일에 있어서는 어리석었으나, 재앙을 행하는 데는 매우 현명하여, 그것을 궁리하는 일에 있어서는 그 누구의 도움도 필요치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그들은 나의 슬픔을 그들의 성과로 삼았으나, 그것은 그들에게 결코 유익함이 되지 못했다." 악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재앙에 의해 아무 것도 얻지 못할지라도 그것을 기뻐한다.
5. 그에게 이 모든 재앙을 행한 자들은 수가 많았고, 일치단결했으며, 과격했다(14절). 수문이 터졌을 때의 물처럼 "그들이 내게로 달려드는구나." 또는 "그들은 포위한 성을 크게 파괴하고서 그곳으로 들어오는 군사들 같이 내게로 달려드는구나." 그리고 이 일에서 그들은 긍지와 즐거움을 느꼈다. 그들은 마치 편하고 폭신한 침상에 누우려는 자같이 "그 파괴된 가운데로 몰려들어 오고" 그들의 모든 악의를 동원하여 무겁게 그를 눌렀다.
Ⅲ. 그에게 가해진 이 모든 경멸은 그가 처한 환난 때문에 야기된 것이었다(11절). "하나님이 내 줄을 늘어지게 하시매, 나의 허리를 동인 영예와 권력을 빼앗으시고(12:18), 내가 함께 모은 것을 흩으시고, 내 모든 일을 푸셨기 때문에, 즉 그가 나를 괴롭히셨기 때문에, 무리가 내 앞에서 굴레를 벗었음이니라." 즉 "무리가 그들 마음대로 나를 대적하여 말하고 행할 자유를 얻었다." 섭리에 의해 영예를 빼앗긴 자들은 몰지각하고 성품이 나쁜 사람들에 의해 경멸당하는 괴로움을 겪게 되리라는 것을 예상해야 한다.
"그가 그의 줄을 늘어지게 하시매,"(원문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즉 "그가 그들의 사악함을 규제하던 그의 굴레를 벗어던졌다." 즉 "그들은 나의 권위를 거들떠 보지도 않을뿐더러, 나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서지도 않는다." 우리가 이처럼 계속해서 모욕과 능욕을 당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이라도 그 양심을 잡고 계시며, 그들을 통제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언제고 이처럼 그릇된 대우를 만난다면 시므이의 저주를 받았을 때의 다윗처럼 그 속에서 속박의 줄을 끊으신 하나님의 손을 인정해야 한다.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1. 이제 이 모든 일 속에서 우리는 세상적인 명예, 특히 대중의 칭송이 불확실한 것이라는 사실과, 높은 권세를 지닌 자가 얼마나 갑작스럽게 치욕의 밑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는가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처럼 쉽게 잃어 버리는 것에 대해 야망을 품거나, 그것을 자랑하는 것은 얼마나 덧없는 일이며, 우리는 얼마나 그것에 대해 자만할 수 없는가! 오늘 "호산나" 하고 외치는 자들이 내일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예가 있는데, 무리가 그것에 대해 안심할지라도 그것은 이처럼 변하기 쉽고, 잃기 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2. 우리는 이처럼 짓밟히고 욕을 당하는 것이 흔히 매우 지혜롭고 선한 자들이 받아야 하는 운명이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3. 그리고 나타난 것들만 보는 자들은 세상이 불쾌하게 여기는 자들이 아무리 귀한 하늘의 총아라 할지라도 그들을 경멸한다. 빈곤한 자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사람들의 멸시를 받는 일보다 그들을 더욱 상심케 하는 일은 없다. "로마의 군중들은 행운아에게는 충성스러운 반면에, 몰락한 자들은 가차없이 박해했다."
4. 우리는 욥에게서 그리스도의 원형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는 이처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였던 것이다"(시 22:6; 사 53:3). 그러나 그는 사람들이 욕하고 침 뱉는 것을 피하기 위해 얼굴을 감추지 않고 욥보다 더 그 분노를 참으셨다.
자기의 환난을 원망하는 욥(욥기 30:15-31)
욥의 원망을 나타내는 이 두 번째 부분은 매우 비통스러우며 그 속에는 슬픈 어조가 매우 많이 담겨 있는데, 우리는 여기에서 그가 몹시 원망하고 있는 것과, 어느 정도 약간 그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Ⅰ. 여기에는 그의 원망이 많이 담겨 있다.
1. 일반적으로 그것은 큰 환난과 슬픔의 날이었다.(1) 환난이 그를 사로잡았으므로, 그를 놀라게 했다. 환난 날이 그를 사로잡았다(16절). "환난의 날이 나를 따르고"(어떤 사람들의 견해대로) "나를 잡음이라." 마치 집행관이 빚진 자를 체포하여 그를 결박하고 가두는 것처럼 "그들이 나를 체포했다." 환난이 명령으로써 왔을 때 그것은 단단히 결박할 것이며, 결코 그 끈을 늘어지게 하지 않을 것이다. 환난 날은 그를 놀라게 했다(27절). "환난의 날이 내게 임하였구나." 즉 "사전에 아무 경고도 없이 그것이 내게 임하였구나. 나는 그 날을 예상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 악한 날을 대처할 준비를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다음을 주목하라. 그는 그의 환난을 수를 세어서 곧 끝낼 수 있는 그리고 영원한 세월에 비해 아무 것도 아닌 날수로 간주하고 있다(고후 4:17).
(2) 그는 그것 때문에 큰 슬픔에 빠졌다. 그는 번민으로 "마음이 어지러워 쉬지 못했다"(27절). 그의 재앙에 대한 조심은 조금도 중단함이 없이 계속해서 그의 마음을 파먹어 들어갔다. 그는 매일 "검어진 살을 가지고 걸으며," 항상 한숨짓고, 항상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이러한 구름이 끊임없이 그의 마음을 덮고 있었으므로, 그는 사실상 "햇볕에 쬐지 않고" 걷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28절). 그는 위로를 얻을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야곱처럼 중한 상을 입은 사람처럼, 끊임없는 슬픔 속에서 자포자기하고 있었다. 그는(어떤 사람들의 견해대로) 햇볕을 피해 우울한 사람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그늘로 다녔다.
엄숙한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공회중에 갔을 때는 조용히 일어서서 그들의 기도를 청하는 대신에, 육신의 고통이나 마음의 번민으로 인해 미친 사람처럼 "서서 도움을 부르짖었다." 그가 초대에 응하여 대중 속에 나타났을 때에도 발작이 치미는 것을 그는 참을 수 없었으며, 또 알맞는 예의 범절을 갖출 수 없었고, 단지 서서 크게 비명을 지를 뿐이었다. 이처럼 그는 "이리와 타조의 형제" 였다(29절). 즉 그는 그들처럼 한적한 은둔처를 찾을 뿐 아니라(사 34:13), 그들처럼 두렵고 소름끼치는 고함을 질렀다. 그의 분별없는 원망은 말 못하는 그들의 것과 잘 비교될 수 있었다.
2. 그의 영혼을 사로잡은 두려움과 고통은 그의 재앙 중 가장 아픈 부분이었다(15, 16절).(1) 그가 앞을 내다 보았을 때 그 앞에 있는 모든 것들은 그에게 두려움을 안겨다 주었다. 만일 그가 그 공포를 떨쳐버리려고 애쓰면 그것은 더욱 맹렬하게 그에게 덤벼들었다. 만일 그가 그것으로부터 도망가려하면 그것은 바람처럼 재빠르고 맹렬하게 그의 영혼을 추격해 왔다. 그는 제일 먼저, "하나님의 두려움이 그를 엄습하여 치는" 것을 원망했었다(6:4). 그리고 지금도 그가 어디를 돌아보든지 그것은 그를 엄습했다. 그가 어느 길로 도망하든 그것은 그를 추격했다. "내 마음"(히브리어로는 "나의 본체, 나의 여왕"), 그것은 인간의 주된 부분이다. 그것은 우리의 영광이며 어느 면으로 보나 육신보다 더욱 뛰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을 뒤따르며 위협하는 그것이 가장 두려운 것이 된다.
(2) 그가 옛날을 뒤돌아 볼 때, 그가 이전에 즐기던 모든 선한 것들이 그에게서 떠나고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그것에 대한 씁쓸한 추억뿐임을 발견하였다. "내 복록이" 그리고 행복이 "구름같이" 갑작스럽고 재빨리 그리고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지나갔구나."
(3) 그가 내면을 살펴 보았을 때, 그의 마음이 상했을 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녹아 완전히 침체되어 그의 연약함을 극복할 수 없음을 발견했다(16절). 그는 물처럼 연약했을 뿐만 아니라, 바닥에 엎질러진 물처럼 이해력을 잃고 있었다. 시편 20편 14절과 비교해 보라. "내 마음은 초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다."
3. 그의 몸의 병도 극심했다.
(1) 왜냐하면 그의 몸은 쑤시는 고통, 뼈를, 그의 온뼈를 뚫는 고통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17절). 그가 잠을 자 원기를 회복해야 할 때, 곧 밤이 되었을 때 "그의 뼈를 쑤시는" 것은 그 "뼈 속에 있는 칼"이었다. 그의 근육은 심한 경련을 일으켜, 그의 "몸에 아픔이 쉬지 아니하였다." 그 고통 때문에 그는 휴식을 취할 수 없었고, 잠은 멀리 달아나 버렸다. "그의 뼈는 열기로 탔다"(30절). 그의 몸은 계속 마저 타버릴 지경이었다. 우리의 몸이 얼마나 연약한가 보라. 우리의 몸 자체에 병과 죽음의 씨앗이 들어 있다.
(2) 그의 몸에는 종기로 가득했다. 뼈 속에 고통을 당하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그 전 살갗의 고통은 면할 수 있다. 그러나 욥을 치라는 사탄의 명령은 그의 뼈와 살에 모두 뻗쳐서, 조금의 양보도 하지 않았다. 그의 "가죽은 검어져서 떨어졌다"(30절). 피는 굳었고 종기는 곪아 점차 딱지가 생겼으므로 그의 가죽은 검게 보였다. 그의 의복 빛깔마저도 계속 흐르는 종기로 해서 퇴색했고, 그가 입고 다니던 부드러운 옷은 이제 매우 뻣뻣하게 되어서, 그의 모든 옷들이 "옷깃처럼" 되었다(18절). 깨끗한 옷감과 정성스런 시중이 없었기 때문에 욥이 얼마나 초라한 상태에 있었고, 또 그의 옷은 얼마나 더러운 누더기로 되었는가를 묘사하는 것은 불쾌한 일일 것이다.
다른 병들과 함께 욥이 후두염을 앓고 있었거나 목구멍이 부었었고 그의 목을 옷깃처럼 뻣뻣하게 감은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처럼 그는 "진흙 가운데 던져져(19절) 진흙같이 되었다"(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그의 몸은 차라리 한 무더기의 티끌처럼 보였다. 그 누구도 그들의 옷을 자랑하지도 말고, 그 "정결함을 자랑하지 않도록 하자." 그들은 단지 어떤 병으로 인해 "그들의 옷이 추하여지고," 심지어는 그들이 "진흙 가운데 던져져," 그들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불쾌한 존재가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때에 "썩은 냄새가 향을 대신할 것이다."(사 3:24). 우리는 기껏해야 티끌과 재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의 몸은 비천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잊기 쉬우나 하나님께서 마침내 어떤 심한 병을 주시어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느끼고 인정하게 만든다. "나는 이미 내가 곧 그렇게 분해되어야 할 티끌과 재같이 되었다. 내가 어디를 가든지 나는 내 무덤을 짊어지고 다닌다."
4. 그 무엇보다도 그를 괴롭게 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대적이 되시어 그와 싸우시는 것처럼 보인 사실이었다. "그를 진흙 가운데로 던지신 것은 하나님"이었다(10절). 그리고 그가 그를 던지셨을 때는 그를 짓밟으시는 것같이 보였다. 이것이 그 무엇보다도 더욱 그의 마음을 상심케 했다.(1) 즉 하나님은 그를 위하여 나타나지 않으셨다. 그는 하나님께 그 자신을 아뢰었지만 아무 응답을 얻지 못했다. 하나님에게 호소했으나 아무런 판결을 얻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귀찮을 정도로 탄원했으나 소용이 없었다(20절). "진심으로 내가 주께 부르짖으며, 응답을 기다리면서 섰사오나 주께서 듣지 않으시고, 굽어보시기만 하시나이다. 왜냐하면 내가 아무 것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옵니다." 우리의 뜨거운 기도가 신속하고 뚜렷한 응답을 얻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이상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비록 야곱의 자손이 결코 헛되이 구한 적은 없었지만, 그들은 흔히 그것이 헛되었다고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귀를 막으셨을 뿐만 아니라 노하셨다고 생각했다(시 80:4).
(2) 하나님은 그를 대적하시어 나타나지 않으셨다. 여기에서 그가 하나님에 대해 말한 것은 욥이 말한 것 중 가장 잘못된 것 중의 하나였다(21절). "주께서 돌이켜 내게 잔혹히 하시나이다." 그가 사람들과(그는 결코 동정을 버리시지 않는다) 그의 자녀들에게 잔혹하시다는 것은 자비와 은혜의 하나님과 매우 거리가 먼 일이다. 욥이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한 것은 부당하고 배은망덕한 일이었다. 그러나 욥이 하나님에 대해 심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그 때에 그가 가장 쉽게 범할 수 있는 죄였다.
[1] 여기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대적하여 싸우시고 온 힘으로 그를 멸망케 하신다고 생각했다. "주께서 완력으로 나를 핍박하시나이다." 또는 내 적수가 되시어 나를 치나이다. 그가 하나님께서 "큰 권능을 가지고 그로 더불어 다투시지" 않으리라는 결론을 내렸을 때는 하나님께 대해 좀 더 낫게 생각하였다(23:6). 하나님은 적대적인 주권과 항거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계시나, 그 어느 것도 어느 누구를 짓이기거나 핍박하시기 위해 사용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2] 그는 하나님이 그를 모욕했다고 생각했다(22절). 바람이 장난하는 깃털이나 겨처럼 "주께서 나를 바람 위에 들어 얹으시나이다." 욥은 그 자신을 전능자와는 상대가 되지 않으며, 승리 속에서가 아니라, 두려움 속에서 바람의 날개 위에 얹혀졌을 때에도 그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하나님의 심판은 마치 바람에 불려 흩어지는 구름처럼 그를 "대풍 중에 소멸케 하셨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존재는 아무리 훌륭한 상태에 있더라도 하나님의 권능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것은 곧 무력하게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5. 그는 하나님께서 이 환난을 곧 끝내 주시는 것 이외에는 지금 그 어느 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만일 내가 바람 위에 들어 얹혀진다면 나는 내 목이 곧 부러지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마치 하나님이 그를 다루시는 모든 일 속에서만 어떤 계획을 지니고 계신 듯이 말하고 있다. "내가 아나이다. 주께서 이처럼 온갖 두려움과 함께 나를 죽게 하사 끌어가실지라도 나는 이 모든 고통없이 그곳으로 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생물을 위하여 정한 집이기 때문입니다"(23절).
무덤은 집이다. 좁고 어둡고 추우며 잘 갖추어지지 않은 집이다. 그러나 그곳은 우리가 거하게 될 곳이며, 거기에서 우리는 안전하게 휴식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오랜 집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어머니의 무릎이며, 그곳에서 우리 아버지에게로 보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곳은 모든 생물을 위하여 정해져 있다. 그곳은 공동의 피난처로서 부자와 가난한 자가 만나는 곳이다. 즉 그것은 총집결지로 정해져 있다. 우리는 모두 곧 그곳으로 끌려 가야만 한다. 우리를 그곳으로 데려가는 것은 하나님이시다. 사망과 음부의 열쇠가 그의 손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조만간에 그가 우리를 그곳으로 데려가시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잘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유익할 것이다. "생물은 그들이 죽으리라는 것을 안다." 우리 각자가 그것을 응용함으로써 깨닫도록 하자.
6. 그의 고통을 격동케 하는 두 가지 일이 있는데, 그를 더 참을 수 없도록 만든다.(1) 즉 그의 기대가 크게 무너졌다(26절). "내가 더 좋은 복을 바랐더니, 또는 적어도 예전의 상태가 계속되길 바랐더니 화가 왔다." 이처럼 불확실한 것들이 우리의 모든 세상적인 즐거움이며 우리는 그것을 매우 기대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충족시키려는 이러한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있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위로의 섬광 속에서 광명을 기다리는 자는 비참하게 실망할 것이며, "흑암 속에 침창을 베풀" 것이다.
(2) 그의 형편이 너무 크게 바뀌었다(31절). "내 수금은 팽개쳐져, 버드나무에 걸려 있을 뿐만 아니라, 애곡성이 되고, 내 피리는 애통성이 되었구나." 욥은 그가 형통할 때에, "소고와 수금으로 노래하고 피리 불어 즐겼었다"(21:12). 그가 엄숙하고 너그러웠던 반면에 또한 즐길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의 형편은 바뀌었다. 그러므로 즐거워하는 자들을 "즐겁지 않은 것같이" 하라. 그들은 얼마나 빨리 그들의 "웃음이 애곡성이 되고 그들의 웃음이 한숨으로" 변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욥이 얼마나 원망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Ⅱ. 그러나 이 모든 것들 중에는 그 스스로에게 위안이 되는 것이 있긴 했지만, 그것은 극히 적었다.
1. 그는 죽음이 그의 모든 재앙을 종식시킬 점이라는 사실을 예고하면서 위로를 얻고 있다(24절). 지금 비록 하나님이 완력으로 그를 핍박하시지만, "그래도" 그는 말하고 있다. "사람이 넘어질 때에 어찌 손을 펴지 아니하겠는가!" 하나님의 진노의 손은 사람을 죽게 하실 것이다. 죽음 저편까지 그를 따르지는 않으실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영혼은 영의 세계에서, 안전하고 행복할 것이고, 그의 육신은 티끌 속에서 안전하고 행복할 것이다. 비록 사람이 "재앙을 당할 때에 부르짖을"지라도(비록 죽어갈 때에 많이 번민하고 부르짖으며, 많이 한숨짓고 신음하고 원망할지라도), 무덤 속에서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며,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은 모든 것이 조용하다. "비록 멸망이라고 불리우는 지옥에서 그들이 부르짖을지라도 무덤 속에서는 그렇지 않는다. 그리고 두 번째 죽음에서 구원되었으므로 첫 번째 것도 사실상 내게 구원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그를 "음부에 감추시기"를 원했었다(4:13).2. 그는 그가 편히 지낼 때 다른 사람의 재앙에 대해 항상 관심을 기울였던 사실을 회고하면서 위로를 얻고 있다(25절). "고생의 날 보내는 자를 위하여 내가 울지 아니하였는가?" 여기에서 욥은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푼 그 자신이 긍휼을 얻지 못하게 된 것은 매우 가혹한 처사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다고 풀이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오히려 그 자신에 대해 조용히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고 싶다. 즉 그가 언제나 불우한 자들을 동정했고, 그들을 위하여 할 수 있는껏 도왔다는 것을 그의 양심이 증거했으므로, 그는 결국 하나님과 그의 친구들이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는 것을 기대할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애곡하는 자들과 함께 애곡하는 자들은 그들이 쓴 잔을 마실 차례가 되었을 때에 그들 자신의 슬픔을 더 잘 참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후서 11장 29절에서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하는 내용과 비교하여 25절의 내용을, "빈궁한 나를 위하여 내 마음이 애타하지 않더냐"로 풀이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무자비하고 냉혹했던 자들은 그들 신이 환난을 당할 때 그들 자신의 양심으로부터 그런 말을 들으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난한 자들을 생각해 주고, 구해 준 자들은 그것으로 인해 그들의 병 중에서 그 자리를 편하게 함을 얻을 것이다(시 41:1, 3).
Previous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