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바스의 세 번째 연설(욥기 22:1-4)
여기에서 엘리바스는 욥이 이처럼 극심한 고통 중에서 원망하고 있으므로, 그를 괴롭히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다고 욥이 생각하고 있다고 하여, 욥을 책망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친 "빈정거림"이었다. 욥은 전혀 그렇게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엘리바스가 여기에서 한 말은 욥에게 잘못 적용되고 있다. 그러나 그 말 자체는 매우 진실되고 선하다.
Ⅰ. 하나님이 우리에게 유익을 베푸시는 것은 그가 우리의 은혜를 입고 계시기 때문이 아니다. 만일 그가 우리로부터 도움을 입고 계시다면, 그가 우리에게 고통을 주실 때, "그는 우리를 정당하게 대하지 않으신다"라고 투정거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어떤 훌륭한 행위로써 하나님께 도움을 끼쳤다고 생각한다면 그 도움을 밝히도록 하라. 그러면 그는 그것을 잃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롬 11: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그러나 엘리바스는 여기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선한 자의 의로움과 온전함이 하나님께 진정한 이익 또는 도움이 되지 못하므로, 그로부터 어떠한 일도 공적으로 간주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1. 인간의 경건이 하나님께 아무런 유익도, 어떠한 이득도 드리지 못한다(1, 2절). 만일 우리가 어떤 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공로를 얻었다면, 그것은 우리의 경건, 우리의 의로움이 되어 우리의 길을 온전하게 만든다. 만일 그것이 공로를 얻지 못한다면, 분명 그밖의 것으로도 얻지 못할 것이다. 인간은 그의 경건이나 정직 그리고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 도움을 끼칠 수 없다. 더욱이 그의 재치나 학식 그리고 세속적인 술책으로도 그렇게 할 수 없다. 이제 엘리바스는 여기에서 사람이 하나님께 유익하게 하는 것이 가능한가를 묻고 있다. 분명히 그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방법으로든 할 수 없다. 지혜로운 자도 스스로 유익할 따름이니라.우리의 지혜와 경건은 우리들 자신에게 매우 유익하다.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니라"(전 10:10).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다."(딤전 4:8). "네가 만일 지혜로우면 그 지혜가 네게 유익하리라"(잠 9:12).
믿음의 이득은 믿음의 손해보다도 무한히 크다. 그러므로 그것들이 균형을 이룰 때 믿음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여 사람이 하나님께 도움을 줄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 사람들로 인한 도움이나, 이득을 받아 들일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온전하심이기 때문이다. 무한한 것에 무엇을 더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하나님께 어떤 도움이나 이득을 끼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연약함이며, 불완전함이다. 촛불이 태양의 도움이 되며, 양동이의 물이 대양에 도움이 되겠는가? 지혜로운 자는 그 자신의 계획과 방어, 그 자신의 신용과 위인에 대해 그 스스로에게 유익하다. 그는 자기의 지혜로써 스스로를 즐길 수 있으며, 풍요하게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께 도움을 줄 수 있겠는가? 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치 않으시며, 우리의 봉사도 필요치 않으시다. 우리는 그가 없이는 언제나 아무 것도 행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없어도 영원히 행복하실 수 있다. "우리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될 수 있겠는가?" 그의 영광이나 부귀를 진실로 더할 수 있겠느냐? 그것이 아주 온전하다고 한들, 하나님께 어찌 더 유익하겠는가? 그것이 온전한 것과 거리가 멀 때는 더욱 그러하다.
2. 그것은 하나님께 즐거움이 못된다. 하나님은 의인을 기뻐하신다고 그의 말씀 속에서 정말 표현하셨다. 즉 그는 그러한 자들을 지지하시고 그들과 그들의 기도를 기뻐하신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영원한 마음 안에 있는 그의 무안한 기쁨과 만족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하나님은 우리 없이도 스스로를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친구들 없이는 우리 스스로 거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 비록 우리의 봉사가 실제적으로는 그에게 어떤 도움이나 즐거움을 드리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가 그것을 청하시고 격려하시며 받으시는 것은 그의 겸손하심 때문이다.Ⅱ. 하나님께서 우리를 제어하거나 책망하시는 것은, 그가 우리로부터 위험을 당하게 되었거나, 우리를 시기하시기 때문이 아니다(4절). "그가 너를 책망하심이 너의 경외함을 인함이냐? 방백들이 때로 그 신하의 세력이 커져 매우 강대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정책을 쓰는 것과 같이, 하나님도 그에 대해 그들이 너무 강대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너의 번창함을 막으시려는 것이냐?" 사탄은 우리의 첫 번째 조상을 유혹할 때 그들이 신같이 되어, 하나님과 경쟁자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것을 두려워하여 하나님이 그들에게 지식의 나무를 금해 놓은 것이라고 실지로 암시했다. 그러나 그것은 악랄한 암시였다. 하나님은 선한 자를 책망하신다. 그가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두려워하기 때문에 큰 자들을 책망하시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인간과 더불어 심문하시지 않는다. 즉 그들이 그의 영예를 가리우고 그의 세례를 위협할 것이 두려워서 트집을 잡아 그들과 송사하며, 그들을 대적할 기회를 살피시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재판장들은 범죄자들을 두려워하여 처벌한다. 바로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들을 압제했다. 헤롯이 베들레헴 자손들을 살해하고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을 박해한 것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행한 것처럼 어떤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의를 남용하지 않으신다(35:5-8 참조).
여러 가지 범죄로 고소당한 욥(욥기 22:5-14)
엘리바스와 그의 동료들은 대체로 욥을 악하고 사곡한 자로서 정죄하고 있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세부적인 내용은 언급하지 않았고, 또한 그에 대한 비난의 조목들을 나열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엘리바스는 여기에서 실제적으로 그리고 명백하게 고도의 많은 범죄와 비행을 들면서 욥을 책망하고 있다. 만일 욥이 실제로 그러한 죄를 범했다면 그들이 욥을 냉혹하게 책망하는 일을 매우 타당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엘리바스는 말했다. "자,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요점을 제쳐 놓고 둘러서 이야기 해왔었고, 또 욥에게 지나치게 부드럽게 대해 주었으며, 그를 상심케 할까봐 매우 염려해 왔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단지 그로 하여금 더욱 자기 변명을 하도록 만들었을 뿐이다. 이제야말로 그에게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할 때이다. 우리는 비유로 그를 책망했으나 그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즉 그가 굴복하여 스스로 뉘우치는 기백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명히 그에게 네가 바로 우리가 여지껏 말해왔던 그 자이며, 그 포학자이고 그 압제자이며 또한 그 무신론자이다라고 말하자.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분명히 크다. 그렇지 않으면 네가 그처럼 큰 고통을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네 자신 그리고 네 양심에 호소한다. 네 죄악이 그 수효나 가증함에 있어서 극하지 아니하냐?"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 이외에 극한 것은 없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욥의 죄가 생각보다 매우 많으며, 매우 가증하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함이다. 죄는 무한한 권세를 대적하는 행위이므로, 그 안에 무한한 악의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엘리바스가 욥 자신도 모르고 있는 것을 책망하면서, 감히 그 죄목을 열거하고 또 이처럼 그를 심하게 꾸짖는 태도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경우를 생각해 낼 수 있다.
1. 부당하게 그 형제들을 책망하고 정죄하는 자들에 대한 분노를 생각할 수 있다. 잘은 모르지만 엘리바스가 여기에서처럼 욥을 잘못 경책하는 것은, 그를 강탈한 스바 사람이나 갈대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욥에게 큰 죄를 범하는 것이며, 큰 잘못을 행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명성이 그 재물보다 더 귀하고 중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비방과 시기와 나쁜 추측을 불러 일으키거나 받아들이는 것은 공의와 사랑과 우정의 모든 율법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처럼 환난 중에 있는 자를 노하게 하여 그 고통을 더 가중시키는 것은 더욱 야비하고 교활한 일이다. 엘리바스는 이에 따른 욥의 세부적인 죄목을 열거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대담하게 욥을 비방하고자 하여, 최대한으로 모든 책망을 퍼부은 것 같으며, 모두가 그와 똑같은 생각이라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은 것 같다.2. 이처럼 책망을 받고 정죄당한 자들에 대한 동정을 생각할 수 있다. 결백 그 자체가 거짓되고 타락한 혀를 막아내지는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자로 칭찬해 주신 욥이, 그리고 지혜롭고 선한 자인 욥이 여기에서는 그의 한 친구에 의해, 본래 극악한 자로 진술되어 있다. 우리가 어느 때 이처럼 누명을 쓰더라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지 말고, 좋은 것은 물론 악한 소문도 간과하는 방법을 배우도록 하자. 그리고 우리의 호소를 욥이 행한 것처럼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에게 맡기도록 하자.
이제 우리는 그 책망의 내용이 어떠한 것인가를 자세히 살펴 보기로 하자.
Ⅰ. 엘리바스는 욥이 부유하였을 때는 그의 재물과 권세로써 선을 행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크게 해하였다고 말하면서 포학하고 부당하게 그를 책망했다. 이러한 말은 욥이 그 자신에 대해 언급해 놓은 내용(20:12 이하)과, 하나님께서 그의 성품에 대해 언급하신 것(1장)을 살펴 볼 때, 완전한 오류임이 드러나고 있다.
1. 그러나 엘리바스는 여러 가지 항목을 들추어 내어 마치 그가 증인을 불러 그 모든 조항을 증거할 수 있는 것같이 매우 단호하게 책망하고 있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1) 욥은 가난한 자들에게 잔인했고,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재판장으로서 그는 그들을 보호해 주어야 했고, 그들이 도움을 받고 있는가를 살펴야 했다. 그러나 엘리바스는 욥이 그들에게 결코 어떤 친절도 베풀지 않았고, 그의 권세를 이용하여 그들을 해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즉 욥은 그 형제들에게까지 그들의 정직함과 형편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빚을 갚도록 요구하고, 폭력으로 빼앗았으며 매우 귀한 물건을 볼모잡았다고 엘리바스는 억측하고 있다(6절). "너는 까닭 없이 형제의 물건을 볼모잡으며" 또는 칠십인 역(LXX)에서와 같이 "너는 볼모로 너의 형제를 잡으며," 까닭 없이 그들을 감금하고, 그들이 지불할 능력이 없다고 하여 노예로 삼았다. 그리고 파산한 소작인과 빚진 자들의 옷을 빼앗으려고 "그들의 의복을 벗겨" 놓았다(이것은 모세의 율법에 금지된 것이다. 출 22:26; 신 24:13).
따라서 욥은 가난한 자에게, 심지어 초라한 나그네와 불쌍한 과부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너는 갈한 자에게 그가 그것을 청할 때에(그것이 비용이 드는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한 잔의 물을 마시우지 아니하고(7절), 목말라 죽을 지경까지 내버려 두었다. 뿐만 아니라, 극도로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지 아니하였다. 즉 그것을 네 손으로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주는 것도 금함으로써,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꼈다(잠 3:27). 남편이 살아있을 때 누구를 해한 일이 없었던 불쌍한 과부가 이제 위로를 구하기 위해 그의 집 앞에 왔을 때에도, 너는 빈손으로 돌려보내어, 그녀를 슬프게 했다(9절). 공의를 묻고자 네게 온 자들도 너는 듣지도 않고 돌려보냈다. 더욱이 그들이 풍성한 가운데 너를 방문했을지라도 너는 그들을 억지로 짜내어 빈 채로 돌아가게 했다. 무엇보다도 극악한 것은 네가 고아의 팔을 꺾었다는 사실이다. 그들 스스로도 거의 어떻게 행할 수 없는 자들을 네가 완전히 무능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것은 가장 혹독한 비방으로서 교묘하게 암시되고 있다. 고아의 팔이 꺾이우는구나!(역주, 우리 성경에는 꺾었다로 번역되었으나 영어 흠정역 성경에는 꺾이운다고 하여 수동형으로 번역되었다) 그는 "네가 그 팔을 꺾었다"고 말하지는 않고 있으나, 그는 그러한 뜻으로 이 말을 한 것이다. 그들의 팔이 부러졌을 때 능력있는 자들이 그들을 위로하지 않는다면, 그 책망은 능력있는 자들이 받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네 밑에 있는 자들에 의해 꺾이웠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묵임함으로써 죄를 범하는구나!"
(2) 욥은 부유하고 큰 자만을 편애했다(8절). "권세있는 자가 토지를 얻고(만일 그가 어떤 죄를 범했다면 그는 결코 그것을 신문하지 않았을 것이다) 거기서 사는구나. 만일 그가 매우 부당한 행위를 했거나, 또한 매우 정당하게 그를 대적하는 행위가 일어났다면 그는 분명 그 일을 너의 법정에 가져올 것이다. 가난한 자들은 너의 문간에서도 얻어 먹지 못하는 반면에 부유한 자들은 너의 부탁에서 대접받았다." 남을 대접하는 일에 관한 그리스도의 교훈은 이와 반대이다(눅 14:12-17). 그리고 솔로몬도 "부자에게 주는 자는 가난하여질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2. 엘리바스는 욥이 현재 당하고 있는 모든 고통은 다음과 같은 죄 때문이라고 추측하고 있다(10, 11절). "이러한 죄를 범한 자들은 대개 지금의 너와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너도 이와 같은 죄를 범했다고 단정지을 수 있다."
(1) "하나님의 섭리는 이러한 자들을 저지하며 방해한다. 그러므로 올무들이 너를 둘러 있어서, 네가 어디를 가거나, 무엇을 보든지, 너는 네 스스로가 환난 가운데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네가 가난한 자들에게 냉혹하게 대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네게 행할 것이다."
(2) "그들 자신의 양심이 그들을 위협하고 고소하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무자비한 것보다도 높은 원성을 불러 일으키는 죄는 없다. 그러므로 두려움이 홀연히 너를 침범하리라. 비록 네가 그것을 시인하려 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네게 이 모든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범죄가 된다." 소발도 이러한 사실을 암시한 바가 있다(20:19, 20).
(3) "그들은 재치를 발휘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놀라고 당황하여,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며, 너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어두움이 너로 보지 못하게 하여, 왜 하나님이 너와 싸우게 하는지를 모르며, 창수가 너를 덮으므로 네가 취해야 할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즉 "너는 안개 가운데, 깊은 물 가운데, 하늘의 짙은 구름 가운데 있다." 자비를 베풀지 않은 자들이 자비로 인한 위로를 얻지 못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들은 올무와 어두움과 끊임없는 두려움 이외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Ⅱ. 엘리바스는 욥의 무신론과 불신과 매우 사악한 행위를 꾸짖었으며, 이것은 그의 불의하고 가혹한 성품 밑바닥에 들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그는 욥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사람을 존중하지도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욥이 쾌락주의자로서 실재로는 하나님의 존재로 인정하나, 그의 섭리는 부인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욥이 그 스스로를 저 높은 세상의 즐거움에 몰두시키고, 이 세상의 삶과 일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추측했다.
1. 엘리바스는 한 가지 중요한 진리를 언급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만일 욥이 그것을 잘 생각했다면, 그처럼 격하게 원망하지 않았을 것이며, 대담하게 스스로를 변명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12절). "하나님이 높은 하늘에 계시지 아니하냐?" 물론 하나님은 거기에 계신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처럼 높은 하늘은 없다. 그리고 가장 높은 하늘에, 축복된 하늘에, 그의 영광이 거하는 곳에 하나님은 특별한 모습으로 계신다. 거기에서 그는 높은 세상의 특별한 방법으로 스스로를 증거하고 계신다. 그리고 그 곳에서 그는 아래 세상에 합당한 방법으로 그 스스로를 나타내신다. 거기에 그의 보좌가 있고 그의 법정이 있다. 그는 하늘이라 일컬어진다(단 4:26). 이와 같이 엘리바스는 인간이 하나님께 유익할 수 없음을 증명하고 있다(2절).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과 싸워서는 안 되고(그와 싸운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언제나 하나님께 큰 경외심을 지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별의 높음이 얼마나 높은가 볼" 때 우리는 동시에 별 위에 계시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주권을 생각해 보고, 그가 얼마나 높으신가를 깨달아야 한다.2. 엘리바스는 욥이 이 이론을 선하게 사용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악용했다고 하여 그를 책망했다(13절). "이것은 불의 속에서 진리를 잡는 것이며, 믿음의 무기로 믿음을 대항하여 싸우고, 그 대포를 그것으로 향해 겨누는 것이다. 너는 기꺼이 하나님이 높은 하늘에 계시다는 사실을 시인했으나, 하나님이 무엇을 아시냐고 반문하고 있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눈을 이 세상 밖으로 추방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그들의 마음으로부터 내어 쫓으며(겔 8:12), 하나님이 모르신다는 것으로 그들 스스로를 설득시키기만 한다면 무슨 일을 행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엘리바스는 하나님이 높은 하늘에 계신다고 해서, 욥이 하나님에 대해 이러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1) 하나님이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땅에서 무엇이 행해지고 있는가를 보실 수도, 들으실 수도 없다. 그와 우리 사이에 "흑암"(13절)과 "빽빽한 구름이 그를 가리우고 있을"(14절) 때는 특히 보일 수 없으며, 또 이 아래 세상의 일을 판단할 수도 없다. 마치 하나님이 "육신의 눈"을 감고 계신 것과 같다(10:4).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끼어 있는 창공이 그에게는 투명한 수정과도 같다(겔 1:22). 무한한 공간을 채우시는 하나님에게 공간의 거리가 아무런 어려움을 주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원하신 그에게 시간의 거리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2) 이처럼 보잘 것 없는 창조물에 관여하는 것은 하나님을 천하게 만드는 것이며, 그의 영광을 저하시키는 것이다. "그가 궁창으로 걸어다니실 뿐이다." 그 밝고 조용한 세상에서 마음껏 그 자신과 그의 온전하심과 영광을 즐기신다. 그가 왜 우리로 인해 괴로워하시겠는가? 그것은 매우 불합리하고 불경건한 일이다. 여기에서 엘리바스는 욥에게 이러한 죄과를 씌우고 있다. 왜냐하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최고의 권력자에게 있어서 부담스럽고 가치가 떨어지는 일이며, 의와 자비의 행위는 무한히 지혜롭고 거룩하여 선한 마음을 지닌 자에게 노역이 되기 때문이다. 만일 해와 생물과 무생물이 그의 빛과 힘으로써 이 땅에 그리고 그 곳곳에 도달할 수 있다면(시 19:6), 그가 계시는 저 하늘 꼭대기 보이는 곳까지 그리고 그가 걸어 다니시는 궁창 안에, 또한 흑암과 빽빽한 구름을 뚫고 도달할 수 있다면 우리가 창조주에 대해 더 이상 의심 할 수 있겠는가?
악인에 대한 심판(욥기 22:15-20)
엘리바스는 욥의 앞에 그의 죄목을 조리있게 열거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려고 노력한 후, 여기에서 죄의 이유를 제시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그의 비참함과 위험함을 보고 깨닫게 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는 욥의 경우와 옛날 죄인들의 경우를 비교하면서 이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았다. "너의 상황은 지금 비참하다. 그러나 네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옛적에 하수로 인하여 함몰되었던 자들(16절)과도 같이 그리고 그 남은 것이 불사른 바 되었던(20절) 자들과도 같이 더욱 비참해질 것이다." 즉 이것은 소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인데, 이들은 옛적 세상에서 유일하게 남은 백성들이었다. 하나님의 진노가 죄와 죄인들에게 임했던 이 두 가지 사건이 이 부주의한 세상에 경고를 주기 위해 우리의 구세주(눅 17:26 이하)와 사도(벧후 2:5, 6)에 의해 여러 번 언급되었다. 엘리바스는 욥이 "악인의 밟던 옛길를 지키려 한다"(15절)고 책망하면서, 그들이 어떻게 되는가,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가를 알게 하려 했다.
악인이 밟아온 옛길이 있다. 죄가 곧 그 길로 들어왔을 때, 믿음도 새로 들어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옛길이고, 넓은 길이며, 발자취가 연결된 길이긴 하지만, 그것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위험한 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길을 살펴서, 감히 그 길을 걷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 좋다. 엘리바스는 여기에서 욥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있는데, 아마도 악인의 흥함에 대해 욥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자 한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마치 욥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처럼 여기는 듯 했다. "너희는 그 어디서나 악인이 그의 일생을 평안하게 마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죄 많은 자들이 영원한 파멸을 당한 커다란 두 가지 사건-온 세계가 물에 잠기고 소돔이 타는 사건-이 그들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는 욥이 대대적인 멸망을 통해서 거울을 보듯이 그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다음을 살펴 보자.
1. 이 죄인들의 멸망을 보자(16절). "그들은 때가 이르기 전에 끊어버리웠다." 즉 많은 사람들이 자연의 순리대로 수 백 년씩이나 살 수 있었을 때에, 그들은 한창 젊을 때 죽임을 당하였는데, 그들이 여물기도 전에 전멸을 당했다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때가 이르기 전 끊임을 당하여," 미리 영원 속으로 떨어져버렸다. 그리고 그들의 터와 그들이 살던 땅과 그 모든 소망이 하수로 인하여 함몰되었는데, 그것은 경건치 않은 세상에 내리신 홍수였다(벧후 2:5).모래 위에 집을 짓는 자들은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날" 때에 그 집이 "함몰 될" 것이다(마 7:27). 그때 그 집은 무너지게 되고, 그들도 그 속에서 멸망하게 되며, 그들의 어리석음을 후회해야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
2. 죄인들의 죄악은 멸망을 가져온다(17절). "그들이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한다." 욥은 그렇게 말할지라도 여전히 흥하는 자들에 대해 이야기했었다(21:14). "그러나 이러한 자들은 흥하지 못한다(엘리바스는 말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그들의 힘으로 알아낸다. 고삐를 욕망과 감정의 목에 매기로 작정한 자들은 이렇게 말하기 시작한다. 즉 그들은 하나님께 우리를 떠나소서 하고 말한다. 그들은 모든 믿음을 버리고, 그것에 대한 생각들을 미워하며, 이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살기를 원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며 하나님의 대리자인 양심을 침묵시킨다. 전능자가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실 수 있으랴?"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그들의 심판에 대한 공정성을 지적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하며 "전능자가 우리를 죽이시는 것 이외에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실 수 있으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황금률에 굴복하려 하지 않는 자들은 그의 막대기로 갈갈이 찢김을 당하리라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은 이것을 그들의 죄악의 불의를 지적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전능자가 무엇으로 우리를 치셨는가?" 무슨 죄악을 우리가 그에게서 발견했는가? 또는 왜 그는 우리를 혐오하셨는가?(6:3; 렘 2:5) 또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그들의 죄에 대한 이유로 보고 있다. 그들이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하며 또 묻기를 "전능자가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실 수 있으랴" 하였다. "그가 우리에게 어떤 은혜를 베푸셨는가? 우리를 비참하게 만드는 진노의 방법으로, 또는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은혜의 방법으로 그가 무엇을 하실 수 있으랴?" 그들은 논쟁을 할 때,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시지 아니하시리라"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습 1:12). 엘리바스는 이에 대한 모순성을 한 마디 단어, 즉 하나님을 "전능자"라고 부르는 사실에서 보여 주고 있다. 그가 전능자라면 못하실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의 은혜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모든 믿음을 던져 버린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3. 이 죄악을 더욱 가중시키는 일을 보자. "그러나 하나님의 좋은 것으로 그 집에 채우셨느니라"(18절). 옛적 사람들과 소돔 사람들은 관능적인 모든 즐거움을 만끽했다. 즉 그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 파는 일들을 했던 것이다(눅 17:27). 그러므로 그들은 "권능자가 그들을 위하여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 물어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의 풍성하신 하사품을 즐기고 있었고, 그러한 친절을 베푸신 하나님께 그들을 떠나달라고 청할 필요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의 집에 재물이 가득하나, 그들에게는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이 없으므로 멸망할 수밖에 없다.4. 이러한 악인들의 원리와 실재에 대한 엘리바스의 항의를 보자. "악인의 계획은 나와 판이하니라" 욥은 이렇게 말했으나(21:16), 엘리바스는 그 의견에 동의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이 하나님에 관한 그들 자신의 원리에 일치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자들의 원리를 부인한다는 사실에는 일치하고 있다. 믿음의 어떤 문제에 있어 서로 의견이 달라 논쟁을 벌리는 자들도 무신론과 불신앙에 대해서는 뜻을 일치하여 단호하게 나서야 하며, 그들의 논쟁이 하나님의 공통된 목적 즉 의로우신 목적을 일치단결하여 적극적으로 하는 일을 방해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5. 의인에게 즐거움과 만족감을 주는 것들에 대해 보자.
(1) 악인의 멸망을 보는 것에 대해 알아보자(19절). 의인들은 "그것을 보게" 될 것이다. 즉 그것을 살펴 알게 될 것이다(호 14:9). 그리고 그들은 "기뻐할" 것이다. 그 이유는 그 동료들이 비참하게 되는 것을 보거나, 그들 자신에게 세속적인 이득이 주어지거나, 목적을 이루게 되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으며, 학대자의 권세가 꺾이우고 그리하여 억압된 자들이 위로를 받는 것, 즉 죄악이 수치를 당하고 무신론자와 이단자들이 당황하여,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이 악한 길을 피하도록 하는 훌륭한 경고를 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의인들은 "그들을 비웃을" 것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께서 거룩한 모습으로 비웃으시는(시 2:4; 잠 1:26) 것과 같이 당연히 그렇게 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할 것이다. 그들은 거기에서 죄인들의 어리석음을 폭로하고, 그들이 지혜롭다고 부르는 그들의 원칙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인가를 보여 줄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다. "이 사람은 하나님으로 자기 힘을 삼지 않는다." 그러니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가 보라(시 52:7).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의인 노아와 그의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로 보고 있다. 노아는 옛적 사람들의 불경스러운 행위를 보고 매우 근심했으며, 그들이 멸망하는 것을 보고 기뻐했던 것이다. 소돔의 멸망을 본 롯도 이와 같은 이유로 기뻐했다(벧후 2:7, 8).
(2) 그들 스스로가 구별됨을 보는 것을 알아보자(20절). "우리 대적이 끊어졌으나, 우리는 살아 남았다. 우리는 계속 흥하리라.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총아로서 의인의 편에 있다는 증거이다." 그로 하여금 더욱 욥을 책망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 규정이 자기 자신과 그 친구들을 칭찬하는데 도움이 되어 주었다. "그의" 대적이 끊어졌다. 그러므로 그 대적은 악인이다. "우리들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인이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그 앞에 있는 모든 것들에 의해서도 사랑과 미움을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다른 사람들이 불사른 바 되었다면, 그 나머지 사람들이 불사른 바 되고, 우리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기에서의 엘리바스처럼 그들을 비난하고 그들 스스로를 추켜 올리기 보다는,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그것을 경고 삼아 같은 재난을 겪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엘리바스의 훌륭한 조언(욥기 22:21-30)
엘리바스는 그의 이야기를 끝내는 이 구절에서, 욥에게 매우 훌륭한 조언과 격려를 해 주고 있는데, 이것보다도 더 취지에 맞는 훌륭한 말은 없다. 그러므로 이 훌륭한 발언을 고려해 볼 때, 이 장의 서두에서 엘리바스가 욥에게 꺼낸 책망들이 매우 부당하고 가혹하긴 했지만, 그것들을 거의 용서해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비록 그가 욥을 악인으로 생각했지만, 그는 욥이 그의 이 모든 충고를 받아들인다면 경건하게 되고 번영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같은 입에서 그리고 거의 동시에, 단물과 쓴물이 흘러 나온다는 것은 이상하게 생각된다. 선한 사람들은 비록 격한 감정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때로는 좀더 온화한 태도로 말할 수 있을 것이며,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그들의 격한 감정을 제어할 수 있을 것이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악인의 비참한 상태를 제시함으로써 그를 두렵게 하고 회개하도록 만들고자 했다. 한편, 여기에서 엘리바스는 진실로 회개하는 자들이 얻게 되는 행복을 욥에게 알려 주어 그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있다.
목회자들은 이 두 가지 방법을 모두 사용하여 사람들을 대해야 한다. 시내산에서의 무서운 율법으로 그들에게 말해야 하는가 하면 시온산에서의 온유한 복음으로 그들에게 말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삶과 죽음, 선과 악, 그리고 축복과 저주를 모두 제시해 주어야 한다.
Ⅰ. 욥에게 준 엘리바스의 훌륭한 조언에 대해 알아보자. 그것이 비록 욥이 악인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적이라는 그릇된 전제에서 나온 조언이긴 하지만, 우리 모두에게 훌륭한 권고가 되고 있다.
1.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께 순종하라." 거룩한 하나님의 섭리에 항상 순종하고, 잠잠히 따르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며, 우리가 고통 가운데 있을 때는 특히 그러하다. "그와 연합하라." 그의 뜻을 따르고, 더 이상 그를 대적하지 말라. 우리의 성경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훌륭하게 번역해 놓았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이전처럼 그에 대한 두려움을 버리거나, 그 앞에서 기도하는 것을 금함으로, 너 자신을 하나님께로부터 동떨어지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이 우리 각자가 모두 행해야 할 의무이며 유익함이다. 우리는 그에 대한 지식을 알고, 그에게로 향한 우리의 마음을 견고케 하며, 우정의 언약 속에서 우리 스스로가 그와 연합해야 한다. 그리고서 그가 정해 놓으신 방법을 따라, 그와 함께 끊임없는 교제를 이루어 나가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교제할 수 있는 길을 얻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영광이며, 죄로 인해 그것을 잃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불행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곳으로 다시 돌아오도록 초대 받았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교제를 맺고 그것을 발전시켜 나가는 일은 우리의 말할 수 없이 큰 행복이 될 것이다.2. "평안하라, 초조해 하거나, 불안해 하거나, 당황하지 말고, 네 마음을 평안하게 하라. 네 마음 속에 괴로워하지 말고, 조용하고 고요한 마음을 가지고 평정을 지키라. 너의 하나님과 더불어 평안하라. 즉 그와 화목하라. 불경스런 이 싸움을 행하지 말라. 너는 하나님이 너의 적이라고 원망했지만, 네 자신이 먼저 그의 친구가 되라." 우리들의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은 우리 각 개인이 지니고 있는 큰 관심이며, 그것은 우리가 그와 함께 즐거운 교제를 나누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는가?"(암 3:3) 우리는 이미 늦어 버리기 전에 지금 빨리 이렇게 행해야 한다. "너희 원수가 길에 있을 때에 너와 화목하라." 우리는 이렇게 행하도록 진심으로 권유받는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청컨대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간청하고 계신다. 즉 그리스도를 대신한 목회자들이 우리에게 화해하도록 청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간청을 물리칠 수 있겠는가?
3. "너는 그 입에서 교훈을 받으라"(22절). "네가 하나님과 더불어 평안한 후에, 그의 다스리심에 복종하라. 그리고 그의 다스리심에 따르기로 작정함으로써, 그의 사랑 안에 계속 거할 수 있게 하라."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생명과 양식을 얻었다. 그로부터 우리는 축복받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우리는 교훈을 받아야 한다. "주여, 나로 무엇을 행하게 하려 하시나이까?(행 9:6) 우리가 그의 뜻을 어떠한 방법으로 암시받든지, 우리의 눈은 반드시 그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가 성서나 목회자나 양심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거나 또는 섭리를 통해 말씀하시든지, 우리는 그 말씀을 그의 입에서 나오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우리의 영혼을 그것에 굴복시켜야 한다.
욥의 시대에 기록된 말씀이 있었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지만, 그 시대에도 받아들여질 수 있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계시가 있었다. 엘리바스는 욥을 악인으로 간주하였고, 그를 회개시키고 교화시키기 위해 설득하려 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죄인의 전향-하나님의 입에서 교훈을 받고 더 이상 이 세상과 육신의 일에 몰두하지 않는 것-을 언급해 놓고 있다. 욥과 씨름하고 있는 엘리바스는 이제 그 논쟁을 끝내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호소하고 있다. "그 교훈을 받고 그것을 따르라." "그 교훈과 증거"를 받으라.
4. "그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 그것을 얻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너는 그것을 보존해야 한다(잠 3:18). 우리는 그것을 매우 귀중한 것으로서, 우리 마음에 두어 그것을 안전하게 지켜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매우 유익한 것으로서 우리 마음에 두어, 일이 생길 때 우리를 돕도록 그것을 준비해 두어야 하며, 그것을 모두 잃어버리도록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필요할 때 당황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5. 전능자에게로 돌아가라(23절). "죄에서 떠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로 그리고 너의 의무로 돌아오라. 선한 뜻으로 선하게 시작함으로써 전능자에게로 돌아설 뿐만 아니라, 그에게로 돌아가라. 그의 집으로 돌아가 그에게 순종하라. 너의 마음과 생명을 온전히 변화시키는 전체적인 개혁과, 그를 열심히 따르겠다는 확고한 결심을 통해 그에게 도달할 수 있게 하라." 이것은 푸울(Pool)씨의 해설이다.
6.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버리라." 소발도 이와 같은 충고를 욥에게 했었다(11:14). "불의로 네 장막에 거하지 못하게 하라. 가슴과 손에서 뿐만 아니라, 네 집에서도, 죄악을 덜어 버리라. 멀리 털어 버릴수록 더 좋다. 네 자신이 악하게 되지 않도록 할 뿐만 아니라, 네가 책임 맡고 있는 자들이 죄를 범하지 않도록 책망하고 견책해야 한다." 우리 뿐만 아니라, 우리 식구들도 개혁시키는 일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리와 우리의 집이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Ⅱ. 엘리바스는 욥에게 훌륭한 권고를 들려 주고 있는데, 그것은 만일 그가 이 선한 권고를 받아들인다면 그가 매우 행복하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21절). 지금 네게서 떠난 재물, 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재물, 즉 현세의 재물과 영적인 재물 그리고 영원한 재물이 모두 네게 임하리라. 하나님께서 네게 임하시어, 너와 언약을 맺으시고, 교제를 나누시리라. 그리고 그는 그 안에 있는 모든 재물도 또한 가져오실 것이다. 너는 지금 몰락하여 멸망한 상태에 있다. 그러나 만일 네가 하나님께 돌아간다면, 다시 흥하여 지금의 멸망을 복구시킬 수 있으리라. 네 자손들이 다시 집안을 일으킬 것이며, 재물이 생겨 가산이 늘어나며, 네 영혼은 거룩함 속에서 안위를 얻으리라." 여기에서 엘리바스가 욥을 격려한 약속의 말을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그의 가산은 흥하고, 현세의 축복도 풍성히 그에게 부여될 것이다. 왜냐하면 경건함은 그러한 삶을 약속해 주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약속하고 있다.(1) 그는 매우 부유케 될 것이다(22절). "네 보배를 진토에 버릴" 정도로 매우 부유하게 되고, "전능자가 네게 귀한 은이 되시리라"(25절). 반면에 너는 지금 매우 초라하며, 모든 것이 고갈된 상태에 있다. 욥도 부유한 적이 있었다. 엘리바스는 욥이 속임수와 학대로써 그 재물을 취했으므로 그것이 그에게서 떠나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였다. 그러나 만일 그가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의 의무를 행한다면 욥은 다음과 같이 된다고 말한다.
[1] 그는 옛날에 가졌던 것보다 더 많은 재물을 가지게 되어, 수 천 마리의 양과 소를 지닌 부유한 농장 주인이 될 뿐 아니라, 수 천의 금과 은을 지닌(3:15) 부유한 관리가 될 것이다. 세상 일에 의해서 보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의해, 우리는 더 풍성한 재물, 참된 재물을 얻을 수 있다.
[2] 그는 그것을 더 안전하게 소유할 수 있을 것이다. "너는 그것을 선한 자들의 손에 버리라. 죄악을 행함으로써 얻었던 재물보다는 경건하게 행함으로써 얻게 되는 재물을 더 확실하게 소유할 수 있으리라." 너는(단어 그대로) "단단한 은"을 얻게 되리라. 그것은 정직하게 얻은 것이므로 강철같이 단단한 은으로서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3] 그는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그것에 너무 집착하지 않게 될 것이다(엘리바스는 욥이 매우 그것에 집착했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가 그것을 사랑하게 되는 함정에 빠지지 않게 될 때, 재물은 참된 축복이다. 너는 "보배를 버리라." 그러나 어떻게 버릴 것인가? 너의 보물과 재산으로서가 아니라, "진토 같이" 그리고 "강가의 돌같이" 버리라. 네가 그것을 거의 귀중하게 여기지 않거나, 또한 별로 원하지 않을 때, 너는 그것을 네 마음 속에 두지 않고, 발 앞에 둘 것이다(행 4:35).
(2) 또한 그는 매우 안온할 것이다. 사람의 재물은 보통 사람들에게 재앙을 초래하며, 욥도 그가 흥한 가운데 있었을 때 그에게 안온이 없었다(3:26)는 사실을 인정하긴 하지만, 이제 그는 안심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전능자가 너의 보배가 되시어," 너를 막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25절). "그가 네게(소외에 있는대로) 금이 되시리라." 이것은 24절에서 금으로 사용된 단어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또한 견고한 요새를 의미하기도 한다. "돈도 보호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전 7:12). 속인들은 황금을 그들의 신으로 만들고, 성도들은 하나님을 그들의 황금으로 삼는다. 그의 은총과 은혜로써 풍요케 된 자들은 "가장 귀한 은을 풍족하게 가졌고," 가장 귀한 것을 쌓아두고 있다고 진실로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그가 네 보배가 되시어, 이웃 약탈자들의 기습을 막아 줄 것이다. 스바 사람과 갈대아 사람들은 재물을 약탈해 갔지만, 너의 재물은 그런 공격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하나의 약속으로 간주하여, "너는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버리게 되리라"는 의미로 생각하고 있다. "너를 대적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는 불의나 나쁜 일들이 좌절되어 네게 미치지 않을 것이다." 전능자를 그의 피난처 삼고 있는 자들은 안전할 것이다(시 91:1-3).
2. 그의 영혼이 충만케 되며, 가장 훌륭한 축복인 영적 축복으로써 풍요케 될 것이다.(1) 그는 하나님 안에서 평온하게 살아갈 것이다(26절). "이에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리라. 그리고 이처럼 전능자도 네게 임하시어, 네가 그를 기뻐함으로 인해 네 보배가 되리라. 그러나 세속적인 사람들은 돈을 기뻐한다. 나는 너의 보배이며 너의 피난처이고 또한 너의 위엄이시다. 왜냐하면 그가 너의 기쁨이시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의 소원을 이루는 길은 하나님을 우리 마음의 기쁨으로 삼는 것이다(시 37:4).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친히 기쁨이 되어 주신다면, 그는 우리에게 유익한 것은 그 어느 것도 거절하지 않으실 것이다. "이제 하나님은 너의 두려움이 되고 있다. 너는 그가 그렇다는 것을 스스로 고백했다"(6:4; 16:9; 19:11). "그러나 네가 그에게 돌아오려 한다면 곧 그가 너의 기쁨이 되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생각하는 것이 네게 고통을 주었던 것과는 달리 네게 큰 즐거움이 될 것이다." 은혜로운 영혼이 전능자에게서 느끼는 기쁨과 비교될 만한 기쁨은 없다. 그리고 하나님과 화곡하며, 전적으로 그에게 복종하는 자들은 그들 자신이 힘에서 뿐만 아니라 찬미 속에서도 그의 은총을 입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2) 그는 하나님께 대해 겸손하고 거룩한 확신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자들은 "그들의 마음이 그들을 책망할 것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요일 3:21). "그때 네가 담대하게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며, 지금처럼 두려워하지 않고 그에게 가까이 나아갈 것이다. 지금 너는 얼굴을 내려뜨린 채, 실의에 잠긴 표정을 하고 있다. 그러나 네가 하나님과 화목할 때, 너는 더 이상 지금처럼 얼굴을 붉히거나, 네 두려움에 떨거나, 네 머리를 숙이지 않게 될 것이다. 그 때 너는 기쁘게 그리고 감사에 넘치는 확신을 가지고 네 스스로를 그에게 보일 것이며, 그 앞에서 기도하며, 그로부터의 축복을 기대할 것이다."
(3) 그는 하나님과 계속 끊임없는 교제를 나눌 것이다. "한번 이루어진 교제는 계속 이루어져 네게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안겨 줄 것이다. 너와 하늘 사이에 편지가 정기적으로 그리고 수시로 교환될 것이다"(27절).
[1] "너는 기도로써 하나님께 편지할 것이다. 너는 그에게 기도하겠고"(즉 너는 더 많이 기도 하겠고), "그것이 길고 많더라도 그는 네 편지를 성가시게 여기시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자주 은혜의 보좌로 나갈수록, 우리는 더욱 환영받는다. 네 모든 고통과 궁핍과 근심과 두려움에 대해, 너는 하늘로부터의 인도하심과 힘, 지혜, 위로 그리고 유익한 승리를 구할 것이다."
[2] "그는 그의 섭리와 은혜로써 네 편지에 답하시고 네가 그에게 청한 것을 친절하게 또는 그 친절을 네게 주실 것이다. 그는 네 기도를 들으시고, 그가 너를 위해 또는 네 안에서 행하심으로써 그 응답을 나타내실 것이다."
[3] "그러면 너는 찬미로써 그가 네게 보내신 은혜로운 응답에 답할 것이다. 너의 서원한 것을 네가 갚으리라. 그리고 그가 그것을 받으시고는 더욱 자비를 베푸시리라." 우리가 고통 중에서 간구한 것을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셨을 때, 우리도 그때 약속드렸던 것을 잊지 말고 이행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정직히 행하지 않는 것이 된다. 만일 우리가 그 밖의 것을 약속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감사드리 는 것으로서 족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모든 것을 결말지어 주기 때문이다(시 116:14).
(4) 그는 외적인 일을 경영해 나가는 가운데, 내적인 만족을 얻게 될 것이다(28절). "네가 무엇을 경영하면 이루어질 것이다." 즉 "너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면서 매우 지혜롭고 은혜롭게 모든 일을 계획할 것이고, 또한 행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의 결과는 너를 만족시킬 것이며, 네가 바라던 대로 의롭게 이루어질 것이다. 너의 행사를 믿음과 기도로써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너는 편한 마음으로 즐거워할 것이다(잠 6:3).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가 네 안에서 역사하리라. 뿐만 아니라 때때로 하나님의 섭리가 네가 원하여 간구하던 바로 그것을 이루어 주실 것이며 네가 원하던 방법과 모양으로 네가 원하던 때에 네게 이루어 주실 것이다. 네가 원하던 대로 그것이 너에게 임하리라.
우리가 계획한 그대로 언제고 일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을 때, 그리고 우리의 추측이 조금도 어긋남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이루어졌을 때 우리는 이러한 약속, 곧 "네가 무엇을 경영하면 이루어질 것이다"는 약속이 이행되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지금 너는 네 주위를 흑암이 덮고 있는 것을 원망하고 있으나, 그 때에는 네 길에 빛이 비추리라." 즉 "하나님이 너를 인도하시고 지시하실 것이며, 그 후에는 물론 네가 행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고 성공하게 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가 너를 인도하고 그의 은총이 너를 안위할 것이다. 너의 길이 그 빛 아래 있으므로 너는 현재의 상태를 편하게 즐길 것이고, 미래에 대해 기쁜 소망을 품을 것이다"(시 90:17).
(5) 모든 사람들이 대체로 재난과 위험 속에 있을 때라도 그는 풍성한 기쁨과 소망을 가지게 될 것이다(29절). "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낮춤을 받거든, 그들의 일이 실패하고 그들의 마음이 상하여 기가 죽고 낙심하는 상태에 빠질 때 높아지리라고 말하라. 너는 네 안에서 고통을 극복하고 기진맥진하지 않게 해 주는 힘을 발견할 뿐만 아니라, 네 고통 위로 너를 들어 올려 너로 언제나 기뻐하게 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사람들이 "무서워하므로 기절할" 그때에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기뻐하며 머리를 들 것이다"(눅 21:26-28). 이처럼 그들은 "땅의 높은 곳에서 올리움"을 당할 것이다(사 58:4).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위로에 힘입어 머리를 들고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리라. 스스로를 겸손하게 여기는 자들은 높임을 받아 영예뿐만 아니라 즐거움도 얻게 된다.
3. 그는 그의 나라의 축복이 되며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행하는 도구가 될 것이다(30절). "하나님"은 너의 기도에 응답하시어, "무죄한 자의 땅을 건지실 것이며" 그 일에서 "네 손의 깨끗함이" 증명 되리라.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기 위해서는 깨끗한 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딤전 2:8). 그러나 우리들이 무죄한 자는 구원할 능력이 없으리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기 때문에(아브라함이 중재로 인한 이익을 얻지 못했던 것은 죄에 물든 소돔이었다), 나는 무죄한 자가 그 지혜로써 그 땅을 건질 것이며(전 9:14, 15), 그 기도와 그에 대한 하늘로부터의 도움으로써 건지리라(행 72:24)는 사실을 부언해 두고 싶다. 또는 "그는 무죄한 자가 아니라도 건지시리니 네 손이 깨끗함을 인하여 그런 자가 건지심을 입으리라." 30절을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는데, 이것은 매우 적절한 풀이로 볼 수 있다. 한 사람의 선한 자는 온 백성에게 유익하다. 죄인들은 그들이 알든지 모르든지, 성도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있다. 만일 엘리바스가 이것으로써(일부 사람들의 견해대로) 욥의 기도가 상달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손이 깨끗하지 못했다는 것을(왜냐하면 그때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이 위안을 얻으려 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암시하고자 했다면, 후에 그가 욥이 그보다 하늘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이 밝혀졌을 때, 그의 과오를 깨닫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문제에 있어서 무죄한 자가 아니었던 엘리바스와 그의 세 친구들은 "욥의 손의 깨끗함을 인하여 구원받기 때문이다"(22:30).
Previous
List