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성실함을 단언하는 욥(욥기 27:1-6)
여기에 나온 욥의 이야기는 솔로몬의 잠언의 제목인 "비사"(parable)란 말로 일컬어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엄숙하고 무거우며 매우 교훈적인 이야기이며, 그는 권위를 가진 자로서 말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스리다" 또는 "주권을 가지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단어에서 온 것이다. 그것은 욥이 이제 그의 반대자들을 물리치고서, 그들을 당황케 한 자라고 말하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듣는 자들을 통솔할" 줄 아는 사람을 훌륭한 설교자라고 말한다. 욥은 여기에서 그러했다. 욥과 그의 친구들간에 오랫동안 다툼이 있었다. 그들은 그 문제를 타협할 뜻이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므로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기" 때문에(히 6:16), 욥은 여기에서 그 자신의 결백함을 지지하기 위해 그가 말했던 것들을 엄숙히 맹세하면서 논쟁을 멎게 하고 있다. 그리고 만일 그가 거짓말을 했다면 그 자신이 모든 책망을 받겠다고 말하고 있다. 다음을 살펴 보자.
Ⅰ. 그의 맹세의 형식을 살펴보자(2절). "나의 의를 빼앗으신 하나님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1. 여기에서 욥은 하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그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항상 살아계신" 영원한 하나님을 의미한다)이라고 지극히 높여 부르고 있으며 그를 유일하신 최고의 심판관으로 여겨 그에게 호소하고 있다.2. 그러나 욥은 하나님께서 심판을 피하시고(즉, 욥에게 이 논쟁을 판단해 주어 그를 옹호하는 일을 행하지 아니하시고), 그의 친구들이 그를 책망하게 되는 원인인 그의 환란을 계속되게 함으로써 하나님은 그 자신의 결백함을 밝히기도 전에 그가 기대한 기회를 없애 버렸다고 말하여, 하나님에 대해 가혹하고도 온당치 못하게 말하고 있다. 엘리후는 이 말에 대해 그를 책망했다(34:5).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모든 행사에 의로우시므로 인간의 판단을 받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즉시 은총을 보이시지 않을 때 우리는 얼마나 쉽게 실망하며, 얼마나 풀이 죽고 곧 그의 영혼을 괴롭게 하였다고 원망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나타나 주시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를 대적하셨다 하고 있으며, 이처럼 무거운 고통을 그에게 가하심으로써 그의 생명과 그 모든 위안을 몹시 상하게 했다고 원망하고 있다.
우리는 조급한 마음 때문에 우리 자신의 영혼을 괴롭게 하며, 그리하고서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괴롭게 하셨다고 불평한다. 그러나 욥은 그의 주장과 하나님의 뜻이 모두 선함을 얼마나 확신하고 있는가를 보라. 그리고 비록 하나님께서 그에게 노하신 것같이 보이고 또 현재 그를 대적하여 행하시는 것 같을지라도 그는 기쁘게 그의 고소를 하나님께 맡길 수 있었다.
Ⅱ. 그가 맹세한 내용을 살펴 보자(3, 4절).
1. 욥은 결코 "불의를 말하지 아니하며, 궤휼을 발하지" 아니하려 했다. 일반적으로 그는 거짓된 방법은 용납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논쟁에서도 그가 생각한 그대로를 줄곧 말할 정도로 그는 거짓말하거나 그의 양심을 그르치는 일은 결코 하려하지 않았다. 그는 어떤 이론을 주장하거나 어떤 사실을 단언한 것이 아니라, 그가 사실이라고 믿는대로 말하곤 했다. 뿐만 아니라 진리를 말하는 것이 그에게 불리하다 하더라도 그는 그 진리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의 친구들이 그를 사곡한 자라고 책망했을 때에도 그는 그 모든 심문자들이 요청한다면 맹세 위에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한편으로 욥은 그 자신이 유죄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반드시 그 비난을 거부하지 않고 그 사실, 모든 사실이 오직 사실인 것만을 밝히려 했을 것이며, 자신의 사곡함에 대한 수치를 스스로 짊어졌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 그는 자신의 결백함을 스스로 인식하고 있었고, 또 그 자신이 그의 친구들이 표현한 것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의 결백함을 저버리려 하지 않았고, 또한 그 자신이 무죄한 사실에 대해 스스로를 책망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들의 부당한 비난의 고통 가운데 스스로를 그릇되게 정죄하려 하지 않았다. 우리가 우리 이웃에게 거짓된 증인이 되지 않아야 한다면 우리 스스로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지 않아야 한다.
2. 욥은 살아있는 한 이 결심을 더욱 지지하려 했다(3절). "나의 생명이 아직 내 속에 완전히 있다." 죄를 대적하는 우리의 결의는 이처럼 확고해야 하며, 생명을 위하는 결의 또한 그러해야 한다. 그러나 의심스럽거나 무관심한 일에 대해서는 이처럼 단호한 태도를 지닌다는 것은 안전하질 못하다. 우리는 무슨 이유로 우리의 마음이 변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지금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을 우리에게 게시해 주실 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분명한 사실 속에서 우리는 결코 사악한 말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나치게 확신해서는 안 된다.욥이 그러한 결심을 가지게 된 이유 중 그 일부가 여기, 우리의 생명이 언제까지나 지속되지는 않으리라는 말 속에 내포되어 있다. 우리는 조만간에 마지막 숨을 몰아 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명이 우리 속에 있는 한 우리는 결코 사악하고 거짓된 숨을 내쉬어서는 안 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호흡이 끊어질 때 우리를 대적하게 될 어떤 일을 말하거나 행하도록 우리 스스로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은 하나님의 기운이라고 일컬어진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을 우리 안에 불어넣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왜 우리가 사악한 말을 해서는 안 되는가 하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 우리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호흡하고 있는 한 우리는 그를 찬미해야 한다.
Ⅲ. 그의 맹세에 대한 해명에 대해 알아 보자(5, 6절). "나는 단정코" 나 자신을 사곡한 자로 인정함으로써, 나를 무자비하게 비난한 "너희를 옳다하지 아니하겠고, 죽기 전에는 나의 순전함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 내가 내 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라."
1. 욥은 언제나 정직한 자가 되려 했고, 그의 결백함을 굳게 지키려 했다. 그리고 그의 아내가 사탄처럼 하나님을 저주하라고 권했을 때에도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2:9). 욥은 여기에서 그가 죽어가고 있으며 죽음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가 비록 이 세상에서 가졌던 것을 모두 읽었을지라도, 결코 그의 믿음을 버리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있다. 죽음에 대한 가장 훌륭한 준비는 죽음에 굴하지 않고 우리의 결백함을 지키는 것이다. "죽기 전에는" 즉 "비록 내가 이 환난으로 인해 죽을지라도 나의 하나님과 내 믿음에 대한 확신은 버리지 않으리라.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믿으리라."2. 욥은 그가 정직한 자였다는 사실을 항상 지지하려 했다. 그는 양심과 위안과 그의 결백함에 대한 신뢰를 제거하려 하지 않았고 결코 버리려 하지 않았다. 즉 그는 끝까지 그것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내가 항상 선하려 했고, 알고 있는 의무를 태만히 하거나 알려진 죄를 범하는 일은 내 자신이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시며 또 나 자신의 마음이 알고 있다. 이것이 나의 기쁨이며, 아무도 내게서 그것을 빼앗을 수 없다. 나는 결코 나의 의를 거스려 거짓말 할 수 없다." 흔히 올바른 사람들은 위선자라고 비난받으며 정죄받는다. 그러나 그러한 비난을 대담하게 견디어야 하며, 그것에 의해 위축당하거나 그들 자신이 그러한 책망을 받을 만큼 나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한 사도처럼(히 13:18),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라고 말해야 한다.
이것으로 너의 단단한 방어벽을 삼고
계속 네 양심의 결백함을 지키라.
욥은 그의 친구들의 책망을 매우 원망했다. 그러나(그는 말하고 있다) "내 마음이 나를 책망치 아니하리라." 즉 "나는 결코 내 마음으로 스스로를 책망하지 않고 악의가 없는 양심을 지킬 것이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우리가 책망을 받을 만한 이유가 있을 때에도 우리 마음으로 우리를 책망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하나님과 대리자인 양심을 모욕하는 것이며, 우리 스스로를 그르치는 것이다. 사람이 죄를 범하였을 때 그것에 대해 그 마음으로 그를 징계하는 것은 선한 일이기 때문이다(삼하 24:10).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결백함을 확고히 지키고 있는 한 우리의 마음으로 우리를 책망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하는 것은 악한 영("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는 질문을 던져 선한 그리스도인들을 유혹하는)의 계획을 좌절시키는 것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됨을 증거해 주는 선한 영의 일을 돕는 것이다.
사곡한 자의 형편(욥기 27:7-10)
Ⅰ. 욥은 그것을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는가를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사곡한 자와 악인의 형편은 그 누구보다 가장 비참할 것이 틀림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7절). "나의 대적은 악인같이 되기를 원하노라." 이것은 "왕을 미워하는 자에게 응하기를 원하노라"(단 4:19) 하는 것과 같이 잘 알려진 표현이다. 욥은 어떤 악한 길에 빠지거나 그 속에서 즐거워하는 것과는 매우 멀었기 때문에, 만일 그가 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가장 나쁜 적에게 가장 큰 재난이라고 생각되는 일을 간구할 수 있도록 그에게 허용되어졌다면 그는 악인의 상황이 그 대적에게 내려지기를 원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 이상 나쁜 것은 바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악인이 되거나, 악인이 아닌 자가 악인처럼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가 합법적으로 바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우리는 언제나 매우 화려해 보이고 또 겉으로 흥하는 악인의 상태보다는 차라리 걸인이나 버림받은 자, 노예, 또는 그 외의 상태를 모두 택해야 한다.
Ⅱ. 그는 우리에게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알려 주고 있다.
1. 사곡한 자의 소망은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8절). "사곡한 자가 무슨 소망이 있으랴?" 빌닷(8:13, 14)과 소발(11:20)은 이러한 사실을 책망했었는데, 여기에서 욥도 그들과 동의하고 있으며, 사곡한 자의 소망이 끊기리라는 것을 그들처럼 매우 확고히 단언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왜 그가 그의 결백함을 떠나지 않고 계속 그것을 지지하는가에 대한 적당한 이유가 되고 있다.악한 사람들 특히 사곡한 자들의 비참한 상태를 깊이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올바른 자가 되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우리가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원히 파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의 올바름에 대한 위로를 주는 증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가장 큰 관심이 되는 일이 모호한 가운데 있다면 우리가 어찌 편안할 수 있겠는가. 욥의 친구들은 그에게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소망에 불과하다는 것을 설득시키려 했다(4:6). "그렇지 않다." 욥은 말하고 있다. "나는 결코 그런 썩은 터전 위에 집을 지을 만큼 어리석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곡한 자에게 무슨 소망이 있으랴?"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일을 살펴보자.
(1) 사곡한 자는 착각을 한다. 그는 "이익을 얻었으며," 소망을 지니고 있다. 이것이 그의 밝은 면이다. 그는 자신의 사곡함으로 인해 얻을 수 있었고, 사람들의 찬사와 박수 갈채를, 그리고 이 세상의 재물을 얻을 수 있었다. 예후는 그의 사곡함으로 해서 나라를 얻었고, 바리새인들은 많은 과부의 집을 얻었다. 이러한 이익 위에 그는 그러한 소망을 세워 놓았다. 그는 저 세상에서도 훌륭한 상태에 있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그는 이 세상에서 그것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제 나름대로 스스로를 축복한다.
(2) 사곡한 자는 진실을 깨닫게 된다. 그는 마침내 그 자신이 비참하게 속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1]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의지와는 반대로 완강히 "그의 영혼을 취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라"(눅 12:20). 하나님은 심판관으로서 심문하시고는 그의 영원한 상태를 결정하시기 위해 영혼을 취하신다. 그러면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떨어져 즉시 처리될 것이다.
[2] 그때에 그의 소망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은 공허한 것이 되고 거짓이 될 것이다. 즉 그것은 그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할 것이다. 그가 소망을 두었던 이 세상의 재물도 그는 뒤에 두고 떠나야 한다(시 49:17). 그가 바라던 저 세상의 행복도 분명 사라질 것이다. 그는 하늘 나라에 가기를 원하나 부끄럽게도 좌절될 것이다. 그는 외적인 직업이나 특권 그리고 솜씨를 진술할 것이나, 그의 모든 진술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선언될 것이다. "나를 떠나라 내가 너를 통 알지 못하노라." 그러므로 전체적으로 볼 때, 사곡한 자는 그의 모든 이득과 소망에도 불구하고, 죽어가는 순간에는 비참하게 될 것은 분명한 일이다.
2. 사곡한 자의 기도는 청종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9절). "환난이 그에게 임할 때에 하나님이 어찌 그 부르짖음을 들이시랴?" 하나님은 결코 듣지 않으실 것이다. 그가 들으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다. 만일 그가 참으로 회개한다면 하나님은 그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를 받아들이실 것이다(사 1:18). 그러나 만일 그가 계속하여 돌이키지 않고 회개함이 없다면, 그는 하나님의 은총을 발견하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다. 다음을 살펴 보자.
(1) 환난이 분명히 그에게 임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의 환난은 흔히 계속 번영하는 가운데 매우 안심하고 있는 자들을 놀라게 한다. 그러나 그가 세상과 그 속에 있는 모든 즐거움을 떠나야만 할 때 죽음은 올 것이며, 그것과 더불어 환난도 올 것이다. 그 큰 날의 심판이 임할 것이다. 그리하여 두려움이 사곡한 자를 놀라게 할 것이다(사 33:14).
(2) 그때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기도할 것이고, 그리고 진심으로 기도할 것이다. 번영할 때 하나님을 무시하여 전혀 기도하지 않거나 기도에 냉담하고 부주의했던 자들은 환난이 올 때 그에게 호소하는 진지한 태도로서 울부짖을 것이다.
(3) 그러나 그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들으시겠는가? 이 생의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은 마음에 죄악을 품고(시 66:18), 우상을 섬기는 자들(겔 14:4), 그리고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는(잠 28:9) 자의 기도도 듣지 아니하시겠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라"(삿 10:14). 장차 올 심판의 날에 하나님께서 사곡하게 살고 죽은 자들의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할 것은 분명하다. 그들의 서글픈 탄식은 동정받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희의 재앙을 비웃으리라." 그들의 성가신 간청은 모두 내쫓길 것이며, 그들의 탄원은 거절당할 것이다. 공명정대한 심판은 치우침이 있을 수가 없으며, 또한 그 판결은 결코 취소될 수 없다. 마태복음 7장 22, 23절과 누가복음 13장 26절을 보라. 그리고 마태복음 25장 11절에 나오는 어리석은 처녀들의 경우를 보라.
3. 사곡한 자의 믿음은 위안이 되지 않으며, 꾸준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10절). "그가 어찌 전능자를 기뻐하겠느냐?" 언제나 그는 그렇지 못하고(왜냐하면 그의 기쁨은 하나님 안에 있기보다는 세상적인 이득과 정욕의 즐거움에 있기 때문이다), 환난의 날에는 특히 그러하다. "그가 항상 하나님께 불러 아뢰겠느냐?" 그렇지 않다. 형통함 가운데에서 그것은 결코 하나님께 불러 아룀이 없을 것이고, 그를 무시할 것이다. 역경 속에서 그는 하나님을 부르지 않고 그를 저주할 것이다. 그는 믿음으로써 아무 것도 얻지 못하거나, 손실당할 위험에 놓여 있을 때 그는 믿음에 싫증을 느낄 것이다.
(1) 비록 믿음을 고백할지라도 그 속에서 즐거움을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끈기 있게 밀고 나가지 못하는 자들은 사곡한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을 고역으로, 혹은 하찮은 것으로, 지루한 것으로 간주하는 자들과 그것을 냉대하는 자들은 사곡한 자들이다. 필요할 때만 그것을 이용하고 그 필요가 충족되었을 때에는 그것을 밀어놓는 자들, 그것이 유행하거나 헌신적인 충동이 지속된 동안에만 하나님을 부르려 하고, 그들이 다른 것에 집념하거나 그 격한 감정이 끝났을 때에는 그것을 내던지는 자들은 사곡한 자들이다.
(2) 사곡한 자들이 믿음을 끈질기게 밀고 나가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그 속에서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은 언제나 그를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믿음 안에서 기쁨을 발견할수록 우리는 더욱 굳게 그것을 지지할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얻지 못한 자들은 쉽게 관능적인 즐거움에 유혹되어 그들의 믿음을 떠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 생애의 시련에 의해 쉽게 파멸당하며 그들의 믿음을 저버릴 것이며, 항상 하나님을 부르지 않을 것이다.
악인의 산업(욥기 27:11-23)
욥의 친구들은 악한 사람들 특히 강포자들에게 따르는 비참함과 멸망을 많이 보아 왔다. 그리고 욥은 한창 논쟁의 열기에 들떠 있을 동안 그들의 형통함을 매우 많이 그리고 매우 자신을 가지고 말했다. 그러나 이제 싸움의 열이 거의 끝났을 때, 그는 기꺼이 그가 어느 점에서 그들의 의견과 일치하고 있으며 그의 의견과 그들의 의견이 어느 점에서 다르다는 것을 시인하고 있다.
1. 악한 사람들은 비참한 자들이며 하나님께서는 분명 잔인한 강포자들을 기억하시리라는 것, 그리고 조만간에 어떠한 방법으로도 하나님의 의는 그들의 하나님께 모욕한 그 모든 것과 그들의 이웃에게 행한 모든 잘못됨을 갚아 주시리라는 점에서 욥은 그들의 의견에 동의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격렬한 논쟁 가운데서도 완전히 동의함으로써 충분히 확증되었다.2. 그러나 "이러한 점"에서 그들의 견해는 달랐다. 그들은 이 응당한 심판이 악한 강포자들에게 곧 그리고 눈에 보이게 임하며, "악인은 그 일평생에 고통을 당하며" 형통함 속에서도 "멸망시키는 자가 그에게 임하고, 그는 부요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그 가지가 푸르지 못하며 그의 날이 이르기 전에 그 일이 이룰 것이라"는 주장을 고집했다(엘리바스는 15장 20, 21, 29 32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또한 "그 강한 걸음이 곤하여지고, 무서운 것이 사방에서 그를 놀래며"(빌닷은 18:7, 11 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가 재물을 다시 토할 것이고" 또한 "풍족한 때에도 곤액이 이르리라"(소발은 20:15, 22 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장했다. 그러나 욥은 많은 경우에 심판이 그들에게 곧 임하지 않고, 어느 기간동안 연기된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그 보복은 천천히 임하게 된다는 것을 그는 이미 보여 주었고(21, 25장), 이제 여기에서 그는 그것이 분명하고 엄하게 그리고 조금은 용서됨이 없이 가해질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Ⅰ. 욥은 여기에서 이 문제의 진실을 밝히려고 노력하고 있다(11, 12절).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겠다." 우리는 약하고 초라한 자들일지라도, 그리고 또한 까다로운 자들이라도, 만일 그들이 진실되고 선한 것을 가려낸다면 그들로부터 배우기를 멸시해서는 안 된다. 다음을 알아 보자.
1. 욥은 그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려고 했는가를 알아보자. "전능자의 뜻" 즉 "악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은 그와 함께 감추어진 것이며, 너희가 성급히 판단할 수 없는 것이지만 너희에게 가르치겠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그의 섭리의 통상적인 방법도 가르치겠다." 욥은 이러한 것들을 "숨기지 아니하리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숨기시지 않은 것을 우리는 우리가 가르쳐야 할 자들에게 감추어서는 안 된다.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속한 일들이 계시되었다."2. 욥은 그들에게 어떻게 가르치려 했는가를 알아 보자. "하나님의 하시는 일로써" 즉 그의 힘과 도움으로 가르치려 했다.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의무를 지닌 자들은 그들을 가르치고, 그들의 귀를 여시며(사 50:4), 그들의 입을 열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강한 손으로 가르치시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능력을 갖춘 자들이다(사 8:11).
3. 왜 그들은 그가 가르치고자 한 것들을 배워야만 했는가를 알아보자(12절). 그것은 그들 자신의 통찰력에 의해 확증된 것이었다. "너희가 다 이것을 보았거늘"(그러나 우리가 듣고 보고 안 것들을 우리는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배운 것을 온전케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그에 관한 옳은 판단을 내릴 때가 되었거늘-"어찌하여 아주 허탄한 사람이 되어, 내가 환난 가운데 있다는 이유로 나를 악인으로서 정죄하는가? 올바르게 이해되고 적용된 진리는 우리의 실수로 인해 야기된 마음의 허탄함을 치료해 줄 것이다. 그가 이제 그들에게 특별히 제시해 놓고 있는 것은 악인이 하나님께 얻을 분깃 특히 강포자"에 관한 것이다(13절). 20장 29절과 비교해 보라. 이 세상에서 그들이 얻을 분깃은 재물과 출세가 될 수도 있으나, 하나님에게서 얻을 분깃은 멸망과 비참함이다. 그들은 어떤 세상적인 능력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자들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능자는 그들을 다루실 수 있다.
Ⅱ. 욥은 악한 사람들이 어떤 면에서는 형통할지도 모르나, 바로 그 속에서 멸망이 그들을 따른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진상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분깃이고 그것이 그들의 산업이며 또한 그들이 따라야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1. 그들은 자손대에서도 번영할 수 있으나 멸망이 그들을 따른다. 아마도 "그 자손이 번성하거나"(14절), "존귀케" 될는지도(어떤 사람들의 견해대로) 모른다. 즉 그들은 매우 수가 증가되고 그들의 영예와 재산도 불어날는지 모른다. 세상적인 사람들은 "자녀로 만족하며"(시 17:14), 거기 난외에 있는대로 "그들의 자녀는 풍족하다."고 일컬어진다. 그들 가운데에서 그 부모들은 살기 원하며, 그들의 출세 가운데에서 존경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들이 더 많은 자손을 남기고, 더 많은 번영을 그들에게 물려줄수록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 곧 그의 세 가지 쓰라린 심판인 "칼, 기근, 온역"의 화살이 더욱 잘 겨누어 질 수 있는 과녁을 남겨놓는 것이 된다(삼하 24:13).(1) 그들 중 어떤 자들은 칼에 의해 죽을 것이다. 그것은 싸움터의 칼일지도 모르며(그들은 창 27:40 에서와도 같이 칼을 믿고 생활하며, 그러한 자들은 언젠가는 칼에 의해 보통 죽임을 당한다), 그들의 범죄에 대한 심판의 칼이거나, 그들의 재산을 노리는 살인자의 칼일지도 모른다.
(2) 또 어떤 자들은 기근에 의해 죽을 것이다(14절). "그 후예는 식물에 배부르지 못할 것이다." 그는 그들을 위해 많은 재산을 쌓아두었다고 생각할 것이나, 그들은 일상 생활의 필요한 것들을 얻지 못할 정도로, 결코 편히 살아 갈 수 없을 정도로 빈곤해질 것이다. 그들은 너무 궁핍하여 필요한 식량을 지니고 있지 못할 것이며, 너무 탐욕스럽고 또는 너무 만족할 줄 모르기 때문에 그들이 무엇을 얻든지 결코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이 전에 사용했던 것처럼 그리 풍족하거나 그리 맛있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리라"(학 1:6).
(3) "그 남은 자는 염병으로 묻히리라." 즉 "사망"이라 일컬어지는(계 6:8) 염병에 걸릴 것이며, 그들이 죽자마자 정식절차를 밟지 않고 몰래 그리고 급히 서둘러 "나귀의 장례식으로써 묻을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그의 과부들이 울지 못할 것이다." 즉 그들은 그 죽은 자를 위해 애도 할 기회도 얻지 못할 것이다. 또는 이 악한 자들이 살아 있을 동안에도 별 호감을 못 얻었으므로 죽었을 때도 애도함을 얻지 못하며 그 과부들끼리도 그들이 사라진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사실도 볼 수도 있다.
2. 그들의 재산은 흥할지도 모르나 멸망이 또한 "그들을" 뒤따른다(16-18절).
(1) 우리는 그들이 많은 돈과 식기, 옷 그리고 가구를 지니고 있으리라고 추측할 것이다. "그가 은을 티끌같이 많이 쌓고 의복을 진흙같이 예비한다." 즉 그들은 흙더미처럼 풍족하게 의복을 쌓아둔다. 또는 그들이 짐스러울 정도로 많은 의복을 지니고 있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들은 "볼모잡은 것으로 무겁게 짐진 자"들이다(합 2:6). 세상적인 사람들의 관심과 일이 무엇인가 보라. 그것은 세상적인 재물을 쌓아두는 것이다. 많이 지닌 자들은 더 많이 가지기를 원하며, 마침내 은은 녹 쓸고 옷은 좀 먹게 된다(약 5:2, 3). 그러니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는 그것으로도 더 나아짐이 없을 것이다. 비록 그가 곧 빼앗기거나 약탈당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죽음이 그를 약탈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 예비한 것을 의인이 입고 그 은은 무죄자가 나누어" 가지도록 명하신다.
[1] 그들은 그것을 얻은 후 그들끼리 그것을 나눌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섭리가 그렇게 되도록 명하기 때문에, 악한 자들이 정직하지 못한 방법으로 취한 재물을 선한 자들이 정직하게 얻게 될 것이다. "죄인의 재물은 의인을 위하여 쌓이느니라"(잠 13:12). 하나님은 그가 원하시는대로 사람들의 재물을 분배하시며, 흔히 그들의 의지를 거스려 행하신다. 악인이 미워하고 박해한 의인이 그의 모든 수고를 다스리게 될 것이며, 그로부터 강제로 빼앗긴 것들을 합당한 때에 되찾게 될 것이다. 애굽 사람들의 보물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해 노고하도록 하시는 것을 관찰하였다(전 2:26). 즉 "하나님이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저로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게 하신다."
[2] 그들은 그것으로 좋은 일을 행할 것이다. 무죄자는 악인이 은을 모은 것처럼 그것을 쌓아두지 않고, 가난한 자들에게 주기 위해 그것을 "일곱 또는 여덟 분깃으로 나눌" 것인데 이것이 가장 안전하게 쌓아두는 것이다. 돈은 마치 비료와도 같아서 분산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 하나님께서 선한 자들을 풍족하게 하실 때 그들은 그들 자신이 청지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것의 전말을 상세히 밝혀야 한다. 악한 자들이 그릇된 방법으로 취하여 그들 가족에게 저주를 임하게 한 그 재물을, 선한 자들이 선하게 이용함으로써 그들 가족에게 축복을 가져오게 한다. "중한 변리로 자기 재산을 많아지게 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 불쌍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그 재산을 저축하는 것이니라"(잠 28:8).
(2) 우리는 그들이 그들 스스로를 위해 튼튼하고 당당한 집을 지었으리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집은 마치 좀벌레가 파먹어 들어가는 낡은 옷과 같아서 곧 흔들리게 될 것이다(18절). 그는 좀벌레처럼 그 속에서 매우 안심하고 있으며 어떤 위험도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빨리 무너져 없어지는 "상직군의 초막"처럼 잠시밖에 지탱하지 못할 것이며, 그의 처소는 더 이상 그를 아랑곳하지 않을 것이다.
3. 비록 그들이 건강하고 편하게 오랫동안 살더라도, 결국 멸망이 그들을 따를 것이다(19절). 그들은 "부자로 누워" 잠을 자고 그의 풍족한 재물 가운데에서 휴식을 취할 것이다("영혼아, 편히 쉬거라"). 또한 그 부자는 그의 견고한 성에 누워 있으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매우 행복하고 편하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즉, 그는 그의 재물을 즐길 만한 마음의 평정을 얻지 못할 것이며, 안정과 만족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그에 대해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편안한 잠자리를 이루지 못한다. 그는 누우나 "그의 배부름으로 자지 못할 것이며," "노동자의 잠처럼 결코 달지도 못할 것이다"(전 5:12). 그는 누우나 새벽까지 이리저리 뒤척인다. 그리고 나서 "눈을 뜬즉 없어졌으리라." 즉, 그는 그 자신과 그가 소유한 모든 것들이 눈 깜빡할 사이에 없어진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의 근심은 두려움을 더욱 자극하여 그를 불안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가 침상에 누운 그를 살펴 볼 때, 우리는 그곳에서 그가 행복한 상태에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임종 때의 그의 모습을 우리가 지켜본다면, 우리는 그가 죽음 속에서 그리고 죽음 후에 얼마나 비참한 가를 보게 될 것이다.
(1) 그는 비참하게 죽어간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두려움의 왕이다(20, 21절). 어떤 불치의 병이 그를 잡을 때 그는 얼마나 놀라겠는가! "두려움이 물같이 그를 따라 미칠 것이며," 그는 마치 밀물에 포위된 자같이 될 것이다. 그는 이 세상을 떠난다는 생각에 몸을 떨고, 저 세상으로 옮겨간다는 생각에 더욱 두려워한다. 이것은 솔로몬의 관찰과도 같이 그에게 "번뇌와 병과 분노"를 가져다 준다(전 5:17).
[1] 이 두려움은 그를 침묵과 암담한 절망으로 몰아 넣는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진노의 폭풍, 죽음의 폭풍이 아무도 모르는 또는 아무도 그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은 "밤에 그를 빼앗아 갈" 지도 모른다.
[2] 또는 모두가 알 수 있는 소란스러운 절망 속으로 몰아 넣는다. 그리고 나서 "그를 날려보내는" 즉, 폭풍과 같이 거세고 소란스러우며 매우 무서운 동풍이 그를 처소에서 몰아내는 일이 생긴다. 믿음이 깊은 자에게는 죽음이 그를 하늘 나라로 데려다 주는 고마운 일진광풍과도 같으나, 악인에게는 혼돈과 경악 속에서 그를 파멸로 몰아넣는 동풍, 광풍, 그리고 폭풍과도 같다.
(2) 그는 죽은 후에도 비참하다.
[1] 그의 영혼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진노 아래 놓이게 되며, 그것은 그에게 죽음이 다가오게 하여 그를 이러한 경악 속으로 몰아넣은 바로 그 진노의 두려움이다(22절). "하나님이 그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쏘시리라." 그가 살았을 동안 그는 자비를 베푸는데 인색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참으시는 날이 끝났을 때, 하나님은 아끼시지 않고 그에게 복수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해 쏘실 때, 그 누구도 그것을 피해 달아날 수 없으며, 또한 그것을 막아낼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이 가나안 사람들에게 "하늘에서 큰 덩이 우박을 내리시어"(수 10:11), 그들에게 무서운 벌을 가하셨다는 것을 읽는다. 그러나 "납조각"처럼(슥 5:7, 8) 죄인의 양심 위를 무겁게 내리누르는 그의 진노는 어떠한 것인가? 그 저주받은 죄인은 하나님의 진노가 그에게 임하려는 것을 보고서, 그의 손에서 열심히 벗어나려 하나, 그는 결코 벗어날 수가 없다. 지옥의 문은 굳게 잠겨 있고 깊은 심연도 막혀 있다. 그리고 바위와 산으로 된 은신처의 도움을 구하는 것도 헛된 일이 될 것이다. 그를 받아들이기 위해 팔을 펼치고 있는 거룩한 은총의 팔로 돌아오라는 설득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자들은 거룩한 진노의 팔로부터 결코 달아나지 못하게 될 것이며, 그 팔은 곧 그를 잡아 멸망시킬 것이다.
[2] 모든 사람들은 의로운 분노와 함께 그를 기억할 것이다(23절). "사람들이 박장하며 대소할 것이다." 즉, 그들은 그를 죽게 한 하나님의 심판을 기뻐할 것이며, 그의 멸망을 즐거워할 것이다. "악인이 패망하면 기뻐 외치느니라"(잠 11:10). 하나님께서 그를 묻으실 때 사람들은 그를 그의 처소에서 몰아낼 것이며, 그의 이름 위에는 영원한 치욕의 낙인이 찍힐 것이다. 그가 아첨을 받고 찬미를 받던 바로 그 장소에서 그는 비웃음을 당할 것이며(시 52:7), 그의 유골은 짓밟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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