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욥기 2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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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1

욥의 이전의 형통함(1)(욥기 29:1-6)

손실자들에게 말할 기회를 주었을 때 그들은 그들의 빼앗겨버린 즐거움에 대해 많은 말을 하고자 한다. 그들이 예전에 번영하였던 사실은 그들이 생각하고 말하는 데 있어서 가장 즐거운 주제가 된다. 욥도 역시 그러했다. 그래서 그는 여기에서 이러한 기원으로 시작하고 있다(2절). "내가 이전 달과 같이 되었으면!" 이렇게 그는 그의 형통함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그의 기원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내가 그때처럼 훌륭한 지위에 있었으면, 내가 그때처럼 많은 재물과 영예와 낙을 누렸으면!" 그가 이러한 상태를 바란 것은 그의 편안함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의 하나님에 대한 명성과 영광 때문이었다. 그는 현재의 고통으로 인해 이러한 것들이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내가 다시 형통함을 되찾을 수 있다면 그들의 이론을 들어 나를 책망하고 비난하는 내 친구들을 충분히 침묵시킬 수 있게 되고 나는 영원히 그 비난을 면케 되련만!" 만일 생명과 건강과 형통함을 원하는 우리의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우리의 거룩한 고백에 대한 신뢰를 구축시켜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그 소망은 당연한 것일 뿐만 아니라 영적인 것이다.

2. "내가 그때와 같은 영적 상태에 있었으면!" 욥이 지금 가장 원망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서 숨어 버리셨기 때문에 그의 마음이 무거워진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때처럼 하나님을 섬기는 가운데 그의 마음이 큰 위로를 받아 넓어지고 그가 행복했다고 생각했던 그때처럼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면서 큰 자유를 얻기 원했다. 그가 "강장하던 날에"(4절), 즉 그가 한창 이 모든 것을 즐기고, 그것에 지극히 심취될 수 있었을 때 그는 이러한 상태에 있었다. 젊은 날에 형통하는 자들은 어둡고 음침한 날들이 기다리고 있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욥에게 지난 날 즐거움을 주었던 것은 다음 두 가지였다.

Ⅰ. 욥은 그의 하나님 안에서 안위를 얻었다. 이것이 그가 즐거움을 누린 가장 주된 것이었고, 그의 형통함은 그것으로부터 솟아 나오는 아름다운 것으로서 그가 하나님의 은총을 얻고 있다는 증거가 되었다. 그는 그의 형통함을 그의 행운으로 여기지 않았고, 그 자신의 힘으로 돌리지 않았으며, 그 자신의 손의 능력으로도 생각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다윗과 같이 받아들였다(시 30:7).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다." 은혜로운 영혼은 이 세상의 미소가 아닌 하나님의 미소 속에서 기뻐한다. 여기에서 경건한 욥에게 지극한 즐거움을 준 것은 다음 네 가지 일이었다.

1. 욥은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확신을 지니고 있었다. 그날들은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던 날"이었다(2절). 그가 위협을 느끼더라도 그는 "재물을 그의 강한 성읍으로 삼거나, 그의 부요를 믿지 않았고, 오직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의 강한 성채로 삼았다." 그 속에서만이 그는 안전함을 느낄 수 있었고, 그가 안전하고 안위를 얻을 때는 그것을 곧 하나님의 은혜로 여겼다. 마귀는 하나님이 그를 산울로 두르신 것을 보았고(1:10), 욥도 그것을 직접 보고서 "하나님께서 권고하심으로 그의 영을 지키셨다"는 사실을 시인했다(10:12).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자만이 안전하며 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것들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는 자들이라도 하나님이 그것들을 보호해 주시지 않는 한 결코 그들 자신이 안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2. 욥은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만족하고 있었다(3절). "하나님의 등불이 그의 머리에 비취었다." 즉 하나님께서 그 얼굴의 빛을 그에게 비취셨고, 그의 사랑의 향기로운 맛과 확신을 주셨다. 이 세상에서 성도들에게 전해지는 하나님의 은총의 가장 훌륭한 것도 미래에 예비되어 있는 것과 비교한다면 등불에 불과하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이처럼 풍부한 만족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 광명을 힘입어 흑암 중에 행하였다. 그것은 의혹 속에 있는 그를 인도했고, 슬픔 속에 있는 그를 위로했으며, 모든 괴로움은 참게 해 주었고, 어떠한 역경도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외부적 번영의 찬란한 햇빛을 지니고 있는 자라 할지라도 한동안은 흑암이 오리라는 것을 예상해야 한다. 그들은 때로 방해를 막거나, 손해를 보거나 비판 속에 빠질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존중할 줄 아는 자들은 그 광명을 힘입어 즐겁게 그리고 편안하게 이 눈물 골짜기의 모든 흑암을 지나갈 수 있다.

3. 욥은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교제했다(4절). "하나님의 우정이 내 장막에 있었다." 즉, 하나님은 서로 흉금을 터놓는 친구처럼 그와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셨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때는 지금처럼 그렇게 그것에 어둡지 않았다.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는 것을 "그 언약" 속에서 "저희에게 보이시기" 때문이다(시 25:14).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그의 은총과 은혜를 전하시며, 세상이 모르는 방법으로 그들의 헌신을 받으신다. 이 구절을 "그 때는 하나님의 모임이 내 장막에 있었다"로 풀이하는 사람들도 있다. 유대의 랍비 솔로몬(Solomon)은 이것을 하나님의 백성의 무리가 욥의 집에서 모여 종교적 행사를 가졌고, 그가 그것을 주관한 사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속에서 욥은 큰 즐거움을 느꼈고, 그것이 해산되는 것이 그를 상심케 했다. 또는 그것을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가 거하는 주변에 그들의 장막을 세워 놓은 것으로 풀이할 수도 있다.

4. 욥은 하나님의 임재를 신뢰하고 있었다(5절). "전능자가 오히려 나와 함께 계셨다." 이제 그는 하나님이 그를 떠나셨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그때는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셨고, 그것이 그에게 무엇보다도 소중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집은 그것이 비록 초막에 불과할지라도 성곽이 되며 또한 궁전이 된다.

Ⅱ. 욥은 그의 가족 안에서 안위를 얻었다. 모든 것이 그 속에서 순조로왔다. 그는 그의 음식을 먹을 사람들이 있었고, 그의 사람들을 위한 음식도 있었다. 그 중 어느 하나라도 결핍된다는 것은 큰 고통이었다.

1. 욥은 그의 재산을 즐길 수 있는 무수한 후손들이 있었다. "나의 자손들이 나를 둘러있었다." 그에게는 그의 주위를 둘러쌀 만큼 많은 자손들이 있었고, 그들은 그를 지켜 보았고, 또 그에게 순종했다. 그들은 그를 둘러싸고 있어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그리고 그들이 그를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온유한 부모들에게 있어 자손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위로가 된다. 욥은 지금 빼앗겨 버리고 없는 이 위안을 매우 절실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그의 자손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는 일례로 생각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 자손들을 잃었을 때 우리가 우리의 하나님을 잃지는 않았다는 사실로 우리 스스로를 위로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잘못을 범한다.

2. 욥은 이 많은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풍족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4절). 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버터가 그의 발자취를 씻길" 정도로 그의 농장은 풍족했다. 그리고 그의 감람나무 밭은 예상외로 매우 수확이 풍성했으므로, 마치 "반석이 그를 위하여 기름 시내를 흘려내는" 것 같았다. 그는 저장해 두는 금과 은으로써 그의 재물을 계산한 것이 아니라,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버터와 기름으로써 계산했다. 우리 스스로에게 유익을 주지 못하며 또 그것으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행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재산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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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의 이전의 형통함(2)(욥기 29:7-17)

우리는 여기에서 욥의 영예롭고 유력한 지위를 알 수 있다. 그는 그의 집에 누리기 충분한 즐거움이 있었지만, 그는 그것에만 집착하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공공의 유익을 위해 태어났다. 성문 다시 말해서 재판장에서 행해져야 할 일이 있었을 때, 욥은 "나가서 성문에 이르기도 하였다"(7절). 그것은 거드름을 피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의에 대한 그의 사랑 때문이었다. 다음을 주목하라.

재판은 성문, 거리, 광장에서 베풀어졌기에,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원하는 사람들은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해 증인이 될 수 있었고, 범죄에 대한 심판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듣고 두려워하도록 만들었다. 욥은 동방 사람들 가운데 방백이었고 사사였으며 장관이었고 권위를 지닌 자였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읽을 수 있다.

Ⅰ. 모든 부류의 사람들은 욥에게 매우 깊은 경의를 품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귀한 신분에 대한 것 뿐만 아니라, 그의 인격적인 미덕과 탁월한 분별력, 성실함 그리고 훌륭한 처사에 대한 것이었다.

1. 백성들은 그를 존경했고 또한 어려워했다(8절). 그의 표정과 태도의 엄숙과 위엄, 그리고 악하고 고상치 못한 모든 것을 날카롭게 비난하는 그의 정평있는 엄격함은 그의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올바른 예의범절을 지키게 했다. 태연한 태도를 지닐 수 없거나 또는 그들 스스로가 어떤 일에 잘못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소년들은 숨으며" 그를 피했다. 그리고 "노인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을지라도 앉은 채로 있으려 하지는 않았다. 즉 그들은 "일어나서 서며"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또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 자들도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덕과 경건은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요구하며, 흔히 그것을 얻게 된다. 그러나 선할("are" good)뿐만 아니라 선을 행하는("do" good) 자들은 두 배의 존경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연로하여 아랫사람을 지배하고 있는 자들에게 위엄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젊고 윗 사람에게 복종해야 하는 자들에게는 겸손이 필요하다. 존경과 두려움은 장관들에게 합당한 것으로서 그들에게 바쳐져야 한다(롬 13:7). 그러나 훌륭하고 선한 자들이 이처럼 존경함을 받거늘 하물며 위대하고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랴!

2. 그 방백들과 귀인들도 그에게 깊은 경의를 표했다(9, 10절). 이들은 그의 아래에 있는 관리들이었으므로 그들이 그를 그들의 높은 자로 여겨 존경을 표하는 것은 그의 신분에 합당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오히려 그들은 그와 동등한 지위에 있었고, 그와 함께 임무를 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들이 그에게 특별한 존경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그의 뛰어난 능력과 업적으로 인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은 그가 그들 중 어떤 사람보다도 이해력이 빠르고 건전한 판단력을 지니고 있으며, 적용력이 정확하고 표현이 명료하고 풍부하다는 것을 모두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동료들 가운데 율법과 의와 조언을 알려 주는 자가 되었고 그가 말한 것을 모두 따르고 순종했다.

그가 재판정에 들어 왔을 때 특히 그가 일어서서 어떤 일을 말할 때 "방백들은 말을 참고 귀인들은 소리를 금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가 말한 것을 더욱 열심히 청종하여, 그의 말의 뜻을 분명히 이해하고자 했다. 그들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에 급급하며 그들 자신의 말을 듣기 좋아하는 자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별로 청종하지 않는 자들도 욥이 말할 차례가 되었을 때는 마치 그의 생각이 그들 자신의 분출구가 되는 것처럼 그의 생각을 열심히 알고자 했다. 그들 자신의 판단을 의심하던 자들은 그의 판단에 만족했고, 그들을 미혹케 했고 혼돈하게 만들었던 난점을 풀어 주는 그의 재치에 감탄했다. 방백들과 귀인들의 의견이 서로 분분할 때 그들은 이 논쟁을 욥에게 의뢰하여 그의 판단대로 결정하는데 모두 의견을 일치했다.

이와 같이 뛰어난 은사로 축복받은 자들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나님을 영예롭게 하고 선을 행하기에 좋은 기회를 많이 가지지만 그들의 교만을 경계해야 할 필요가 또한 큰 것이다. 이처럼 뛰어난 사람들로 축복받은 백성들은 행복하다. 그것은 그들 모두에게 유익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Ⅱ. 그는 그의 직책에서 매우 많은 선행을 행했다. 그는 그가 지니고 있었던 능력으로 그의 나라에 큰 공헌을 했다. 그리고 욥이 형통하던 날에 스스로를 평가한 기준이 무엇인가를 우리는 여기에서 알게 될 것이다. 어느 정도 자기 자신을 중히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으로 우리 자신을 평가하고 있는가를 살펴봄으로써, 우리 자신의 성품의 어떤 것을 판단할 수 있다. 욥은 그 자신을 그의 가문의 영예로 평가하지 않았으며, 그가 소유한 큰 재산, 막대한 수입, 풍성한 식탁, 그가 부리던 많은 하인들, 그의 권세, 소유물과 종자, 그가 베푼 훌륭한 연회, 그리고 그가 받은 아첨 등에 의해 그 자신을 평가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그의 유용함으로 자신을 평가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선한 것이며 그것은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처럼 자비로울 수 있다면 우리는 또한 그와 같이 온전할 수 있다.

1. 그는 그가 온건한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과 기도를 얻었던 사실로써 그 자신을 평가했다. 그것은 재치 있는 자들과 시인들의 찬사에 의한 것이 아니고,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찬사에 의한 것이었다. 그가 말한 것을 듣고 그가 행한 것을 본 모든 사람들은, 그리고 모든 권세와 그의 나라에 대한 아버지의 부드러운 사랑으로써 공공의 유익을 위해 그가 어떻게 헌신했는가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를 축복했으며 그를 위하여 증거하였다(11절). 그들은 그에 대해 숫한 찬사의 말을 했고, 그를 위해 선한 기도를 해 주었다. 그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두려워하도록 만들거나("그들로 하여금 미워하게 하라. 그러면 또한 그들은 두려워할 것이다") 독단적으로 행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사람들이 그에 대해 말하는 것을 무시하고서 그 자신의 마음대로 행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모르드개처럼 "그 허다한 형제에게 굄을 받았다"(에 10:3).

욥은 그의 행실의 증인이 되고 그와 항상 같이 있으면서 그를 보고 듣고 그리하여 그들 자신의 지식으로 그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자들의 증거를 멀리 있는 자들의 칭찬보다는 더욱 중히 여겼다. 특히 그로 인해 직접 도움을 입고 그들 자신의 경험을 말할 수 있는 자들의 증거를 더욱 중히 여겼다. 망하게 된 자들과(13절) 멸망 전에 욥의 도움으로 구출된 자들도 그를 축복했던 것이다. 훌륭한 자들과 재물이 있는 자들로 하여금 이처럼 선을 행하게 하라. 그러면 그들은 그와 똑같은 칭찬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유익함을 입은 자들로 하여금 그것을 그들의 보호자와 은인들에게 얻은 정당한 빛으로 간주하게 하여, 그들을 축복하고 그들을 증거하며, 그들의 안위를 위해 땅에서는 그들의 명예를 위해 그리고 하늘에서는 그들의 안위를 위해 사용하게 하라. 또한 그들을 칭송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게 하라. 이 적은 보답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자들은 정말 배은망덕한 자들이다.

2. 욥은 그들 스스로 거의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들을 돌본 것으로써 그 자신을 평가했다. 그들은 가난하고 궁핍한 과부들과 고아들, 소경들과 절뚝발이들로서 그의 은혜를 얻을 만 하다거나 그것을 갚을 능력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자들이었다.

(1) 만일 빈궁한 자들이 손해를 입거나 압제당했다면, 그들은 욥에게 호소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호소하는 내용이 사실임을 그가 발견했다면, 그들은 그의 귀와 내장 뿐만 아니라 그의 손도 역시 얻을 수 있었다. 그는 부르짖는 빈민을 건졌고(12절), 그들을 짓밟아 망하게 하는 고통을 결코 그들에게 주려하지 않았다. 더욱이 그는 "빈궁한 자의 아비도 되었다." 즉 그들을 보호해 주고 그들이 괴롭힘을 당하지 않도록 살피는 재판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 그들이 모자람이 없도록 살피고 그들에게 권고하고 가르치며, 모든 경우에 그들을 위해 나타나 행하는 아비가 되었다. 방백의 아들이 빈궁한 자들의 아비가 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다.

(2) 도움을 줄 자들을 아무도 가지고 있지 않은 고아들은 욥이 그들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어서 그들이 곤경에 처하면 그들을 구해 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들이 조금 가지고 있는 것으로 최대의 유익을 거둘 수 있도록 도왔고 그들이 빚진 것을 갚도록 해주었으며, 그들이 받아야 할 것을 받게 해 주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구출하여 이 세상에 들어가도록 도왔고 그 속에서 일할 수 있도록 도왔다. 즉 그곳으로 들어가도록 도왔으며, 그 속에 있을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이와 같이 고아들은 도움을 받아야 한다.

(3) 망하게 된 자들을 그는 건져내었고, 굶주리고 궁핍함으로 인해 망하게 된 자들을 구해 주었다. 그리고 병들거나 버림받거나 부당하게 고소당한 자들, 또는 부당하게 파산할 위기에 처해있거나 그밖의 이유로 망하게 된 자들을 보살펴 주었다. 그들의 위험이 너무 극심하여 욥으로 하여금 더욱 용감하게 그들을 위해 나타나 주도록 재촉하였던 것만큼, 그들은 욥의 긴요한 친절에 더욱 감동되어 더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들의 축복을 욥에게 더욱 풍성히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4) 번민으로 한숨짓고, 두려움에 떠는 과부들을 그는 기쁘게 노래부르도록 만들었다. 그는 그들을 매우 세심히 보살피고 그들을 도왔으며, 그들의 이익을 진심으로 도모하였다. 매우 근심에 잠겨 있는 자들에게 기뻐할 기회를 주는 것은 선한 사람들의 즐거움이며 훌륭한 자들에게도 역시 그러해야 한다.

(5) 무슨 일로 인해 당황하고 있는 자들에게 욥은 적절하고 알맞는 위안을 주었다(15절). "나는 소경의 눈도 되어," 어쩔 줄 모르는 자들에게 최선의 것을 권고했고 조언해 주었다. 그리고 "절뚝발이의 발도 되어"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알고 있지만, 어떻게 그것을 이루어야 할지를 모르는 자들에게 돈과 친구들을 보내어 도와 주었다. 우리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이 궁지에 처하여 가장 도움이 필요한 바로 그 문제에 대해 그들에게 가장 큰 도움을 줄 수가 있다. 우리가 눈멀고 절뚝발이가 되는 때가 올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자들을 불쌍히 여겨 구해 주어야 한다(사 35:3, 4; 히 12:13).

3. 그는 그의 모든 처사에서 공의로 행한 양심에 의해 그 자신을 평가했다. 그의 친구들은 그를 포학자라고 하여 부당하게 책망했다. "그것에 관한 한 나는 의를 지지하고 돕는 것을 언제나 나의 일로 삼았다"고 욥은 말했다.

(1) 욥은 의를 다스리는 일에 스스로를 전념시켰다(14절). "내가 의로 옷을 삼아 입었다." 즉 그는 의를 행하고 그것에 따라 확고한 결단력으로 행하려는 뜻을 언제나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공의의 허리띠"였다(사 11:5). 그것은 그의 모든 행위에 있어서 그를 단단하고 견고하게 묶어 놓았다. 그는 마치 옷을 입고 있듯이 그것을 입고 나타났으며, 결코 그것을 버리지 않았다. 의는 그것을 입는 자에게 옷이 되어 줄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그들을 따뜻하고 편하게 해 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을 안전케 하고, 기온의 변화로부터 그들을 보호해 줄 것이다. 또한 그것은 그들을 장식해 줄 것이며, 그들에게 하나님과 사람의 은혜를 모두 부여해 줄 것이다.

(2) 그는 그 속에서 즐거움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거룩한 즐거움이라고도 말할 수 있었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의를 행함으로써 아무도 해하지 않는 것을 그의 최상의 영광으로 여겼다. "나의 공의는 도포와 면류관 같았었느니라." 아마도 그는 도포나 면류관을 손수 입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러한 영예의 깃발에는 매우 무관심했다. 그것을 받을 만한 자격을 거의 갖추고 있지 않은 자들이 그것을 가장 좋아한다. 그러나 그가 다스림을 받고 또 그것에 의해 다스린 공의의 확고한 원리가 대신 그에게 그 모든 장식품이 되어 주었다. 만일 장관이 그의 직무를 충실히 행했다면 그것이 그에게는 정금이나 자주빛 의복을 능가하는 영예가 될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또한 그의 기쁨이 된다.

그리고 실상 그가 그의 의무를 떳떳하게 행하지 않고서도 어느 정도 출세하는 결과를 얻게 되었다면 그의 도포와 면류관, 그의 의복과 모자, 그의 칼과 창은 수치스러운 것에 불과하고, 그것들은 유대인들이 우리 구세주를 조롱하기 위해 고안해 낸 자색옷과 가시 면류관과도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죽은 사람에게 있어서 의복이 그를 결코 따뜻하게 해 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야비한 자의 의복은 결코 그를 영예롭게 만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3) 그는 그가 책임 맡은 일들을 수행하기 위해 수고했다(16절). "나는 생소한 자의 일을 사실하여 주었다." 그는 부지런히 사건의 진상을 조사했으며, 끈기 있고 편견 없이 양쪽의 진술을 들었다. 그리하여 모든 일을 규명하여 거짓된 것들을 밝혀 놓았다. 그는 모든 상황을 살펴, 모든 경우의 상벌과 진상을 발견하고자 했다. 그리고 나서, 그때서야 비로소 그는 판결을 내렸다. 그는 듣기 전에 그 일에 대답하지 않았다. 또한 비록 "원고"의 말이 바른 것 같을지라도(잠 18:17) 그를 의롭다고 판결하지도 않았다.

4. 그는 교만하고 악한 자들의 폭력을 저지한 것으로써 그 자신을 평가했다(17절). "나는 불의한 자의 어금니를 꺾었다." 그는 그들의 목을 부러뜨렸다고는 말하지 않고 있다. 그는 그들의 생명을 빼앗은 게 아니라, 그들의 어금니를 꺾었고, 해로운 일을 행하는 그들 힘을 제거했다. 그는 그들의 교만을 꺾고 그들에게 굴욕을 주었으며, 그들의 무례함을 억제했다. 그리하여 그들의 이 사이에서 겁탈한 물건을 빼어내었고 정직한 자들과 그 재산을 구하여 그들의 먹이가 되지 않도록 했다. 그들이 이 사이에 약탈물을 넣고 그것을 게걸스럽게 삼키려할 때, 다윗이 사자의 입에서 양을 구한 것과 같이 그는 그것을 급히 구출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먹이를 빼앗긴 사자들처럼 성나서 으르렁거릴지라도,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훌륭한 장관들은 이처럼 악을 행하는 자들을 두렵게 하고 제재해야 하며, 무죄한 자를 보호해야 한다. 그러고 이렇게 하기 위해 그들은 그들 자신을 열성과 결의로써 그리고 굴하지 않는 용기로써 무장할 필요가 있다. 재판석에 앉은 재판장은 야전 사령관과 같은 충분한 대담성과 용기를 지닐 필요가 있다.

 

29:8 없음.

 

29:9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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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의 이전의 형통성(3)(욥기 29:18-25)

욥의 형통함을 장식한 것은 그가 그것을 계속 누리리라는 즐거운 전망이었다. 비록 그가 환난에 처했으므로 안심할 수 없다는 것을 대체로 알고 있었으나(3:26 안온도 없고 안식도 없구나), 그는 두려워할 특별한 이유가 없었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 못지 않게 평정을 오래 누릴 만한 이유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Ⅰ. 여기에서 그는 그의 형통함 가운데서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보라(18절). "내가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내 보금자리에서 선종하리라 하였느니라." 그 스스로를 위한 따뜻하고 편한 보금자리를 만든 후에, 그는 그가 죽기까지 그 속에 있는 그를 아무 것도 방해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를 그곳에서 쫓아내지 않기를 바랬다. 그는 그의 보금자리를 불사르게 될 숯을 그 자신이 제단으로부터 결코 훔친 일이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내일도 오늘 같으리라"고 단정했으며, 다윗처럼(시 30:6) "내 산이 굳게 섰으니 요동치 아니하리라"고 생각했다. 다음을 주목하라.

1. 그의 형통함 속에서도 그는 죽어가는 것에 대해 생각했고, 그러한 생각은 그를 불안하게 하지 않았다. 비록 그의 보금자리가 높이 있긴 하지만 그것이 죽음의 화살이 미치지 못하게 해 주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2.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은 헛된 소망으로 그 스스로 기뻐했다.

(1) 그는 오래 살 것이며, "그의 날은 모래같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해변의 모래를 뜻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짧은 시간에 모두 없어질 모래 시계 속에 있는 모래로써 우리의 날들을 계산해야 한다. 선한 사람들도 죽음을 멀리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들에게 진정 좋은 날이 되어 줄 그 험한 날을 매우 멀게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을 살펴 보라.

(2) 그는 그가 살았던 것과 똑같은 번영하는 상태에서 죽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만일 이러한 기대가 하나님의 섭리와 약속을 확고히 믿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라면 그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우리 자신의 지혜로 인한 착상과 세상적인 재물의 견고함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것은 잘못된 것에 근거한 것으로서, 죄로 전락해 버린다. 우리는 욥의 확신이 다윗의 것과 같은 것이고("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시 27:1) 어리석은 부자의 것과 같지 않은("영혼이, 평안히 쉬라." 눅 12:19) 것이기를 바란다.

Ⅱ. 이러한 생각이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를 보라.

1. 그가 집을 살펴 본다면 그는 그가 좋은 터전을 가졌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가축들은 모두 그의 소유였고 그의 이웃의 어느 누구도 그를 힐문하지 않았다. 그의 재산은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지 않았다. 더욱이 그는 그 뿌리에 어떤 벌레가 있음을 느낄 수도 없었다. 그의 일들은 잘 진척되었으며, 퇴노하는 일은 없었다. 그는 명성을 잃지 않고 더욱 많이 얻었다. 그는 그의 영예를 빼앗으려 하거나 그의 능력을 제한하려고 위협하는 경쟁자를 가지지도 않았다. 그가 이것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를 보라(19, 20절). 그는 뿌리가 퍼지지 않고 단단히 뭉쳐져 있어서 뒤집혀질 위험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물로 뻗어 나가" 그것을 흡수하여 열매를 많이 맺고 무성하게 자라 시들 염려가 없는 나무와도 같았다. 그리고 그 자신이 땅의 비옥함으로 축복받은 것처럼 하늘의 온유한 강화로도 축복 받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의 가지는 밤이 늦도록 이슬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섭리는 그에게 은총을 베풀어 그의 모든 기쁨을 편안케 하였고, 그의 모든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위로부터 온 축복 없이 이 땅에서 그들이 끌어온 것으로써 그들의 형통함을 지탱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없도록 하자. 하나님의 은총은 욥에게 계속 베풀어지고 있었고 그것에 의해 그의 영광은 여전히 그 안에 새롭게 남아 있었다.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항상 그를 칭찬하는데 있어서 언제나 새로운 칭찬거리를 가지고 있었고, 낡은 이야기들을 다시 반복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영광이 이처럼 신선하게 보존되고 시들거나 진부해지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꾸준한 선행에 의한 것밖에는 없다. 또한 "그의 활은 그 손에서 날로 강하여졌다." 즉, 그 자신을 보호하고 그를 공격하는 자들을 분하게 만드는 그의 능력은 여전히 커졌다. 그러므로 그는 스바 사람과 갈대아 사람들의 공격도 여느 사람들과 같이 두려워할 이유가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

2. 그의 외부를 살펴 보더라도 그는 좋은 평판과 확고한 신뢰를 얻었다. 그가 그의 적의 능력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또한 그의 친구들의 성실성을 불신할 이유가 없었다. 그가 형통할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들은 여전히 그를 존경했고 또 신뢰했다. 사실상 모든 이웃들에게 법도를 알려 줄 뿐만 아니라 조언도 들려 주는 그가 두려워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실제에 있어서 그가 없이는 아무 것도 행해질 수 없느니 만큼 그를 대적하는 것은 그 어느 것도 결코 있을 수 없었다.

(1) 그는 그의 백성들의 신탁자였다. 그는 신탁자로서의 상담을 받았고 그의 지시는 신탁처럼 준행되었다(21절).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가 없을 때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들으려 그가 가르치기를 잠잠히 기다렸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것을 대항하여 어떤 말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어떤 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말한 후에 그들이 말을 내지 못하였었다"(22절). 이미 끝난 문제에 대해 왜 사람들이 간섭하겠는가?

(2) 그는 백성들의 사랑을 한 몸에 지닌 자였다. 다윗의 백성들이 다윗에게 그러했었던 것같이(삼하 3:36), 그의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가 말하고 행한 모든 것을 퍽 기뻐했다. 그는 모든 이웃 사람들, 그의 모든 종들, 소작인들 그리고 신하들의 충성과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처럼 매우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은 사람은 결코 없었다.

[1] 그가 말을 거는 자들은 행복하다고들 생각했고, 그들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의 지혜로운 이야기가 그를 따르는 자들, 특히 상세하게 중재를 받고 지시받은 자들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하늘의 이슬이라도 메마른 땅에 그처럼 잘 흡수될 수는 결코 없었다. 그의 연설이 그들에게 떨어질 때 그들은 마치 비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것을 기다리면서(22, 23절),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은혜로운 말에 감탄하고는 그것을 잡아 꼭 쥐고는 그것을 격언으로서 간직해 두었다. 그 앞에 항상 서 있어 그의 지혜를 듣게 되는 그 종들은 결코 솔로몬의 지혜가 부럽지 않았다.

지혜로운 말을 귀중히 여길 줄 알고 그것을 갈구하며 그것을 기다리고 마치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것같이(히 6:17) 그것을 마시는 사람들은 지혜로운 사람들이거나 그렇게 될 사람들이다. 욥처럼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어서 그 "조그마한 주장"이라도 큰 영향을 미치고 또 선을 행할 많은 기회를 가진 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해하지 않도록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나쁜 말 한 마디는 매우 치명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2] 그가 미소를 보낸 자들은 더욱 행복한 자들로 여겨졌고, 그들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다(24절). "나 자신이 그들을 기쁘게 여기거나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표하기 위해 내가 함소하면 그것은 너무도 큰 은혜였으므로 그들이 그것을 내가 기뻐하는 것으로 믿지 않았다." 또는 그것은 이처럼 엄숙한 자가 미소하는 것을 보기가 매우 드물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관원의 은혜를 구한다." 욥은 사람들이 그의 은총을 사모하고 높이 평가하던 관원이었다. 훌륭한 방백의 입맞춤을 받은 자는 단지 그로부터 금잔을 받은 자들에 의해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친숙함은 때로 경멸을 야기시킨다. 그러나 욥은 언제고 그 주위에 있는 자들과 허심탄회하게 지낼 필요가 있을 때는 그렇게 했지만, 그것은 조금도 그에 대한 그들의 존경심을 감소하지 않았다. "그들이 나의 얼굴빛을 무색하게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그의 은혜들은 그것을 매우 지혜롭게 베풀었으므로 그것을 천하게 만들지 않았고, 그들은 그것을 매우 지혜롭게 알았으므로 그것을 언제고 받을 수 있는 가치없는 것으로서 여기지 않았다.

(3) 그는 그 백성들의 군주였다(25절). 그는 "그들의 길을 택했고," 키 조종장치 옆에 앉아서 그들을 위해 방향을 잡았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그의 지휘에 그들 자신을 맡겼고, 그의 명령에 복종했다. 이에 대해 아마도 여러 지방에서 군주 정치를 인정했던 것 같다. 욥은 지혜와 성실함에 있어서 그의 모든 이웃 사람들을 능가했으므로 으뜸으로 앉을 수밖에 없었고, 우둔한 자들은 물론 마음이 지혜로운 자의 종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지혜가 잠시 동안만 그 피 속에 흐르고 있었다면 존귀와 권세도 분명 그것에 따랐을 것이고, 그것은 점차로 세습되어졌을 것이다. 주권을 지닌 욥은 다음의 두 가지 역할을 담당했다.

[1] 그는 지휘관 또는 두목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왕이 군중에 거함과 같이" 권위있는 명령을 내렸다. 지혜로운 기질을 가진 사람들은 다스리는 기질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욥은 이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었으며, 필요에 따라 군중에 있는 왕처럼 위엄을 지니고 "가라" "오라" 그리고 "이것을 하라"고 명할 수 있었다(마 8:9).

[2] 그러나 그는 위로하는 사람의 온유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마치 애곡하는 자를 위로하는 것이 그의 직책인 것과도 같이 고통 가운데 처한 자들을 구할 준비가 도어 있었다. 엘리바스 자신도 욥이 이 면에서 매우 훌륭하였음을 인정하였다(4:3). "네가 손이 늘어진 자를 강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 사실을 욥은 어제 그 자신이 애곡하는 자가 되었을 때, 즐겁게 회고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전에 다른 사람들을 위로했던 것으로써 우리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보다는 우리가 전에 위로 받았던 것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이 더 쉽다는 사실을 우리는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는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욥을 그의 능력과 형통함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원형과 상징으로 간주해도 좋을 것이라고 본다. 우리 주 예수는 욥과 같은 가난한 자의 왕으로서 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하셨고 세상적인 축복과는 인연이 먼 분이시다. 시편 72편 2절 이하를 보자. 그러므로 우리는 그에게 귀를 기울이고 그를 우리 마음에 으뜸으로 앉으시도록 하자.

 

29:19 없음.

 

29:20 없음.

 

29:21 없음.

 

29:22 없음.

 

29:23 없음.

 

29:24 없음.

 

29:25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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