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대답(욥기 23:1-7)
욥은 그 자신이 친구들에 의해 손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 그는 비참한 상태에 있지만 결코 이 고소를 포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그에 대한 마지막 판단을 맡기려고 하지 않고 있다.
Ⅰ. 욥은 그 자신의 분노와 고통에 대한 표현을 정상화하고 있다(2절). "내가 오늘도 혹독히 원망하는" 것을 시인하노라. 그런데 그것은 내가 당하고 있는 환난, 다시 말해서 원망하도록 만드는 동기가 그만큼 혹독하기 때문이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상심하나이다"(애 3:19, 20). "오늘도 나의 원망이 패역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나이다(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그의 친구들은 슬픔을 나타내는 욥의 순수한 표현을 하나님께 대한 그리고 그의 섭리에 대한 비난으로 간주하고 있었으며, 그것을 "패역한 것"이라 불렀다. 그러나, 욥은 말했다. "나는 과장되게 원망하지 않는다.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중함이니라. 오늘도 너희가 나를 설득하고 위로하기 위해 말을 많이 하였지만, 그리고 그것 때문에 전보다는 조금 나았을는지 모르지만 나는 여전히 내 몸의 고통과 심령의 아픔으로 해서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심술궂은 어린 아이들처럼 우리가 맞은 것보다 더 아픈듯한 신음을 낸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잘못 행하는 것이 된다. 심술궂은 아이들은 아무 이유도 없이 울 때 그 울음을 달래기 위해 무엇인가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맞은 것을 꾹참고 신음 소리를 적게 낸다고 해도 손해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조금 말할수록 더 빨리 고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Ⅱ. 욥은 친구들의 책망을 떠나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 호소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그가 사곡한 자가 아니었음이 입증되고 있다. 만일 그가 사곡한 자였다면 감히 하나님께 호소하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경우에 "그를 판단하실 이는 주님이시므로," 그는 사람의 판단을 중히 여기지 않았고(고전 4:3, 4), 때가 이를 때까지 기꺼이 기다리자고 했다. 이와는 달리 욥은 매우 초조했다. 그러므로 그는 빨리 심판의 날이 와서, 그의 호소가 특별 명령에 의해 곧 심판 되기를 열렬히 원했던 것이다. 사도들은 환란당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심판자가 오시는 날을 참을성 있게 기다리라는 격려를 강력히 해 줄 필요를 느꼈다(약 5:7-9).
1. 욥은 하나님의 심판이 공정하다는 것을 매우 확신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그 앞에 호소하기를 열망했다(3절). "내가 어찌하여 하나님 발견할 곳을 알꼬!" 이것은 경건한 영혼의 호흡이 죄로 인해 하나님을 잃게 되었고, 만일 다시 그의 은총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영원히 멸망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적당하게 표현한 문장으로 볼 수도 있다. "내가 어찌하여 그의 은총을 회복할 수 있을꼬! 어떻게 내가 그와 언약을 맺고 그와 교제를 나눌 수 있을까!"(미 6:6, 7) 이것은 불쌍하게 버림받은 한 영혼의 절규이다. "내 영혼을 사랑하시는 자를 보았는가? 내가 어찌하여 하나님 발견할 곳을 알꼬1 그에게로 길을 열어 놓으신 하나님이 나를 그곳으로 가도록 명하시고 그 안에서 나를 인도하셨으면!"그러나 여기에서 욥은 그의 친구가 그를 해한 것과 그가 하나님께 나아가 심판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모르는 것을 매우 대담하게 원망하고 있는 것 같다. 만일 그가 그 길을 안다면 그는 그가 앉아 계시는 곳까지 가서, 그것을 요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과 심판을 기다리는 인내는 우리의 지혜이며 의무이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깊이 이 문제를 생각한다면 거룩한 두려움이나 떨림이 없이 죽음과 심판을 열렬히 원한다는 것은 어리석고 죄가 되는 일로서, 우리에게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 우리는 죽음과 심판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가? 우리는 때가 되었을 때 서두를 필요가 없도록 그것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있는가? "화 있을 진저" 열렬하게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암 5:18).
2. 욥은 그의 호소가 선한 것임을 매우 확신하고 있으므로, 그것이 하나님의 법정에서 밝혀지기를 열망하고 있다(4절). "내가 그 앞에서 호소하며, 그것의 진상을 밝히리라. 내가 합당한 방법으로 나의 신실함을 증거하기 위해, 변백할 말을 입에 채우고 그것을 증거하리라." 우리는 이것을 기도의 의무에 적용시킬 수 있다. 우리는 기도 속에서 "성소에 들어갈" 심지어 은혜의 보좌의 발등상에까지 나아갈 "담력을 얻는" 것이다. 우리는 접근할 수 있는 자유 뿐만 아니라, 말할 자유도 얻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허락을 얻었다.(1) 우리는 가장 합당하다고 생각되는 방법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세히 "호소하고," 모든 문제를 말씀드리고, 그 앞에 우리의 모든 슬픔을 아뢸 수 있다. 우리는 겸손하고 거룩한 영혼이 하나님을 대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이 세상의 왕들을 대할 수는 없다.
(2) 귀찮을 정도로 청할 수 있다. 우리는 기도하고 탄원하고 청할 뿐만 아니라, 논쟁할 수 있는 허락을 얻었다. 더욱이 "변백할 말을 입에 채울" 수 있는 허락을 얻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움직이기 위해서가 아니라(그는 우리의 호소를 듣기 이전에 벌써 그 일을 완전히 파악하시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을 움직여 우리의 열성을 북돋우고, 기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격려하기 위함이다.
3. 욥은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판결받을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그것을 듣기를 갈망했다(5절). "그가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리라." 즉 "나는 너희와 나의 논쟁하는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며, 전적으로 그의 판단에 따를 것이다." 이것은 모든 논쟁에 있어서 우리들이 취해야 할 태도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논쟁을 결정하라. 그가 무엇을 대답하시는가를 알고, 말씀하시는 것을 이해하도록 하라. 욥은 그의 친구들이 그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즉 그들은 그를 정죄하고 그를 위축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욥은 말했다. "하나님이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기쁘게 알리라.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께서는 진리대로 심판하시나, 그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들은 그 목적에 합당한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내가 잘 깨달아 그 속에서 만족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Ⅲ. 욥은 이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를 은혜롭게 대해 주시리라는 소망으로 스스로를 위로했다(6, 7절).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는 모든 일에서 언제나 하나님을 선하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들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믿었다.
1. 하나님께서 그를 강압하거나, 절대적인 권세나 엄격한 의로 그를 대하시지 않으실 것이며, 높은 손으로도 또한 강한 손으로도 대하시지 않을 것이다. "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로 더불어 다투실까?" 아니다. 욥의 친구들은 그들의 온갖 권능을 가지고 그로 더불어 다투었는데, 하나님도 그렇게 하시겠는가? 그렇지 않다. 그의 권능은 인간의 것과는 달리 항상 의롭고 거룩하시다. 불신 속에서 회개하지 않고, 완고한 태도를 가진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큰 권능을 가지시고 다투실" 것이다. 그들은 "그의 권능의 영광으로 인하여" 멸망할 것이다. 그러나 그를 사랑하고 의지하는 그의 백성들은 그가 온화한 사랑을 가지시고 다루실 것이다.2. 반면에 하나님은 하나님 앞에 그의 일을 탄원하는 자에게는 권능을 부여하실 것이다. "그가 내 말을 들으시고 나를 도우시사 나의 결백함을 지키도록 해 주실 것이다." 교만한 죄인들을 벌하던 그 권능이, 겸손한 성도들을 도우므로 성도들은 야곱과도 같이 하나님께로부터 얻은 힘을 가지고 하나님과 겨룬다(호 12:3). 시편 68편 25절을 보라.
3. 그 결과는 분명 기쁘게 나타날 것이다(7절). 마지막 재판이 열리는 하늘의 법정에서 "정직자가 그와 변론할 수 있어," 그의 의로우심이 실현될 것이다. 의롭지 못한 자들도 흔히 "여호와의 징벌을 받으나," 그들은 그것에 대해 변론할 수 없다. 결백 그 자체가 재앙이나 비방을 막아 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비록 하나님이 그의 특권에 의해 고통을 주시더라도 "그들은" 그날까지는 "세상의 정죄는 받지 아니할 것이다. 그 때에 너희가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리라"(말 3:18). 그리하여 그들간의 영원한 상태는 큰 차이가 나는 것이다. 반면에 우리는 지금 거의 그들을 분별할 수 없고, 외적인 그들의 상황에 별 차이가 없어, 모두 비슷하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멸망이 올 때 "내가 심판자에게 영영히 벗어나리라." 즉 "나는 내 친구들의 부당한 책망과, 지금 나를 이처럼 크게 위협하고 있는 거룩한 형벌로부터 구원되리라." 그들의 주인이시며 다스리시는 자이신 하나님에 의해 구원된 자들은 영원히 그의 심판과 보복에서 벗어날 것이다. 그의 심판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길은 그의 자비 가운데로 나아가는 길 밖에 없다.
섭리의 비밀(욥기 23:8-12)
Ⅰ. 욥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매우 당황하게 됨을 원망하고 있다(8, 9절).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신다." 엘리바스는 그에게 하나님과 화목할 것을 지시했다. "내가 그와 화목할 수 있는 방법을 알기만 한다면" 욥은 말했다. "내가 전심으로 그렇게 하겠다." 그는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의 대답을 듣고자 하는 큰 갈망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심판자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욥이 그를 위해 그의 무죄함을 증명해 주실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는 표적을 보지 못한 것을 주목하라. 욥은 물론 하나님께서 모든 곳에 그 자신을 나타내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욥은 다음 세 가지를 원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 욥은 그의 생각을 걷잡을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 속으로 어떤 일들을 분명히 판단할 수도 없었다. 그의 마음은 그의 고통으로 인해 매우 불안해 하는 가운데 안정을 잃고 있었으므로, 놀란 또는 분별력을 잃은 사람과도 같이 우왕좌왕하고 있었고, 당황하여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정신이 혼란하고 소란스런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욥은 그 자신이 하나님 안에 있는 지를 확신할 수 없었다. 만일 그가 그러한 믿음을 확고히 가질 수만 있었다면, 그리고 그의 생각 안에 그것이 거했다면 그는 큰 힘을 얻었을 것이다. 병들거나 우울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아무리 좋은 것도 그들에게 별로 소용이 없다는 불평을 한다.2. 욥은 고통당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격노케 하여 그와 싸우도록 한 죄도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여러 면에서 그의 모든 대화를 검토해 보았지만,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이처럼 더 벌을 받을 만큼, 다른 사람보다 더 죄를 지은 사실을 발견할 수 없었다. 또한 이처럼 하나님께서 그를 괴롭게 하시는 일에서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다른 목적을 깨달을 수도 없었다.
3. 욥은 그 결말이 어떻게 날지, 하나님께서 결국 그를 구하실 것인지 만일 그렇다면, 언제 어떤 방법으로 할 것인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그는 하나님의 표적을 보지 못했고, 또 그것이 얼마나 오래일는지 들려 주는 자도 없었다. 교회의 호소도 이와 같은 것이었다(시 74:9). 그는 완전히 당황하여 하나님께서 그에게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어떤 추측도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모든 상황이 예측을 불허했기 때문이다.
Ⅱ. 욥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결백함을 증거해 주시리라는 생각에 스스로 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 결과가 좋게 되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1. 욥이 하나님의 섭리의 미궁에서 헤매고 있을 때, 마침내 이러한 생각이 떠올라 매우 기뻐했다. "비록 나는 그가 택하신 길을 모르나("왜냐하면 그의 길은 바다 가운데 있으며, 그의 첩경은 큰 물 가운데" 있기 때문이며, 그의 생각과 뜻은 우리의 것보다 무한히 높으시며, 우리가 그것을 판단하려 한다는 것은 무려한 일이기 때문이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신다"(10절).(1) 하나님은 그것을 잘 알고 계신다. 욥의 친구들은 자신들이 모르고 있는 것을 판단하여, 욥이 지은 적이 없는 죄로 욥을 책망한다. 그러나 그가 행한 길을 모두 알고 계시는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실 것이다(시 139:3). 사람들은 그들의 뜻을 이해하지 않으며, 할 수도 없고 또 하려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이해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솔직히 시인하는 자들은 위로를 얻을 수 있다.
(2) 하나님은 그것을 시인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때로 그릇된 걸음을 따를지라도, 계속 선한 길을 밟으며 진리의 길을 좇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므로 그것도 또한 알고 계신다." 즉 하나님은 그것을 용납하시며, 그것을 기뻐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의인의 길을 인정한다"고 하셨기 때문이다(시 1:6). 이러한 사실은 선지자를 위로했다(렘 12:3). "주께서 내 마음이 주를 향하여 어떠함을 감찰하시나이다." 여기에서 욥은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하고 추론하고 있다. "주님의 길을 지키는" 자들은 그들의 환난 가운데 있을 때, 다음 세 가지에 의해 위로를 얻을 것이다.
[1] 그들은 단지 단련 받을 뿐이다. 그것은 그들을 해하는 일이 아니라, 그들을 영예롭고 유익하게 하는 일이다. 즉 "그것은 너희 믿음의 시련이다"(벧전 1:7).
[2] 그들이 충분히 단련 된 후에, 그들은 용광로 속에서 나올 것이고, 그 속에서 계속 버려둠을 당하여 찌꺼기나 부스러기 은처럼 되어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 단련은 끝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히 다투시지 않으실 것이다."
[3] 그들은 정제기에서 정금처럼 깨끗하고 귀하게 되어 나올 것이다. 그들은 정평있고 다듬어진 정금처럼 선하고 더 훌륭하게 되어 나올 것이다. 우리에게 오는 환난도 이와 같다. 즉 용광로 속에 금으로 들어간 자들은 결코 질이 저하되어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2. 욥이 그의 현재의 고통이 이처럼 좋은 결말을 가져오리라는 소망으로 그 스스로를 위안한 이 사실은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선한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알려 주는 그의 양심의 증거였다.
(1) 하나님의 길은 그가 걷고 있는 길이다(11절).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다." 즉 "그가 택하신 발걸음을 바싹 따랐다. 나는 그의 모본을 따르고자 노력했다." 선한 백성들은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이다. 또는 "나는 그의 섭리에 순종했으며, 한걸음 한걸음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면서 그것에 대한 모든 의도를 이루고자 노력했다." 또는 "그의 걸음은 나로 하여금 따르도록 정해 놓으신 걸음이다. 즉 그것은 믿음과 진실된 경건의 길로서 내가 여지껏 지켜 왔고, 또 결코 떠남이 없던 길이었다. 나는 완전히 배신함으로써 그 길을 돌아서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악한 범죄로 인해 그 길을 피해가지도 않았다." 그가 하나님의 걸음을 따르고 그의 길을 지켰다는 것은 그 유혹자가 속임수와 힘으로써 모든 술책을 꾸며 그로 하여금 탈선하도록 만들려 했으나, 온갖 주의와 결단력으로써 그리고 그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보호되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하려는 자들은 결단력을 가지고 따르며 경계심을 가지고 지켜야 된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2)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걸음을 인도하는 규례였다(12절). 그는 "하나님의 입술의 명령"으로써, 그 스스로를 다스렸고 그것을 피함이 없이 그것을 따라 행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인도받아 광야를 지나갈 때, 그 명령의 길을 따르는데 어떠한 어려움을 만나든지 간에 우리는 결코 후퇴하려는 생각을 말고 그 목적지를 향해 계속 전진해 가야 한다. 욥은 말할 때에도 하나님의 율법을 견고히 지켰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과 그 사랑이 욥으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인도했기 때문이다. "내가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 즉, 욥은 그것을 그의 일정한 음식으로 여겼다. 그는 일용할 양식 없이 살아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 없이도 살아갈 수 없었다. 공격에 대비하여 물품들을 쌓아둔 자들과 같이, 또는 기근에 대비하여 곡식을 모아둔 요셉과 같이 내가 그것을(단어 그대로) 쌓았도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마음에 두라"고 명했다(22:22). "그렇게 하겠다" 욥은 말했다. "내가 하나님을 거슬러 죄를 범하지 않도록, 그리고 훌륭한 가장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베풀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항상 그렇게 하리라."
일정한 음식이 우리 몸에 중요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영혼에 중요하다. 그것은 영적 생명을 유지해 주고, 그러한 생명의 활동을 위해 우리에게 힘을 준다. 우리는 그것 없이 살아나갈 수가 없으며, 그 부족함을 다른 것으로 대치시킬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중히 여기고 그것을 얻도록 노력하며, 그것을 갈급하게 찾으며, 그것을 기쁘게 먹고, 그리고 그것으로 우리 영혼을 키워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여기에 나오는 욥의 경우와도 같이 악한 날 우리의 기쁨이 될 것이다.
결백함을 기뻐하는 욥(욥기 23:13-17)
욥은 여기에서 그가 여지껏 그의 결백함을 명백히 입증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고통을 조금도 완화시키거나 덜어 주심이 없이 그를 부당하고 불공평하게 대하신다고 하여,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경건한 욥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원망함으로써 죄를 범하고 있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의 원망은 사실상 비통하며 까다롭다. 그리고 그는 "강건한 인내"로써 참고 있으나,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가혹하게 대하신다고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욥은 어쩔 도리가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참아야 했다. 그가 말한 가장 극심한 말이란 하나님께서 종잡을 수 없이 그를 다루신다는 것이었다.
Ⅰ. 욥은 훌륭한 진리들을 제시하였고 그것은 선용될 수 있는 진리들이었다(13, 14절).
1. 하나님 뜻은 불변하다.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 그는 하나이시다"(어떤 사람들의 해석대로). 또는 "일정하시다." 그는 모사들이 필요 없으시므로, 그들의 간언을 받아 그의 뜻을 변경하시는 일이 없다. 그는 혼자이시며 그의 뜻을 변경하심이 없으시고, 그의 판단을 결코 바꾸시지 않는다. 기도는 하나님의 방법이나 그의 섭리를 변경시킬 수는 있어도 결코 그의 뜻이나 목적을 움직일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드러내 주신 것은 모두 그가 행하신 것이다."2. 그의 능력은 항거할 수 없다. "그 마음이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며," 그 어느 것도 그의 길을 방해할 수 없고 그의 뜻을 변경시킬 수도 없다. 인간은 그들이 허락받지 못한 것이나, 할 수 없는 것 또는 감히 행해서는 안 되는 많은 일들을 하고자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논의할 여지도 없는 권세를 가지고 계시다. 그의 뜻은 온전히 순수하며 의롭기 때문에 그가 그의 모든 결정대로 행하신다는 것은 극히 합당한 일이다. 그리고 그는 제어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아무도 그의 손을 멈추게 할 수 없다. 여호와께서 무릇 기뻐하시는 일을 다 행하셨도다"(시 135:6). 그리고 언제나 그렇게 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항상 가장 선하기 때문이다.
3. 그의 행하시는 모든 일들은 그의 뜻대로 작정하심에 의한 것이다(14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그것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시 57:2). 그리고 하나님의 신비가 이루어졌을 때 그것은 모두 경탄할 만한 일로 나타날 것이다. 그는 모든 일을 그가 작정하신 대로 작정하신 시간에 그리고 작정하신 방법으로 이루실 것이다. 이것은 우리를 침묵시킨다. 왜냐하면 이미 작정한 일은 "변경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고자, 우리의 끝날을 영광스럽게 하시고자 우리에게 이러한 상태, 이 환난을 주셨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그 환난이 어떠한 것이든지 간에 기쁘게 참을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이 모든 것을 가장 훌륭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일이라는 사실에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지금은 그가 하고자 하시는 일을 우리가 모르지만 장차 알게 될 것이다.
4. 그가 행하시는 모든 일은 그의 섭리의 규칙에 의한 것이다.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즉, 그는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그의 섭리의 순리대로 많은 일을 행하시나, 그것은 그의 절대적인 권세 아래에서 행해진다. 우리가 어떠한 곤경에 처할 때 다른 사람들도 그것과 비슷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우리의 상황은 유일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고 있다"(벧전 5:9). 우리는 허약하게 되고 헐벗게 되어 병들거나 상심하고 있는가?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작정하신 것이며,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우리를 위하여 땅이 버림을 당하겠느냐?"
Ⅱ. 욥은 이 선한 진리들을 잘못 사용하였다. 그가 만일 깊이 그것들을 생각해 보았다면, 그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런즉 나는 편한 마음으로 즐거워하며, 나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잘 순종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고통이 결국 좋은 열매를 맺으리라는 소망 가운데 내가 즐거워하리라." 그러나 그는 "그러므로 내가 그의 앞에서 떠는구나"하고 말했다(15절). "하나님을 생각하고 불안해 하는" 시편 기자처럼(시 77:3),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근심하는 자들은 정말 떠는 영혼들이다. 불쌍한 욥이 스스로를 부정함으로써, 얼마나 큰 혼돈 속에 빠져 있는가를 보라. 바로 조금 전 그는 하나님의 부재로 인해 근심하였으나(8, 9절), 지금은 그의 임재로 인해 떨고 있다. "내가 이를 생각하고 그를 두려워하는구나." 그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이 그로 하여금 더욱 두려워하게 만들었다. 우리가 그 사실을 잘 생각해 볼 때 즉 그의 무한하신 공의와 결백함을 우리 자신의 사악함과 비열함에 비교해 볼 때 우리는 실상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가 구속자 안에 있는 그의 은총과 우리가 그 은총에 참여할 수 있음을 생각해 볼 때 우리의 두려움은 사라지고, 오히려 그 안에서 소망을 지니게 될 것이다. 욥의 심령의 상태가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보라.
(1) 욥은 매우 두려워했다(16절). "전능자가 그를 두렵게 하시며 낙심케 하시는도다." 즉 어떠한 것도 온전히 참을 수 없게 되며, 움직이는 모든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 요시야처럼 마음이 온유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떠는 자들에게는 자비로운 관대함이 임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 나온 말은 비탄에 젖은 것으로서, 현재의 모든 일들이 압박감을 주는 것으로, 그리고 미래의 모든 일들이 위협감을 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2. 그는 매우 초조했고 또 사실상 역정을 내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과 다투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다툰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그가 그의 고통들을 보지 못하도록 그의 환난이 이르기 전에 죽지 못한 때문이었다(이는 어두움으로 나를 끊지 아니하셨음이니라(7절)). 그러나 그가 극히 흥한 가운데서 무덤으로 오라는 소환장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는 그것을 가혹하게 생각했을 것임에 틀림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언제 죽음이 오든지 우리로 하여금 죽음에 순응하도록 만든다. 왜냐하면 죽음은 우리로 하여금 어떠한 재앙을 모면하게 해 줄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난이 닥쳤을 때, 우리가 죽어서 그것을 보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그것을 최대한으로 선용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2) 그가 그렇게 오랫동안 환난 가운데 놓여 있었고, 그 어두움은 그를 무덤으로 숨기어 그의 얼굴을 덮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만일 정직한 자들에게는 어두움 속에서도 놀라운 불빛이 때로 비추인다는 사실을 기억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어두움을 이보다 더 잘 참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위해 그것 뒤에는 더욱 찬란한 빛이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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